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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Pédés, 검은 피부, 무지개마스크 (Peau noire, masque arc-en-ciel)

by 인-무브 2025. 11. 6.

검은 피부, 무지개 마스크 (Peau noire, masque arc-en-ciel[1])

 

ANTHONY VINCENT

번역: 임하은

 

시작에 모욕이 있다. Didier Eribon, Réflexions sur la question gay에서.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 마티니크의 어느 여름 오후. 다섯,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엄마와 대모에게 장바구니를 들어드린다고 했어요.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요. 가방을 팔꿈치에 걸쳐 들었을 때, 두 사람이 제가 너무 makoume[2]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먼저 부끄러움이, 그 감정은 제 몸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강했습니다. 그 모욕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욕설과 침, 그리고 폭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살에 대한 충동은 열한 살쯤 시작되었고, 가족들은 제가 단순히 아주 우울한 아이였다고만 생각했어요. 저는 멍을 가리기보다는 내 몸 자체를 숨기려고 더 큰 옷을 입었습니다. 내 몸이 나를 배신해, 세상에 내가 인정하지 못한 것을 드러낼 것만 같았습니다. 자라면서 때로 게이라는 정체성이 어떤 그물망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인종화된 젊은 남성으로서, 또 빈민가 출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색을 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나라에서 테오THEO(2017), 아다마ADAMA(2016)는 왜 지예드ZYED와 부나BOUNA(2005)가 도망쳤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결과가 정해진 듯 반복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늘 개인은 지워지고, 소수자화된 몸으로 환원되며, 우리는 고정관념 속 깡패나 착취할 대상으로 취급됩니다. 이런 이분법은 흑인이면서 동시에 퀴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매트릭스에 나오는 이상한 사람처럼 느꼈습니다. 정체성의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압력이 분명하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복잡했던 것은, 퀴어라는 정체성이 어떤 백인들에게는 제가 다른 흑인들보다 덜 위협적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치 그것이 저를 희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리나 대중교통에서 제가 위협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제가 다가오면 가방을 움켜쥐고 움찔했다가, 저의 게이스러움이 보이면 긴장을 풀었습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런 반응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작은 움찔거림, 무심한 듯 던지는 말, 차가운 시선들이 그것을 만들어냅니다. 경찰을 마주칠 때 일부러 퀴어함을 더 드러낸 적도 있습니다. 그것이 방패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저는 결국 내 편을 배신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작 그 편 안에서도 제가 늘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소수 집단 안의 또 다른 소수로 보일 때, 더 강한 동화 압력과 모범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흑인으로서 부모님께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겨우 백인들이 얻는 절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인종화된 동시에 퀴어라는 사실은 그 부담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소수의 소수자가 가지는 스트레스는 눈에 띄지 않으려는 태도로도 나타납니다. 이미 규범 밖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 조심하려는 마음. 다수자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동이 집단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흑인이거나 퀴어인 사람이 실수를 하면, 친구들조차 그것이 그들의 대의에 해를 끼친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수치는 감시와 처벌의 도구로 내면화됩니다.

 

