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의 청년 서사와 ‘박탈’의 가능성[1]
지영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Ⅰ. IMF 이후 청년의 자리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하게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겪으며, 청년들은 구조적 불안정 속에서 ‘자기 계발’의 논리를 내면화한 주체로 재구성되었다. 안정적 고용과 복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스스로의 생존 가능성을 입증해야 하는 압박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기 계발하는 주체’는 유연한 노동 주체이자 자기 계발 문화를 소비하는 개인으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요구들을 수행하면서 그 체제에 철저히 종속되었다.(서동진, 2010) 얼핏 보면 이 주체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개인으로 보였지만, 그 실상은 불안정성을 체화한 채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착취의 과정에서 타자와의 관계적 기반까지 상실하며 존재 박탈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무한경쟁을 강요당하는 승자독식 시대”(소영현, 2012)에 확산된 자기 계발 담론은 체제의 불안정성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홍중이 말한 ‘생존주의’가 작동한다. 생존주의는 청년들이 패배와 배제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우수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감정적 레짐이며, 이는 경쟁을 도덕화하는 체제의 감정 구조로 기능한다. IMF 이후 청년들은 불확실성과 위험을 삶의 상수로 받아들이며, 장기적 전망 대신 단기적 생존 단위로 삶을 분할한다. 이때 개인의 불안정은 구조적 문제로 환원되지 않고 ‘자기 실패’로 귀속된다(김홍중, 2015).
2000년대 이후 청년들의 삶의 조건 변화는 문학 텍스트 전반에도 반영되어 왔다. 선행 연구들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청년들이 경험한 감정 구조의 변화, 취약 노동, 사회적 배제의 메커니즘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해 왔다(권경우, 2016; 박성준, 2019; 소영현, 2012). 특히 ‘백수 청년’ 서사(조윤정, 2021),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공포의 정동(정의정, 2024)에 대한 논의는 구조적 불안과 감정의 동요가 어떻게 청년 서사 안에서 사회 비판의 형식으로 활성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 흐름 속에서 청년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사회적 약자, 빈곤층’의 범주 안에서 재배치되는 존재로 읽히며(소영현, 2012), IMF 이후의 한국 사회가 청년에게 요구한 생존 조건과 그에 따른 주체의 균열이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맥락과의 연결선상에 놓이는 김애란⋅이기호⋅박형서의 작품은 2000년대 청년 서사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핵심적 위치를 점해 왔다. 김애란의 소설은 열악한 주거⋅고용 조건과 고립된 관계 등 청년의 불안정성과 정체성 위기를 섬세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일상적 박탈의 감각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아 왔으며(박권주, 2021; 장미영, 2014), 이는 청년의 자기서사적 실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다. 박형서와 이기호의 작품은 기술⋅재난⋅폭력⋅부조리한 시스템 등 청년을 둘러싼 구조적 조건을 보다 확장된 범주로 다루며, 개인적 고립에서 사회적 기능화, 나아가 세계적 소모로 이어지는 박탈의 연쇄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고영진, 2011; 노대원, 2018; 이규일⋅이상우, 2014; 정홍수, 2013). 이 세 작가를 함께 읽을 때 IMF 이후 청년들의 존재적⋅언어적⋅관계적 박탈이 어떻게 다양한 층위에서 복합적 재난으로 구조화되는지가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기존 연구들은 2000년대 이후 소설에서 청년들이 어떻게 주체성을 구성하거나 상실하는지, 그 과정에서 공간⋅노동⋅감정의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규명해 왔다. 이 글은 기존 연구의 범위를 확장하여 IMF 이후에 사회가 요구하는 자기 계발하는 ‘주체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청년들의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청년들이 처한 상황을 ‘재난’과 ‘언어’, 그리고 ‘존재 박탈’의 관점에서 조망할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박탈(Dispossession: The Performative in the Political)』은 IMF 이후 청년 서사를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버틀러는 초기 저작에서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을 통해 주체가 언어 행위의 반복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이후의 연구에서는 ‘취약성(vulnerability)’과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이라는 관계적 차원으로 사유를 확장한다. 이때 주체는 더 이상 자율적이고 완결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자에게 드러난 결여를 통해 인식되는 관계적 존재로 정의된다. 즉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이며, 주체의 정체성은 자기 소유의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상호 침투와 의존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IMF 이후의 한국 청년들은 이러한 인정의 장 자체가 붕괴된 시대를 살아간다. 버틀러가 말하듯 “박탈은 근간을 잃어버리고, 점령당하고, 가정과 사회적 유대가 파괴되는 경험”이며, “삶의 위태로움(unlivability)”을 드러낸다(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2016). 이러한 박탈은 단순히 생존 자원의 부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가 사회적으로 존재를 유지하고 승인받을 수 있는 언어적⋅정동적 기반이 붕괴되는 사건이다.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가 부정된다는 뜻이다. 청년들의 ‘결여’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인정의 가능성을 열지 못한 채, 사회적 언어의 장에서 침묵과 배제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 침묵과 결여는 관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계의 윤리를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계기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사용하는 ‘존재 박탈’은 『박탈』이 제시하는 양가적 의미, 구체적으로는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타율적 조건”이자 “주체에게 가해진 손상, 상처를 주는 호명(injurious interpellations), 폐쇄, 폐제, 예속의 양식들”(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2016)을 모두 포괄한다. 즉 박탈은 주체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승인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는 부정적 상태이면서, 동시에 타자에게 의존함으로써만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긍정적 조건이다.
