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지금이 아닌 곳에 가고 싶다
수차미

KMDB에 올라온 “너무 많이 매혹된 죄, 불가항력의 불안을 마주하는 시간”을 읽었다. 송경원 평론가가 쓴 이 글이 눈에 들어온 건 예전에 그가 씨네21의 편집장 인사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당시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등이 겹쳐 시기상의 이유로 지면에 다루지 못했다”고 적었는데, KMDB에 올라온 글은 그 점을 정확히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 못한 말은 분명 마음에 맴돌기 마련이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해소하고 싶은 게 모든 관객들의 바람일 테다. 생각해보면 그러한 욕구에 관해서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불만족스럽게 경험했던 것들은 어른이 되어서 무언가를 소비하며 행동하게 하는 동인이 된다고 말이다. 가령 어려서 형제의 신발을 물려받는 식으로 낡은 운동화를 신어야만 했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 신발 수집 취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정신분석이 말하는 것처럼 억압된 욕구가 왜곡된다면, 우리가 성인이 되어 갖는 취미는 억압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까? 또한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돌아온 ‘욕구’는 원본에 비해 상당히 변형된 상태인 걸까?
이 생각은 의도에 상관없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남긴다. 우리의 마음에 남은 건 있는 그대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적인 여과를 거치고 나면 추억은 어떤 쪽으로든 왜곡된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하는 도중에는 감정이 실시간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난 후에는 결과값이 이전의 총량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감상할 때도 그것을 ‘본다’고 말하는 일은 ‘보았다’는 말과 서로 다르게 호칭돼야 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 자기만의 경험으로 변형된다. 나만이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와 섞여 만들어진 무엇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무언가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를 보는 자신과 그걸 보고 난 후의 자신은 서로 다른다. 마치 터널을 통과하고 난 뒤에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듯 단지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바뀐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어떤 방향이든 관계없이 그저 ‘바뀌었으면 좋겠다’거나 어떻게든 지금이 아닌 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이런 생각의 저변에 깔려 있다.
생각해보면 그런 작품들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으레 남들이 즐겨보는 영화라면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해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정주행해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취향에 들어맞는 때는 잘 없다. 오히려 이렇게나 맞지 않을 수가 있나 싶은지를 고민해볼 때가 더 많다. 이를테면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를 볼 때면 무언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꼭 세계에 남아야만 하는 이들의 선택을 고려해본 적이 없는 탓이다.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고 느끼면, 대개 세상이 종말에 가깝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다른 어딘가로 무작정 떠나거나 하는 식의 가정이 있을 텐데 처음부터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느끼면 더 이야기를 이어가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이다. 만약 영화를 보는 이유가 어느 쪽으로든 상당히 변형된 자기를 받아들고 싶다는 마음에 귀인한다면, 영화 자신과 관객 일반이 서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일은 무언가 나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에 감정이입을 한다는 점에서, 한 작품을 평가하는 일에서는 각각의 완성도보다는 개인의 취향이 더 앞서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면 섞이지 않는 쪽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가깝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는 영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라도 이를 술식으로 구성해보려고 한다. 단순히 이유가 없다고 말하기에는 있는 그대로를 문자로 적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언어화 이전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좋다’와 ‘싫다’는 사실 그걸 감정으로 먼저 느낀 후에 나머지 과정을 풀어내려는 쪽에 가까워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후천적으로 호감을 발명한다고나 할까. 이런 점에서 오늘날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서비스에서 자신이 작품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밝히는 일은 자신의 취향을 홍보하는 것이기보다 의도적인 자기 지지의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을수록, 상당히 변형된 채로의 자기를 긍정할 점이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글을 남기는 감상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시네필 문화와 의도적으로 분리하려는 태도를 유지하지만, 적어도 유동성이 증가하는 상태에서 이를 고정해보려는 시도만큼은 긍정할 만하다.
