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잃어버리기
필자: 수차미

KMDB에 올라온 김병규 평론가의 “터널을 통과하기: 없는 것을 망각하는 비평”을 읽었다. 글에서 눈에 들어온 건 “비평은 망각된 것들을 기억하고 흩어진 기억을 서로 연결하는 일이 아니라 망각 자체에 속하는 일”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이었다. 다소 엉뚱해 보이기도 하는 이 말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명료하게 시각화돼 의미를 얻는다. 그는 “영화는 조우가 아니라 사라짐의 체험이고 따라서 비평은 그 사라짐에 관한 기술이기 때문”이라면서, “비평이 한국영화가 곤경을 투사하고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 특정한 장소를 감지하지 못”한다고 말을 이어간다. 문제는 이 말이 후열의 “비평은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행위다”라는 서술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비평이 사라짐에 관한 기술이어서 ‘한국영화’를 곤경에 빠트린 게 아니라, 반대로 비평을 계승하면 그 대상을 상실하는 쪽에 가깝다. 마치 부전의 조약이라도 걸린 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이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이렇게들 생각해보자. 왜 비평가가 되는 순간 우리는 비판의 대상을 잃는가? 워낙 업계가 좁으니까 함부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평가로 등단한 이들이 무언가 업계에 쓴소리를 하는 걸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영화에 대한 비판은 철저히 지양되며 동료의 글에 대한 평가도 최대한 자중한다. 이른바 비평 안에서 비평은 무언가 큰 문제를 외면하는 쪽에 가깝다.
언젠가 김병규는 자신이 씨네21을 통해 등단했지만 정작 씨네21을 비판했더니 당분간 글을 맡기지 않더라는 취지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꽤 회의감이 드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돈을 주는 쪽이 돈을 받는 사람 앞에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무언가 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논란이 될만한 말은 그렇다쳐도, 자사의 플랫폼을 비판하는 건 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도 제 살 깎아먹기에 가깝다. 사실 플랫폼에서 글을 쓸 때는 사실 자신이 어느 플랫폼에 소속돼있는지를 깜빡 잊어버리는 경우도 흔해서 본의치않게 그런 일을 하게 되는 때도 있다. 딛고 서 있는 곳을 보기란 힘든 법이니 말이다. 그래서 비평가는 자신의 구역에 머무르기보다 이따금 유체이탈해 유령처럼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일도 필요하다. 비평이 사라짐에 관한 기술인 건 무언가를 보고 듣는 자신의 몸에 의존해서고, 비평이 곤경에 처한 것도 이렇게 밖으로 탈출할 생각 없이 고립무원을 강령으로 채택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요구된다고 하면 도리어 바깥으로 나서야 함에도 제 위치를 고수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은 가장 큰 문제인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것일까? 아마도 건강검진이랑 비슷하다고 본다. 건강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건강검진을 할 때면 무언가 겁이 먼저 난다. 지금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번진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몸을 돌아보는 일은 너무 무섭다.
문제가 발견될 게 두려워 검진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다. 마찬가지로, 비평가가 다음 일을 맡지 못할 게 두려워 자기를 잊어버린다면 그것만큼 이상한 일이 없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게 “자기의 한계에 갇히는 일”과 같은 뜻이 아님에도 우리는 이를 착각하곤 한다. 이를테면 한 문제나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어도 우리는 그런 문제들에 시선을 보낼 수 있다. 당사자의 말이 가장 진솔한 것도 맞지만, 그런 논리라면 애초에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이 세계가 영화가 아니기에 불가능하다. 비평가는 그와 같은 ‘불분명함’을 두고 싸우는 사람이다. 삶의 감정들을 이겨내야 한다 여기면서 정작 그런 감정들을 갖고서 작업하는 사람이다. 비평가가 곤경을 외면하고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일 수 있다. 이미 곤경에 처해있는 그는 스스로의 선택이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어떤 형태로의 죽음은 불합리한 선택지로 기능하기에 대개 고려되지 않지만, 시기와 상황이 갖춰지면 그게 마치 대안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 점에서 비평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평을 하는 사람에는 그런 비평이 되려는 충동이 항상 잠재해있다. 자기 자신이 되려 하면서 그와 같은 ‘자기’를 말하는 일이 오히려 무언가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몸의 사라짐에서 대안은 없다고,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참된 비평이 자본이나 플랫폼, 문화담론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비평을 하는 일은 무언가 죽음을 마주하기를 결심하는 일이 아닐까. 말하자면 비평은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을 구구절절하게 풀어놓는 일”인 것이다. 아무런 돈이나 대가를 받지 않고 글을 쓰는 것도 어렵고, 대중에서 아무런 반향도 오지 않으면 글을 쓰는 동인은 더욱 약해진다. 