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무브 Writing/In Moving Zone

조직화의 관점으로부터: 보그다노프와 아우구스티누스적 좌파 (1)

by 인-무브 2026. 2. 18.

조직화의 관점으로부터: 보그다노프와 아우구스티누스적 좌파 (1)

 

 

로드리고 누네스

번역: 김수환 | 한국외대

 

 

 

노버트 위너의 1950년 저작 인간의 인간적 활용의 첫 번째 장인 진보와 엔트로피는 악마학(demonology)에 관한 짧은 논문이기도 하다. 본문은, 예상할 수 있듯이, 유명한 맥스웰의 악마[이야기]로 시작한 뒤 두 가지 버전의 악마, 즉 위너가 마니교적 것과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것이라고 정의한 두 악마 유형을 비교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엔 받아들였다가 평생 싸우며 극복하려 했던 마니교 이단에 해당하는 첫 번째 버전에서, 악마는 질서에 반대하는 능동적인 힘이자, 피조물을 무질서하게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서 어떤 속임수도 쓸 수 있는, 무한히 창조적인 적대자일 수 있다. 교회 교부[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도들과 결별한 후에 옹호하게 될 두 번째 버전에서는, 악마가 질서의 반대말이 아니라 질서의 부재, 그러니까 그 자체로서의 힘이 아닌 우리 자신의 나약함의 척도이며 [...] 적의 능동적인 저항이 아닌 자연의 수동적인 저항[각주:1]에 해당한다.

 

이러한 저항의 과학적 명칭이 바로 엔트로피. 이 두 가지 버전 중에서 두 번째가 옳다는 위너의 확신은 다음의 생각에 기초한다. “세계 전체는 열역학 제2법칙에 복속되어 있는 삶에 침잠해 있으며, 그 안에서 혼돈은 증가하고 질서는 감소한다,”[각주:2] 하지만 수학자 위너는 이러한 원칙이 침묵하는 적에 맞선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버려야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서둘러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닫힌계 전체에 대해서는 타당한 진술일 수 있지만, 그 계 내부의 고립되지 않은 부분에 관해서는 반드시 유효하지 않다. 전체로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 세상 속에서도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섬들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섬들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진보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진보 그 자체와 엔트로피의 증가에 맞서는 우리의 투쟁이 결국은 우리가 탈출하려 애쓰는 그 내리막길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각주:4]고 하더라도, 이것이 국지적이고 일시적인승리들이 불가능하다거나, 그 승리들을 위해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말리놉스키는 1873822일 현재 폴란드 영토인 소쿨카에서 태어났고, 54년 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배교자로서 생을 마감했다(텍톨로지 에세이(Essays on Tektology)와 거의 같은 시기에 쓴 보그다노프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파문 10(19041914)이라는 제목의 글은, 무려 80여 년이 지난 1995년에야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를 겨냥한 이론적 논쟁들은 종종 볼셰비키 내부에서의 [분파 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을 숨기기 위한 연막에 불과했지만, 보그다노프가 파문당한 자(pariah)이자 이단아로서 생을 마감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19세기에 시작된 과학혁명의 함의를 마르크스의 교의에 통합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 위너는 이 [과학]혁명의 공로를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조사이어 윌러드 깁스, 그리고 루트비히 볼츠만과 같은 인물들에게 돌리는데, 그것의 요체는 물리학에 통계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다.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의 저자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물리학의 관심을 필연적으로 일어날 에 관한 사고로부터 얼마간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일에 관한 사고로 전환시켰고, 뉴턴 역학의 경직된 결정론의 우주로부터 현대 과학의 우발적인(contingent) 우주로 이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현대 과학의 이런 불완전성 - “세상 한복판에 존재하는 거의 비이성적인 것(irrationality)” - 은 프로이트가 인간 행동과 사고 깊숙이 자리한 비이성적 요소[각주:5]를 인정한 것과 유사하다고, 위너는 지적한다.

