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 박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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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이 글은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책 Power and Inven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에 실린 브뤼노 라투르의 서문으로, 스탱게르스의 철학을 영어권에 처음으로 소개한 글이다. 한편으로 라투르 자신이 스탱게르스에게 배운 교훈을 정리하는 글이자, 스탱게르스의 철학이 지닌 주요 논점과 변천 과정을 1997년 시점에서 매우 명쾌하게 정리한 글이기도 하다.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을 끊임없이 재형성하는 데 스탱게르스가 끼친 영향력은 과소평가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마찰하는 동반자 관계”(도나 해러웨이)를 담은 한 권의 책 <얽혀 있는 이중 비행>이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Philippe Pignarre, Latour-Stengers: un double vol enchevêtré, 2021).
그러나 라투르의 사상을 한국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외부’의 존재는 지금까지 거의 말해지지 않았다. 마치 라투르의 철학이 오롯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그만큼 안티-라투르적인 일이 있을까!). 그래서 라투르의 박사논문이나 <비환원> 같은 초기 저작으로 라투르의 전체 존재론을 기원적으로 소급시키는 잘못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착오는 스탱게르스의 개입에 의한 1987년의 ‘전회’가 지닌 중요성을 간과하는 태도이며, 마치 기원에 모든 것이 존재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물론 라투르 자신에게 초기부터 후기까지 관통하는 철학적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경험 철학’은 계속해서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때로는 외부의 경험으로부터 완전한 재배치가 일어나기도 한다.
왜 스탱게르스의 십볼렛(판별 기준)이 라투르에게 그토록 중요할까? 이는 초기 라투르가 겪은 가장 혹독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비환원’이나 ‘행위자-연결망 이론’이 갖는 모노톤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일종의 의무통과점으로서, “들뢰즈의 일원론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일원론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처음으로 제공한 것이 스탱게르스의 십볼렛이었다.
실제로 초기에 라투르 자신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함정이 있었다. 이원론적, 이분법적 근대주의의 합의를 넘어서고자 하면, 곧바로 일원론자, 범신론자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니체, 푸코, 들뢰즈는 물론이고, 최근의 여러 신유물론자 역시 이런 일원론적 함정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바로 이 점에서 스탱게르스의 십볼렛, 새로운 판별 기준이 중요해진다. 라투르가 이를 극도로 중요시하며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예컨대 「고분고분하지 않은 주체들」 「How to Talk About the Body?」).
2.
이 글은 라투르가 제시하는 두 가지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더 이상 어떤 진술이 PC한지[정치적으로 올바른지]가 아니라, 그것이 CC한지, 즉 “코스모정치적으로 올바른지(cosmopolitically correct)”를 따지는 것이 새로운 문제다.”
2. “위험이 없다면, 좋은 구성도 없고, 발명도 없으며, 따라서 좋은 과학도 없고 좋은 정치도 없다.”
이 두 가지 슬로건이 보여주는 것은 ‘비인간’이나 ‘생태정치’를 추가하는 것만으로 브뤼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탱게르스의 ‘신유물론’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망하다는 것이다. 비인간 존재자나 비인간의 영역만이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 인간이 인간을 연구하는 방식도 중요한 문제다. 핵심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과학자의 대상이든 활동가의 열정이든, 화학 실험실이든 정치 무대이든, “과학이 무엇이고 사회가 무엇인지에 완전히 무관심한 채 정확히 동일한 목표를 유지하는 일”에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정치에서의 지배(domination)는 실험실에서의 지배와 많은 동일한 요소를 갖고 있다. 즉, 자신이 다루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in their own terms) 상황을 재정의할 어떤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 무능력(inability)이다. (…) 밀그램이 자신이 고문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고문자가 될 기회를 주지 않은 나쁜 실험자의 상징이라면, 과학, 예술, 제도, 의학과 같은 연구 대상들에게 백인 남성 자본가들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수천 편의 급진적 팸플릿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새로운 복합적 현상에는 그에 맞는 새로운 이론적 도구가 필요하다. ‘근대적’, ‘담론적’, ‘인간적’, ‘사회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과거의 좋은 이론들도 더욱 미시적이고 더욱 실재적인 교섭 과정을 분석하는 데에는 상당히 부적합할 수 있다. 칸트의 비판철학, 구식 유물론, 언어적 전회,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으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문제설정에 응답할 수 있을까?
근대 과학의 ‘고유한 발명’을 사유할 수 있는 경험적 과학철학, 근대주의의 낡은 합의를 넘어서 ‘근대 세계의 인류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대칭적 인류학, 연구자와 연구 대상 사이의 비가역적 ‘영향’을 제거하지 않는 평등한 인식론, 세계와의 위험한 교섭을 이론화할 수 있는 사건과 발명의 형이상학, 주체의 ‘순응적 능력’을 오히려 고분고분하지 않은 연결과 모방의 역량으로서 다룰 수 있는 결합과 연합의 사회학...
모든 실재는 결코 고분고분하게 환원되지 않는다. 애초에 정의상 실재란 “시험 속에서 저항하는 것”(<비환원>, 1.1.5.)이기 때문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실재는 연구자의 요구(exigence)를 거부하고 그에게 새로운 의무(obligation)를 부과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위험한 시험(épreuve) 속에 놓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실재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연구나 비판이 그러한 위험한 시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학문으로서든 정치로서든 무의미하다.
