비평의 트랙, 평론가의 자리
필자: 수차미

박동수 평론가가 씨네21에 쓴 글 「밀레니얼의 문화 코드를 노려라, 게임 원작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읽었다. 지면에 올라갈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커뮤니티를 보며 생각 외의 반응이 나와 놀랐다. 씨네21이 왜 영화가 아니라 게임을 다루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대충 ‘씨네21이 망했다’는 식의 지적이었다. 어딜 가나 ‘망했다’는 말은 불만의 표시로 사용되니 별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이 반응이 지적하는 건 사실 유효하다. 게임과 영화를 한 자리에 두는 건 어쩌면 게임 웹진이 해야 할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모든 것을 다룰 수 있지만 반대로 게임은 영화가 아니면 다른 분야로 뻗어 나가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영화는 음식과 음악, 사회학과 인류학 등 여러 다양한 표지를 들고 올 수 있으며 이는 영화가 기본적으로 ‘현실’을 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달걀을 담는 바구니와도 같아서, 다양하게 많은 걸 담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깨지지 않게 하는 건 어렵다. 결국 적당히 한두 개만 담든가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 역량은 온전히 글을 쓰는 비평가 개인의 몫이다.
문제는 박동수 평론가는 게임 평론에도 당선된 적이 있다는 점이다. 게임 평론가가 영화 관련된 글을 씨네21에 게시했다고 보면 별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화평론가가 게임에 관련된 글을 쓰는 것으로 이를 의식했다. 이 일화는 평론 하나에만 당선되어 활동하지 않는 근래 비평계 경향을 연상케 한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평론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는 영화평론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가장 많지만 이들 중에 대부분은 다른 길로 빠지거나 이를 겸하게 된다. 결국 영화평론은 ‘평론’의 대체어이거나 동의어로 쓰이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평론의 브랜드화된 상표명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단순히 비평을 하고 싶은 이들이 그걸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가장 유명한 영화 평론을 택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따금 이런 글을 읽으면서 평론가와 아닌 사람을 구분짓는 게 무엇일지를 생각해보고는 한다. 여러 근사한 소리를 할 수 있겠지만 평론가를 구분짓는 건 담론의 취향인 것 같다. 자신이 글을 쓰며 다루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그걸 다뤄보려 한다. 무엇보다 이 세상의 일부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평론가가 되는 것이다.
영화평론이 항상 다른 무언가로 빠지는 이유는 모든 문화이론이 모이는 곳이어서인 탓이 아닐까 한다. 영화만으로 다른 무언가를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다른 무언가를 영화에 빗대어 설명하는 사람은 많다. 그리고 영화를 두고서 ‘영화적인 것’을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당장 우리부터가 ‘영화 같은’ 삶을 꿈꾸지 않던가. 하지만 영화는 카메라를 들어 특정한 현실을 재현하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만 공통점이 있을 뿐, 어떻게 만들지는 딱히 제한이랄 게 없다. 오히려 영화는 제작하는 방식이 아니라 특정한 틀을 통해 다른 무언가가 펼쳐지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일종의 ‘창’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문’을 열어 다른 세계로의 여정을 떠나려 하는 일 말이다. 여기서 ‘만화’는 일종의 탈 것이다. 세상을 불태우든, 아니면 그 위에 올라타든. 만약 평론가를 꿈꾸는 누군가가 있다면, 영화에서는 신춘문예나 씨네21, 박인환상을 노릴 테고 만화에서는 만화영상진흥원을 노릴 수밖에 없다. 미술이라면 SeMA, 문학이라면 젊은평론가상 (게임에서는 제너레이션일 테고) 정도가 아닐까.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상을 받는 일에 등급을 나누고 있으며 이는 곧 ‘수상’을 한 사람이 다시금 재등단을 선택하는 이유가 된다. 재수를 해서 더 높은 등급의 대학에 편입하는 일과도 같다. 하지만 상이란 건, 결국 상을 주는 쪽의 취향에 따라 갈라질 뿐이다. 영화평론이라면 (부산)영화평론가협회도 있고 르몽드에서 개최하는 상도 있고, 쿨투라에서 하는 상도 있고 여하튼 다양하다. 이들 모두가 저마다 다른 성향을 지녔고, 어느 하나라도 당선되면 등단이라 할 수 있으니 ‘조건’은 성립한다. 그럼에도 결국 씨네21이 지면을 계속 확보하며 담론을 확장하는 스피커가 되어주기에 사람은 씨네21을 원한다. 다른 공모전과는 달리 기성의 참여를 제한하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확실한 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만큼이나 그 어려움이 어떨지를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하다. 응모하는 사람 수가 엄청 많은데 그 모든 이들이 허수가 아니다. 