이 글은 이 양가적 개념을 통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청년들이 처한 부정적 현실을 분석하되, 그 부정성의 드러남이 ‘소설 밖’에서 관계 회복의 사유를 열어주는 계기로 작용함을 밝히고자 한다. IMF 이후의 청년들은 노동⋅가족⋅언어⋅공동체 등이 해체된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장치를 갖지 못한다. 이러한 청년들의 ‘존재 박탈’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붕괴가 초래한 체제적 재난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관계의 복원에 대한 요청으로 읽을 수 있다.
이를 밝히기 위해 이 글은 김애란의 「종이 물고기」(2004), 이기호의 「수인(囚人)」(2005), 박형서의 「두유 전쟁」(2004)을 중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2] 세 작품은 청년의 ‘존재 박탈’을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해 보여주는 서사적 연쇄를 이룬다. 「종이 물고기」에서는 불안정한 거주 공간 속에서 자기 언어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귀결되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박탈이 드러난다. 이어서 「수인」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폭발 이후 통제 사회 속에서 창작 주체의 언어와 정체성이 해체되면서 존재 박탈이 ‘사회적⋅국가적 차원’으로 심화된다. 마지막으로 「두유 전쟁」은 전쟁과 비행기 폭발이라는 전 지구적 재난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계 속에서 인간이 완전히 소모되고 대체되는 현실을 그리며 ‘세계적 차원’의 구조적 박탈을 형상화한다.
이 글이 세 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세 작품에서 청년의 고립과 파열을 드러내는 서사는 단순한 현실 재현을 넘어 관계적 윤리를 사유하게 하는 문학적 장을 마련한다. 이때 인물들이 보여주는 침묵과 실패는 패배의 징후가 아니라, 언어적 존재가 해체된 이후 관계를 다시 구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드러내는 서사적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음 장에서는 각 작품이 ‘존재 박탈’의 국면을 어떠한 방식으로 서사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다중재난 속 청년들의 존재 박탈
1. 집/방의 붕괴와 자기 서사의 실패
김애란의 「종이 물고기」는 시골에서 상경한 소설가 지망생인 ‘그’가 서울의 옥탑방에서 생활하다가 겪는 붕괴 재난을 그린다. 그는 자그마한 옥탑방에 거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소설 창작을 위한 단상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방의 모든 벽에 붙인다. 이 포스트잇은 창작을 위한 ‘의욕’인 동시에 벽의 균열을 덮기 위한 ‘가림막’으로 작용한다. 결국 포스트잇으로 벽의 균열이 가려졌던 옥탑방은 무너지고 ‘종이 물고기’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대부분의 포스트잇도 매몰되면서 작품은 마무리된다.
‘2004년 서울’을 주된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지방의 정원 미달 고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집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은 하지 않은 채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공간을 상상”(242)하는 아들을 부끄러워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그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말한다. IMF 이후 한국 사회에서 공무원은 안정된 삶의 보증 수표처럼 인식되었고, 많은 청년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 되었다(김태일⋅한경희, 2008).[3] 주인공의 아버지가 아들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기를 원하는 장면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 구조 속에서 주인공은 국가와 사회가 부과하는 불안정 노동, 자기 계발 압박이라는 외적 조건뿐 아니라 가족의 기대와 실망이라는 내적 중압까지 떠안게 된다. 이는 이 시기의 청년들을 둘러싼 안정에 대한 욕구와 그에 부응하지 못한 채 불안정성과 고립 속에 내던져지는 실존의 양가성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상징적 질서 안으로 편입하지 못한”(박권주, 2021) 그는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삶 대신 불확실하지만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는 길을 선택한다. 시대적 요청과 미묘하게 엇갈리는 그의 삶은 ‘방’에 대한 경험과 연결되어 서술된다. 어린 시절의 그는 방바닥과 천장의 너비가 같지 않은 방에서 벽을 도배한 신문지의 글자들을 탐독했다. 이 경험은 청년이 된 후 방에 포스트잇을 붙여서 글을 쓰는 작업과 구조적으로 연결되는데, 두 장면에서 언어의 기능은 극적으로 전환된다.
그는 한쪽 벽면을 다 읽은 뒤 다른 벽면으로 이동했다. 그 벽면을 전부 훑으면 또다른 벽면으로 넘어갔다. 한면에서 다른 면으로 이동할 때마다 그는 점점 대범해졌고,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는 네 벽면을 읽고 또 읽고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읽을 면이 없어지면 모든 걸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단,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그는 퍼즐을 맞추듯 이 문장과 저 문장, 이 단어와 저 단어를 섞어 읽었다. 모르는 단어의 뜻을 제멋대로 상상하기도 하고, 세로로 씌어진 글을 가로로 읽기도 했다. 그것은 훨씬 수고로운 일이었지만 그는 그 방법을 좋아했다. 그편이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다.(김애란, 2020, 249)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신문지 벽을 바라보며 글자들을 뒤섞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던 행위는 언어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가장 원초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언어는 규범이나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를 무한히 비틀고 확장할 수 있는 놀이의 도구였다. 그러나 청년이 된 후 상경하여 얻은 옥탑방 벽에 포스트잇을 붙여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증명이라는 목적에 의해 지배된다. 첫 포스트잇에 담긴 호이징하의 문구인 “―나는 지금 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쓰기로 결정했다.”는 그의 글쓰기가 존재 및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결단임을 보여준다. 글쓰기는 더 이상 자유로운 놀이가 아니라, 붕괴하는 삶의 균열을 막고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정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 된다.
