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소유한다는 것
LA PROPRIÉTÉ DE LA TERRE
사라 바눅셈 Sarah Vanuxem
번역: 박기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3장 거주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소유
우리는 이제 세 가지 거주 양식, 곧 거처(la demeure), 코뮌 공유지(le communal), 영역(le territoire)을 통해 거주할 수 있는 능력(faculté d'habiter)으로서의 소유라는 형상을 실험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민법 제544조를 다시 검토하고, 제542조를 되살리며, 거주자 공동체(la communauté des habitants)를 비인간 존재들(non humains)에게까지 여는 데 힘쓸 것이다.
3-1. 거처에 거주하기 — 민법 제544조 되살리기
소유를 절대적 권리(한 인격이 하나의 사물에 대해 갖는 주권적 권력이라는 의미에서)로 제시함으로써, 고전적 소유 이론과 갱신된 소유 이론은 소유권의 한계를 소유의 정의 안에 충분히 통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민법 제544조는 "사물들을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가 "법률 또는 규정에 의해 금지된 사용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종속된다고 정한다. 또한 소유권에 설정된 한계가 많고 광범위하여, 일부 저자들이 소유를 상대화된 권리로, 나아가 사회적 기능으로 제시하게 되었다는 점도 우리는 알고 있다. 갱신된 학설은 절대적이고 단일한 소유라는 도그마를 유지하면서, 소유권 행사에 부과된 제한들의 숫자와 그것들이 미치는 범위가 어떠하든, 소유는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사물들을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라는 원칙을 뒤집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소유자가 사물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권리를 갖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하더라도, 소유자가 사물에 대해 무제한적 권력을 갖는다는 규정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¹²⁸ 따라서 갱신된 학설에서 소유는 하나의 순전히 교과서적인 가정, 곧 사물들, 즉 소유의 객체 또는 주체에 대한 특정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과 규정이 부재하는 상황을 기준으로 사유된다.
이는 얀 토마스가 다음과 같이 쓸 때 말하려는 바(enseigner)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어떤 해결책이 "바로 예외의 순간에, 곧 그 가장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포착될 때", 그것은 "모든 용도에 대비된 추상적 형상", 곧 법적 범주가 된다.¹²⁹ 실제로 소유권에 대한 한계가 부재하는 예외 상황, 곧 소유자의 권력이 무제한이 되어 극단에 이르는 상황에서 절대주의적 소유 형상이 구체화된다. 법적 범주들의 형성을 "예외적인 것의 안정화"로 보는 이러한 역사는 갱신된 학설의 사유 방식(démarche)과 그 학설이 소유에 부과된 한계들을 부인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¹³⁰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법 제544조를 절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필연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소유자라는 형상 대신, 법률과 규정에 의해 완전히 구속되는 소유자라는 형상을 선택할 수도 있다.¹³¹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유자가 자신의 권리 행사에서 어떤 한계도 없는 예외 상황에서 더 이상 소유를 사유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예외적인 다른 상황, 곧 소유자가 사물들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어떤 자유의 여지도 누리지 못하며 그 권리 행사가 완전히 통제되는 상황에서 소유를 사유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의 극단적 준거점에서 반대편 극단으로, 소유자-전제군주 모델에서 소유자-노예 모델로 옮겨간다고 해서, 그렇게 수정된 소유 범주가 소유자가 통상 마주하는 상황을 더 잘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법적 현실과 소유 개념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소유자-거주자라는 형상은 실정법을 더 잘 포착하고, 민법 제544조에 설정된 한계들을 온전히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한계들은 환경으로 사유된 사물들에 거주하기 위해 존중해야 할 준칙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물들의 특정 사용을 금지하는 법률과 규정은 일종의 내부 규칙을 형성할 것이며, 장소들의 용도를 존중하도록 의무를 부과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물들은 엄밀히 말해 결코 전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소유는 특정한 준칙들을 존중하면서 사물들을 사용할 권리만을 뜻하기 때문이다. 소유권 행사에 설정된 한계들은 사물들과 소유 사이에서 하나의 차단막을 형성하거나 둘 사이에 개입할 것이다. 따라서 소유는 사물들을 자기 안에 편입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다. 소유가 사물들 자체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안의 권리들 또는 자리들에만 미친다면, 소유자는 하나의 권리, 곧 하나의 자리가 지정되고, 부여되고, 마련된 자일 것이다. 그는 사물 안의 하나의 자리를 누리는 자일 것이다.
우선, 소유에 대한 이 새로운 접근이 민법 제544조의 문언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소유를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사물들을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라고 명시한다고 해서, 반드시 소유가 무제한적인 방식으로 사물들을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유가 다투어질 수 없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라는 뜻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민법 제544조는 소유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절대적으로 무엇이든 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 소유는 모두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곧 대세적으로 대항 가능하다(erga omnes)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따라서 이 법조항에는 모호성도, 모순도 없다. 이는 소유자에게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행위할 권리를 부여해 놓고서, 곧바로, 그럼에도 금지들이 그를 제한할 수 있다고 덧붙이는 식이 아니다. 실제로 소유는 사물들을 제한된 방식으로 사용할 권리를 양허한다는 점에서는 상대적 권리이지만, 모두에게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절대적이다. 더구나 "절대적"이라는 형용사가 대세적으로 대항 가능하다는 뜻을 가진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민법 제544조가 혁명 이후 시기에 입안되었고, 새로운 질서를 안정화하고 영속화하려는 의도에 부응했으며, 소유자들에게 그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확보하고 보장하려 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바다.¹³²
다음으로, 소유를 거주 관계(rapport d'habitation)로 보는 관념이 동시적 소유들의 체계(système des propriétés simultanées)와 명확히 다시 연결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짚어 두자. 왜냐하면 이 두 관점에서 토지소유권은 대지 자체의 소유를 결코 부여할 수 없고, 오직 대지 안의 권리들 또는 자리들의 소유만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소유를 사물들 자체 또는 res corporales(유체물)에 미치는 권력이 아니라, 권리들 또는 res incorporales(무체물)에만 미치는 권력으로 제시하는 방식은 갱신된 학설보다 로마법에 더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덧붙여 두자. 왜냐하면 갱신된 학설은 타인의 사물에 대한 권리들의 소유와 자기 자신의 사물들의 소유, 무체물의 소유와 유체물의 소유를 구별하는 반면, 토마스에 따르면 로마법상의 사물들은 모두 무체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적 정합성을 넘어, 소유를 거주 관계로 제시하는 것은 대지와 그 사용들에 다시 연결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사물들의 사용에 부과된 한계들이 소유의 정의 안에 온전히 통합되면, 토지소유권을 대지의 사용들로부터 분리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종래에 그렇게 분리했던 것은 소유자가 그럴 경우 대지를 남용하고 함부로 다룰 능력을 갖게 되리라는 반론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그런 반론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대지를 물질적으로 처분하는 것이 대지를 지배하는 무제한적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거주하는 필연적으로 절제된 권력에서 나온다면, 처분권을 사물들을 법적으로 처분할 권리로만 제한할 필요도 더 이상 없다. 또한 소유자의 향유권, 곧 "배타성의 향유"라고 여겨지는 것과, 용익권자의 향유권, 곧 "효용들의 향유"라고 여겨지는 것을 구별할 필요도 더 이상 없다. 토지소유자는 대지 안의 하나의 자리에 거주하면서 제3자, 예컨대 용익권자나 임차인을 자신의 자리 안으로 맞이하고, 그 자리를 더 이상 능동적으로 점유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점유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토지소유자의 향유권은 자신의 소유자 지위에 안주하여 만족을 누릴 권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해서든 타인을 매개로 해서든 대지의 과실을 수확할 권리를 뜻한다. 마지막으로, 민법 제544조가 사물들의 사용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외면할 필요도 더 이상 없다. 토지소유자는 사물들에 거주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대지, 정원 또는 집처럼 그것들을 사용한다. 결국 토지소유권은 모두에게 대항할 수 있는, 대지에 거주할 권리로 정의될 수 있다. 이 권리는 대지를 사용하고, 그 과실을 수확하며, 대지를 물질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처분할 권리를 부여하되, 그 내부 규칙을 구성하는 법률과 규정을 존중하는 가운데 행사된다.
고전적 소유 이론과 갱신된 소유 이론은 소유의 절대성을 대항 가능성만이 아니라 주권성과 동일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다시 배타성과도 동화시킨다. 그러나 이 학설들은 소유를 한 인격이 하나의 사물에 대해 갖는 배타적 권력이라는 의미의 절대적 권리로 제시함으로써, 민법 제544조에 그 조항이 규정하지 않은 구별을 덧붙인다. 실제로 민법 제544조는 소유가 사물들을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라고 정할 뿐, 이 권리가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에 의해 행사된다고 명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민법전은 집합소유의 형태들, 예컨대 담의 공유(mitoyenneté)나 공유(불분할 소유, indivision)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소유를 독점적 소유로 환원하는 것은 고유한 것(le propre)과 공동적인 것(le commun) 사이의 이율배반 또는 모순이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법학자들이 사물들을 물체(corps)로 표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논리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들이 사물들을 환경들로, 예컨대 여러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함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풍경처럼 사유한다면, 이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프레데리크 제나티-카스탱(Frédéric Zenati-Castaing)은 소유가 단독적 권력(pouvoir solitaire)으로 이해된다는 생각을 다음과 같은 문구로 간결하게 표현한다. "소유는 공동체의 뱃속에서 나온다(La propriété sort des entrailles de la communauté)."¹³³ 이 이미지는 사물들이 공동체에서 끌려 나올 때 재산, 곧 전유된 사물들이 되며, 따라서 공동체를 배제하는 소유는 독점적 소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물들이 환경들로 사유된다고 가정하면, 이 문구는 뒤집힌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소유가 공동체의 모태(母胎, ventre)에서 "솟구쳐 나온다(jaillit)"¹³⁴고 말하지 않고, 공동체가 언제나 사물들의 배 속에, 전유되었다고 말해지는 사물들 속에 남아 있다(demeurer)고 말할 것이다. 사물-환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공동체는 사물들 안에 머문다(séjourner). 이 새로운 진술은 갱신된 학설이 사용하는 문구보다 실정법을 더 충실하게 포착할 수 있다. 예컨대 재산의 사진 복제와 관련하여, 파기원(破棄院, Cour de cassation)[1] 전원합의체는 "사물의 소유자는 그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보유하지 않는다"고 판시했고, 타인에 의해 전유된 재산의 이미지를 인격들의 보편성 또는 집합성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다만 그 타인에게 "비정상적 방해"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그러했다.¹³⁵
생태계가 제공하는 서비스들과 관련해서도, 판사들은 마찬가지로 "사물의 소유자는 그 사물이 생산하는 생태계 서비스(services écosystémiques)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보유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물들의 이러한 신-과실(néo-fruits)[2]이, 비록 흔히 전유되었다고 말해지는 사물들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모두의 사용에 남아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유림 소유자는 자신의 나무들을 바라보는 전망이 주는 즐거움도, 그 나무들이 수행하는 탄소 격리나 물 저장도 타인에게서 쉽게 박탈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체적 사물의 비물질적 차원들은 소유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물의 어떤 효용들은 소유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갱신된 학설이 가르치는 바와 반대다. 마찬가지로 지식재산권 영역에서는, 지적 구상은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다는 원리가 법전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신적 저작물의 아이디어는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통행(libre parcours)[3] 상태로 남아 있다고들 말한다. 이는 인격이 그 안의 권리나 자리를 소유하는 사물에서도 공동체가 축출되지 않음을 증명한다. 사물의 자유 이용 원리와 "공동체가 사물 안에 머문다"는 문구는, 예컨대 유전 자원(ressources génétiques)이나 생명체 그 자체, 곧 사물 자체를 전유하지 않는 것(non-appropriation)을 정당화하기 위해 규범적이고 규정적인 방식으로도 쓰일 수 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하자.
사물-환경들의 관점에서, 공동 사물(choses communes)[4]은 더 이상 재산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로 공동 사물은 특정한 누구에게도 전유될 수 없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거주하며 모두가 사용하는 사물로 드러난다. 다른 사물들과 달리, 공동 사물은 그 안에 어떤 자리도, 곧 전유될 수 있는 어떤 권리나 재산도 제공하지 않는다. 공동 사물의 거주자 공동체가 인격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된다면, 누구도 그 안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할 수 없고, 그 안의 자리, 재산 또는 권리의 소유를 부여받을 수도 없다. 이로써 소유자로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소유자라는 것은 사물들 안의 권리나 재산의 소유를 갖는 것, 다시 말해 그 안에 부여되고 지정된 자리를 누리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모두가 재산도 권리도 자리도 없이, 곧 권원(titre) 없이 사물들을 사용하고 그 안에 머무를 자유를 뜻한다. 다만 이 자유는 소유자 또는 소유자들이 차지하는 특권적 위치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행사된다. 따라서 사물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거주할 수 있다. 인격들은 권리나 권원 없이 거주자들의 보편적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예컨대 매매계약이나 증여계약을 거쳐 그 공동체에서 나와 사물들 내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격들은 자신의 자리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 이때 그들은 사안에 따라 경계벽 공유자, 불분할 소유자, 또는 공동소유자(copropriétaires)라고 불린다. 또한 이러한 특권적 인격들은 자신의 자리 안에 타인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 경우 그들이 맞이하거나 묵게 한 이는 예컨대 용익권자나 임차인의 지위에 오른다.
