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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배우는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by 인-무브 2026. 3. 8.

배우는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수차미

 

 

만약 세상에서 인류가 멸망한다면, 우리는 이를 희망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낸 건 얼마 전 이종범 작가의 유튜브에서 <기생수> 설명회 영상을 본 덕이다.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일부임을 말하는 이 작품에서 ‘종말’은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자연의 세계로 바라보아진다. 우리가 인간종이기에 인류의 멸망이 곧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지만, 인류가 없어도 세상은 그저 계속될 뿐이다. <아인>이나 <플루토>처럼 인외가 나오는 작품과는 달리, <기생수>는 인간을 잡아먹는 생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놓았다. 우리가 생태계의 최상위에 서 있기에 잠시 잊고 있었던 ‘자연’을 말이다. 인간이 자연을 개간해서 사용하고 있으므로 자연은 인간 종에 복속한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자연’에 인간이 속한다. 이는 배우가 무대 없이 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결국 어떠한 고리 안에 속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영역’이다. <주술회전: 사멸회유>의 등장인물인 젠인 나오야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있는가”라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 인간들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울 때, 죽고 죽이는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마음을 지켜내기 위한 것으로 요약된다. 가령 작품의 최종보스인 스쿠나와의 결전은 저주의 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모든 인간이 하나의 고리에 속한다면, 이를 풀지 않은 채로 엮을 수만 있다면, 세상은 생각보다 꽤 아름다울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논해볼 수 있는 여러 사실이 있지만 우선은 서부극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할리우드 고전 시기에서 현대영화로의 진입점에서 서부극은 ‘인간’을 등지는 것으로 끝나고는 했다. 흔히들 방랑자로 불리는 존재들이 어느 날 마을에 찾아와 악을 무찌르며 다시 떠나가는 서사였는데, 이는 큰 틀에서 볼 때 ‘영화’라는 존재에 대한 신화적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위 방랑자는 여기저기 유랑하는 존재이기에 고유의 영역도 계속해서 변화하는데, 중요한 건 이 영역을 타인에 겹칠 때다. 이들 영화에서 사람들이 모인 마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인격처럼 묘사되며 이는 곧 마을 ‘공동체’를 가리킨다. 달리 말한다면 방랑객이 마을에 출몰하는 일은 일종의 영역대결인 셈인데 여기서 그가 잠시나마 동화되는 것이 사건의 첫 번째 전개다. 그러니까 마을이 자연을 개간하며 이겨내는 형태로서 ‘복속’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면, 방랑자는 자연에 동화돼 서로 영역을 겹치는 존재다. 전자가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라면 후자는 배우라고나 할까. 배우는 극 안에서 특정한 플롯을 따라가지만 적어도 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은 관객으로서 무언가 이야기를 스스로 파악하고 해석하려 들지만, 오히려 무대의 환상에 무기력하게 빠져들어야만 하는 위치다. 이 세계에 빠져들기보다 다시금 현실에 귀환해야만 하기에 ‘관객’은 항상 자연의 바깥에 선다.

 

자연의 바깥에 현실이 있다. 이 안에서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단위로 살아간다. 집단은 ‘관객성’이나 ‘대중’처럼 특정한 속성을 토대로 이해되는데 이런 영역은 서로 간에 막연한 겹침만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어 대립하는 일을 낳기도 한다. 이 일에서는 차라리 집단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이미 특정한 이해관계들이 엮인 집단에 해당한다. 관객을 말하려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말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 사람들이 나고 자란 곳은 결국 어느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몸을 움직이며 살아가는 장소다. 의식은 한 개인이 바라보며 인식하는 공간을 가리키지만 반대로 영역이란 활동의 무대가 되는 것으로, 지구촌 시대라면 남극처럼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곳이 가능하다. 오늘날 프랑스나 미국 정도는 비행기표나 나선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쉽게 선택할 수 있고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부터가 그런 자유를 방증한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돼있다면 중세 서양의 농노들처럼 거주지 이전이 자유롭지 않고, 그로 인해 세계관 또한 ‘신’(혹은 왕)과 ‘나’로만 나뉘었을 테다. 이는 곧 관객이 영화를 개간하며 정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이를 피해 살아갈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무대에 오른 자로서 ‘배우’이며, 그렇기에 연기를 중단할 수 없다. 연기를 중단하는 순간은 곧 이 세계가 끝나기 때문이다.

