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이성> 서문 해제
글쓴이: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포퓰리즘 이성>의 서문을 문단 별로 풀어서 해설한 글입니다. 관련해서 3월 20일(금)부터 서교연에서 <포퓰리즘 이성> 강독 강좌(온라인)가 시작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의 신청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forms.gle/f2sJQLLJn8Xv9vP19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쟁점은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본질과 논리다. 전체적으로 내 접근법은 어떤 사회학적 관점에 대한 기본적인 불만족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사회 분석의 기본 단위로 집단(group)을 고려하거나, 더욱 확장된 기능주의 또는 구조주의의 패러다임 안에 집단을 위치시킴으로써 그 집단을 초월해 버리는 관점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사회적 활동 유형이 전제로 내세우는 논리들은 너무 단순하고 균일해서 정체성 구성과 관련한 다양한 운동을 포착할 수 없다. 말할 필요 없이, 합리적 선택을 포함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내가 문제를 제기하는 여러 패러다임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6)
책의 첫 문장이 말하는 것처럼 이 책은 집합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ies) 형성의 본질과 논리를 다룬다. 라클라우는 집단이라는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학적 분석이 집합적 정체성 형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기존의 사회학적 관점은 집단을 개인들이 모인 결과(방법론적 개인주의), 사회적 안정과 통합과 같은 특정한 기능을 하기 위해 모인 결과(기능주의), 객관적인 구조적 위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인 결과(구조주의) 등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라클라우는 집단 형성을 집합적 정체성, 즉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집합적으로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쫓은 경로는 두 갈래다. 한 갈래는 집단이라는 통일체를 우리가 요구(demands)라고 부르는 더 작은 통일체들로 나누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집단이라는 통일체는 요구들의 접합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러나 이 접합은 통일된 전체로 파악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실정적인 배열(configuration)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기성 질서에 주장(claim)을 제기하려는 모든 요구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접합은 기성 질서에 내부와 외부에 존재하면서 기성 질서와 특이한 관계에 있다. 기성 질서는 요구를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일관된 총체성으로 구성하지 못한다. 하지만 요구가 ‘시스템에 하나의 주장으로 기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통해 결정화되고 있다면, 이 요구는 총체화되어야 한다. 즉 모호하고 모순적인 이 운동은 차이 논리와 등가 논리 사이에서 다양한 접합 형태에 이르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을 4장에서 논의할 것이다.”(7)
라클라우는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 논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집단이 아니라 요구(demands)라는 최소 단위로부터 분석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집단은 요구들이 접합(articulation)된 결과다. 접합 개념은 요구들 사이의 결합이 우연적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접합은 “통일된 전체로 파악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실정적인 배열”에 상응하지 않는다. 요구는 먼저 결정 권한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상위 심급에 대한 요청(request)의 형태로 제시된다. 행정기관에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요청은 기존의 질서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성 질서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요청을 수용할 수 없다. 따라서 거절된 요청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기성 질서가 불완전하다는 증거이자, 그러한 질서가 흔들리게 되는 씨앗이 된다. 만약 거절된 요청들이 특정한 계기에 접합되면서 기성 질서 자체에 대한 주장(claim)으로 전환된다면 기성 질서의 정당성은 위기에 빠진다. 집합적 정체성은 바로 이 요청이 주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방식은 요구들이 접합되는 방식에 대한 두 가지 논리인 차이 논리(logic of difference)와 등가 논리(logic of equivalence)에 달려 있다.