이러한 소유의 이중적 관점이, 야니크 보스크(Yannick Bosc)가 『인권의 테러(La Terreur des droits de l'homme)』에서 보여주는 혁명적 소유 관념과 공명한다는 점을 짚어 두자. 한편으로, 소유는 거주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사물을 사용할 자유로서, 어떤 재산이나 권리의 특권적 소유자인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모든 인격에게 부여된다. 이러한 소유는 "존재할 권리(droit à l'existence)"라는 정의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소유는 사물들 안의 특권적 위치, 곧 자리, 권리 또는 재산을 부여하는 한에서 "물질적" 소유 또는 "토지 소유(propriété territoriale)"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소유는 "몰수권(un droit à la confiscation) — 배타적 소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로 한정되는 사용권"을 뜻하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모두에게 주어지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배당(allocation)"의 수여를 정당화한다.¹³⁶ 소유를 거주 관계로 재정의함으로써, 우리는 프랑스혁명의 이러한 대안적 역사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사는 프랑스혁명에서 더 이상 소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개인주의의 매개체를 보지 않고,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 표현했던 것과 같은 농민적 요구들의 지지대를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권원 없는 거주자, 곧 존재할 권리의 소유자는 특권적 토지소유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면서 사물들을 사용할 자유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특권적 토지소유자들에게는 다른 거주자들의 보편적 공동체가 갖는 존재할 권리의 한계 안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점유할 의무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한 의무는 토지 소유의 무제한적 확장을 가로막을 것이다. 더욱이 권원 없는 거주자들은 자신의 소유-자유 또는 존재할 권리가 존중받지 못한다면 봉기할 권리(le droit de s'insurger)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¹³⁷
한편, 소유를 거주 관계로 재구성하는 것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의 글과도 공명할 수 있다. 에코페미니스트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관계와 남성들이 여성들을 지배하는 관계 사이에 유비적 연결을 설정하는 생태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다. 그리하여 스타호크(Starhawk)는 "빛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어둠"을 복권시키고, 우리에게 동굴[5]을 떠나라고 촉구하는 대신 어머니-대지(terre-mère)의 뱃속에까지 우리를 이끌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자고 요청한다.¹³⁸ 이 에코페미니스트는 또한 권력(pouvoir)이라는 말의 라틴어적, 민중적 기원, 곧 potere[6]를 재발견할 것을 권한다. potere는 "할 수 있음(être capable)"을 뜻한다. 예컨대 적성, 능력, 그리고 자신의 힘을 발전시키고 펼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¹³⁹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가부장(家父長, pater familias)의 potestas를 한쪽으로 치워두고 potentia를 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권력을 사물들-위의-권력(pouvoir-sur les choses)으로 사유하지 않고, 사물들-안으로부터의-권력(pouvoir-du-dedans des choses)으로 사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부장적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아래로부터, 어둠으로부터, 대지로부터" 오는 권력을 회복하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스타호크는 "질투하는 신", 곧 "남성적이고, 배타적이며, 초월적인" 신에 대한 숭배보다, "배타적이기보다 포용적인 판테온(panthéon)을 낳는" 여신에 대한 숭배를 더 선호한다고 말한다.¹⁴⁰
갱신된 소유 학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에코페미니즘 비판에 쉽게 빌미를 준다. 우선 "소유는 공동체의 뱃속에서 나온다"는 문구는, 공동체의 모태에서 "소유가 솟구쳐 나온다"는 것, 나아가 소유가 어머니-자연(mère-nature) 또는 어머니-대지로부터 끌려 나와 분리되는 듯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소유의 탄생 서사는 빛에 이르기 위해 동굴을 떠나라고 명령하는 서사들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소유자가 아무 "상대" 없이 사물들에 대한 "배타적 향유"를 누린다는 표현은, 사물들을 자기 혼자만을 위해 갖는다는 사실을 향유하는 질투하는 신의 관념을 가리킨다.¹⁴¹ "배타성의 정복은 영속적이다"라는 명제는 이 여성 저자들(autrices)이 맞서 봉기하여 끝장내고자 하는 것, 곧 여성들과 자연 모두를 겨냥한 정복 정신과 지배를 향한 갈망을 환기한다.¹⁴²
반대로, 거주하는-인격들과 거주되는-사물들 사이의 거주 관계(relation d'habitation)로 사유된 소유는 권력-potestas를 내려놓고 권력-potentia를 붙잡으려는 에코페미니스트들의 바람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유는 더 이상 인격들이 사물들 위에 행사하는 권력으로 이해되지 않고, 사물-거주지들 또는 환경들의 안으로부터 행사되는 권력으로 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사물들 안에 남아 있다는 문구는 모두가 어머니-대지의 어두운 모태에 머문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거주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 소유는 먼저 권원 없는 거주자들의 공동체에 포함될 권리를, 때로는 한 자리를 가진 소유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갈 권리를, 혹은 또 그들이 마련한 자리에 받아들여질 권리를 뜻한다.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타인을 배제하고 밀어낼 권리는 그 모든 것에 뒤이어 올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사물에 대한 배타적 장악을 유지하는 소유자-주권자와 달리, 소유자-거주자들은 세계(monde)로 가득 찬(saturées) 사물들 안에서 함께 머문다(séjournent ensemble).
소유를 거주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에코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하고 르네상스기에 널리 퍼져 있었던 양육하는 대지(terre nourricière)의 이미지와도 다시 연결될 수 있다.[7] 실제로 캐럴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대지의 모태를 착취하기(Exploiter le ventre de la terre)」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이자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대지 이미지"가 오랫동안 "살아 있는 존재들의 행위를 제한하는 문화적 제약으로 기능했다"고 지적한다.¹⁴³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르네상스 동안 "양육하는 대지의 이미지는 여전히 통제와 제약의 미묘한 형태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문학 문화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심상"은 그 안에서 "규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양육하는 대지는 "죽어 있고 생명 없는 물리적 체계가 됨으로써 규범적 제약의 기능들을" 상실했고, 새로운 근대적 윤리는 "대지의 뱃속을 파헤치는 일"과 대지의 "착취"를 허용했다.¹⁴⁴ 그런데 소유를 사물-환경들에 거주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법의 영역에서 대지를 되살리고 다시 활기를 불어넣으며, 대지에 그 규범적 또는 규정적 역할을 되돌려주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격들의 보편적 공동체가 그 안에 남아 있고 머무는 환경들로 표상된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대지 자체의 이미지에 따라 사유되기 때문이다. 대지는 우리의 공동의 삶터(lieu commun de vie)이고, 우리 모두의 거처이며,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에쿠멘(écoumène)[8]이다.¹⁴⁵ 따라서 16세기와 17세기의 상상계와 다시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사법상 물권법의 영역에서, 근대 서구의 법 관념에서 벗어나 코뮌적 소유(propriété communale)로 나아갈 길을 열 수 있는 운동을 개시할 수 있다.¹⁴⁶
3-2. 코뮌 공유지에 거주하기 — 민법 제542조 되살리기
『어둠을 꿈꾸기(Rêver l'obscur)』에서 스타호크는 옛 동시적 소유들의 체계 안에 있던 인적 종속 없는 소유 형태들 가운데 하나, 곧 농민 공동체 소유(propriété communautaire paysanne), 다시 말해 가계 소유(家系, propriété lignagère) 또는 마을 소유(villageoise)를 되찾기를 요구하자고, 오늘날 그것들을 다시 살려내자고 요청한다.[9] 이 소유는 "코뮌적 소유"라고도 불린다. 「화형대의 시간(Le temps des bûchers)」이라는 제목을 단 한 부록에서, 이 미국의 에코페미니스트는 두 계열의 현상을 서로 연결짓는다. 한편에는 양육하는 대지 이미지의 포기, 여성들의 의학 지식에 대한 수탈, 마녀사냥 동안 자행된 여성학살(gynocide)[10]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영국에서 시작된 토지 인클로저 운동, 농민들의 집합적 권리에 대한 침탈, 자유주의 사상의 출현, 자본주의의 발전이 있다. 실제로 이 여성 저자는 마녀 박해가 토지의 울타리치기 또는 사유화에 대한 강력한 민중 저항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스타호크에 따르면, 늙은 농민 여성들은 "완벽한 희생양"이었다. 이들은 "가장 가난한 계급의 분노와 격노를 같은 계급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로" 돌릴 수 있었고, 따라서 "농민 공동체의 단결"을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¹⁴⁷
『관습의 쓰임새들(Les usages de la coutume)』, 더 정확히는 「관습, 법 그리고 집합적 권리들(Coutume, droit et droits collectifs)」이라는 장에서,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은 대지의 어둠과 "마녀사냥"을 환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역시 인클로저 운동에 대한 민중 저항을 강조하며, 새로운 토지소유자들의 이해가 어떻게 가장 가난한 이들의 이해와 대립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11] "토지 소유는 소유자를 요구했고, 토지 개량은 노동을 요구했으며, 따라서 토지를 예속시키는 일은 가난한 노동자들을 예속시키는 것까지 요구했다."¹⁴⁸ 가난한 이들과 대지가 결부된 이러한 예속은 그때까지만 해도 농민들의 세계에서 지배적이었던 대지에 관한 표상과 대비된다. 톰슨에 따르면, 가난한 이들의 관습법은 대지 자체에, 더 정확히는 장소들 자체에 새겨져(inscrit) 있었다. 농민들의 권리 또는 특권(prérogatives)은 그들의 인격에 귀속(attachés)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던 장소에 귀속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톰슨은 18세기까지 관행들(les usages)과 권리들이 일의적으로 "직분들(aux offices) 또는 장소에 귀속되어" 있었다고 지적하며, 1803년의 한 논고에서 다음 대목을 인용한다. "관습은 장소적이다, 곧 특정 장소에서 통용되는 법(lex loci)이다 (...). 그것은 '인격 안에(non dans la personne)' 있는 것이 아니라 장원 안에(dans le manoir) 자리한다고 가정된다."[12] 물론 이 역사학자는, 철학자 캐럴린 머천트처럼 르네상스에 "자연에 관한 애니미즘적 관념"이 지배했다고 쓰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연, 대지 또는 장소들에 대한 농민들의 관념은 인격들 또는 권리주체들에 대립하는 중립적(neutre)이고 수동적(passive)이며 불확정적인(indéterminée) 사물이라는 근대적 관념과 뚜렷하게 대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관념의 특이성(spécificité), 근대인들의 눈에 보이는 그 낯섦(étrangeté)은 톰슨이 인용하는 토머스 페인의 단언(斷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권리들을 장소에, 다시 말해 생명 없는 물질에 결부시키고 장소와 관계없이 인격 자체에는 결부시키지 않는 관습은, 너무나 부조리해서, 합리적 논증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¹⁴⁹
영불해협(la Manche)의 이쪽[프랑스]에서, 중농주의자들이 낡은 동시적 소유들의 체계가 지닌 "경제를 마비시키는 해로운 시대착오"를 규탄한 것은 농학자들, 경제학자들, 법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도 토지 인클로저 운동¹⁵⁰이 농민들의 봉기를 일으켰다. 예컨대 공한지 방목권(vaine pâture)과 같은 그들의 집합적 권리들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13] 따라서 혁명 이전 시기는 소유를 둘러싸고 두 관점이 대결하는 무대와 다를 바 없었다. 안-마리 파토(Anne-Marie Patault)가 설명하듯, "사적 전유를 추동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중농주의적인 흐름"에, 많은 농민이 애착을 가졌던 관습적 관념(...)에 대한 존중이 맞섰다.¹⁵¹ 이 여성 저자는 프랑스혁명의 표준 역사를 따라, 혁명가들을 "마을 공동체 소유"의 유지에 반대한 이들, 대다수가 "자연적 공동체들"이라는 개념에 적대적이었던 이들로 제시한다. 반대로 프랑스혁명의 대안 역사에서 농민 저항집단들은 외부자가 아니라 혁명을 수행한 이들로 제시된다. 그것도 패배하기 전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한 혁명가들로 말이다. 야니크 보스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프랑스혁명 동안 ‘1792년 8월 28일 법’과 ‘1793년 6월 10일 법’은 농민들의 투쟁이 이뤄낸 결과다." 첫 번째 법은 영주들이 침탈한 코뮌 공유지를 마을 공동체들에 돌려주도록 했다. 두 번째 법은 코뮌 공유지의 회복 절차를 간소화했고, 공동체들이 그것을 나누기를 원할 경우에 한해 그 분할을 규율했다.