여기서 ‘고분고분하지 않음’이란 연구자와 연구 대상 한쪽에만 귀속되는 특징이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관계의 역동을 방향 짓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요구’와 ‘의무’다. 따라서 언제나 바깥은 상존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깥과 항시 연결되어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숨을 쉬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듯이.
바깥은 없다, 바깥을 알 수 없다, 바깥과 연결될 수 없다고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심리학화된 근대주의적 합의에 굴복하고 있을 뿐이다. 오직 심리적 현실과 담론적 서사(요컨대 ‘어항’) 속에서만 바깥이 없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실재는 느낌과 감정으로, 이론과 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실재들은 각기 다른 존재양식들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어떤 이론적 입장, 어떤 존재양식의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그러한 요구가 잘 들릴 수도 있고 전혀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소리의 볼륨을 낮출 수도 높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분고분하지 않음, 마찰, 반발, 불화, 불협화음을 연구나 정치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연구 대상이자 미래의 정치적 주제, 즉 기존의 이론이나 실천, 나아가 존재양식을 바꾸기 위한 중요한 신호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서 있던 입장에서 쫓겨날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비판’을 정말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변화될 위험을 감수하지도 않고, 아무런 감수성과 민감성도 없이 타자를 대하는 것을?
각자의 민감성과 감수성, 각기 다른 애착과 영토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정확한 자리에서 이번에는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 라투르와 스탱게르스의 철학은 현재적으로, 동시대적으로 지극히 유효하다.
나는 이번에 출간한 책 <동료에게 말 걸기: 옆 사람과 대화하면서 세계를 바꾸는 방법>(민음사)에서 라투르와 스탱게르스에게서 배운 것들을 ‘내가 발 딛고 선 곳에서’ 적극 활용해 보려고 했다. 그것은 각자의 기억과 체험을 단 하나의 허술한 이론으로 환원하지 않아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고, 타인의 말과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 자신의 이론과 언어까지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안이기도 하다.
내가 서 있던 입장에서 쫓겨날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기대된 결론을 정확히 재생산한다면, 그것은 동료와 정말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동료에게서 비롯되는, 어쩌면 위험할 수 있는 영향을 제거한 채 정치적이거나 과학적일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보자. “위험이 없다면, 좋은 구성도 없고, 발명도 없으며, 따라서 좋은 과학도 없고 좋은 정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잘 말하고 있는지, 내 입장이 옳은지는 결코 나 혼자서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잘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유일한 방법은 동료와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길”(<동료에게 말 걸기>, 15쪽)뿐이다. 분열의 시대, ‘동료에게 말 걸기’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 + +
서문: 스탱게르스의 십볼렛
Foreword: Stengers’s Shibboleth
브뤼노 라투르
번역: 박동수
(편의상 주석 번역은 생략했음.)
1997, Foreword to Isabelle Stengers, Power and Inventi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http://www.bruno-latour.fr/node/378
이자벨 스탱게르스가 가장 위대한 프랑스 과학철학자라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습니다. 다만 그녀가 벨기에 출신이라는 점만 빼면요. 벨기에는 부분적으로만 존재하는 나라로, 프랑스와 달리 과학과 국가의 연결고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녀는 노벨 화학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의 철학적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여러 권의 책을 썼으니까요. 하지만 그 이후 그녀는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과학과 문화의 “새로운 동맹”에 매혹된 광신자 무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과학사학자인가요?
-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갈릴레오, 19세기 열역학, 그리고 화학에 관해 폭넓게 저술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물리학자와 화학자 동료들이 자기 학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는 철학자입니다. 그녀의 주요 관심사는 근대 과학이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역사학자와 철학자가 함께 연구해야 하는 주제 아닐까요?
그녀를 내재주의/내부주의(internalist) 과학철학자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죠?
- 그보다 훨씬 골치 아픕니다.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초내재주의자(hyperinternalist)”로, 언제나 과학자 동료들이 내린 소수의 이론적 결정들로 더 깊이 파고들게 만듭니다. 그녀의 눈에는 대부분의 과학자조차 충분히 내재주의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가스통 바슐라르나 조르주 캉길렘처럼 경성 과학(hard science)이 마침내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을 찾는 휘그주의적(Whiggish) 과학사학자라고 말하지는 마세요.
- 안타깝게도 그녀는 훨씬 더 골치 아픕니다. 그녀는 “반-반-휘그주의자(anti-anti-Whiggish)”입니다. 과학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때 어째서 반-휘그주의적 입장이 좋은 방법이 아닌지를 밝히려 합니다. 적어도 그녀가 함께 일하는 화학자, 생물학자, 물리학자를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분명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성 철학자이니,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 페미니즘 과학철학은 하고 있겠죠?
- 그녀만큼 페미니즘 문헌에 비판적인 사람도 드뭅니다. 페미니즘 문헌을 폭넓게 활용하고 깊이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렇다면 그녀는 과학의 기초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느라 바빠서 성별, 젠더, 국적, 입장 같은 모든 표지를 지워 버리는 추상적인 합리주의자 중 한 사람이겠군요?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만큼 외재주의적인 사람도 드물고, 과학의 사회사 문헌을 그토록 폭넓게 읽는 사람도 없습니다.
뭐라고요? 과학과 사회를 연결하려는 그런 터무니없는 시도들에 그녀가 인내심을 보인다고요?