어린 시절 그는 도장 파는 아버지의 직업을 하찮게 여겼지만 아버지는 타인의 이름을 새기는 일을 하며 그들의 삶을 제도적 질서 속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게 된 바로 그 시점에,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며 ‘안정된 존재 증명’을 요구한다. 서울에 올라가서도 별다른 성과가 없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던지는 “넌 뭐가 그렇게 괜찮냐?”(254)라는 질문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주체 형성 압력이 가족 내부를 통해 재생산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때 가족은 더 이상 보호와 돌봄의 울타리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인정의 질서를 내면화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그의 글쓰기는 아버지의 도장이 수행하던 사회적 인증의 기능을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온 시도였지만 제도 밖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그는 결국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 시도는 또 다른 형태의 고립으로 이어진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그가 쓴 소설은 오직 한 장의 포스트잇이 들어갈 자리만 남긴 채 옥탑방의 벽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옥탑방은 그다음 날 허물어져 내린다. 마치 종이 물고기의 비늘처럼 덧붙여진 포스트잇 속 메모들에는 주인공의 ‘의미’와 ‘존재 증명’을 위한 의지의 흔적이 담기지만, 결국 포스트잇은 그의 삶의 터전이 붕괴되고 있음을 외면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방 앞에서 자신의 ‘글쓰기’가 삶의 근본적 불안정성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열한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은행나무 잎처럼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그의 발밑으로 날려왔다. 그는 신발 밑창으로 그 포스트잇을 지그시 눌러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곤 달달 떨리는 손으로 꼬깃꼬깃 구겨진 포스트잇을 펴보았다.
그는 침도 별로 없는 입을 열며 우리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희망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그것을 읽고 한동안 꺼이꺼이 울었다. (…)
그는 포스트잇을 자기 엄지손가락으로 가만 눌렀다. 그러곤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포스트잇이 바람에 파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가쁘게, 그러나 팔딱팔딱 나풀거렸다.(김애란, 2020, 270-271)
이 마지막 장면은 청년 주체의 존재 증명 욕망이 결국 실패와 박탈로 귀결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옥탑방 붕괴는 청년들이 직면한 주거 불안이나 미래 상실의 감각을 물리적 파국으로 변환시켜 극대화한다. 이 소설에서 집/방의 붕괴는 폐허와 파편 속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사유 방식인 벤야민식 알레고리로 작동하며, 삶의 세계가 잔해와 파편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드러낸다(발터 벤야민, 2008).[4]
여기서 ‘글쓰기’로 대변되는 청년의 언어는 더 이상 세계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스스로 붕괴하며 ‘관계적 존재’로서의 조건 자체를 상실한다. 이 관계적 박탈은 언어가 주체를 구성하는 동시에 그를 상처 입히는 수행적 장임을 보여준다. 주체는 타자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 드러남 자체가 곧 노출과 상처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는 언어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언어의 장이 무너진 자리에서 그 행위는 더 이상 타자에게 닿지 못한 채 공허한 반복으로 전락한다. 언어는 우리를 노출시키고 때로는 상처 입히지만 타자에게 도달하게 하는 유일한 매개이기에, 언어의 실패는 곧 관계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포스트잇에 적은 문장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도 결국 폐허 속에 묻히는 것은 그의 언어가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기 폐쇄의 증거로 남았음을 보여준다.
옥탑방이 무너진 뒤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주운,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가쁘게 떨리는 포스트잇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청년들의 불안정한 호흡을 연상시킨다. 거기에 적힌 “희망 때문일 것”이라는 문장은 체제가 약속하는 성공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와 관계가 붕괴된 자리에서 간신히 남아 있는 미세한 잔여이다. 주인공의 울음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완전한 ‘자기 말하기’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말하기와 관계가 본질적으로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조건을 깨닫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그는 포스트잇을 붙드는 행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서사가 폐허 위에서만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무너진 방은 주체가 자리를 잃는 동시에 새로운 배치를 모색할 여지를 열어 보인다. 이러한 결말은 박탈이 부정성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관계적 존재의 조건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2. 폐허 속 기능적 존재로의 전환
“‘미달(未達)’의 인간과 세상을 이야기”(정홍수, 2013)하는 이기호의 「수인」은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라는 기술 재난 이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서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려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시멘트로 막혀버린 종로 출입구부터 자신의 책이 있는 광화문 교보문고까지를 곡괭이로 뚫어 나가며,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유엔 조사단은 그가 창작한 소설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그가 보인 곡괭이질 능력, 다시 말해 육체적 노동력만을 이주 자격으로 인정한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돈이 되지 않는 ‘창작’이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되고,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노동력’으로 환원되는 현실임을 폭로한다.
주인공 ‘수영’은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한 작가이다. 그는 장편소설을 완성하기 전까지 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태기산의 폐가에 들어가지만, 그 사이 원자력 발전소 두 곳이 폭발하면서 한반도 전체가 방사능에 오염된다. 방사능을 피해 북쪽으로 향하는 피난 행렬로 인해 분단 체제는 허무하게 허물어지고, 남북한 정부는 동시에 기능을 상실한다.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유엔이 개입해 남쪽 정부를 해산시키고 국민들을 선별해 세계 각지로 이주시킨다. 한반도는 더 이상 ‘국가’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주민들은 이주 가능한 ‘인적 자원’으로만 분류된다.
작품 속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은 단순한 물리적 재난이 아니라, 국가 체제가 해체되고 인간 생존의 조건이 붕괴되는 ‘문명적 파국’을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이 재난은 청년 세대의 존재 기반이 무너지는 사회적 진실을 드러낸다. 청년의 좌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 구조 자체가 붕괴한 현실의 징후로 제시된다. 그리고 주체에게 허락된 자리 자체가 사라지고 주체는 비존재로 규정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사회적 인정의 언어를 획득할 수 없는데, 「수인」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비존재의 조건’ 속에서 주체의 존재 증명이 강요되는 상황을 형상화한다.