"봉건 권력의 남용과 침탈"을 "억제"하려 했기에, 1793년 6월 10일 법은 혁명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 이 법은 "모든 코뮌 공동재산(biens communaux)을 통틀어 (...) 그 본성상 주민 총체(à la généralité des habitants)에 속한다"고 규정했으며, 주민들이 그것을 나눌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14] 다만 숲, 습지, 광장, 산책로, 공공도로, 그리고 코뮌이 사용하는 건물은 예외로 두었다. 따라서 소유가 집합적이냐 독점적이냐는 문제에 관해 "여기서는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적인 정치적 선택에 따르며", 그와 관련해 남녀 주민 각자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므로 보스크가 지적하듯, 6월 10일 법은 개인적이고 배타적인 근대적 소유 이데올로기의 "변종"이 아니었다. 더욱이 분할이 없을 경우, 코뮌 당국(municipalité)이 아니라 "일요일에 총회로 모인 주민 전체"가 계속해서 공동 향유의 조건을 정하였다.[15] 이 역사가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6월 10일 법은 "나뉠 것과 나뉘지 않을 코뮌 공유지, 곧 원물(元物, fonds)과 과실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16] 이 법은 원물을 공유재(bien commun)로 유지하면서도, 그 과실을 나눌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이 법의 목적은 흔히 생각하듯, 공동소유(propriété commune)를 없애는 데 있지 않으며, 오히려 독차지하는 것(accaparement)에 맞서 싸우고, 존재할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¹⁵²
그런데 1793년 6월 10일 법은 온전히 과거에 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1804년 민법전 제542조에서 6월 10일 법¹⁵³ 제I.1조의 핵심 내용을 이어받는다. 따라서 우리가 민법 제544조를 해석한 바와는 별개로, 프랑스 물권법은 하나의 소유 모델, 곧 코뮌적 소유를 품고 있을 수 있다. 이 소유는 처음부터 거주라는 표지 아래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제542조는 코뮌 공동재산(과 코뮌 분구 공동재산)을 특정 장소, 즉 코뮌이나 코뮌 분구의 주민에게 속하는 재산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주하는 인격들과 삶의 장소-사물들(또는 환경들) 사이의 이러한 관계에서, 거주 관계로서의 소유 관념이 추론되는 듯하다. 이 장소-사물들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코뮌이며, 더 작은 규모—촌락·읍·마을의 규모—에서는 코뮌 분구다. 이렇게 코뮌 공유지는 로마법의 res publicae 또는 res universitatis 개념을 계승하면서, 소유가 거주로, 다시 말해 영지뿐만 아니라 시민 공동체에 대한 거주로도 이해될 수 있음을 증언한다. 말하자면, 민법 제542조는 자구(字句) 자체에 이미 소유-거주라는 관념을 담고 있다.
코뮌적 소유로 눈을 돌리면, 소유-거주에 관한 논의를 한층 더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로제 그라팽(Roger Graffin)은 코뮌 공유지에 가해진 "자유주의적 공격"에 맞서, 이미 1899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코뮌 공유지의 유용성을 가늠하려면 토지 수익률이라는 협소한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이 공유지가 "주민에게 베풀 수 있는 이로움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¹⁵⁴ 마찬가지로 르 플레이(Le Play)는 농촌 주민이 가난에서 벗어나 "안녕과 자립을 뚜렷이 누리는 상태"를 유지할 수단을 코뮌 공유지에서 자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¹⁵⁵ 코뮌적 소유(또는 분구 소유)는 사회적 기능 외에도 토지, 특히 목축지를 보전하는 생태적 기능을 품고 있을 수 있다. 톰슨은 영국에 관해 이렇게 썼다. "공유지 입회권자(communier)[17]들이 자신의 권리를 다시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런던과 그 주변에는 공원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도시의 허파는 시대를 앞선 이 '녹색' 운동가들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¹⁵⁶ 프랑스에서도 우리는 어떤 넓은 땅, 특히 목축지의 보전을 공유지 입회권자들에게 빚지고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생태적 상호 얽힘"¹⁵⁷을 되찾고, 인간과 자연이 "연루된" "위협받는 균형"¹⁵⁸을 복원하며,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를 되살리기 위해,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대상은 바로 이 공유지 입회권자들이 아닌가? 이러한 배려는 옛 법에 익숙한 관념으로, 프랑스 코뮌 분구의 권리보유자(ayants droit)·구성원(membres)·공유지 입회권자가 자주 불러내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 코뮌적 소유와 분구 소유에 제기되었던 비판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2013년 5월 27일, 이른바 분구 제도 현대화법(loi de modernisation du régime des sections de commune)이 가결되었다. 이 법은 분구를 없애려 한다. 분구가 지역 발전을 가로막고, 중세에서 비롯되어 낡고 복잡하며, 끊임없이 소송을 낳는다는 이유에서다. 하여 머지않아 프랑스 토지 인클로저 역사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든지, 역사의 중단된 흐름을 더 이전 시기, 즉 민법 제542조가 아직 문언 그대로 읽히던 시기로 되돌려 다시 이어갈 수도 있다. 그 무렵에는 주민 집합체(또는 주민 총체)와 그들의 삶터—코뮌이나 분구—사이에, 코뮌이나 분구의 법인(personne morale)이라는 가림막이 끼어들지 않았다. 실제로 판사들은 오래전부터 제542조를 해석하면서, 코뮌 공유지와 분구 공유지의 소유자를 주민들이 아니라 코뮌·분구라는 법인으로 보았다. 그 결과 코뮌적 소유와 분구 소유의 집합적 성격이 부인되었다. 법인을 코뮌 공동재산과 분구 공동재산의 단독 소유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정당성을 잃고, 공유재를 자율적으로 관리할 권력마저 쉽게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프랑스 주민 집합체는 권리와 권력을 빼앗기고, 자신들의 공유재와 공동 과실에 대한 관심을 잃었으며, 결국 서로 연대를 상실한 채 상당히 약화되었다. 아직도 저항하는 공유지 입회권자들의 보루가 일부 남아 있다 해도 말이다.¹⁵⁹
「극단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사라진 공동체라는 중세 사례에 관한 단상(L'extrême et l'ordinaire. Remarques sur le cas médiéval de la communauté disparue)」에서 얀 토마스는 코뮌적 소유와 분구 소유를 법인 개념에 기대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법인 개념은 결국 주민 집합체 또는 주민 총체를 가려버리고 말았다. 이 글에서 그는 어떤 "형상들"로 되돌아간다.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중세 법학자들은 바로 그 형상들을 중심으로, "집합체와 조직된 인간 집단에게 소송을 수행하고, 권리의 보유자가 되며, (...) 오늘날 우리가 법인격이라 부르는 것을 떠맡을 능력을 보장하는, 하나의 법적 통일 형식을 만들고자" 했다. 토마스가 이 법적 범주의 형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 사건 기록(dossier)에서 한 "조각"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인격성(personnalité)과 대표(représentation)의 도구들이 만들어진 구체적 사례들의 역사다.
당대 법학자들이 수도원 공동체(communautés monastiques), 교회 꼴레주(collèges ecclésiastiques), 신심회(confréries), 또는 자치도시에 "인간의 생사와 무관하게 유지되는 항구적인 법적 동일성"을 부여할 방도를 찾을 때, 그들은 거의 언제나 다음과 같은 사안에서 출발해 논의를 전개했다고 토마스는 설명한다. 한 집합체의 구성원이 한 명만 남고 모두 사라지면, 그 집합체의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또는 더 극단적으로 가정하여, 그 집합체에 아무도 남지 않으면 그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 집합체는 여전히 그 재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가? 그렇다면 "동일한 집합체가 사라지기 전이든 다시 세워진 뒤이든, 그 집합체가 변함없이 해당 재산의 보유자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¹⁶⁰ 이 물음은 1140년대 무렵 제기되었으며, 중세 볼로냐의 [판례, 소송 등] 사례집(recueil de cas exemplaires)에도 실려 있다.[18] 위의 물음에 대해 여러 답변이 제출되었다. 첫 번째는 사라진 공동체의 재산이 본래의 설정자나 증여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법인 개념의 기원에 놓인 것인데—이 재산이 다시 주인 없는 부동산이 되었다가, 국고 곧 국가의 소유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재산이 장소 그 자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민 공동체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더라도, 재산은 장소에 그대로 남으므로, 공동체가 다시 세워지는 즉시 그 재산에 대한 권리를 되찾는다.
토마스가 밝히듯, 이 마지막 답은 라벤나의 모세(Moïse de Ravenne)가 처음 정식화했다. 수도사들에게 권리 보유자(titulaire)의 지위를 부여할 경우, 수도사들이 사라지면 지배의 연속성이 불가피하게 끊길 수밖에 없었다. 하여 라벤나는 "특정 재산이 배정된 건물 자체에 권리 보유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그 재산이 "수도원의 벽에, 곧 그 장소에" 증여되었으며(donnés), "토지는 교회의 벽에, 그리고 교회가 자리한 그 장소 자체에 속한다(appartenaient)"고 판단했다.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는 인격에서 사물로 넘어갔다. 사물을 인격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음을—하나의 장소가 토지와 재산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정립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중세 초기의 법문화"에서 "재산의 수증자(donataire)이자 소유자"가 반드시 "인간들로 이뤄진 집합체"였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자주 장소나 건물, 성인의 성유물(聖遺物)을 봉헌한 제단이었음은 분명히 입증된 사실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우리는 더 멀리 로마 시대와 "성법(聖法)의 아주 오래된 원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신에게 배정된 토지와 재산, 예컨대 서원(誓願, voeu)을 이행하려 신에게 바친 것은, 언제나 신전의 봉헌된 장소, 곧 경계로 구획된 바로 그 장소에 속하기" 때문이다.¹⁶¹
12세기 후반부터 대다수 법학자는 이 해법, 곧 특정 장소의 법(lex loci) 또는 소유자로서의 장소-사물이라는 해법을 배척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 해법을 적용하려 노력할 수 있다. 장소가 비어 있는 동안에도 조직된 집합체를 존속시키기 위해, 더는 주민들을 은폐하는 법인격에 기댈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특히 이농(離農)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진 (새) 농촌 공동체는, 소유자로서의 장소를 다시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장소는 새로운 주민들에게 집합적 재산과 집합적 권리를 귀속시킨다. 이렇게 하면, 프랑스 코뮌 분구에서 이따금 사라지곤 했던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고, 그 집합적 재산과 집합적 권리도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세 번째 길은 12세기 이후에도 여러 공동체가, 특히 농촌 공동체가 걸어온 길이다.¹⁶² 토마스가 강조하듯, 실제로 16~17세기에 농촌 공동체를 옹호한 이들은 라벤나가 처음 내놓은 해법을 다시 활용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의 자취는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남아 있었다. 그에 따르면, "전염병과 전쟁으로 마을이 텅 빈 다음, 그곳에 새로 들어온 주민들이 옛 공유재—지역 유력자들이 마을이 빈 틈을 타 가로챈 것—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남부 이탈리아 영주들과 맞선 소송에서", 장소를 소유자로 인정함으로써 "점유와 공동권리의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¹⁶³
따라서 우리가 코뮌적 소유와 분구 소유를 되살리고, 나아가 거주로서의 소유라는 형상을 펼쳐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의 장소(les lieux de vie)나 영역들(territoires)을 소유자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래 어떤 관행(habitude), 곧 주민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존속하는 경우에도"¹⁶⁴ 그 위에 법인을 덧씌우는 관행이 굳어졌다. 그로 인해, 결국 주민 공동체가 망각되었다. 이 관행을 버린다면, 우리는 소유를 "추상적 법적 존재물"¹⁶⁵이 아니라 리외디(이름이 붙은 장소, lieux-dits)[19]에 부여하기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장소-사물을 궁극적인 소유자이자 권리의 귀속자로 삼음으로써, 새로운 논거를 얻는다. 다시 말해, 거주하는 인격은 결코 사물 자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물 안의 자리(places)·권리·재산(biens)만 소유한다는 것을 설명할 논거를 얻는다. 우리는 단 한 가지, 즉 엄밀히 말해 장소-사물이 결코 거주하는 인격에게 전유되지 않는다는 점만 규명하면 된다. 왜냐하면, 장소-사물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법적 범주를 통해 안정화된 그 예외 상황은, 결코 사물에 대한 소유자의 무제한적 권력이 작동하는 상황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권력이 작동하는 상황일 것이다. 사물들은 거주자의 권리·재산·자리를 보장할 것이며, 거주자들은 제3의 대표자[추상적 법적 존재물, 즉 법인]에게 자기 목소리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민법 제542조를, 그리고 거주로서의 소유의 한 양태인 코뮌적 소유(와 분구 소유)를 재발견하면, 소유에 관한 다른 비-자연주의적(a-naturalistes) 관점들[20]과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실제로 코뮌 공유지는 우리를 영국의 옛 농촌 공동체로, 또한 스위스의 알멘덴(Allmenden)[21]으로, 베르베르족의 즈마아(jmâa)[22]가 관리하는 공유재로, 로마의 콘소르티움(consortium)[23]으로, 그 밖의 수많은 곳들로 이끌 수 있다. 그곳들로 찾아가기 위해, 우리는 에밀 드 라블레예(Émile de Laveleye)가 1891년 저작 『소유와 그 시원적 형태(De la propriété et de ses formes primitives)』에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정을 쫓을 수 있다.¹⁶⁶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프랑스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대신] 거꾸로 [프랑스 밖에서 안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원래는 선주민들과 지역 공동체들(peuples autochtones et communautés locales)[24]을 보호하려고 마련한 법규로부터 프랑스 본토의 주민 공동체가 어느 정도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단계에서 우리가 법을 사유하는 자연주의적 방식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암묵적으로 사물-환경의 거주자 공동체를 오직 인간 존재에게만 한정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주로서의 소유라는 형상은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에게 반드시 닫혀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3-3. 영역에 거주하기 — 공동체를 비인간 거주자들에게 열기