- 그보다 훨씬 골치 아픕니다. 그녀는 거기에 중독되어 있으며, 이 분야에서 그 누구보다도 “과학학(science studies)”에 정통합니다.
그녀가 자신의 급진적 정치 성향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과학학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겠죠?
- 훨씬 골치 아프죠. 그녀는 마약 합법화에 관해 글을 썼고, 벨기에의 소수 좌파 정당의 활동가이며, 심지어 최면이나 그 밖의 비정통 치료법을 쓰는 돌팔이들과 함께 일하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뭐랬습니까.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언제나 더 골치 아프다고요! 그녀는 물리학만큼이나 최면에 관해서도 많이 썼고, 화학 실험실과 민족정신의학(ethnopsychiatry)을 기꺼이 비교하며, 심지어 “돌팔이(charlatan)”라는 단어를 복권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학의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해서 정치나 하는 무지한 급진주의자 중 하나이겠군요?
- 전혀요. 그녀는 라플라스, 라그랑주, 카르노가 자신들의 방정식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면밀히 규정함으로써 급진 정치를 실천하니까요.
완전히 길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대단한 여성이군요?!
-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말 대단한 지성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철학적 정교함, 정치적 의지, 과학적 식견 면에서 당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의 책에 왜 당신이 서문을 쓰게 된 거죠?
- 정말 이상한 일이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아마 그건 “아래”보다 “위”를 연구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온 과학학과 근대 세계 인류학의 전통 때문일 겁니다. 경성 과학을 삼키려 애쓰는 노력이 연성 과학에도 아주 좋은 효과를 냈거든요. 스탱게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녀의 논증을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읽고 나면, 다 읽은 뒤에는 훨씬 더 개운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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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소개되는 이 논문 모음집을 간단히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이것이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을 구별하려는 아주 고전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 한 철학자가 쓴 글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래된 문제에 대해 그녀가 제시하는 새로운 해법은 과학학 연구자들에게도 철학자들에게도 결코 쉽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해법은 몇 가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최근 과학사와 과학사회학의 주류를 이루는 반(反)규범적 입장을 공유하지 않으며, 과학과 비과학을 분별하는 십볼렛(shibboleth, 판별 기준)을 찾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그녀의 작업은 어떠한 규범적 입장도 회피하려는 “과학학” 연구자들보다는 영미권 인식론자들에게 약간 더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철학자들은 적어도 그녀가 나쁜 과학의 생산을 용인하지 않으며 그것을 깨끗이 청소하고자 하는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녀가 사용하는 판별 기준(touchstone)이 대부분의 인식론자들뿐 아니라 적지 않은 경성 과학까지도 내쫓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규범적 목표는 유사할지 몰라도, 선택의 원칙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을 구별하는 판별 기준을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에서, 언어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찾는다. 바로 이 특성이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무수한 후예들, 즉 철학계와 사회구성주의 진영의 사람들에게 그녀의 작업이 그토록 기이하게 들리는 이유일 것이다. 적어도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이후로, 어떤 진술이 정확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 언어,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충실히 재현할 수 있는지를 두고 인간들끼리 논쟁을 벌이는 동안, 세계 그 자체는 완전히 장면 바깥에 머물며 고요하고 완강하게 자기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무척 흥미롭게도 이러한 전제는 인식론적 문제와 존재론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주 고전적인 철학자들과, 세계를 우리의 재현 바깥에 남겨둔다고 아주 고전적으로 주장하는 급진적인 사회학자들 모두에게서 공유되고 있다. 모두가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인간 쪽만을 심문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물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오해나 합의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스탱게르스의 해법은 우리가 세계에 관해 어떻게 합의하거나 불화하게 되는지를 묻는 데 있어 완전히 비(非)칸트적인 길을 제시한다. 물론 사회, 언어, 정신, 뇌가 오해의 일부 원인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불확실성의 원천을 심문하기 위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주된 파트너는 세계의 복잡성(complexity of the world)이다. 세계는 바깥에 가만히 머물지도, 자기 동일하게 남아 있지도 않다. 스탱게르스는 인식론과 사회구성주의에 맞서서 세계가 스스로를 뒤흔들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방식들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특히 이 책의 1부를 이루는 그녀의 이른바 “첫 번째 시기”에 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시기 동안 그녀는 프리고진과 협력하여 세계 그 자체의 카오스적 요동(chaotic agitation of the world itself)이 우리의 과학 정의를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를 보다 내밀한 수준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여기에 규범적 판별 기준(normative touchstone)의 첫 번째 극적인 사례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재현이 갖는 한계를 찾는 대신 세계가 한계를 표시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을 분별한다. 두 저자의 저작들에 따르면(적어도 프랑스에서는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시간의 화살(혹은 더 정확히는 여러 시간들의 화살들)을 고려하지 않는 모든 학문은 아무리 엄격하고, 존경받고, 고도로 객관적으로 보일지라도 과학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 판별 기준(ontological touchstone)”이라 부를 만한 것의 첫 번째 적용 사례였다. 그것은 인식론자들이 사용해온 판별 기준과 명확히 다르다. 왜냐하면 이 존재론적 판별 기준은 지금까지 과학성을 향한 다른 모든 노력을 판단하는 표준으로 사용되었던 바로 그 학문 분과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언어, 재현, 명료성, 엄밀성에 초점을 맞추는 인식론으로는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부분의 고전 물리학 저자들이 시간, 비가역성, 복잡성, 요동을 은폐해왔다는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
