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서 가족 장치의 구성과 그 기능
- 1997년 IMF 사태를 중심으로
권범철(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2025 제5회 서교연 컨퍼런스 <신자유주의와 조각난 삶>(2025.8.23)에서 처음 발표 후, 수정 보완하여 <공동체문화와 민속 연구> 11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인용 시 해당 호를 참고 바랍니다(http://doi.org/10.52955/JCCF.2026.03.11.9).
1. 서론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공적인 혹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공격이면서 사적인 일자리에서 사람들을 내쫓는 과정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공적인 지원 — 그런 것이 있던 사회에서는 — 도 약해지면서 재생산 영역은 크게 취약해졌다. 간단히 말해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 재생산 영역을 축적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가야한다면 그 삶은 어떻게 유지되었는가? 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로 상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을 잃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했을까? 사회가 그들에게 제시한 ‘대안’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마거릿 대처는 우리에게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한 측면을 상기시킨다. 1987년 9월 23일 대처는 여성 잡지 『우먼즈 오운』(Womans’ Own)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와 개인, 가족에 대한 예의 그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그는 어떤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이 그 문제를 사회에 떠넘기는 시기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가 누구입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개별적인 남녀가 있고 가족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듬해 7월 『선데이 타임즈』(Sunday Times)에 발행된 성명을 통해 총리실이 해명했듯, 사회는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들과 가족들의 행위가 사회의 진정한 힘줄이라는 것이다. 그 성명은 이렇게 덧붙인다. “일을 해내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 ‘사회’에 맡기는 것은 진정한 결정, 실천적 책임, 효과적 행동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입니다.”[1] 그런데 대처는 사회를 이루는 요소에 왜 개인만이 아니라 가족을 덧붙인 것일까? 같은 인터뷰 말미에서 대처는 가족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국가는 여러분의 가족 생활이 계속되고 그 국가의 구조가 가족 구조일때만 계속해서 위대한 국가일 것이라는 점 ... 입니다. ...(중략)...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들이 가족 구조 안에서 살고 있고 가족은 계속됩니다. 그것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들이 있을 때, 그리고 문제는 항상 있을 텐데, 대부분의 문제들은 가족 구조 안에서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문제들이 일어나겠지만 가족 구조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족 구조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결책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2]
그에 따르면 가족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나라, 위대한 나라의 기초이며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야만 하)는 곳이다. 가족 외에는 “대안이 없다”(TINA)는 뜻일까? 가족이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란 어떤 것일까? 이러한 가족은 어떤 제도 혹은 삶형태이며, 이 제도가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란 어떤 곳일까?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이들에게 노동을 강제하는 — 그렇지 않으면 굶어죽을 자유만 제공하는 — 체계이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것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지만 모든 이들이 임금 노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직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들었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임금 노동을 하지 못하는/않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임금 노동을 하지 못하는/않는 까닭에)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지 못하는 이들로 이해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일반적으로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것을 강요하는 체제로, 자기기업가는 그러한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형상으로 이해되지만 그러한 명령과 상상은 늘 비임금자(the unwaged) 앞에서 좌절된다. 그렇다면 임금 노동을 하지 못하는/않는 이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는가? 물론 그 방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계는 가족을 통해 유지된다.[3] 가족은 임금 노동자와 비임금 노동자를 묶어둠으로써 사회의 비용이 될 수 있는 비임금자의 생계를 내부적으로 알아서 처리하는 임무를 떠맡는 제도다. 따라서 자기기업가뿐 아니라 가족 역시 신자유주의 전략에서 중요하며 이것이 대처가 가족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이유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은 없’지만 모두가 자기기업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은 개인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남아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가족은 신자유주의 이전부터 비슷한 임무를 수행해왔다. 실비아 페데리치에 따르면 서구에서 집-가족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가사노동 ‘공장’으로 구축된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일로, 이는 19세기 과도한 노동 강도로 인한 노동계급의 소멸 위기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생산 체계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요구된) 좀 더 건강하고 강인하며 생산적인 노동자의 필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4] 이는 알프레드 마샬의 말처럼 노동자들의 “건강과 힘, 육체, 정신 그리고 도덕”을 보장할 “숙련된 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5] (이전까지는 중간계급에만 존재하던) 풀타임 주부와 그의 생산 현장, 즉 가족은 이렇듯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6] 가족은 많은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자본을 위해 무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며,[7] 이것이 자본에 있어 가족의 첫 번째 가치다. 자본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기보다 “무상 노동의 방대한 기여에 의존”[8]하며, 이를 위해 커먼즈(commons)를 (파괴하는 것 못지 않게) 흡수한다.[9] 이런 한에서 가족은 자본의 커먼즈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가족에게 부여된 새로운 기능은 무엇일까? 상술한 바와 같이 포드주의 시대 자본에 있어 가족의 주요 기능이 산업 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무상 공급이라면, 그러한 노동력을 공급할 곳이 축소되고 불안정해진 시대에 가족의 기능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그 변화의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에게 부과된 공통의 억압과 (특히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가?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에서 가족에게 부여되는 새로운 혹은 강화된 기능을 밝히고, 그것이 자본에 대해 갖는 가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이를 위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시기라 할 수 있는 1997년 IMF 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임금 노동을 중심으로 한 재생산이 위협받던 당시가 가족 장치[10]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성과 기능 변화를 살피기에 적합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본격화된 가족 생계의 불안정은 3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1997년의 가족 장치에 대한 분석은 현재에도 유의미한 함의를 갖는다. 본 연구는 이렇게 1997년 IMF 사태 전후를 중심으로 가족 장치의 작동을 분석하면서 그것이 갖는 동시대적 함의와 대안적인 관계의 방향까지 아울러 논할 것이다.
2. 이론적 배경과 선행 연구 검토
1) 자본에 있어 가족의 두 가지 가치
멜린다 쿠퍼는 복지국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형성에 있어 모두 가족이 중심적인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먼저 포드주의 가족임금과 소득 재분배는 특정한 가족 구조를 전제로 작동했다. 다시 말해 남성 임금 노동자와 여성 비임금 노동자라는 젠더 규범성에 따른 분업은 쿠퍼가 말하듯 “복지자본주의의 핵심이자 토대”였다. 그러나 1960년대 해방 운동이 이 규범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의 동맹이 형성되었다.[11]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도덕보다는 오로지 시장 메커니즘에만 기대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쿠퍼는 신자유주의가 “자생적인 가족 가치의 질서를 가정”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그가 예로 드는 개리 베커는 “이타주의를 향한 가족적 동기(incentive)가 이기적인 교환의 공리주의적 동기만큼이나 자유시장 구성에서 중심적”이라고 주장하며, 밀턴 프리드먼은 “경제적 안전은 이상적으로 국가-기반 재분배보다는 가족의 재산 이전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12] 이 점에서 가족을 중심에 두는 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동맹을 맺는다. 신자유주의는 “자생적으로 자족하는 가족”이라는 자신들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비계약적 의무의 부과”를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아웃소싱”해야만 하는 것이다.[13]
이 동맹이 제안한 것은 포드주의 가족임금의 복원이 아니라 사적 가족 책임이라는 구빈법 전통의 재발명이었다. 1601년에 제정된 빈민 구제법(엘리자베스 시대 구빈법)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국가 체계였다. 이 법안은 공적 구제를 조직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동시에 구제 분배에 엄격한 조건을 부과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시행된 것이 가족 책임이었다. 이는 “특정한 친족 관계 내의 친척들이 교구가 어떤 자금을 지급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모든 가난하고, 늙고, 눈멀고, 절뚝거리고, 무력한 사람, 또는 일할 수 없는 다른 가난한 사람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자녀들은, 충분한 능력이 있다면, 자신들의 비용으로 그러한 모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부양해야 한다.”[14] 이러한 가족 책임은 복지국가를 개혁하려하는 신자유주의적·신보수주의적인 시도의 표어가 되었으며, 가부장주의에 입각한 가족은 “자유시장 질서의 자생적인 복지 원천”으로 이해되었다.[15]
요컨대 신자유주의 아래 가족의 새롭다기보다 강화된 기능은 가족임금도 공공복지도 불안정해지고 축소되는 시대에 (과거처럼 여전히 노동력을 (재)생산하면서) 어떻게든 생계를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자본의 커먼즈로서의 기능이 좀 더 강화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다른 무엇보다 가족을 우선하는 가치관이 필요했고, 이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성별 분업을 여전히 따르는) 아버지와 어머니상(像)을, 가족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리거나 모른척하며 가계 문제에 몰두하는 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의 전형으로 만들었다.[16]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에게 신보수주의가 필요했던 이유였다. 그런데 이렇게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한층 불안정해진 재생산을 가족에게 전가하기 위해 가족주의가 강화되는 과정 속에서 가족의 또 다른 (역시 새롭다기보다는 강화된) 기능도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기능이란 어떤 것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족이 자본에게 갖는 첫 번째 가치는 가족 구성원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재)생산하고 생계를 어떻게든 책임지는 것, 즉 자본의 커먼즈로서의 기능이다. 이는 자본으로 하여금 엄청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런 의미에서 비임금 재생산 노동(과 그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장으로서의 가족)은 자본의 기둥으로 기능한다. 이것이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파악된 가치라면, 우리는 동일한 노동이 갖는 정치적인 가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해리 클리버는 노동 가치론을 노동이 자본에 대해 갖는 가치 이론으로 다루는데, 여기서 노동의 가치는 “사회를 조직하고 지배하기 위한 근본적인 수단”을 자본에 제공한다는 데 있다.[17] 다시 말해서 자본에 있어 노동의 가치는 이윤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끝없이 노동을 강제함으로써 일 그 자체에 매몰되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족 가치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자본에 있어 가족의 가치는 국가를 대신하여 복지 단위로 기능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끝없이 재생산 노동을 강제함으로써 가족 그 자체에 매몰되게 하는 것,[18] 그럼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데 있다고 말이다. 물론 가족은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이러한 기능을 수행해왔으므로 새롭다기보다는 강화된 기능이라고 말해야겠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에서 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클리버의 말처럼 노동이 무엇보다 사회를 조직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대량으로 실업 상태에 몰아넣음으로써 지배적인 질서 유지에 역설적으로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사람들을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는다기보다는 불안정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때 신보수주의에 맡겨진 가족은 그 자체로 이상화되거나 삶의 최후의 보루로서 생존을 위한 다양한 노동을 강제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위험에 빠뜨린 지배적인 질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가설을 1997년 IMF 사태를 사례로 확인할 것이다.
