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말하고’
(연재코너) 아티스틱 리서치 - 함께 사는 길 찾기 1화
조한결
안녕하세요. 이번 달부터 코너 ‘아티스틱 리서치 - 함께 사는 길 찾기 (Artistic Research - Finding a way to live together)’의 연재하는 조한결입니다.
첫 화이므로 코너 소개를 먼저 한 뒤, 연재글의 방향성과 연관이 깊은 작업 2개를 간략히 다루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코너 소개
예술 그리고 연구는 ‘발견’ 그리고 ‘세계에 관한 사랑’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무언가에 관한 예술 활동을 하는 과정이나 새로운 앎을 좇아가는 과정이 ‘자신만의’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때로는 글로, 때로는 그림으로, 때로는 음악으로, 때로는 움직임으로.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또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대화의 물꼬를 만들어 갑니다. 바로 이 시선을 통해 할 수 있는 앎과 사랑, 실천의 과정이 바로 제가 이번 코너에서 다룰 아티스틱 리서치에서의 핵심 활동입니다. 아티스틱 리서치는 실천 기반 연구, 실행 연구, 리서치 크리에이션과 같이 비슷하지만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다른 용어로도 불립니다. 누군가는 연구 방법론으로만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자체가 어떠한 하나의 수행적 양식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특성상 ‘이것이 바로 아티스틱 리서치이다!’라고 확실히 정의 내리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수행 양식이자 연구 방법인지 이 코너를 통해 찬찬히 함께 고민해 가고 싶습니다.
직접 제작하고 수행하고 실천한 과정을 ‘연구’라는 자리로 위치시켜 온 역사는, 시각예술분야가 학계나 문화계의 사업 지원을 더 공고히 받기 위하여 앎의 실천 과정을 권위로 특권화하려 했던 의도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발견하고 함께 성찰하고, 제작하고 창작하며 함께 감각해오면서 서로의 앎을 공유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아티스틱 리서치는 절대 새로운 형태의 행위는 아닙니다. 다만,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위해 용어들이 등장하는 과에서 문화예술계와 학계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혀 가고 있다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예술과 연구가 공존하는 이 과정은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에서 우리가 발견한 기쁨을 함께 나눌 때 그리고 동시에 아름다워야 할 세계가 지금처럼 너무 비참하고 슬프기도 할 때, 경청의 마음으로 존재와 세계를 직시하고 함께 연대할 마음으로 곁에 머무를 때 빛이 날 것입니다. 결과 못지않게, 의도와 배경 그리고 과정에서의 생각도 함께 나누면서 각자가 발견한 성찰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아티스틱 리서치에 관한 이야기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본 코너에서 연재할 글들은 각 주제에 따라 이론이, 때로는 사색과 성찰이 더 드러날 수도 있고, 때로는 작업 자료(그림, 음악, 영상, 글 등)나 솔직한 수기가 중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발견하고 고민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주제별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 작가와 연구자 그리고 한 개인의 삶에서의 다양한 위치성을 가지고 서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 접해온 예술, 학계에서의 글보다 더 날 것의 순수한 질문과 탐색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매월 1편씩 연재될 이 코너의 이야기들과 함께해 주세요! (때에 따라 한 달에 2편이 연재될 수도 있습니다.)
※ 2화부터는 코너 소개가 간략한 버전으로 하단에 배치될 예정입니다.
오늘은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인스타그램: @climateperformer) 활동에 참여하며 작업 했던 두 작업과 작업 에세이를 먼저 소개하고, 이에 관한 제 물음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기후위기 앞에선 창작자들’ 8기 활동으로 논산 폭탄 공장 현장에 함께 다녀와(25.11.27) 남긴 기록 작업입니다.
작업 에세이
전쟁과 학살, 분쟁 이후에도 심각한 민간인 살상 피해를 일으킬 수 있어,
악마의 무기로도 불리는 집속탄.
흩날리는 새끼 폭탄들이 불발 상태에서도 엄청난 살상력을 가지고 폭발할 수 있다.
집속탄 금지 협약(Convention on Cluster Munitions, CCM)이 있지만,
대한민국을 포함해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같은 국가들은 가입하지 않았다.
집속탄을 생산하는 방산 공장은 단순히 분쟁 시에만 삶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폭탄 시험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주민들의 삶을 안전으로부터 위협하며,
들판의 나무에 새 한 마리 오지 못하게 하는 모습을 직시해야 한다.
논산시 양촌면에 있는 폭탄 공장 코리아 디펜스 인더스트리(KDI) 사례가 바로 그렇다.
비인도적 대량살상무기 제작을 위해 주민들을 포섭하고,
폭탄 공장 설치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을 위협하고,
군수 사업을 위해 삶의 터전을 뿌리 뽑아 간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대체 왜 문제 삼느냐는 듯이,
알리지도 않고, 비판하지도 않고, 성찰하지도 않으며
조용히 마을을 고립시킨다.