 

모스크바 대학의 화학도 시절 참가했던 시위 탓으로 1894년 말에 도시 툴라로 추방되었을 때 보그다노프가 고수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에 이것이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하나의 중대한 결과는, 마르크스 본인보다도 당대 과학에 무지했으며, 그렇기에 당대의 변화를 간과했던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이 정련시킨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자부심의 핵심 지점을 건드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결정론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과학이 필연성을 버리고 우연성을 택했을 때,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은 더 이상 역사의 필연적 이행 경로를 설정하는 법칙을 공표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측량될 수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띤 또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 만일 절대적인 역사적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혁명과 계급 없는 사회는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게 되며, 이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예언적 힘을 박탈하는 동시에 그와 같은 결과를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지의 문제를 근본적인 물음으로 격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보그다노프가 삶의 자발적인(spontaneous) 운동일관되고 총체적(holistic)”인 것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의 모든 발현이 우아하게 조절되고 조화롭게 조정되며, “발전의 힘이 무한해질”[foonote]Aleksander Bogdanov, “Goals and Norms of Life,” Russian Cosmism, ed. Boris Groys (e-flux/MIT Press, 2018), 180, 175, 201.[/footnote] 미래 사회의 약속을 완전히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사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좀 더 음울하면서도, 아마도 보다 더 진실한 것일 이 흐름은 다음의 사실을 조용히 인식하고 있었다. 새로운 과학적 발전들이 우주적인 규모로 펼쳐지는 가운데 혁명 프로젝트가 배양해 온 인류 진보의 기대 자체에 모종의 귀결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보그다노프가 1908년 발표한 공산주의 SF소설 붉은 별에서 화성인들이 발견했듯이, 결국 계급투쟁에서의 승리란 진정힌 투쟁을 인식하는 과정에 가로놓인 역사적 페티시를 극복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 진정한 투쟁이란 환경이 부과하는 수동적(그리고 능동적) 저항에 맞선 종()의 투쟁이며, 이는 공산주의조차 결코 끝낼 수 없고 궁극적으로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한 투쟁인 것이다.

 

과학과 진보의 세기 한복판에 열역학 제 2법칙이 몰래 들여온 의구심은, 만일 어떤 궁극적인 평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 충만의 완결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무질서와 무관심이 시간이 지남에 통계적으로 증가하는, 하나의 시스템이 향해가는 상태라는 사실이다. “만약 우주적 과정이 엔트로피의 지속적인 증가를 통해 안정적인 평형을 향해간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우리의 [현재] 국면에서의 우주 전체의 생명 또한 보그다노프가 쇠퇴(fading)”라고 규정했던 종류의 위기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 위기란 궁극적 평형이 초기 평형과 거의 구별되지 않으며, 발생했던 모든 변화가 점차적으로 소거되는 상태다.[각주:6] 따라서 자연 선택이 산출한 조직화의 누적된 이득이 예증해주는 자연 과정의 보편적 불가역성조차도, 엄밀히 말해 역전되진 않더라도, 결국엔 궁극적인 무질서의 무자비한 전진에 의해 소멸되고 말 것이다.[각주:7]

 

보그다노프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특이점은 아마도 그가 트리어 출신의 스승(마르크스)을 발견하기 이전에 가졌던 만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가 에른스트 마흐와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의 경험비판론, 그리고 빌헬름 오스트발트의 에너지주의와 가졌던 만남이다. 보그다노프는 이 저자들로부터 적어도 세 가지 핵심 아이디어를 가져왔는데, 1909년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보그다노프를 이 저자들과 관련시키면서 집요하게 매도했다. 그중 하나는 일원론(monism)으로, 이는 대개 분리된 것, 심지어 대립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온 용어들, 이를테면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인간과 비인간,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 자연과 문화, 행동과 지식을 사유할 수 있는 단일한 프레임을 찾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그러한 통합적 시도의 열쇠를 제공할 수 있는 과학적 원리, 곧 에너지 보존과 자연 선택이다. 보그다노프가 1899년 저작 자연에 대한 역사적 관점의 기본 요소들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물이 절대적으로 공유하는 공통점은 가능한 한 가장 경제적인 에너지 지출을 추구한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환경에서 존속 가능해지기 위해서 적응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런 방식으로 두 원리가 결합되어, 가장 생존 가능성이 높은 적응이란 곧 언제나 가장 에너지 효율적인 적응이 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각주:8]

 

