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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니 비니! нi вiйнi! (전쟁 반대!)

전쟁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장애, 『듣지 않는 자들의 공화국』

by 인-무브 2026. 5. 20.

전쟁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장애

: 『듣지 않는 자들의 공화국』(일리야 카민스키, 박종주 역, 가망서사, 2025)

 

 

 

길혜민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바센카 주민들은 고유한 수어를 고안했다. 일부는 다양한 전통(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미국 등의 수어)에서 유래했다. 당국이 모르는 언어를 만드느라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도 있다.

 

 

 

 

 

전쟁은 어떻게 시를 뚫고 나타났는가. 

 

  젊은 부부가 있다. 두 사람이 한번에 들어갈 만큼 커다란 사랑을 입고, 부푼 웨딩드레스  속에서 결혼을 했다. 상대를 향한 갈망을 표현하면서... 말하자면 이런 장면을 살았던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등에 올라탄다. 올라탄 모습 그대로 욕실로 달려간다. 젖은 바닥 위에서 그들은 미끄러진다. 넘어진 그대로 시원하게 웃어넘기면 아프지 않다. 이들에게는 비눗물을 찍어 우리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는 것, 그것이 지금 가장 신성한 일이다. 주근깨를 가진 너의 어깨, 그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머리칼을 보여주고, 오늘은 함께 시원한 이불을 덮고 자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둘’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 속에서 레몬 달걀 샴푸로 풍성한 머리를 씻던 소냐 바라빈스키, 그녀는 아이를 임신한다. 그녀의 뱃속에는 해마만한 아이가 자랐다. 

  이처럼 사랑만이 이기는 나날들이 있다. 모든 것의 논리, 당위, 질서를 압도하는 사랑의 시간들이 있기에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서로 힘을 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이 세계에 내놓게 된다. 그 사랑이 언젠가 우리를 배신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시절이 있다. 우리가 서로의 사랑을 배신하거나, 숱한 일상의 시험대에 오르기도 전에 소냐 바라빈스키는 마을에 들어온 군인에 의해 죽는다. 

 

 

  “나는 시인은 못 돼, 소냐, 네 머리칼 속에 살고 싶어.”
(「전쟁이 나기 전의 결혼식에 관하여」 부분)

 

 

 

  둘이 하는 것은 모두 시가 될 것 같았던 소냐, 그리고 소냐의 알폰소는 시처럼 살았으나 시의 바깥으로 쫓겨난다. 마을에 군인이 들어오게 되면서 광장은 집회가 금지된 장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냐와 알폰소는 광장에서 인형극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벤치와 전신주 뒤에 숨어서 그들의 공연을 본다. 또 누구는 나무 위로 올라가 공연을 보고, 그들의 조카이자 농인(deaf, 聾人)인 페탸는 무대 앞에서 극을 보다가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총에 맞은 페탸의 시신을 광장에 그대로 두고, 사람들은 이제부터 농인이 되기로 한다. 불현듯 들리지 않는다며, 수화로 대화한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우리 나라, 군인들의 소리를 듣지 않기로 한다.
 페탸의 이름으로 우리는 거부한다.
오전 여섯 시, 군인들은 골목길에서 소녀들에게 알랑대지만 소녀들은 제 귀를 가리키며 지나친다. 여덟 시, 빵집이 군인 이바노프의 면전에서 셔터를 내린다. 그가 최고의 단솔 손님인데도. 열 시, 마마 갈랴가 막사 정문에 분필로 쓴다. 너희 말은 아무한테도 안 들려.”
 (「듣지 않는 봉기가 시작된다」 부분)

 

 

 

침묵에 관하여. 농인에게 적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막은 청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군인의 총에 맞은 소년이 죽은 마을 바센카에서 이제부터 언어의 매질은 공기가 아니다. 시민들은 군인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침묵과 무응답을 약속한다. 그 결과, 군인의 말을 듣지 않는 시민들은 부지기수로 체포된다. 소냐의 조카이자 농인인 소년 페탸가 죽기 전의 이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인형극을 보는 광장이 있었다. 글로 쓰노라면 서정시가 될 것 같은 평등한 약속이나 감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언어의 공동체였다. 그러나 군인이 마을에 등장하면서부터 마을은 자아, 언어, 감정이 일치되지 않는 곳이 된다. 환희의 노래가 될 수 있던 것들로부터 언어는 도망가고, 과거에 느꼈던 일치의 감각은 손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의 언어인 수화는 감시와 경계의 언어로 바뀐다. 입에서 입으로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세계, 몸을 통해 두려움과 생존의 가능성을 탐지하는 세계. 그래서 이 마을은 극의 세계로 나아가려 한다. 이를 ‘극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그 자신이 시가 아니어야 할 때, 어떻게 존재할까.

