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의 통치성: 에스포지토의 생명정치 재구성과 사회주의 통치성 문제
강길모 (현대정치철학연구회)
1. 서론: 생명정치 이후의 이론적 곤경
미셸 푸코가 제시한 생명정치 개념은 근대 정치권력의 전환이 있었음을, 정치권력이 더 이상 죽일 권리를 의미하는 주권 중심의 권력이 아니라 생명을 관리하고 조절하는 권력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었다.[1] 그러나 생명정치에 대한 이러한 푸코의 분석은 하나의 난점을 남긴다. 생명을 보호하고 증식하는 권력이 왜 여전히 반복적으로 주권적 폭력, 인종주의, 그리고 죽음정치로 귀결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푸코 자신은 이러한 현상을 인종주의와 예외상태, 통치성의 기술들을 통해 설명했지만, 주권과 생명관리정치 사이의 구조적 연관성은 끝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의 정치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푸코의 생명정치 분석을 계승하면서도, 문제를 주권과 생명이라는 도식에서 공동체와 면역이라는 새로운 구도로 이동시킨다. 이 글은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을 생명정치 이후의 이론적 대답으로 독해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통치성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에스포지토가 사용하는 면역 개념을 단순한 권력에 대한 정치적 은유의 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보호·배제·관리의 정치적 합리성으로 읽음으로써, 생명정치가 반복적으로 주권적 폭력과 결합하는 경로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두려고 한다.
2. 면역 개념의 형성과 정치적 역설
바타유가 제시한 생명의 과잉과 소진은 생명을 보호하고 관리하려는 생명정치의 정치적 합리성이 직면한 근본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는 푸코 이후 주권과 생명정치의 관계를 공동체의 취약성과 보호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재사유하도록 요구한다. 에스포지토는 전쟁담론을 통해 주권을 비신비화하고, 면역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기술로 재정식화한다. 그리고 재정식화를 통해 면역은 보호의 장치이자 동시에 자기면역으로 전환될 수 있는 역설적 메커니즘으로 드러난다.
바타유의 소진과 생명의 과잉
에스포지토의 사유는 일정부분 조르주 바타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바타유에게서 생명이란 본질적으로 생산과 보존의 논리를 초과하는 과잉이며, 필연적으로 소진과 낭비를 포함하는 것이다. 생명은 결코 축적과 유용성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질서를 교란하는 힘을 항상 초과의 형태로 내장한다.[2]
이러한 바타유의 통찰은 생명정치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생명을 관리하고 보호하려는 정치적 합리성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과잉, 즉 통제 불가능한 향유와 소진을 위험으로 간주하고 제거하려 한다. 그로 인해 생명정치는 생명을 증식시키는 동시에, 관리되지 않는 생명의 과잉은 배제하거나 억압함으로써 자신을 유지한다. 이때 보호는 단순한 긍정적 기능이 아니라, 과잉을 통제하고 불확정성을 제거하려는 질서화의 시도와 결합한다. 에스포지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명정치가 보호의 정치이면서 동시에 파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푸코 이후의 문제 이동: 주권에서 공동체로
에스포지토가 면역이론을 개념화 할때 또 다시 직접적으로 빚지고 있는 이론가는 푸코이다. 푸코에게는 주권, 생명관리정치, 통치성은 서로 대립하는 권력 형식이라기보다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배열로 이해하는 편이 적합하다. 그러나 에스포지토는 푸코의 배열을 수용하면서도, 그 배열 속에서 주권의 작동이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국면을 더 전면화한다. 주권은 사라지거나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정치 내부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등장하는 것이다. 즉, 생명정치가 죽음정치로 전환되는 순간, 주권적 결정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견해는 인종투쟁과 주권을 결합해서 인종주의 정치가 탄생했다고 주장한 푸코의 방법론[3]을 계승하고 있지만, 이러한 방법론은 생명관리정치에 결합시켰다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
에스포지토는 이러한 재등장을 주권 개념 자체의 문제로 간주하기보다는, 주권이 작동하는 토대인 공동체 자체의 문제로 전환한다. 그에게 코뮤니타스-공동체(communitas)는 조화롭고 자족적인 전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고 취약한 존재들의 관계, 근본적으로 조화로운 성립이 불가능한 무엇을 의미한다. 즉, 공동체는 기원론적으로 공유된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과 의무의 관계 속에서 강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근본적인 취약성은 보호의 필요성을 낳고, 이 보호 장치로서 이무니타스-면역(immunitas)이 등장한다.
