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고분하지 않은 주체들
Des sujets récalcitrants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
번역: 박동수
인문사회과학(sciences humaines)은 어떻게 하면 마침내 “단단한(dures)” 과학이 될 수 있을까? 이자벨 스탱게르스(Isabelle Stengers)는 『코스모폴리티크(Cosmopolitiques)』에서 인간과학(sciences de l’homme)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적 원칙을 제안하며, 이를 통해 인문사회과학의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쇄신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 인문사회과학을 둘러싼 논쟁에서는 대개 두 가지 접근 방식이 구분된다. 첫 번째 접근 방식은 뒤르켐(Durkheim)의 유명한 공식에 따라 “사회적 사실들을 사물처럼 다루려는” 시도다. 이 접근법은 군중, 줄서기, 교통 체증, 경쟁, 끌림, 혼란, 시장 등에서 인간의 집단적 행동이 물질의 운동과 최대한 유사하게 나타나는 상황을 연구한다. 반면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사회적 행위자의 행동을 사물의 운동과 최대한 구분하려는 시도다. 의식, 성찰, 의도, 도덕성, 역사는 인간과학에 자연과학의 정량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간단히 말해, 첫 번째 접근은 대상화(objectivante)이며, 두 번째 접근은 해석적(interprétative)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전통적 입장은 자연과학이 대상을 “사물처럼” 다룬다고 믿는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즉, 자연과학은 대상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야말로 이자벨 스탱게르스가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이론적이거나 실험적인 대상은 실제로는 고분고분하지 않음(récalcitrance)으로 특징지어진다. 연구자는 실험을 구성하여 응답을 요구할 수 있지만, 대상은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응답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실험이 잘 구성되었다면, 대상은 질문을 비껴가고, 질문자를 놀라게 하며, 예측을 뒤흔들고, 해석이 감수해야 할 예기치 못한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스탱게르스의 관점에서는 어떤 과학 분과의 질, 어떤 실험이나 이론이 지닌 흥미로움, 연구자가 감수하는 위험, 그리고 대상의 고분고분하지 않음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존재한다. 이제 지식은 더 이상 대상화의 정도로 측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 공유되는 위험(risques partagés)에 따라 측정된다.

이 새로운 원칙이 도입되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사이의 비교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연과학의 장치들에 특유한 실험의 놀라움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모방할 수 있을까? 고전적 접근을 지지하는 이들은 비활성 사물에 대한 통제를 인간과학으로 이식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반면 반대편에 선 이들은 인간을 사물처럼 다루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스탱게르스는 단언한다. 자연과학을 가장 잘 모방하는 방법은 바로 고분고분하지 않은 주체들(sujets récalcitrants)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자연과학의 대상들처럼 연구자의 요구(exigences)를 거부하고 오히려 연구자에게 새로운 의무(obligations)를 부과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한 사회학자가 한부모 가정을 방문하여 미혼모에게 설문지를 작성하게 한다면, 그는 그저 단조롭게 반복되는 과학을 생산할 뿐이다. 왜냐하면 피조사자는 수동적으로 응하며, 순서대로 항목에 응답하고, 조사 대상자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사회학자가 질문을 거부하고, 오히려 다른 질문을 제기하며, 조사의 방향을 뒤집고, 마침내 그를 내쫓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를 조사하게 된다면, 그는 비로소 과학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주체와 맞닥뜨린 것이다. 그는 응답을 요구했지만, 이제부터는 다른 질문을 제기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위험을 감수했기에, 그의 담론은 과학적이 될 수 있었다.2)
이 방법론적 원칙의 참신함이 여기서 드러난다. 해석적 접근의 지지자들에게는 인간 행위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참된 인간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상화 접근의 지지자들에게는 인간을 사물처럼 침묵하고, 비활성이며, 통제할 수 있고, 수량화 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야 비로소 참된 인간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탱게르스의 원칙은 이 두 입장을 동시에 전복시킨다. “적어도 실험실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대상들을 다루는 것만큼 인간 주체들을 다루는 법을 배워라!” 실제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을 다룰 때 가장 큰 위험은, 그들이 어떠한 조사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는 그들의 고분고분하지 않음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조사자의 요구에 쉽게 영향을 받는(influencer)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멀리서 통제되고 외부에서 인식되는 사물의 수동적 자세에 자신을 기꺼이 고정시키려 한다.3) 이런 공모관계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존재들은 물리학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과학자의 관심이나 요구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따라서 생명 있는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거리감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과학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주체들만을 다루는 것이다! 오직 연구자와 연구 대상 사이의 평등(égalité)만이 자연과학의 놀라운 성과를 가능케 한 조건, 즉 대상이 과학자의 질문에 대해 보이는 무관심(indifférence)을 인간과학으로 이식할 수 있게 해준다.4)
이로써 우리는 스탱게르스의 원칙과 칼 포퍼(Karl Popper)의 “반증 가능성(falsification)”이라는 유명한 원칙 사이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포퍼의 원칙은 연구 대상에게서 “예” 혹은 “아니오”라는 응답을 끌어낼 수 없는 모든 활동을 가짜 과학으로 배제하는 기준을 제공한다(이때 정보가 담긴 응답은 “아니오”뿐이며, “예”는 단순히 과학자의 가설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매우 드물면서도 동시에 지나치게 쉽게 만들어지기도 한다.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와 다윈주의, 정신분석학과 역사학을 모두 과학에서 배제한다. 반면 어떤 존재든 완전히 말문이 막힌 상태(a quia)로 몰아넣어 “예” 혹은 “아니오”로만 답하게 만드는 모든 실험 구성은, 비록 인위적 요소(artefacts)로 가득 차 있더라도, 온전히 과학으로 인정한다. 스탱게르스는 자신의 구획 기준(critère de démarcation)을 전혀 다른 곳에 둔다. 그녀는 연구자의 요구와 연구 대상이 부과하는 의무 사이에 평등(égalité)이 허용되지 않는 실험 분과들은, 설령 그것들이 매우 정교하더라도, 비과학적이라고 거부한다. 반면 연구자가 연구 대상에게 제기하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모든 장치는 과학적이라고 인정한다. 이와 같이 인문사회과학은 이른바 경성 과학(sciences dures)을 더 이상 헛되이 모방하지 않고도 그 나름의 새로운 “단단함(dureté)”을 획득할 수 있다. 대상들에 대한 통제가 자연과학에서 그토록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대상들이 언제나 이 통제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과학에서 주체들이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침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
1997년 9월
- 1) Isabelle Stengers, Cosmopolitiques, La Découverte & Le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 Paris (1996).