“4장에서 주장하듯이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에 사회구성체의 통일성을 고정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통일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명명(naming, 이름 붙이기)이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동시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합하기 위한 사회적 접착력의 필요성은 이 요소들의 (기능주의적이거나 구조주의적인) 접합 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면, 곧 바로 정동(affect)이라는 접착력에 중심성을 부여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적 유대는 곧 리비도적 유대다. 내 연구는 4장에서 정교하게 다룬 차이와 등가 논리, 비어 있는 기표, 헤게모니와 같은 범주들을 더 넓은 정치 현상으로 확장함으로써 완성된다. 따라서 나는 5장에서 떠다니는 기표와 사회적 이질성 개념을, 6장에서 대표(representation)와 민주주의 개념을 논할 것이다.”(7)
라클라우는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이 구조적 결정과 합리적 선택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논리를 갖는다고 본다. 요구들이 ‘사회적 접착력’을 갖기 위해서는, 즉 통일체를 이룰 정도로 충분히 접합되기 위해서는 명명(naming)과 정동(affect)과 같은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명명은 개념화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대상에 행하는 부차적이고 임시적인 일로 여겨져 왔으나, 라클라우는 명명이 집합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에서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떤 이름으로 묶이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또한, 정동은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왜 리더와 같은 상징적 존재나 특정한 기표에 끌리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사회적 유대는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선택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리비도적 유대라고 보았다. 라클라우는 이 프로이트의 테제를 사회정치 분석 일반에 확장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이 쟁점들을 다루는가? 그 이유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심, 즉 포퓰리즘을 기각하는 과정에는 주변 현상들을 사회적 설명의 가장자리로 격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러한 경멸적 거부 반응은 분명히 정치에 대한 기각이며, 공동체 관리를 행정 권력에 관심사로 단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행정 권력이 지닌 정당성의 원천은 ‘선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적절한 지식이다. 수 세기에 걸쳐 이 지식은 플라톤이 처음 도입했던 ‘정치철학’의 담론이었다. ‘포퓰리즘’은 항상 위험한 과잉과 연결되었으며, 이 과잉은 합리적 공동체라는 명확한 틀에 의문을 제기했다. 내가 구상한 것처럼, 나의 임무는 이 과잉에 내재한 특정한 논리들을 밝히고 (이것을 주변 현상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태도와 달리) 모든 공동체주의적 공간이 실제로 작동하는 과정에 이 논리들이 기입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8)
라클라우는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본질과 논리를 포퓰리즘이라는 화두를 통해 다룬다. 이는 포퓰리즘을 일시적이고 병리적인 현상으로 기각해 왔던 관행이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본질과 논리를 체계적으로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라클라우가 보기에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합 정체성이 형성되는 핵심적인 논리 중 하나이다. 포퓰리즘을 거부하는 것은 곧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며, 행정 권력이나 지식인들만이 통치할 권한이 있다고 보는 반(反)민주적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정치철학은 민주주의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 동시에 끊임없이 인민의 통치를 어떻게 제한할 것인지를 고민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인민은 통치에 적합한 지식을 갖지 못하거나, 감정에 휩쓸려 우매한 선택을 하는 존재로 여겨지곤 했다. 이것이 인민주권을 주장하는 포퓰리즘이 항상 ‘위험한 과잉’과 연결되는 이유이다. 이와 달리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의 논리, 즉 포퓰리즘 이성(populist reason)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결코 제거될 수 없는 혹은 제거되지 않아야 하는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본질과 논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는 ‘군중’에 관한 이러한 특징들이 집단심리학에 대한 19세기 논의들에서 어떻게 점진적으로 내재화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이 특징들은 처음에는 (예를 들어 이폴리트 텐(Hippolyte Taine)의 작업이 보여주듯이) 동화될 수 없는 과잉으로 보였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이 보여준 것처럼, 이 특징들은 모든 사회적 정체성의 구성 과정에 고유한 것이다. 나는 1부에서 이것을 해 보고자 한다. 7장은 인민적 정체성(popular identity)의 출현 조건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을 다루고, 7장은 인민적 정체성의 구성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계를 살필 것이다.”(9)
포퓰리즘을 ‘위험한 과잉’으로 여기는 판단의 기저에는 대중(mass) 혹은 군중(crowd)에 대한 비하(denigration)가 존재한다. 포퓰리즘이 위험한 현상인 이유는 대중과 군중이 개인과 달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위험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프로이트의 집단 심리학에서 찾는다. 프로이트는 “처음부터 개인심리학은 (중략) 동시에 사회심리학이기도”(92) 하다고 이야기하면서 개인심리학과 사회심리학이 사회적 유대의 서로 다른 측면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이로부터 대중/군중에게서 드러나는 것으로 여겨졌던 예외적이고 병리적인 특징들은 모든 사회적 정체성의 구성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포퓰리즘이 예외적이고 병리적인 현상으로 기각할 수 없는 집합적 정체성 형성의 핵심적인 논리라는 라클라우의 주장으로 연결된다.
“이런 개입의 결과 중 하나는 ‘포퓰리즘’의 지시 대상이 흐려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포퓰리즘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많은 현상이 우리 분석에서는 포퓰리즘의 우산 밑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접근 방식에 대한 비판이 가능한데, 이 비판에 대해 나는 사회 분석에서 ‘포퓰리즘’의 지시 대상은 언제나 애매모호했다고만 대답할 수 있다. 1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포퓰리즘에 관한 문헌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 문헌들은 개념의 소멸과 그 한계의 부정확성에 대한 준거들로 가득 차 있다. 내 시도는 포퓰리즘의 정확한 지시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를 수행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범위 설정이 가능한 현상에서가 아니라 많은 현상을 가로지르는 사회적 논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아무런 지시적 통일체가 없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나의 시도다. 간단히 말하면, 포퓰리즘이란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법이다.”(10)
<포퓰리즘 이성>은 포퓰리즘이라는 현상을 정의(definition)하려 하기보다는 그러한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포퓰리즘이 다양한 현상들을 가로지르는 사회적 논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포퓰리즘은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집합적 정체성이 구성되는 핵심적인 논리이다.
참고문헌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2026. 『포퓰리즘 이성』. 이승원 옮김. 빨간소금. 6~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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