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에서 땅으로: 하나의 여정을 위한 이정표들
Des réseaux au terrestre: repères pour un trajet
이자벨 스탱게르스
번역: 박동수

과학에 대한 물음은 분명 브뤼노 라투르의 작업 전반에서 일관된 주제이지만, 이 물음이 끊임없이 다시 다루어진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매번의 재검토마다 지난 40년간 나타난 문제들과 맞물려 있는 새로운 도전들에 응답하는 고유한 방식을 발명해왔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브뤼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과학 활동에 대한 그의 관점이 무엇보다도 인식론(épistémologie)의 지배로부터 과학을 해방시키려는 도전에 의해 방향 지어져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점은 내게 다소 놀라운 일이었는데, 내가 화학을 공부하던 학생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 철학 수업에서 처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단어가 바로 “인식론”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에게, 심지어 나중에 “과학전쟁”에 참여하게 될 과학자들 중 일부에게도 토머스 쿤은 오히려 “경성” 과학(정상 과학)의 특성을 정확히 짚어낸 인물이었다. “상대주의”라는 관념은 내게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다. 요컨대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에서 출발했고, 그래서 때때로 개와 고양이처럼 다투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나의 여정은 과학을 행하는 모든 방식이 다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나를 민감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인식론적 규범에 호소하지 않고 그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재양식의 탐구』에서는 혁신사회학센터에서 발전된 행위자-연결망(réseau) 이론이 [RES] 양식에 해당한다.[1] 그것은 탐구자에게 “자신이 따라가고 싶은 행위자들과 동일한 이동의 자유”를 제공하기 때문에 탐구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Latour, 2012, p. 43[국역본, 59쪽]). 분명 연결망이 확장되고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이 동원되는 방식은 나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지만… 하지만 동원의 모든 방식이 다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 “하지만(mais)”이 겨냥하는 전형적인 사례는 라투르가 『젊은 과학의 전선(La Science en action, 1989)』에서 따라간 한 연구소 소장의 여러 활동 중 하나에서 발견된다. 그 소장은 “판도린(pandorine)”이 뇌에서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그것이 단순한 인공물이 아니라는 것)을 동료들에게서 인정받은 뒤, 이 판도린을 일종의 혁명적 사건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동맹의 연결망을 짜기 시작한다. 그는 예수회 잡지에 판도린과 성 요한의 신비적 열정 사이의 연관성을 가정하는 글을 기고한다.[2] 의도는 분명하다.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논쟁을 촉발하며, 판도린을 과학의 거침없는 진보에 기여하는 존재로 등장시키는 동시에 그것이 불러올 수밖에 없는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이다. 요컨대 라투르가 나중에 “과학의 대중적 재현(représentation publique de la science)”이라 부르게 될 사례다. 그러나 『존재양식의 탐구』에서는 이것이 [PRE] 양식을 요청하는 명백한 범주 오류의 사례로 제시된다.[3] 라투르는 인류학자로서 인식론적 규범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판도라의 희망』에 실린 글들은 1990년대에 걸쳐 쓰인 것으로, 그의 여정이 지나온 궤적을 보여준다. 부제인 “과학 활동의 실재론적 버전을 위하여(Pour une version réaliste de l’activité scientifique)”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Latour, 2001). 초반의 글들은 여전히 “실제로” 행해지는 과학을 따라가려는 기획을 되풀이하지만, 책은 결국 “팩티시(faitiches)”의 도입과 우상파괴적 제스처에 대한 문제 제기로 마무리된다. 이제 던져야 할 물음은 실험실에서 실재가 제조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잘 제조된 것인가(est-elle bien fabriquée?)이다. 그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주의적 비합리성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과학자들의 조롱 섞인 주장이 아니라, “그건 단지 구성물에 불과하다(ce n’est qu’une construction)”라는 함정이다. 이 표현이 신비 해체자들의 후렴처럼 반복되며 구성(construction)이라는 용어를 공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공적인 과학적 구성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바로 “실재(réalité)”다.
