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소유한다는 것
LA PROPRIÉTÉ DE LA TERRE
사라 바눅셈 Sarah Vanuxem
번역: 박기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2장 민법 전통의 기원에 놓인 자연의 세 얼굴
로마법에서 자연(nature)은 먼저 법의 타자로, 소유는 공동체를 대체하며 등장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듯하다. 그러나 자연은 법의 도움 또는 보조자(auxiliaire du droit)로도 나타난다. 개인소유와 집합소유 모두 자연 상태(état naturel)에서 예형화(préfigurées)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자연이 법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재판 작업(travail judiciaire)은 정확히 사물들, 사안들, 또는 소송원인들의 본성(nature des choses, des affaires, ou des causes)을 탐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의 다양한 의미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는 가운데, 바로 이러한 사물들에 대한 과정적 접근(approche processuelle)으로부터 소유의 새로운 형상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2-1. 자연의 법적 타자성 — 공동체를 대체한 소유
얀 토마스(Yan Thomas)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근대인들에게” 귀속시키는 것, 곧 “행위할 수 있는 역량(puissance d’agir)의 담지체로서의 권리주체(sujet de droit), 이 역량이 적용되는 객체로서의 자연, 그리고 이 행위의 기술적 수단으로서의 세계의 탈자연화(dénaturation du monde)—산업적이기 이전에 제도적이었던 기술 (…)”을 정교화한 것은 고대인들, 더 정확히는 로마인들이었다. 그리고 이 기술은 ars iuris, 곧 사법 기술(art juridique)이라는 이름을 지녔다.⁷⁷ 따라서 이 로마법학자에 따르면, “자기 자신과 세계의 지배 및 변형을 위해 사법적으로 무장한(juridiquement armé) 주체, 그리고 기술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영역에서도 이 지배를 실현해가는 중인 주체는 우리의 가장 오래된 법 전통 안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그곳에 새겨져 있다 (…).” 실제로 이 역사가는 이어서 말한다. “가장 오래된 스콜라 전통 안에서, 법은 점진적으로 절대주의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지배와 주체의 자율화에 복무하는 기획이기를 멈춘 적이 없다.”⁷⁸ 따라서 절대주의적 소유 관념은 근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얀 토마스가 물권법(droit des biens)보다는 인법(人法, droit des personnes)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는 성전환자의 신분등록상 지위(état civil) 변경이나 의료보조생식(procréation médicalement assistée)의 활용 같은 주제들로 논의를 열고자 하며, 자연을 변질시키는(adultération de la nature) 기술로서의 법이 초래할 위험을 경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표는 오히려 '새로운 이데올로기', '반동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반작용적인' 이데올로기를 경계하는 데 있다. 이 이데올로기는 '근대적 범주인 권리주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자신과 자연의 주인인 개인에게 법이 부여했다고 하는 전능성(toute-puissance)'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 역사가는 비판을 한층 밀고 나가기 위해 물권법의 영역으로 옮겨 가, 소유의 문제를 다루며 짓궂게 이어간다. '모든 새로운 지배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주체-왕(sujet-roi)에 대한 비판의 관점에서, 오늘날 소유 영역(domaine de la propriété)의 확장을 두고는 과연 물음을 던지고 있는가?' '주체의 "논리적 구조"를 구성하는 "한계들"에 그토록 주의를 기울이는 우리의 심리-법률가들(psycho-juristes)이라면, 다음을 설명해주어야 할 것이다. 곧 자기 점유와 상속재산을 가치의 상한도 기간의 제한도 없이 무한정 늘리고, 그리하여 타인을 희생시켜 세계에서 그 가치의 점증하는 몫을 잘라내는 것 — 법이 인정한 이 권리가, 성전환자에게 제 신체와 정체성을 바꾸도록 법이 인정한 권리보다 어째서 전능성의 환상에 덜 복무한다는 것인지를 말이다.' 여기서 보듯, 얀 토마스가 서구의 자연 변형에서 로마법이 갖는 설명력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고대 로마를 복원하도록—특히 1804년의 소유를 로마 시대의 소유와 동일시하도록—우리를 이끌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제도들의 먼 기원을 우리가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로마법의 이러한 인위성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법 전통 자체 안에서 법과 자연을 넘어설 수단을 찾고, 토지소유를 주체-왕들(sujets-rois)이 객체-자연(nature-objet)을 지배하는 권력과는 다르게 사유하려는 시도는 헛된 일이 아닐까? 자연/문화, 주어진 것/구성된 것의 구분은, 우리의 민법 전통이 로마법을 토대로 삼는 한, 그 전통의 심장부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역사가의 몇몇 글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예컨대 「Fictio legis」⁸¹에서 토마스는 의제(fiction)를 "사실들을 위장하고, 그것들이 실제와 다른 것이라고 선언하며, 바로 이러한 변조(adultération) (…)와 이러한 거짓 가정으로부터, 만약 가장된 진실이 그것에 부여된 외양 아래 존재한다면 그 진실에 결부되었을 법적 효과들을 끌어내는" 기술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의제는 명백한 진실의 부정이다. 의제는 사물의 본성의 질서 자체를, 그것을 다르게 정초하기 위해, 위반한다. 의제는 자신이 반대 방향으로 판단하는 어떤 사실로부터 확정적인 법적 효과를 끌어낸다."⁸² 예컨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자신의 출생 시점에 사망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수 있도록, 이미 태어난 것으로 간주된다.⁸³ 따라서 의제는 자연적 사물 질서 또는 사물의 본성(nature des choses)이 존재하며, 사법 기술이 그것을 위반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물론 의제가 법의 모든 기술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추정(présomption)은 자연 질서의 전도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로마법의 fictio는 로마 시민법의 근본적 측면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⁸⁴ 토마스에 따르면, 그것은 법과 의제, 사법적 실정성(positivité juridique)과 구성 사이를 근본적으로 결합하는 관계, 곧 "제도성(institutionnalité)이 자연의 사물들의 세계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음"⁸⁵을 드러낸다.