2) 선행 연구 검토
가족을 다루는 연구가 매우 방대한 까닭에 모두 다룰 수는 없으므로 본 연구와 좀 더 관련된 주제로 한정하여 살펴보면 관련 연구의 흐름은 크게 세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거의 유일한 생계 단위가 된 가족의 성격을 문제화하는 경향이다. 쿠퍼는 가족 책임을 1960년대 해방 운동에 맞선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동맹과 이들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 전략의 결과로 이해하지만, 서구와 달리 복지시스템이 거의 부재했던 한국에서 가족 책임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이었다. 여러 연구자들이 개인의 삶을 의지하는 최후의 보루, 복지의 최소단위, 거의 유일한 사회적 연대 틀로서의 가족을 강조해왔다. 대체로 이 연구들은 식민지배, 한국전쟁, 군사독재,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 같은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이 가족을 삶의 거의 유일한 가능태로서 다른 어떤 집단보다 우선하는 한국의 가족주의를 낳았다고 분석한다.[19]
다음 두 연구 경향은 첫 번째 경향에서 좀 더 세부적으로 갈라져 나온 줄기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줄기에 해당하는 두 번째 경향은 폐쇄적인 가족 내에서의 성별 분업과 차별을 문제화하는 연구들이다. 여기서 주로 문제시 되는 것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제기되는 가족위기 담론이 사실상 부권위기 담론이라는 것, 즉 남성 실직자들만이 위기의 희생자로 인식되고 여성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된다는 것이다. 또한 위기 상황에서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는 가족 내 노동을 대부분 여성이 전담하는 성별분업 체계도 문제로 지적된다.[20]
또 다른 줄기에 해당하는 세 번째 경향은 가족이 국가를 대신하여 복지 단위로 구성되는 문제를 다룬다. 이 연구들은 한국의 국가와 자본이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사회적 보호에 대한 요구를 무마하면서 재생산 문제를 가족에 전가했으며, 이를 통해 경제 개발 혹은 자본 축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21]
이 세 가지 경향은 뚜렷하게 구별되기보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논의들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나 기업 혹은 공동체의 지원이 결핍된 사회에서 가족이 최후의 보루로 등장하는 과정(첫 번째 연구 경향의 주제)은 여성의 비가시화된 재생산 노동에 크게 의지하고 있으며(두 번째 연구 경향의 주제), 이는 곧 국가를 대신하는 최소 복지 단위로서의 가족 제도의 구성(세 번째 연구 경향의 주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 줄기들로 분류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분류한 기존 연구들은 앞서 다룬 쿠퍼의 논의가 비록 다른 맥락에서 전개된 것이긴 하지만 국내의 가족을 다룰 때에도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쿠퍼가 이야기하는 가족 책임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산물이라면,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은 가족 책임을 이미 오래전부터 작동시켜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쿠퍼가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동맹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었다고 이야기한 가족은 위에서 언급한 국내 연구들이 분석하는 가족과 그 기능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둘 다 자생적인 복지 기구로 기능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가족을 이상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가족 책임이 완전히 새로운 문제라기보다 기존 가족의 기능 강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족은 신자유주의 이전부터 자본주의 생산을 뒷받침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노동을 이전부터 수행해 왔다. 그러므로 가족 책임이라는 기능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서구에서는 복지 국가의 해체와 더불어 그 기능이 새롭게 부각되었고, 국내에서는 (복지 체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미 강하게 작동했던) 그 기능이 신자유주의적 전환기에 더욱 심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 책임이라는 기능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이런 점에서 본 연구는 쿠퍼의 작업과 기존 국내 연구들이 유사한 연구 경향에 속한다고 이해한다.
본 연구 역시 이 경향에 속한다. 그러나 이 경향에 속하는 기존 연구들이 대체로 가족이 자본에게 갖는 첫 번째 가치, 즉 자본의 커먼즈라는 경제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면, 본 연구는 이를 이어받으면서도 신자유주의에서 강화되는 가족 장치의 또 다른 기능(정치적 기능)을 명확하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지닌다.
3. 연구 방법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족 장치의 구성과 기능을 살피는 본 연구는 1997년 IMF 사태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 이는 상술한 것처럼 구조조정과 대량 실업 등 거대한 사회적 소용돌이에 가족이 휩쓸리던 그 시기가 가족 장치의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역할 부여, 가족의 이상화, 가족 대상 담론 · 정책 · 제도의 변화, 가족을 둘러싼 정동들, 혹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느낌의 구조”라고 불렀던 것 등을 살피기 위해 본 연구는 언론, 특히 신문 기사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소셜미디어(social media)뿐 아니라 인터넷도 대중적으로 이용되지 않던 시기에 신문 기사가 가족을 둘러싼 담론과 정동을 살피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문이라는 매체는 지배적 담론을 잘 보여주는 데 비해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다른 가족 실천을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새로운 가족 실천보다는 신자유주의에서 강화된 가족 재생산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전자의 문제는 결론에서 시험적으로만 다루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분석의 대상을 신문 기사로 한정하긴 했지만 연구의 목적을 감안할 때 큰 오류를 낳지는 않을 것이다.
기사 검색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빅카인즈를 활용했으며, IMF 체제가 시작된 시기를 전후로 각각 1년, 즉 1997년 1월 1일부터 1998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일간지에서 “가족”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된 모든 기사(총 22,407건)를 살피면서 연구 주제와 관련이 깊은 기사들을 걸러낸 다음 분석했다.
4.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시도들
가족이 최후의 보루가 된 사회에서 그것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나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나’의 삶은 가족을 토대로 전개될 수 있었고, 따라서 나의 삶의 흥망성쇠는 가족의 그것과 동기화되어 있었다. ‘나’는 가족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삶을 산다는 것이 생계 유지로 거의 환원되다시피한 피난민 사회에서 가족은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러한 신념을 갖는 것이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삶의 가능성이 가족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 온 사회에서 IMF 사태로 인한 구조조정과 삶의 불안정화가 무엇보다 가족 위기로 이해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IMF가 개입하기 이전부터 이미 고용 안정성이 약화되고 실직자들이 늘어나면서 가족 위기/해체 담론이 유포되었다. 그러나 박혜경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구조조정이 직접적으로 야기하는 것은 가족의 위기라기보다 특정한 재생산 방식의 위기다. “재생산이라는 용어는 가족이라는 용어로 대체될 수 없다.”[22]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자본주의 체계보다 더 넓은 사회적 재생산 체계이며,[23] IMF 사태 당시 우리가 경험한 것은 우리를 재생산하는 특정한 방식의 위기였다. 물론 이는 임금 노동자의 소득에 의존하는 가족에게 위기로 다가왔지만, 재생산의 위기를 가족의 위기로만 이해하면 다른 재생산 양식에 대한 상상은 차단된다. 다시 말해 IMF 사태로 인한 특정한 재생산 양식의 위기는 다른 재생산 양식을 개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가족이 삶의 근본 단위인 사회에서 구조조정으로 인한 삶의 불안정화는 곧장 가족 위기로 이해되었고, 이는 가족을 되살려야 한다는 보수적인 주장으로 쉽게 이어졌다. 쿠퍼의 말처럼 자본주의가 ‘좋았던 옛 시절의’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론화되면, 저항은 보수적으로 상상되기 쉽다.[24] 한국 사회에서 IMF는 무엇보다 가족을 파괴하는 ‘적’이었고, 따라서 새로운 삶형태를 개발하기보다 가족을 복원하는 것이 IMF 시대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가족을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었다. 안정적인 고용 관계 속 임금에 기댄 가족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족이 유일한 삶의 토대로 남아 있는 사회에서 가족은 다른 모습으로나마 유지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여러 기제가 동원되었다. 첫 번째는 구조조정의 풍파를 맞아 피폐해진 임금 노동자이자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1) 아버지 신드롬과 남편 기 살리기
IMF 사태가 발생하기 한 해 전 한국 사회에는 아버지 신드롬이 불었다. 암에 걸린 중년 남자의 눈물겨운 가족 사랑 이야기를 다룬 소설 『아버지』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힘있는 중년 아버지’의 목소리를 담은 어느 경찰관의 시집 — 『자식은 웬수 며느리는 가정파괴범 이런가?』 — 이 화제가 되었으며, <아버지모임 전국연합>은 1997년 새해 벽두에 ‘아버지 헌장’을 발표했다. 이 신드롬 속 아버지는 “자녀나 아내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을 혼자서 감내”하며 “약하고 안쓰러워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하는 인물이다.[25] 이러한 ‘약한’ 아버지는 성별 노동분업에 기초한 가족 구성에서 임금 노동을 담당하며 가계 수입의 기둥을 이룸으로써 획득했던 그의 자리가 무너진 데서 기인한다.
1996년 12월 26일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 개정안은 그 붕괴 과정에 기름을 부었다. 그 법안은 정리해고, 파업 기간 중 대체근로 허용, 퇴직금 제도 폐지 등 자본을 위한 규제 완화와 유연생산체제를 위한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의 불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눈물겨운 가족 사랑”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복원은 흔들리는 삶의 토대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더 이상 과거처럼 임금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복원은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즉 이데올로기적인 혹은 정동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약하고 안쓰러운 “「왜소화한 아버지 상품」은 분별없는 부성의 파괴를 부추기고 사회의 든든한 울타리인 가족해체를 조장”하므로 “강한 아버지상이 필요”하다고 주장되었다.[26] 또한 아버지의 ‘권위’를 다시 정립하기 위한 여러 헌장과 계명도 발표되었다. <아버지모임 전국연합>이 “존경받고 신뢰받는 아버지 상”을 만들기 위해 발표한 ‘아버지 헌장’을 보자.
①아버지는 가족의 생계와 행복을 위해 힘쓰며 가족은 이를 인정하고 협조해야 한다. 아울러 자녀와 배우자를 보호하며 정신적 지주로서 참된 가장이 된다.
②아버지는 자녀들이 건전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인간으로 발달할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과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을 지키며 자녀 양육과 교육의 공동책임자로서 그 본분을 다한다. ...(중략)...
④아버지는 개인임과 동시에 직장과 사회 국가의 일원으로서 그 발전에 이바지하며 책임있는 생각과 행동을 유지한다. 아울러 아버지들의 이러한 노력은 존중되고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⑤아버지는 한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능력이 아닌 한 인격체의 인품으로서 순수하고 참되게 평가되어야 한다. ...[27]
이 헌장은 “자녀 양육과 교육의 공동책임자”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언급하며 아버지 모습의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이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자녀와 배우자를 보호”하는 “정신적 지주”이자 “참된 가장”의 자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인물로 설정된다.[28] 또한 가족이 아버지의 노력을 “인정”하고 그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면서, 임금 노동을 하며 유지되던 아버지의 권위를 다르게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아버지의 노력은 — 다시 말해 이 노력의 결과(취업)를 장담할 수 없는 시대에 노력 그 자체만으로도 — “현실적인 능력이 아닌 한 인격체의 인품으로서” “존중되고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애써 주장함으로써 말이다.