산속에 있어서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수영은 유엔 심판관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을 요청받지만, 주민증은 분실했고 주민등록번호는 제대로 외우지조차 못한다. 국민연금⋅건강보험⋅자동차⋅여권 등 사회적 존재임을 증명하는 요소가 모두 결여된 그는 ‘소설가’라는 직업이 있음에도 실직자처럼 취급된다. 작품 속에 제시된 대형자동차 운전면허, 정보처리 기능사, 배관기술, 병아리감별사 등 각국의 이주 조건은 IMF 이후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기능적 존재’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영은 앞으로도 글을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프랑스’로 가고자 하고, 심판관은 수영에게 서점에 가서 그가 쓴 책을 직접 찾아오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수영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문구를 떠올리며 곡괭이를 쥔다.
그는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부터 석양이 질 때까지 쉬지 않고 교보문고를 파내려갔다. 식사는 하루 두 번 유엔 임시급식소를 찾아가 해결했으며, 잠은 주로 교보문고 앞 버거킹 매장 탁자 위에서 잤다. 눈을 뜨면 바로 곡괭이부터 잡았고, 식사를 할 때에도 손에서 곡괭이를 놓지 않았다. 그의 두 손바닥은 이미 여러 번 물집이 터져 검붉게 변해버렸으며, 물집이 터진 곳엔 다시 누런 굳은살이 돋아났다. 그의 팔죽지와 허벅지는 더 탄탄해졌으며, 허리는 더 가늘어졌다(이기호, 2024, 218-219)
위의 인용문에서 곡괭이질은 단순한 생존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작가임을 증명하려는 강박적 몸짓이다. 곡괭이질 하는 그의 삶은 장시간의 육체노동, 부실한 식사, 불안정한 수면으로 귀결된다. 손바닥의 굳은살과 피로에 젖은 몸은 존재 증명을 향한 열망이 체제 속에서 ‘노동력의 강화’로 환원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주인공의 처지는 IMF 이후 불안정 노동과 생존 경쟁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축소판으로, 창작의 욕망이 사회적으로는 저임금⋅고강도 노동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수영의 신체는 노동을 할수록 변해가지만 그는 자신이 찾는 책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그가 곡괭이질을 하는 현장에 매일 찾아오는 유엔 서기가 “이 벽을 혼자 다 깼는데 그 이상 무슨 증명이 필요합니까?”라고 말할 때조차 수영의 불안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도스토옙스키, 베케트, 조이스를 그리워하며 “노동 없는 곳에 존재하는 소설들이 내는 소리”(232)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소설은 더 이상 현실에서 실체를 갖지 않는다. 라이터 불빛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꺼지면 사라지는 소설들은 존재 증명 욕망의 덧없음과 불안정성을 상징한다.
그가 라이터를 켜면 그곳에 소설이 있었고, 그가 라이터를 끄면 소설은 사라졌다. 그는 반복해서 라이터를 켰다 껐다.
어둠 속, 축구장 크기만한 서점 안에, 수많은 발명품들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는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어디선가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이기호, 2024, 233)
이 마지막 장면은 라이터 불빛에 따라 소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청년의 존재 증명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은 주인공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할 유일한 매개이지만, 그것은 외부의 도구인 ‘라이터 불빛’에 의존해야만 드러날 수 있다. 또한 불빛이 꺼지는 순간 소설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은 창작 주체로서의 자아가 내적으로 단단히 구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꺼져버릴 수 있는 취약한 상태임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청년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그 증명의 순간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다.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한 채 잠시 빛날 수는 있어도 곧 사라지는 존재로, 이들의 삶은 라이터의 불빛처럼 깜박이다 꺼져간다.
이때 서점 안에 조용히 누워 있는 ‘수많은 발명품들’의 이미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들은 인간의 창조적 산물들이지만 주체의 실존을 보장하지 못한 채 폐허 속에 방치되어 있다. 기술적 발명품과 문학적 산물이 나란히 누워 있는 이 풍경은 창조의 결과물이 더 이상 인간의 존엄을 증명하지 못하는 세계를 드러낸다. 창작의 욕망이 상품화되지 못하면 덧없는 흔적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존재 증명은 곧 존재 박탈의 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모순이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주체는 자기 증명을 위해 창조하지만 그 창조 행위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체제의 외곽에서 ‘쓸모없음’의 징표로 남는다.