여기서 에스포지토가 계보학적으로 면역개념을 추적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우선 면역개념은 생물학적 면역 메커니즘, 혹은 면역학의 직접적인 적용은 아니었다.[4] 오히려 근대 이전에도 사용됐던 전통적인 면역 개념은 법과 정치적인 것의 차원에서 등장하는데, 이때의 면역 개념은 공동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위험을 분류하고 경계를 설정하며 보호를 조직하는 정치적·법적·사회적 기술의 집합을 가리킨다.[5] 이 정의가 확립된 이후, 근대에 들어와서 파르퇴르의 연구를 토대로 생물학적 면역 메커니즘이 인종주의적 경쟁 속에서 전면화되며 지식담론 전반과 통치성의 영역으로까지 완전히 확장됐을때, 면역은 비로소 단순한 정치적 은유를 넘어 진정으로 생명정치가 주권과 결합하는 구조를 설명하는 분석 틀이 된다.
전쟁담론과 면역: 주권의 비신비화
푸코–니체적 계보[6]를 따라가면 정치의 근원은 합의나 계약이 아니라 투쟁과 전쟁에 가깝다. 이에 따르면 주권은 신비적 기원이나 초월적 정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전쟁은 단지 정치의 외적 조건을 구성하는 사건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치 질서를 구성하는 내적 원리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쟁 담론은 단순히 실증적 전쟁의 사건과 그에 따른 직접적인 여파만을 지시하고 인정하는 담론이 아니라, 정치적 관계가 갈등과 힘의 비대칭 속에서 구성된다는 계보학의 형태로서 작동하는 담론이기에 주권 분석을 다면적이고 복잡한 지식권력의 문제로 만들 수 있는 담론이 된다. 에스포지토는 이 계보를 직접적으로 승인하진 않지만, 주권이 역사적 투쟁의 결과로 형성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7]
에스포지토가 주장하는 면역은 이러한 상황 이후 공동체를 안정화시키는 권력 기술로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쟁에 의해 구성된 공동체는 면역을 통해 비로소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위험 요소를 차단하며, 생명을 보호한다. 따라서 주권은 전쟁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면역이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전쟁담론의 분석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권의 비신비화란, 주권을 어떤 초월적 결정의 기원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공동체가 자신을 지속시키기 위해 작동시키는 보호의 장치들이 축적된 결과로서 읽는 것을 의미한다.
면역의 역설과 자기면역의 위험
그러나 면역은 항상 공동체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에스포지토가 강조하는 핵심은 면역 메커니즘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자기면역(auto-immunitas)[8]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다.[9] 면역이 강화될수록 공동체 내부의 차이는 적대화되고, 내부 구성원은 타자로 규정되며, 공동체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자기면역의 논리는 현대 정치에서 인종주의, 배제, 예외상태,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와 결합하여 생명정치를 죽음정치로 전환시킨다.[10] 보호의 논리는 제거의 논리로, 생명의 관리는 생명의 선별로 변형된다. 면역이 위험을 제거하려는 장치로 강화될수록, 그 제거의 기준은 확대되고 정교해지며, 마침내 공동체 내부를 공동체 자체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 공동체 자체에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을 낳고 만다.