파스퇴르는 이 책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더 이상 “위대한” 파스퇴르가 아니라, 자신의 실험실에서 구성주의적 접근과 실재론적 접근을 실제로 결합시킨 화학자로서의 파스퇴르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기회를 적극적으로 마련해 주었고, 그 결과 발효균은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로(réellement)” 살아 있는 존재로 드러났다. 따라서 발효균은 단지 과학자들이 흔히 “어쩔 수 없이”라고 말하며 동원하는 수많은 동맹자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파스퇴르는 자신이 실험실에서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에 홀로 행동할 수 있는 힘, 곧 자신의 제안/명제(proposition)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위임했다.(Pasteur a délégué à ce qu’il avait activement construit au laboratoire, le pouvoir d’agir seul, d’accepter ou non sa proposition.) 그리고 이러한 실험적 사실의 특이성에서 출발하여, 라투르는 합리적이라고 자처하는 “대문자 과학(la Science)”이 입막음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온 정치의 실천적 특이성까지 포함해, 다른 여러 실천적 특이성들을 펼쳐나갈 것이다.
이제 『존재양식의 탐구』로 넘어가자. [REF], 즉 지시(référence)의 양식은 과학을 “먼 곳에 대한 접근(accès au lointain)”으로 특이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브뤼노 라투르는 먼 곳을 특별히 선택했고, 예를 들어 셜리 스트럼(Shirley Strum)의 개코원숭이에 대한 근접 연구(étude proche)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또한 왜 몽 에귀유 산에 대한 접근과 지도 제작자들의 작업을 예로 들었을까? 물론 핵심 쟁점은 [REF]와 [REP]를[4] 혼동하는 오류에 있다―즉 산과 지도가 서로 대응할 수 있게 하는 지시의 연쇄를 확립하는 행위와, 몽 에귀유 산이 스스로 존재를 유지하는 고유한 방식 사이의 혼동에서 비롯된 오류다. 그러나 왜 귀류법에 가까운 방식으로 논증을 전개해야 했을까? 왜 하필 지도 제작자들이고, 지질학자들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해당 장에서 동원되는 유일한 실험과학의 사례는 보르도의 효모 실험실이다. 이곳은 샤를로트 브리브(Charlotte Brives)의 박사 연구 현장이기도 해서 그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Latour, 2012, p. 99–100[국역본, 142-143쪽]). 그런데 이곳에서 지시의 연쇄를 따라 이동하는 불변의 가동물(mobiles immuables)의 왕복 운동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수고로운 일이 아니라, 위태로운(périlleux) 일이다. 몽 에귀유라는 먼 곳에 대한 접근은 그 산이 인간의 분주한 활동에 무관심(indifférence)하다는 점을 조건으로 삼고 있었다(먼 곳의 또 다른 의미). 그러나 효모 연구자들은 연구 대상인 효모 균주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분주하게 움직인다. 실험실 전체가 효모들이 “자신의 존재 경로에 고정된 채(figées dans leur chemin d’existence)” 보존되어 있는 냉장고를 중심으로 조직된다.[5] 그리고 냉장고에서 표본을 꺼내올 때마다,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객관성의 운명(destin d’objectivit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신속히 작업해야 한다. 냉장고에서 꺼낸 효모가 이미 증식할 시간을 가졌다면, 그 표본을 더 이상 지시를 통한 정보의 원천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시의 연쇄를 한 고리씩 되짚으며 대응 관계를 입증하는 불변의 가동물의 왕복 운동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며, 그것은 인간의 오류가 아니라 바로 효모 자체에 의해 위협받는다.