더구나 자연은 실재가 인위에, 또는 주어진 것이 구성된 것에 대립하듯 법에 대립할 뿐 아니라, 자연적 자유가 시민 공동체의 규칙들에 대립하듯 법에 대립하기도 한다. 「자연의 사법적 제도(L'Institution juridique de la nature)」⁸⁶에서 얀 토마스는 울피아누스(Ulpianus)의 『법학제요(Institutes)』를 논평하는데, 이 책은 고유하게 인간적인 제도들 안에서 인류의 두 가지 연속되는 상태를 제시한다. 여전히 자연에 속하는 첫 번째 상태에서, "인간들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신분(statuts)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들은 대지의 재화를 공유(indivision)의 상태로 향유하며", "어떤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두 번째 상태에서는 노예제, 왕국, 사적 소유지, 또는 토지의 경계 같은 구별들이 출현한다. 자연적 시대가 사라지고 "jus gentium, 곧 만민법(droit des gens)이 태어나는 바로 그 운동 속에서, 시민 공동체들과 ius civile, 곧 시민법(droit civil) 또한 태어난다."⁸⁷ 그리하여 자연법은 시민법 앞에서, 자유의 체제는 시민 공동체의 규율된 체제 앞에서 사라진다. "자연 이후에 (그러나 자연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연법 이후에, "심지어 자연법에 반하여" 도입된 이후의 법은, contra naturam, 곧 자연에 반하여—자신에게 한계를 부과할 수 있는 이 물리적 "장애물"에 반하여—구성될 수 있으며, 특히 의제라는 기술을 통해 그 장애물에서 "벗어나고자" 한다.⁸⁹ 마리-앙젤 에르미트(Marie-Angèle Hermitte)와 파올로 나폴리(Paolo Napoli)가 지적하듯, 얀 토마스는 시민 공동체의 시민적 수립(institution civile)을 자연의 사법적 폐위(destitution juridique)와 연결한다. 이런 조건에서 자연이 법의 원천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은 이해할 만하다. 예컨대 미셸 빌레(Michel Villey)와 달리, 얀 토마스는 로마에서 법률가들이 자연을 "궁극적이고 구성적인 규범의 형상"⁹¹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자연법에 규정적 역할을 부여하지도 않는다고 가르친다. 소유에 관해서 보면, 울피아누스의 『법학제요』가 펼치는 논의는, 소유가 시민법에서 집합적 권리가 아니라 독점적(privatif) 권리로 이해됨을 시사한다. 실제로 노예제, 신분, 소유가 자유, 평등, 공동 향유의 뒤를 잇는 한, 소유는 이 공동체 상태의 이면으로 나타나고 배타성을 뜻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법 전통의 요람에서 자연은 법과 시민 공동체(cité)의 타자, 다시 말해 시민법(droit civil)의 타자였다고 할 수 있다. 소유의 경우, 이 시민법의 토대에 새겨진 소유는 공동체를 밀어내는 배타적 소유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법의 영역에서 자연주의(naturalisme) 및/또는 주의주의(主意主義, volontarisme)가 르네상스 말기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민법 전통 자체와 더불어 태어났으며, 갱신된 이론에서 소유가 땅에서 유리된 성격(caractère hors-sol de la propriété)을 갖는 것은 로마법의 인위성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토마스를 읽어보면, 로마법에서 자연은 오직 "폐위(destituée)"되고 "접근할 수 없는 이전 시기 안에 고립"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며, 그에 따라 소유 역시 언제나 독점적 소유(propriété privative)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2-2. 법의 보조자로서의 자연 — 예형화된 개인소유와 집합소유
겉보기와 달리, 자연은 로마 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저작 주변부에서 즐겨 상기했을 "유토피아"나 "황금시대" 이상의 것이다. 자연은 "한낱 부차적인(ornementale) 학설에 자양분을 대기는커녕", 법에 의해 다시 소환되어, "사법(droit privé)의 영역에 배정된다." 그리고 자연법은 사법의 한 분과가 된다.⁹² 특히 자연이 시민 공동체 상태(état de cité) 안에서 다시 발견되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 번째는 시민 상태(état civil)에서 살아남은 자연의 사물들(choses de la nature)의 경우다. 이것들은 자연법의 "원형들", "증인 형상들" 또는 "잔존물의 형태들"이다. 시민법이 그것들을 대체했어야 했지만, 법학자들은 예외적으로 그것들이 "제한된 영역 안에서" 존속하도록 남겨두었다. 시민의 시대(âge civil)에 "화석화된" 것처럼 남아 있는 이러한 자연적 사물들은 두 종류다. 한편으로는 공동 사물들, 곧 res communes가 있다. 예컨대 공기, 바다와 그 해안, 곧 "겨울철 가장 큰 만조에 의해 정해지는" 해안이 그렇다. 아직 누구의 소유 아래로도 떨어지지 않은 이 사물들을 매개로, 자연은 사인(私人)들의 법(droit des particuliers)으로부터 계속 벗어난다.[1]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시민 공동체들에 귀속되는 것도 아니다. 시민 공동체들은 물론 그것들의 "사용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그 사용을 금지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보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 없는 사물들(choses sans maître), 곧 res quae capiuntur[2]가 있다. 예컨대 아직 포획되지 않은 야생동물들은 시민 공동체의 시대에도 사인들의 법이 미치는 영향권 밖에, 그리고 소유객체의 범주 밖에 남아 있다.⁹⁴
시민의 시대에 자연이 유지되는 두 번째 상황은 자연의 사물들이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경우다. 이 경우 자연의 사물들은 잔존하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것으로서, 다름 아닌 시민 공동체 안에서 자연 상태가 복원될 가능성을 증언한다. 이러한 사물들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예전에는 주인 없는 사물들이었으나 포획되어 한동안 전유되었다가 다시 자유를 회복한 것들이다. 예컨대 어떤 맹수가 밀렵꾼의 덫에 걸렸다가 다른 사냥꾼의 손에 풀려나고, 다시 그 사냥꾼의 손아귀마저 벗어난다고 하자. 이 맹수는 자유를 되찾아, 전유된 사물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난다. 그렇기에 사냥꾼은 그 맹수를 밀렵꾼에게서 훔쳤다는 이유로 고발당할 수 없다.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사물들 중 두 번째 종류는 예전에는 공동 사물들이었으나 인간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 소유객체가 되었다가 다시 자유를 회복한 것들이다. 예컨대 수면 위로 튀어나온 건축물이 헐리고 나면, 그 해안은 처음 상태로 돌아가 본래의 자유를 되찾는다.⁹⁵