「수인」은 폐허가 된 세계에서 청년이 자신의 자리를 상실하는 과정을 통해 IMF 이후 청년들이 겪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낸다. 원전 폭발 이후 수영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갇힌 자’로 남겨지며, 폐가에서 글을 쓰고 터널에서 곡괭이질을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때 ‘소설을 쓴다’는 행위마저 체제 안에서 무가치하거나 죄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며, 그는 존재 증명의 통로를 상실한 채 기능적 자원으로 전락하거나 타자의 심사에 종속되는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이러한 감금과 고립의 박탈은 단순히 청년을 무력화시키는 폭력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언어적⋅신체적 자리에서 밀려날수록, 오히려 세계가 어떻게 폭력적 구조와 허구적 규칙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지를 더 선명하게 목격한다. 다시 말해 수영이 ‘박탈된’ 존재로 놓이는 순간은 그를 세계에 묶어두던 관습적 인식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상실은 세계가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치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요청을 드러내며, 청년의 박탈을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감각적 계기로 전환한다. 결국 「수인」의 박탈은 단순한 소멸의 서사가 아니라 관계적 윤리와 문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낳는 역설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소설이 여기 존재하는 것은, 이 세계가 소설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그것을 위해,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제사는 이 작품이 단순히 청년의 절망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세계’가 폭력적 구조와 재난의 논리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체계임을 선포한다(장 보드리야르, 2001)[5]. 「수인」의 서사는 현실의 허구성을 감추기 위해 구축된 질서를 드러내며 ‘세계로서의 소설’과 ‘소설로서의 세계’가 서로를 은폐하는 이중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구성 속에서 작가는 재현의 윤리 자체를 문제화하며, 청년의 존재 박탈이 단순한 개인적 실패가 아니라 세계의 구성 원리와 폭력적 질서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임을 폭로한다. 그리고 그 결과 작품은 무너진 관계와 언어의 자리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미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3. 인간-자원 쟁탈전과 침묵하는 신체의 파열
박형서의 「두유 전쟁」은 매일 머리에서 고농축 유분이 분비되는 청년 백수 ‘성범수’를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이 벌이는 자원 쟁탈전을 다룬다. 그의 머릿기름은 하루 이백만 배럴에 달해 2004년 기준 한국의 하루 석유 소비량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막대한 양이다.[6] 그러나 성범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지 못한 채 미군에 납치되어, 개인의 몸이 국가의 전략 자원으로 추락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다. 한국은 그를 확보해 ‘산유국’이 되기를 원하고, 미국은 ‘에너지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다. 이렇게 그의 신체는 더 이상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제국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원화된 몸’으로 변모한다.
본격적인 사건은 “실어증에 걸리고 지능까지 낮은”(256) 스물세 살의 성범수가 자취방에서 만화책을 읽다가 허기를 느끼고 라면을 끓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십대 초반 실어증에 걸려 단 한 마디의 말도 세상에 내뱉지 못한다. 말할 것을 요구받은 적도, 말할 것도 없는 그에게 언어는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 상실된 흔적에 가깝다. 따라서 그의 삶은 언어의 결핍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가 차단된 상태로 드러나며, 이는 IMF 이후 청년이 사회적 승인과 관계적 기반을 상실한 채 고립된 존재로 내몰리는 상황을 압축한다. 그가 납치되어 ‘두유 전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과정은 말할 수 없는 주체가 국가와 자본의 체계 속에서 오직 ‘소모 가능한 생명’으로 기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성범수는 ‘침묵’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다시 말해 자기 언어를 상실한 채 타인의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인물이다. 주체는 타자의 언어와 인정을 통해서 구성되지만, 그 인정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사회에서 주체를 둘러싼 언어는 억압의 장치로 전환되기도 한다. 성범수는 스스로 발화할 수 없는 존재이자 타인에 의해 과도하게 발화되는 존재, 즉 언어의 바깥에 있으면서 언어에 의해 완전히 포획된 주체이다. 그의 침묵은 결여가 아니라 폭력적 언어가 주체를 대신해 발화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는 박탈이 주체가 타자와 맺는 인식적⋅언어적 관계의 조건이 무너지는 사건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미국 국방장관의 ‘성범수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평생 에너지를 추출하겠다’는 계획은 인간을 기능적 자원으로 환원하는 신자유주의의 극단적 은유이다. IMF 이후 한국 사회가 청년들을 ‘유연한 인적 자원’으로 전유하며 경쟁과 효율의 언어로만 평가하던 현실은 이 소설 속에서 신체의 강제적 착취로 과장되어 나타난다.
국방장관은 계획을 다시 점검해 보았다. 동양인이 도착하면 일단 침대에 묶어놓고는, 뇌의 의식중추를 제거해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줄 셈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사실 몇 시간 전에 벼락처럼 떠올랐다. 볼썽사납게 침대에 묶어두느니, 움직이는 데 필요한 신체의 일부를 잘라주면 훨씬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해놓고는 질 낮은 싸구려 술만 잔뜩 먹여 간을 괴롭혀주면 녀석의 머릿가죽은 고농축 유분을 생산해낼 것이다. 확실히 그 노란 동양인 새끼는 식물인간이 어울렸다. 얌전히 화분에 갇혀 광합성이나 하며 죽을 때까지 미합중국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일부를 제공하는 것이 녀석이 본분이었다. 국방장관은 자신의 계획에 만족하여 미소를 지었다. 별로 미소를 지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박형서, 2007, 257-258).
이 장면은 기술적 폭력과 생명정치가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를 보여준다. 성범수의 신체는 더 이상 고통조차 표현할 수 없는 비정치적 몸으로 환원되고, ‘죽지 않는 노동력’으로서의 기능만 남는다. 살 수 있는 조건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사회에서, 어떤 존재들은 살아남을 권리 자체를 박탈당한다. 성범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생명을 유지하지만 그 삶은 타자에 의해 완전히 점유된 채 ‘살아 있음’ 자체가 소외된 상태로 존재한다.