그러나 보그다노프식 이단성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만든 용어인 변증법적 유물론자체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첫 번째 철학 저작인 자연에 대한 역사적 관점의 기본 요소들이래로, 보그다노프는 헤겔을 자신의 제한적인 선구자로 간주했고, 변증법을 충분히 보편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모순을 통한 발전은 발전의 가능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그것의 적용 범위는 유기적 자연의 현상에 국한되고 무생물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증법은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기 위해 논증의 언어적 모델(정립-부정-부정의 부정)을 은유로 채택함으로써, 스스로의 분석력을 제한했다. 변증법은 해당 모델에 충분히 부합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도 사유할 수 없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정이나 종합같은 개념의 사용을 자의적이고 근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헤겔이 실제의 과정 대신에 사고를 대입했기 때문에, 그의 변증법은 논증의 모델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각주:9]) 따라서 변증법은 동일한 환경 속에 존재하는 상반된 힘이나 경향들의 동적 평형, 그리고 새로운 평형을 찾는 과정에서 위기의 순간을 거치는 대상들에 관해서는 단지 저해상도의 이미지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그다노프가 헤겔의 체계에서 자기 시대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결국 인식이란 경험의 조직화이며, 헤겔의 체계는 그 방향에서 당대까지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시도였기 때문이다.[각주:10] 하지만 자연의 과정이 대립물의 투쟁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들을 통해서도 발생한다면”, 변증법은 단지 특수한 사례일 뿐이며, 그 모델이 보편적인 방법이 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고, 결국 더 넓고 보편적인 관점으로 나아갈 필요성[각주:11] 이 생겨난다. 이 관점은 독일의 자연주의자 에른스트 헤켈로부터 빌려온 명칭인 텍톨로지(tektology)”(그리스어 tekton, 건설자에서 유래된 단어)가 될 것이었는데, 헤켈은 이 용어를 오직 인간의 활동에 대해서만 사용했다. [각주:12] 당대 경험을 조직화하는 인식적 과업은 일종의 보편 조직학으로 구축된 텍톨로지의 몫이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1913년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17년에 그것의 두 번째 파트가 출판되었고, 마침내 1921년에 요약된 버전으로 등장했다. 바로 이것이 영어와 현재 포르투갈어로 출판된 텍톨로지 에세이(Essays on Tektology). 이 책은 보그다노프가 한동안 품어왔던 생각들을 발전시킨 것으로, 분업에 의해 초래된 지식과 사회의 파편화로 인해 보편조직학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는, 1901년 작 역사적 관점에서 본 지각에서 처음 발표되었던 바로 그 결론으로부터 출발한다.[각주:13] 조직화 작업의 중심성은 1897년의 경제학 단기 과정1899년의 기본 요소들에서도 이미 조직자(organizers)”집행자(executors)” 사이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바 있는데, 이는 원시 사회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계급투쟁의 본래적 기초였다. 아울러 이 저작들에는 산업 사회가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조건들을 그 자체 내에 품고 있다는 암시가 존재했는데, 그 이유는 기계가 전문화된 집행자의 역할을 맡게 됨에 따라 이를 감독하는 노동자들은 점차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를 갖춘 조직자가 되어갔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보그다노프 사상에서 가장 (그리고 어쩌면 정당한 근거 없이) 낙관적인 측면 중 하나다. 산업의 발전과 노동의 숙련도 저하 사이의 연관성이나, 훗날 질베르 시몽동이 발전시킨 기술적 소외와 같은 개념과는 반대로, 보그다노프는 현대의 기계 장치 속에서 형성 중인 해방을 보았다.[각주:14] 그에게 기계는 비권위적인 협력의 형태를 예견하는 바, 그는 이를 1901년부터 종합적(synthetic)” 혹은 동지적(comradely)” 협력이라 불렀고, 미래 사회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이를 조직하고 확장해야 한다고 여겼다.

 