공동면역의 가능성과 그 한계
이처럼 에스포지토는 푸코의 생명관리정치 분석을 계승하면서, 현대 정치의 고유한 특징을 생명과학 담론과 결합한 사회면역론으로 규정한다. 생명과학 담론과 결합한 사회면역론 속에서 생명은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관리되며 최적화되지만, 동시에 특정 생명은 보호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죽게 내버려진다. 즉 생명정치가 단지 생명을 증진하는 정치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분류와 선별을 통해 죽음정치의 경로를 재가동하는 방식이 본격적으로 구조화되는 양가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주권과 생명관리정치는 더 이상 대립하거나 서로 다른 장치들의 이접으로 머물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의 완전히 통합된 권력 형태로서 작동한다. 따라서 사회면역론은 생명을 보호하는 정치이면서 동시에 생명을 선별하고 배제하는 정치이다. 주권과 생명관리정치의 통합은 주권의 소멸이 아니라, 주권의 재배치이며, 보호의 합리성이 제거의 기술과 결합하는 지점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에스포지토는 면역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면역의 파국을 넘어서기 위한 가능성으로 오히려 공동면역을 제시한다. 에스포지토가 제시하는 공동면역이란, “타자를 배제하기 위한 면역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작동하는 면역이며, 타자로부터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안전하게 만드는 정치적 구성”[11]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면역의 구상은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제기한 사회주의 통치성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읽힐 수 있다. 분명히 공동면역은 생명정치의 틀 안에서 생명을 보호하면서도 배제를 최소화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공동면역의 기획이 충분히 성공적이고 현실성을 갖출 수 있다면, 공동면역은 사회주의 통치성에 요구되는 고유한 메커니즘으로 활용 될 수 있다.[12] 그러나 공동면역 역시 질문을 남긴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타자를 위한 면역을 결정하는가? 공동면역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규범 권력의 이름인가? 이러한 질문은 에스포지토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정교화 되어야만 한다. 분명히 타자를 위한 보호라는 명제는 제도화되는 순간 보호의 자격을 심사하고 규정하는 새로운 권력 기술로 전화될 가능성을 내포하며, 이때 면역은 배제의 폭력을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기에, 에스포지토의 공동면역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3. 비교로의 전환: 에스포지토의 위치 묻기
공동면역의 가능성과 한계를 묻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을 하기 이전에, 추가로 필요한 작업들이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에스포지토가 생명정치 이후의 곤경을 공동체와 면역의 문제로 재정식화하는 과정을 재구성했다면, 앞으로는 이 재정식화가 생명정치 논쟁 전체에서 어떤 이론적 위치를 점하는지, 그리고 정치의 자율성·보호·폭력·통치성이라는 문제들을 어떻게 재배치하는지를 다른 이론들과의 비교를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푸코–아감벤–에스포지토의 논쟁 지형을 정리하고, 이어 아렌트와의 대비를 통해 면역 개념이 갖는 정치철학적 함의를 확장할 것이다.
푸코–아감벤–에스포지토: 생명정치 논쟁의 세 갈래
푸코 이후 생명정치 논쟁은 크게 세 갈래로 분기된다. 푸코의 계보학적 분석을 출발점으로 하여,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생명정치를 주권의 본질로 환원시키는 급진적 비판을 전개하고, 에스포지토는 이 둘의 대립을 공동체와 면역이라는 개념을 통해 재구성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푸코에게도 생명정치는 주권을 완전히 대체하는 새로운 권력 형식이 아니라, 주권과 중첩되며, 혹은 주권과 별도로 작동하며, 혹은 주권과 이접하며 작동하는 권력의 배열이다. 그는 생명관리정치가 인종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죽음정치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지만, 이를 하나의 필연적 구조로 고정하지는 않는다. 푸코의 분석은 역사적이며 전략적이고, 권력의 변형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규범적 결론은 유보한다.
반면 아감벤은 생명정치의 문제를 주권의 근본 구조로 급진화한다. 아감벤에게 생명정치는 근대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서구 정치 전통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이며, 그 핵심은 벌거벗은 생명과 예외상태의 결합이다.[13] 이 관점에서 생명정치는 언제나 죽음정치이며, 보호와 관리의 언어는 주권적 살해 권력을 은폐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아감벤의 분석은 생명정치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드러내지만, 그만큼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극도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고도 볼 수 있다.