성범수가 겪는 박탈은 생명정치적 폭력에 의한 절대적 상실처럼 보이지만, 『박탈』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침묵은 단순한 무력함이 아니라 말하기의 정치적 조건을 재사유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윤리적 관계의 출발점이다. 성범수의 신체가 국가와 제국에 의해 소유되고 재배치되는 과정은 그가 자기 존재를 완전한 ‘내 것’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세계와의 관계가 “소유”가 아니라 “노출과 취약성”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한다. 그러므로 결말의 폭발은 체제의 파괴라기보다, 주체를 오로지 자원으로만 ‘배치’하려 했던 세계가 그 ‘박탈’의 역설 속에서 붕괴하는 순간이며, 인간의 신체가 타자에게 열려 있는 관계적 존재라는 진실이 파열의 형태로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1944년 겨울, 베를린 슈프레 강 기슭에 위치한 티르가르텐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건물들은 산산조각이 났고 거대한 불기둥이 인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독일군 지휘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유능한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했다. 원인이 조금씩 드러났다. 「다중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인체에서 생성되는 고농축 유분에 관한 보고서」라는 제하의 서류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나치 최고위급 간부에게 전해졌다(박형서, 2007, 211).
이 소설의 도입부에 1944년 베를린의 나치 수용소 폭발이 배치된 것은 인간의 신체를 탈취하여 존재를 박탈하는 폭력의 역사적 연속성을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나치의 인체 실험과 21세기의 생명정치는 서로 맞닿아 있으며, 이것은 인간이 자원으로 관리되는 구조가 시대적 변이를 거쳐 반복됨을 보여준다. 이 역사적 병치로 인해 ‘두유 전쟁’은 풍자적 SF에 머무르지 않고 폭력과 자원 착취의 세계사적 알레고리로 격상된다. 박형서의 서사는 한 개인의 고통을 통해 제국주의적 권력과 신자유주의의 폭력, 그리고 인간을 자원으로 환원하는 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폭로한다.
또한 성범수를 납치하기 위한 작전명이 ‘자비와 환희’라는 사실은 인도주의적 언어가 폭력을 포장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드러낸다. 미군은 “이십대 초반의 한국 남성을 구출하여 그의 인권과 생명을 보호하는 자비를 베풀어 전 세계 지성인들에게 환희를 준다”(219)는 명분을 내세운다. 하지만 실제로 성범수 납치 행위는 타국 청년의 신체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기만적 언어는 ‘보호’와 ‘관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통제이며, 타자의 취약성을 관리하는 폭력의 한 사례이다. 이처럼 성범수의 몸은 인정이 아닌 지배의 구조 안에서만 가시화된다.
결말에서 성범수는 미국의 초음속 수송기에 실려 가던 중,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집요하게 ‘샌드위치’를 요구하다 폭발을 일으킨다. 그의 머리에서 분출된 유분이 불씨가 되어 수송기를 집어삼키고 미국의 국방장관을 비롯한 권력자들까지 불길에 휩쓸린다. 이 폭발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를 자원으로 전유해 온 제국주의적 체계가 스스로의 탐욕에 의해 붕괴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이 파괴는 해방의 도래라기보다는 관계와 의미의 조건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후의 소진에 가깝다.
성범수는 더 이상 타자에게 인정을 구할 수도, 스스로의 존재를 서술할 언어를 가질 수도 없다. 오직 폭력과 침묵 사이의 긴장에서, 그는 자신의 몸을 폭발의 매개로 내던진다. 이 ‘파열’은 언어가 무너진 주체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자, 세계와의 단절을 몸으로 표기하는 행위이다. 즉 결말의 폭발은 생존의 의지라기보다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존재가 세계에 남기는 마지막 자취이다.
발화 불가능성은 정치의 외부가 아니라 그 경계 자체를 드러낸다. 성범수의 침묵은 무력함의 증거가 아니라, 폭력적 체계 속에서 발화가 불가능해진 존재의 실존적 증언이다. 성범수를 빼앗긴 후 한국의 한 장성이 내뱉는 “너무 많은 사람이 다쳤고,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다”(252)는 독백은 단순한 체념의 언어가 아니라 폭력에 동조한 사회 전체의 공모를 폭로한다. 한 청년의 소멸은 국가와 체제가 모두 가담한 결과이며, 이는 IMF 이후 한국 청년이 스스로를 소모하면서도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구조를 연상시킨다. 「두유 전쟁」은 이처럼 무감각이 제도화된 사회를, ‘박탈된 삶’을 정상으로 둔 재난의 체계로 폭로한다.
따라서 작품의 마지막 폭발은 개인의 자기 증명이 아니라, 타자를 자원으로 환원한 문명 전체가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자가 소멸의 표지이다. 성범수의 붕괴는 실패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소비 대상으로만 다루어온 세계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급진적 진단이다. 그가 남긴 침묵과 파열의 이미지는 재난 이후의 세계에서 문학이 관계와 윤리를 새롭게 모색해야 할 이유와 방식을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Ⅲ. 존재 증명에서 존재 박탈로, 재난 속 청년 표상
이 글의 분석 대상인 세 작품은 IMF 이후 다중재난 속에서 청년들이 자신을 증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떻게 체제에 의해 좌절되거나 왜곡되는지를 보여준다. 김애란의 「종이 물고기」에서 주인공의 존재 증명 노력은 벽의 균열을 감추고 한 번 떨어진 다음에는 다시 잘 붙지 않는 포스트잇처럼 허약하다. 이기호의 「수인」에서 주인공은 창작자로서의 자아를 드러내려 하나, 사회는 그의 육체노동만을 인정하며 그를 기능적 노동력으로 전환한다. 박형서의 「두유 전쟁」에서 성범수는 자신의 욕망과 무관하게 ‘에너지 자원’으로 대상화되고, 그의 몸은 국가 간 전쟁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세 작품은 청년들이 존재를 증명하려 할수록 오히려 제도적 체계에 흡수되고 말소되는 과정을 그리며, ‘존재 증명’의 열망이 어떻게 ‘존재 박탈’의 정치로 귀결되는지를 포착한다.