이처럼 IMF 시대에 가족의 복원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이해되면서 아버지의 복원은 덩달아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리가 과거처럼 임금 노동의 수행으로 확보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동적인 복원이 시도되었으며, 나머지 식구, 특히 여성(아내)은 이 복원에 적극 협조해야 하는 인물이 되었다. 당시 중년 남성을 남편으로 둔 부인을 대상으로 ‘남편 기살리기’ 강연을 진행했던 주부경영학교장 강경란은 “세상이 변했으니 내조도 시대에 맞춰야” 한다면서 “‘사랑받는 아내’가 아니라 풀죽은 남편의 기를 살려 주는 ‘베푸는 아내’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한 ‘남편 기살리기 9계명’을 제안했는데, 몇 가지를 꼽아보면 “하루 한번 이상 남편을 웃기자” “매일 한번씩 남편을 칭찬하자” “남편의 용돈은 많이 주자” “남편의 의견 · 결심은 최대한 존중한다” 등이 있다.[29]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산하 노동경제연구원의 양병무 부원장도 나름의 ‘남편 기살리기 5계명’을 제시했는데, 이 중 하나는 “남편을 왕으로 대접하라”는 것이었다.[30] 칭찬을 하고 용돈을 많이 주며 존중하고 웃기기까지 해서, 심지어는 왕으로 모시면서까지 살려야만 하는 남편의 ‘기’란 무엇일까? 그의 기는 왜 살려야만 할까?
정말이지 지금 우리에게는 기(氣)가 절실히 필요하다. … 기가 없으면 기력(氣力)도 기운(氣運)도 기세(氣勢)도 없다. ... 한 사회는 가족의 집합체요 가족의 중심은 아버지다. 한 가정이 건강하자면 건전한 권위가 필요하다. 부성(父性)은 권위의 중심일뿐 아니라 가치관의 중심이기도 하다. … 아버지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가정의 구성원들이 자기 위치를 정확하게 잡을 수 없다. … 부성의 결함은 이렇게 사회를 결손시킨다. 부권의 복권을 위해서라도 아버지들의 기를 살리지 않을 수 없다. 가족과 사회의 격려가 필요하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실의나 절망이 자신이나 가족의 건강뿐 아니라 나라의 건강을 해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 정기(正氣)의 회복이 급하다. 아버지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만물이 생동하는 새봄의 기운과 함께 아버지들의 기를 살리고 가정의 기를 살리고 그래서 나라의 기를 살리자. 실직보다 더 위험한 것이 실기(失氣)다.[31]
실직이나 사업 실패로 좌절감에 빠진 남편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다. 사람의 말에는 생명력이 들어있어 사람의 기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가장이 직장을 잃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용기를 잃는 것이 문제다.[32]
IMF한파를 건강한 가정으로 이길 수 있다. IMF시대에는 든든한 직장뿐아니라 든든한 가족을 거느린 사람이 마음도 든든하다. … 우울증에 빠졌던 남편들이 아내의 이 말을 들으면 힘이 난다고 한다. 『여보 걱정마세요. 내가 파출부를 해서라도 당신과 가족들을 책임질께요』 『소나기가 지나가면 햇빛이 나듯 이 고통도 오래가지 않아요. 힘내세요』등의 말을 들으면 거짓말 같이 기운이 나는게 사실이란 것. 그만큼 가장의 가족부양책임은 무겁다. 만약 가족이 아무도 가장의 아픔을 이해해주지 않으면 방황은 오래간다. 가족이 따뜻하게 대해줄때 아버지는 위기를 잘 극복해 낸다. 가족이 꿈을 잃지않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아버지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33]
위 기사들은 IMF 사태를 전후로 무수히 나온 ‘남편 기 살리기’ 기사의 전형이라고 해도 좋다. 이 기사에 따르면 ‘기’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생명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 정도로 유추해볼 수 있다. 이러한 기를 잃는 것(“실기”)은 직장을 잃는 것(“실직”)보다 더 위험하므로, 손에 잡히지 않는 기가 물질적 토대(임금)보다 더 중요하다. 이러한 논리에 기대어 기를 살리면 실직도 문제없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 기 살리기는 “가족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아내의 응원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비록 실직이나 사업 실패로 기를 잃긴 했지만, 가족의 응원으로 기는 얼마든지 “거짓말 같이” 회복 가능하며 이를 통해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IMF 사태를 야기한 사회구조적인 원인이나 책임을 문제화하는 것보다 기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기를 살리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을 (경영 실패에 책임이 있는 기업가보다, 경제 정책에 책임이 있는 관료보다) 문제 삼는 것이 가능해진다. “가족이 따뜻하게 대해줄 때 아버지는 위기를 잘 극복해 낸다”는 말은 왜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못해 남편 기를 죽이냐는 비난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다. 이렇게 기를 무엇보다 중요시함으로써 결국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가족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가족 문화의 소멸에서 기인한다. 나라를 빼앗겨도, 전쟁통에 집을 잃어도, 살인적인 물가고와 취업난에 짓눌려도 아버지 어머니가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켜주고 사랑을 쏟아준다면 인간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 그것은 위의 존재가 뿌리박고 있는 우리의 근거지가 곧, 우리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잔뜩 기가 죽어 불화의 깨깨마른 거리를 떠도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래도 가정의 구심점이 되고 그런 가정으로부터 문제가 풀어지지 않으면 안된다.[34]
경희대 김○○ 교수(경제학)는 이날 세미나에서 『오늘날 국가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가족이 흔들리고, 자녀의 인성교육이 안돼 있기 때문』이라며 … 식탁에 일체 다른 음식없이 커다란 냄비나 뚝배기에 비빔밥을 만들어 모든 식구가 숟가락을 넣고 함께 먹을 것』 등을 제안, 박수갈채를 받았다. … 김○○ 서울대명예교수는 이같은 사회분위기에 대해 『가정은 국가의 근본으로, 가정이 건강해야 나라도 바로 선다』며 … .[35]
이 교수들은 대처가 그랬듯 “가정으로부터 문제가 풀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가족 문화 살리기를 해법으로 제시한다(정확한 원리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가정의 기가 살아나는 것 같다). 이들의 진단에서 위기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서 기인한다기보다, 아버지가 “가정의 구심점”이 되어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가족이 흔들리”는 데 있다. 따라서 아버지의 기를 살리지 못하는 가족이 문제인 것이다. 가장이 직장을 잃는 것보다 용기를 잃는 것이 문제인데, “따뜻한 말 한마디”면 기를 살려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데, 그렇게 아버지의 기를 살려야 가정의 기도 살고 나라의 기도 사는데,[36] 그 출발을 시작하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이야말로 이 IMF 사태가 위기로 발현하는 데 책임이 큰 이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가족 구성원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쓰기보다 여성(아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실제로 IMF 사태의 책임을 가족에게, 특히 가족 내 여성에게 돌리는 기사들을 종종 찾을 수 있는데, 이 문제는 이후에 다시 다룰 것이다.
기 살리기에서 응원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이며, 다른 가족 구성원, 특히 여성은 그를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두 가지는 첫째, 기 살리기 담론에서 가족의 중심은 여전히 아버지(남성)에 있다는 것, 그에 따라 기존의 젠더 규범성을 강화한다는 것이고, 둘째, 기를 상실하는 사람은, 다시 말해 “실직이나 사업 실패로 좌절감에 빠”지는 사람은 언제나 남성으로 전제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성이 겪는 실직이나 사업 실패는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며 개인적인 일로 여겨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의 임금 노동은 생계를 위한 일이라기보다 개인적인 허세 정도로 치부되었으며,[37] 그에 따라 여성은 정리해고에서 우선순위에 있었다.[38]
결국 남편 기 살리기란 실직 대란 속에서도 사회적·공적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개인이 아닌) 가족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담론이었다. 남편의 기만 살리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해서 이 모양이냐고 비난하거나, 가족이 굳건하지 못해서 이런 위기를 낳았으니 (비빔밥을 해 먹으면서) 다시 가족이 뭉치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망상을 늘어놓는 방식으로 말이다. 개인이 아니기에 서로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는 (더군다나 소수이기에 ‘똘똘 뭉치기’ 쉬운) 구성원들이 서로 강한 정동에 휩싸이면서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도취되어 그 정동 자체에, 가족에 몰두하도록,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섣불리 참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남자”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인물을 가족의 기둥으로 삼아 기대어 살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남편의 기는 그래서 살려야만 했다. 결국 과거처럼 가족에게 책임을 다 떠넘기고 싶지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정서적 해법에 기대어 그것을 주문처럼 외는 것이 남편 기 살리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아내)은 기 살리기에 주요한 책임을 진 인물로서 쉽게 도마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2) 위기의 원인으로서의 여성과 재생산 노동의 강화
가족을 복원하기 위한 두 번째 움직임은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관된 성격을 갖기보다 상충하는 주장들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에서 아내의 전통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돈벌이를 현모양처의 역할로 적극 강조”한다.
우선 아내의 주된 역할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비임금 재생산 노동이지만 IMF 시대에 남편 기 살리기를 비롯하여 그 강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줄어들고 불안정해진 소득을 여성의 노동으로 대신하는 경향이다.
IMF 사태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화가 계급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회사-나라 대 IMF’라는 구도로 틀지어지면서, ‘우리’가 변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담론이 전개되었다. 그중 하나가 “무절제한 과소비와 사치 풍조”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 문제의 원인은 아니나다를까 가족, 특히 여성(아내)이었다.
“과소비의 뿌리는 가정이죠. 가정에서 지출되는 외식비부터 줄이면 과소비는 물론 심각한 경제난도 해소할 수 있습니다” … 일부 기업체에서는 경제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집에서 저녁 먹기 운동’을 전개중이다.[39]
최근 경제위기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과소비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 가정경제권이 여성에게 있는 우리 현실에서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 분에 넘친 아내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에는 벅차다.[40]
한편 앞에서도 언급한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산하 노동경제연구원의 양병무 부원장이 제시한 ‘남편 기살리기 5계명’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휴일에는 쉬게 하라=휴일에 더이상 남편을 가족나들이를 위한 운전기사로 만들지 말라.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외출을 희망하지 않는 남편은 집에서 쉬도록 하라.
△위기의식을 함께 가지라=내 남편도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
△욕구를 낮추라=옷 · 보석 · 여행 등 욕구를 줄여라. 욕구가 높은 만큼 남편의 기는 내려간다.[41]
이 기사들이 전제하는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아내란, 휴일에 남편을 운전기사로 부리고, 사회적으로 실직 바람이 부는 상황임에도 위기의식은 없으며, “옷·보석·여행”으로 사치스러운 소비를 일삼는 인물이다. 이 5계명에서는 여성에 대한 어떤 적개심마저 느껴지는데, 이는 아마도 “생존 전쟁”에 뛰어든 남편과 달리 아내는 너무나 한가하게 구는 인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적개심과 더불어 여성은 경제 위기의 원인이 된다. 경제 위기의 주요인 중 하나가 과소비이며,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바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생하는 가장(남성)’ 대 ‘철없이 기생하는 아내(여성)’의 구도에서 여성은 가장의 짐을 넘어 이 모든 사태의 원인, 가해자가 된다. 이와 달리 현명한 여성이란 당연히 근검절약하는 여성이다.