인터넷 공간을 보면 한 문화에 대한 담론이 얼마나 넘실대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총량이 작더라도 알고리즘 등이 이용자 개인단에 응집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특정 담론이 유동적으로 넘실대는 결과를 낳는다. 한 화제가 대두하면 피드 전체가 해당 내용으로 가득 차는 일이 흔하다. 그러다가 다른 화제를 발견해 우연히 좋아요를 누르면, 하나 둘씩 관련 콘텐츠가 들어서다가 끝내는 해당 화제로 피드가 완전히 전환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증가하는 유동성은 실물 자산에 대한 애호를 형성, 타인의 경험과 감상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콘텐츠를 보고 들으며 경험하려는 행위 동인을 유발한다. 앞서 욕구가 상당히 변형된 채로 등장해온다고 가정했을 때 이 변형이 오히려 수용자가 직접 자신의 ‘변성’에 나서는 일을 촉구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실물 자산에 대한 수요가 폭등함에 따라 간접경험보다는 직접경험이 더 우위에 서는데, 가령 지난해 한국에서 <체인소맨: 레제편> 열풍은 어느 정도 그렇게 이해되는 감이 있다. 극장에 가서 작품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욕망을 고정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한 문화의 유동성이 증가할 때, 이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은 간접경험보다 직접경험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단순히 다른 사람이 하는 대화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더 늦지 않을 때에 적절한 온기의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이 행동의 주요 동인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작품에 대한 관람경험은 문자 등의 형태로 더 오랜 기간을 두고 ‘기록’해서 ‘보존’하는 일에 중점을 두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문화자산의 양적 증대에 대응하는 속공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작품 하나를 보고 나서 곧바로 감정을 적는 일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정석적으로 보면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사전 조사부터 감독에 대한 이해,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레퍼런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이 필요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여러모로 배경지식이 많아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극장을 나오면서 곧바로 쓰는 글이 무언가 깊이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자신이 돌아갈 자리를 만들어둔다는 점에서 이 감상은 몹시 훌륭한 ‘고정’이다.
단순히 사사로운 글을 계속 쓰자고만 말하는 건 아니다. 글 한편에 꼭 모든 걸 담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예전 시대에는 글 하나를 고치려면 판갈이를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서 탈고나 오탈자 등을 꼼꼼히 검수했다. 글 하나의 완성도 자체와는 별개로, 이렇게 판이 나가는 순간에 방점이 찍히는 구조에서는 자신이 무언가를 섣불리 말하거나 단정 짓는 일을 경계하게 되어 생각을 논하기에는 불리한 감이 있다.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이 이후의 자기를 전부 결정하는 게 아님에도, 한 의견에 좋아요를 보내는 일이 피드 전체를 도배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수많은 변형이 있다. 즉흥에서 조판을 이어가는 그루브와 한 숫자를 다른 숫자로 나눈 후의 나머지를 반환하는 ‘모듈로’, 다시 무대에 서는 앙코르와 악보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다카포는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현장의 용어다. 이런 경험들은 각자 빠듯하게 제자리에 서서 고정돼있지만 이들을 유동적으로 움직여 자신의 몸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매혹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술식의 성능을 결정하는 것에는 속박의 원리 또한 있다.
평소 영화보다 먼 곳을 상상하고는 한다. 많은 시간을 영화에 대해 생각하며 보내기를 좋아해서, 영화가 아닌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보는 탓이다. 이런 점에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최근 <봇치 더 락!>에 관한 글을 쓰며 겹쳐보았던 한 그룹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아시안 쿵푸 제너레이션(아지캉)에 관해서는 한 애니메이션의 음악으로 처음 접했던 기억이 있다. 유아사 마사아키가 감독한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라는 2010년 작품으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해 제작됐다. 이전에도 <나루토>와 <블리치>,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 작품에 가수로 참여했다는 것 같지만, 이 작품들은 보지 않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다다미>가 다루는 내용과 노래가 무척 어울려서 작품을 보는 재미가 한껏 더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시간이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온 후속작은 영화 <타임머신 블루스>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제작된 <다다미 넉 장 반 타임블루스>다. 원작 소설이 영화를 참조해서 다시 소설을 낳고, 그 소설이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는 과정에 두 애니메이션은 다사다난한 12년을 보내왔다.
**이 글에서 언급된 원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kmdb.or.kr/story/9/9511
너무 많이 매혹된 죄, 불가항력의 불안을 마주하는 시간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www.kmdb.or.kr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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