 

 

 

 

듣지 않는 자들의 공화국

 

 

 

 

 

 

  손으로 부르는 코러스, 으깨진 저항.

 

  희생된 소년의 농聾으로 저항하는 바센카 마을 사람들. 이들의 손은 신체들을 넘고 넘어 코러스가 된다. 흥얼거리는 리듬이 없어도, 악보에 씌어지지 않았어도 이들의 신체는 신호가 되어 마을의 위험을 알리고 저항하는 장애를 표현한다. 바센카에서 전쟁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은 농聾이다. 시는 농聾을 표현할 수 있을까. 또는 농聾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농聾과 시의 극단이 만나는 것을 저항으로서의 극시라 말할 수 있겠다. ‘극시’과 달리 ‘시극’은 공연을 지향하는 희곡의 형태이다. 이와 달리 ‘극시’는 상연에는 부적합하나 눈으로만 시를 소비하거나 독백의 감상적인 낭독에 머물지 않고, 시의 극적인 상황을 재현하거나 낭독하려는 의지를 표현한다. 위험의 언어가 문자로 전달되지 않을 때, 소리로 이해되기를 멈출 때 바센카는 소리와 문자라는 매개를 버리고 몸으로 저항하고 소통하게 된다. 

  따라서 이 저항은 발화자의 독백에 기대지 않는다. 방백에도 기대지 않는다. 서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기대고 멈추지 않는 흔들림이 되고자 한다. 소냐가 “체포 불응범”으로 잡혀 총살되고, 알폰소 마저 광장에서 줄에 매달려 죽을 때 사람들은 손에서 손으로 이 죽음을 기억하고 널리 알린다. 한편, 독자인 나는 그리고 당신은 이러한 저항은 저항이 될 수 있는지, 또한 이러한 방식의 저항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저항인가? 이 저항은 무엇을 산출하는가?

 

 

 

 

 

  제1막에서 신혼부부인 소냐와 알폰소가 죽고, 그들의 남은 아이, 이제 막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누슈카는 군인에 의해 거둬들여진다. 전쟁이 앗은 부모의 품을 대신하여 제2막의 화자인 마마 갈랴가 나타난다. 그녀는 아이를 빼돌린다. 마마 갈랴는 인형극을 하는 극장의 주인이다. 마마 갈랴가 운영하는 인형극장의 인형술사들은 그녀와 함께 비밀 저항군의 역할을 자임한다. 끝나지 않는 농聾은 마마 갈랴의 손을 거쳐 또다른 저항을 꿈꾸는 것이다. 우선, 그녀는 한동네 주민이었던 소냐와 알폰소를 대신하여 아이를 기른다. 아이를 기르면서 농聾의 화법인 몸으로 군인들을 홀리고, 군인들을 하나씩 없앤다. 그러한 마마 갈랴의 저항은 최소한의 저항, 또는 부수적인 피해를 부르는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 바센카 사람들은 마마 갈랴와 인형술사들이 벌인 군인 살인에 의해 자신들이 겪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마마 갈랴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전쟁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찾아내는 자이다. 시에 몸을 얹어 농聾의 언어가 되는 위반의 시. 위반의 힘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문을 열도록 한다. 

 

 

“그녀는 문 여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걸어
나가는 법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
(「마마 갈랴가 처음으로 저항한 날」 부분)

 

 

 