에스포지토는 이 두 입장을 모두 비판적으로 경유한다. 그는 푸코처럼 생명정치를 단일한 본질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아감벤이 지적한 생명정치와 주권의 구조적 결합 또한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에스포지토는 아감벤과는 달리 생명정치의 파국을 예외상태나 주권의 초월성에서 찾지 않고,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면역 메커니즘의 역설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에스포지토에게 문제의 원인은 주권과 생명정치의 구조적 결합 그 자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도입된 보호 장치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푸코와 아감벤 사이의 절충이 아니라, 문제의 지형 자체를 이동시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생명정치를 주권으로 환원하지도, 주권과 생명정치를 단순히 병렬시키지도 않는다. 대신 공동체의 취약성과 보호의 필요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생명정치와 주권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분석한다. 공동면역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분석의 연장선에서 제시된 정치적 가능성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배제적 규범 권력의 절대화의 위험을 내포한 개념이기도 하다. 이 비교를 통해 볼 때,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푸코의 역사적 분석과 아감벤의 급진적 비판 사이에서 생명정치 사유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생명정치의 파국을 필연성으로 고정하지 않으면서도, 보호와 배제의 정치가 내포한 폭력성을 공동체 차원에서 드러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와 에스포지토: 공동체, 복수성, 그리고 보호의 정치
공동체 자체와 관련하여,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정치철학과 생산적인 긴장을 형성한다. 두 사상가는 모두 정치를 생물학적 생존이나 주권적 명령으로 환원하는 관점에 비판적이며, 정치의 핵심을 인간들 사이의 관계성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들이 공동체와 폭력, 보호의 문제를 사유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무엇보다 복수성(plurality)의 조건 위에서 성립한다. 인간은 동일한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며, 정치는 이 차이가 말과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공적 공간에서 가능해진다.[14] 이때 공동체는 보호나 동일성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있음’의 존재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아렌트의 정치 개념에서 폭력은 정치의 조건이 아니라 정치의 붕괴를 의미하며, 생명 유지와 보호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정치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난다.
반면 에스포지토에게 공동체는 처음부터 취약성과 위험을 내포한 관계이다. 공동체는 단순한 함께 있음이 아니라,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고 상처 입을 수 있는 상태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호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에스포지토의 사유에서 정치란 복수성이 평화롭게 현현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보호 장치들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장이다. 이 차이는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아렌트는 생명 과정의 필연성(노동, 재생산, 생존)을 정치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정치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아렌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정치는 근본적으로 정치의 왜곡 혹은 전도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에스포지토는 생명과 정치를 분리할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문제는 생명이 정치화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정치화되는가에 있다고 본다.
아렌트의 칸트 해석과 공동체의 불가능성: 에스포지토의 『코뮤니타스』를 중심으로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에스포지토는 『코뮤니타스』에서 아렌트의 칸트 해석을 공동체 해석의 중요한 단서로 읽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아렌트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만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저작들, 특히 법과 권리, 시민 상태를 다루는 텍스트들로부터 공동체의 성립 조건을 끌어내려 한다는 점이다.[15] 이 독해에서 법은 실천이성의 보편적 합리성에 의해 공동체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구성하는 선행적 장치로 기능하며, 주체들은 이 법에 의해 강제로 하나의 공존 상태로 묶인다.
이때 공동체는 자율적 주체들의 합의로 구성되는 규범적 이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하는 조건으로 나타난다. 아렌트가 말하는 ‘함께 있음’의 존재적 성격은 바로 이러한 불가피한 공존을 가리킨다. 에스포지토는 이 해석을 사회계약론과 대비시키며, 사회계약론이 가정하는 공동체, 즉 자율적 개인들이 합의로 결속한 공동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칸트가 이미 보여준다고 본다.[16] 칸트에게도 이미 계약의 주체는 계약 이전에 이미 법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며, 공동체는 자유로운 결합이라기보다 법적 강제에 의해 유지되는 공존 상태라는 것이다.