물론 자연의 사물들, 곧 공동 사물들과 주인 없는 사물들은 "사실상 더 이상 이 세계의 것이 아니며", 시민의 시대에 드물게만 존속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시적으로 자유와 주인 없는 사물 및 공동 사물이라는 성질을 잃었다 하더라도, 시민 공동체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다. 포획된 사냥감이나 둘러싸인 해안이 그러하다. 자연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되돌아와, 자신을 상대로 획득된 법적 상황들을 무효화하고, 시민법적으로 보장된 '점유들의 연속성'을 중단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움직임은 법의 인위성을 거의 상대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실제로 이는 마치 법학자들이 자연을 법에서 떼어낸 뒤, 그 자연을 자기 손으로 빚어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자연이 되돌아오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로마 법학자들은 "법이 시민의 시대에 사라진 자연적 체제를 사안에 따라 산발적으로 회복시킨다"고 믿는 척한다. 그러나 그 자연을 정교하게 빚어내고 그려내며 끝내(in fine) 제도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다. 따라서 법과 자연은 대립하기보다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토마스에 따르면, 자연법은 법학자들이 이 지상에서 재생산해야 하고, 인간들이 그것에 따라야 하는 초월적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법은 시민 공동체의 제도들과 짝을 이루는 상상의 자연물을 재현하고자 법학자들이 그린 프레스코화다.
특히 물권법의 영역에서, 공동 사물들과 주인 없는 사물들은 자연 상태에서 공적 사물과 사적 사물이라는 시민적 제도들을 반영한다. 주인 없는 사물들이 사적 사물들을 예형화한다면, 공동 사물들은 공적 사물들, 다시 말해 res publicae 또는 res universitatis[3]라고도 불리는 사물들을 예형화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주인 없는 사물들은 독점적 소유의 본보기가 되는 반면, 공동 사물들은 집합소유의 본보기가 된다. 실제로 사냥꾼은 야생동물을 포획할 때 공동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취하는 것이 아니며, 집합적 향유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본래 자율적인" 존재, "원초적으로" 이미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는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덫 사냥꾼이 자신의 사냥감에 대해 갖는 개인소유는, 그 짐승이 애초에 그리고 개별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소유를 본뜬 것이다. 반대로 숨을 쉬거나 갈증을 해소하는 산책자는 공동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취한다. 그는 물과 공기에 대한 집합적 향유권을 행사한다. 이 권리는 불분할 소유를 예형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는 res communes, 곧 바다와 해안이 모든 시민 공동체 바깥에서, 시민 공동체들 안에서 공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그 사용이 공동적인 사물들, 곧 강, 도로, 광장, 극장, 시장, 목욕장 등의 모델을 구성한다고 쓴다. 따라서 공동 사물들은 시민 공동체 상태에서 존속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집합적 사용에 속하는 수많은 사물들의 제도화와 함께 연장된다. 우리는 소유가 시민 공동체 상태 안에서도 독점적·개인적·배타적(exclusive) 소유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른바 res publicae 또는 res universitatis를 통해, 소유는 불분할적(indivisée)·공동적(commune)·집합적(collective)인 것일 수도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배타적인 소유라는 생각을 옹호하기 위해 로마법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주인 없는 사물들, 공동 사물들, 공적 사물들에 대한 로마법적 접근은 이러한 민법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독해를 갱신하도록 이끈다. 우선, 주인 없는 사물들에 대한 얀 토마스의 해석은 권리객체와 권리주체의 범주들을 뒤흔들고, 사물들을 배제하고 오직 인격들만이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아직 사냥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맹수가 자기 자신에게 속하고, 자신의 자연적 자유를 회복한다면 다시 자기 자신에게 속하게 되는 것이라면, 동일한 하나의 존재물이 권리객체와 권리주체의 자격을 겸유할 수 있으며, 사물들 또한 소유자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¹⁰⁴ 실제로 현행 민법 제715조는 경찰법규(lois de police)[4]들이 사냥하거나 낚시할 수 있는 능력을 규율한다고 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냥감과 물고기가 포획되기 전까지 계속 자기 자신에게 속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법은 사물-소유자들(choses-propriétaires), 적어도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사물-소유자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res communes에 관해 이 역사가가 덧붙인 설명들은 공동 사물들의 범주가 전유 불가능한 사물들, 또는 적어도 전유되지 않은 사물들의 범주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이끈다. 토마스는 "오늘날 우리가 그것들이 자연에 속한다는 이유로 '사물들'이라고 부르기를 망설이는 이러한 사물들"이 로마에서는 "특이한 법적 상태, 곧 '모든 인간에게 공동적인 사물들'의 상태"를 지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상태는 "그 사물들을 특정한 누구에게도 전유될 수 없게 만들었다."¹⁰⁵ 현행 민법 제714조에서 공동 사물들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그 사용이 모두에게 공동적인 사물들이 있다. 