만약 이자벨 스탱게르스가 자신의 존재론적 판별 기준에 대한 이 첫 번째 정의를 고수했다면, 그녀는 프리고진이 자신의 논적이나 “친애하는 동료” 학자들과 벌인 싸움과 논쟁을 해설하는 논평가로 남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극히 논쟁적인 화학자의 철학적 조력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녀는 우리의 재현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도를 지닌 진화라는 주제에 대해 좋은 서사와 나쁜 서사를 끊임없이 구분하려 애쓴 스티븐 제이 굴드와 다른 진화 이론가들의 열렬한 숭배자로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그녀는 결국 시간의 과학과 나머지 문화를 화해시키려는 다소 낭만적인 이상에 이끌린 고전적인 과학철학자로 안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부분적으로는 이 첫 작업의 성공 덕분에) 과학과 문화의 “새로운 동맹”이 그렇게 빠르고 값싸게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평형 상태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다루는 과학이 아무리 시간-의존적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과학, 즉 세계를 안정화하려는 시도에 머문다. 그런데 과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스탱게르스의 “두 번째 시기”는 그녀 자신의 이름으로 쓴 일련의 논문과 저작에 해당하며, 여기서 그녀는 요동치는 세계의 또 다른 판본, 즉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질 들뢰즈의 독해를 통해 제시된 세계의 판본을 탐구한다. 같은 존재론적 판별 기준의 이른바 이 두 번째 층위에서, 그녀는 과학철학에서 본격적인 철학으로, 과학이 다루는 요동치는 카오스 세계라는 문제에서 세계 그 자체가 우리의 불확실성 대부분의 주된 원인이 되는 존재론으로 이동한다.
철학이 한편으로 인식론과 다른 한편으로 사상사로 분리되어버린 나라들에서는 스탱게르스 같은 철학자를 위치 짓기가 아주 어렵다. 그녀는 인식론의 규범적 과업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과업을 라이프니츠나 화이트헤드 같은 형이상학자의 도구를 사용해 수행한다. 하지만 이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죽은 백인 남성들 중 일부로 가르쳐졌거나 아예 가르쳐지지도 않은 인물들이다. 그녀에게 형이상학은 다른 수단을 통해 수행되는 인식론이다. 그것은 과학과 사상의 전체 역사에 축적된 집단적 지혜를 필요로 하는 진지한 과업이며, 과거의 철학이나 패배한 과학의 폐기된 주장들 가운데 어느 것도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을 읽다 보면, 이런 글쓰기 전략의 효과가 얼마나 낯선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갈릴레오, 아인슈타인, 푸앵카레, 플랑크 같은 유명 과학자들이 더 이상 철학에서 벗어난 인물로 읽히지 않고, 스탱게르스의 동물우화집(bestiary)에서 애호되는 예기치 못한 인물인 에티엔 템피에(Étienne Tempier) 같은 무명의 중세 신학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싸우는 위대하고 논쟁적인 형이상학자들로 읽히기 때문이다. 역사가가 이런 글을 읽는다면 그 효과는 더 낯설 것이다. 세기를 그렇게 쉽게 건너뛰는 방식이 납득되지 않을 수 있지만, 스탱게르스의 설명이 비록 그 성격상 역사적이라 부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역사와 양립 가능한” 서술임을 모든 지점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내재주의 철학자도 그녀만큼 자신의 논증에 과학의 사회사라는 (컴퓨터 공학의 말투로 말하자면) 최신 “주변 장치”를 이렇게 능숙하게 접속시킨 적은 없었다. 그 결과 탄생한 산문은 항상 따라가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과학과 철학은 다시금 단단한(hard) 존재론적 문제이자 정치적 문제가 된다. 이 기묘한 혼합을 스탱게르스는 이후 아름다운 새 이름으로 부르는데, 바로 칸트의 유산에서 가져온 이름,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다. 그녀의 제자들 중 한 명이 농담 삼아 말했듯이, 더 이상 어떤 진술이 PC한지[정치적으로 올바른지]가 아니라, 그것이 CC한지, 즉 “코스모정치적으로 올바른지(cosmopolitically correct)”를 따지는 것이 새로운 문제다.
CC 진술이란 무엇인가? 구획 설정의 과업을 존재론까지 밀고 나가는 진술이란 어떤 것인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만일 독자가 스탱게르스에게 근대주의적 관용어법을 특징짓는 과학, 정치, 윤리, 신학 간의 전통적 합의(settlement)를 적용한다면, 그녀의 시도는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며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시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세 철학자는 모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 합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첫째,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고 인간의 역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외부 세계. 둘째, 외부 세계의 법칙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을 얻기 위해 애쓰는 자기 정신 내부에 고립된 정신. 셋째, 저 아래에 있는 정치적 세계—이곳은 외부 세계 및 내부 정신과 명확히 구별되고, 유행과 정념, 폭력의 불꽃과 욕망의 분출, 집단적 현상으로 요동치며, 마치 불을 끄기 위해 위에서 물과 거품, 모래를 뿌려야 하듯 과학의 보편 법칙을 도입해야만 진정될 수 있다. 그리고 넷째, 이 세 영역의 명확한 분리를 보증하는 “저 위”의 위치—과거에는 고대 종교의 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으나 최근에는 보다 믿을 만하고 감시자 역할을 자처하는 물리학자-신이—확실히 그는 남성이다!—인간의 비이성적 행동을 막을 충분한 물리 법칙을 확고히 하며 어디에도 없는 곳의 관점(a view from nowhere)을 차지한다. 이 전체 합의를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정치학, 신학 등 그 모든 구성요소와 함께 한꺼번에 논하지 않는다면, 과학철학에서 그 어떤 진전도 이룰 수 없다. 덧붙이자면, 이 방법론적 요점은 이른바 과학전쟁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 과학전쟁은 이 오래된 합의의 분리된 실타래들을 다시 끌어 모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패러디로서 반복될 뿐이다…….