여기서 [REF]와 [REP]의 혼동을 피하는 것이 진짜 쟁점이다. 왜냐하면 생명체의 계보들(lignées de vivants)을 다루는 경우,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가는 생물학자들에게 매우 중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지시의 연쇄를 통해 접근하려 한다. 비록 브뤼노가 이 가능성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REF] 양식은 대조를 통해 각기 다른 과학적 실천들이 그것이 접근하고자 하는 대상의 고유한 재생산(reproduction) 양식에 따라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간략히 제시된 “힘의 선(lignes de force)”과 “계보(lignées)”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Latour, 2012, p. 109[국역본, 157쪽]). 물리학과 화학이 선호하는 힘의 선은 지속하려는 “고집(insistance)”으로 특징지어지며,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며 수고롭고 놀라움의 대상이 되지만 위태롭지는 않은(non périlleuses) 지시의 연쇄를 구축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경우 “독립” 변수들 간에는 기능적 관계가 유지된다(실험실에서는 하나의 변수를 조작하면서도 다른 변수들을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 반면 계보는 스스로 존재를 지속시키는 데 성공해야 하며, 그 성공은 본질적으로 위태로운(périlleuse) 성취다. 지시의 연쇄를 정착시키기 위해 효모의 재생산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효모가 겪는 “객관성의 운명”이 생물학자들이 그들의 “존재 경로(chemin d’existence)”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할 것임을 함의한다. 전형적인 방식으로 생물학자들은 자신의 “불변의 가동물” 중 일부를 재생산이 요구하는 바의 “대표자(responsables)”로 변형시키며, 이는 지시가 아니라 성공이라는 사실(fait)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다소 허구적인 “행위를 만드는(faire faire)” 힘을 이들에게 부여한다.
실제로 21세기 초, 파스퇴르 이래로 생물학자들에게 먼 곳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미생물들은 이 허구의 핵심 부분, 즉 개체에서 개체로 전달되는 “유전 정보(information génétique)”가 생명체 계보의 유지에 궁극적 책임을 진다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생물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시의 연쇄가, 가장 설득력 있게 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조차, 극도로 선택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한 연쇄는 다른 생명체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채 무균 배양 환경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미생물들의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대다수의 미생물들이 자신들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대다수의 미생물들이 실험실에서 배양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기서 먼 곳에 대한 접근은 미생물들의 민감성/감수성(sensibilité)과 부딪히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특정한 환경, 즉 그들의 재생산 능력에 개입하는 수많은 관계들로 짜인 환경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지는 어떤 일반법칙으로도 예측할 수 없다.
미생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 곧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é)이 그 선택적 성격을 무시(ignorer)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결정되는 일방적 단순화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실험자들이 미생물이나 세포를 변형시키는 일을 막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단지 “그것이 작동한다(cela marche)”고밖에 말할 수 없는 수단을 통해 그렇게 할 뿐이다. 여기서 연구자들은 재생산 양식이 요구하는 바에 얽매이지 않고, 바이러스가 숙주의 계보에 개입할 수 있는 확인된 능력을 전용하는(détourner) 일에 몰두한다([TEC] 양식).[6] 생물학은 생명공학(biotechnologie)이 되는 것이다. 다른 과학들에서는 흰 가운의 위엄이나 방법론의 규칙이 단순화의 역할을 함으로써 무시해야 할 것을 무시하도록 해준다.
탐구의 우선 과제는 각기 고유한 적정성 조건(conditions de félicité)으로 특징지어지는 양식들을 식별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지시의 연쇄의 성공적 구성인 [REF] 양식의 주요 관심은 다른 양식들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faire de la place)” 데 있다. [REF]는 이 점에서 효과적인데, 그 적정성 조건이 극도로 선택적(hyper-sélectif)이기 때문이다(환경에 대한 민감성/감수성을 변수의 형태로 객관화할 수 있는 먼 곳의 대상에 대한 접근으로 한정된다). 그러나 이 양식이 과학들의 특성을 하나로 규정하는 것(une caractérisation)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역으로 위험이 초래된다. 이는 오늘날 “건전한 과학(sound sciences)”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려는 모든 후보자들에게 던져지는 “증거를 보여라!”라는 명령에 제한 없는 자유를 부여하고, 대개의 경우 불변의 가동물을 추출(extraction)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위조(contrefaçon)를 부추길 위험이다. 그리하여 단죄되는 것은 지시의 연쇄에서 벗어난 비인간들의 얽힘을 관찰하고 그것에 사로잡히는 법을 배우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실천들(pratiques récalcitrantes)이다. 특히 애나 칭이 비확장적(non scalable) 지식이라 부르는 것(Tsing, 2015),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유목하는(ambulantes)” 과학이라 부르는 것이 그러하다(Deleuze et Guattari, 1980, p. 463).