경찰법규들이 그것들을 향유하는 방식을 규율한다." 공동 사물들에 관한 로마법적 관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조항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곧 특정한 누구에게도—속하지 않고, 그 사용이 모두에게 공동적인 사물들이 있다. 이 사물들은 모두의 소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동 사물들은 시민의 시대에도 지속되는, 원시적·실정적 공동 소유(communisme positif primitif)의 상태를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법 제714조는 "경찰법규들이 그것들을 향유하는 방식을 규율한다"고 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res publicae에 관해 토마스가 제시한 설명들 역시 소유가 공동체에 대립하지 않으며, 집합적 소유가 민법전 자체 안에서 독점적 소유와 경합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 이 역사가는 로마인들이 공적 사물들을 시민 공동체나 국가에 속하는 사물들, 곧 공공의 단독 소유(propriétés individuelles publiques)로 파악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그들은 공적 사물들을 시민들의 일반성, 집합성 또는 보편성에 속하는 사물들로 파악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res universitatis라고도 불렸다.¹⁰⁶ 그런데 현행 민법 제542조는 코뮌 공동재산(biens communaux)을 "하나 또는 여러 코뮌의 주민들이 그 소유권 또는 그 수익에 대해 기득권을 갖는 재산"으로 정의한다. 물론 판사들은 이 조항을 코뮌이라는 법인들에게 코뮌 공동재산을 단독으로 소유(la propriété individuelle des communaux)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민법 제542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코뮌 공동재산을 로마법의 공적 사물들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공적 사물들은 시민 공동체 주민들의 일반성, 집합성 또는 보편성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은 더욱 정당화될 수 있다. 민법 제542조의 기원에 있는 1793년 6월 10일 법률이 제4절 제1조에서 다음과 같이 정했기 때문이다. "모든 코뮌 공동재산은 (…) 그 본성상, 이 코뮌 공동재산이 그 영역 안에 위치한 코뮌 또는 코뮌 분구의 주민 총체 또는 그 구성원들에게 귀속되며 그들의 소유이다." 따라서 유명한 민법 제544조 곁에 있는 제542조는, 원칙적으로 집합적이며 주민 공동체에 속함에 기초한 소유 형태를 담고 있을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 없는 사물들의 소유를 모델로 한 사적 사물들의 배타적 소유와, 공동 사물들의 소유를 모델로 한 공적 사물들의 집합소유는 소유자가 되고 소유자로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응할 수 있다. 한편에는 포획(captation)에 뒤이은 지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접근(accès)에 뒤이은 거주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움직이는 사물과 고정된 사물, 소멸하는 사물과 영속하는(pérennes) 사물 사이의 프랑크법의 구분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소유 유형을 구별할 수 있다. 한편에는 사냥감과 같은 움직이는(mobiles) 사물들에 대한 지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대지와 같은 영속하는 사물들에 대한 거주가 있다. 소유를 지배할 권력으로 정의하는 것은, 고전적 소유 이론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다지 놀랍지 않다고 인정하자. 반면 소유를, 특히 대지에 거주할 권력(pouvoir d'habiter)으로 제시하는 것은 놀라움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거주라는 소유자의 형상을 사법적 사물들(choses juridiques) 또는 res iuris에 관한 로마법적 존재론에 정박시킬 수 있을 것이다.
2-3. 사물의 본성을 발견하기 — 사물들을 장소로 사유하기
얀 토마스가 로마 법학자들이 자연에 대해 취하는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미리 상정된 관념적 자연 질서나 사물의 본성에 충실한 법을 정교화하려는 기획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을 전한다. 이 교훈을 빠뜨리면 로마법을 우리의 근대적 법 관념의 두 번째 측면, 곧 자연법론적(jus-naturaliste) 측면이 아니라 주의주의적(volontariste) 측면으로 환원하게 된다.¹⁰⁷ 실제로 이 역사가는 로마인들이 주관적 권리(droit subjectif) 개념을 알지 못했으며, 그들이 법에 대해 주관주의적 관념이 아니라 객관주의적 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달리 표현하면 결의론적(casuistique)[5]인 시각이다.¹⁰⁸
로마법의 이러한 객관성은 여러 함의를 갖는다. 우선 갱신된 학설이 그러하듯, 이 경우 소유와 동일시되는 주관적 권리의 토대를 로마법에서 찾는 일이 헛된 일임을 뜻한다. 다음으로 같은 학설에 기대어, 실용주의적 로마법에 기초해 명시적으로 교조적인(dogmatique) 소유 관념을 옹호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민법 전통, 특히 우리의 물권법이 지닌 로마법과 게르만법이라는 이중 기원이, 안-마리 파토(Anne-Marie Patault)가 생각하듯, 극복 불가능한 모순을 만들어내지는 않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¹⁰⁹ 실제로 농민들의 현실이 스며 있는 관습법상의 물권법과 학술적인 지적 구성물인 로마법상의 물권법을 대립시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로마법은 사물들의 현실로부터 분리된 구성물, 곧 그러한 의미에서 땅으로부터 유리된 건축물(édifice hors-sol)이기는커녕, 사물들에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실제로 원인 개념(notion de cause)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구성하는 범주들의 일부를 이루는 사물과 원인의 개념들이 서로 겹쳐진다고 진술한다.¹¹⁰ 그는 사물이라는 말의 절차적이고 본래적인 의미, 곧 재판에서 판단이 내려진 사안의 권위(기판력, autorité de la chose jugée)에서 출발하여, 재판의 틀 안에서 사물, 곧 res를 구성하는 사안 또는 계쟁(係爭)의 요소들이 어떻게 정제되고, 구조화되고, 특정화되어, 마침내 특징지어진 원인, 곧 causa[6]로 귀착되는지를 보여준다.