- 2) 인류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순한 정보 제공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연구하는 사회에서 태어난 또 다른 인류학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익숙해져 왔다. 이로 인해 거리감을 잃은 대신, 그들은 날카로운 긴장감(virulence)을 되찾게 되었다. 사회학에서 이 원칙은 해럴드 가핑클(Harold Garfinkel)이 창안한 민속방법론(ethnométhodologie)의 기반을 이룬다. 민속방법론에서 사회적 행위자는 사회학자만큼이나 사회학을 행하며 오히려 사회학자보다 더 성찰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같은 논리가 민족정신의학(ethnopsychiatrie)에도 적용된다. 민족정신의학에서 치료자는 환자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구 상황에 놓여 있는 동료로 간주한다.
- 3) 스탱게르스가 상세히 분석한 사례는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이다. Stanley Milgram, Obedience to Authority. An Experimental View, Harper Torch Books, New York (1974).
- 4) 평등은 쌍방향적이어야 한다. 기업의 경영자는 자신을 연구하는 조사자에게 특정한 방식으로만 자신을 다루라고 요구할 수 없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을 연구하러 온 이들에게 특정한 질문만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조사자는 침묵하는 존재들을 외부에서 내려다보며 통제하는 방식으로 연구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연구 대상이 자신의 질문을 규정짓는 것 역시 원하지 않는다. 어느 쪽의 강요(diktat)도 있어서는 안 되며, 이것이 바로 평등의 요구다.
옮긴이의 소개글
고분고분하고 유순한 주체들만 다루는 인문사회과학은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이 명제는 연구자의 방법론이 양적이냐 질적이냐, 정치적 입장이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와는 무관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인문사회과학 연구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이 언제나 자연과학과의 대조 또는 모방 속에서 스스로를 정립해온 이상, 이 문제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피해갈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브뤼노 라투르와 그의 동료들의 작업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표시한다. 라투르가 수행한 과학기술학(STS) 연구는 단순히 자연과학의 현장으로 들어가 과학 실험실의 실상을 민족지적으로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연구는 자연과학이라는 활동을 재정의함으로써, 인문사회과학의 방법론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흔히 라투르의 사상을 ‘신유물론’이라 부르지만, 이를 기존 연구 방식에 비인간 행위자를 하나 더 ‘추가’한 것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 핵심을 놓치게 된다.
브뤼노 라투르와 그의 동료들이 진정으로 겨냥한 바는,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경유해 기존 인문사회과학의 주체 이론, 사회 이론, 비판 이론을 ‘내파(內破)’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이론적 확장이 아니라, 근대주의 인문사회과학이 전제하고 있는 기초 좌표계를 바꾸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재정의한다는 것은, 결국 어떤 철학이나 이론의 좋고 나쁨을 가늠할 수 있는 새로운 판별 기준을 제시한다는 뜻이다. 이 짧은 글에서 라투르는 이자벨 스탱게르스(혹은 스탕게르스)의 책을 경유하여 그 기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슬로건은 이렇게 요약된다. “적어도 실험실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대상들을 다루는 것만큼 인간 주체들을 다루는 법을 배워라!”
물론 이런 통찰이 라투르의 독창적 산물인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인정하듯,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시도해온 작업을 보다 명료하게 정식화하고 일반화한 것이다. 다만 그의 결정적인 기여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사이의 거리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고, 그에 따라 객관성, 대상, 주체 같은 기본 개념들의 관계설정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한 데 있다. 이는 스탱게르스의 작업과도 정확히 궤를 같이하며, 이 글은 그들의 얽혀 있는 이중 비행의 궤적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글을 번역하게 되었는가? 정세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정세에도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준다. ‘이대남’이나 ‘청년 페미니스트’ 같은 주체들을 실험실의 대상 수준으로도 다루지 못하는 ‘논객들’과 ‘사회학자들’이 넘쳐나니 말이다.
실제의 주된 이유는 최근 랑시에르 세미나에서 『불화』를 함께 읽으며, 랑시에르의 주체지향 정치와 라투르의 객체지향 정치를 연결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러던 중 이 글이 그 접점을 드러내는 중요한 고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아직 탐구 중이다).
이 글은 라투르가 1997년 9월에 발표한 에세이로, 대중 과학 잡지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모은 책 Chroniques d’un amateur de sciences (2006)에 수록되어 있다. 스탱게르스의 책에 대한 일종의 서평이자, 인문사회과학을 어떻게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 원칙을 탐색하는 글이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방법론적 원칙의 탐색은 라투르와 스탱게르스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철학적 작업의 핵심을 이룬다.
이 글의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books.openedition.org/pressesmines/204
덧붙여 récalcitrant라는 단어를 “고분고분하지 않은”으로 번역하기까지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완고한”, “반항하는” 등 다양한 번역어를 검토한 끝에, 이 맥락에 가장 적합한 표현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석아영 님의 조언 덕분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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