이 논점은 공동체를 회복해야 할 상실된 고향으로 상정하거나, 공동체를 완성해야 할 규범적 이상으로 전제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근본에서부터 흔든다. 이러한 의미의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진단은 정치의 포기를 요구하기보다, 오히려 공동체가 어떤 장치들에 의해 유지되는지를 묻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면역은 윤리적 표어가 아니라, 공존을 조절하고 지속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통치의 논리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복수성의 자기면역적 역설: 아렌트 정치철학에 대한 에스포지토적 비판
아렌트의 정치철학에서 복수성은 정치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제시된다. 정치는 이 차이가 말과 행위를 통해 공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에서 성립하며, 폭력은 복수성이 소멸될 때 등장하는 정치의 붕괴 양식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복수성 개념은 구조적 취약성을 내포한다. 아렌트는 복수성을 정치의 긍정적 조건으로 사유하지만, 복수성이 유지되기 위해 작동하는 보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론화하지 않는다. 복수성은 마치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조건인 것처럼 제시되지만, 실제의 정치적 공동체는 복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설정하고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의 복수성은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면역 논리를 은폐한 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복수성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위의 공적 공간이 유지되어야 하며, 이 공간은 언제나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파괴 가능성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러한 보호를 정치의 조건이 아니라 정치의 외부로 밀어냄으로써, 복수성 자체를 비정치적인 면역 장치 위에 세워둔다.
에스포지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아렌트의 복수성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면역 메커니즘을 사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기면역적 위험을 내포한다. 복수성을 순수한 정치적 가치로 절대화할수록, 그 복수성을 가능케 하는 보호와 배제의 작동은 비가시화된다. 그 결과 복수성이 위협받는 순간, 공동체는 복수성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복수성을 제한하거나 제거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자기면역적 역설은 아렌트가 폭력을 정치의 외부로 규정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폭력은 정치의 붕괴로 이해되지만, 에스포지토의 관점에서 폭력은 공동체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위험이다. 폭력을 정치의 외부로 배제하는 순간, 정치 공동체는 폭력이 언제, 어떻게 내부에서 생성되는지를 설명할 이론적 자원을 상실한다. 이때 폭력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사유되지 않고, 예외적 사태나 도덕적 실패, 혹은 외적 침입으로 환원된다.
결과적으로 아렌트의 복수성 개념은 정치의 이상형을 제시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그 이상이 붕괴되는 경로를 설명하는 데에는 취약하다.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개입한다. 그는 공동체를 본질적으로 취약한 관계로 사유하고, 복수성을 보호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자기면역으로 전환되어 공동체 자체를 위협하는지를 분석한다. 이 관점에서 복수성은 보호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의 조건이 아니라, 항상 보호의 역설 속에 놓여 있는 불안정한 상태로 재규정된다.
특히 에스포지토의 면역 개념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드러낸다. 아렌트의 복수성 개념은 타자의 현존과 차이를 긍정하지만, 공동체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메커니즘이 어떻게 폭력으로 전환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에스포지토는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면역이 자기면역으로 전환될 때, 복수성 자체가 말살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때 폭력은 정치의 외부가 아니라, 정치가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적 위험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에스포지토 역시 아렌트적 질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공동면역이라는 구상은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보호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그 보호가 어떤 기준과 주체에 의해 결정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 점에서 공동면역은 아렌트가 경계했던 생명 중심적 합리성이 새로운 형태로 정치의 자율성을 잠식할 위험을 내포한다. 결과적으로 아렌트와 에스포지토의 대비는 생명정치 이후 정치철학이 직면한 근본적인 두 가지 긴장을 드러낸다. 하나는 정치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과 보호의 문제를 거리 두는 전략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과 보호를 정치의 중심 문제로 끌어안으면서 그 파국을 내부에서 사유하려는 전략이다.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이 두 전략 사이에서 후자의 전략을 취하는 이론이지만, 그러한 전략을 취하기 이전에 이미 정치가 더 이상 순수한 복수성의 공간으로 남을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사유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통치성과 면역의 문제: 공동면역의 정치적 함의
푸코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합리성을 분석하면서, 사회주의 통치성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17] 푸코에게 사회주의는 고유한 통치 합리성을 발전시키지 못한 채, 자유주의 통치성의 기술들을 차용하거나 변형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해왔다. 이로 인해 현실 사회주의와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정치 이론들에서 귀결되는 통치성 전반은, 생명관리정치의 대안이라기보다 동일한 통치 합리성의 다른 배치로 남는다는 의문을 피할 수 없다.
에스포지토의 공동면역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푸코의 질문을 다시 호출한다. 만약 생명정치의 문제를 단순히 시장 대 계획, 자유 대 국가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면역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사회주의 통치성의 문제 역시 새롭게 정식화될 수 있다. 문제는 국가가 생명을 관리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보호가 어떻게 조직되는가에 있다.