남아메리카에서 지구의 비인간 거주자들은 권리객체-사물들(choses-objets de droit)이라는 근대 서구의 범주와, 권리주체-인격들(personnes-sujets de droit)에 의해 자유롭게 조작되고 착취될 수 있는 재료라는 자신의 조건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의 법은 자연 또는 Tierra Madre의 법인격(personnalité juridique)을 인정한다. 2008년 9월 28일 에콰도르 헌법이 제10조 제2항에서 자연에 권리주체의 지위를 인정하는 한편, 2010년 12월 21일 볼리비아 법은 제1조에서 어머니-대지의 권리들을 선포한다.¹⁶⁷ 에콰도르법에서와 마찬가지로 볼리비아법에서도, 자연은 "집합적 인격(personne collective)", "일반이익의 집합적 주체(sujet collectif d'intérêt général)"를 이룬다. 그것은 동물상과 식물상을 포괄할 뿐 아니라, 광물, 물, 공기, 풍경과 같은 커다란 전체들, 그리고 자연을 구성하는 각각의 생명 있는 또는 생명 없는 개별 존재물들을 포괄한다. 따라서 "그 안에서 생명이 재생산되고 실현되는" 자연 또는 Tierra Madre는 에콰도르 헌법에 따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존중, 그리고 자신의 생명주기, 기능, 진화 과정의 유지와 재생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¹⁶⁸ 또한 볼리비아의 어머니-대지 권리법에 따라 생명, 다양성, 물, 깨끗한 공기, 균형, 복원, 오염 없는 존재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¹⁶⁹ Tierra Madre가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오래된 전통적 대지-여신인 파차마마(Pacha Mama)라는 이름도 갖는 한¹⁷⁰, 우리는 명백히 아메리카 선주민에게서 영감을 받은 이 법적 텍스트가 애니미즘적 사유 방식을 표현하며, 사물들의 거주자 공동체를 비인간들에게 열기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¹⁷¹
그러나 어머니-대지에 관한 에콰도르법과 볼리비아법은 북미의 작업들에서도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에콰도르 제헌의회는 아마존 유역의 선주민들을 옹호하는 데 관여한 NGO들의 지원, 미국 내 안데스 디아스포라의 도움, 그리고 크리스토퍼 스톤(Christopher Stone)의 논문 「나무도 원고적격을 가질 수 있는가?(Should Trees Have Standing?)」¹⁷²에서 영감을 받은 여러 소송을 제기했던 미국 법률사무소¹⁷³의 후원을 받았을 수 있다. 이 글은 이미 1972년에 "자연 요소들(éléments naturels)"에 권리를 인정하자고 제안한 텍스트였다. 그 글이 어떤 역할을 했든 간에, 자연과 그 요소들을 인격화하자는 제안은 서구 법전통에 반드시 낯선 것은 아니다.¹⁷⁴ 스톤은 자신의 글에서, 사회들이 과거에 권리객체로 간주되고 인격들과 대립되는 사물의 범주에, 나아가 여성, 아동 또는 노예처럼 동산의 범주에까지 놓였던 존재물들에게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끊임없이 변모해왔다고 지적한다. 이어 그는 자연 요소들이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불가피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아 보인다고 주장한다. 만약 강과 숲이 스스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소(訴)의 이익(intérêt à agir)[25]을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을 국가, 아동 또는 취약 성년자에게 부여할(accorder)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위험에 처한 자연 요소의 어떤 "친구"라도 후견인이자 대표자로서, 그 자연 요소의 보호 및/또는 배상을 얻기 위해 법원에 나설 수 있다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¹⁷⁵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일부 저자들은 우리의 법전통 밖에서 논거를 끌어오지 않고도 동물, 나아가 자연 또는 생물다양성의 법인격을 옹호한다. 예컨대 장-피에르 마르그노(Jean-Pierre Marguénaud)는 일부 동물들이 이미—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법인격을 누리고 있다는 명제를 옹호한다. 실제로 이 법학자는 형법이 동물에게 가해진 폭력을, 곧 공공연하게 자행된 것뿐 아니라 사적으로 자행된 것까지 처벌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지적한다. 이 동물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보호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으로, 따라서 인격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동물들을 위해 취해지는 조치들이 늘어나는 것은 짐승들이 인격화되는 과정의 일부를 이룬다.¹⁷⁶ 동물보호단체와 같은 다른 인격들이 동물의 이름으로 말할 권한과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소송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마리-앙젤 에르미트(Marie-Angèle Hermitte)는 그와 같은 생각을 옹호하되, 자연으로 확장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통용되는 인격과 인간 존재의 동일시가 언제나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상기시킨다. 그리고 인격이라는 말의 최초 의미, 곧 per sonare, "그것을 매개로 소리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의미를 재발견하자고 제안한다. 이 여성 저자는 자연인과 법인 곁에 고유한 법적 규율체계를 갖춘 비인간 인격들이¹⁷⁷ 자리할 수 있다고 본다.¹⁷⁸ 두 법학자 모두 드모그(Demogue)를 참조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드모그는 1909년에 동료들에게 자연인 개념도 법인 개념 못지않게 법적 구성물이며, 따라서 특정 존재물들에게 법인격을 거부할 자연적 이유는 없고 오직 정치적 동기만 있을 뿐이라고 상기시켰다. 처분주체(sujet de disposition)—반드시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가 맡아야 하는 역할—와 향유주체(sujet de jouissance)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살아 있든 살아 있지 않든, 어떤 개체든 구성할 수 있는 주체—를 구별하면서, 드모그는 "동물들, 예술작품들과 같은 무생물적 사물들을 권리주체로 내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¹⁷⁹
따라서 인간 외부의 존재물들을 인격화하는 것(la personnification)은 우리의 민법 전통에 완전히 낯선 해법이 아니다. 심지어 그것이 근대 서구의 주관주의적 법 관념의 기초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셸 빌레에 따르면 주관적 권리의 아버지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가 1651년에 출간한 『리바이어던』에서 인격들, 본인들(authors), 인격화된(personalized) 존재들에 관한 장 하나를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장에서 그는 "인격(person)"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격이란 ‘말이나 행위가,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 혹은 그의 말이나 행위가 타인 혹은 다른 사물의 말과 행위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에서 타인 혹은 다른 사물의 말과 행위란 ‘그 말과 행위가, 진실이든 의제(擬制, fiction)이든 그에게 귀속되는’ 경우를 말한다." 홉스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한다. "그 말이나 행위가 그 자신의 것으로 생각될 때 그는 ‘자연 인격(natural person)이라 불리며, 그 말이나 행위가 타인의 말과 행위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될 때 그는 허구적(虛構的) 인격(feigned person), 또는 인공적 인격(artificial person)이다." 이어 그는 덧붙인다. "의제에 의해 대표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 교회, 병원, 교량과 같은 무생물은 교구 목사, 병원장, 교량 감시인에 의해 인격화될 수 있다."¹⁸⁰ 명백히 근대 법사상은 비인간 사물들, 달리 말해 자연과 그 요소들의 인격화를 금지하지 않고 허용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인간적이지는 않은 사물들을 "사물들의 의회(Parlement des choses)" 안으로 맞이하자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제안은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것으로 보인다.¹⁸¹ 실제로 사물들이 인격의 범주로 들어가고 그 결과 사물의 범주가 비워진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사물들을 인격 또는 주체에 대립하는 객체로 보는 우리의 관념이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물과 인격의 대분할은 여전히 양자의 대립을 뜻할 것이다. 여전히 한편에는 발화 없는 존재들, 곧 말하지 않고 그 이름으로 아무도 말하지 않는 존재들(사물들)이, 다른 한편에는 발화를 부여받은 존재들, 곧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타인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말하지 않지만 그 이름으로 다른 이들이 말하는 존재들(인격들)이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자연과 그 요소들의 인격화가 실천적·법적 효과를 갖지 않을 수는 없다. 산이 일단 인격화되면, 그 산의 항의(plainte)를 표현하는 것, 곧 그 산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 산의 비인간 거주자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비인간 거주자들은 더 이상—법률과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살해되거나 채굴되거나 학대받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 식물 또는 광물에게 대변자나 대표자를 붙여주는 일을 비판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단지 강조하려는 것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의지와 객체의 대면"¹⁸²에 기초한 근대 법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자연의 사물들 자체가 자유롭게 조작될 수 있는 객체라는 조건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연의 대표라는 의미에서의 이러한 인격화는 그 영향이 언제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연의 사물들을,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위할 권한을 부여받은 인격들로 이중화하는 것은, 주민 공동체들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가면을 씌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가면은 머지않아 그들을 가려버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들의 권리가 부인되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사물들은 결코 처분주체로 제도화될 수 없고 오직 향유주체로만, 또는 홉스의 용어를 빌리면 허구적 인격들로만 제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사물들은 능동시민이 아니라 오직 수동시민[26]으로 머물 운명에 처한 존재물이다. 다른 이들이 [자연의 사물들을 대신해] 그들의 이름으로 발화할 수 있으나, 정작 그들과 소통하는 일은 일찌감치 거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얀 토마스는 "권리주체라는 우리[근대 서구]의 인공물(artefact du sujet de droit)이 전제로 주어지지 않는" 다른 법체계를 사유하도록 격려하고, 민법 전통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근대의 서구적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도 다시 우리를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연을 권리주체로 제도화하려는 기획으로 되돌아가면서, 이 기획의 지지자들이 권리주체 범주를 확장하고 그럼으로써 해당 범주를 공고히 하자고 제안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새로운 권리주체를 특징짓는다고 여겨지는 자연 지배 욕망의 전능성에 대한 비판"은, 마땅히 권리주체라는 범주 자체를 거부하거나 해체하는 쪽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토마스는 또한 인격화에 관한 논쟁이 "사실상 모든 대안적 해법을 은폐해버렸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한다. 역사적으로는 거래 밖의 사물들(choses hors commerce)[27]과 공동 사물들(choses communes)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포함한 개체들을 보호할 수 있게 했음에도 말이다.¹⁸³ 실제로 로마법의 사물 개념은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기억하듯이, 가장 오래된 의미 규정에서 사물이라는 말은 소송 또는 논의되어야 할 사안을 뜻한다. 따라서 사물들은 토론하고, 협상하고, 교섭하는(parlementer) 장소들, 곧 말 그대로 의회들(Parlements)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물들의 의회, 곧 인격화된 사물들을 위한 의회를 세우는 대신, 사물들 자체를 의회로 바라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물을, 인간 인격과 비인간 인격이 그 안에서 자신들의 분쟁을 해결하게 되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인격과 사물이 발화와 맺는 관계가 달라진다. 