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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영(影)의 역사_자기애의 배리어

by 인-무브 2026. 4. 21.

영(影)의 역사_자기애의 배리어

 

수차미

 

한국예술종합학교 블로그에 올라온 영상이론과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보았다를 읽었다. 영상이론과 학생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이 기획은 소위 말하는 영잘알에 대한 생각과 부합하는 점이 있어 보였다. 이를테면 이렇다. 흔히들 업계 종사자라 하면, 무언가 해당 분야에 대한 이미지를 덧입혀 생각하게 되고는 한다. 그래서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의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섣불리 말하기가 어렵게 된다. 영화를 업으로 삼은 사람은 무언가 다른 의견을 내줄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단순히 호기심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수를 기대한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만도 같다. 여기서 떠올린 건 영화가 고백의 장치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미셸 푸코는 초기 기독교에 존재하지 않던 고해성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탐구하면서, “권력이 곧 고백을 듣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한국 사극에서도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등을 떠올려볼 수 있는데, 이를 따른다면 업계인들에게 최애 영화를 묻는 일도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 리스트를 작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를 묻는 쪽이 권력자이며, 평론가나 감독, 학계 사람 등은 영화를 향유하는 소비층에게 지식을 헌납하는 봉사자에 가깝다. 그러니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질문받았을 때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리를 옮겨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연애를 할 때는 대개 고백을 받는 쪽이 더 연애권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에 물을 때 최애 영화를 꼽는 일은 영화쪽이 더 권력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 대한 감정이 숭배이든 아니면 존경이든 간에 업계인들에게 영화는 삶의 높은 곳에 있다. 이런 구도가 영화를 분석할 때 이를 신화화하거나 숭고히 여기는 감정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고백하는 건 자신이 무엇을 믿고 따르는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 특정한 영화를 제시하는 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일과 같아서, 어느 정도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권력관계는 우리에게 영화에 대한 믿음으로서 주어진다. 영화를 믿는 이들에게 믿음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역할도 있다. 업계인에게 이 물음은 소비층에게 지식을 헌납하는 일이면서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기에 어려운 과제가 된다. 같은 뜻에서 매년 업계인의 목록을 작성해서 공유하는 일은 지금 사람들이 어떤 현안에 끌리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별다른 미래와 앞날이 보이지 않는 순간들에서 그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업계인이 소비층에 봉사하는 위치라고 보면, 이들은 자신의 취향을 온전히 드러낼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자신만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다. 영화는 일종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니까 이들이 먼저 나서 그걸 보여주어야 한다. 

 

업계인이 일종의 고백을 하게 되는 자리가 목록이라면 여기서 영화는 살기 힘든 세상이다. 살만한 세계가 살기 힘든 세계의 의식 속에서 구성된다고 가정할 때, ‘살만한 세상을 제안하기 위해 자신을 소비자에 헌납하는 게 이들의 책무이다. 그래서 개인의 취향을 고백하는 자리는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진단, 해결책까지 고루 묻는 시험장과도 같다. 이 세계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지,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으며 또한 정의롭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고백하는 게 바로 이들 시네필의 고해성사다. 즉 영화가 왜 우리가 살 수 없는 곳인지를 증명해내는 게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런 뜻에서 영화를 선택해야 할 때 손이 닿는 건 아무런 변화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작품이 되는 경우가 잦다. 무언가 더 이야기를 꺼낼 만한 작품이 담론을 만들기에는 더 좋겠지만, 반대로 뭔가를 더 첨언하기에 어려운 것이야말로 사유 자체로서 다뤄질 수 있다.  순간들에 대한 진단이 우선한 뒤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 질문이 도착한 셈이다. 사안으로 다뤄야 할 작품이 있는 한편, 순수하게 시네필로서 다루게 되는 작품도 있다. 이 묘한 균형에서 서로가 일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더 많을 텐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후자를 배신하는 선택을 한다. 이는 자신보다 상대를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향에 대해 질문받는 자리에서 온전히 자기만을 택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자체로만 주어진 것을 타인과 나눌 수는 없다. ‘영화에 가까울수록 이를 언어로 설명하기는 힘들어지므로 나눌 수 없는 여분으로만 남는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가 목록으로 나열된 것들에서 무언가 설명이나 이유를 찾는 것도 우스운 일인 것이다. 이 목록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 지목된 게 아니라, 세계에 출현해 와 타인에게 이유를 만들어준다. 어떤 경우 영화는 자신이 소화할 수 있어 삶에 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몸에 녹아들지 않기에 계속해서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어떠한 목록을 작성하는 행위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질문을 가끔 받는다. 일상에서 작은 대화 소재로 참조되는 이야기지만 그때마다 어떤 영화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상대와 무난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작품일까, 아니면 영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일까. 공적인 자리에서 그만한 말을 해야 한다면 확실히 사적인 감정을 꺼내기는 어렵다. 특히 무언가를 평가하는 자리(가령 심사위원)의 경우,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하더라도 얼추 눈치는 봐야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지 않는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면 아니다라고 답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왓챠피디아와 같은 평가 사이트를 보면 유명 평론가의 별점이 등장한 후에 자신의 평점을 수정하는 등, 어느 정도 입장을 바꾸는 일이 꽤 흔하다. 