쟁송(爭訟) 중인 사안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법률가는 실제로 res의 한 부분, 곧 주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부분을 걸러내거나 제거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중심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다른 부분, 곧 causa를 남기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기준들이나 근거들의 도움을 받아 먼저 논쟁을 설정하고, 토론의 구체적 객체 또는 주제, 곧 res를 일반적 객체, 곧 quaestio로 변환한다. 이어서 이 객체, 곧 "같은 유형의 모든 사안들이 환원되는" 객체인 genus causae는 개별 사안에 그 특수한 존재, 곧 natura causa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¹¹¹ 따라서 causa는 res에서 출발하여 각각의 항이 다음 항을 포함하는 "하나의 연쇄의 마지막 단계"¹¹²로 나타난다. 분명히 해둘 점은, 법학자의 임무는 가능한 무한한 수의 사안이나 계쟁에 제한된 수의 원인 또는 법적 근거를 대응시키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 목록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사물들의 관념적 본성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인위적 본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 실제로 그 방법은 "주체가 객체의 실제 구조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고자 하는 인위적 구조"를 객체 위에 투사하는 것이며, 이 구조는 결국 "객체의 실제 구조로 인정된다."¹¹³ 한마디로, 그것은 "인식이 존재의 심장부 자체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오직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문제다.¹¹⁴
물론 로마의 사법적 사물들(choses juridiques romaines), 곧 res iuris 또는 res incorporales가 res corporales에서 유래한다는 점이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 물을 수 있다. 여기서 res corporales란 자연의 사물들의 소유 또는 무-소유(a-propriété)를 파악하기 위한 쟁송 중인 사물들 또는 논의된 사안들을 말한다. 실제로 이러한 로마법상의 법적 사물들은 재판 절차와 소송 과정상의 법질서에 속하며, 실체적 법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특히 물권법에 속하지 않는다. 얼핏 보면 한편에는 소유의 다양한 형태를 예형화하는 자연의 사물들, 곧 공동 사물들과 주인 없는 사물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재판의 결과로 얻어진 사물들이 있으며,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물권법상의 사물들에서 절차법상의 사물들로 넘어가는 일은 보기보다 덜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 우선 갱신된 소유 학설의 한 지지자는 소송의 소유자(propriétaire du procès)[7]와 토지의 소유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둘은 사물들에 대해 동일한 역량을 행사하기" 때문이다.¹¹⁵ 다음으로, 얀 토마스는 우리에게 사물에 관한 근대적 관념, 곧 비어 있고 수동적이며 불확정적인 존재물들(entités)이라는 관념을 버리고, 사물에 관한 로마적 시각, 곧 자신들 안에 새겨진 규정들로 가득 찬 존재물들이라는 시각을 택하라고 권한다. 이는 로마법의 세계에 접근하고, 나아가—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근대성의 프리즘이 아닌 방식으로 법을 읽어내기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이 역사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 "주체와 객체의 근대적 대립", "행위의 주관적 영역과 사물들의 객관적 영역 사이의 분할", "인격의 자유와 자연의 수동성" 사이의 구분에 우리의 법적 사고방식 전체가 토대하고 있다면, 로마법은 이와는 다르게 작동한다. 로마법의 사물, 곧 논쟁이나 분쟁의 객체 또는 주제인 사물과, 근대의 사물, 곧 권리주체-인격(personne-sujet de droit)에 대립하는 권리객체로서의 사물을 비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유의지와 객체의 대면(confrontation)[8] 위에서 작동하는 우리의 법적 사유와 달리, 로마법은 res를 주체와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 바라보지 않고, 법에 통합되는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res는 처음부터 법의 사물이다." 그런데 로마법의 법적 사물이 데카르트적 res extensa(연장 실체)의 범주뿐만 아니라 칸트와 헤겔의 Sache(사물, 사태) 개념에서도 완전히 벗어난다는 사실은 소유를 바라보는 방식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토마스가 지적하듯, 로마법의 사물은 결코 "주체의 일방적 지배가 행사되는 자리", 곧 자신의 소유자에게 전적으로 종속된 존재물이 아니다. 그 증거로, 초기 로마법에서 "dominium, 곧 소유는 dominus, 곧 집의 주인을 가리키며", "인격의 연장이라 할 만한 것"을 이룬다. 그러므로 사물들과 인격들은 서로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물들의 본래 의미로 되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소유를 자기 외부의 객체에 대한 주체의 배타적 권력과는 다르게 사유할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인격들에 외부의 물질적 객체로서의 사물이라는 표상을 대신하여 우리가 어떤 도식, 어떤 사물 표상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토마스의 글들로 되돌아가면, 로마법적 관념은 장소(lieu)로서의 사물이라는 이미지를 품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토마스는 res의 정제 과정 중 첫 번째 단계인 논쟁이 "소송당사자들 사이에 하나의 닫힌 장소를 그려내며, 그 안에 논쟁의 소재가 갇힌다"고 언급한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논쟁은 실체가 아니라" 순수하게 담는 것, 외부적인 한계, 서로 맞서 있는 두 적대자가 투사하는 한계다. "이 공동의 중심 안에 논의되는 '사물'이 놓인다 (…)." "이 한가운데에 사로잡힌 res는 causa가 된다." 