수치심의 내면화는 때로 저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게 만들었고, 가까워지기 전에 멀어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뉴스에서 퀴어 퍼레이드 장면이나 리얼리티 TV LGBTOIA+ 참가자가 나올 때마다 저는 알 수 없는 친밀감이나 연대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런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럴 때면 한 개인이 공동체 전체를 대표해 공격받는 것처럼 보였고, 저 역시 함께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튼튼한 자존감을 세우기는 어려웠습니다. 부모님에게는 그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말이었지만, 저에게는 옷장 속에 더 깊이 숨게 만드는 못질이었습니다. 수치심이 커질수록 미래는 더 어두워졌고, 저는 부모님이 혐오하는 게이라는 클리셰에 가까워질 수 있는 어떤 선택도 두려워했습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저는 언젠가 패션 업계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저는 스스로를 억눌러서 프랑스어 교수가 되고 싶다고, 안정된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믿고 말했어요. 이 부정을 극복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늘 제 안의 일부를 잘라내야 한다는, 스스로를 훼손해야 덜 튀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흑인이라는 사실이 이 두려움을 더 크게 만들었고, 그래서 저는 사람들 속에 섞이고 물결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독립적인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게이 공동체 안에서도 저는 피부색 때문에 자주 이방인처럼 느껴졌습니다. 보편주의를 표방하는 프랑스는 색을 보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종 문제를 부정하기 위한 말에 불과합니다.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인종차별적 역학이 존재했고, 그것은 LGBTQIA+ 사람들 사이에서도 구조적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너무 많은 게이 남성들이 자신이 소수자로 살아온 경험 때문에 다른 억압도 자동적으로 이해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결코 인종차별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이런 믿음이 있기에 그들은 데이팅 앱 프로필에 “No Blacks, No Asians”라고 아무렇지 않게 적을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인종적 페티시화는 본질화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에요. 특정한 인종으로 규정된 사람에게서 개별성을 지워버리고, 결국 비인간화로 이어지게 합니다. 인종차별은 체계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용과 수용을 말한다 해도 이미 우리 공동체 안에 스며 있습니다. 제가 겪는 인종차별에는 때때로 폴로포비아(follophobie)’, 즉 여성적으로 보이는 게이들에 대한 혐오가 더해집니다. 어떤 게이들은 저더러 그들의 눈에는 제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심지어 집단적 상상 속에서 흑인 남자에게 부여된 고정관념야성적인 남성성의 전형에도 부합하지 못한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저는 늘 제가 아닌 것, 제가 되지 못하는 것, 인종차별적이고 동성애 혐오적이며 여성성 혐오적인 고정관념까지 포함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했어요. 그 결과 제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흐릿해졌습니다. 

 

게이로는 너무 검고, 남자로는 너무 여성스럽고, 그 어떤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듯했어요. 

 

정장을 입거나 단순히 셔츠를 입을 때조차 저는 마치 분장을 한 것처럼 느껴지고, 제 자신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게 가면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제 정체성을 도피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달아나려 하기보다는, 끊임없는 변형과 탐구, 구축과 해체 속에 사는 것을 받아들였어요. 

 

유동적인 남성성과 흐르는 흑인성 속에서 익사할 것 같았지만, 결국 그 속에서 숨 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런 이유로 배리 젠킨스의 영화Moonlight(2016)이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흑인 남성성, 그리고 퀴어한 남성성을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나온 한 대사가 특히 기억에 남았어요.

 

« I cry so much, sometimes I feel like Imma just turn into drops. »

 

저는 소수자라는 스트레스를 받아들였고, 지금은 그것을 제 선택 가족, 기능적이지 않으면서도 눈부신 퀴어 집단의 일원이라는 표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은, 흑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부끄러움을 어떻게 자부심으로 바꿀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다큐멘터리 Césaire et moi에서 마르티니크 출신의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흑인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우리를 흑인’, 다시 말해 로 취급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정확히 답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글쎄요, 아니에요! 흑인이라고 부르시죠, 좋습니다, 저는 흑인입니다. 이 말을 퍼뜨리지는 마세요, 하지만 흑인은 당신들을 짜증 나게 할 겁니다.”

흑인성 운동을 공동으로 창시한 세제르는, 인종차별 사회가 그의 피부에 덧씌운 모욕을 의도적으로 되찾아 당당히 주장했고, 그로써 낙인의 의미를 벗겨냈습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루이 그뤼엘은 지배자가 만든 낙인을 재적용함으로써 오히려 긍정적인 정체성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어요. 모욕이 사회 질서로 회귀시키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면,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고 되돌려주며 지배에 저항할 수도 있는 겁니다. 세제르가 “nègre”라는 단어를 당당히 주장하며 조직된 수치심을 해체하는 태도는 제게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제 귀에는 여전히 “pédé”라는 단어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게이 공동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세대적, 사회적, 정치적 단절 때문일 거예요. 결국 이는 단순한 언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결정과 재현의 문제였습니다. 최근 대중매체 속 몇몇 사례가 이런 불협을 잘 보여주었어요. 예컨대, 1968년생 코미디언 Pierre Palmade는 오랫동안 유리 벽장 속에 있다가, 2019 Laurent Ruquier TV 프로그램에서 나와 “homos” “gays”를 구분한다고 말했습니다.