곧 사물은 더 이상 대표될 가치조차 없는 침묵하는 존재물이 아니라, 갈등이 해결되는 장소가 된다.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라는 개념은 더 이상 인격 개념과 포개어지지 않고, 인격화는 대표[개념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이제 절차적 의미의 사물에서 실체법(實體法, droit substantiel)의 사물로, 더 정확히는 물권법의 사물로 논의를 옮겨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사물은 장소, 곧 인간 인격과 비인간 인격이 함께 거주하는 삶의 장소 또는 환경이며, 이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사안과 생길 수 있는 분쟁을 해결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갈등이 특히 다루기 까다로울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없다면, 동물, 식물 또는 광물과 인간이 벌이는 교섭은 아마도 헛될 것이다. 따라서 비인간 공동체에 직접 말을 걸 수 있다고 자처하면서 법인 개념을 무너뜨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인격들 사이에 번역자가 필요할 수 있듯이, 인간 인격과 비인간 인격 사이에서도 제3의 매개자(tiers médiateur)가 인간들 곁에 파견된 비인간들의 대표자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비인간 집합체의 옛 대표자는 거주자들 사이의 진정한 제3자가 된 이상, 더는 그 집합체의 이름으로 말할 권한이 아니라 다양한 범주의 거주자들을 조정할 권한을 부여받을 것이다. 이 제3자는 더 이상 비인간을 이중화하지도 가리지도 않으면서, 같은 언어를 공유하지는 않지만 같은 환경에 거주하는 인간 인격과 비인간 인격이, 이를테면 영역의 배분을 협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거주의 장소이자 다툼의 장소이기도 한 사물-환경들 안에서, 이 매개자—여전히 마녀 또는 샤먼이라 불릴 수도 있을 존재—는 다양한 공동-거주자 집단들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쟁송을 해결하도록 도울 것이다. 바티스트 모리조(Baptiste Morizot)의 용어를 빌리면, 제3자가 된 옛 대표자는 더 이상 대의원의 자격이 아니라 외교관¹⁸⁴이자 영역 배분자의 자격으로 개입하여, 예컨대 양우리와 늑대 무리를, 곧 인간과 가축화된 양들의 집단을 늑대 개체들과 조정하게 될 것이다. 이 늑대 개체들은 무주물로 남아 있는 까닭에, 로마 자연법이 알려주듯, 여전히 자연적 자유를 보유하며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
『외교관들: 생태계의 다른 지도 위에서 늑대들과 함께 거주하기(Les Diplomates: Cohabiter avec les loups sur une autre carte du vivant)』에서 바티스트 모리조는 비인간들의 대표라는 의미에서의 인격화 문제로 되돌아가, "정치에서 비인간들의 대표를 개선하려는 일련의 이론적 기획들"이 "역설적"이라고 지적한다.¹⁸⁶ 왜냐하면 그 기획들은 "대표의 위기에 직면하여 근대화의 전선(front de modernisation)[28]처럼 반응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곧 "근대성이 위기라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충분히 근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가 위기라면, 대표를 더욱 늘리자"라고 표명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티스트 모리조는 외교관이라는 형상을 "인간들의 집회 안에서 비인간들을 대표하는 자"라는 형상으로부터 세심하게 분리한다.¹⁸⁷ 제3자-외교관(tiers-diplomate)도 인격-대표자(personne-représentant)처럼 가면을 쓴다.¹⁸⁸ 하지만 이 가면은 대표되는 인격의 얼굴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집단과 비인간 집단 사이의 매개물(média)로 쓰이며, 양쪽이 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¹⁸⁹ 외교관은 "타자들을 위해 말하고" "복화술을 부린다"¹⁹⁰는 품위 없는 과업을 거부하고, 비인간들에게 "품위 있게" 자신을 제시한다. "우리 가운데 살고 있으며, 공동거주의 형식들을 그들과 함께 다시 발명해야 하는 이방인들"을 대하듯이 말이다.¹⁹¹ 이어서 모리조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이는 비인간들을 대표하는 인간들 사이의 외교가 아니라, 비인간들과 직접 벌이는 외교다. [외교관의] 모델은 탐험가이지 대의원이 아니다. 여기서 외교관은 자기 진영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는 진영을 제시한다. 그는 진영의 이익이 아니라, 관계 자체의 이익을 옹호한다."¹⁹²
그러나 법적 영역에서 동물, 식물 또는 광물이 법적으로 무엇인지를 묻는 "일종의 지위 강박(obsession statutaire)"에 빠지지 않으면서, "관계 자체의 이익"에 주의를 기울이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법적 성질 결정(qualification juridique) 작업을 어떻게 건너뛸 수 있으며, 이런저런 유형의 비인간이 감각 있는 존재(être sensible), 사물, 재산 또는 인격의 범주 가운데 어디에 포섭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¹⁹³ 실제로 민법학자의 작업은 주어진 사안이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법적 규율체계를 찾는 데 있다. 그런데 이 규율체계는 검토되는 사례의 법적 성질에 따라 좌우되며, 그런 점에서 성질 결정이라는 첫 번째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어머니-대지 또는 생물다양성이 인격화되면, 자연과 그 요소들의 법적 지위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물, 식물, 광물이 사물-환경의 인격-거주자(personnes-habitants)라는 반열에 오르게 되면, 법학자는 "행동학적이고[29] 기술적인 관계(relation éthologique et technique)"가 "중요한 것이자 성찰을 이끌어야 하는 것"이 되는 외교적 접근에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법학자는 "타자들의 보이지 않는 '법' 속으로의 산책(excursion)"에 나서, 비인간 인격-거주자들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s'accordent)" 권리들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¹⁹⁴
바티스트 모리조의 뒤를 따라, 우리는 비인간들과의 갈등을 "동일한 영역 위에 함께 거주하는, 이질적인 '사유와 법적 체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법적 갈등(conflits de droits)"으로 간주할 수 있다.¹⁹⁵ 그렇다면 국제사법(droit international privé)의 장치들을 동원하는 방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국제사법은 "사인들 사이의 국제관계를 규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규들"을 아우르며, "서로 다른 국가의 개인들이 상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법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비인간 공동체들에서도 법적 현상이 발견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법률충돌(conflits de lois), 나아가 관할충돌(conflits de juridictions)[30]을 해결하는 과제를 안게 될 것이다.¹⁹⁶ 그러나 외국적 요소(élément d'extranéité)¹⁹⁷[31]는 늑대나 까치라는 인격—이들은 프랑스 시민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¹⁹⁸—보다는 법 자체에, 곧 비인간 공동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규칙들에, 예컨대 너도밤나무나 참나무 공동체의 내부 규정¹⁹⁹에 깃들어 있다. 그런 만큼 이러한 법들 사이의 갈등은 국제사법이 다루는 문제보다는 법다원주의(pluralisme juridique) 상황에서 마주치는 문제를 상기시킨다. 실제로 우리의 과제는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결합된 하나의 영역 위에서 서로 경쟁하는 여러 법체계를 접합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직면할 어려움은 지역 공동체들과 선주민들, 또는 프랑스식 용어를 빌리자면 주민 공동체들²⁰⁰이 자신들의 고유한 규칙, 이른바 관습을 경우에 따라 국가 법질서에 반해서라도 적용할 능력을 간직하고 있을 때 우리가 마주치는 어려움과 유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주민 사법 전통들(traditions juridiques autochtones)²⁰¹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공동체들이 지향성(intentionnalité)[32]을 인간에게만 한정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비인간에게도 법규칙을 만들어낼 역량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전환은 그만큼 더 적절한 선택이 될 것이다.²⁰²
[우리(근대 서구)와] 다른 인간들의 법—인간 아닌 타자들의 권리에 애초부터 열려 있는 법—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 민법 전통의 불충분함이 드러날 수 있다. 다만 인류의 경계를 가로지르는(transgenre humain) 이러한 법다원주의 상황이 완전히 전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두어야 한다. 동물들, 특히 가해 동물들(déprédateurs)을 상대로 제기된 중세의 재판들이 입증하듯,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영역에 대한 사법적 분할은 이미 이루어진 적이 있다. 물론 대개 어린이를 다치게 하거나 죽였다는 혐의로 돼지들을 기소한 재판이 열리곤 했는데, 그 재판은 돼지가 처형대로 끌려가는 처단으로, 따라서 인간-동물 관계의 한 항[인 동물]을 문자 그대로 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곤충들²⁰³과 그 외 유해 생물들을 상대로 제기된 재판들에서는 그것들의 존재권이 인정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애벌레, 민달팽이, 메뚜기, 파리, 풍뎅이, 달팽이, 생쥐 또는 두더지가 리외디에서 먹을 것을 얻고 거주할 권리가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1545년 사부아의 생-쥘리앵 마을에서 바구미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랑보 변호사(Maître Rambaud)는 이 짐승들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에게 환대를 베풂으로써 그들의 가해행위에 대비하자고 제안했다. 나아가 이 변호사는 바구미들이 배타적으로 사용할 장소를 따로 마련하자고 제안하면서, 생-쥘리앵 마을 주민들에게 "클라레 숲 가장자리의 라 그랑 페스(la grand feisse)"를 바구미들에게 줄 것을 권했다.²⁰⁴ 장 레알(Jean Réal)은 『짐승과 판사들(Bêtes et juges)』에서 "유해동물들을 상대로 한 여러 재판들"이 위 사례와 똑같이 "오로지 그들을 환대하기 위해 마련된 전용 영역들을 내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과 짐승이라는 두 당사자의 대립은 결투(duel)의 문제가 아니라 비옥한 영역들의 관리(gestion)라는 문제로 제기되었다. 곧 공동 공간 안에서 각자가 먹을 권리를 공평하게 나누도록 하는 것이 마땅했다"라고 썼다.²⁰⁵
그럼에도 이러한 영역 할당(attributions de territoires)은 동물들이 자기 자신에게 주었을 권리에 대한 인간의 지식(connaissance)보다는, 인간이 동물들에게 권리를 인정(reconnaissance)하는 데에 더 많이 기초하는 것으로 보인다.[33] 물론 동물들을 상대로 한 중세 재판들은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했다. 변호사가 그들의 말을 판사 앞에서 대변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했고, [그들과] 인간이 동시에 차지하고 있는 환경의 거주자(habitants de milieux)라는 반열에 그들이 오를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법적 분규들의 기록을 읽어보아도, 오늘날 우리가 행동학적이라 부를 지식에 기초하여 인간들이 짐승들과 협상하고 화해(transiger)[34]하려 했다는 인상은 거의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러한 결정들은 종교재판과 같은 시기에 주로 교회법원에서 내려졌는데, 무엇보다도 그때까지 마녀들이 다루던 갈등을 교회도 해결할 수 있으며 [교회가] 마녀들을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이 있었다.²⁰⁶ 이렇게 가정한다면, 우리의 민법 전통 안에서 비인간들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권리들을 향한 열림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해충들을 상대로 한 소송 기록보다는 마녀들—진정한 외교관들—의 마법서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이 기이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생물다양성, 자연, 풍경의 재정복(reconquête)[35]을 위한 2016년 8월 8일 법률²⁰⁷은 우리를 권리주체들 너머(au-delà) 또는 그 아래(en deçà)에 이르는 법(droit)으로 이끈다. 이 법은 더 이상 "자유의지와 객체의 대면"²⁰⁸에 기초하지 않으며, 그 혁신들—특히 생태손해의 배상(réparation du préjudice écologique)²⁰⁹, 환경 물적 의무(obligation réelle environnementale)²¹⁰[36], 생태적 보상(compensation écologique)²¹¹—은 소유-거주의 용어들로 설명될 수 있다.
분명히 해두자. 맞아들여진 인격들(personnes-accueillies)은 사물-환경들 안에서 권리 또는 자리를 부여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사물-환경을 배려하고(ménager) 유지하는 만큼, 그것을 향유하고 그로부터 혜택을 누린다(bénéficier). 따라서 거주하는 인격들은 이 거처들[사물-환경들]이 손상되었을 때(생태손해의 피해), 생태적 사용에 배정되었을 때(환경 물적 의무의 부담), 또는 사물들 사이에서 깨진 균형을 회복하는 일에 쓰이게 되었을 때(환경침해에 대한 보상), 사물들에게 돌봄(soins)을 베풀도록 요청받을 수 있다. 한편 사물-서식지들(choses-habitats) 또는 거주되는 사물들(choses-habitées)은 궁극적 소유자들, 곧 자기 자신의 소유자들일 수 있다. 이들은 주인들과 주권자들의 장악을 수동적으로 감내하기는커녕, 서로 관계 맺으며, 생물다양성, 자연, 풍경에 대한 침해로부터 [서로를] 지켜주는 권리와 의무의 망을 엮어낼 것이다. 결국 소유-거주는 근대적 주관주의 관념(conception moderne subjectiviste)에서 생태적 현실주의 관념(conception écologique réaliste)으로의 이행(transition), 건너감(passage) 또는 전환(tournant)을 사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권리주체의 자유의지와 [그에 대한] 권리객체의 종속을 지향하는 법 대신, 사물들을 둘러싸고 인격들 사이에 맺어지는 상호관계들, 그리고 인격들과 사물들 그 자체 사이에 맺어지는 상호관계들의 견고함을 보살피는 법을 가시화하게 될 것이다.²¹²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마침내 마음속에 그려낼(se représenter) 수 있을 법적 세계다.