보그다노프가 당대 과학과 맺은 관계가 궁극적으로 공산주의의 필연성에 대한 그의 신념을 완전히 뒤엎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완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마오주의가 훗날 문화 혁명이라 부르게 될 것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통해서였다. 보그다노프는 십중팔구 이 용어의 최초 사용자다. 그에게 산업 혁명이 가져다준 해방의 기회는 지배적인 부르주아 문화로부터 독립된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발전을 요청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착수되어야 할 과업에 해당했다. 그래야만 부르주아지의 개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습성에 오염되는 것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사회의 조직자로서 수행할 미래의 과업을 스스로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볼셰비키 통제권을 둘러싼 레닌과의 분쟁기(1909-12) 동안 브페료드(Vpered, 전진)’ 그룹을 창설한 기초 중 하나가 되었고, 1917년 혁명 이후에는 프롤레트쿨트(proletkult)’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프롤테트쿨트는 1921년까지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의 독립 기구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보그다노프는 자신의 사상에 대한 박해가 재개됨에 따라 조직의 중앙위원회에서 강제로 사임해야 했다. 이 사건은 그가 정치와 결정적으로 작별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는데, 사망 7년 전의 일이었다. 그 시점까지 인류의 모든 조직적 경험을 집대성한 텍톨로지는 이 프로젝트의 과학적 지주였다.

 

 

조직화의 관점

 

보편조직학의 배경, 동기, 목적은 이미 10년 넘게 보그다노프에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1910년대 작업에서 나타난 최초의 커다란 새로움은 아마도 1913년의 텍스트 과학의 비밀에서 처음 발표된 조직적 관점(organizational point of view)”의 발견일 것이다. 이것은 우주에 대한 유일한 일원론적 이해로서, 조직화와 그 메커니즘이 가장 보편적인 실재로 나타나는 관점이다.[각주:15] 무기물에서 생명 물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조직화되어 있으며, 이는 곧 모든 것이 조직화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곧 조직을 산출하는 행위로 사유될 수 있으며, 마침내 모든 것은 스스로를 조직화한다. 요컨대, 우주 전체는 부분들의 끊임없는 조직화, 해체, 재조직화로 구성된 자기조직화된 현상(self-organized phenomenon)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에테르의 미지 요소들로부터 인간 집단과 항성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형태와 조직 수준들이 무한히 펼쳐지는 직물이며, “그것들의 뒤섞임과 상호 투쟁,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부분적으로는 무한히 분열되어 있으나 전체로서는 연속적이고 단절이 없는 보편적인 조직화 과정을 창출한다.”[각주:16]

 

그렇다면 조직화란 무엇인가? 이 책은 두 가지의 구별되면서도 상보적인 정의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간접적이고 다른 하나는 명시적이다. 만약 인간의 노동이 어떠한 생산물이라도 물질적 요소들을 인간 노동의 에너지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조직된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점을 발견한다면, 이로부터 조직화란 에너지 소비를 통한 요소들의 결합이라는 일반화가 가능해진다. [각주:17] 가장 일반적인 텍톨로지적 의미에서, 생물학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결합은 활동의 소비 없이는, 즉 에너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각주:18] 그러나 이는 또한, 이렇게 구성된 하나의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조직화가 곧 저항을 극복하는 활동들의 조합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복합체의 활동들의 합이 그것이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마주치는 저항들의 합보다 클 때, 우리는 그것이 조직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그것[조직화된 전체]그 부분들의 단순한 합보다 실질적으로 더 크다는 것을 뜻한다. [각주:19] 이로부터 조직화의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은, 어떤 복합체나 시스템을 그 모든 부분들 사이의 내부적 관계들과, 그것이 하나의 전체로서 자신의 환경, 곧 모든 외부 시스템들과 맺는 관계의 관점에서[각주:20] 관찰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원칙은 보그다노프를 1950년대 루트비히 폰 베르탈란피의 작업 이후 시스템 이론으로 알려지게 될 분야의 선구자로 분명하게 위치시킨다.

 