 

“게이들은 게이처럼 먹고, 게이처럼 웃고, 게이처럼 살고, 게이처럼 말하며, 게이 같은 영화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 반면 호모들은 호모이긴 하지만, 이마에 표시가 나지 않아요. 말할 때도 알 수 없고, 살아갈 때도 알 수 없어요. 그들의 침실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죠.”

 

그는 후자 쪽에 자신을 더 가깝다고 했고, 커뮤니티 내 가장 급진적인 이들로부터 내면화된 호모포비아라는 비판을 받았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비슷하게, 1974년생 방송인 Matthieu Delormeau 2021 <Danse avec les stars>에서 Bilal Hassani가 남성과 짝을 이룬 것에 반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20년 동안 TV는 완전히 풍자적인 동성애자들을 보여왔습니다. ... 그들은 ‘Secret Story 4’를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Benoît Dubois 같은 캐릭터를 보여주죠: 풍자적인 게이. [...] ‘Danse avec les stars’에서 두 남자가 춤추게 해 달라고 요구한 지 벌써 12년입니다. 두 남자가 함께 춤출 때, 누가 춤추나요? Bilal Hassani예요. Bilal Hassani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미안하지만 가발과 가짜 속눈썹을 한 남자, 저는 이 게이 스타일과 공감하지 못합니다. TV는 항상 극단적으로 풍자적인 게이, 완전히 여성적인,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 사람들이 TV를 볼 때 , 이 게이를 알아보겠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게이가 정상적이면, 그가 게이라는 걸 알 수 없으니까, 그럼 물어봐야하죠.”

 

그 역시 내면화된 호모포비아와 follophobie라는 비판을 받았어요. 하지만 이런 발언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시스-헤테로 규범성에 동화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트위터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었어요. 게이 남성이 어떤 고정관념적 클리셰를 제시하며 스스로는 거기에 맞지 않는다고 선언할 때(: “내가 이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단 한명의 게이니? Mylène Farmer / Madonna / Lady Gaga / RuPaul's Drag Race?”), 다른 이들은 드랙퀸 Trixie Mattel Katya Zamolodchikova의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 Ooh, she's different! »

 

이 패턴은 너무 자주 반복돼 이제는 밈이 되었어요. 이는 질문자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라, 같은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역효과를 내는지를 풍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Palmade, Delormeau, 그리고 스스로를 중심에서 벗어난 게이라고 자랑하는 다른 이들의 발언은, 일부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시스-헤테로 규범성에 동화되려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게이들이 종종 같은 문화적 코드와 사회적 습관을 가진 단일한 집단으로 오해받는 현실을 반영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취향이 아니라, 호모포비아라는 경험과 그것이 사회화 방식에 남긴 흔적입니다. 스스로를 “gay”라 부르든 “homo”라 부르든, 우리 대부분은 이미 한 번쯤은 “pédé”라 불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단어는 지금도 많은 호모들에게 모욕으로 쓰이고 있어요. 그렇기에 어떤 게이들은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되찾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몸에 깊은 상흔을 남겼기 때문이에요. 바로 그 상흔이라는 단어가 어원적으로 뜻하듯이요. 상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더 벌어져 감추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이미 아문 경우도 있습니다. 나처럼 아주 여성적인 게이로 자라며 성적 지향이 쉽게 드러나는 경우에는, 일찍부터 그것을 방어할 무장을 해야 했어요. 아마도 그래서 제가 오랫동안 “pédé”라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Palmade Delormeau의 발언은 저를 내면화된 호모포비아와 follophobie로 다시 끌어당겼습니다.