이 과정에서 글을 쓰는 이의 자아는 죽음을 맞이하고, 전처럼 평범한 무언가로 돌아간다. 리스트도 마찬가지다. 김병규는 윗글에서 이렇게 말해두고 있다. “최근 영화잡지 ‘씨네21’은 잡지의 30주년을 기념해 1995년에서 2024년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를 대상으로 한국영화/해외영화 10편의 베스트 목록을 발표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허한 목록의 재생산이 아니라 눈앞에 존재하는 영화문화에 과도하게 채워져 있는 목록과 관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읽으면 리스트 문화가 영화 문화를 증진하는데 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보면 이미 ‘젊은 비평가’ 축에서 이탈한 자신에 대한 신세한탄처럼 보인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활동하던 ‘Fantasy’는 이제 없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영화 문화의 한 곳, 한 몸에 여전히 잠들어있다. 리스트에 반대하는 건 어떤 점에서는 ‘무엇이 죽음으로 이끄는지’를 외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결국 비평을 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 같다.
너무 주류에 친해지면 비평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기도 힘들어지니 최대한 지양해야 하는 걸까. 뭐든 적당히라는 말처럼 너무 상대방을 미워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칭찬만 해서도 안 된다. 이 사이에서 비평가는 하나의 예술인이기보다 직업이 되어간다. 실제로 비평가는 하나의 신분이 될 수는 있어도 반대로 직업이 될 수는 없다. 비평가가 직업이 되려면 돈을 받아야 하는데 돈을 받는 순간부터 무언가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잘 알아듣기 어려울 말은 하기 어려워진다. 심지어 비판을 당하던 상대는 유무형의 자원을 지불함으로써 해당 비평가를 길들이는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중요한 건 이 길들임의 작업이 비평가 개인에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일지는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일종의 보존처리, 박제화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당신을 더 오래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비평가 개인으로서도 원한다면 박제가 되어서라도 박물관에서 무병장수하며 죽음에 대항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같은 논리에서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도 영화사의 한 성취를 기념하는 게 아니라 영화들을 죽음에서 끄집어내는 안티에이징, 혹은 미이라화의 처리에 해당한다. 만약 비평을 하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루는 작업이라면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붕대를 칭칭 감아서라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편이 위기를 피하는 데 더 수월하니, 응당 지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평은 죽음을 향해가는 일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해의 여지가 있다. 가령 어른이 된다는 건 성숙해진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내일을 잃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보다 비자발적인 형태로 죽음에 얽힐 확률이 높아진다. 몸이 물리적으로 아파 오기 시작하면 죽음이 그 무엇보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비평가는 자신의 생각과 사유가 성숙해질수록 그런 비판의 대상에 자기 자신이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되므로 끝내 무언가를 비판하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 아무리 말해봐야 자기 자신에 침을 뱉는 것밖에 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왜 ‘젊은 비평가’의 존재가 소중한지를 잘 알 수 있다. 학생 시절에는 학교에 있으면 되지만 성인이 되고 나면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학생들의 몸이나 마음은 미성숙해서 보호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반대로 그 자신의 위치가 확실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는 곳이 아니라 ‘살고 싶은 곳’에 관해 서술하는 게 더 옳다. 이 젊은 비평가는 자신이 빠져들었던 것에서 출발해 점점 자신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서술하는 과정을 거친다. 밝게 빛나던 외모와 능력은 깊은 주름과 쇠약한 몸을 지닌 노인의 외견으로 수렴한다. 이 안에서 ‘신체’는 점차 빛을 잃지만, 그렇다 한들 아무런 것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비평가가 자신의 몸을 잃어버리는 건 살아갈 ‘용기(Container)’를 얻는 작업이다.
**이 글에서 언급된 원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kmdb.or.kr/story/837/9251
터널을 통과하기
<버닝>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해미(전종서)는 조금 뜻밖의 말을 한다.
www.kmdb.or.kr
김병규, 터널을 통과하기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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