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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In Moving Translation

라스트코 모치닉, 이해와 호명

by 인-무브 2026. 6. 23.

이해와 호명

Understanding and Interpellation

 

 

라스트코 모치닉(Rastko Močnik) 지음

엄정후 옮김

 

 

[옮긴이의 말]
라스트코 모치닉이라는 이름이 생소하실 수 있지만, 그는 슬라보예 지젝, 믈라덴 돌라르, 알렌카 주판치치 등과 함께 슬로베니아 학파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앞서 언급한 학자들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가 전개하는 이데올로기론은 라캉의 이론보다는, 주로 담론 이론에 의거한다는 점입니다(물론 그 역시 라캉의 이론을 참조합니다.). 모치닉을 통해서, 슬로베니아 학파는 단순히 라캉의 이론에 의거하는 학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이론을, 또 아방가르드·펑크 예술을 통해 당시의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이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앞으로도 모치닉의 글을 번역해 연재할 계획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치닉을 소개해주신 배세진 선생님, 발화와 언표 개념에 대해 친절히 알려주신 Bomin 님, 바흐친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 주신 아주대 이병훈 교수님, 루카치의 작업에 대해 설명해 준 편린에게, 또 글의 게재를 허락해 주시고 기다려주신 웹진 인-무브에 감사를 표합니다. 무엇보다도 친절히 이 글을 제공해 주고, 번역까지 허락해 준 모치닉 선생님께 큰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자 약력: 요시프 라스트코 모치닉은 1968년 류블랴나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문학사{History of Literature} 학위를 취득했다. 1969-1970년에 파리 고등사회연구원의 박사 과정생이었다. 그는 A. J. 그레마스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부터, 류블랴나 대학의 문화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류블랴나 인문학 연구 기관의 공동 설립자이자 학술위원회의 구성원이다. 동시에 플로브디프 파이시 힐렌다르스키 대학교{Paisii Hilendarski University of Plovdiv} 산하 비판사회연구소 국제운영위원회의 공동 의장을 역임했다(2005~2021). 그는 Sociological Problems의 편집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2005년에는 플로브디프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문화사회학, 문학사회학, 언어 철학, 담론 이론, 기호학, 인류학 이론, 정신분석 이론 그리고 정치 이론의 분야에서 13개 언어로 출판된 250편 이상의 저서와 논문의 저자이다. 그의 단행본 Encounters: Histories, Transitions, Beliefs (2001)와 여러 편의 이데올로기론 관련 논문은 불가리아어로 출간되었다.

 

[모치닉의 말]
이 글의 목표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의 도입에 의존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이론의 개념을 다른 이론의 문제의 장 속으로 차용하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이러한 이행은 차용하는 이론의 결점과 풀리지 않은 문제를 감추는 알리바이가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론의 공백을 다른 곳에서 차용한 개념을 통해서 채우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더 이상 개념으로서 기능하지 않게 됩니다.

독자들은 제가 주체를 한 기표가 다른 기표에 의해 대리 표상되는 것의 효과(“은유”)로 파악하는 라캉의 이론을 암묵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것이 합당한 차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의 주체 개념이 현재 존재하는 유일한 주체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대한 자립적인 문제 설정을 구축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론적 인식의 대상{objet de connaissance théorique}의 층위에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거나 벼려냄을 통해서, 즉 담론 이론의 개념(바흐친, 뒤크로)에 의거함을 통해서 말이죠.

데안 데야노프의 철학적 탐구는 바로 그것이 다른 어떤 이론이 아닌 철학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론적 정교화 과정 속으로 옮겨올 수 있습니다.

저는 데얀 데야노프와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 왔습니다. 데얀은 플로브디프 파이시 힐렌다르스키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플로브디프에서 자주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저희는 몇 개의 연구 과제를 함께 진행했습니다. 

 

 

**초록**

이 글은 라스트코 모치닉이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대해 2013년에 쓴 글로, 이는 우리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이 놀라운 사상가와의 만남에 빚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 중 하나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십여 년 동안,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긴 했지만, 이 글은 우리의 아카이브에 원고로만 남아 있었다처음에는 비판 사회학 연구소에(모치닉은 이 기관의 국제 이사회의 공동 의장이었다) 있다가, 초근대성 비판 이론 연구소{Institution for Critical Theories of Supermodernity}에 보관되었다. 틀림없이, 이 글은 그가 소피아 대학과 플로브디프 대학의 강의 속에서 발전시킨 그의 이론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라는 알튀세르적 문제를 재논의하며, 모치닉은 타자의 담론으로의 정향{orientation towards another’s discourse} 그리고 그가 담론적 연쇄의 “이중 기입”{double inscription}이라고 부르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해, 그의 과거 해결책들을 되짚고(주로 오스왈드 뒤크로의 언어 내에서의 논증에 대한 이론에 근거하는), 사유의 선술어적 명증성에 대한 데안 데야노프의 이론을 거쳐 그것에 기반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최종적으로 여러 사례의 미시적인 세부 사례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동일화를 통한 재생산 이데올로기적 호명”{reproductive ideological interpellation by identification}과 “주체화를 통한 분열적 호명”{disruptive interpellation by subjectivation}을 구분해야 한다는 인상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모치닉의 이론이 앞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이며, 그것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오직 미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편집자 일동

 

*핵심어: 이데올로기적 호명(재생산적 그리고 분열적), 알튀세르, 토포스{topos}, 뒤크로, 사유의 선술어적 명증성

 


 