세 작품의 결말은 대체로 정치적 희망이나 사회적 회복의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종이 물고기」의 집/방 붕괴 이후 포스트잇을 붙이려는 절박한 몸짓, 「수인의 반복되는 곡괭이질과 라이터 불빛 속에서 명멸하는 소설, 「두유 전쟁」의 폭발과 전멸은 모두 체제의 부정성과 재난의 불가피성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이 장면들을 문학의 효과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체제의 균열을 감지하고 이를 서사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정치적 함의가 잠재되어 있다. 청년들이 실패하는 장면은 단순한 절망의 표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특정 인간이 자원을 독점하고 타자를 소모해 온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청년들은 언어를 잃고 직업도 없고 관계의 장에서도 배제된 상태에 놓이지만, 그 부정성 속에서도 타자와 세계를 향한 미세한 감응을 지속한다.
이는 체제의 논리에 순응하거나 경쟁의 장에 편입되는 대신 그 밖에서 존재를 재사유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김홍중, 2015).[7] 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적 경쟁과 자기 계발의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을 거부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제도적 인정의 장 밖에서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자리에서 언어적⋅정동적으로 고립을 경험한다. 이것은 “진보와 성공의 논리를 거부함으로써 자발적 사회부적응자가 되고자”(소영현, 2012) 하는 청년 세대의 초상이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체제가 부여한 존재 조건을 거부하고 다른 형태의 관계를 모색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들의 침묵과 고립, 혹은 사라짐은 체제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존재의 다른 윤리, 곧 살아 있되 체제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삶을 향한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세 인물의 삶은 다중재난 속에서 청년들이 겪는 고통과 소진, 그리고 사회적 환원이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결과임을 드러내며, 문학이 그러한 시대적 고통을 감각하고 사유하는 장임을 확인시킨다.
이 세 작품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IMF 이후 한국 사회의 청년이 ‘자기 계발’의 주체로 호명되면서도, 삶의 토대 자체가 해체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의 붕괴, 가족의 단절, 노동의 불안정성, 공동체의 소멸 등은 청년들을 ‘관계적 박탈’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성의 서사를 통해 문학은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사유한다. 상처는 관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윤리적 응답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청년 주체가 처한 절망적 상황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자에게 드러난 ‘결여’ 속에서 인간의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관계의 복원을 요청한다. 문학은 박탈의 현장을 절망의 종착점이 아니라 공명하기 위한 감응의 출발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글은 청년 서사를 ‘존재 박탈’과 ‘관계 회복의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냄으로써, IMF 이후 청년들의 실존적 위기가 사회적 재난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변주되는지를 분석했다. 세 작품은 청년 세대의 고립과 소멸을 재현하는 동시에 언어⋅신체⋅노동⋅윤리의 경계에서 다시 관계를 상상하려는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이는 재난의 시대에도 문학이 타자와 세계를 연결하는 윤리적 사유의 장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향후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청년 범주 내부의 다양성과 교차성을 반영하여 확장할 필요가 있다. 특히 특성화고 학생이나 청소년 노동자, 지방대 학생 등 사회적 취약 조건 속에서 ‘박탈된 주체’로 살아가는 개별 청년 집단에 대한 서사적 형상화를 분석함으로써, 박탈 이후의 연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해야 할 것이다. IMF 이후 시작된 청년들의 존재 박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며, 이를 사유하는 문학적 언어는 곧 우리 사회가 관계를 복원하고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데 필수적인 통로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고영진(2011), 이기호 소설에 드러난 글쓰기 방법으로서의 환상과 윤리, 현대문학이론연구, 44, 현대문학이론학회, 157-178.
권경우(2016), 한국 청년세대 담론의 지형도, 교양학연구, 3, 다빈치미래교양연구소, 7-44.
김동식(2007), 소설적인 세계의 비(非)소설적 위장술: 이기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과사회, 20(1), 문학과지성사, 395-396.
김애란(2020), 종이 물고기, 달려라, 아비, 창비.
김태일⋅한경희(2008), 1990년대 말-2000년대 전반의 공무원과 민간기업 종사자의 직무 만족도 변화 비교, 한국행정학보, 42(3), 한국행정학회, 293-312.
김홍중(2015),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한국사회학, 49.1, 한국사회학회, 179-212.
노대원(2018), 소설 소설만이 소설을 안다 - 이기호와 박형서의 소설들, 문학들, 54, 심미안, 253-271.
박권주(2021), 김애란의 개정판 『달려라, 아비』에 나타난 무장소성과 헤테로토피아, 현대문학의 연구, 74, 한국문학연구학회, 519-555.
박성준(2019), 한국 청년 세대 담론의 변화(1990s⋅2000s), 글로컬창의문화연구, 8(1), 글로컬창의산업연구센터, 24-42.
박재규(2001),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노동자의 삶의 질 변화 한국의 사례, 한국사회학, 35(6), 한국사회학회, 79-104.
박형서(2007), 두유전쟁, 자정의 픽션, 문학과지성사.
서동진(2010),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해부학 혹은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문화과학, 61, 문화과학사, 37-54.
소영현(2012), 한국사회와 청년들 - ‘자기파괴적’ 체제비판 또는 배제된 자들과의 조우, 한국근대문학연구, 13.2, 한국근대문학회, 387-416.
이규일⋅이상우(2014), 환상 세계의 함정 주체적 사고의 몰수, 비평문학, 54, 한국비평문학회, 275-301.
이기호(2024), 수인(囚人),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동네.