위기 극복의 의지가 국가적으로 확산되면서 고○○씨 역시 절약의 지혜를 실천해나가고 있다. 가장 먼저 줄인 가계비 항목은 식비. 두 아이의 부식비가 만만치 않았다. 요즘은 인스턴트 과자 대신 누룽지, 감자튀김 등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이고 있다. 큰아들 △△(7)의 교육비도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올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정규학비 외에는 과외를 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엄마가 과외교사가 돼 감성교육을 시킬 예정.[42]
“이제 절약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낭비하는 것은 죄를 짓는거나 마찬가지예요.”[43]
소득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절약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자 도덕적인 의무(낭비=죄)였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씀씀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추가 노동을 통해 해결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외식을 줄이고, 교육비를 줄이면, 누군가가 그만큼 집에서 더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가르치는 노동을 해야 했고, 이는 결국 집안의 노동자, 즉 여성의 몫이 되었다. 대처가 어떤 문제든 집에서 해결되어야한다고 할 때, 그것을 해결하는 건 결국 여성의 노동이었다. 조혜정은 “‘피난민 사회’적 상황에서 소위 사회적 영역을 담당한 것으로 되어 있는 아버지의 역할은 축소되고 가족의 영역을 책임진 어머니의 역할이 부각된다”고 쓴다. 그 ‘사회’가 개인의 삶을 내팽개치는 상황에서 “실질적 생존은 가족과 그 소우주의 주연출자인 여성에 의해 이끌려 갔던 것이다.”[44]
뿐만 아니라 비임금 초과노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현금 수입을 위해 여성은 “가족 부양의 짐을 가정의 어깨에서 끌어내려” 나눠 질 것을, 다시 말해 임금 노동을 요구받았다.
선진국에선 집에서 노는 사람이 거의 없는 셈이다. 여성들은 물론 젊은이들도 용돈이나 대학 학비를 자신이 벌어서 댄다. 가족들이 대책없이 가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는 관계다. 가장 혼자 바둥대는 우리와는 삶의 질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 가장 중심의 소득구조가 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올리고, 대외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주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45]
“선진국에선 집에서 노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있는데, 여성이 그런 인물이다. 여성은 “대책없이 가장에 의존하는” 까닭에 “인건비(가족임금)를 올”려,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이런 점에서 이 기사 역시 여성을 경제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마치 가족 부양의 짐을 남성 가장만 져온 것처럼, 비임금 재생산 노동은 노동이 아닌 것처럼, 여성은 집에서 놀기만 한 것처럼 말이다. 일하는 여성을 “허영심”에 물들었다고 조롱하던 사회가, IMF 시대에는 여성을 일하지 않는 기생체라고 비난한다.
사실 이러한 이해와 그에 따른 혐오 — 노동경제연구원 부원장이 잘 보여준 것과 같은 — 는 오래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여성을 기생체로 이해한다. 그 시각에서 ‘진짜’ 일은 집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요구된 그 모든 일들 — 남편 기 살리기, 교육비 지출을 대신하는 가정 교육, 외식을 대체하는 집밥 등등 — 은 다 무엇이었나? 임금 노동만이 ‘진짜’ 일이라는 생각은 임금이라는 말로 재생산 노동을 감춰버린다. 마치 화폐 형태를 한 임금이 직접 밥·청소·빨래까지 해서 나를 다시 충전해준다는 듯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IMF 사태를 특정한 재생산 방식의 위기로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과제는 재생산을 어떻게든 — 물론 지금과는 다르게 한다면 더욱 좋겠지만 — 완수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생산적인’ 임금 노동이 아니라 재생산이다. 나를 혹은 누군가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키워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임금 노동은 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들이 모두 상품 형태로 제공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 우선순위를 뒤집어서 이해한다. 중요한 건 임금 노동이고 재생산 노동은 그것을 지속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IMF 사태에서 그랬듯 우리가 임금 노동에서 강제로 분리(실직)될 때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야 하므로) 다르게 재생산을 추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선순위를 되돌려 놓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는 달리 임금 노동 없이 재생산은 가능해도, 그 역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우리는 보통 이를 반대로 생각한다). 이는 재생산 노동이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점 — 그래서 모든 임금 노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 — 뿐 아니라, “임금 노동은 언제나 대상이나 목표 — 생산물과 이윤 — 를 염두에 두고 고용되지만, 재생산 노동의 의미는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자본주의적 텔로스를 초과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46] 삶을 생산하는 건 재생산 노동이다.[47] 재생산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의 무상 공급으로 흡수되곤 하지만) 살아가는 일, 삶 그 자체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력 재생산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다.
그러나 IMF 사태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된 모습은 다르게 재생산을 추구하기보다 기존의 성별 분업 질서 내에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의 이면에는 어떻게든 임금 노동을 유지해야 하는 남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다음 절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어떤 이들은 죽음(과 죽임)으로써 고난을 종결짓고자 했다.
결국 가족 지키기로 요약될 수 있는 이런 모습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재생산의 위기가 가족의 위기로만 이해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런 점에서 가족은 우리가 사회에 닥친 위기를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는 방식을 특정한 회로로 제한하는 장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치는 삶에 대한 욕망을 자신(가족)을 지키는 것으로 변환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그 구성원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5. 가족 지키기라는 억압과 무너지는 가족
가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 — 남편 기 살리기, 여성의 재생산 노동 강화 — 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늘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가족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견딜 수 없는 억압으로 다가올 때 가족은 무너졌다. 이것의 극단적인 모습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심지어는 ‘가장’이 다른 구성원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였다.
IMF 체제로 진입하면서 자살은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1998년 4월 대검 강력부의 발표에 따르면 그해 1/4분기 자살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 증가한 2천 2백 88명이었다. 여기에 ‘가장’에 의해 살해당한 가족까지 포함하면 하루 자살자는 30여명으로 추정되었다.[48] 가족을 해체하거나 확장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가족을 어떻게든 유지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응원하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우기는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집 안팎에서 이중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뿐 아니라 기업이 줄도산을 하는 와중에도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던 남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에게 가족은 부담이었다. 1988년 2월 몇 달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쉬던 한 남성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점을 괴로워했다.”[49] 같은 달 어느 50대 남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아들의 등록금 마감일이 모레인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생활고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남성 가장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가게 운영에 실패하고 어머니의 폐지 수입으로 겨우 가계를 꾸려가던 상황에서 자신마저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식당에서 해고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20대 여성, 취직을 고민하다 자살한 대학생, 남편의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험금으로 빚을 갚아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40대 여성 등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은 ‘가족이 뭉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우겨대던 수많은 기사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위기 상황에서 가족이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비극적으로 증거한다. 국가나 다른 공동체의 지원이 너무나 취약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문제들은 가족 구조 안에서 해결”될 수 없었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을 살해한 뒤 죽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빚 때문에, 부도 위기에 몰려, 사업 실패를 비관하여 그런 선택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왜 가족을 살해했을까?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단지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라면 굳이 가족을 살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1998년 3월 아내와 자녀 2명을 살해하고 목을 맨 30대 ‘가장’은 “아내만 남겨두면 커다란 고통을 줄 것 같아 데리고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 가족 살해는 ‘가장’으로서의 자신이 죽은 뒤 남은 가족이 겪을 고통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선의’였을까?
가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가족 살해 후 자살이라는 형식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서울 여성의 전화>가 발표한 상담 결과에 따르면 1998년 1/4분기 상담결과에서 가정폭력은 31%(5백 36건)를 차지했으며, 이 가운데 89명이 IMF 이후 구타가 더 심해졌다고 호소했다.[50]
이달초 서울시립아동상담소에 들어온 李모(5)양은 택시기사였던 아버지(30)가 실직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2년전 엄마와 갈라선 뒤에도 자신을 따듯이 돌봐오던 ‘자상한 아빠’가 올들어 일자리를 잃고난 뒤부터는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너 때문에 힘들어 못 살겠다”며 마구 때려 밖으로 내쫓기 일쑤였다. … 김석산(金石山) 아동학대예방협회장은 “실직당한 아버지들이 가족이 자신의 짐이 되고 있다는 심리적 부담감에다 평소 성품이 복합적으로 작용, 화풀이 차원의 아동학대나 가정폭력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51]