스탱게르스가 그런 종류의 헌법적 구성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입장이 사회구성주의자들이 취하는 비판적 입장인 것도 아니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 네 영역 간의 연결이 분명 존재하지만 불행히도 단절되어 있다고 말하기를 선호한다. 즉, 내부 정신은 외부 세계와 안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논쟁의 여지없는 과학 법칙도 무질서한 대중의 정치적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동원될 수 없으며, 그 결과 그 어떤 신적인 형상도 영원히 전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진정한 스승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비판적 사유에 전혀 인내심이 없다. 그녀는 저 영역들이 필연적이며 영역들 간의 연결이 안타깝게도 단절되었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저 영역들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즉, 세계는 외부에 있지 않고, 정신은 내부에 있지 않으며, 정치는 저 아래에 있지 않고, 물리학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어디에도 없는 곳의 관점을 차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이런 종류의 중재 작업 자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미권 독자들은 칸트적 합의로부터 그리고 따라서 또한 그것의 비판적 감정평가(appraisal)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사유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종종 큰 어려움을 겪는다. 칸트가 아니라면, 그들은 당연히 비트겐슈타인이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근대주의적 토대가 불가능하다면, 어떠한 토대도 결여한 채 행사되는 끊임없는 아이러니뿐이라는 것이다.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비판(denunciation)만큼이나 아이러니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젠가 철학을 “진리의 유머(l’humour de la vérité)”로 정의할 것을 제안했다. 그녀의 전통에 속한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사건들의 세계(world of events)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결코 멀리 떨어진 부재하는 사태를 필사적으로 재현하려 애쓰는 언어의 감옥이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핵심 용어 중 하나를 빌리자면, 명제들(propositions)은 통과하며 움직이는 것(moving through)이지, 저 바깥에서 우리의 운명에 무관심한 채 남아 있을 물자체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아니다. 정치는 위로부터(from above) 합리성을 끌어와 정념과 감정을 진정시키는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on the spot) 사건에 정의(justice)를 행하는 좋은 명제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정신은 절대적 진리를 찾아야 하면서도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절대적으로가 아니라—상대적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주던 모든 연결로부터 단절된, 불가능한 이중 구속에 놓인 고립된 언어-담지자가 아니다. 정신은 신체다. 그것은 행동학적 신체(ethological body)이자,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사유의 습관(habit of thought)”이다. 이러한 비비판적(noncritical) 철학자들이 여행하는 나라는 인식론자들과 사회구성주의자들이 200년간 전쟁을 벌여온 달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후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들은 근대성과 비근대성이 다르듯, 푸른 행성의 표면과 달의 표면만큼이나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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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언어, 명제와 실체,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과 비인간에게 일어나는 일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들뢰즈가 그토록 자주 비난받아온 물리주의(혹은 유기체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일부 과학사회학자들에서 보이는 일반화된 마키아벨리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이다. 그녀가 근대주의적 합의로부터 벗어났을지 몰라도, 결국 “모든 것은 자연이다” 또는 “모든 것은 정치다”라는 이중의 중대한 위협 가운데 하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녀를 오해할 덫은 잘 준비되어 있고, 활짝 열려 있으며, 기름칠까지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근본적으로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을 구별하는 고전적 과업에 확고히 매달리는 규범적 철학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사유에는 들뢰즈의 일원론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일원론으로부터 그녀를 구해내는 어떤 구분이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구성(risky construction)”이라 부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위험(risk)을 판별 기준으로 삼는 특정한 유형의 구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스탱게르스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옮길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일 것이므로, 그녀의 십볼렛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여러 과학을 가로지르는 양상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구분은 참된 진술과 거짓된 진술의 구분이 아니라, 잘 구성된 명제와 잘못 구성된 명제(well-constructed and badly constructed propositions)의 구분이라는 것이다. 명제(proposition)는 진술과 달리 특정 상태의 세계를 포함하며, 들뢰즈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을 빌리자면 사건(event)이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구성(construction)이란 정신이나 사회가 어떤 사물, 대상,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유형의 세계가 특정 유형의 집합체에 관여하는 것(the engagement of a certain type of world in a certain type of collective)이다. 스탱게르스에게 구성주의(constructivism)는 반대말이 없는 단어다. 예컨대 그것은 실재론(realism)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구성주의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처럼 세계와 언어의 이분화(bifurcation) 이후 생겨난 쌍둥이 같은 두 입장의 반대편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은 구성주의의 한 갈래가 아니라, 모든 구성의 부정이며, 실재론 철학자들의 부정만큼이나 철저한 부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론과 사회적 구성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며, 두 불운한 입장을 섞어보려는 절충안을 상상할 이유도 없다. 