  인형극장을 운영하는 마마 갈랴는 이 지역의 섹스심볼임을 자처하는 자이다. 그러한 그녀가 소냐와 알폰소의 아이 아누슈카를 살려내기 위해서 숨어 지내기로 한다. 전쟁 속에서 페탸와 같은 아이가 죽는다. 그리고 그 어린 죽음에 저항한 소냐와 알폰소도 죽는다. 이 전쟁은 이제 막 태어난 아이 아누슈카를 고아로 만들고, 그 목숨까지도 풍전등화에 놓았다. 최고의 약자를 공격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 군인들의 행위는 이 시대 전쟁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상황이다. 팔레스타인 사람이 갇혀 있는 가자 지구에 쏟아지는 이스라엘의 폭격은 어린 아이를 겨냥한다. 또는 어린아이라고 해서 예외적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아서 무차별하게 아이들이 또는 임산부가 희생된다. 이는 비단 팔레스타인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2026년 3월 1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여자 초등학교를 무차별 공습하여 170명에 가까운 어린이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리야 카민스키는 “우리는 전쟁 통에도 행복하게 살았네”라는 작품을 이 시집의 대문으로 배치한다. “침대맡에서 미국이” 폭탄을 터트려서 “보이지 않는 집과 보이지 않는 집이 줄지어”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돈의 거리에서 돈의 도시에서 돈의 나라에서 우리 위대한 돈의 나라”의 침대맡에서 어린 아이의 침대가 폭탄에 의해 터지는 것을 본다. 그들이 마실 수도시설이 가루가 되는 것을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음식과 병원이 모두 눈앞에서 먼지가 되는 것을 보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평화로운 나라”에서 “전쟁 통에서 행복하게”살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평화로운 나라는 그가 망명한 미국일 것이다)

  저자 일리야 카민스키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1993년에 미국으로 망명한 자이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는 고향인 오데사로부터 떠난 지 이미 3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떠나온 고향이 러시아의 폭격을 받고 전쟁의 한가운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이 전쟁의 당사자임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듣지 않는 자들의 공화국』에 실린 여러 작품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전쟁이 격화될 때마다 SNS를 통해서 널리 퍼뜨려지기도 했다. 일리야 카민스키는 4살 때 유행병으로 인해 청력을 잃고,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보청기를 사용했다. 청력을 잃은 그에게 있어서 오데사의 폭발 소리는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폭력의 기억에서 기인한다. 미국 정착 이후 방문한 오데사에서 전쟁으로 인해 장애를 얻은 과거의 이웃을 마주친 그는 자신의 장애와 연결되는 전쟁의 문제를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상의 어떤 국지전도 국제 정치·경제의 이해관계가 얽힌 대리전”이라고 말한 편집자의 언급과 같이 강대국은 판돈을 대고, 산업을 무기를 팔고, 자본은 재건을 노린다는 사실은 전쟁을 감싸고 있는 이 작품의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에서 폭로된다.(박우진, 「출간 배경: 이방인의 감각으로 그림 모두의 전쟁」)  

  일리야 카민스키가 표현하고 시험하는 무대, 마을 바센카. 여기에서 벌어지는 농聾의 저항, 인형술사 여성들의 목숨을 건 군인 살해, 마을 공동체의 동요와 좌절 등은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의 가자 등지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본원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약자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도록 만드는 동일한 사건으로서의 강대국의 대리전인 바센카의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민족과 인종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갖고 ‘제노사이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2023년 12월 29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엔 산하 국제사법재판소에 이스라엘을 제노사이드 범죄 혐의로 제소했다. 남아공 의회는 이스라엘의 행동을 ‘아파르트헤이트’로 규정하고, 한 민족을 절멸하려는 시도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절멸하려는 시도를 할 때, 문제는 그 대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민족에 의한 타 민족의 운명이 결박되는 것은 다른 대지에서도, 반도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절멸의 시도를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더라도, 이 이름은 교묘히 다른 이름을 통해 살아남는 것. 일리야 카민스키는 이 시집의 마지막 작품 「평화의 시절에」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를 표방한 그 시절 이후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들이 휴대전화 속 경찰을 바라본다
경찰은 한 남자에게 운전면허증을 요구한다. 남자가 지갑을 꺼내려 하자 경찰은
총을 쏘았다. 차창 너머로. 쏘았다.

이곳은 평화로운 나라.

우리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간다.
치과에,
학교에 아이들을 데리러,
샴푸를 사러,
바질도 사러,

우리 나라는 경찰의 총에 맞은 소년이 길가에 누워 있는 곳,
몇 시간이나.

아이의 벌어진 입속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국가의 나신. 

우리는 본다, 보는
이들을 본다.

소년의 몸은 길가에 그저 소년의 몸처럼 누웠고─
이곳은 평화로운 나라
(「평화의 시절에」 부분)

 

 

 

  바센카에서 그러했듯이 소년의 몸에 총구를 겨누는 곳은 어디든지 전쟁 중에 있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흑인에 대한 여전한 린치, 어린 사람과 범죄자를 동일시하는 인종주의 혐오, 또는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고 믿는 잘못된 판단들) 없어져야 하는 이민자들을 향한 절멸의 시도. 또는 이민자들을 만들어 내는 군수산업.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아이, 그리고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이름이 죽어간다. 

 

  땅을 빼앗긴 자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반전! 니 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