역으로, "causa는 논쟁의 장소 안에서 변형된 이 '사물'이다."¹²¹ 마찬가지로, causa 개념에 관한 연구에서 res는 어떤 장소 안에서 형체를 갖추는 사물, 바로 어떤 장소 안에 기입됨으로써 생겨나는 사물이다. "계쟁에서 남겨지는 것은 두 행위자 사이의 갈등 장소 안에 그것이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 계쟁, 곧 lis는 "하나의 틀, 하나의 형식적 장소를 구성한다"고 토마스는 기록한다.¹²² 어떤 경우에는 사물과 장소가 심지어 동일시된다. res는 "(미)분화된, 불확정적이며, 규정되지 않은 사물(une chose (in)différenciée, indéterminée, non qualifiée)"이기는커녕, "위치 지어진 것이며, 고유한 기능들의 장소(«la res est située, elle est le lieu de fonctions propres)"이다.¹²³
사물들이 장소로 사유됨에 따라, 인격들과 사물들의 관계, 이어서 양자 사이의 전유 관계 역시 재구성되어야 한다. 「사물(Das Ding)」과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Bauen Wohnen Denken)」에서 하이데거(Heidegger)는 사물이라는 말의 본래적이고 법적인 의미, 곧 사안, 계쟁 또는 사례라는 의미를 다시 취한다. 로마법 역사가가 그러했듯이, 이 철학자 역시 사물들을 장소로, 곧 단지(der Krug)나 다리(die Brücke)처럼 사방(Geviert)에게, 다시 말해 대지(die Erde), 하늘(der Himmel), 신적인 것들(die Gottheit), 죽을 자들(der Sterbliche)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장소로 정의한다.¹²⁴ 따라서 사물들은 그 안에 머무는 자들을 위한 맞이의 장소, 거처 또는 거주처로 나타난다. 근대적 사물-객체 관념을 로마적 사물-장소 관념으로 대체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 철학자가 그려낸 움직임을 따라 사물들을 환경들로, 인격들을 그 거주자들로, 소유를 거주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그리고 권리들 또는 재산들을 이른바 소유자들이 사물-환경(choses-milieux)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들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유자들은 사물들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도록 허락받은 자들이기는커녕, 장소들을 존중하는 행동, 다시 말해 위치 지어진 이러한 사물들 또는 이러한 환경들에 적합한(approprié)[9] 행동을 채택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될 것이다.
물론 법의 영역 위에서 사물-몸체들(choses-corps)에서 사물-환경으로 넘어가는 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거주 관계(rapport d'habitation)로서의 소유 관념이 우리의 민법 전통 자체와 함께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res publicae, 곧 시민 공동체의 거주자들에게 속하는 이러한 사물들은 차치하더라도, 거처 또는 집인 domus가 dominium에 자신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가 "주체와 객체의 근대적 대립"에서, 다시 말해 인격들이 사물들에 대해 행사하는 "일방적 지배"로부터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사물들과 인격들 사이의 동일성 관계, 또는 적어도 연속성 관계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dominium이 dominus, 곧 집의 주인의 연장선상에 놓인다면, 소유는 원초적으로 자신의 거처 또는 집에 거주할 수 있는 능력(capacit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본래 dominium은 지배할 권력에 앞서, 먼저 거주할 권력(pouvoir d'habiter)을 의미할 수 있지 않나? 집주인의 지배를 기준으로 소유를 정의하는 대신, 우리는 dominus에 의한 소유지(domaine)의 거주에서 출발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우리는 소유가 res publicae를 통해 집합소유의 영역(champ)에서뿐만 아니라, domus, 곧 집을 통해 독점적 소유의 영역에서도 거주 관계로 사유될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소유에 대한 이러한 재구성은 하나의 법적 세계관, 곧 로마법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 로마법적 세계관은 한편으로 자연을 단순히 법의 타자, 곧 "법률 밖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함께 사유하고 행위할" 존재물로 이해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사물들의 실재를 무시하고 더 이상 대지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땅에서 유리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각주
76. Y. Thomas는 자연에 관한 로마적 개념을 환경법이 아니라 자연법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그렇다고 자연법 연구가 자연 환경이라는 의미의 자연의 법적 지위와 무관한 것은 아닌데, 아래에서 드는 야생 동물이나 이동하는 해안의 예가 이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일상 언어에서 사물의 실체 또는 본질을 뜻하는 '사물의 본성(nature des choses)'이라는 표현은, 언뜻 환경이라는 의미의 자연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가 이 '사물의 본성'이라는 표현을 해석하는 방식은 법적 주관주의(곧 근대 서구의 법 관념)에 정면으로 맞서며, 따라서 오늘날의 환경 문제와 관련될 수 있는 관점에도 맞선다.