 

더 노골적으로는, Kiddy Smile 2018년 음악 축제에서 엘리제궁에서 공연하며 « 이민자의 아들, 흑인 그리고 호모 fils d'immigré, noir et pédé »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을 때였어요. 저는 더 멀리 앞서나가 있는 어떤 분신을 보는 듯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길을 걸어온 누군가, 그래서 제가 아직 건너지 못한 거리를 드러내는 존재였어요.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뇌리에, 심지어 역사 속에 새겨지도록 의도된 듯했습니다. 그는 DJ로 불렸지만, 그가 초청된 건 음악 때문이 아니라 보이는 상징으로서 였음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글자 그대로 몸에 새겨 입었습니다. 대통령 궁이라는 자리에서 Kiddy Smile은 프랑스에서 인종화된 사람들, 이민자, LGBTQIA+가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묻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행동은 많은 퀴어들에게는 영웅적인 것으로, 또 다른 많은 프랑스인들에게는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예상과 같이 그에게 인종차별적이고 호모포비아적인 반발이 쏟아졌습니다. 

 

물론 모든 가시적인 상징이 똑같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징을 드러내는 사람과 그 몸에, 맥락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2022년 카타르에서 열린 축구 월드컵에서 불행히도 드러났습니다. 당시 여러 유럽 여성 지도자들이 관중석에서 무지개 팔찌를 착용했는데, 이는 경기장 안의 선수들에게는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덴마크의 전 총리 Helle Thorning-Schmidt 2022 11 22일 덴마크-튀니지 경기 참관을 위해 LGBTQIA+ 깃발 색상의 소매를 착용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이 행동의 적절성을 스스로 돌아보았습니다. “무지개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카타르의 동성애자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가? 혹은 이로 인해 카타르 정부가 그들을 더 강하게 탄압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죠. 11 23일 독일-일본 경기에서는 독일의 Nancy Freser 장관이 유명한 One Love 팔찌를 착용했습니다. 벨기에-캐나다 경기에서는 벨기에의 Hadja Lahbib 장관이 팔에 무지개 장식을 착용했습니다. 12 10일 프랑스-잉글랜드 경기에서는 프랑스 스포츠 장관 Amélie Oudéa-Castéra도 무지개 깃발 색상의 소매가 달린 스웨터를 입었고, 사전에 현지 당국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행동들을 칭찬할 수 있지만, 카타르에 있는 LGBTQIA+ 사람들의 생활이 나아지지는 않았죠. 이런 지원 퍼포먼스를 위해 많은 현지 활동가들에게 의견을 물었을까요? 실제로 일부 카타르 현지 LGBTQIA+ 활동가들은 서양인들이 이런 주제에 대해 공연적 개입을 덜 하기를 요청했습니다. 사실, 카타르 축구 경기장에서 무지개 상징을 착용하는 것은 거의 특권 과시와 같았습니다. 누가 처벌을 받을 것인지, 누가 충분히 권력과 영향력이 있어 무지개를 착용하고도 카타르 경찰에게서 면제될 수 있을지 말입니다. 현지의 젊은 퀴어들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경기 상징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카타르에서는 동성애가 7년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전반적으로, 카타르 축구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유럽 지도자들이 갑자기LGBTQIA+ 권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의문이 들어요. 이것은 일종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도구적 행동일까요? 미디어의 관심을 상징 하나에 집중시키는 것은, 그 나라의 동성애 혐오법을 진짜로 문제 삼는 척하면서 서양이 자신들의 양심을 세탁하고, 동시에 이 스포츠 이벤트가 가져온 인간적, 생태적, 정치적 재앙을 잊게 만드는 효과일까요? FIFA 예상에 따르면, 이 대회는 360만 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지만, Carbon Market Watch NGO에 따르면 이 수치를 최소 5배 이상 곱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개방형 냉방 경기장과 항공 셔틀 서비스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12년 동안 경기장 건설을 위해 약 6,500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고 추정됩니다. Nicolas Sarkozy에 대한 수사 또한 Qatargate라 불리는 사건에서 적극적·수동적 부패, 은닉 및 자금세탁 혐의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이콧 요구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무지개 상징을 착용한 지도자들에게도 거의 영향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카타르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주장하는 방식이 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축구 연맹이 자국 경기장에서 동성애 혐오와 싸우는 데 거의 힘을 쓰지 않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2022 5, Idrissa Gueye가 무지개 색상의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면서 경기장 내 동성애 혐오 논쟁이 재점화되었고, 관중석에서는 여전히 동성애 혐오적 노래가 자유롭게 울려 퍼졌습니다. 법적으로는 이런 모욕 행위가 처벌 대상입니다. 카타르에서 One Love 팔찌를 이용한 정치적 도구화는, 많은 서방 국가들이 자신들은 세계 다른 나라보다 성소수자 수용에 훨씬 진보적이라는 것을 자랑하려는 방식과 거의 같아 보입니다. 이는 마치 국경 밖의 동성애 민족주의 homonationalisme 를 연상시킵니다.