대신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것은 두 철학 중 하나다. 즉, 구성과 실재가 서로 대립하는 철학이냐, 아니면 구성하기(constructing)와 실재하기(realizing)가 동의어인 철학이냐 가운데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탱게르스가 자신의 논점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구성 개념에 위험 개념을 덧붙이는 이유다. 세계도 언어도, 코스모스도 과학자도 아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구성들이 있다. 이것들은 잘못 구성된 명제들로, 과학과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즉, 그것들이 아무리 PC하게 보일지라도, CC하지(코스모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반면 세계와 과학자 모두가 위험을 감수하는 명제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잘 구성된 명제들, 즉 실재를 구성하고 실재를 만드는 명제들로, 과학과 사회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그것들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보일지라도, CC한 것이다. 스탱게르스의 손에서 이 위험을 감수하는 구성주의는 매우 강력한 구획 기준이 된다. 그것이 처음에는 예기치 않게 작동하여 그녀에게 (또한 그녀의 독자들에게)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그녀의 십볼렛이 내 미온적인 논변들을 어디서 무너뜨릴지 예측하는 데 매번 너무 서툴렀기에 나 역시 많은 상처를 입었다. “여성, 불, 그리고 위험한 것들”이라는 표현은 스탱게르스가 자신의 많은 친구들을 다루는 방식에 잘 어울릴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례들이 이 위험한 불의 시험(trial by fire) 속에서 제시된다. 프리고진과 협력하던 시절, 스탱게르스는 자신의 존재론적 판별 기준을 사용하여 시간(time)이 자신들에게 “제안된(proposed)” 본질적 특징들 중 하나일 수 있다고 규정하지 않는 모든 학문 분과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전형적인 스탱게르스식의 예기치 못한 연결을 통해, 그녀는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던 매혹적인 정신과 의사 레옹 셰르톡(Léon Chertok)과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로이트와 그의 많은 제자들이 이미 폐기한 치료 기법인 최면(hypnosis)을 여전히 임상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동일한 원칙이 물리학과 정신의학에서 낳는 효과를 비교해보면, 그녀의 판별 기준이 지닌 독창성이 더없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보통이라면 어떤 구획 기준을 적용하든 정신분석학은 과학에서 제외된다고 기대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이 칼 포퍼(Karl Popper)가 했던 일이기도 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최면도 함께 제외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역적 물리학과 과학주의적 정신분석학을 과학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시간-의존적 화학, 카오스 물리학, 그리고 최면은 과학의 경계 안쪽에 남겨두는 기준이라면, 우리는 그 기준에 대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스탱게르스의 구획 기준에는 분명 어떤 깊은 결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녀의 위험을 감수하는 구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따라가 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충족 이유의 원리(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는 가역성은 포함하면서 비가역성은 그림에서 배제하는 한, 결코 충족될 수 없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과학처럼 행동함으로써 충족 이유의 인과 원리를 흉내 내려 한다—하지만 그것은 아직 스탱게르스의 원리를 적용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해된 과학이다! 프로이트는 최면을 통해 자신의 영향(influence)이 환자들에게 놀라울 만큼 빠르고 순응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고, 자신이 환자의 행동에 원인이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경성 과학”을 모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전이(transference)라는 유명한 현상을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았고, 그때부터 마치 화학적 절차를 소파라는 “실험실”에 적용하려 애쓰는 정화된 분석을 통해 환자들을 상대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식 “과학에의 의지(will to science)”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시간의 화살이 물리학에서 제거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향(influence)이 정신의학에서 제거된 것이다. 그렇다,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과학의 자격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보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역적 물리학조차 똑같이 잘못 구성되었다는 이유로 과학의 경계 바깥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동일한 원칙이 두 번 적용되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다. 즉, 어떤 학문이든 그것이 지닌 불확실성과 위험의 주요 원천을 제거해서는 안 된다. 비인간 현상의 경우에는 비가역적 시간을, 인간 현상의 경우에는 영향에 대한 감수성(susceptibility to influence)을 제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탱게르스가 셰르톡과 함께한 작업의 역설적 결과는, 그녀가 프리고진과 함께한 초기 작업의 결과와 동일하다. 문제는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다시 말해 과학과 비과학을 구획 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과학 내부에서, 혹은 더 낫게는 코스모폴리틱스 내부에서,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대상과 동일한 수준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요구받는 절차들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정신분석학이 스탱게르스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리석게도 인간을 비인간처럼 다루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은 어떤 경성 과학자도 감히 자신의 연구 대상을 그렇게 다루지 않을 방식으로 인간들을 대했기 때문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과학에 의해 심문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 자신의 언어로(on their own terms) 재정의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물론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지배 가능한 객관적 사실과 어떠한 지배의 시도에도 저항하는 인간 영혼을 구별했던 오래된 차이가 아니다. 