이 고인물 파티에서 살아남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글을 쓰며 문득 한스 짐머가 참여한 영화 의 사운드트랙을 들었다. 영어에서도 ‘사운드’와 ‘트랙’이 결합된 이 삽입곡 목록은 F1 레이싱이 프로들의 경주라는 점을 연상케 한다. 열 몇 명이 순위를 두고 달려서 잘 의식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F1에 등장하는 모두가 프로다. 맨날 꼴찌를 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국에는 ‘선수’라는 소리다. 영화평론에 줄곧 도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느껴진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선수인데 그 자신이 누군가에 비하면 모자란다고 여긴다. 모든 트랙에서 1등을 하는 사람은 있지만, 특정 맵이나 지리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1등을 거머쥐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이 게임의 플레이어라는 의식이 더 중요하지 어느 트랙을 달리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스포츠라는 건 사람들 사이에 우정과 연대를 발휘하는 것이지 상대를 ‘처치’하는 게 아니었다. 올림픽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1등을 못해서 아쉬울 수는 있지만 반대로 올림픽 자체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은 무척 많다. 대개는 삶의 전부를 이곳에 걸지 않은 이들, 생활체육인이라던가 하는 경우가 그러한데 비평도 그런 쪽이 되어야 한다.
식사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세를 내거나, 그런 저런 무의미하고 하찮은 일들이 우리 곁에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유튜브에서 사운드트랙을 검색하고, 다른 사람의 평을 찾아 읽고 집에 가서 글을 쓸 생각에 신이 나는 일은 그런 부류에 속한다. 평론을 쓰는 일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영화 평론에 시시콜콜한 개인의 일상이 담겨있으면 안 된다고도 하지만, 작가와 창작물을 분리할 수 없다면 우리도 영화와 삶을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어떤 글이나 작품을 찾아볼 때도 ‘자리’가 있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어느 방향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글은 나 자신조차 길을 잃을 것만 같다. 글이라는 건 한 사람의 삶아온 길과 떠나야 할 때를 예견하기에, 그런 것들에서 중립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글 한 편에 이런저런 것들을 얼마든지 덧붙여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것들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꾸며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면, 마찬가지로 내가 서 있을 곳도 사라지고야 만다. 이는 기본적으로 남의 글을 따라만 하면 결국 나 자신이 사라지는 일과도 같다.
어떤 것이든 ‘이야기’를 많이 보고 들을수록 기억에 남는 것도 커진다. 여행이라던가, 영화라던가 하는 건, 단순히 ‘풍경이 예쁘다’는 말에만 그치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를 기억하려면 여기엔 항상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평론의 자리를 생각하면 드는 생각이 몇 개 있다. 첫 번째는 영화평론이라는 주제에 관한 문제다. 평론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려면 결국 이야기를 끌어내야 한다. 그 안에 이야기를 품든, 아니면 거대한 이야기 안에 연루되든 간에 이들 평론은 이야기 앞에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 글을 쓰는 일에 정답은 없다지만, 결국 평론은 세계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세계와 만들 것인지의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전자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어느 쪽을 가도 결국 우리는 이 세계를 외면할 수 없다.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가 모두를 향해 열린 태도를 취하는 것, 모두에 안길 수 있는 이가 자기 스스로를 끌어안는 것, 아무리 근사한 글이라 하더라도 결국 이곳에는 꿈의 주인이 있다. 만약 글을 읽으면서 이 세계를 탈출하고 싶다고 느꼈다면 꿈의 주인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다.
**박동수 평론가의 원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특집] 밀레니얼의 문화 코드를 노려라, 게임 원작 영화의 현재와 미래
[특집] 밀레니얼의 문화 코드를 노려라, 게임 원작 영화의 현재와 미래
게임 원작 영화가 실패한다는 속설도 이젠 옛말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 대형 게임 프랜차이즈의 영화화는 흥행과 비평적으로 대개 실패했다. 하지만 2020년대 이후 <수퍼 소닉>시리즈, <언차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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