전통적 사회주의 통치성은 종종 공동체를 하나의 실체로 상정하고, 그 실체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면역 장치를 구축해왔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내부의 차이는 통합의 대상이거나 제거의 대상으로 환원되었고, 보호의 이름으로 작동한 면역은 자기면역으로 전환될 위험을 내포했다. 에스포지토의 관점에서 이는 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 역시 면역의 역설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포지토의 기획을 선해해보자. 이제 공동면역은 사회주의 통치성의 새로운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공동면역은 공동체를 하나의 동일한 몸으로 보호하려는 전략이 아니라, 취약성과 노출을 전제로 한 관계적 보호의 정치이다. 더 나아가 이는 생명을 최적화하거나 동일화하려는 관리의 정치가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면역의 강도를 조절하는 정치적 실천까지 함축한다.
그러나 공동면역을 곧바로 사회주의 통치성의 완성으로 읽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공동면역 역시 보호의 기준과 방식이 제도화되는 순간, 새로운 규범 권력으로 굳어질 가능성을 여전히 내포한다. 특히 타자를 위한 면역이라는 명제는 누가 타자를 규정하고 보호의 범위를 설정하는가라는 고전적인 통치성의 문제를 다시 불러온다. 이 점에서 공동면역 개념은 완결된 사회주의 통치성의 모델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주의 통치성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질문들의 집합에 가까워 보인다.
분명,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사회주의 통치성에 대해 하나의 청사진을 제공하기보다는, 통치가 불가피한 보호의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자기면역의 파국을 피하기 위해 어떤 자기 제한을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사회주의를 국가 소유나 계획의 문제로 환원하는 전통적 논의를 넘어, 생명정치 이후 정치철학이 사회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조건을 제공한다.
사회주의 통치성의 미완과 현실사회주의의 면역 전략: 신자유주의와의 대비 속에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사실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제기한 사회주의 통치성의 부재의 문제는 하나의 완결된 통치 합리성을 당장 요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부재 자체를 가리키는 질문에 가깝다. 푸코에게 현실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처럼 고유한 통치 합리성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정치체제이며, 현실사회주의의 통치성은 기존의 고전적 국가 이성이나 자유주의의 생명관리 기술을 차용·전유하는 방식으로만 등장해왔다. 이 점에서 푸코가 문제 삼은 의미에서의 사회주의 통치성은 하나의 실현된 모델이 아니라, 끝내 정식화되지 못한 미완의 기획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푸코의 진의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현실사회주의는 이 미완의 기획의 자리를 비워둔 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생명과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매우 강력한 통치 기술들을 실제로 조직하고 실행했다. 이때 작동한 것은 푸코가 가설적으로 문제 삼았던 사회주의 통치성이라기보다, 현실사회주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특정한 면역 전략이었다. 공동체는 하나의 통일된 신체로 상정되었고, 그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규율, 감시, 동일화의 장치들이 강화되었다.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바로 이 지점을 사유 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관점을 차용해서 푸코의 문제의식을 되살려본다면,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 통치성의 본래 가능성을 실현한 사례라기보다,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면역 논리가 과잉으로 작동한 근대의 전형적인 역사 형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분명히 보호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보호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공동체 내부의 차이는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면역은 자기면역으로 전환될 위험을 구조적으로 내포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현실사회주의의 통치성은 신자유주의와 단순히 대립하는 대안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과는 서로 다른 극단의 면역 전략으로 대비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에서 면역은 개인화된다. 국가는 위험을 곧바로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관리체계를 정상화(시장경제의 경쟁원리를 원활하게 작동시키는 장치들의 정비)하는 편에 힘을 쏟으며, 개인에게 직접적인 위험 관리의 책임을 전가한다.[18] 경쟁과 자기책임은 보호의 철회가 아니라, 보호를 개인의 자기 통제 능력으로 전환하는 면역 기술이다. 이 체제에서 위험에 대한 노출은 보편화되며, 경쟁의 실패는 개인-국가의 면역 실패로 ‘자연화’된다.