차이는 비인간들이 과학에 포섭되는 것을 본성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시간의 비가역성은 스탱게르스에게 그러한 저항의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반면 인간들은 놀라울 정도로 순응적이어서, 마치 과학자의 목적과 목표에 지배된 존재처럼 너무나 쉽게 행동한다.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진정한 “과학적” 발견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무엇이 과학인지에 대한 그릇된 관념 때문에 이를 보지 못했다. 스탱게르스의 시험에서는 과학의 외양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누군가 감히 그 테스트를 받아들일 만큼 대담하다면, 대신 그는 자신의 실험이 제기하는 질문들이, 실험실이나 이론이 동원한 현상들에 의해 재정의될 위험에 처해 있음을 입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겉보기에는 이것이 포퍼의 반증가능성(falsification) 기준을 연상시키는 듯하지만, 어떤 과학이 탈락하고 어떤 과학이 살아남는지를 살펴보기만 해도 두 인식론 사이의 완전한 차이를 알 수 있다. 포퍼의 판별 기준은 흰 가운과 같다. 입기는 쉽지만, 그것을 입었다고 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스탱게르스의 기준은 늑대의 털가죽을 쓴 양을 꿰뚫어본다! 예컨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원더풀 라이프』로 대표되는 진화론은 스탱게르스의 시험을 통과한다. 그녀의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종은 그 진화를 설명하려는 자연사학자로 하여금 종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만큼의 위험을 혁신적인 서사 형식을 통해 감수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포퍼의 면도날은 테스트에 부칠 수 없다는 지극히 빈약한 구실로 다윈주의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프로이트주의와 함께 과학으로부터 잘라내 버린다. 하지만 어떤 테스트인가? 과학자들이 모든 입력과 출력을 통제하고, 연구 대상에게 “예”와 “아니오” 외에는 아무런 자유도 남겨두지 않는 테스트 말인가! 그것은 사물들이 마스터마인드 게임의 흑백 기물들만큼도 말하지 못하고, 과학자의 거친 상상력(wild imagination)만이 나머지 모든 말을 대신하는 지극히 빈곤한 과학이다.
다행히도 과학에는 사물들의 야생적 상상력(wild imagination)이 과학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제안함(proposing)으로써 과학자들을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무수한 상황들이 존재한다. 재미있게도 반증가능성은 이런 상황들 또한 놓쳐 버리며, 오히려 가짜 모조품들(fake imitations)에게 과학 훈장을 수여한다. 예를 들어 포퍼의 기준에 따르면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흠잡을 데 없이 반증 가능한 실험은 여전히 과학으로 인정된다. 왜냐하면 이 실험은 미국 학생들 사이에 권위에 대한 선천적 복종 성향이 존재한다는 거친 가설(wild hypothesis)을 테스트에 부쳤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이 가장 유명한 실험보다 더 과학적인 실험이 어디 있겠는가? 밀그램은 필요한 모든 통제를 갖추지 않았는가? 모든 블라인드 테스트를 포함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의 실험은 스탱게르스의 기준을 적용하면 완전히 붕괴된다. 왜냐하면 이 실험이야말로 그녀가 말하는 잘못된 구성의 전형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밀그램의 권력에 종속된 학생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밀그램 자신조차 이 재앙적인 실험에서 이끌어낼 수 있었던 단 하나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즉, 그가 마을 안의 유일한 고문자이며, 자신이 피험자들에게 행사한 광기의 권력 자체가 심문되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오, 그렇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정말로 존재한다. 하지만 눈먼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이 교훈은 심사위원과 사실 검증자를 모두 갖춘 훌륭한 학술지들에 발표된 무수히 많은 실험들에서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포퍼의 기준과 스탱게르스의 기준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다른 곳에 있다. 포퍼의 반증가능성은 과학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발명을 분별할 수 있는 완전한 권력을 전제한다. 애초에 그것은 과학자들을 사회의 어떤 침입으로부터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반면 스탱게르스의 십볼렛은 말해지는 사람들(those who are talked about)의 발명에 의해 권력이 상쇄되는(counterbalanced) 조건들을 도처에서 탐색할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는 물론 과학의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의미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식론의 고전적 문제들로부터의 이러한 이탈이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포퍼는 여전히 전통적인 과학철학자이며, 그의 눈에 그토록 많은 학문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정치적 삶의 끔찍한 난국들과 너무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안전하게 반증할 수 없고, 인간 대중은 광장에서 자신의 현존을 “예”와 “아니오”로만 제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그토록 많은 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가 과학의 적이기 때문이다. 포퍼의 과학철학은 1930년대의 정치적 과업에는 잘 맞아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스탱게르스의 목표는 우리가 지금 과학 고유의 경계 안팎에서―혹은 포퍼 안팎에서라고 해야 할까―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의 특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딜레마가 관찰되는 집단적 상황들에까지 그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는 구성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과학의 경계지대(confines of science)를 벗어나야 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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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번째 과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어떤 실천이 포퍼식으로 이해된 과학과 얼마나 닮았는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녀는 내부로부터 알고 있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녀에게 철저한 내재주의자가 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다. 문제는 과학을 얼마나 잘 흉내 낼 수 있느냐가 아니라(이제 그것은 너무 쉽고, 너무 안전하고, 너무 값싸져서 심지어 사회학자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언설이 세계에 의해 수정되도록 허용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느냐다. 