이 글에서, 나는 이데올로기론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데올로기론은 중요하다. 이는 어떤 이가 순진하게 추측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조작에 대한 해독으로서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는 그것 자체의 정치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이러한 중요성은 우리가 특정 이데올로기론에 수반된 정치적 전술과 그것의 정교화가 야기한 특정 효과를 함께 고려한다면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급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둘 사이의 대립 양상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인 방식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물은 각각의 계급이 자신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했는가에 달려있다. 즉, 이는 그들의 계급의식의 “성취” 혹은 “현실화”에 달린 것이다.[1] 이것을 정치적인 용어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급의식을 외부로부터 도입하려는 레닌주의적 기획에 헌신하는 볼셰비키형 정당의 독트린을 뒷받침할 수도 있을 것이다.[2] 그람시적 개념인 헤게모니를 과소평가하며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키면, 그것은 부르주아적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의 성취이라는 톨리아티의 전술로 귀결할지도 모른다.[3] 혹은, 그람시에 대한 대략적으로만 올바른 이해와 역사적 상황에 대한 형편없는 분석이 결합해, 최종적으로는 베를링구에르의 “역사적 타협”이라는 독트린에 다다를지도 모른다.[4]

 

볼셰비즘과 유로-코뮤니즘에 이르기까지, 20 세기의 공산주의 정치의 다양성을 표시하는 독트린들 속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부르주아 사회의 재생산에서 이데올로기적 다원성이 행하는 역할에 대한 평가절하를 찾아볼 수 있다. 정치 속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말해, 이데올로기의 호소 작용에 대한 문제 설정{problematics}을 구성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이는 알튀세르가 개념화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라는 문제의 장{problem field}을 형성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루카치는 소작농이나 쁘띠 부르주아지를 향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가능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유보하며, 소작농과 쁘띠 부르주아지의 의식은 “언제나 빌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루카치, 1999:146). 그리면서 그는 그 “빌려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그 조건에 대해 탐구했다면, 그는 이데올로기적 호명과 프롤레타리아트적 개인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 숙고했을지도 모르며, 결과적으로 그의 역사적 낙관주의를 철회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베를링구에르는 의회 민주주의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성의 물질적 현존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따라서 부르주아의 지배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이러한 이론적 결함은 엄청난 정치적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정치적 패배의 두 가지 전형인, 스탈린적 정치와 유로-공산주의적 방식은, 사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두 가지 이론적 공백을 공유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대한 이론의 부재와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현존에 대한 이론의 부재이다. 볼셰비키의 교육적 관점은 아마 그 혹은 그녀 “자신의 것이라 가정되는 계급 의식이 아닌 다른 담론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대한 모든 개인의 취약성을 간과했을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당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현존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유로-공산주의적 의회주의는 다당제 의회주의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로서의 물질적 현존이라는 견고한 역사적 특성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무시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이 정치 장치 바깥에서도 작동한다는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해 도외시했고, 따라서 그람시 헤게모니 이론의 구성주의적 견해를 방종했다. 이러한 논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현존이라는 개념의 이론적-정치적 파급력에 대해 분명히 보여준다.

 

이 에세이는 앞서 언급한 알튀세르의 두 개념에 의해 기술된 장에 대한 고려 속에서 서술된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현존이라는 개념은 부르주아 법 이데올로기가 그 물질적 현존을 통해 노동자에 대해 과잉-착취를 유발하고, 수많은 법적-경제학적 분류하에 이들을 파편화시켜 계급 형성을 막는 동시대 속에서 중요한 그리고 특별한 적절성을 지니게 되었다.[5]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헤게모니를 잃었지만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모호한 상황은, 이데올로기론의 시급함을 시사한다.

 

 

타자의 담론으로의 정향과 담론적 연쇄의 이중 기입

 

대략적으로 그려진 다음의 지평 속에서, 우리는 우선 제시된 셰익스피어의 시행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담론적 효과를 검토하며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문제에 접근할 것이다.

 

눈이 희다면 그 가슴은 검은 편이{If snow be white, why then her breasts are dun}

소네트 130의 3행[6]

 

만약 “눈처럼 하얀 가슴”{breasts white like snow}과 같은 상투적 문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다음의 시행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주장한다면 이는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학문적 정전 속에서 교육받은 독자라면 살아오면서 콘체토{concetto}[7]를 접했는지와는 상관없이 다음의 시행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게 더 생산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일 것이다(우리가 요즘 이러한 상투적인 문구를 마주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8]

 

우리는 이렇게 수용자의 관점에서 일어난 자기지지적 이해{self-supporting enlightenment}가 알튀세르적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결과로서 발생한 것임을 보이려 할 것이다.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시행을 (이해하는: 옮긴이) 과정을 배치해 본다면, 우리는 호명을 구성하는 데 출발점이 되는 이해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눈이 희다면, 가슴은 마치 눈과 같아야 한다. 만약 가슴이 눈과 같아야 한다면, 그 가슴은 검은 편이.[9] (이탤릭체로 표기된 부분은 모치닉이 삽입한 부분이다: 옮긴이)

 

두 가지 특징이 계속해서 우리의 관심을 끌 것이다. (1) 이 발화는 어떠한 연쇄를 암시하는데, 언표되지는 않지만, 의미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그 연쇄는 이탤릭으로 표기되어 있다) (2) 이 연쇄를 구성하는 요소는 중복되어 추론의 두 지점에서 나타난다. 우선 첫 번째 논증의 결과로서, 그리고 두 번째 논증의 전제로서. 셰익스피어의 시행에서는, 같은 표현이 두 개의 메커니즘을 응축한다.

 

셰익스피어의 시행에서는, 첫 번째 논증의 결론(“가슴은 마치 눈과 같아야 한다”)과 두 번째 논증의 논거(“만약 가슴이 눈과 같아야 한다면”)는 생략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특성이 다음과 같은 일상적인 논증에서도 발생한다.

 

날이 좋으니, 산책하러 가자!

 

구체화한 형태로는, 위의 연쇄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날이 좋으니, 그러므로 산책은 즐거울 것이다. 산책이 즐거울 것이므로, 산책하러 가자!