반대로 현실사회주의에서 면역은 집단화된다. 국가는 공동체 전체를 보호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보호를 위해 통합과 규율을 강화한다. 이때 보호는 곧 동일성의 요구로 전환되며, 차이는 조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요소로 취급된다. 에스포지토의 개념을 분석의 편의를 위해 요약해서 사용하자면, 신자유주의는 공동체 면역의 결핍을 통한 자기면역을, 현실사회주의는 공동체 면역의 과잉을 통한 자기면역을 각각 구조화한다.
이러한 에스포지토의 개념을 통한 통치성의 대비는 푸코가 끝내 답하지 못했던 사회주의 통치성의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린다. 에스포지토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사회주의의 문제는, 사회주의가 국가 개입을 강화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었는가, 그리고 그 보호가 공동체를 어떻게 변형시켰는가에 있다. 이때 에스포지토의 공동면역 개념은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신자유주의적 노출의 정치에 머무르지 않기 위한 이론적 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공동면역은 푸코가 질문으로만 남겨두었던 사회주의 통치성의 완성형이라기보다, 그 질문을 오늘의 조건에서 다시 제기하는 방식에 가깝다. 분명히 에스포지토의 면역론은 공동체의 윤리적 회복이나 새로운 정치적 이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공동체가 결코 자발적 결속이나 상호 승인에 의해 성립하지 않으며, 법과 보호, 배제와 관리의 장치를 통해서만 유지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선택이 아닌 공존, 계약이 아닌 강제라는 이 구조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말하기보다, 공존이 어떻게 유지되고 조절되는지를 묻도록 강제한다. 이 지점에서 면역은 정치적 이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통치의 논리에 더 가까워진다.
따라서 공동면역은 통치 없는 정치의 가능성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통치가 불가피한 조건 속에서, 보호가 언제 자기면역으로 전환되는지를 끊임없이 문제화해야 한다는 요구를 사회주의 통치성의 핵심 과제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사회주의 통치성의 해답이 아니라, 그 미완성을 유지하는 비판적 장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야 할 사회주의 통치성?
이 글은 푸코의 생명정치 분석 이후 제기된 주권과 보호의 문제를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을 통해 재구성하고, 그 정치적 함의를 사회주의 통치성의 문제로 확장해왔다. 푸코가 제기했으나 끝내 정식화하지 못했던 사회주의 통치성의 질문은, 단일한 대안 모델의 부재가 아니라, 생명정치 이후 정치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이론적 과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생명정치의 파국을 주권의 본질이나 예외상태의 논리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면역 메커니즘이 어떻게 자기면역으로 전환되어 공동체 자체를 위협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보호와 폭력의 관계를 공동체 차원에서 드러낸다. 이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와 현실사회주의는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체제라기보다, 면역의 결핍과 과잉이라는 상이한 방식으로 자기면역을 구조화한 역사적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렌트의 복수성 개념은 정치의 이상형을 제시하지만, 복수성을 가능하게 하는 보호의 문제를 정치의 외부로 밀어냄으로써, 복수성 자체가 붕괴되는 경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에스포지토의 면역 이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개입하여, 복수성이 언제나 보호의 역설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복수성을 정치의 본질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수성을 파괴할 수 있는 면역의 작동을 정치 내부에서 사유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는 사회주의 통치성에 대한 푸코의 미완의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개한다. 사회주의 통치성은 현실사회주의에서 이미 실현된 통치 합리성으로 동일시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완결된 모델로 제시될 수도 없다. 또한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에스포지토의 진단은 정치의 포기를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통치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사회주의 통치성은 통치가 불가피한 조건 속에서, 보호가 언제 자기면역으로 전환되는지를 끊임없이 문제화하는 비판적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에스포지토의 공동면역 개념은 이러한 실천의 한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규범적 해답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공동면역은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 보호의 이상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 보호가 다시 규범 권력으로 굳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 권력의 위험성을 에스포지토가 몰랐고, 이를 무릅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평가이리라. 에스포지토의 문제의식을 유지한다면, 분명 공동면역은 사회주의 통치성의 완성이 아니라, 사회주의 통치성이 스스로를 닫지 않기 위해 유지해야 할 긴장 상태에 가깝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생명정치 이후의 정치철학이 직면한 과제는 통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가 스스로를 절대화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조건을 사유하는 데 있다. 에스포지토를 경유해서 본다면, 사회주의 통치성은 이 과제를 완결된 프로그램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을 때에만 자기면역의 파국을 피할 가능성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완은 결핍의 고백이 아니라, 면역이 자기면역으로 전화되는 순간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분석적 형식이다. 이러한 의미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사회주의 통치성은 하나의 도착점이 아니라, 생명과 공동체, 보호와 폭력의 관계를 끊임없이 다시 묻는 비판적 질문의 형식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Roberto Esposito, Bíos: Biopolitica e filosofia, Torino: Einaudi, 2004.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사회면역』, 윤병언 옮김, Critica, 2022.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코뮤니타스』, 윤병언 옮김, Critica, 2022.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 난장, 2016.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르트망 옮김, 난장, 2012.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김, 나남, 2004.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의 합리성』, 오트르망 옮김, 그린비, 2022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옮김, 한길사, 1996.