『탐구』는 근대인들을 겨냥하며 그들을 당혹의 순간에 위치시킨다. 그들이 지금껏 소중히 여기면서도 잘못 다루어온 그들의 “보물들”, 곧 다양한 존재양식들은 이제 가이아의 요구와 “생태화”의 필연성,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지는 애착들(attachements)을 가꾸어야 할 필요성 앞에서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브뤼노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보물들을 존엄하게(dignement) 제시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우리의 죄를 그것들에 전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탐구』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타당한 탈착된 지식(connaissance détachée)의 이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과학의 특성을 규정하는 길을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Où atterrir?,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지시를 통해서만 인식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자연(une nature)에 대한 과학, 즉 생기를 박탈당한 것(désanimée)의 과학과 대립하는 지구생활자들의 과학(sciences terrestres)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Latour, 2017).[7] 더 이상 “발효균을 자신의 존재 경로에 고정시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왜 발효균을 고정시켜야 했는지를 잊지 않아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행위 역량들(puissances d’agir)의 얽힘, 다시 말해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은 이러한 역량들 사이의 상호 감수성들(sensibilitées mutuelles)이다.
여기서 먼 곳에 대한 접근은 자연-우주(nature-univers)의 과학이 수행하는 일이 된다—이 과학에서 지식은 오직 도구, 모델, 계산의 매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지구생활자들의 과학 또한 도구들을 사용하지만, 이 도구들은 지시(référence)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묘사(description)를 지향한다. 센서와 탐지기는 행위자들(agissants)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따라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생기 박탈(désanimer)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이러한 도구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사용하는 정교한 수단들과 다르지 않다.[8]
브뤼노는 지구생활자들의 과학 혹은 임계지대(zone critique)의 과학을, 불변의 가동물을 순환시키던 앎의 욕망(libido sciendi)과는 다른 종류의 앎의 욕망과 결부시킨다. 지구생활자들의 과학은 다른 감수성(sensibilité différente)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잘 묘사하거나 잘 탐구한다는 것은 단지 인식되는 자연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사로잡히게 놓아두거나 영향을 받게 허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다른 지식들, 곧 얽힘을 묘사하거나 중요하게 만드는 다른 방식들을 평가절하(disqualifier)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일러주는 지식을 전수받고 수용해야 하는, 영향을 받기 쉬운 순진한 대중은 지구생활의 주인공(protagoniste terrestre)이 아니다. 지구생활자들의 과학을 둘러싼 환경은 더블 클릭(Double Clic)에 동요되지 않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대화자들(interlocuteurs récalcitrants)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지구생활자들의 과학은 다른 연구자들, 다른 실험실들, 다른 탐구들, 다른 과학적 모험들, 다른 지식 생태학을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과학 제도들은 훈육된 연구자들을 생산할 줄 안다. 그러나 브뤼노가 생산(production)과 생성(engendrement)을 대립시킬 때 그러하듯이, 지구생활자들의 연구자들은 그들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대화자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생산될(produits) 수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성(engendrement)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브뤼노는 이 문제를 우리 모두가 다른 지구생활자들과 함께 거주하는 임계지대와 결부시켰다. 하지만 이는 또한 오늘날 방향을 전환하고(bifurquent), 이탈하고(désertent), 저항하는(rebellent) 연구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우거나 수행하라고 요구받는 일들이 가이아(Gaïa)가 부과하는 질문에 응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나타난 미지의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응답 능력을 생성하는(engendrent) 제도들을 상상할 수 있는가?
참고문헌
Deleuze G., Guattari F. 1980. Mille Plateaux. Paris, Minuit.
Latour B. 1989. La science en action. Introduction à la sociologie des sciences. Paris, La Découverte.