 

셰익스피어의 시행에서, 생략된 연쇄는 시인이 반대했던 시의 형태를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반면 “날씨” 논증에서 생략된 연쇄는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가정되는, 공유된 일상적 고정관념이다. “생략된 연쇄”는 논거와 결론을 연결하는 고리를 제공함으로써 발화의 의미를 결정한다. 우리는 이것이 발화자나 수용자에 의해 “생략된”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전의 해결책: 토포이{topoi}, 믿음, 동일화

 

논거(혹은 기반)와 결론(혹은 주장)을 연결하는 고리는 스티븐 E. 툴민에 의해서는 보증{warrant}이라 불렸고(1969) 오스왈드 뒤크로에 의해서는 토포스{topos}라 불렸다(앙스콤브레&뒤크로, 1983). 이 고리는 발화 속에서 그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발화자에 의해 암묵적으로 나타나고 수신자에 의해 승인된다. 제시된 예시에 대해, 뒤크로는 연결하는 고리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것이다(1996: 142). “좋은 날씨는 산책을 즐겁게 만든다.”

 

뒤크로의 이론에 따르면, 소통하는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구성 요소가 참이거나 참이라 여겨질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논거로부터 끌어낸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이 토포이에 호소한다는 것이다.[10] 뒤크로 이론의 약점은, 발화의 주관적 차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11] “좋은 날씨는 산책을 즐겁게 만든다”와 “지금 그리고 여기의 날씨는 좋다”로부터, 누군가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의 산책은 즐겁다”를 끌어낼 수 있지만, “산책하러 가자!”를 끌어내지는 못한다.

 

이전 시도들에서,[12] 나는 주관적 차원을 분석에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유사-진리-조건적 이론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분석철학적 언어철학{analytic philosophy of language}에서, 나는 발화가 일정한 배경의 전제 위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생각을 차용했다. 나의 이론은 발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수용자가 기본 전제를 (참이라) “믿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수용자가 기본 전제를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즉 그것을 “믿는” 게 가능한 것으로만 여겨도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이 이론은 발화를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공유하는 게 필수적이지 않은 일상적인 경험에 관해 설명했다.[13] 즉 이 이론은 이해{interpretation}를 이데올로기적 호명으로부터 분리한 것이다. 발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믿음을 그저 가능한 믿음이라 조건부적으로 가정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발화에 의해 호명된다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배경이 되는 믿음에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이론은 수용자의 믿는다고-가정된-주체{subject-supposed-to-believe}로의 조건적 동일화와 같은 순전한 이해의 메커니즘과 수용자의 안다고-가정된-주체{subject-supposed-to-know}로의 무조건적 동일화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메커니즘을 개념화했다.[14] 다음의 과제는 믿는다고-가정된-주체가 안다고-가정된-주체로 변환되는 무조건적 동일화가 발생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었다.

 

이전의 이론은 대안에 의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다. 주체화에 대해 개념화하지 못하는 담론에 대한 비-진리-조건적 이론이거나, 유사-진리-조건적 이론을 대가로 치러서 주체화와 동일화를 이론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을 얻거나.

 

 

데얀 데야노프의 선술어적 명증성에 대한 이론과 그것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적절성

 

이 글에서는, 나는 막다른 골목을 우회하고 앎과 믿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작동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예비적인 설명을 하려 한다. 나는 데얀 데야노프의 선술어적 명증성과 술어에 대한 정교화를 통해 제공된 개념적 장치를 통해 이 기획에 착수할 것이다.[15]

 

데야노프는 서로 통약 불가능한 두 사유 전통[16]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을 구별한다. 이 관계는 항상 관계를 맺은 사유 전통 중 하나의 관점에서 구축된다.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접근 방식에서, 두 담론적 배경의 관계가 그중 하나의 관점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데야노프는 통약 불가능한 사유 전통인 전통 1과 전통 2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세 방식을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1. 비판적 이해{Understanding critique}: 전통 1의 선술어적 명증성은 전통 2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편입된다(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전통 1의 방법은 전통2의 관점 속에서 물화된다. 이러한 통약의 방식은 그저 각각의 방법론의 물화에 불과한 것으로, 두 전통은 각각의 기준에 따라 통약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이들의 통약은, 오히려, 각각의 사유 전통의 기준에 따라 서로를 평가한 것이다(각각의 사유 전통이 애초에 자신이 권위 있는 기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록 두 차원에 대한 것일지라도, 비판적 이해라는 생각은 독백으로 남는다” (데야노프, 2001: 147, 강조는 모치닉).

 

            2. 대화적 이해{Dialogical Understanding}: 대화의 참여자는 평등한 방식으로 두 통약 불가능한 사유 전통이 지니는 선술어적 명증성을 대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사유 전통 속에 머문다. 즉 각각의 참여자는 상호적으로 통약 불가능한 사유 전통 중 하나 속에 머문다. 각각의 참여자는 자신의 명증성을 고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은 상대방의 명증성의 타당성을 인지한다. 그들이 각자의 사유 전통에 따라 작동하는 한에서. 상대방의 사유 전통의 지평을 통해 상대방의 명증성의 실재성을 인지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명증성의 실재성 또한 자신의 사유 전통에 달려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들은 이제 명증성이 특정 사유 전통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둘 다 전통 2의 [선술어적 명증성]은 전통 2에만 실재적이지만, 전통 1에도 가시적이고, 전통 1의 [선술어적 명증성]은 전통 1에만 실재적이지만, 전통 2에도 가시적이라고 생각한다.” (데야노프, 2001:147). 이런 식으로, 각각의 대화 참여자는 자신의 선술어적 명증성을 대상화한다. 각각의 참여자는 자신의 선술어적 명증성을 대화의 상대방에게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과 관련짓는다. 이전 단계였던 “비판적 이해”에 비해 이루어진 “진전”은, 현재 단계인 “대화적 이해”에 이르러서는, 참여자가 자신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자신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유비적 통각으로서의 미메시스{Mimesis as analogizing apperception}: “비판적 이해와 대화적 이해에서는, [참여자는] 술어화하려는 관심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반대로, 미메시스에서 참여자는 그러한 관심을 삼간다 […] 그들 자신의 것과 통약할 수 없는 사유 전통의 선술어적 명증성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 (데야노프, 2001:151)

 

데야노프의 첫 메커니즘(비판적 이해)은 바흐친이(1981:317) 소설의 이질언어성{Romanesque heteroglossia}의 예시로 든 투르게네프의 구절에서 나타난다:

 