기존의 젠더 규범성에 따른 가족 구성은 여성에게는 재생산 노동이라는 짐을, 남성에게는 임금 노동이라는 짐을 부과한다. 그러나 이 짐을 맡은 이들은 가족 내에서 위계적으로 결합되는데, 임금 노동은 임금을 벌어들이는 생산적인 노동으로 인정받지만, 재생산 노동은 임금이 없는 까닭에 아예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집밖에서 힘들게 돈을 버는 사람’과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는 가족 내 위계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임금 노동자(대체로 남성)는 자연스레 집 안의 ‘가장’이 되고, 이들은 자신이 가정 경제를 오롯이 떠맡고 있다는 부풀려진 상상 속에서 과도한 의무감에 시달린다. 가족을 “자신의 짐”으로 여기는 이 아버지들은 다른 가족이 자신을 어떻게 부양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들은 오로지 화폐 흐름에서만 부양 관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다른 가족을 내가 먹여 살린다는 상상이 커질수록, 그 과도한 의무감은 위기 상황에서 쉽게 “너 때문에 힘들어 못 살겠다”는 생각으로 “돌변”할 수 있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부양은 철저히 일방향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의 의무감은 자신을 결코 피부양자의 위치에 놓지 못했고, 이는 다시 다른 구성원을 부양능력이 없는 무력한 자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가족 살해는 부양을 화폐 흐름과 등치시키는 까닭에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노동과 역량을 알지 못하는 ‘가장’이 자신의 과도한 의무감 — 어쩌면 스스로 부풀린 — 을 극단적으로 따르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가장에 의한 가족 살해는 물질적으로는 이미 불가능해진 젠더 규범을 비물질적으로 어떻게든 유지하여 그를 가족의 기둥으로 세우고자 했던, 남편 기 살리기를 비롯한 가족 지키기 담론의 비극적인 결과였다. 그러한 젠더 규범에서 가장은 많은 이들의 주문을 따라 자신을 가족의 유일한 희망으로 상상했고, 이는 그가 그러한 비극을 주도하도록 이끌었다. 혹자는 이 비극이 극단적인 소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면 위로 분출한 이러한 극단적 소수는 수면 아래에서 일반화된 억압적 환경을 토대로 한다. 그 억압이란 바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주문이었다. ‘가족을 지키자’는 위기 시대의 구호는 역설적이게도 (늘 그렇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파괴로 이어졌다. 너무나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그 구호가 문제적인 이유다. 또한 이는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손쉽게 해법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강한 호수성(reciprocity)의 관계 — 대표적으로 가족 — 가 오히려 그 관계에 속한 이들에게 문제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책임을 (특히나 도덕적인 명령으로) 강하게 주문하는 그 관계가 관계 자체의 유지를 최우선하면서 구성원에게 억압으로 작동하며 그에 따라 관계로 얽힌, 짐으로 여겨지는 상대에 대한 폭력을 낳는 것이다. 이는 폐쇄적인 관계 안에서 모든 문제를 떠안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후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처럼 가족 살해는 가족 장치의 작동 메커니즘이 지닌 문제를 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젠더 규범성에 따른 책임 부과와 재생산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가 결합한 그 메커니즘은 고도성장 시기에는 내부의 모순을 억눌러가며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불황을 맞아 무너졌다. 이는 임금 노동을 중심으로 한 가족 재생산이 위기 시기에 매우 취약함을 보여주며, 재생산의 재구성, 즉 위에서 언급한 폐쇄적인 가족과는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공유하는 관계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6. 가족으로서의 기업과 국가
유일하다시피한 삶의 토대로서의 가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노력은 결국 가족에게 모든 과제를 떠넘기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렇게 가족을 통한 문제 해결은 가족을 벗어난 단위에서도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업을 하나의 가족으로 상상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돌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설날을 앞두고 기업체 사장들이 IMF한파에 움츠러든 종업원이나 협력회사에 위로의 뜻과 함께 사랑과 협력, 고통분담을 구구절절이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 화제다. 기아자동차의 박제혁(朴齊赫) 사장은 최근 임직원(2만여명)들에게 ‘기아 가족 여러분, 고향 잘 다녀오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을 보냈다. 그는 “악몽같았던 지난 6개월을 인내로 이겨낸 가족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내일을 기약하며 살신성인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삼성전기 이형도(李亨道) 사장도 최근 임직원(1만7백여명)들에게 ‘불씨를 나눕시다’라는 제목의 사내 PC통신을 띄웠다. 李사장은 이를 통해 “IMF한파의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하자” 며 “스스로의 가슴에 솔선수범이란 불을 붙이자”고 당부했다. … 대우전자 전주범(全周範) 사장의 경우는 1천여 협력회사에 ‘서로 사랑하자’는 제목의 편지를 띄웠다. … 사장들의 편지가 전해진 이들 회사의 PC통신에는 “이 한몸 불태워 나라경제를 살리겠다” “생산직 여사원인 나도 가만 있을 수가 없다”는 내용의 응답이 쇄도하고 있다.[52]
이 기사에서 확인되는 것은 ‘우리 회사 대 IMF’라는 구도다. 이 구도는, 사장들이 직접 가족, 사랑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우리’가 한 가족임을 강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가족 대 IMF’라는 구도를 동형적으로 반복한다. 첫 번째 반복되는 점은 ‘우리’, ‘가족’ 등의 용어로 희석되는 내부의 분할선이다. ‘우리 가족’이 내부의 성별 위계를 지우며 작동하듯이, ‘우리 회사’는 내부의 계급 분할을 흐리며 작동한다. 가장의 고통을 나누어 질 것을 요청 받았던 가족 구성원들처럼, 직원은 고통을 분담할 ‘가족’으로 호명된다. 여기서 계급 정치라는 말은 어떻게 들릴까? IMF 사태라는 전례 없는 위기는 모두에게 당장의 생계유지를 최우선의 과제로 만들었다. 이는 저항의 문제틀을 무색하게 만들고 노동자가 회사에 헌신하도록 만든다. 가족 내에서 (성별 위계를 문제삼기보다) 남편을 ‘왕처럼 모실’ 것을 권유받는 아내가 남편(아버지)을 ‘존중’하듯, “생산직 여사원”은 (가장으로서의) 사장의 편지에 호응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회사를 살려 나라 경제를 살리겠다는 생각이다. 우리 회사로 확장된 우리 가족은 이제 우리나라로 다시 확장된다. 가족 사랑 = 회사 사랑 = 나라 사랑의 등식이 등장한다.
“국민들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금을 모으는데 수출 일감을 놔두고 설이라고 쉴 수 있나요. 망설임없이 설 연휴 반납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 전남 영암 출신인 이○○ (李○○.27.여) 씨는 “우리는 (반도체를) 만드는 대로 달러를 벌기 때문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기로 했고, 고향 아버지도 격려해 주셨다”고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53]
‘달러’를 버는 자부심이란 어떤 마음일까? ‘달러’로 표현된 수익은 이씨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외화 잔고가 바닥난 나라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자부심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데서 나온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데 왜 자부심을 갖는가? IMF라는 외부의 적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가족’이기 때문이다. 회사도 나라도 일종의 가족이다. 위기 상황에서 등장하는 이 ‘우리’들은 책임 소재를 흐리고, 위기를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만든다(“IMF한파의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하자.”). 그 위기가 실은 ‘우리’라는 말로 감춰지는 젠더와 계급의 분할선과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자부심은 그렇게 흐려진 분할선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달러를 버는 노동에 자부심을 느끼는 가운데 일에 매몰되는 회사 인간이 등장한다.
세계 제5위의 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직원들의 의지는 공장 가동률이 높아지면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94년 4월, 고향인 경남 거창을 떠나 세계적인 제철소를 건설하겠다는 회사약속만을 믿고 충남 당진의 허허벌판에 들어섰던 안씨. … 그는 이번 설날 3일 휴가중 하루만 서울의 가족들에게 잠깐 다녀온 뒤 공장을 지킬 생각이다. 안씨는 『한보철강 직원들은 오직 당진제철소를 계획대로 올해안에 완공시켜 세계적인 제철소 직원이 되고 싶은 생각 뿐』이라고 밝혔다.[54]
공단 전체가 신정휴무에 들어가 스산한 정적이 감도는 2일 이곳에서는 시끄러운 기계소음이 종일 뿜어 나왔다. 직원 150여명은 벌겋게 단 용광로 불빛속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연신 닦아냈다. 『연휴를 가족과 보내고 싶은 마음이야 사장이나 직원들이나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다른 기업들이 IMF한파로 어쩔 수 없이 쉬는 상황에서 일거리가 밀려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오○○ 사장(64)은 『직원들 모두 새해 벽두부터 일에 미친 것같다』고 말했다.[55]
달러를 번다는 자부심, “세계적인 제철소”의 직원이 되는 것, 일을 한다는 행복 … 직원은 회사라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물의 형성에 각자 공헌한 몫에 따라 생산물을 나누는 하나의 연합관계인 듯한 그릇된 외관”[56]의 전형처럼 보인다. ‘내’가 이러한 연합관계에 있다고 여길 때 “고통분담을 구구절절이 호소하는 편지”에 화답할 수 있고 일을 하며 자부심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느끼는 시절에 “일거리가 밀려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 시대에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 나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일일까? 경쟁력을 갖춘 나, 가족 혹은 회사가 되거나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IMF 시대에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세계적인 제철소 직원이 되고 싶은 생각”도 그 과제에 연결된 바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쟁력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실업과 연결되어 있다. 연구 개발과 혁신을 거쳐 성취한 우리 회사의 경쟁력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다른 회사의 파산에, 그 직원의 실직에 기여할 것이다.[57] “세계적인 제철소 직원”이 되면 나의 일자리는 당분간 (또 다른 “세계적인 제철소”가 등장할 때까지) 유지될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제철소의 직원들은 실업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임금 노동에 의지하는 생계는 자본의 일원이 된다는 점에서 기업 간 전쟁에, 다른 누군가의 삶의 파괴에 연루되거나 지구적인 경쟁 시장의 변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른 생계 수단이 전무하다시피한 노동자들은 IMF 위기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본의 공모자가 되었다. 나(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임금이 필요했고, 그래서 임금을 줄 기업이 필요했으며, 이는 기업을 살리기 위한 노동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 노력을 비웃고 싶은 게 아니다. 기업을 망하게 내버려 두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생계를 위한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생계가 임금에 좌우되는 상황에서 기업은 우리 생계의, 삶의 유일한 구원자로 등장하고, 이는 먹고 살기 위해 (대통령의 말처럼) 기업이 잘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출현한다. 그러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결국 기업이 노동자를 마구 부릴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살기 위해) 기업이 잘되려면, 기업이 노동자를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노동자는 살기 위해 자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극단적인 경우, 끊이지 않는 산업재해에서 보듯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기업을 지켜야만 한다. 이런 아이러니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살기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해야하는 상황을 왜 감수해야만 할까?[58]
마리오 뜨론띠는 노동계급이 자본과 대립하려면 우선 자신이 자본의 일부임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러한 자신과 싸워야 한다. “자본과 싸우기 위해 노동계급은 자본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59] 이러한 생각은 “노동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 “노동이 되는 것에 대한 노동력의 거부”를 제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60] 하지만 노동(‘을 위한’이 아니라) ‘에 대한’ 투쟁은 다른 재생산 기반 없이 가능하지 않다. 그럴 때 우리는 살기 위해 죽음까지도 감수하며 일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수용하게 된다. 다른 재생산 기반이 없을 때, 우리는 임금 노동을 삶의 생산보다 우선하게 되고, 전자가 없으면 후자가 불가능하다는 — 우리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회사 인간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회사 인간을 탓하기보다는 그러한 선택을 가져 온 물질적 조건을 살피고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가족 지키기와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 가족이 이전의 젠더 규범을 답습하면서 그 안의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억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의 비극적인 결과를 우리는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러므로 별다른 물질적 기반이 없는, 그리하여 재생산 노동자를 쥐어짜서 겨우 유지되던 가족을 지킬 것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을 토대로 한 다른 재생산 양식을 구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하다.
요컨대 가족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서도 재생산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특정한 형태로 이끄는 장치로 작동했다. 그러나 이제 가족은 그 외부로 확장되어 기업과 국가에 투영되었으며, 이는 그 기구들을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할 ‘우리’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가족은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는 틀로 기능하면서 계급 간 힘 관계를 대체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분출될 수도 있었던 저항의 에너지를 노동으로 변환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7. 장치로서의 가족과 가족 가치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가족은 IMF 사태에서 여러 기능을 떠맡도록 의도되었다. 첫 번째 역할은 복지 정책이나 공동체적 부조가 부족한 상황에서 “삶의 최종 보루”로서 기능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IMF 이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맡은 역할이었지만, 1997년의 임무는 임금이 더 이상 안정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떠맡게 된 임무라는 점에서 달랐다. 물질적 토대가 약화된 상황에서 남편의 기를 살리고, 서로 응원하고 사랑하라는 정서적 해법이 쏟아졌지만, 기와 사랑으로 먹고 살 수는 없었기에 가정의 경제는 더욱 더 재생산 노동으로 보완되어야 했다. 물론 그 노동은 대개 여성의 몫이었다.