폭탄 시험의 충격으로 먹먹해지는 귀에,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목소리조차 가닿지 못하게 막는다.
그 무엇도 알 수 없도록 백화하는 탓에
그 무엇도 그릴 수 없게 만든다.
다 흩어지고, 흩날리고, 흩뿌려지며 사라진다.

※ ‘기후위기 앞에선 창작자들’ 8기 활동으로 매향리와 화성 습지에 함께 다녀와(25.11.29) 남긴 기록 작업입니다.
작업 에세이
매향리 역사기념관에서의 기억을 좇는다.
겨울바람에 천막이 흔들리며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
이보다 훨씬 큰 소리를 냈을 폭격은, 그동안 존재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었을까.
수십 년간 미군의 사격장으로 사용되어 쌓여온 잔해물을
아직도 수거하고 모으고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오폭 사고, 굉음 피해, 난청, 정신적 트라우마, 자연 파괴.
고통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주민들.
역사기념관 근처에는 시에서 건설한 평화기념관과
운영하는 건 맞는지 의심스러운 야구경기장도 보인다.
주민들의 투쟁과 기억을 고립시킨 평화기념관.
이곳을 주민들은 ‘껍데기뿐’이라고 얘기한다.
저 커다란 건물에서는 ‘평화’를 대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역사기념관 안에서 발에 밟힐 때마다 귀를 긁어내며 찰랑거리던 탄피 소리가 들린다.
또, 어떤 포탄은 둥글게 쌓여 꽃을 이루고 있었고, 어떤 포탄은 화분이 되어있었다.
주민들이 만든 작품들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더라.
기억을 승화시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더라.
하지만 잔혹한 삶을 아름다움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지우고 있는 사회가, 너무나 괴물 같더라.
이제 기억 속 화성 습지를 현상한다.
기러기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붉은 염생식물과 황금빛이 나는 갈대 그리고 푸른 물빛이 흔들린다.
겨울이지만, 이 모든 것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삭막하지 않다.
자연의 경이 그리고 평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이곳의 모든 존재는 왜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했을까?
왜 사격장이 멈춘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제되고 있을까?
분명 늘 보고 듣고 말해온 존재들이 있었을 텐데.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시야가 하얘진 것 같다.
모든 것들이 그저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 감각과 기억을 말하고 좇을 수 있다.
그렇게 앞으로도,
보고, 듣고, 말해야겠다.
현장 기록 사진 일부






글을 마치며
나는 작가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할 것’인가?
요즘 들어 더 자주 생각하고 곱씹어보고 있는 생각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마 평생 가지고 살아갈 끝나지 않을 고민이지 않을까 싶네요. 관련된 정말 많은 물음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곤 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물음들입니다.
아무도 모를 것으로 생각하고 자행되는 폭력을 정말 아무도 모르고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이고, 또 때로는 그 기억을 놓아줄 수 있을까? 어떠한 연대를 예술로 함께 해나갈 수 있는 것일까? 한 개인의 삶을 하나의 사건이나 점으로 일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온몸으로 사건을 감각할 수 있을까? 이분법적이고 납작한 구분 넘어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질문을 놓치지 않고, 의식적으로 더 복잡하게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을까?
현장의 직접 보고, 증언을 듣고, 대화를 나누며 현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속이 울렁이고 마음이 어지러워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닐 때도 불구하고 정말 화가나서 성격이 예민해지고 괴팍해질 때도 있고, 슬픔에 눈물이 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전 세계에서 너무 비참하고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무력감을 느낄 때도 많고요.
개인적으로도 많이 방황하고, 부끄럽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요새는 ‘일단 어떻게든 창작하고 말하고 본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한 순간에 휘발되고 사라지는 삶과 창작, 사회 운동이 아니라 오래오래 얘기하기 위해 스스로 그리고 서로 돌보면서 나아갈 방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불씨가 꺼지면 ‘아무도 모르는’ 재가 되어 사라지고, 지워지고 배제될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연결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을지 정말 어렵지만,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로 지워지고 있는 존재들을 호명하고, 부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코너에서의 연재 글은 앞으로도 오늘 소개한 작업처럼 다양한 사회 문제와 연결되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작업을 다룰 예정입니다. 오늘은 첫 글이라 특별히 참고 문헌까지 다루진 않았는데, 2화부터는 다양한 참고 문헌과 더불어 작업 과정 그리고 당시의 제 고민을 더 투명하게 다뤄나갈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글의 내용과 관련해 더 확장해 보며 살펴볼 수 있는 자료-생각과 연결되길 바라며, ‘지금’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표현하고 연구해 갈 수 있을 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포일러: 2화에서는 ‘아티스틱 리서치’의 정의-특성-사례 등의 풍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학술적인 느낌으로 다루는 글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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