이튿날 아침, 네지다노프는 시내에 있는 시퍄긴의 저택으로 향했다. 근엄한 서재에는 자유주의적인 위정자로서 또한 훌륭한 신사로서의 그의 위엄에 잘 어울리는 웅장한 양식의 가구들이… [「처녀지」, 챕터 4[17]]

 

강렬한 가구에 의해 암시된 선술어적 명증성은, 서재를 기술함에 따라 등장하는 술어와 동일한 층위에 놓인다. 사건의 첫 번째 부분을 읽을 때, 그 기술은 ‘객관적’인 것으로, 즉 서술자의 관점에서 제시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독자가 선술어적 명증성이 술어처럼 여겨지는 것과 마주함에 따라, 그 기술은 소급적으로 네즈다노프의 관점에서 주어진 것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독자는 네즈다노프가 “비판적 이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린 주인공은 교묘하게 배열된 “술어”를 “꿰뚫어 보고”, 그 호화로운 스펙터클에 의해 호명되지 않는다. “술어”가 “선술어적 명증성”과 함께 잠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이 영웅은 이데올로기적 함정에서 벗어나지만,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태도에 대해서는 자문하지 않는다. 그의 “비판적 이해는 독백으로 남는다”.

 

수상한 만찬을 묘사하며, 찰스 디킨스는 술어와 선술어적 명증성 사이의 혼란을 이용한 비슷한 절차를 작동시킨다:

 

변호사는 식욕이 없었지만 식욕을 자극할 만한 저녁이었다. 아주 귀한 요리가 호화롭게 요리되어서 호화롭게 제공되었다. 최고급의 과일들과 최고로 맛 좋은 포도주들, 금과 은 또는 자기와 유리로 만든 경이로운 세공품들, 미각과 후각과 시각 모두를 만족시키는 아주 맛이 좋은 수많은 음식이 저녁식탁을 이루었던 것이다. 오, 머들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구나, 아주 위대한 사람이야, 대단한 주인이야, 아주 축복받고 부러울 정도로 재능이 많은 사람이구나 한 마디로 말해, 아주 부자구나!

(『작은 도릿』, 2권, 챕터 12[18], 바흐친에 의해 인용됨, 1981: 304)

 

디킨스는 우선 호화로운 만찬의 선술어적 명증성을 술어인 것처럼 드러낸다(“오, 머들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것을 이 위대한 남자의 손님들에 의해 “승인된 것” 혹은 “겪어진 것”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해설자의 관점에서, 대조적인 술어(“한 마디로, 아주 부자구나!”)를 덧붙인다. 마치 주인의 신봉자에 의해 주어진 그 명증성에 대조적인 그 술어가 선행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데야노프의 구별의 이행이 가능하게 한 것은:

1.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이질적인 담론적 연쇄의 네트워크로 개념화하는 것

2. 담론적 연쇄의 명시적 차원(데야노프의 술어)과 명증하다고 받아들여진 비명시적 차원(데야노프의 선술어적 명증성)을 구분하는 것.

 

뒤크로의 이론에 대해서, 그의 토포스 개념을 우리는 “타자의 담론”으로, 바흐친이 “타인의 말”(чужая речь)이라 부른 것으로 재정립했다.[19] 바흐친의 이론에 대해서는, 우리는 “타자의 담론”{discourse of another}의 “술어”, 즉 명시적인, 그리고 “선술어”, 즉 비명시적인 차원을 구분했다. 데야노프의 이론에 대해서는, 그의 술어/선술어라는 구분법을 약화시키고, 명시적/비명시적이라는 구분법을 모든 담론적 연쇄에 대한 차원까지 확장했다.

 

우리는 우리의 개념을 바흐친의 문학 텍스트 분석을 통해 발전시켰는데, 이는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이 그것이 특히 가시화가 될 수 있게 만드는 미학적 절차에 의해 가공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제 일상적인 이데올로기적 사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구체적인 분석: 무엇이 말해졌고 무엇이 환기됐는가

 

류블랴나 기반의 일간지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벌어진 시위의 시위대가 “유럽의 민중이여, 일어나라!”라는 구호를 내거는 사진을 실었다. 그리고 그 사진의 설명란에 ‘시위대가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나 경찰이 개입하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뒤크로는 논변 연산자{operator} “그러나”가 논변의 정향에 개입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논증에 대해 도출할 결론과는 모순되는 결론을 도입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게 만드는 토포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유적지에서의 시위는 경찰의 개입을 당연하게 만든다”인가? 혹은, “공산주의자가 사람들에게 일어나라고 선동하는 시위를, 경찰은 막는다”인가?

 

뒤크로를 따른다면, 논변 연산자 “그러나”는 경찰의 시위 개입을 당연히 일어나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뒤크로와는 달리, 우리는 더 나아가 “그러나”가 선행하는 (담론적: 옮긴이) 연쇄를 “타자의” 담론 속으로 통합하는 것이고, 이는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 특정한 사례의 경찰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 “타자”의 담론은 명증성의 지위를 가지며, 이는 데야노프의 더 엄격하고 좁은 의미의 선술어적 명증성의 지위와 유사하다. 발화되지 않았지만 명증한 “타자”의 담론에 의해 주어진 바로 그 불확실한 정당화가, 토포스의 결함일 것이며, 발화에 호명적 힘을 더한다. 독자는 이 빈칸을 채우거나, 경찰의 개입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그저 확인할 뿐이다. 어느 경우이든, 독자는 발화에 의해 호명된다. 이러한 경우에, 호명은 독자가 해당 발화를 “그러나”가 환기한 담론의 문제없는 연속으로 받아들일 만한 이유(구체적인 정당화든 존재조차 불분명한 정당화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작동한다.

 

 

다음과 같은 사례는 더욱 복잡하며, 우리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비록 세르비아인들이 권위주의 정부에 우호적이지만, 세르비아가 권위주의적으로 변할지는 야당과 시민사회에 달려있다.