각주
[1]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권: 지식의 의지』(이규현 옮김, 나남, 2004), 제5장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
[2]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제1장 <일반경제의 개념 및 제 2장 에너지의 초과와 소비>
[3]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김상운 옮김, 난장, 2016), <3월 17일 강의>
[4]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사회면역』(윤병언 옮김, Critica, 2022), 1장 <전염>. 에스포지토의 이전 저작에서도 이미 면역 개념의 전근대성이 등장하지만, 특히 『사회 면역』 에서의 에스포지토는 파스퇴르의 면역학 개념 자체가 동시대의 정치적 구성물이기도 했음을 지적했고, 과학적 면역학이 사회 전체로 침투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5] 『사회 면역』, p.82, “면역의 특권은 민주주의에만 속하는 것도, 근현대라는 시간에만 속하는 것도 아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면역은 최소한 2000년이 넘는 뿌리 깊은 역사를 지녔다.” 이외에도 에스포지토의 전 저작에서 근현대 이전의 정치과 관련맺은 면역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6]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2월 강의>
[7] 『사회 면역』 3장 <생명정치의 시대>, p.147
[8] 한국어 출판본에서 ‘자기면역’은 자가면역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글에선 현대정치철학연구회 김상운의 번역을 따라 자기면역으로 표기했다. 에스포지토의 autoimmunity는 의학적 의미에서 면역체계가 자기 신체를 공격하는 병리 상태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면역의 논리가 과도해질 때 그 보호 장치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공동체의 생을 잠식하는 정치적·철학적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이러한 auto-의 의미는 ‘자기 집단의 속성’을 암시하는 ‘자가’보다, 보호의 논리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전도·반사되는 작동의 방향성과 자기지시성을 드러내는 ‘자기’에 더 정확히 부합하며, 따라서 에스포지토가 면역을 실패나 예외로서가 아니라 생명정치의 핵심 장치이자 내재적 역설로 사유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가면역’보다 ‘자기면역’이라는 번역어가 개념적으로 더 정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기존의 번역관행에서 사용한 ‘자가면역’은 생명정치의 의료화의 맥락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고 의학적 용어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 맥락에 따라 더 적절한 경우가 있음은 밝혀둔다.
[9] 『사회면역』 2장 <자가면역적 민주주의>.
[10] Roberto Esposito, Bíos: Biopolitica e filosofia, Torino: Einaudi, 2004. 3장 Biopotere e biopotenze. Bios의 번역은 『생명권력과 생명역량』(김상운 옮김, 현대정치철학연구회/월간 멀티튜드, 2024)를 참조했다.
[11] 『사회면역』, p.238
[12]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오르트망 옮김, 난장, 2012), 1월 강의록 전체 참조.
[13] 아감벤 『호모 사케르』 2장.
[14]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이진우 옮김, 한길사, 1996), p.24~26
[15]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코뮤니타스』(윤병언 옮김, Critica, 2022), p.156
[16] 『코뮤니타스』 3장 <법>.
[17]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월 강의록에서 푸코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고유한 통치성을 제시하였으나 사회주의는 그렇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18]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의 합리성』(오트르망 옮김, 그린비, 2022), 제7장 & 제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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