 

미국의 퀴어 이론가 Jasbir Puar는 동성애 민족주의를, LGBTQIA+에 대한 겉으로 보이는 관용을 정치적·국가주의적, 심지어 인종차별적 정책 수행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진정으로 퀴어혐오에 맞서 싸우려 한다면 할 일이 많습니다. 그 목록은 너무나도 길어 모두 나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권력 중심지에서 Kiddy Smile이 겪은 인종차별·동성애혐오, 2016년 유엔이 프랑스를 상대로 제기한 간성 아동 절단 관련 3건의 제재, 혹은 SOS Homophobie의 연례 보고서에서 나타나는 트랜스포비아 증가와 온라인 증오 확산 등이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12-2013‘Manif pour tous’ 모두를 위한 시위 운동을 지지했던 전직 지지자들이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예를 들어 Gérald Darmanin, Christophe Béchu), Caro Cayeux 등이 있습니다. 참고로 Caro Cayeux  2022 11월 말 정부에서 사임했는데, 이는 그 사람들에 대한 동성애 혐오 발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과소평가된 재산과 관련한 스캔들을 우려해서 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그들의 이익보다 얼마나 덜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동성애 민족주의를 보면,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유권자가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 RN) 쪽으로 이동하는 추세를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RN의 전략이 효과적임을 보여줍니다. 2022년 대선 직전, Ifop 조사에 따르면, 동성애·양성애 응답자의 16% RN에 투표할 의향이 있었으며, 이는 2017년과2012년보다 높았습니다. 트랜스젠더 관련 데이터는 신분증 등 법적 문제 때문에 더 제한적이지만, 좌파정당 지지 성향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RN의 전략은 LGBT 혐오를 부각시켜 인종차별적·국가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이며, 게이 남성을 당내 임원으로 임명하면 우리는 더 이상 동성애 혐오가 없고, 게이 친구가 있다라는 외형적 보증처럼 보이는 부수적 효과도 있습니다. 참고로 RN의 전신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 창립자는 동성애를 생물학적·사회적 이상(anomalie biologique et sociale)”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무지개 색을 착용하는 행동은 공중에게 미덕을 과시하거나 일부 당사자에게 이미지 개선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핑크워싱 pinkwashing과 유사합니다. 기업, 정당, 국가가LGBTQIA+ 권리를 이용해 자신을 진보적으로 보이게 하거나 문제를 은폐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런 정치적 아젠다의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논쟁도, 자선도 아닙니다. 또한, 관련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반체제적 증거로 이용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술적 재창조를 추구하는 유명인이나 단순히 멋을 내기 위해 착용하는 평범한 사람들 모두 포함됩니다. 이런 이유로 퀴어라는 단어의 점진적 탈정치화가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퀴어라는 단어도 처음에는 낙인을 뒤집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스트레이트들이 LGBTQIA+ 일탈자로 즉 퀴어로 부르기 위해 사용했지만, 이후 LGBTQIA+ 커뮤니티가 자랑스럽게 재적용했습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시스·헤테로 사람들이 자신을 퀴어라고 선언합니다. 예를 들어 2022 7월 프랑스 인기 유튜버 Loris Giuliano의 영상에서는, 익명의 한 여성이 자신을 헤테로이면서 퀴어라고 정의하며 모든 것, 다양성, 재미를 좋아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LGBTQIA+ 운동의 저명한 지지자 Marina Fois 2019년 방송 « Quotidien »에서 « pédé »라는 단어를 매우 편하게 사용하며 일반 대중과 당사자들에게 혼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게이들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들 스스로 ‘pédé’라고 불렀기에, 나도 게이 호모라고 부르기 어려웠습니다. [...] 그들은 항상 ‘pédé’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죠!”