77. Y. Thomas, 「Le sujet de droit, la personne et la nature」, Le Débat, 1998/3, n° 100, p. 105.
78. 같은 글, pp. 105-106.
79. 같은 글, pp. 106.
80. 같은 글, p. 92, p. 105.
81. Y. Thomas, 「Fictio legis. L’empire de la fiction romaine et ses limites médiévales」, in Les opérations du droit, EHESS, Gallimard, Seuil, novembre 2011, pp. 133-186, 특히 p. 153을 보라 (원래 Droits. Revue française de théorie juridique, n° 21, 1995, pp. 17-63에 수록).
82. 같은 글, p. 135.
83. 같은 글, pp. 144-145. 로마법 격언 infans conceptus pro nato habetur de commodis ejus agitur는, 잉태된 아이는 그에게 이익이 되는 때에는 언제나 태어난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다음의 민법 제725조 제1항, "상속받기 위해서는 상속 개시 시점에 존재하고 있거나, 이미 잉태되어 있었던 경우 살아서(viable) 출생하여야 한다."와 견주어 보라.
84. Y. Thomas, 「Fictio legis...」, 앞의 글, pp. 135-136.
85. 같은 글, pp. 137-139, pp. 147-149, pp. 151-153.
86. Y. Thomas, 「L'institution juridique de la nature. Remarques sur la casuistique du droit naturel à Rome」, in Les Opérations du droit, 앞의 책, pp. 21-40 (원래 Revue d'histoire des facultés de droit et de la science juridique, n° 6, 1988, pp. 27-48에 수록).
87. 같은 글, p. 22.
88. 같은 글, pp. 21-22.
89. M.-A. Hermitte, P. Napoli, 「Préface」, in Y. Thomas, Les Opérations du droit, 앞의 책, pp. 8-9.
90. Y. Thomas, 「L'institution juridique de la nature...」, 앞의 글, p. 23.
91. 같은 글, p. 25.
92. Y. Thomas, 「L'institution juridique de la nature...」, 앞의 글, pp. 25-26.
93. 같은 글, p. 36.
94. 같은 글, p. 29.
95. 같은 글, pp. 33-36. 흐르는 물(바닷물이 아닌)이 한 소유지의 한쪽 하안(河岸)에서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서서히 물러나 다른 쪽으로 옮겨 갈 때 드러나는 땅(relais)에 관한 민법 제557조 제1항, "드러난 하안의 소유자는 충적지의 이익을 얻으며, 맞은편 하안에 인접한 토지 소유자는 자신이 잃은 땅을 되찾겠다고 청구할 수 없다."와 견주어 보라.
[옮긴이] rive는 강·호수·바다를 가리지 않고 물과 육지가 맞닿는 가장자리를 두루 뜻하는 일반적인 말이다. 다만 이 조문이 바닷물이 아닌 흐르는 물, 곧 하천을 다루므로, 그 맥락에 맞추어 강가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하안(河岸)'으로 좁혀 옮겼다. 물과 접한 이 가장자리는 물권의 경계가 되는 지점이다.
96. 같은 글, p. 31.
97. 같은 글, p. 33.
98. 같은 글, p. 35.
99. 같은 글, p. 33.
100. 인격법에 관하여는, 입양에 대해 같은 글, p. 36, 또한 「Fictio legis」, 앞의 글, p. 154를 보라.
101. Y. Thomas, 「L'institution juridique de la nature...」, 앞의 글, p. 30.
102. 같은 글, p. 27.
103. M.-A. Hermitte, P. Napoli, 앞의 글, p. 9를 보라.
104. F. Zenati-Castaing(앞의 책, p. 42)과 대조하라. 그에 따르면 사물이 권리주체라는 관념은 프랑스법에서 결코 인정된 적이 없다.
105. Y. Thomas, 「Le sujet de droit, la personne et la nature...」, 앞의 글, p. 95.
106. Y. Thomas, 「L'institution juridique de la nature...」, 앞의 글, p. 27.
107. 근대 법사상은 '주의주의(主意主義, volontarisme)'(근대 실증주의의 다른 이름)와 '합리주의(rationalisme)'로 나뉜다고 하는데, 이 합리주의는 일종의 자연법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V. Descombes, Le Complément de sujet. Enquête sur le fait d'agir de soi-même, Gallimard, 2004, NRF, pp. 401-402와 O. Cayla, 「Le droit de se plaindre」, in O. Cayla, Y. Thomas, Du droit de ne pas naître. À propos de l'affaire Perruche, Le Débat, Gallimard, 2002, p. 26을 함께 보라.
[옮긴이] 여기서 '실증주의'는 콩트류의 인식론적 실증주의가 아니라 법실증주의(positivisme juridique)를 가리킨다. 법실증주의는 법을 주권자·입법자의 의지(volonté)가 정립한 실정법으로 보는 입장이므로, 의지를 앞세우는 주의주의와 통한다. 이는 법을 이성(raison)이 발견하는 보편적 정의로 보는 자연법주의(합리주의)와 대립한다.
108. Y. Thomas, Causa: sens et fonction d'un concept dans le langage du droit romain, Université Paris 2 Panthéon-Assas, 1976, p. 615: "로마적 방식은 법에 대한 실재론적 시각에 고유한 방식으로, 그 연구의 모든 노력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안들의 이론적·전형적 정식화에 기울인다."