Latour B. 2001. L’espoir de Pandore. Pour une version réaliste de l’activité scientifique. Paris, La Découverte.
Latour B. 2012. Enquête sur les modes d’existence. Une anthropologie des Modernes. Paris, La Découverte.
Latour B. 2017. Où atterrir ? Comment s’orienter en politique. Paris, La Découverte.
Tsing A. 2015. Le champignon de la fin du monde. Sur la possibilité de vivre dans les ruines du capitalisme. Paris, Le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La Découverte.
옮긴이 주
[1] 영어로는 network(연결망)를 나타내는 [NET]에 해당됨.
[2] 『젊은 과학의 전선』에 나오는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3월 18일 기내에서: 보스는 뇌 과학과 신비주의의 관계에 대해 써 달라고 예수회 친구가 요청한 논문을 수정 중이다. 보스는 기독교의 사도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에게 ‘활력(kick)’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마도 판도린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정신 분석학은 종말을 고했다고 지나가면서 덧붙인다.”(4장 내부자의 외부 활동, 310-311쪽)
[3] [PRE]는 préposition(전치사)을 뜻한다.
[4] [REP]는 reproduction(재생산)을 뜻한다.
[5] 『존재양식의 탐구』에 나오는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효모는 “자신의 존재의 경로에서, 거대한 냉장고 덕분에 (냉장고의 열림과 닫힘이 실험실 전체의 생활을 조직한다) 통제되고 보정되는 냉동 효과를 통해 고정되어본 적이 없었다.”(3장 대응의 위험한 변화, 142쪽)
[6] [TEC]는 technique(기술)을 뜻한다.
[7]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17장, 114쪽 이하 참조.
[8]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에 나오는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주로서의 자연’의 과학은 분명히 지구에 대한 것을 연구하지만 기기, 모델, 계산 등의 매개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먼 곳의 현상을 다룬다. 여기에 일반인들이 대안을 제시한다거나 연구의 질을 의심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을 권리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것을 배우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 임계영역에서 ‘과정으로서의 자연’을 다루는 과학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선험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지식 체계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그 영역에 거주하는—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특권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행위자들 하나하나와 갈등을 겪게 된다. // 블랙홀이나 자기장 전도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관철하려고 뛰어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토양, 백신, 지렁이, 곰, 늑대, 신경전달물질, 버섯, 물 순환, 공기의 구성 요소와 관련해서는, 아주 작은 연구도 곧장 해석의 전면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임계영역은 학교 교실이 아니다. 연구자와 대중 사이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115쪽)

출처: Une journée avec Bruno Latour (Presses des Mines, 2024), pp. 91-96.
https://www.pressesdesmines.com/produit/une-journee-avec-bruno-latour/
Une journée avec Bruno Latour - Presses des M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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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소개글
위에서 번역한 과학철학자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글은 브뤼노 라투르의 지적 여정에 대한 최상의 독해 중 하나이자 (원문 기준으로 볼 때) 다섯 페이지로 요약하는 라투르의 과학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 스탱게르스는 라투르의 지적 여정에서 ‘과학에 대한 물음’이 지나온 궤적, 그 중요한 이정표들을 제시한다. 라투르의 초중기 과학철학에 대한 글은 많지만, 라투르의 생애 전체에 걸쳐 그 변동 과정을 따라간 글은 희소한데, 이 글은 그런 글 중 하나다.