 

2021 10, 이 시스-헤테로 여배우는 게이 잡지 Têtu의 표지를 장식하며 퀴어 퀸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관련 당사자들이 시각적 공간을 거의 갖지 못한 상황에서, 미디어가 시스·헤테로 유명인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커뮤니티 일부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실제로 Kiddy Smile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낙인의 뒤집기는 관련자들끼리,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비록 퀴어라는 단어가 상업적으로 유리해졌다고 해도, 우리의 정체성과 고통은 장난처럼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LGBTQIA+ 당사자들이 낙인을 뒤집더라도, 관련 없는 사람들이 이 모욕을 이용해 우리를 정의할 권한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욕으로 자신을 정의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지속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낙인 ‘pédé’ 뒤집기: 여기에는 커뮤니티 일부가 여전히 겪는 위험이 있습니다. 모든 LGBTQIA+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모욕은 여전히 커뮤니티 일부에게 고통을 남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그리고 커뮤니티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고통일지도요.”

 

여기에는 ‘pédé’라는 단어를 되살려 쓰는 것에서 오는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욕적인 단어로 자신을 정의하는 한, 그 단어의 사용을 계속 이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사자들끼리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외부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상상과 무의식, 사회적 지배 구조가 얽혀 있습니다. 프랑스 활동가인 Guy Hocquenghem 1960년대부터 게이 권리 운동에 참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그가 아랍 남성에 대해 본질주의적·인종차별적 입장을 취한 점은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억압은 금지를 강하게 설정함으로써,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더욱 집중시키고, 금지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일탈의 흥미를 느끼게 한다. [...] 동성애적 욕망은 수치심의 게임 안에 갇혀 있었고, 이를 자부심의 게임으로 바꾸는 것도 결코 덜 왜곡된 일이 아니다.” , 낙인을 기반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그 낙인의 배제적·타자화적 성격을 강화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 규범과 비규범 사이의 대립을 더욱 견고하게 하지만, 동시에 권력과 지배가 존재함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붙여진 꼬리표가 무엇이든, 혹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꼬리표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게이임을 드러내는 것은 개인적·집단적 힘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혁명적입니다. 그것은 사회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하며 필요하다고 믿도록 강요하는 수많은 편견과 규범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가 20대 초반에 처음 사랑을 경험하면서 몸소 깨달았어요. 욕실에서, 문자 그대로와 비유적으로, 저는 항상 제 피부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심한 습진이 있었고, 이를 가리고 관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간단한 스킨케어 루틴만 사용했는데, 저는 다양한 제품을 그와 함께 사용하며 그를 바꾸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더 아름답거나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즐거웠을 뿐입니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욕실에서, 침대에서,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통해, 그는 의도치 않게 저에게 자존감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가 제 눈에 빛나게 만드는 자질, 저는 그게 없었어요. 오랫동안 저는 자존감을가치 공로와 혼동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어 ‘propre’라는 단어가 가진 다중 의미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Propre’는 소유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청결, 단정함, 자기 관리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깔끔하게 단정한 외모를 갖추는 것은 제게 항상 중요했습니다. 