이로부터 딸려 나오는 몇 가지 결과들이 있다. 첫째, 조직화와 탈조직화(해체)(상대적인) 상관성이다. 만일 모든 창조가 기존 요소들의 조직화이고, 그 요소들 또한 이미 다른 배열에 관여하고 있었다면, 하나의 시스템에게 조직화의 이득으로 보이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시스템들에게는 손실로 보일 것이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가 된다. 물론 이것이 한 시스템의 조직화의 이득이 다른 시스템에도 이득이 되는 것을 막지는 않는데, 가령 두 시스템이 협력 관계에 있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하위 시스템인 경우에 그렇게 될 수 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조직화의 관점이 일종의 관점주의(perspectivism)를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텍톨로지의 핵심 개념 쌍인 활동-저항(activity-resistance)” 개념에서 한층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그다노프가 지적하듯이, 만일 두 군대나 두 계급이 투쟁에 가담하고 있다면, 각 진영의 활동은 상대방에게 저항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단지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각주:21] 이와 같은 동전의 양면을 단일한 개념으로 통합하는 것은, 보그다노프가 그렇듯이, 행위주체성(agency)의 거대한 보편적 평등화(equalization of agency)를 함축한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이고, 주체이면서 객체인 바, 행위주체성의 평등화는 이를 구상하기 위한 완벽하게 비도덕적인(nonmoral) 방식이다. 만일 자신과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 다른 것들의 탈조직화(해체)를 의미한다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하거나 악한 행동이란 존재할 수 없다. 들뢰즈가 스피노자에 관해 가르쳤듯이, 그 어떤 관점도 특권화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언제나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들이 존재하게 되는 바, 비록 그것이 다른 것들의 분해를 의미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이 누구에게좋은지가 명시되지 않는 한 좋다[선하다]”거나 나쁘다[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각주:22] 다르게 말해서, 그러나까 또 다른 종류의 도덕화에 반대하며 말하건대, 그 어떤 권력도 즉각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권력(power over)이 아닌 채로 어떤 것을 위한 권력(power for)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보그다노프의 저항-활동 개념에 가장 적절히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푸코의 권력 개념일 것이다. 푸코의 개념은 우리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형태의 권력, 이를테면 하나는 밑으로부터의 선한 권력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의 나쁜 권력으로 구별하려 할 때마다 심각하게 왜곡되는데, 요점은 우리가 언제나 하나이자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코가 자주 말했듯이 저항이 권력에 앞선다면, 그것은 저항이 권력과 구별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모든 저항은 언제나 이미 활동, 다름 아닌 권력 (“가능한 행동들에 대한 일련의 행동들[각주:23])이기 때문이다. 저항한다는 것은 언제나 이미 무언가에 작용하는 것이며, 반대로 작용을 받는 것은 비록 수동적일지라도 언제나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화와 탈조직화, 활동과 저항만이 상대적 실재이자 상관적 용어인 것은 아니다. 조직화와 자기조직화라는 쌍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둘의 차이는 오로지 분석의 규모(scale)에 달려 있다. , 요소들의 규모에서는 일부 시스템이 다른 시스템에 가하는 작용으로 묘사될 수 있는 과정이, 더 높은 규모에서는 동일한 시스템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바로 이것이 보그다노프의 표현대로 불연속성과 상호투쟁조차도 단일하고 연속적인 보편적 조직화 과정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는 조직화의 관점에서 비롯되는 세 가지의 결과를 따른다. 위계, -분해 가능성(quasi-decomponibility), 규모 상대성(scale relativity)이 그것이다. 첫 번째 결과인 위계는 여기서 생태학적 의미로 사용되는데[각주:24], 복잡한 시스템들이 그 자체로 복잡한 시스템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서로 다른 통합 수준에서 시스템 내부에서 [또 다른] 시스템들이 중첩된, 다층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인 준-분해 가능성은 이러한 유형의 구조가 가진 속성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동일한 위계 수준 내에서의 구성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의 속도가 서로 다른 위계 수준에 있는 구성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상이한 수준들로부터 하나 이상의 분석 수준을 고립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더 높은 위계 수준에서 발생하는) 저빈도 상호작용은 상수로 취급하고, (채택된 관찰 규모보다 낮은 위계 수준에서 발생하는) 고빈도 상호작용은 관련성을 갖기엔 지나치게 찰나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해준다.[각주:25] 따라서 세 번째 결과에 따르면, “시스템”, “하위 시스템”, 그리고 요소와 같은 용어들은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 구체적 지시 대상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관찰자가 시스템의 위계 구조를 어떻게 분할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된다.[각주:26]

 

만약 한 시스템의 조직화가 그 시스템의 활동과 그것이 환경에서 마주하는 저항들 사이의 관계(혹은 달리 표현해서 “[] 복합체와 그 환경의 상대적 활동-저항들[각주:27])의 함수이고, 환경이 세계 사건들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으며, 엄밀한 분석을 거치면 결국 전 우주로 퍼져나가고”, “그 결과 [...] 필연적으로 변화한다[각주:28], 우리는 모든 시스템을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process)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변 환경이 가하는 탈조직화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현재의 복합체로 유지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활동이란 무엇보다도 스피노자가 코나투스(conatus)라고 불렀던 것, 그러니까 각각의 시스템이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노력(따라서 모든 활동은 자동적으로 저항이기도 한데)을 가리킨다.