각주
125. Y. Thomas, 「Res, chose et patrimoine...」, 앞의 글, pp. 413-414.
126. F. Ost의 저작(각주 5에서 언급한 책) 제목을 빌린 것이다.
127. C. et R. Larrère의 저작 Penser et agir avec la nature. Une enquête philosophique(éd. La Découverte, 2015)의 제목을 빌린 것이다.
128. P. de Vareilles-Sommières, 「La définition de la notion juridique de la propriété」, 앞의 글, p. 452.
129. Y. Thomas, 「L'extrême et l'ordinaire. Remarques sur le cas médiéval de la communauté disparue」, in Les Opérations du droit, 앞의 책, 특히 pp. 207-208.
130. 같은 글.
131. 구분소유(copropriété des immeubles bâtis) 제도의 적용을 받는 건물에 있는 한, 아파트의 소유자(propriétaire foncier)는 구분소유 규약(règlement de copropriété), 도시계획법, 환경법 등을 준수해야 한다. 그는 내력벽(murs porteurs)을 허물 자유도, 덧창(volets)을 원하는 색으로 다시 칠할 자유도, 복도에 화분을 둘 자유도, 자기 주거에서 아무 직업이나 영위할 자유도 없다.
132. 예컨대 A.-M. Patault, 앞의 책, p. 191을 보라. "소유의 신성한 성격을 만성적으로 환기하는 것은, 그 정당성과 안정성이 끊임없이 재확인될 필요가 있었던 이 거대한 재산의 대이동(translation des biens)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133. F. Zenati-Castaing, Les Biens, PUF, 1988, n° 92, p. 106; F. Zenati-Castaing et T. Revet, Les Biens, [각주 51에 등장한] 앞의 책, 1997, n° 92, p. 118.
134. F. Zenati-Castaing, 「Pour une rénovation de la théorie de la propriété」, Revue Trimestrielle de Droit Civil, 1993, p. 316.
135. 2004년 5월 7일 파기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보라. 상고번호(n° de pourvoi) 02-10450, 공보(Bulletin)에 게재된 판결.
136. Y. Bosc, La Terreur des droits de l'homme : le républicanisme de Thomas Paine et le moment thermidorien, éd. Kimé, 2016, pp. 60-66.
137. 봉기권(droit à l'insurrection)에 관해서는 같은 책, 특히 pp. 106-107을 보라.
138. Starhawk, Rêver l'obscur - Femmes, magie et politique, collection Sorcières, éd. Cambourakis, 2015, p. 13.
139. 또한 E. Hache, Ce à quoi nous tenons, Le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 2011, p. 196을 보라.
140. 같은 책, p. 27, p. 38, p. 48.
141. F. Zenati-Castaing, Essai sur la nature juridique de la propriété, 앞의 책, p. 87. "따라서 소유자는 자기 권리의 본질 그 자체로 인해 자신의 사물과 단둘이 있으며, 어떤 계책으로도 그에게 다른 상대를 찾아줄 수 없다."
142. F. Zenati-Castaing, 「Pour une rénovation de la théorie de la propriété」, Revue Trimestrielle de Droit Civil, 1993, pp. 305 이하.
143. C. Merchant, 「Exploiter le ventre de la terre」, in Reclaim. Recueil de textes écoféministes, choisis et présentés par Emilie Hache, éd. Cambourakis, 2016, collection Sorcières, p. 131-134.
144. 같은 글, p. 158.
145. 이 용어에 관해서는 특히 A. Berque, Ecoumène. Introduction à l'étude des milieux humains, Mappemonde, Belin, 2000, pp. 12-14를 보라. 사물들을 환경(milieux)으로 사유하자는 제안은, 오귀스탱 베르크가 논의하고자 하는 환경학(science des milieux), 곧 메졸로지(mésologie)를 법의 영역에서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메졸로지에 대한 소개로는 특히 A. Berque, Poétique de la terre. Histoire naturelle et histoire humaine, essai de mésologie, Belin, 2014; A. Berque, La Mésologie. Pourquoi et pour quoi faire ?, Essais et conférences, Presses universitaires de Paris Ouest, 2014를 보라.
146. C. Merchant, 앞의 글, p. 151.
147. Starhawk, Rêver l'obscur..., 앞의 책, pp. 237-327, 특히 pp. 281-289를 보라.
148. E.-P. Thompson, Les Usages de la coutume. Traditions et résistances populaires en Angleterre, 17e-19e siècle, EHESS, Gallimard, Seuil, septembre 2015, p. 228.
149. 같은 책, pp. 156-157, pp. 197-198.
150. 우리는 앞서(각주 17) 인클로저(enclosure)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영국에서 영주 권력(puissance seigneuriale)의 작용에 의한 코뮌 공동재산(biens communaux)과 개별 보유지(tenures individuelles)의 침탈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는 점을 보았다. 이를 인클로저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재산들이 이후 종래의 사용권(droits d'usage) 체제에서 벗어나게 할 정확한 목적으로 수용되고 울타리로 둘러쳐졌기 때문이다(F. Gauthier, 「Enclosure」, Dictionnaire des biens communs, 앞의 책). 프랑스에서도 코뮌 공동재산, 특히 코뮌 공유림(bois communaux)에 대한 사용권을 침탈하는 현상이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은 덜 폭력적이었고,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으로 마을 공동체와 농민층(paysannerie)의 소멸로 이어지지 않았다(F. Gauthier, 「Enclosure」, Dictionnaire des biens communs, 앞의 책). 같은 취지로 A. Corvol, L'Homme aux bois. Histoire des relations de l'homme et de la forêt. 17e-20e siècle, Fayard, 1987, p. 11을 보라. "17세기 초부터 우리는 알뢰(alleux), 곧 어떤 부담도 지지 않고 자유로이 보유하던 토지(terres tenues en franchise)가 그야말로 짓눌려 사라져가는 과정을 목격한다 (...). 오랫동안 영주의 활동은 (...) 자신의 헤게모니에 반하는 이 체계를 약화시키려 애써 왔다." 그리고 p. 13에 따르면, 삼림에 대한 권리의 침식은 "18세기의 마지막 3분의 1 동안" 정점에 이른다.
151. A.-M. Patault, 앞의 책, p. 173, p. 187.
152. Y. Bosc, 「Loi du 10 juin 1793 sur le partage des biens communaux」, 앞의 글. 한편으로 장기간에 걸친 인클로저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 마을 공동체를 그들의 권리 안에서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이중의 운동은 R. Larrère et O. Nougarède, Des hommes et des forêts, coll. Découvertes, Gallimard, 1993, p. 77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혁명기는 인근 공동체들(communautés riveraines)이 자신들에게 할당된 임야(林野, 숲과 들판)에 대해 갖는 집합적 소유를 공고히 했고, 이 임야는 코뮌 공동재산이 되었다. 그러나 국유재산(biens nationaux)의 매각은 농민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혁명 입법은 농촌민에게 불리한 배타적 소유 관념을 부과했다. [해당 입법으로] 사용권은 '역권(役權, servitudes usagères)'이 되었으며, 모든 소유자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옮긴이] 역권(役權, servitude)은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타인의 사물, 특히 토지를 이용하는 물권으로, 특정인의 편익을 위한 인역권(人役權)과 특정 토지의 편익을 위한 지역권(地役權)으로 나뉜다. 로마법 이래 근대 민법전은 두 역권을 모두 계승했으나, 한국 민법은 지역권만 두고 인역권은 도입하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가 인용하는 servitudes usagères는, 혁명 입법이 본래 집합적 소유에 가깝던 농민들의 사용권(droits d'usage)을 이제 사인의 소유가 된 토지 위에 부가된, 그래서 그 소유자가 매수·소멸시킬 수 있는 역권으로 재규정한 것을 가리킨다. 곧 공동체의 집합적 권리가 사적 소유권에 종속된 역권으로 전락했음을 뜻한다.
153. "코뮌 공동재산이란 하나 또는 여러 코뮌의 모든 주민, 또는 코뮌 분구(section de commune)의 모든 주민이 그 소유권 또는 그 산출물에 대해 공동의 권리를 갖는 재산이다."
154. R. Graffin, Le Rôle social des biens communaux, éd. Albert Fontemoing, 1899, p. 13.
155. F. Le Play, Les Ouvriers européens, 1855 (appendice, p. 283, 2e col.), R. Graffin이 같은 책에서 재인용.
156. E.-P. Thompson, Les Usages de la coutume, 앞의 책, p. 186.
157. 같은 책, p. 248.
158. 같은 책, p. 245.
159. 우리는 특히 다음 코뮌들의 몇몇 분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장티우-피즈롤(Gentioux-Pigerolles, 밀바슈 고원), 생탈리르-에-몽타뉴(Saint-Alyre-ès-Montagne, 세잘리에), 샤날레유(Chanaleilles, 마르주리드), 샹봉-쉬르-돌로르(Chambon-sur-Dolore, 리브라두아-포레), 사뉴-에-구둘레(Sagnes-et-Goudoulet, 아르데슈 고원).
160. Y. Thomas, 「L'extrême et l'ordinaire. Remarques sur le cas médiéval de la communauté disparue」, in Les Opérations du droit, 앞의 책, pp. 207-208.
161. 같은 글, pp. 211-212.
162. 같은 글, p. 212.
163. 같은 글.
164. 같은 글, pp. 207-209.
165. 같은 글.
166. É. de Laveleye, De la propriété et de ses formes primitives, 4e éd., Félix Alcan, 1891.
167. Constitución de la República del Ecuador, Registro oficial no 449, 2008, art. 10 [에콰도르 헌법](자연을 권리주체 가운데 하나로 열거하는 조항)을 보라; E. Fernandez Fernandez, 「Les controverses autour de l'intérêt à agir pour l'accès au juge constitutionnel : de la défense du droit à l'environnement (Costa Rica) à la défense des droits de la nature (Équateur)」, Vertigo, hors-série n° 22, 2015, en ligne : <journals.openedition.org/vertigo/16214>. Ley no 071 : ley de derechos de la Madre Tierra, Gaceta Oficial de Bolivia, 21 décembre 2010, art. 1 (Ley no 071)을 보라. 또한 "건강하고 보호되며 균형 잡힌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볼리비아 헌법 제33조는 이 권리의 행사가 "현재와 미래 세대의 개인들과 공동체들, 나아가 다른 생명체들이 정상적이고 항구적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규정한다(V. David, 「La lente consécration de la nature, sujet de droit : le monde est-il enfin Stone?」, Revue juridique de l'environnement, vol. 37-3, 2012, p. 469, 특히 pp. 481-482, Nueva constitución política del Estado, 2008, art. 33을 인용·번역). 또한 F. Morin, 「Les droits de la Terre-Mère et le bien vivre, ou les apports des peuples autochtones face à la détérioration de la planète」, Revue du MAUSS, n° 42-2, 2013, p. 321, 특히 pp. 329, 335를 보라.
168. 에콰도르 헌법 제7장 제71조 제1항.
169. 어머니-대지의 권리에 관한 2010년 12월 볼리비아 법률의 제2장 제7조.
170. 에콰도르 헌법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 불가결한 일부를 이루는 자연, 파차마마(Pacha Mama)를 기린다."
171. 마찬가지로 2017년 3월 15일, 뉴질랜드 의회는 황가누이(Whanganui)강이 법인격을 갖춘 살아 있는 존재물임을 인정했다. 며칠 뒤인 2017년 3월 20일, 인도 우타라칸드주 고등법원도 이와 똑같이 갠지스강과 그 지류인 야무나강에게 인간 존재와 동일한 권리를 갖춘 살아 있는 법적 존재물의 자격을 인정했다(É. Naim-Gesbert, 「Êtres et choses en droit de l'environnement : l'appel du sacré」, Revue juridique de l'environnement, 2017/3, vol. 42, pp. 405-408).
172. C. Stone, 「Should trees have standing? Towards legal rights for natural objects」, Southern California Law Review, 45-2, 1972, pp. 148-157. 프랑스어 번역본으로는, C. Larrère의 해제와 함께, C. Stone, Les Arbres doivent-ils pouvoir plaider ?, Le passager clandestin, 2017.
173. 펜실베이니아에 본부를 둔 Community Environmental Legal Defense Fund를 가리킨다.
174. 에콰도르의 법학자들은 또한 벨기에 법학자들을 경유하여, 프랑스 법학자 M.-A. Hermitte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도 있다. 에르미트는 이미 1988년에 생물다양성을 권리주체로 구성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B. Edelman et M.-A. Hermitte, L'Homme, la nature et le droit, Paris, Christian Bourgois, 1988). 마찬가지로 프랑스 법학자 V. David는 자연의 특정 요소들에게 법인격을 인정하는 것을 허용하는 누벨칼레도니 루아요테 제도(îles Loyauté)주 환경법전 제110-3조의 작성에 동료들과 함께 기여했다고 밝힌다(「La nouvelle vague des droits de la nature. La personnalité juridique reconnue aux fleuves Whanganui, Gange et Yamuna」, Revue juridique de l'environnement, 2017/3, vol. 42, pp. 409-424, 각주 46을 보라).