Vili Einspieler, “야당 없는 권위주의 정부세르비아의 선거,” Delo, 류블랴나, 2014년 3월 15일

 

문법적으로 “비록”은 양보의 종속 접속사{concessive subordinate conjunction}이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뒤크로의 관점에 따라, 그것의 도입은 절로부터 일반적으로 도출될 결론을 전도한다고 말할 것이다.[20]

 

우리는 우선 발화를 뒤크로 이론의 관점에 따라 분석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논거와 결론을 연결하는 고리를 토포스로 개념화할 것이다. 이 토포스는 발화 속에서 명백히 언급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암묵적으로 발화자에 의해 환기되며 수용자에 의해 승인된다.[21]

 

발화 속에서 논증과 결론을 연결하는 고리를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22] 다른 한편, 류블랴나 기반의 일간지 Delo의 독자는 이를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 우리는 평범한 Delo의 독자가 다음과 같이 발화를 이해할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비록 세르비아인들이 권위주의 정부에 우호적이지만, 세르비아가 권위주의적으로 변할지는 선거 이후의 야당과 시민사회의 활동에 달려있다.”

 

이 삽입된 문구를 통해 보면, 발화의 이해는 유권자 집단이 선거가 끝나면 실질적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다고 보는 다당제 의회주의 체제라는 특정한 통념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통념을 전달하는 담론의 연쇄는 발화 내에 생략되어 있지만, 그것의 저자와 그 독자는 그 통념이 생성하는 의미에 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생략된 연결고리는 명증한 것으로 제시되어 있고, 암묵적인 제시 방법에 의해, 상호 소통을 구성하는 물질적 구성 중 일부로 잠입한다. 생략된 연쇄를 채워 완성하면, 발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될지도 모른다:

 

비록 세르비아인들이 권위주의 정부에 우호적이지만, 선거의 결과가 어떻든, 정치 공동체의 태도는 최종적으로 정치의 결과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세르비아가 권위주의적으로 변할지는 야당과 시민사회에 달려있다.

 

뒤크로적 분석에서는, 발화에는 이중 생략삼단논법{double enthymeme}의 구조가 있다고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첫 번째 논거의 생략된 결론은 최종 결론의 생략된 논거로 나타난다:

 

논거 1: 비록 세르비아인들이 권위주의 정부에 우호적이지만,

결론 1: 선거의 결과가 어떻든, 정치 공동체의 태도는 최종적으로 정치의 결과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논거 2: 정치 공동체의 태도는 최종적으로 정치의 결과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므로]

결론 2:  세르비아가 권위주의적으로 변할지는 야당과 시민 사회에 달려 있다.

 

노골적인 광신적 애국주의만이 이데올로기적 작동을 뒷받침하는 구성요소는 아니다. 세르비아의 사악한 풍속을 바로잡아 주기 때문에 현재 의회주의의 형식을 “정상적”인 것으로, 또 이익이 되는 것으로 제시하는 명백하지 않은 요소가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 작동에: 옮긴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암묵적으로 환기된 요소는 논증의 도식 속에 이중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우선 첫 번째 논증의 연쇄의 결론으로, 이후에는 다음 결론의 논거로. 뒤크로적 관점에서는, 발화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명시된 구성 요소는 볼드체로, 암묵적으로 환기된 요소는 이탤릭체로 표기했다): 

 

논거 1

결론 1=논거 2

            결론 2

 

이것은 빈번한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인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발화는 이것의 확장된 형태를 보여준다.

 

크림반도가 없는 우크라이나는, 개선된 민주주의 국가가 될 기회를 오히려 더욱 갖게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친-러시아적 인구를 상당수 상실했기 때문에, 더 친-유럽적이게 될 것이다.

로만 스즈포르루크, 하버드 대학교 명예교수,

Delo와의 인터뷰, 류블랴나, 2014년 4월 12일

 

생략된 연쇄를 완성하면,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다시 쓸 수 있다:

 

논거 1: 우크라이나는 친-러시아적 인구를 상당수 상실했다,

결론 1: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덜 친-러시아적이게 될 것이다.

 

논거 2: 우크라이나는 덜 친-러시아적이게 될 것이[므로],

결론 2: 우크라이나는 더 친-유럽적이게 될 것이다.

 

논거 3: 우크라이나가 더 친-유럽적이게 될 것이[므로],

결론 3: 우크라이나는 더 민주적이게 될 것이다.

 

논거 4: 우크라이나가 더 민주적이게 될 것이[므로],

결론 4: 우크라이나는 개선된 민주주의 국가가 될 기회를 더욱 갖게 될 것이다.

 

친-러시아 대 친-유럽”의 대립과 “친-유럽=민주적”의 동일시가 암묵적으로 환기된 요소들이며, 이들은 논증을 뒷받침하는 식으로 의미 자질{semantic features}을 해석한다. 뒤크로적 다중-생략삼단논법{poly-enthymemic} 도식은 따라서 “타자의 담론으로의 정향”(바흐친적인 의미에서 установка на чужое слово)이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생산하는 다성적 과정의 형식화이다. 우리의 개념적 장치를 더 유연하고 포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뒤크로적 개념을 버리고, 바흐친적 용어로 이 과정에 관해 기술할 것이다.

 

우리가 고려해 오던 발화는 그것의 이해 혹은 그것의 “수용”이 발화들이 참조하는 “타자” 담론에 대한 수용자의 재구성에 의존한다는 공통적인 특성을 공유한다. 뒤크로적 분석은 이 타자의 담론으로의 정향이 (의미작용의: 옮긴이) 구조적 조건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화의 오로지 형식적인 “외부 정향적 관계”가 의미를 산출한다. 수용자는, 발화를 그것이 근원한 담론의 연쇄에 관련지음으로써, 이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보증하고, 이해의 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승인”{ratifies}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촉발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고려해 오던 발화에서, 이러한 메커니즘은, 바흐친적 용어로, 단방향 이중음성어{unidirectional double-voicedness}에 의존한다.[23]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동일화를 통한 호명이라고 부를 것이며, 수용자가 발화의 수신인과 동일화함에 따라, 스스로를 개인에서 자아{Ego}로서 호명된 개인으로 변형한다(그러나 알튀세르의 유명한 공식인, 직접적으로 주체로(서)는 아니다.)