 

에너지 보존 및 자연 선택과 더불어 보그다노프가 일반화시키고자 하는 또 다른 과학적 원리는 앙리 루이 르 샤틀리에가 말한 소위 평형의 법칙(Law of Equilibrium)”이다. 이에 따르면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은 평형을 변화시키는 힘에 대해 내부적 반작용을 생성함으로써, 평형을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다.”[각주:29] 그리고 교란이 지속적이고 이질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보상하려는 노력 또한 그러하기에, 복합체나 형태의 보존은 발생하는 변화들이 반대 방향의 다른 변화들에 의해 균형을 이루는 동적(dynamic) 평형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평형은 결코 절대적으로 정밀한 것으로 취급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 변화들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균형이 존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언제나 단지 근사적이고 실천적인(practical) 것일 뿐이다.”[각주:30] 요컨대 우리는 조직화의 손실과 이득 사이의 차이가 충분히 작아서, 그것이 관찰되는 시간과 세부 수준의 규모 내에서 그것이 충분히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보일 때, 어떤 사물이 보존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적이고 과정적인 접근 방식의 필연적인 결과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조직화란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없으며, 언제나 탈조직화가 얼마간 그것에 혼입되어 있다[각주:31]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절대적인 탈조직화 역시 마찬가지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어떤 실체가 자신의 세계에서 작용하고 저항할 수 있게 해주는 내·외부적 연결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와 같은 절대적으로 탈조직화된 실체를 하나의 실체라고 부를 수가 있겠는가? 사실 활동-저항 개념이 가진 구성적 관점주의(constitutive perspectivity) - , 한 지점에서의 모든 조직화는 다른 지점에서의 탈조직화를 전제로 한다는 것 - 는 조직화와 탈조직화, “인그레션(ingression)”디스인그레션(disingression)”[각주:32], “동화(assimilation)”이화(disassimilation)”, 연결과 단절,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서로를 상호 제한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연결의 완전한 붕괴와 복합체들의 절대적인 분리 상태는 우리의 경험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우리의 경험은 보편적 인그레션에 의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다른 모든 사물들과는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변화하는 것은 사물들 사이의 분리의 정도일 뿐인데, 바로 이점이 실재라는 것이 관찰자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경우에는 분리 상태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연결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각주:33] 마지막으로, 전체성의 관점 혹은 시스템들 사이의 관계의 관점에서 상호 제한적인 자질들로 보이는 것이, 고립된 개별 시스템의 관점에서는 그 시스템에게 반대급부(trade-offs)[각주:34]로 보이는 자질들(“텍톨로지적 모순들”)을 함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잡성과 불안정성, 다양성과 응집성, 가소성과 견고성, 확산성과 조밀성, 분화(differentiation)와 역분화(counter-differentiation)가 그것이다.

 