마치 흑인 게이로서 사회적 편견을 보상하려는 듯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동성애를 일반적인 이성애보다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혈청 공포증(세로포비아)까지 더해, 일부 게이들은 데이팅 앱에서 잠재적 파트너에게 혈청 상태가 ‘clean’인지 묻습니다. 또한 흑인에 대한 일부 편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흑인은 본질적으로 냄새가 나거나, 곱슬머리는 단정하지 못하고, 야만적이라고 보는 편견입니다. 이런 편견은 저를 끊임없이 사회적 기준에 맞추게 만들었고, 이는 내부화된 동성애 혐오와 인종차별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자존감을 외모와 청결로만 연결하며 사회적 폭력과 고정관념을 극복하려 했지만, 이 첫사랑은 저에게 거울 속 수치나 외부 인정이 아닌, 제 안에서 자존감을 찾고 키우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존감은 저에게 매우 소중하며, 잘 사는 것 그리고 존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조금 과장되어 들릴 수 있지만, 이는 생존과도 관련됩니다. 영어 표현 “Black don’t crack”은 흑인이 항상 젊어 보인다는 의미지만, 저는 인종차별이라는 현실 속에서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아프리카계 지리학자 Ruth Wilson Gilmore는 인종차별을 조기 사망에 대한 차별적 노출로 정의합니다. 통계적으로, 서양에서 흑인, 특히 남성은 장수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확인된 사실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인종 통계가 거의 없지만, 2020년 생드니 지역의 코로나19 과잉 사망률이 이를 보여줍니다. 빈곤이 명백한 요인이지만, 인종 차별 역시 바이러스 노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에 게이라는 이유로 살해·살해 미수 위험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러 연구는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가 불안, 우울, 자살, 섭식 장애, 중독, 위험 행동에 과도하게 노출됨을 보여줍니다. 영국 게이 매거진 Attitude 전 편집장 Matthew Todd는 책 《Straight Jacket》에서 동성애 혐오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유발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어린아이를 몇 년 동안 옷장 안에 가두고 나오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면, 누구든 트라우마 없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제, 인종차별적·동성애 혐오적 사회에서 흑인 퀴어가 되는 이중적 스트레스를 상상해 보세요. 정신 건강 문제, 위험 행동, 경찰 폭력 등으로 인해 죽음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적 사랑은 혁명적이며, 우리의 자존감 역시 혁명적입니다.

 

아프리카계 페미니스트 지식인 Audre Lorde는 에세이 《A Burst of Light》에서 이렇게 씁니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이기적 관용이 아니라, 자기 보호이며, 정치적 투쟁 행위입니다.”

 

흑인 레즈비언 여성으로서 그녀는 많은 소수자가 직관적으로 깨닫는 사실을 요약합니다. 체계적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그리고 다른 구조적 억압은 자존감을 지키기 너무나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날, 제 검은 피부와 무지개로 자존감을 세우는 것은 반란이며, 우리의 사랑은 혁명입니다. 이는 단순한 자기계발이나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LGBTQIA+ 커뮤니티 내 집단적이고 지속 가능한 혁명을 시작하는 기반입니다.

 

저기에 있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낙인을 전복해 마스크 없는 연대의 땅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1] Frantz manon Peau noire, masques blancs을 조금 바꾼 것 같습니다. 

[2] 크레올어로 Pédé와 같은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 도서정보: Pédés, collectif, 2023, Points.

https://www.editionspoints.com/ouvrage/pedes-florent-manelli/9791041410224

 

Pédés , Florent Manelli , Documents

Pédés, Florent Manelli , Adrien Naselli , Yoann Idiri , Julien Ribeiro , Nanténé Traoré , Matthieu Foucher , Anthony Vincent , Rubén Tayupo : Décryp...

www.editionspoints.com

- 엮은이: Florent Manelli

- 지은이: Jacques Boualem, Camille Desombre, Adrien Naselli, Julien Ribeiro, Ruben Tayupo, Nanténé Traoré et Anthony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