 

더 풍성해진 장치를 통해서, 우리는 서구 개인주의의 부상 당시 생겨난 프랑스의 고전 비극의 더 복잡한 사례에 대해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코르네유의 『르 시드』에 등장하는 시멘의 사례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하지만, 코르네유가 시멘을 정교한 방식으로 그의 비극에서 보여주는 장면보다는, 코르네유가 스페인 역사서{historia}에서 찾아낸,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멘의 딜레마에 대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 대목을 스페인어로 인용한 후, 시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Ceux qui entendent l’espagnol y remarqueront deux circonstances: l’une, que Chimène, ne pouvant s’empêcher de reconnaître et d’aimer les belles qualités qu’elle voyait en don Rodrigue, quoiqu’il eût tué son père, alla proposer elle-même au roi cette généreuse alternative, ou qu’il le lui donnât pour mari, ou qu’il le fît punir suivant les lois; l’autre, que ce mariage se fit au gré de tout le monde.[24]

피에르 코르네유, 서문, 1648.

 

어떻게 시멘은 고결한 선택{generous alternative}을 군주에게 제안하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는가? 우리는 우선 그의 사유를 뒤크로적 관점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논거 1: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결론 1: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다.

 

논거 2: 나는 자유로우[므로]

결론 2: 나는 내 선택을 군주에게 위임할 수 있다.

 

이 연쇄는 중첩된 이중 기입{double double inscription}에 의존한다. 우선 “자유”라는 기표가 기입되고, 후에 “선택”이라는 기표가 기입된다. 첫 번째 중첩은 결론 1=논거 2의 접합에서의 친숙한 이중 기입이고, 두 번째 중첩은 논거 1→결론 2[25]의 접합에서의 이중 기입이다. 결론 2에서 “선택”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며 논증의 방향을 바꿔 자유를 예속으로 변형시킨다. 거의 홉스적 논리에 가까운 이 시멘의 사유가 코르네유를 매료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 논거에서 두 번째 논거로의 이행은 재생산적 호명인 결론 1=논거 2에 의해 보장된다. 그 와중에 분열적인 두 번째 이중 기입 논거 1→결론 2는 결국 예속화의 행위에 이르게 된다. 시멘의 탁월함{tour de force}은 예속화의 행위를 자유의 행위로서 수행해 낸 것에 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자유에서 예속으로의: 옮긴이) 전복을, 주체화가 곧 예속화라는 알튀세르의 직관을 과장하여 묘사한 사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이 과정을 바흐친적 관점에서 고려한다면, 이는 우리가 이전에 타자의 담론으로의 정향이라고 분석한 발화와는 대비되며, 시멘의 (담론적: 옮긴이) 작동은 최종 단계에서 자신의 담론의 일부를 참조한다. 그 결론인 결론 2는 논거 1을 참조한다. 시멘은 자신의 담론을 마치 타자의 것인 것처럼 취급한다. 이러한 작동은 자신의 담론을 타자의 것과 관련짓는 데야노프의 두 번째 방식(대화적 이해: 옮긴이)과 상응한다. 또한, 자기 자신의 담론을 타자의 것인 양 관련지으면서, 시멘은 그 논증의 방향을 전복시킨다. 그러므로 최종적 결론은 바흐친적 의미의 “다방향 이중음성적 담론”이다.

 

이것과 역대칭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호이다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26]

 

랑시에르는 이것을 정치적 주체화의 전형적인 사례로 제시한다.[27] 데야노프의 관점에서, 이 발화의 선술어적 명증성은 “대니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이다. 바흐친적 관점에서는, 이 발화는 타자의 담론(다니엘 콘벤디트에 대한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추정적 술어)을 마치 자신의 담론인 양 참조하며, 이때, 마치 두 담론이 같은 논증의 방향을 지녔던 것처럼 참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방향 이중음성적 담론”은 단성적 담론인 것처럼 나아간다(그리고 지속적으로 다방향성을 “기본으로” 갖는다).

 

시멘과 학생들의 구체적인 이데올로기적 작동이 이와 분명한 유사성을 지니는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밝혀질지도 모른다.

 

Sancta Maria, Mater Dei, ora pro nobis peccatoribus.[28]

 

“저희”를 “죄인”이라 말하는 것은 역설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고, “우리”를 “독일계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데야노프의 관점을 통해 고려해 봤을 때, 선술어적 명증성은 “우리는 모두 원죄에 의해 낙인찍혀 있다”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성모송이 타자의 담론으로 정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신조와 같이 원죄 교리를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기독교 담론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 발화의 논리적 뼈대는 우아한 방식의 재귀적{reflexive} 전환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의 자손은 원죄에 의해 낙인찍혀 있다.”는 발화는 타자의 담론으로 정향하지 않으며, 이를테면 “외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동일화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사례로 간주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발화는 명백히 자신의 논리적 도식을 드러낸다.

 

모든 자유로운 인간은, 그가 어디에 살든, 베를린의 시민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이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말에 자긍심을 느낀다.

존 F. 케네디, 베를린에서의 연설, 1963년 6월 23일

 

데야노프의 선술어적 명증성을 통한 검증은, 이 발화가 정향하는 담론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발화에서 명증한 요소가 “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대립시키고 “민주주의”를 “자유, 진보, 생기 등”과 동일화하고, 또 이 용어들을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것으로 여기는 냉전의 용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담론은 “외부”를 가지고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으며, 자신의 담론적 연쇄로의 정향을 지닌다. 이것이 호명에 성공하는 경우, 이것은 동일화에 의한 호명을 수행한다.