이렇게 위기 상황에서 가족 내 재생산 노동이 강화되는 현상은 IMF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서도 사회가 문을 닫아, 집이 학교가 되고 사무실이 되고 경로당이 되면서 재생산 노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증가분을 감당하는 이는 이번에도 대부분 여성이었다. 또한 집에 갇힌 이들에게 음식을 배달하고, 병실에 갇힌 이들을 돌보고, 환자를 치료하는 노동자들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탱했다. 위기를 맞아 비틀거리는 사회는 집 안팎의 재생산/돌봄 노동자를 쥐어짜내어 겨우 유지되었다. 이처럼 위기 상황에서 가족이 부각되고 (가족 내) 재생산 노동으로 위기 상황을 돌파하(도록 요구받)는 일은 복지를 떠넘기는 차원을 넘어 이제 국가가 위험을 관리할 수 없다는 사실의 징후인지도 모른다. 경제 위기뿐 아니라 생태 위기 등 각종 위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복합 위기 상황에서 이러한 관리 불가능성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61] 가족이 알아서 위기를 헤쳐 나가는 재앙적 미래를 피하기 위해 다른 상호부조 관계가 절실히 필요하다.
IMF 시대 가족의 두 번째 역할은 기업과 국가를 다르게 상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IMF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주체라기보다 나와 함께 IMF에 맞서 싸우는 동료들의 연합체로 말이다. 이는 ‘우리 가족-회사-나라 대 IMF’라는 구도 하에서 상상된 것으로, 이를 통해 IMF라는 ‘적’과 맞서는 ‘우리’ 안의 차이와 차별과 위계와 착취는 제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IMF가 우리 가족-회사-나라를 파괴하는 외부의 적으로 이해되면서 ‘저항’은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되었다. 가족, 기업, 국가는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지켜져야만 했다.
결국 가족은 우리가 삶을 재생산하거나 사태를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을 걸러내고 특정한 방식으로만 상상하게 하는 장치였다. 그 장치는 삶을 살아가고 문제를 제기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잠재적인 욕망들을 포획한다. 이러한 장치는 왜 필요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가족이 자본에게 갖는 두 번째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IMF 시기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담론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적인 복지를 대신하는 경제적인 비용 절감(자본에 있어 가족의 첫 번째 가치)의 측면이 분명 있었다.
「효사상」이 쇠퇴하지 않았다면 노인들의 노후 사회보장은 상당히 서양과 달리 우리의 경우 가정 안에서 해결되었을 것이다. 「자녀교육」도 부모들이 잘 시켜왔으면 노인문제가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부권」도 마찬가지이다. 부권이 서 있다면 부모를 버린다든가, 부모를 타살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62]
프리드먼과 유사하게[63] 효사상이 살아있었더라면 사회보장이 가정 안에서 해결되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하는 이 기사는 모든 문제가 가정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대처와 공명한다. 이렇게 가족으로 복지를 대체하여 재정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는 이후 <건강가정기본법> 제정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2003년 3월 27일에 열린 ‘건강가정육성기본법[64]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발제자로 참석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은 “가족 해체 현상 급증”으로 “국가의 지출부담이 증가하고” 있음을 우려하면서 “건강가정”을 “아동문제, 노인문제, 여성문제 등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장치”로 이해한다.[65] 이날 발제문에 포함된 건강가정육성기본법(안) 14조는 ‘기본계획 수립의 추진 방향’을 “가정의 자립 증진”, “가정과 사회의 연계를 통한 국가경쟁력 제고”, “가족해체 예방을 통한 사회비용 절감”의 세 가지로 정리했다. 국가의 도움 없이 알아서 살아갈 뿐 아니라 여러 사회 문제를 예방하여 재정을 절약하는 ‘건강 가정’을 ‘육성’하는 것이 이 법안의 목적인 것이다. 김혜경은 건강가정기본법이 통과된 데는 “가족강화를 통해 복지 부담을 줄여보려는 국가의 재정적 입장이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한다.[66]
이처럼 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파악된, 자본에 있어 가족의 첫 번째 가치 — 자본을 위해 무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 — 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생적인 복지 원천으로서 어떻게든 자급자족하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그렇게 ‘알아서 살아가는’ 가족을 만들기 위해 IMF 사태 당시 요구된 것은 ‘남편 기 살리기’라는 비물질적 해법과 재생산 노동 강화라는 물질적 해법이었다. 이 두 가지 모두 여성의 몫이었으며, 그로 인해 여성은 쉽게 IMF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인물로 이야기되었다.[67] 이러한 가족의 경제적 기능은 이미 IMF 이전부터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위기를 맞아 더욱 강하게 요청되었으며, 이는 앞에서 본 것처럼 때로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기능은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향후 복합 위기 국면에서 더욱 문제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1997년의 비극을 지금 다시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가족을 강조하는 이유가 국가의 복지를 대신하여 비용을 절감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이 사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질서 유지 측면에서 큰 공백을 만들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제하기는커녕 — 그리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는커녕 — 오히려 일자리에서 내쫓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질서 유지 수단으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사람들을 내쫓으면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여기서 가족은 임금 노동의 공백을 메우는 질서 유지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가족을 새롭게 가치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불혹의 나이에, 한창 일해야할 때, 새삼스레 가족을 위해, 아니 가족이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해 퇴직한 가장이 있다. 강○○씨(40·경기 성남시 분당신도시). 작년까지만 해도 학습지 회사인(주)대교 대표이사 부사장이었다. … 오늘날 굴지의 학습지 회사를 만든 그였지만 작년 12월말 그만뒀다. 그에게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인생에서 직장이 모든 것은 아니다. 좀 더 본질적인 것을 찾아보자, 어렴풋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자산인 ‘남는 시간’을 아이들과 가정에 투자해 보세요. 세상이 힘들수록 더 빛나는 가치가 가정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가정을 가꾸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십시오.”[68]
아마도 사정이 별로 나쁘지 않을 사람의 이야기를 마치 누구라도 선택할 수 있는 일인양 쓰고 있는 이 기사는 가정이 직장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곳임을 강조한다. 이는 회사를 가족처럼 여겼거나 혹은 삶의 의미를 그곳에서 찾고자 했으나 이제는 내쫓긴 이들에게 그들이 몰두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서 가족을 제시한다. 앞서 살펴본 <아버지 헌장>처럼 실직한 아버지들에게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새로운 아버지상이 제시되었는데, 이것 역시 수평적인 가족 만들기의 기획이라기보다 아버지에게 새롭게 몰두할 수 있는 곳으로서 가족을 제시하는 기획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처럼 노동이라는 사회 질서 유지 수단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떨어져 나간 이들에게 새롭게 몰두할 무언가 — “세상이 힘들수록 더 빛나는 가치”로서의 가정 — 를 제시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 유지 수단의 필요라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우려를 전하는 기사는 그러한 수단의 필요성을 방증한다.
실업이 장기화할수록 실업자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뭉치게 된다. 이미 고실업의 프랑스·독일 등에선 실업자 시위를 전하는 외신보도가 심심찮게 들린다. 실업자동맹이란 말도 낯설지 않다. “우리 실업의 특징은 ‘사회보장 대책이 없는, 고금리 시대의 장기 실업’입니다. 더 이상 개인 실업자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그러니까 재취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고금리 대출금 상환에 몰리고 그런 개인의 상황이 하나둘 모이면 이들이 사회세력화하는 건 불가피한 일입니다.” 유럽의 실업사태를 연구해온 가톨릭대 조돈문 교수(노동사회학)는 “이미 실업 수준이 위험수위에 달한 상황에서 이것이 몇 달간 계속된다면 정치적 공황상태마저 우려된다”고 말했다.[69]
보건복지부가 최근 실태조사를 벌여 작성한 ‘서울지역 도시노숙자 실태조사 결과보고서'는 "실업자, 특히 일용직 실업자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가시화되지 않으면 많은 실직노숙자가 범죄집단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신규 실직노숙자는 일자리를 제공하면 일할 의사가 있으나 가출 1~2개월이 지난 실직자는 가족과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지며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변한다"며 "불량성 부랑인과 어울려 집단화되면 매우 거칠어지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며 부랑인 선도시설에 수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70]
실업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세력화하여 실력 행사를 하거나 범죄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이들을 직장으로 돌려보낼 수 없고 — 다시 말하면 적절한 관리 수단 밑으로 밀어 넣을 수 없고 — 재정 지출로 이들을 모두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가족만큼 저렴하고 간편하게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수용할 수 있는 기관이 또 있을까? “어려운 때일수록 가정 구성원이 화합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야 사회가 건전해진다”[71]는 식의 무의미한 발언이 계속해서 기사에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각종 불만이 폭발하여 기존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시대에 가족은 그 모든 불만을 도덕적 가치로 봉합하는 장치로 의도되었다. 또한 기업과 국가를 일종의 가족으로 포장하는 일 역시 IMF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이들과 피해자를 혼란스럽게 뒤섞으면서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사회적 소요를 예방한다.
요컨대 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파악된, 신자유주의 시대 가족이 자본에게 갖는 두 번째 가치는 신자유주의 자본이 노동계급을 공격(정리해고)하며 역설적으로 취약하게 만든 지배·관리 수단(임금 노동)을 보완하는 것이다. 임금 노동이라는 삶의 대표적인 경로가 파열되어 삶에 대한 의지와 욕망이 갈 곳을 잃고 사회에 소란을 일으키거나 특이하게 분출할 수도 있었던 시기에, 그 다종다양한 욕망들이 다시 질서정연하게 흐를 수 있는 수로를 제공함으로써 말이다. 그러한 욕망들을 흡수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이러한 가족의 정치적인 기능 역시 이미 이전부터 어느 정도 작동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금 노동 일자리가 줄어든 상황에서 가족이 질서 유지 기능을 보완한다는 점(그리고 그에 따라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저성장, 고용 불안정 심화,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 등 이미 가시화된 현상들이 앞으로 일자리의 축소를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그 예측이 펼쳐질 세계에서 가족은 1997년에 수행했던 보수적인 역할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그 시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반면교사로 남아 있다.