 

영화를 특정한 순간에 붙들어두는 일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면 그와 같은 순간을 특정하는 일이 이를 통해 다른 행위를 진술하거나, 언어를 창출해내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정도랄까. 어떤 목록을 꼽는 일은, 그에 속한 영화가 아니라 이를 기념하는 쪽에 더 의의가 있다. 살기 힘든 세상을 지목하는 일은, 자신이 그곳에 다시 돌아가기 힘들다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우리 세상이 왜 이들을 품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의무를 지운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이해가 통과하지 못할 만큼 완고한 영화를 있는 그대로 막아두기 위해 만들어둔 게 바로 목록이다. 이러한 뜻에서 한 영화를 꼽는 건 자신이 무엇에 대항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자신이 영화를 지속하는 힘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생각을 마친 후가 아니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을 타인과 나누는 게 이러한 호명의 참된 의미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모두와 나누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기보다, 왜 영화가 우리의 앞을 막아서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선언은 이렇게 막힌 말문들에서 어떤 목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지를 자문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에게 부름을 받았든 아니면 그렇지 않든 간에 영화는 자신을 지속하고 있다. 이 영화는 우리 자신이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못다한 말들에 앞서 존재하는 판단이다. 즉 우리가 어떤 영화를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런 영화들을 발판 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가령 어느 시네필이 꼽았다고 하는 목록을 보면 경향성이 느껴지고는 하는데, 이는 애초에 특정인물에게 선별임무를 맡겼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누군가를 선별했다면 목록이 아니라 의 존재감이 앞으로 나오는 터라, 독자가 보는 건 평가자가 말하는 영화이지 영화가 말하는 평가자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는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만남이나, 다른 것들의 사이에 얽혀 등장해온다. 이런 맥락이 거세되지 않으려면 결국 다른 잡다한 것들을 안에 채워넣거나 아니면 자신이 빠져나온 채로 만들어진 공산품을 손에 쥘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따금 특정한 목록을 꼽거나, 영화를 선별하는 일은 영화 자체를 다루기보다 더 큰 무언가로 통하는 입구를 두는 일처럼 느껴진다. 한 단어나 문장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그리고자 한다면, 이는 일종의 포착(Shot)’에 가깝다. 그리고 영화를 선별하는 체계도 어떠한 순간에 기대므로 평가자는 자신이 그걸 외부에 두는 것만으로도 더 많은 의미와 서사를 엮을 수 있다. 즉 같은 수준의 언급이라도 더 많은 의미의 심도를 가져다줄 수 있다. 여럿이서 각자의 목록을 고백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Sin)의 의미가 원초적 세계와의 단절을 뜻한다면, 우리는 각자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추방 이후의 낙원에 다시금 들어서게 된다. 

 

 

**이 글에서 언급된 원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karts_/224234298294

 

영상이론과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어보았다.

안녕하세요. 예종지기 8기 나은입니다. 한예종 영상이론과(Cinema Studies)는 영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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