 

 

예비적 결론

 

데얀 데야노프의 이론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이제 동일화를 통한 재생산 이데올로기적 호명과 주체화를 통한 분열적 호명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일화를 통한 호명은 “단일언어성”{homoglossia}을 통해 특징지어진 이미 설립된 담론적 장 위에 정초된다. 이와 같은 호명은 동일한 논증의 방향을 지닌 타자의 담론에 정향하거나 자기 자신의 담론적 연쇄에 정향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체화를 통한 호명은 호명된 개인이 “이질언어적” 담론적 장의 구성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상이한 논증 방향을 지니는 타자의 담론으로 정향하며, 자주 역설적인 작동을 수행한다. 즉 타자의 상이한 담론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다루거나, 자신의 담론적 연쇄를 마치 타자의 것인 양 다루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나의 향후 이론적 작업을 위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이것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더라도, 이것들은 내가 이전에 지니고 있던 협소한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인식론적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만일 어떠한 단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데얀 데야노프와 나눈 대화에서 받은 영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재 나는 이 대화가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향해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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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lmin, S. E. (1969). The Uses of Argu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 루카치(1999: 160)는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순간 속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의식의 결정적인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의 최후의 경제공황이 일어나면 혁명의 운명 (이와 함께 인류의 운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성숙도, 곧 그들의 계급 의식에 달려 있다.

[2] 이것이 레닌(1999: 74-104)이 프롤레타리아트에 계급 이데올로기를 외부로부터 도입하는 것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이다. “사회 민주주의 당이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지도하는 것은 […]. […] 사회 민주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것은 […]. […] 우리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 교양과 그들의 정치 의식 진전에 적극 매진해야 한다. […] 정치적 계급 의식은 오직 외부에서,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라는 영역 밖에서 노동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

[3] 톨리아티는 그가 레닌주의 정치의 역사적 극복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비례 대표제 체제는 한편으로 의회를 국가의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만든다. 지금까지 각 정당은 꽤 정확하게 자신을 실제로 지지하는 정도에 따라 의석을 배정받았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당이 대중에게 행사하는 큰 영향력을 누리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비례제에 따라 선거가 진행될 때, 사회주의 경향을 띤 정치 집단이 3분의 1에서 절반가량 의석을 차지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각 집단의 의정 활동이 의회를 그저 선동에 기여하는 정도로 여겼던 과거와는 다른 특성을 보여야 함을 이해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이것은 의회라는 영역 속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 능동적 활동이 수반해야 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했다. […] 승리의 확언과 연속되는 사회주의의 세계적 차원에서의 통합이 일어난 현대의 상황에서는, 의회주의적 노선을 사회주의로 향하는 통로로 쓰는 것 또한 가능해진다.” 팔리모 톨리아티, “의회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Parliament and the Struggle for Socialism}, Pravda, 1956, 3월 7일, Rinascita에 의해 재발행, 1976, 8월 27일, Marxism Today에 의해 재발행, 1977. https://www.marxists.org/archive/togliatti/1956/togliatti-parliament.htm 에서 접속 가능.

[4] “과거의 경험이 우리가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계급 적대가 격하되도록 만드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기초가 되는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가치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모스크바에서의 담화, 1970). “국가 문제의 심각성, 반동적 모험{reactionary adventure}의 영구적인 위협과, 경제 발전, 사회적 쇄신, 민주적 진보를 향한 안정된 길을 국가에 마침내 열어주어야 할 필요성은, 대다수의 이탈리아인을 대표하고 결집하는 세력 사이의 새롭고도 위대한 ‘역사적 타협’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해야 함을 더욱 긴급하고 무르익은 것으로 만든다.”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칠레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 이탈리아에 관한 소견. 사회적 동맹과 정치적 지지.”, Rinascita, 1973년 10월 12일: 모치닉이 영역한 것을 옮긴이가 번역함)

[5] 다음을 참조하라. Cf. Močnik (2011); transl. into German: Die Integration der Arbeitskräfte und die politische Zusammensetzung der Arbeiterklasse. Beton Kulturpropagandabeilage Beton, Spezialausgabe, 02, Leipzig, März 2012, available at: http://www.elektrobeton.net/wp-content/uploads/2014/07/Beton_Spezialausgabe_Leipzig_2012.pdf.

[6] 윌리엄 셰익스피어 (2018). 셰익스피어 소네트. 275.

[7] 콘체토는 정교한 방식으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의 비유, 신선한 착상을 일컫는다. (옮긴이)

[8] 우리가 다음과 같은 발화를 이해할 때도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나는 신을 믿는다”{I believe in God}, “나는 우정을 믿는다”{I believe in friendship}, “나는 민주주의를 믿는다”{I believe in democracy} 등. 이러한 발화는 신, 우정, 민주주의 등에 대해 정확히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발화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는다. “나는 믿는다…신이 존재한다는 것을·친구는 서로 충실하다는 것을·통상적으로 민주주의의 장점으로 간주되는 효과를…등”.

[9] 소네트는 예술적 구성물이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 아니므로, 이를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의 탐구를 위해 사용하는 게 남용이라고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학적 실천을 이데올로기적 구성 요소의 이차적 정교화라고 개념화한다면, 예술적 구성물은 특정한 (“미학적”) 방식으로 변환되는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수반한다. 

[10] 뒤크로의 이론은 진리-조건적이지 않고 그 인식론적 지평을 철저히 상호주관적 차원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이 이론은 주관적 차원을 명확히 포착하지 못한다.

[11]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뒤크로의 이론은 “발화자”가 두 번째 “언표 주체”(논증의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와 자신을 동일화한다고 상정하지만, 이러한 동일화에 관해 설명하지 못한다.

[12] 모치닉 (1993, 1994, 2013a, 2013b). 이 글의 목표를 향한 잠정적 시도가 모치닉 (2014)에서 시도되었다.

[13] “파리 백작이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이다”라는 발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군주제를 지지할 필요 없다. 그리고 프랑스가 군주정이라 믿는 것은 더 불필요하다.

[14] 지식은 푸코의 앎{savoir}과 같은 것으로 개념화되었다. 정당화된 믿음으로, 특정한 담론과 장치{dispositif} 생산하는 장 내부에서 “참”(이며 궁극적으로는 전략적으로 작동하는).

[15] 데야노프(2001: 140ff)의 “아홉 번째 강의”(불가리아어)를 참조하라.