8. 결론
너나 모두 힘겨운 IMF시대. 그러기에 가족간 사랑과 믿음은 다른 무엇보다 큰 힘이 된다. 교보문고가 4월부터 넉 달 동안 공모한 ‘IMF 위기극복 주부 글짓기 대회’. 다른 백일장과 달리 어려운 경제현실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과정에 주제를 제한했다. 전국에서 쏟아진 3백여편의 사연들. 삶을 떠받치는 버팀목은 역시 가정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가슴 ‘찡하게’ 전달한다.[72]
IMF 시기에 이처럼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다. 주로 아내, 아들, 딸이 “풀이 죽은 가장”을 위해 “용기를 불어넣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그 행사들은 참여자들에게 “삶을 떠받치는 버팀목은 역시 가정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전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진실이 문제다. 이는 다른 버팀목, 가령 공공복지의 결핍을 뜻할 뿐 아니라 우리가 불어넣는 용기가 가정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사들은 결국 우리가 가정 안에 계속 매몰되도록 함으로써 가정 바깥을 돌봄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가족이라는 섬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진 군도로서의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문제적인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폐쇄적인 가족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삶을 떠받치는 버팀목”을 훨씬 더 다양하고 넓게 다지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남는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가족의 경계를 넘어 서로 도우며 살 수 있는가?
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는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에 대한 사례 연구에서 이에 대한 한 가지 힌트를 제공한다.[73] 우리가 서로 도우며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자기 책임을 강하게 내면화한 개인들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가와 사야카가 말하듯 ‘성실히 노력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가능한 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립하려는 사람은 ‘폐 끼치기’를 주저하며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이에 대해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대안은 강한 상호 응답의 세계다.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깊고 친밀한 이들로 이루어진 관계. 아마도 가족이 이러한 관계의 대표가 아닐까? 아내는 가족을 돌보고, 남편은 일을 하러 간다. 혹은 그렇게 하기를 사회적으로 기대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IMF 시대의 가족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관계는 관계 내에서 부담을 발생시키거나 위계적이기 쉽다. 내가 더 돌보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입장일 때 ‘나’는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명령하거나 피해의식을 갖는다. 주고받는 돌봄을 계산하며 내가 늘 더 돌본다고, 상대는 나보다 늘 덜 돌본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그들이 해준 것과 그들로부터 받은 것,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것과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셈하는 장부에 사로잡혀 있다.”[74] 이러한 계산은 쉽게 관계에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강한 친밀 관계는 서로를 잘 돌보아야 한다는,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부담 역시 관계를 악화시킨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러한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부담을 발생시키는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보았던 가족 살해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건은 강한 호수성으로 인한 책임과 부담의 문제를 너무나 비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자기 책임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갇힌 이들이 흩어져 있는 ‘부재하는 관계’의 세계와 반대로 관계 속에서 할당된 역할에 사로잡혀 부담에 짓눌린 이들의 강한 호수성의 세계는 어떻게 보면 서로 닮아 있다. 자기 책임에 사로잡혀 관계를 기피하거나 관계 속 책임에 사로잡혀 결국 관계를 멀리하거나. 관계에서 부담을 느낀 이들은 인간관계 자체를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관계란 성가신 것이다.
이와 달리 오가와 사야카가 보여주는 세계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세계다. 책임이 느슨하고 지연되는 약한 호수성의 세계라고 할까. 강한 호수성이 폐쇄적이라면, 약한 호수성은 열려 있다. IMF 시대의 가족 지키기는 강한 호수성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시도였다. 오가와 사야카는 이와 달리 재난이나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사귀고, 깊이 알아가고, 크게 신뢰하고, 확실한 인연을 만든다는 발상과는 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75]고 주장한다. 그가 관찰한 홍콩 탄자니아 상인들이 바로 그 다른 아이디어를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인데, 그가 보기에 이들은 어떤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 같은 건 없다”[76]고 인식한다. 그러니까 상대를 고정된 사람으로, 즉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라도 신뢰할 수 있다’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77] 바로 이러한 관점이 느슨한 상호지원 네트워크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스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인간, 완벽한 인간이 되게끔 노력해서 자신의 가능성에 베팅하거나 또는 가치관과 자질이 서로 비슷한 동질적인 소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이에 따른 호수성 및 응답할 의무에 확실히 응답해가는 대신에, 능력, 자질, 선악의 기준, 인간성이 다른 사람들과 가능한 한 많이 느슨하게 연결되고 타자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우발적인 응답’의 가능성에 베팅하는 것은 ‘이질성과 유동성이 높고 누가 응답해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불합리한 전략이 아니다.[78]
요컨대 서로를 잘 아는 강한 친밀성의 세계를 구축하기보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누구라도 신뢰할 수 있는 상호지원 네트워크를 폭넓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열어젖힌 유연성과 불안정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쩌면 마찬가지로 유연하고 불확실한 네트워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해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강한 호수성의 세계가 구성원들에게 부담을 안기면서도 동시에 안정감을 준다면, 약한 호수성의 세계는 부담을 안기지 않는 대신 안정감도 주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마도 부담과 안정 사이의 절묘한 배합은 실제의 관계 맺기에서 구체적으로만 발견되겠지만, 그것이 가족이라는 닫힌 세계를 넘어설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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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garet Thatcher, “Interview for Woman’s Own,” Margaret Thatcher Foundation(1987 Sep 23), https://www.margaretthatcher.org/document%2F106689(2026.2.11.)
[2] Ibid. 강조는 인용자.
[3] 물론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재생산 양식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신자유주의에서 강제되는 가족을 통한 재생산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커먼즈로서의 다른 재생산 양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한디디, 『커먼즈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를 넘어서 삶의 주권 탈환하기』(빨간소금, 2024); 권범철, 『예술과 공통장: 창조도시 전략 대 커먼즈로서의 예술』(갈무리, 2024a).
[4] Silvia Federici, “The Construction of Domestic Work in Nineteenth-Century England and the Patriarchy of the Wage,” Patriarchy of the wage: Notes on Marx, gender, and feminism, Oakland, CA: PM Press, 2021.
[5] Alfred Marshall, Principles of economics: An introductory volume, London: Macmillan and Co, 1938, p.195; Federici, op. cit., p. 101에서 재인용.
[6] 권범철, 「가족을 공통하기: 예술가 근족과 “아트 스피릿 머신”」, 『문화와 사회』 32(2)(한국문화사회학회, 2024b).
[7]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이영주 · 김현지 옮김, 「여성과 공동체 전복」, 『페미니즘의 투쟁: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부터 삶의 보호까지』(갈무리, 2020); 실비아 페데리치, 황성원 옮김, 『혁명의 영점: 가사노동, 재생산, 여성주의 투쟁』(갈무리, 2013).
[8] 제이슨 W. 무어, 김효진 옮김,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자본의 축적과 세계생태론』(갈무리, 2020), 44쪽.
[9] 많은 이들이 커먼즈의 (파괴가 아니라) 흡수를 나름의 언어로 표현해왔다. 제이슨 무어는 이를 전유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상품체계 바깥의 무상 일을 찾아내고 확보하여 자본의 회로로 보내는 비경제적 과정”을 가리킨다(무어, 앞의 책, 45쪽). 애나 칭은 이를 구제(salvage)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를 써먹는 것”이며 “축적은 항상 구제에 의존한다.”(애나 칭, 노고운 옮김,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현실문화, 2023), 120쪽).
[10] 이 글에서 장치(dispositif)란 푸코, 아감벤 등의 용법을 따른 것으로, 다중의 에너지와 욕망을 포획하여 기존의 질서로 흡수하는 메커니즘을 뜻한다. 아감벤은 장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푸코가 말하는 장치는 이미 아주 넓은 부류인데 이것을 더 일반화해 나는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부를 것이다. 따라서 감옥, 정신병원, 판옵티콘, 학교, 고해, 공장, 규율, 법적 조치 등과 같이 권력과 명백히 접속되어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인터넷 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등도, 그리고 (왜 아니겠는가마는) 언어 자체도 권력과 접속되어 있다.”(조르조 아감벤 · 양창렬, 『장치란 무엇인가?/장치학을 위한 서론』(난장, 2010), 33쪽).
[11] Melinda Cooper, Family values: Between neoliberalism and the new social conservatism, New York: Zone Books, 2017, p. 21, 24.
[12] Ibid., pp. 57-59.
[13] Ibid., p. 63.
[14] Ibid., p. 73.
[15] Ibid., pp. 62-63.
[16] 박완서는 자신의 단편, 「부처님 근처」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러한 ‘이상적’ 인간형을 서술한다. “너도 결혼해야지. 처자식만 알 착실한 남자하고. 어느날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그말에 대번에 동의했다. 처자식만 아는 착실한 남자라는 말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처자식의 먹이를 벌어 들이는 것 이외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섣불리 참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남자,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박완서, 「부처님 근처」, 『도둑 맞은 가난』(민음사, 1981); 조혜정, 「한국의 사회변동과 가족주의」, 『한국문화인류학』17(한국문화인류학회, 1985)에서 재인용).
[17]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Chico, CA: AK Press, 2017, p. 13.
[18] 권범철, 앞의 글(2024b) 참고.
[19] 김동춘, 「유교(儒敎)와 한국의 가족주의-가족주의는 유교적 가치의 산물인가?」, 『경제와 사회』 55(비판사회학회, 2002); 김혜경, 「가족/노동의 갈등구조와 ‘가족연대’ 전략을 중심으로 본 한국가족의 변화와 여성」, 『가족과 문화』 14(1)(한국가족학회, 2002); 손승영, 「한국의 가족주의와 사회적 과시-지속과 변화」, 『담론201』 9(2)(한국사회역사학회, 2006); 조혜정, 앞의 글.
[20] 김수영, 「한국의 산업화과정과 가족 · 여성」, 『뉴 래디컬 리뷰』(7), 2001; 박소진, 「‘자기관리’와 ‘가족경영’ 시대의 불안한 삶」, 『경제와사회』(84)(비판사회학회, 2009); 박혜경, 「경제위기시 가족주의 담론의 재구성과 성평등 담론의 한계」, 『한국여성학』 27(3)(한국여성학회, 2011); 임인숙, 「대량실업 시대의 가족 변화」, 『경제와사회』(40)(비판사회학회, 1998); 조혜정, 앞의 글.
[21] 김혜경, 「부계 가족주의의 실패?: IMF 경제위기 세대의 가족주의와 개인화」, 『한국사회학』 47(2)(한국사회학회, 2013); 김혜영, 「‘동원된 가족주의’의 시대에서 ‘가족 위험’의 사회로」, 『한국사회』 17(2)(한국사회연구소, 2016); 김수영, 앞의 글.
[22] 박혜경, 앞의 글, 98쪽.
[23] 맛시모 데 안젤리스, 권범철 옮김, 『역사의 시작: 가치 투쟁과 전 지구적 자본』(갈무리, 2019), 81쪽.
[24] Cooper, op. cit., pp. 14-15.
[25] 김재순, 「조금 적게 분배받더라도」, 『한국일보』, 1997.01.07.
[26] 「이젠 ‘강한 아버지’ 모습 그리자/드라마마다 ‘고개숙인’ 아버지」, 『한국일보』, 1997.02.05.
[27] 「「건강한 아버지」 상 재정립/16개 남성단체 「아버지헌장」 마련」, 『세계일보』, 1997.01.04. 강조는 인용자.