2부에서 계속

  1. Norbert 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Cybernetics and Society (Da Capo Press, 1988), 35, 36. [본문으로]
  2. Wiener, Human Use of Human Beings, 36. [본문으로]
  3. 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36. [본문으로]
  4. 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4647. [본문으로]
  5. Wiener, The Human Use of Human Beings, 11. [본문으로]
  6. Aleksander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The General Science of Organization (Intersystems Publications, 1984), 249. [본문으로]
  7.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227, 원문에서 강조. 보그다노프가 우주의 열적 사멸 가설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론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 지금 평형화되고 있는 저 차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금 분해되고 있는 저 원자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우주 그 자체의 분화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한, 미래의 어느 시점을 최대치의 반-분화(contra-differentiation)”의 지점으로 투사하는 일이 자의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152. [본문으로]
  8. 그럼에도 보그다노프는 최선의 경제가 반드시 지출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자연에 대한 승리는 에너지를 좀스럽게 보존함으로써가 아니라, 에너지를 가장 충만하고 생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달성된다.” 이 진술은 엄밀히 말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환경 위기 앞에서 수정될 필요가 있다. Aleksander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Popular Outlines (Haymarket, 2016), 147. [본문으로]
  9.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174. [본문으로]
  10.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174, 강조는 원문. [본문으로]
  11.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200. [본문으로]
  12. James White, Red Hamlet: The Life and Ideas of Alexander Bogdanov (Haymarket, 2018), 290. [본문으로]
  13. White, Red Hamlet, 287. [본문으로]
  14. 이러한 낙관주의에 대한 스타니슬라프 볼스키(Stanislav Volsky)의 비판은 일찍이 1911, 보그다노프가 주도했던 전진(Vpered)” 그룹이 발행한 신문 제2호에 게재되었다. White, Red Hamlet, 282를 보라. 물론 이 독일 사상가(마르크스)에 대한 상당히 일반적인 해석이 존재함에도, 보그다노프가 마르크스의 진정한 견해에 더 가까웠다고 제안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Paul S. Adler, “Marx, Machines, and Skill,” Technology and Culture 31, no. 4 (1990).를 보라. [본문으로]
  15.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6. [본문으로]
  16.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6 [본문으로]
  17.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26. [본문으로]
  18.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148. [본문으로]
  19.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39, 강조는 원문. [본문으로]
  20.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52. [본문으로]
  21.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42. [본문으로]
  22. 질 들뢰즈의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Minuit, 1981), 147. 이하를 보라. 올덴부르크와 주고받은 서신 중 림프와 유즙에 관한 유명한 구절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는 관점주의와 (아래에서 보게 될) 조직적 관점이 전제하는 실재의 위계적 개념화 모두의 선구자이다. Baruch Spinoza, “Letter 32,” Complete Works (Hackett, 2002).를 보라. [본문으로]
  23. Michel Foucault, “Le Sujet et le Pouvoir,” Dits et Écrits, vol. 2 (Gallimard, 2001), 1056. [본문으로]
  24. 가령 T. F. H. Allen and Thomas B. Starr, Hierarchy: Perspectives for Ecological Complexi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을 보라. [본문으로]
  25. H. A. Simon, “The Organization of Complex Systems,” in Hierarchy Theory: The Challenge of Complex Systems, ed. H. H. Pattee (George Braziller, 1973). [본문으로]
  26. 조직학에서 요소라는 개념은 완전히 상대적이고 조건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조사 중인 문제에 부합하여 그 대상을 분해할 필요가 있었던 부분들일 뿐이다. 그것들은 필요한 만큼 크거나 작을 수 있고, 더 세분화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여기에는 분석의 한계를 설정할 수 없다.”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4243. [본문으로]
  27.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93. [본문으로]
  28.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80, emphasis in original. [본문으로]
  29.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54 [본문으로]
  30.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79. [본문으로]
  31.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43. [본문으로]
  32. [옮긴이주] 보그다노프의 ingressiondisingression 개념 쌍은 egresssiondegression과 더불어 텍톨로지의 핵심을 이루는 4가지 조직화 세트를 구성한다. 최대한 간략히 말해서, 후자는 조직의 내적 구조와 안정에 대한 개념이라면, 전자는 조직들 사이의접속과 해체에 관한 개념이다. 우선, egression은 조직을 위로 끌어올려 통합하고 지휘하는 작용, 즉 상위중심화 과정이며, degression은 조직을 아래에서 지탱하고 보존하는 작용, 즉 하위안정화 과정(이런 이유로 골격적인것으로도 불린다)에 해당한다. 한편, 전자의 ingressiondisingression은 서로 다른 조직 복합체들의 결합과 분리를 가리키는 개념인데, ingression은 공통요소(매개)를 통해 하나의 작동 단위로 연결되는 과정을 의미하며, disingression은 그와 같은 접속이 끊어져 결합이 해체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요컨대, 조직화란 이 4가지 과정의 계속적인 상관적 상호작용 및 동적 평형의 작동에 다름 아닌데, 원칙상 이 원리는 생명, 사회, 언어, 정치, 기술, 인식, 역사 등 모든 것을 포괄해 관철된다. [본문으로]
  33. Bogdanov, Essays on Tektology, 127. [본문으로]
  34. [옮긴이주] trade-off는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충관계를 의미한다. 경제학, 경영학 등에서 선택의 대가이율배반등으로 표현된다. 제한된 자원과 조건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선택의 기회를 잃게 되는 상황, 가령 실업률을 줄이면 물가가 상승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면 실업률이 높이지는 모순적 관계를 가리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