175. C. Stone, 앞의 글.
176. J.-P. Marguénaud, L'Animal en droit privé, Limoges, Publications de la faculté de droit et de sciences économiques de l'université de Limoges, 1992; 「La personnalité juridique des animaux」, Recueil Dalloz, 1998, pp. 205-211; J.-P. Marguénaud, F. Burgat, J. Leroy, Le Droit animalier, PUF, 2016.
177. 다만, 이 여성 저자는 이 표현을 쓰지 않는다.
178. M.-A. Hermitte, 「La nature, sujet de droit ?」, Annales. Histoire, Sciences Sociales, 2011/1, pp. 173-212.
179. R. Demogue, 「La notion de sujet de droit. Caractères et conséquences」, Revue Trimestrielle de Droit Civil, 1909, pp. 611-655; Les notions fondamentales du droit privé. Essai critique pour servir d'introduction à l'étude des obligations, 1911, éd. La mémoire du droit, 2000.
180. T. Hobbes, Léviathan, chapitre 16, 「Des personnes, des auteurs, et des êtres personnifiés」, pp. 161 이하. (『리바이어던 1: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토머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2008, 나남)의 제16장, pp. 217-223)
[옮긴이] 이 인용은 진석용이 옮긴 『리바이어던』을 따르되, 저본의 '의제적 인격·인위적 인격'은 '허구적 인격·인공적 인격'으로 바꾸어 옮겼다.
181. B. Latour,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Essai d'anthropologie symétrique, La Découverte/Poche, 1991, 1997, p. 195.
182. Y. Thomas, 「Res, chose et patrimoine...」, 앞의 글, pp. 418-419.
183. Y. Thomas, 「Le sujet de droit, la personne et la nature」, 앞의 글, pp. 92-93.
184. B. Morizot, Les Diplomates. Cohabiter avec les loups sur une autre carte du vivant, éd. Wildproject, 2016.
185. 위의 2-2절을 보라.
186. 특히 브뤼노 라투르의 사물들의 의회와 윌 킴리카(Will Kymlicka)와 수 도날드슨(Sue Donaldson)의 『주폴리스(Zoopolis : A Political Theory of Animal Rights, 2013, Oxford University Press)』(박창희 옮김, 2024, 프레스탁)가 거론되고 있다(B. Morizot, 앞의 책, p. 33, 각주 17).
187. 같은 책.
188. "가면"으로서의 인격에 관해서는 O. Cayla, Y. Thomas, Du droit de ne pas naître..., 앞의 책, 특히 pp. 81-87, 그중에서도 p. 84(O. Cayla, 「Le droit de se plaindre. Analyse du cas (et de l'anti-cas) Perruche」)와 pp. 124-135(Y. Thomas, 「Le sujet concret et sa personne. Essai d'histoire juridique rétrospective」)를 보라.
189. B. Morizot, 앞의 책, p. 92.
190. 같은 책, p. 107.
191. 같은 책, p. 33, 각주 17.
192. 같은 책.
193. 프랑스 민법전에 신설된 제515-14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동물은 감각을 부여받은 생명체다. 동물을 보호하는 법률들의 유보 하에, 동물은 재산의 규율체계에 따른다."(2015년 2월 16일 법률 제2015-177호로 신설된 조문)
194. B. Morizot, 앞의 책, p. 108, 각주 86의 피에르 샤르보니에(Pierre Charbonnier)의 말을 다시 취한 것이다.
195. 같은 책, pp. 122-123.
196. D. Gutmann, Droit international privé, 6e éd., Dalloz, 2009, pp. 1-2. "모든 국제 관계는 (...) 선택의 문제를 제기한다. 당면한 문제 해결을 어느 나라의 법률에 맡겨야 하는가? 이 물음이 법률충돌 앞에서 제기된다. 어느 나라 법원이 이런저런 쟁송을 심리할 관할권을 갖는가? 외국에서 선고된 판결이 효력을 얻으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가? 이 물음들은 관할충돌에 속한다. 이처럼 국제사법의 핵심은 동일한 법적 상황을 규율하겠다는 여러 법률 또는 여러 법원의 경합하는 주장들 사이의 충돌을 판가름하는 규칙을 제공한다는 소명에 있다."
197. 국제사법에서 외국적 요소란, 둘 이상의 국내 법체계를 접촉시켜 법률충돌 및/또는 관할충돌의 해결을 요구하는 사법적 상황의 요소를 말한다(Lexique des termes juridiques, 앞의 책).
198. 동물들의 시민권에 관해서는 W. Kymlicka, S. Donaldson, Zoopolis. Une théorie politique des droits des animaux, éd. d'origine 2011, traduit de l'anglais par P. Madelin, relu par H.-S. Afeissa, Alma éd., 2016, pp. 79-104를 보라.
199. P. Wohlleben, La vie secrète des arbres. Ce qu'ils ressentent. Comment ils communiquent, éd. d'origine 2015, traduit de l'allemand par Corinne Tresca, les Arènes, 2017(『나무 수업』,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2016, 위즈덤하우스)을 보라.
200. 프랑스 환경법전 제L.412-4조 이하를 보라.
201. 법전통이라는 개념에 관해서는 P. Glenn, Legal Traditions of the World, 5e éd., Presses de l'Université d'Oxford, 2014를 보라.
202. 바티스트 모리조가 제시한 예들 외에, 장 루슈(Jean Rouch)의 영화 <사자 사냥(La chasse au lion à l'arc)>(1958)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자 사냥은 사자들의 지향성과 주체성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인정,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에 맺어진 일종의 약조에 기초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 산악 지대의 한 마을 주민들이 여름철에 곰들에게 과일을 가져다주던 관습을 잃어버린 탓에, 이제는 곰들이 마을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 먹이를 찾으러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03. 바구미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면, 바티스트 모리조(앞의 책, p. 89)가 다음과 같이 쓸 때, 그의 태도는 우리가 보기에 매우 낙관적이다. "가장 낙인찍히고, 가장 미움받고,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며, 가장 관리하기 어렵고, 영양 피라미드(pyramide trophique)에서 가장 명확한 경쟁자와 함께 거주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도 함께 거주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과의 공동거주 문제 가운데 가장 만만찮은 것은 명백히 늑대가 아니라 모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기는—치명적 질병들의 매개체로서—인간에게 가장 큰 동물 위험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인간과 모기 사이의 영역 배분이 얼마나 더 까다로운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이 어려움들에 관해서는 특히 S. Dupé, Séparer les moustiques des humains à La Réunion. Co-production d'un nouvel ordre socio-naturel en contexte post-colonial, Thèse d'anthropologie, université de La Réunion - 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 2015를 보라). 모기는 늑대와 달리, 포유류라는 조건을 우리와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화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더 닫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4. Jean Réal, Bêtes et juges, Buchet Chastel, 2006, p. 59, 다른 예들로는 pp. 71-72를 보라. 같은 생-쥘리앵 마을에서 동일한 곤충들을 상대로 열렸고 같은 평결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1587년의 재판에 관해서는 L. Ménabréa, De l'origine, de la forme et de l'esprit des jugements rendus au Moyen Âge contre les animaux, éd. Puthod, 1846, pp. 7-24, 「Relation d'un procès intenté à des insectes」를 보라. 다른 예들로는 pp. 90-93, pp. 99-112도 보라. 유럽뿐 아니라 아메리카(캐나다, 브라질, 페루)의 곤충 재판 사례들로는 É. Agnel, Curiosités judiciaires et historiques du Moyen Age. Procès contre les animaux, éd. J.-B. Dumoulin, 1858을 참고하라.
205. Jean Réal, Bêtes et juges, 앞의 책, p. 60. 곤충들에게 부지를 내어주거나 양도한 사례들에 관해서는 D. Chauvet, La personnalité juridique des animaux jugés au Moyen Age (13-16 siècles), L'Harmattan, 2012, pp. 60-65도 보라.
206. 같은 책, pp. 94-96. "짐승들을 상대로 제기된 교회재판들의 목록을 훑어보면, [소송] 절차 중 압도적 다수가 마녀사냥의 바로 그 시기, 곧 1470년에서 1620년 사이에 진행되었음을 알게 된다 (...). 이 재판들은 그토록 특별한 시대에 존재 이유를 두고 있었다. 이 재판들은 로마의 권위 회복과 정신의 재장악에 일조했다.", "마녀들을 사냥함으로써 종교재판소는 경쟁자를 뿌리 뽑았고, 교회재판소(Officialités)는 메뚜기나 애벌레를 공격함으로써 교회의 힘을 증명하는 동시에, 미신에 사로잡힌 군중에게 도움을 자청했다. 한쪽에서는 '보호자 마녀'를 불태웠고, 다른 쪽에서는 동일한 보호를 단지 재정비한 의례에 따라 제공하였을 뿐이었다. 해충에 대한 판결들은 경쟁과 대체 행위를 동시에 드러낸다." 마녀의 화형과 해충의 단죄 사이의 "연관, 또는 적어도 [그 연관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제기될 수 있다." 동물재판과 마녀사냥의 연관에 관해서는 L. Litzenburger, 「Les procès d'animaux en Lorraine (14-18e siècles)」, Criminocorpus, Varia, 20 décembre 2011; L. Ménabréa, 앞의 책, p. 62 이하, 특히 pp. 80-81; Catherine Chêne, Juger les vers. Exorcismes et procès d'animaux dans le diocèse de Lausanne (15-16 s.), Cahiers Lausannois d'histoire médiévale, 1995, p. 17도 보라. 마지막 연구의 주요 기여는, 저자 자신에 따르면, 이 재판들이 동물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 전체가 전개된 장소였음을 보여준 데 있다. 그 성찰은 특히 인간의 이성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자연환경을 제 뜻대로 처분할 인간의 권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우월성을 앞세우는 것을 특징으로 했다.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듯, 이 성찰은 "17세기와 그 이후 세기들에서 지배적이 될 사유 방식을 예고하였으며, 그 사유 방식은 특히 자연에 대한 순수하게 공리주의적인 시각으로 표현되었다 (...)"(앞의 책, p. 19). 자연을 보는 시각들 간 경합에 관해서는 pp. 114-117도 보라.
207. 생물다양성, 자연, 풍경의 재정복을 위한 2016년 8월 8일 법률 제2016-1087호를 참조하라.
208. Y. Thomas, 「Res, chose et patrimoine...」, 앞의 글, pp. 418-419.
209. 2016년 8월 8일 법률과 함께, 프랑스 민법전 제3편에 "생태손해의 배상에 관하여(De la réparation du préjudice écologique)"라는 표제의 제4장이 신설되었다. 신설된 민법전 제1248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생태손해에 책임 있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배상할 의무를 진다."
210. 프랑스 환경법전에 신설된 제L.132-3조는, 부동산 소유자가 공공단체, 공공시설법인 또는 환경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사법상 법인과 계약을 체결하여, 자신과 그 재산의 후속 소유자들의 부담으로 원하는 물적 의무들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규정한다. 다만 그러한 의무들은 "생물다양성의 요소들 또는 생태적 기능들의 유지, 보전, 관리 또는 복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211. 생물다양성법과 함께, 보상은 예방이라는 지도 원리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의 반열에 오른다. 프랑스 환경법전에서 한 장, 곧 제1권 제6편 제3장이 아예 보상에 할애되어 있을 정도다. 이에 따라 같은 법전에 신설된 제L.163-1조 제I항은, 보상 조치란 "공사 또는 구조물 프로젝트의 실현, 활동의 수행, 또는 계획·기본계획·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계획 문서의 집행으로 인해 생물다양성에 가해지는, 예정되었거나 예견 가능한 침해를 보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치들이라고 규정한다.
212. 어쩌면 우리는 E. Conte(「Affectation, gestion, propriété. La construction des choses en droit médiéval」, in Aux origines des cultures juridiques européennes. Yan Thomas entre droit et sciences sociales, études réunies par P. Napoli, École française de Rome, 2013, pp. 73-86)와 A. Ingold(「Terres et eaux entre coutume, police et droit au 19e siècle. Solidarisme écologique ou solidarités matérielles ?」, Tracés, 2017(2))가 기술한 바와 같은, 대지와 맺는 유대에 관한 중세적 사유 방식과 다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 주
[1] 파기원은 프랑스 사법부에서 민사·형사 사건을 담당하는 일반법원 계통의 최고법원으로,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여 환송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대법원에 상응한다. 전원합의체(assemblée plénière)는 그중 중대하거나 법적 견해가 갈리는 사건을 다루는 최고 심판체이다.
[2] néo-fruits는 저자의 조어로, 원물에서 나오는 수익을 뜻하는 법률상 '과실(fruits)' 개념을 생태계 서비스와 같은 비물질적 편익으로 확장한 표현이다.