이양숙(2016), 메트로폴리스의 시공간과 청년의 감정, 외국문학연구, 62,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91-116.
장미영(2014), 청년의 고립된 자아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김애란 소설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32, 한국여성문학학회, 331-361.
정의정(2024), 신자유주의 시대의 공포의 정동 : 강영숙・편혜영・하성란의 2000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사연구, 86, 민족문학사연구소, 455-484.
정홍수(2013), (이기호論) 이야기와 여백, 다시 태어나는 소설, 문학과사회, 26(3), 문학과지성사, 234-245.
조윤정(2021), 백수 청년을 둘러싼 감정 구조와 증오의 전복 - 2000년대 한국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영주어문, 49, 영주어문학회, 155-187.
진태원(2023), 다중재난 시대에 정의로운 전환을 모색하며, 황해문화, 120, 새얼문화재단, 2-19.
최성민(2012), ‘청년’ 개념과 청년 담론 서사의 변화 양상, 현대문학이론연구, 50, 현대문학이론학회, 227-248.
최성실(2006), 소설 저 먼 ‘새벽’ 혹은 ‘이후’의 표현성을 향한 질주- 박형서 소설집, 『자정의 픽션』, 문학과사회, 20(1), 문학과지성사, 397-399.
Baudrillard, Jean(2001), Simulacres et simulation, 하태환 역, 시뮬라시옹, 민음사.
Benjamin, Walte(2008),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조만영 역, 독일 비애극의 원천, 새물결.
Butler, Judith⋅Athanasiou, Athena(2016), Dispossession, 김응산 역, 박탈, 자음과모음.
우리나라 석유소비량은 얼마, 한국에너지신문, 2005.12.22., https://www.koenerg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67&utm_source=chatgpt.com, (검색일 2025.08.17.)
[1] 이 글은 2025년 8월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IMF 이후의 다중재난과 청년들의 존재 박탈과 『한국교육논총』 2025년 12월호에 수록된 「IMF 이후의 다중재난과 청년들의 존재 박탈- 김애란, 이기호, 박형서의 소설과 문학교육의 가능성」을 수정한 것이다.
[2] 김애란의 「종이 물고기」는 2004년, 이기호의 「수인(囚人)」은 2005년, 박형서의 「두유 전쟁」은 2004년에 발표되었으나, 이 글의 인용 정보는 각 작품이 수록된 최근 단행본의 발행 연도를 따라 작성할 예정이다.
[3] IMF 외환위기 이후 민간기업의 고용안정성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2001년 이후에는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영향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신자유주의에 따른 경제체제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공무원 보수 현실화 계획을 시행하면서 IMF 이후 공무원은 안정성과 보수 면에서 민간기업보다 직무 만족도가 높게 나타나고, 이러한 결과는 취준생들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4]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일반적 용법에서 나아가 ‘알레고리(Allegory)’를 역사적 파편 속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사유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벤야민에게 알레고리는 자족적인 완결성을 지니는 ‘상징(Symbol)’과 달리 현실의 균열과 모순을 직접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둔다. 그는 알레고리를 폐허, 죽음, 파편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레고리는 조화롭고 완결된 것이 아닌, 시대의 폭력과 무상함 속에서 부서지고 해체된 사물과 존재들을 통해 역사의 비극적 진실을 폭로하는 비판적 힘을 지닌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 재난을 알레고리로 형상화하면, 단일 사건을 넘어 역사적 맥락을 드러낼 수 있다. 세 작품 속에는 정치적⋅경제적⋅물리적⋅기술적⋅시스템적 다중재난이 등장하고, 이것들은 모두 한국 청년의 생존 조건과 존재 기반이 박탈되는 중층 구조를 집약적으로 폭로한다. 재난의 알레고리는 IMF 이후의 한국 사회가 겪은 구조적 불안, 자원 착취, 주체의 기능화와 소멸 등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5]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세계가 시뮬라크르임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 같은 환상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6] 우리나라 석유소비량은 얼마, 한국에너지신문, 2005.12.22., https://www.koenerg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67&utm_source=chatgpt.com, (검색일 2025.08.17.) 박형서의 「두유 전쟁」이 발표된 2004년 한국의 일일 석유 소비량은 228만 배럴이다. 이 수치를 참고하면 성범수의 머릿기름으로 한국은 전체 석유 소비량의 대부분을 충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7]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김홍중이 말한 ‘탈존주의’적 주체로 읽힌다. 김홍중은 ‘생존주의’와 ‘공존주의’, ‘독존주의’를 넘어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 곧 사라짐을 꿈꾸는 마음의 지향”으로서 ‘탈존주의’를 설명한다.
'인-무브 Writing > 인-무브 서교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도네시아 투쟁에서 발견한 저항과 연대의 방식 (0) | 2025.09.09 |
|---|---|
| 커먼즈의 이론적 지형 (4) | 2025.07.17 |
| 돌봄의 정치: 무엇을 돌볼 것인가? (0) | 2025.05.15 |
| 인공권력, 인간권력, 자본권력: 민주주의 자동화 시대, 'AI 대전환'? (0) | 2025.05.15 |
| 개신교인은 왜 극우가 되었는가: 애국청년들의 서사에서 보는 극우화의 감정과 사회심리 (0) | 2025.02.21 |
| 서교인문사회연구실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 (2024.06.08 기준) (0) | 2025.01.30 |
| 커먼즈와 사회 전환 (0) | 2025.01.16 |
| 교차성 개념을 통해 바라본 이주노동자 속헹씨 산재사망 사건 (0) | 2024.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