109. A.-M. Patault, 앞의 책, p. 16 § 1, p. 135 § 112.
110. Y. Thomas, Causa..., 앞의 책, p. 107, pp. 137-138, p. 160.
111. 같은 책, p. 210, pp. 229-230.
112. Y. Thomas, 「Le droit entre les mots et les choses. Rhétorique et jurisprudence à Rome」, Archives de philosophie du droit, pp. 93-114, p. 107.
113. Y. Thomas, Causa..., 앞의 책, p. 112, pp. 229-230.
114. Y. Thomas, 「Le droit entre les mots et les choses...」, 앞의 글, p. 107.
115. F. Zenati-Castaing, 앞의 책, p. 263.
116. Y. Thomas, 「Res, chose et patrimoine...」, 앞의 글: "res의 모든 의미를 통합할 수 있는 다른 체계, 곧 권리주체라는 우리의 인공물이 전제로서 주어지지 않는 체계를 구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
117. 같은 글, pp. 413-414.
118. 같은 글, p. 417.
119. 같은 글, pp. 418-419.
120. 같은 글, p. 422. 또한 Y. Thomas, 「Le droit entre les mots et les choses...」, 앞의 글, pp. 93-98을 보라.
121. Y. Thomas, Causa..., 앞의 책, pp. 101-103.
122. 같은 책, p. 266.
123. 같은 책, p. 165.
124. M. Heidegger, 「Bâtir habiter penser」, in Essais et conférences, traduit de l’allemand par André Préau et préfacé par Jean Beaufret, 1958, nouvelle édition, coll. Tel, Gallimard, 2003, pp. 170 이하; M. Heidegger, 「La chose」, in Essais et conférences, 앞의 책, pp. 194 이하.
옮긴이 주
[1] 사법(droit privé)과 사인들의 법(droit des particuliers)은 구별된다. 사법(私法)은 공법(公法)에 대비되는 법 분류상의 명칭이고, 사인(私人)들의 법은 사사로운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즉 개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법을 뜻한다. 저자는 자연의 사물이 사인들의 소유나 지배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공적인 시민 공동체에 귀속되지도 않은 상태를 가리킬 때, 후자의 표현을 사용한다.
[2] res communes(공동 사물)와 res quae capiuntur(포획되는 것들)는 로마법에서 사인의 소유 대상이 되지 않는 자연의 사물을 가리킨다. 전자는 공기·바다·해안처럼 본성상 만인에게 공동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res communes omnium)이고, 후자는 야생동물·물고기·새처럼 아직 주인이 없어(res nullius) 먼저 포획하는 자가 선점(occupatio)으로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전자는 소유 자체가 불가능하고, 후자는 아직 소유되지 않았을 뿐 포획하면 사유물이 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3] 원문에는 'universatis'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res universitatis(단체·공동체에 속하는 사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여 universitatis로 바로잡았다. res universitatis는 로마법에서 도시나 시민단체에 귀속되는 공용 재산(강·도로·광장·극장·시장·목욕장 등)을 뜻한다. 이 오기는 이 책의 원문에서 지금 대목 외에도 제2장 후반부와 제3장에서도 등장한다. 옮기는 과정에서 모두 바로잡았다.
[4] 여기서 '경찰법규(lois de police)'의 '경찰'은 치안 기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규제 작용을 가리키는 전통적 경찰개념(프랑스 민법 제3조의 lois de police et de sûreté)이다. 이 조문(제715조)에서는 사냥과 어로의 권리를 규율하는 특별법규를 뜻한다.
[5] 결의론(casuistique)은 보통 일반 원칙을 개별 사례(cas)에 적용해 판단하는 방법론을 뜻하며, 신학·윤리학에서는 흔히 부정적 함의(궤변적 세부 따지기)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함의 없이, 추상적·연역적 권리 체계가 아니라 구체적 사안 하나하나에 근거해 법을 구성하는 로마법 특유의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이는 앞서 언급된 '사안에 따라(casuellement)' 법이 작동한다는 서술과 연결된다.
[6] 프랑스어 cause와 라틴어 causa는 '원인'과 함께 '소송의 사유·법적 근거(즉 소인訴因)'를 뜻한다(영어 legal 'cause'의 어원을 떠올려보자). 이 소절에서 토마스는 재판 과정에서 '사물(res)'—다투어지는 사안(affaire)의 요소들—이 하나의 '원인이자 소송 근거(causa)'로 정제·귀착되는 방식을 논하며, '사물'과 '원인' 두 개념이 겹침을 보인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저자는 causa를 '법적 근거(fondement juridique)'와 동치시킨다.
[7] '소송의 소유자(propriétaire du procès)'란 소송에서 다투어지는 것(res), 곧 계쟁물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다투는 자를 뜻한다. 앞서 논한 대로 로마법에서 소송의 대상(res)은 하나의 '사물'이므로, 저자는 이를 소유하는 자를 토지의 소유자(propriétaire du fonds)와 나란히 놓아, 둘이 사물에 대해 동일한 소유 역량을 행사함을 보인다.
[8] 여기서 ‘자유의지와 객체의 대면’은 근대 서구의 법이 자유의지(주체)가 객체를 앞에 두고서 마주하는 이항 구도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9] '적합한'으로 옮긴 approprié는 앞서 '전유'로 옮긴 appropriation과 어원(approprier)을 공유한다. 저자는 이 어원상의 연결을 활용하여, 사물을 전유한다(s'approprier)는 것이 사물을 자의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환경에 적합하게(approprié) 관계 맺고 거주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컨대, 전유의 참뜻은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에 적합하게 거주하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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