 

세계의 종말을 피하려는 일은 본격적으로 세계의 법칙이나 가능성을 따르는 게 아니다. 영화에 산다는 건 자연을 산다는 것과 같아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도리어 어디까지를 연기할 것인지와 같은 ‘무대’에 속하는 일이 중요한 역할로서 다뤄진다. 무대를 인식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생각해보는 일이 영화의 밖에 서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이 안에서 우리가 배우는 건 상대를 안는 게 아니라 세계를 분단하는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무대’의 속성은 주체로 하여금 그와 같은 세계 바깥을 의식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무엇을 삼킬 것인지가 아니라 어디까지를 ‘나’로 규정하지 않을 것인지를 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개 자아에 관해서는 타자를 인식함으로써 그에 대한 상대성으로 자기를 규정하게 된다는 점이 잘 알려졌다. 여기서는 흔히 주체의 구성을 먼저 보게 되는 감이 있지만 반대로 무언가를 하나둘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것은 우리가 아니다. 이런 경우 주체가 하는 생각은 그가 집단에 위협이 될지 아니면 우호적일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 대상을 바라볼 때는 그것이 현실에 어떻게 등장해왔는지를 묻는 일이 우선할 뿐 전체를 부정하는 게 최종적인 결론이 되지는 않는다. 간단히 생각하면 사람의 얼굴도 각자 다양하고 이상하게 구성됐지만 멀리서 놓고 보면 큰 틀에서의 ‘얼굴’로 비쳐진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려는 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초! 가구야 공주>의 결말이다. 웹서핑을 하던 도중 작품이 츠쿠요미와 같은 가상공간을 다루면서도 이게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 아님을 묘사한다는 지적을 보았다. 말 그대로 이 작품은 현실과 가상을 서로 나누어 바라보지 않으며, 그렇기에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는 일은 무언가 자아를 실현하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로하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버인 야치요가 그곳에 있기에, 자연스레 현장이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된 것뿐이다. 이 서술이 흥미롭게 다가온 건 ‘네트’의 방대함을 정체성의 확대와 자아의 고립 등에 엮던 서브컬처 장르의 작법과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어서다. 이미 네트워크가 보급된 세상에서 태어난 인간들이 만든 작품에서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고민이 없다. 왜냐하면 그 현장은 여기저기 오가거나 서로 다른 세계라던가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잠시 들렀다가 나오며 방문하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니터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경로 중 하나로서, 어떤 골목을 택해 멀리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정도의 의식이 여기에 있다. 과거의 네트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서 일종의 황무지(자연)에 빗대어졌다면 오늘날 네트는 많은 면에서 현실과 다르지만 적어도 ‘나’를 밀어내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포함해서 하나의 얼굴을 구성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현실과 네트에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정했던 건, 영화의 밖에 서지 않기 위해 배웠던 ‘분단’의 결과였던 게 아닐까. 과거에는 현실이 신체로서 감금의 지위를 가졌다. 가상공간에서의 활동은 네트에 구성된 몸을 현실의 외연에 동일시했다. 현실이 무언가 특정한 영역 안에서 활보한다는 점에서 ‘네트’는 마치 무대에 올라온 배우가 특정한 배역을 ‘운반’하고 또 ‘접속’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 안에서 현실은 자신에 다가올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오매불망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반대로 ‘네트’가 현실에 존속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와 같은 의문이 남는다. 달에서 지구로 돌아온 가구야는 자신이 타고 온 운반체가 고장 나 현실에 유기물로 현현하지 못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택한 건 츠쿠요미라는 평행우주다. 전개에 따르면 츠쿠요미는 지구에 불시착한 가구야갸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므로 ‘지구’에 후행하는 곳이지만, 사념체인 그가 외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구와는 서로 다른 곳으로 분리된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한 세계의 어느 곳에 자리하는 걸까. 이곳을 현실의 안에 둘지 아니면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을 구현하는 가공의 영역으로 볼지에 따라 생각은 달라진다. 여기서 지지해보려는 건 이게 결국 지평선의 문제에 속한다는 점이다. 이로하가 츠쿠요미에서 라이버로 활동하는 일은 현실에서는 그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는 인간관계의 끈이 그 공간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자연은 그저 현실에 불과하다.

 

 

**이 글에서 언급된 원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youtube.com/watch?v=2FIA0NKbO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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