(참고로 이 번역문은 이자벨 스탱게르스 세미나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나는 “브뤼노 라투르가 이자벨 스탱게르스를 읽는 방법”을 주제로 발표를 했는데, 이 발표를 위해 라투르가 1997년에 작성한 “스탱게르스의 십볼렛”을 번역했고 이와 연관된 글 “고분고분하지 않은 주체들”을 함께 공유했다. 그리고 스탱게르스가 2024년에 집필한 “네트워크에서 땅으로”를 번역하여 공유했는데, 이 맥락에서 이 글은 라투르의 과학철학적 여정에 대한 작은 메모이자 ‘이자벨 스탱게르스가 브뤼노 라투르를 읽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번역할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여기서 스탱게르스가 내세우는 핵심 문제설정은 제목에서 나타나듯 ‘네트워크에서 땅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에서 말하는 ‘네트워크로서의 과학’에서 출발하여 <판도라의 희망>에서 말하는 ‘실재를 잘 다루는 과학’으로, <존재양식의 탐구>에서 말하는 ‘지시의 연쇄라는 독특한 존재양식을 지닌 과학’으로, 그리고 마침내 ‘지구생활자들의 과학’으로 이어지는 전체 여정의 이정표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의 세부 내용은 어렵고 압축적이다. <판도라의 희망> <존재양식의 탐구>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존재양식의 탐구>에서 ‘지시의 양식’이 갖는 역할을 한정시키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존재양식으로서의 근대 과학’과 ‘지구생활자들의 과학’을 대조시키는 문제의식을 라투르의 저작들 내부의 긴장 속에서 최초로 조명하고 있는 지극히 예외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탱게르스가 옳다면, ‘지구생활자들의 과학’은 라투르의 ‘말년의 양식’(에드워드 사이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년의 라투르의 관심사를 두고 그의 적들, 심지어 그의 동료들 중 일부조차 ‘과거로 퇴행한’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 점을 확증해준다.
“이것은 말년의 양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이다.”(에드워드 사이드)
라투르의 말년 저작들은 즉흥에 가까운 연주의 산물이었고, 육체적 위기 속에서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저작들이었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
하지만 여기서 ‘지구생활자들의 과학’에 대한 라투르의 중요한 문제제기를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렇게 하듯이, 또는 일부 라투르 해석자가 그렇게 하듯이 서구 남성 지식인들의 익숙한 계보 속에 재위치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관습적인 영토에서 벗어나 연주를 통해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초연한 남자의 이미지”(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니다! 정반대다.
스탱게르스가 다른 글에서 정확히 지적하듯이, 이것은 이제야 고분고분하지 않은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자신의 귀를 활짝 열고, 마침내 외부로부터 오는 요구에 응답하고, 그 요구에 자신이 영향받고 변형되도록 놓아둔 사례다. 고분고분하지 않음, 마찰, 반발, 불협화음을 연구나 정치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연구 대상이자 주제, 즉 기존의 이론이나 실천을 바꾸기 위한 중요한 신호로 삼은 것이다. 자신이 서 있던 입장에서 쫓겨날 위험을 감수한 방향 전환인 것이다.
“나는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이라는 용어를 도나 해러웨이에게서 빌려 쓴다.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브뤼노가 결국 그녀를 한 사람의 동료(soulmate)로 발견하게 되었음을 기리고자 함이다. 처음에 그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무시했었다.”(이자벨 스탱게르스, 여행 동행자의 회고)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나의 방향 전환과도 일치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제야 라투르의 방향 전환이 갖는 참된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무시하던 사람으로부터 뒤늦게 배우는 일, 그의 사유가 내가 지향하는 길과 맞닿아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철학은 서로 다른 ‘나’의 이야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 이야기로 철학을 해야 한다’는 거의 이해할 수 없었던 동료 편집자의 말이 가리키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평범하고 비범한 진리였다. 그 말을 몇 년간 귀가 아프게 듣다 보니, 비로소 그 요구가 철학을 하고 책을 쓰겠다는 나의 꿈을 일깨우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더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실천이다. 탁월한 철학과 뒤떨어지는 철학을 그만 구분하고, 프랑스 철학자 누구누구에만 기대지 말고 네 이야기를 해 보라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동료에게 나는 뒤늦게 응답하기 시작했다.” 박동수, <동료에게 말 걸기>(민음사, 2025), 39쪽
(이 글은 https://blog.naver.com/taiot/224068824221 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번역] 네트워크에서 땅으로 - 이자벨 스탱게르스
아래 번역한 과학철학자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글은 브뤼노 라투르의 지적 여정에 대한 최상의 독해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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