이것은 최면, 약물 중독, 생태 정치, 민족정신의학, 에이즈 환자 모임처럼 겉으로는 완전히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실천이 오히려 가장 추상적이고 대담한 경성 과학들과 더 가까운 특징을 드러낼 수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고등한 미신과 저급한 정치가 뒤섞인 미국적 맥락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아마 가장 독창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한 가지 난점을 느낀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녀의 코스모폴리틱스에서 이 두 번째 측면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많은 정치적 통찰이 그러하듯, 여전히 이 글들은 아직 과학만큼 강력하게 갱신되지 못한 좌파 급진주의의 구상에 상당히 영향을 받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론의 “불균등 발전” 사례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탱게르스는 권력, 사회, 지배에 대해 그녀가 앞부분에서 경성 과학에 수행했던 재구획 작업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가에서 손쉽게 가져다 쓸 수 있는 사회사의 도구들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들이 쓰인 이후 그녀가 나아간 방향은 내게 충분히 분명해 보이며, 지식-언설과 권력-언설 모두를 타격하는 진정한 코스모폴리틱스를 실천하려는 그녀의 의도를 완전히 입증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최근 저작들로 눈을 돌려야만 그녀의 십볼렛이 지닌 완전한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화학 실험실에서 정치 무대로 옮겨가면서,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어떤 과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어떤 정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건전한지를 결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서구의 “죽음정치(thanatocracy)”를 비판하는 많은 논자들처럼 과학에 실망하여 사회로 도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급진주의자들 또한 실험대 위에서 흰 가운을 입은 물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구획 기준에 따라 자신들의 강령을 더욱 혹독하게 시험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스탱게르스는 객관적 과학의 한계에서 급진 정치의 열정으로 호소하지 않는다. 그녀는 과학자의 대상이든 활동가의 열정이든 가차 없이 분별해낸다. 모든 사례에서, 모든 국면에서 그녀는 지배에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지배가 과학의 대열에서 오든 사회 권력의 대열에서 오든 개의치 않는다. 양쪽 모두에서 그녀는 놓쳐온 발명(invention)의 원천들을 찾아 나선다.
과학자들이 그녀가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을 구획 짓는 방식에 놀란다면, 페미니즘, 생태주의, 좌파의 대열에서 그녀를 동지로 생각한 많은 사람들 역시 어려운(hard) 교훈들에 대해,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경성 과학(hard sciences)으로부터 끌어내는 교훈들에 대해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녀에게 과학에서 정치로 이동한다는 것은 엄격한 제약에서 더 느슨한 제약으로 옮겨가는 일이 아니라, 과학이 무엇이고 사회가 무엇인지에 완전히 무관심한 채 정확히 동일한 목표를 유지하는 일이다. 정치에서의 지배(domination)는 실험실에서의 지배와 많은 동일한 요소를 갖고 있다. 즉, 자신이 다루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언어로(in their own terms) 상황을 재정의할 어떤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 무능력(inability)이다. 이 원칙이 내부로부터 많은 학문 분과를 전복시킨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훨씬 더 정치적인 입장들을 전복시킨다. 특히 분석의 결과가 애초에 발화자의 위치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수많은 “입장론 정치(standpoint politics)”의 경우가 그렇다. 밀그램이 자신이 고문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고문자가 될 기회를 주지 않은 나쁜 실험자의 상징이라면, 과학, 예술, 제도, 의학과 같은 연구 대상들에게 백인 남성 자본가들의 지배를 받았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수천 편의 급진적 팸플릿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대부분의 비판적 사유가 그렇듯, 그 팸플릿들은 처음부터 기대된 결론을 정확히 재생산한다. 만일 그것들이 거부되어야 한다면, 그것들이 정치적이기 때문도 아니고, 충분히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단순히 저자가 그것들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서 있던 입장(standpoint)에서 쫓겨날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탱게르스의 기준을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에 적용하는 일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것은 실험대 위에서 벌어졌던 일만큼이나 흥미진진할 것이다. 방정식은 단순하지만 실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위험이 없다면, 좋은 구성도 없고, 발명도 없으며, 따라서 좋은 과학도 없고 좋은 정치도 없다(no risk, no good construction, no invention, thus no good science and no good politics either). 이것이 아직 구성원이 많지 않은 정당의 제1강령이다!
코스모정치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스탱게르스의 요구는 양날의 칼이며, 그 칼날은 가차 없이 잘라낸다. 우리는 과학전쟁의 혼탁한 싸움 속에서 그녀가 모든 진영에서 배신자로 여겨질 것임을 안전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녀가 “중간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그녀만큼 중재자와 거리가 먼 사람도 없고, 그녀만큼 중용의 신봉자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도 없다!―그녀가 모든 당사자들에게 그들이 온 힘을 다해 회피할 어떤 기준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경계를 벗어나는 이론들(Theories Out of Bounds)” 총서로 출간되지만, 스탱게르스의 새로운 구획 기준보다 더 구속력 있는 이론은 없다. 나 역시 여러 번 그 구속력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결국 다시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영어권 독자들이 우리 프랑스어권 세계에서 오랫동안 감당해야 했던 이 가장 대담한 기획 속으로 휘말려들 것을 상상하며 (약간의 고소한 기분으로 말하건대) 큰 즐거움을 느낀다. 그녀의 놀라운 “사유의 습관”에서 내가 지난 20년간 배운 것보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더 많은 것을 독자들이 배우기를 바란다. 또한 나보다 더 강하게 (그럴 가능성은 더 희박하지만) 스탱게르스의 십볼렛을 어디에든 밀어붙이며 경성 과학과 급진 정치의 정의를 수정할 수밖에 없기를 바란다―필요하다면 그녀와 맞서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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