[28] 이런 점에서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아버지에게 자녀 양육에 대한 공동책임을 지우는 것은 보다 평등한 가족 만들기보다는 일자리에서 쫓겨나 갈 곳을 잃은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기 위한 시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29] 「실직공포증 신풍속도/고실업시대」, 『한국일보』, 1997.01.18.
[30] 「IMF 시대/남편 기살리기 5계명/남편을 왕처럼 모셔라」, 『국민일보』, 1997.12.10.
[31] 김성우, 「氣를 살리자」, 『한국일보』, 1998.03.21.
[32] 「남편기 살리는 10마디 보약보다 낫다」, 『국민일보』, 1998.02.04.
[33] 「실직/화목한 가정이 「든든한 버팀목」」, 『국민일보』, 1998.02.03.
[34] 이인화, 「최악에도 「사람」은 다치지 말자」, 『세계일보』, 1998.05.20. 강조는 인용자.
[35] 「「좋은가정 만들기」 운동 확산(순결한 가정 건강한 사회)」, 『세계일보』, 1997.05.31. 강조는 인용자.
[36] 가정의 기는 국가의 기 — 국가 경쟁력으로도 불리는 — 를 살리기 위한 출발점으로 종종 이해되었다.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제 가정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국가경쟁력이 좌우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거국적 「건강한 가정운동」이 필요한 것이다.”(「신 가정문화/가정을 바로 세우자」, 『세계일보』, 1997.02.01.). 이 논리를 따르면 IMF 사태 같은 경제 위기 역시 가정의 기를 살리지 못한 가족 구성원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37]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일하는 마누라가 다시 보이더군. 전엔 허영심으로 일하는 것 같아 못마땅했는데 요샌 든든한 동지같다고나 할까.” 얼마전 만난 한 친구의 고백이다. 평소 “여자가 살림이나 하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얼마전 회사에 감원태풍이 시작되자 맞벌이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털어놓았다.”(「등 떼밀리는 여성들」, 『동아일보』, 1998.06.28.).
[38] “요즈음 구조조정이나 경비절약을 이유로 ‘정리해고’를 하는 기업들에서 자녀를 2명 넘게 둔 여성은 최우선 정리대상이라고 한다. 그 뒤를 자녀 한 명인 여성, 기혼여성, 장기근속여성, 남성이 잇고 있다. 미혼인 여직원들에게는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심리적 압력을 넣고, 임신한 여성에게는 ‘휴가를 가라’는 식으로 사직을 강요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왜 ‘여성 먼저’ 해고인가」, 『한겨레』, 1998.01.17.). 여성의 집밖 노동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은 부부가 같은 기업에서 일하는 경우 여성만 해고한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농협은 사내결혼한 직원 7백52쌍에 대해 부부 중 1명씩을 명예퇴직시켰으며, 해고자의 91%에 달하는 6백88명이 여직원들인 것으로 드러”났다(「농협 ‘여성차별 해고’ 소송 기각」, 『SBS 뉴스』, 2000.11.30.).
[39] 「호화외식 자제(경제위기 극복/우리 모두 나서자: 5)」, 『서울신문』, 1997.11.28. 강조는 인용자.
[40] 장석환, 「과소비와 과외」, 『서울신문』, 1997.12.31. 강조는 인용자.
[41] 「IMF 시대/남편 기살리기 5계명/남편을 왕처럼 모셔라」, 『국민일보』, 1997.12.10.
[42] 「평범한 주부의 힘겨운 새해 구상」, 『경향신문』, 1998.01.06.
[43] 「다시 일어서자(5) “낭비=죄악” 자린고비 만세!」, 『동아일보』, 1998.01.09.
[44] 조혜정, 앞의 글, 87쪽.
[45] 「<위기의 가장 위기의 가정> 1. 무거운 가장의 짐」, 『중앙일보』, 1997.06.25.
[46] Bue Rübner Hansen and Manuela Zechner, “Extending the Family: Reflections on the Politics of Kinship,” Camille Barbagallo, Nicholas Beuret and David Harvie eds., Commoning: With George Caffentzis and Silvia Federici, London: Pluto press, 2019, p. 152.
[47] 마리아 미즈는 삶의 생산 혹은 자급 생산을 “직접적으로 삶을 창조, 재창조, 유지하는 데 쓰이며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모든 일”로 정의하며 “상품이나 잉여가치 생산”과 대비시킨다. “자급 생산의 목적은 ‘삶’인 반면, 상품 생산의 목적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생산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돈’이다.”(Maria Mies, “Towards a Methodology for Feminist Research,” Gloria Bowles and Renate Klein eds., Theories of Women’s Studie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3; 마리아 미즈 · 베로니카 벤홀트-톰젠, 꿈지모 옮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동연, 2013), 55-56쪽에서 재인용).
[48] 「‘IMF 자살’ 올들어 하루 30명 꼴」, 『국민일보』, 1998.04.22.
[49] 「“가족에라도 보상을 …”/군 구타 후유증 비관/30대 가장 목숨끊어」, 『문화일보』, 1998.02.27.
[50] 「[경제위기와 가정] 이혼 급증세…IMF 탓인가」, 『중앙일보』, 1998.05.21. 몇몇 폭력 사례를 살펴보면 “△IMF퇴직이 부인탓이라며 아내를 구타 △실직 남편이 노름에 빠져 빚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거부하면 폭력 행사 △보수가 성에 안찬다며 일도 안나간채, 살림 못한다고 트집잡아 아내 구타 △“다른 부인은 돈을 번다, 돈벌어 오라”며 구타 △40대 중반 취업주부 회사에서 감원바람이 불었는데 대상에서 빠지자 혹시 사장과 깊은 관계라 살아 남은것 아니냐 억지부리며 의심하고 구타” 등이 있다(「IMF 때문에… 아내들이 더 시달린다」, 『서울신문』, 1998.05.18.).
[51] 「[IMF형 매질] 가장실직 화풀이 가정 폭력 급증」, 『중앙일보』, 1998.04.27. 강조는 인용자.
[52] 「삼성 · 대우 · 기아 등 사장님 편지로 고통분담 호소」, 『중앙일보』, 1998.01.27. 강조는 인용자.
[53] 「반도체수출 아남산업 … “근로자 60% 귀향반납”」, 『중앙일보』, 1998.01.26.
[54] 「“그래도 희망은 …”/「한보」 근로자 안○○씨의 회사 사랑」, 『국민일보』, 1997.02.05. 강조는 인용자.
[55] 「일터에서 새해맞은 서울엔지니어링 사원들/IMF 녹이는 용광로」, 『경향신문』, 1998.01.03. 강조는 인용자.
[56] 칼 마르크스, 김수행 옮김, 『자본론 제I권(하)』(비봉출판사, 2001), 718쪽.
[57] Massimo De Angelis, “Reflections on alternatives, commons and communities or building a new world from the bottom up,” The Commoner 6, 2003.
[58] 이러한 아이러니는 위기 상황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주디스 버틀러는 팬데믹 시기에 경제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예방 조치를 해제하는 결정이 누군가의 죽음을 가정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로 인해 노동자들이 겪는 이중 구속을 이렇게 언급한다. “실로 많은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죽게 하더라도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 팬데믹 상황하에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일하러 가지만 바로 그 일이 바로 그 노동자의 죽음을 재촉한다. ... 이로써 자본주의의 오래된 모순은 팬데믹의 상황하에서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주디스 버틀러, 김응산 옮김,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창비, 2023), 84, 88쪽).
[59] Mario Tronti, David Border trans., “Factory and society,” Workers and Capital, London: Verso, 2019, p. 31.
[60] Mario Tronti, David Border trans., “The Struggle Against Work!,” Workers and Capital, London: Verso, 2019, p. 273.
[61] 이러한 지점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 유출과 더불어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를 비롯한 인프라의 붕괴로 인한 재난 속에서 정부 당국의 주요 우선순위는 재난으로 인해 불가피해지고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드는 사후 관리 책임으로부터 자신을 면제하는 것이었다. 정부도 기업도 책임을 질 수 없고 지지 않으려 하는 상황에서 결국 방사성 연료를 해수로 식히는 비극적인 조치를 실행해야 했던 이들은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또한 방사능 위기 속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이들은 어머니들이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 어머니나 일상적인 필요를 돌보는 이들은 정부 보고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아버지나 가장은 만사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아내를 피해망상 환자라고 불렀다. ... 대재앙이 일어난 후 사람들을 방사선으로부터 보호하고 정부의 무책임에 항의하는 노력의 대부분을 이끈 사람은 어머니들이었다.”(Sabu Kohso, Radiation and revolutio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20, p. 35.).
[62] 「되살려야할 덕목들/가정을 바로 세우자」, 『세계일보』, 1997.02.01.
[63] 프리드먼은 한때 자녀들로 하여금 늙은 부모를 돌보도록 강제했던 혈연의 자연적 의무들이 복지국가를 통해 비인격적인 사회보험 체계로 대체되었으며, 그 장기적 효과는 가족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주장한다(Cooper, op. cit., p. 58.).
[64] 이후 법안 논의 과정에서 <건강가정기본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65] 김승권, 「건강가정육성기본법 제정의 필요성과 법(안)」, <건강가정육성기본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3. 3. 27.
[66] 김혜경, 「‘건강가정기본법’의 제 · 개정을 둘러싼 담론에 대한 연구』, 『여성과 사회』(16), 한국여성연구소, 2005, 82쪽.
[67] 물론 ‘여성’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하며 이를 다루지 않는 것은 본 연구의 여러 한계 중 하나이다. 다만 여성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계급으로서의 ‘여성’ 문제는 분명 존재하며, 본 연구는 이 문제에 집중한다.
[68] 「前 대교 부사장 강○○씨 “가족 위해 퇴직하고 가정에 ‘복직’했어요”」, 『동아일보』, 1998.03.17. 강조는 인용자.
[69] 「실업시대의 한국인 그 우울한 자화상」, 『한겨레』, 1998.03.23.
[70] 「실직 노숙자 범죄에 물든다…서울만 2천여명 추산」, 『중앙일보』, 1998.05.13.
[71] 「“가정을 살리자” 사회단체 나섰다」, 『세계일보』, 1998.10.03.
[72] 「[출판화제]주부들의 IMF 극복사연 모음」, 『중앙일보』, 1998.08.20. 강조는 인용자.
[73] 본 연구는 가족이라는 강한 호수성의 관계가 지닌 문제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며, 오가와 사야카가 제시하는 약한 호수성의 관계는 다른 관계를 상상하기 위한 참고로만 다룬다.
[74] 오가와 사야카, 지비원 옮김,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갈라파고스, 2025), 250쪽.
[75] 같은 책, 260-261쪽.
[76] 같은 책, 92쪽.
[77] 같은 책, 277쪽.
[78] 같은 책, 264쪽.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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