[16] 여기서 데얀 데야노프는 “전통”을 과학적 전통, 즉 인식론적 문제 설정 혹은 인식론적 지평 혹은 “패러다임”의 의미로 쓰고 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천동설: 옮긴이)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지동설: 옮긴이)의 예시를 든다. 우리가 과거의 개념 체계를 버림에 따라, 데야노프가 “전통”이라 일컫는 것은 우리가 이전에 썼던 “배경이 되는 믿음”을 번역하여, 그것을 새로운 문제의 장으로 이전한다.

[17] 이반 투르게네프 (1998). 처녀지, 루딘. 39.

[18] 찰스 디킨스 (2014). 작은 도릿 3. 247.

[19] 바흐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포스를 “공통 언어”(общий язык)로 활성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포스에 대한 정의와 바흐친의 “공통 언어”에 대한 기술을 비교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사람에게 혹은 대다수의 사람에게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 혹은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요컨대 그들 모두에게 혹은 그 대다수에게 혹은 가장 유명하고 평판이 높은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 1권 1장, 김재홍 번역, 24-25.) 바흐친 (1981: 301-302) “이 ‘공통 언어’ 주로 사회 집단에서 쓰이는 구어와 문어의 통상적인 언어 규범 저자에 의해 바로 공통의 견해, 사람들이 특정 사회 영역에서 사람과 사물에 대해 말하는 통상적인 방식, 그리고 통용되는 관점과 가치 받아들여진다.

[20] “비록 날씨가 좋지만, 나는 산책에 나가지는 않겠다.”, “비록 나는 공부를 많이 했지만, 시험을 망쳤다.”와 같이. 혹은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비록 A가 결론 C의 논거이지만, 화자는 C의 부정으로 (혹은 C와 반대로) 결론 내릴 것이다. “비록-발화”의 이해는 당연하게도, “비록”이라는 표현이 없었다면, 논증이 “날씨가 좋으므로, 나는 산책을 하겠다.”, “나는 공부를 많이 했으므로 시험에 통과했다.”처럼 전개되었으리라는 추측에 달려있다.

[21] 앞서 언급한 예시에 대해, 뒤크로는 연결하는 고리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것이다. “날씨가 좋을 때, 산책은 즐거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어떤 이가 공부한다면, 그 사람은 시험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22] 대조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화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비록 세르비아인들은 권위주의 정부에 우호적이지만, 이번 선거에서 권위주의 정부를 선출할 가능성은 낮다.”

[23]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 문제』의 5장, “도스토예프스키의 담론”에서 바흐친(1984)은 담론에 대해 명확히 제시한다. 그는 우선 단성적 담론(одноголосое слово)과 이중음성적 담론(двуголосое слово)을 구분한다. 이중음성적 담론을 구분해 주는 특성은 타자의 담론으로의 정향이다(установка на чужое слово). 이중음성적 담론은 단방향적일 수도, (두 담론의 방향이 같을 때) 혹은 다방향적일 수도 있다(두 담론의 방향이 다를 때). 단방향 이중음성적 담론의 예는 양식화{stylization}(저자가 타인의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거나 재현하되, 그 스타일 자체에 동의하고 협력하는 방식: 옮긴이), 구술 서사체{skaz}(문어가 아닌 구어적 화자의 목소리를 서술에 도입하는 기법. 서술 언어가 곧 인물의 언어가 된다: 옮긴이), 일인칭 서사{Ich-Erzählung}(서술자가 “나”로서 직접 이야기를 끌어가는 서술 형식. 서술하는 나와 서술되는 나 사이의 이중음성적 긴장이 발생한다: 옮긴이)가 있다. 다방향 이중음성적 담론의 예로는 패러디가 있다.

[24] “스페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라면 두 가지 상황을 눈여겨볼 것이다: 우선 시멘이, 로드리그의 아름다운 품성을 인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그가, 왕에게 가서 로드리그를 남편으로 맞을 수 있게 하거나, 로드리그를 법에 따라 처벌해 달라는 고결한 양자택일을 제안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 결혼이 모두의 찬성 속에서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25] 여기서 화살표는 논거 1이 결론 2라는 결론을 정향한다는 의미이다. (옮긴이)

[26] 프랑스 국회의 공식 웹사이트에 따르면(http://www.assemblee-nationale.fr/histoire/mai_68/chronologie.asp), “우리는 모두 유대인이고 독일인이다”라는 구호는 1968년 5월 22일에, 하루 전날 다니엘 콘벤디트가 프랑스 체류 금지 처분을 받은 것에 반대해 벌어진 시위의 시위대의 포스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시위대는 같은 날 저녁 국회 앞에 모여,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Nous sommes tous des Juifs et des Allemands}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보다 앞선 5월 3일에, 프랑스 공산당(CPF)의 공식 일간지 L'Humanité에 CPF의 서기장 주르주 마르셰가 “다수의 학생의 이익에 반하고 파시스트의 도발을 조장하는 선동을” 규탄하는 글을 게재했고, 그러한 선동은 “독일 아나키스트 콘벤디트의 지휘하의” 3월 22일 운동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라는 구호는 5월 31일 라틴 지구의 시위에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학생들의 구호의 배경에 대해 정성스럽게 조사를 수행해 준 토도르 페트코프에게 감사를 표한다.)

[27]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자크 랑시에르(2013: 120)는 사실 주체화에 대한 직관적 통념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물론 그가 주체화와 동일화를 올바르게 대립시키지만, 그가 제시하는 해결 방안은 문제의 장을 생산하는 것과는 반대로{a contrario} 에세이적 규정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랑시에르가 “철학적인” 담론의 한계 내에 머무르려는 고집은 그가 드는 예시(“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를 이론적 문제 설정{problématique}의 진전을 통해 프랑스 제국주의와 유럽-대서양 중심 자본주의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계급투쟁 내에서 “계급 간 관계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분열적인 이데올로기적 호명으로 개념화하는 것을 방해한다.

[28] “성모 마리아여,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죄인인 저희를 위해 기도하소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성모송 해설(Esposizione sopra l'Ave Maria)』(피렌체: Bartolomeo de' Libri, 약 1496년)에서 인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