[3] libre parcours(자유로운 통행)는 본래 가축이 공유지나 타인의 토지를 자유로이 오가며 풀을 뜯을 수 있게 한 관습적 방목 통행권에서 온 표현이다. 저자는 이를 빌려 저작물의 아이디어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유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4] 공동 사물(choses communes)은 프랑스 민법 제714조가 규정하는 개념으로, 공기·흐르는 물·바다처럼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그 사용이 만인에게 공통된 사물을 가리킨다. 로마법의 만인공동물(res communes omnium)에서 유래한다.
[5]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우화’를 가리킨다. 그 우화에서 인간은 동굴에 갇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실재로 여기다가, 동굴 밖으로 나가 진리(이데아)에 이른다. 이는 어둠에서 빛으로 상승하는 이미지다. 스타호크는 이 구도를 뒤집어, 동굴(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올라가는 대신 어머니-대지의 뱃속(어둠·모태)으로 내려갈 것을 제안한다. 본문에 언급된 “어둠"의 복권, 그리고 뒤에 나오는 "아래로부터, 어둠으로부터, 대지로부터" 오는 권력은 이러한 전복을 염두에 둔 것이다.
[6] 라틴어 potere는 "할 수 있다"는 뜻의 동사로, 여기서 potestas와 potentia가 갈라져 나왔다. potestas는 남을 지배하는 공적·법적 권력, 특히 가부장(pater familias)이 가솔과 재산에 대해 갖는 지배권을 가리키며, 프랑스어 pouvoir(권력)의 어원이다. 반면 potentia는 안에서 솟아나는 힘·역량·잠재력을 가리키며, 프랑스어 puissance(역량)의 어원이다. 스타호크는 권력을 지배 권한이 아니라 내재적 역량으로 재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7] 이와 관련된 아래의 내용은 캐럴린 머천트의 대표작 『자연의 죽음: 여성, 생태학, 그리고 과학혁명(전규찬이〮윤숙전〮우경 옮김, 2005, 미토)』(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 1980)에서 기반한다. 머천트는 『자연의 죽음』에서 서구의 자연관이 16~17세기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살아 있는 유기체이자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대지'에서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죽은 기계'로 바뀌었다고 논한다. 대지를 살아 있는 어머니로 보는 관념은 그 몸(모태)을 파헤치는 채굴 같은 행위를 죄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하여 자연의 착취를 억제하는 규범으로 작용했으나, 대지가 죽은 물질로 재규정되면서 그 규범적 제약이 사라지고 무제한적 착취가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머천트는 이러한 자연의 대상화가 여성에 대한 지배와 맞물려 진행되었다고 보고, 자연 지배와 여성 지배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8] 에쿠멘(écoumène)은 오귀스탱 베르크의 핵심 개념으로,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ē, 사람이 거주하는 땅 전체)에서 왔다. 베르크는 이를 인간이 거주하며 의미를 부여한 대지, 곧 인간과 대지(환경)의 관계로서 성립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단어로 쓴다. 국내에는 『대지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 에쿠멘(인간적 거처)의 윤리적 원리(김주경 옮김, 2001, 미다스북스)』(Être humains sur la terre, 1996), 『외쿠메네(김웅권 옮김, 2007, 동문선)』(Écoumène: Introduction à l'étude des milieux humains, 2000)가 번역 출판되었다.
[9] 여기서 등장하는 소유 형태들은 하나의 소유 형태—구체제의 농민 공동체가 함께 보유하던 소유—를 각기 다른 단위의 측면에서 강조한 것이다. '공동체 소유(communautaire)'와 '마을 소유(villageoise)'는 소유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와 마을이라는 점을, '가계 소유(lignagère)'는 그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처분 대상이 아니라 가문·혈통(lignage)을 따라 대대로 전승된다는 점을 부각한다. 저자는 이를 '코뮌적(communale) 소유', 곧 하나 또는 여러 코뮌의 주민이 함께 향유하는 공유지(le communal, 이 절 제목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소유와 같은 것으로 본다.
[10] 여성학살(gynocide)은 그리스어 gynē(여성)에 '살해'를 뜻하는 -cide를 결합한 조어로, 제노사이드(génocide, 집단학살)에 빗대어 여성을 겨냥한 집단학살을 가리킨다.
[11] 『관습의 쓰임들(Les usages de la coutume)』은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톰슨이 1991년에 자신의 주요 논문들을 묶어 펴낸 Customs in Common(1991, Merlin Press)의 프랑스어 번역본이다. '공통의 관습'으로 번역할 수 있는 영어 원제 Customs in Common에는, 이 책의 주제인 '공유지(commons)와 공통권(common right)에 관한 관습'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인용된 「관습, 법 그리고 집합적 권리들」의 영어 원제는 'Custom, Law and Common Right'다. 이 책에서 '집합적 권리'로 옮긴 프랑스어 droits collectifs는 톰슨의 표현으로는 common right, 곧 공통권에 해당한다. 이는 공유지에 대해 공동체 성원들이 관습에 따라 누리던 입회·용익의 권리를 가리킨다.
[12] lex loci는 '특정 장소의 법'을 뜻하는 라틴어 법언이다. 어떤 법률관계에 그것이 자리한 장소의 법이 적용된다는 원칙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관습이 사람(인격)이 속한 장소에 매여 있음을 나타낸다.
[13] 공한지 방목권(vaine pâture)은 중세·구체제 프랑스의 관습적 사용권으로, 수확이 끝난 밭이나 휴경지·황무지처럼 작물이 없어 비어 있는 땅에서 공동체 성원이 함께 가축을 방목할 수 있게 한 권리다. 앞서 나온 자유로운 통행(libre parcours)과 짝을 이루는, 농민 공동체의 대표적 집합적 권리 가운데 하나다.
[14] 코뮌 공동재산(biens communaux)은 프랑스 민법 제542조가 정의하는 법적 범주로, 하나 또는 여러 코뮌의 주민이 그 소유권이나 수익에 대해 권리를 갖는 재산을 가리킨다. 코뮌 공유지(les communaux)는 그 재산 가운데 숲·목초지·공한지처럼 주민이 함께 쓰는 땅을 이른다. 공유재(bien commun)는 특정 코뮌에 속하는지와 무관하게 '공동으로 소유·이용되는 재화' 일반을 의미한다.
[15] 혁명기의 코뮌 당국(municipalité)은 1789년 말 이후 프랑스 전역의 각 코뮌에 설치된 자치 행정기관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주민 총회와 대비되는 코뮌 단위의 행정 조직을 뜻한다.
[16] 원물(元物, fonds)과 과실(果實, fruits)은 짝을 이루는 민법 개념이다. 원물은 과실을 낳는 본체를, 과실은 그 본체에서 나오는 산출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원물은 토지·숲·목초지 같은 코뮌 공유지 자체를, 과실은 그로부터 나오는 목재·목초·방목 수익 등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려는 바는 원물(땅 자체)은 공유재로 유지하면서 과실(그 산출물)을 나눌 수 있게 함으로써, 공동 소유와 개별 분배가 양립한다는 것이다.
[17] 공유지 입회권자(communier)는 코뮌 공유지에서 방목·채취 등의 이용 권리를 관습적으로 누리던 공동체 성원을 가리킨다. 입회권(入會權)은 한 지역에 사는 주민이 그 지방의 관례나 법규에 의하여 특정 산림, 원야(原野), 늪, 못 따위에서 공동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영국의 경우, 커머너(commoner)에 해당하며 공통권(common right)을 보유한 자다.
[18]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사이 볼로냐 대학에서는 법학자 이르네리우스(Irnerius)를 필두로 한 주석학파(glossators)를 중심으로 로마법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 여기서 편찬된 사례집은 여러 법적 사안들을 범례로 모아 법학 교육과 토론에 쓴 자료다. 본문에서 다루는 물음도 그러한 법학 논쟁의 한 사례였다.
[19] 리외디(lieu-dit)는 프랑스의 토지 대장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들판·숲·언덕·옛 방앗간 터 등 예부터 사람들에게 고유한 이름으로 불린 장소들을 가리킨다. 이 장소들의 지명은 관습으로 확립되었으며, 대개 그곳의 특징이나 거기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 등을 반영한다. 보통 프랑스의 행정 단위인 코뮌보다 규모가 작고, 공식적인 경계는 없다. 저자는 소유의 귀속처를 추상적인 법인격이 아니라 이처럼 이름이 붙은 구체적 장소로 삼자고 제안한다.
[20] 소유를 '자연주의적'으로 보는 관점은 사적·배타적 소유를 자연 질서나 인간 본성에서 비롯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비자연주의적' 관점은 사적·배타적 소유를 특정한 법적·역사적 구성물로 이해한다. 이 관점은 이 책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적·거주적 소유처럼 다른 다양한 소유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 있으며, 여기서 자신의 논의가 다른 역사적, 현행적 제도들로 예증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1] 알멘덴은 알멘트(Allmend)의 복수형이다. 알멘트는 스위스와 독일어권 알프스 지역의 공유지 제도로, 목초지·숲·고산 방목지 등을 마을 공동체가 함께 소유하고 이용해온 것을 가리킨다. 공동체 구성원은 저마다 가축 방목이나 땔감 채취 등의 이용권을 누리되, 땅 자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다. 중세 이래 관습으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일부 남아 있다.
[22] 즈마아(jmâa)는 아랍어, 베르베르어로 모임을 뜻한다.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사회의 전통적인 자치 단위, 주로 마을 공동체 회의를 가리킨다.
[23] 콘소르티움(consortium)은 고대 로마의 공동소유 제도다. 아버지가 죽은 뒤 상속인인 형제들이 유산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재산으로 함께 소유·운영하던 형태를 가리킨다. 재산이 개별 구성원에게 분할되지 않고 집단 전체에 귀속된다는 점에서, 로마법의 공동 소유 중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24] '선주민과 지역 공동체(peuples autochtones et communautés locales)'는 생물다양성협약(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 1992)과 나고야 의정서(Nagoya Protocol, 2010) 등에서 확립되어 국제 환경법에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다. 약칭 ILCs(Indigenous peoples and Local Communities)’로도 불린다. '선주민'이 식민 지배 이전이나 다른 집단이 이주해오기 전부터 그 땅에 살아온 집단을 가리킨다면, '지역 공동체'는 반드시 그러한 선주(先住)의 지위를 갖지는 않더라도 특정 지역에 뿌리내려 전통적·관습적으로 자연과 자원을 공동으로 이용·관리해온 공동체를 뜻한다. 이들에 관련한 법규는 주로 프랑스의 해외 영토들에 적용되는데, 저자는 '지역 공동체'라는 개념이 반드시 선주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 보호를 거꾸로 프랑스 본토의 주민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냐고 묻고 있다.
[25] 소(訴)의 이익은 소송을 제기하여 법원의 판단을 구할 만한 정당한 이익을 뜻하며, 이것이 없으면 본안 판단 없이 소가 각하된다. 스톤의 논문 제목에서 등장하는 원고적격(standing)은 이에 상응하는 영미법 개념으로, 누가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있는가를 가리킨다.
[26] 능동시민(citoyens actifs)과 수동시민(citoyens passifs)의 구별은 시에예스가 1789년 7월 『헌법 서설』에서 제안한 것으로, 인신과 재산의 보호 같은 시민적 권리는 모두가 누리되 공권력 형성에 참여하는 정치적 권리는 능동시민에게만 속한다는 구별이다. 제헌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1789년 12월 법령과 1791년 헌법에서 능동시민의 요건(만 25세 이상, 사흘치 노동임금에 상당하는 직접세 납부 등)을 정했고, 요건을 갖추지 못한 여성, 하인, 빈민 등은 선거권 없는 수동시민에 머물렀다. 이 구별은 로베스피에르 등의 비판을 받았고 1792년 8월 10일 봉기 이후 폐지되었다.
[27] 거래 밖의 사물(choses hors commerce)은 로마법의 res extra commercium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매매나 양도 등 법적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물을 가리킨다. 신에게 봉헌된 사물이나 공공물이 고전적인 예이고, 현대 프랑스법에서는 인체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물은 권리주체로 인격화되지 않고도 거래 불가능성이라는 지위 자체에 의해 보호된다.
[28] 근대화의 전선(front de modernisation)은 브뤼노 라투르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es: Essai d'anthropologie symétrique, 1991)』(홍철기 옮김, 2009, 갈무리)에서 쓴 표현으로, 근대화가 전통과 자연을 뒤로 밀어내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는 근대인의 자기 이해를 가리킨다.
[29] 여기서 행동학(éthologie)은 동물의 행동과 습성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동물행동학이라고도 한다.
[30] 국제사법의 영역에서 법률충돌(conflits de lois)은 외국적 요소가 있는 법률관계에 여러 나라의 법이 경합할 때 어느 나라의 법을 준거법으로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다. 관할충돌(conflits de juridictions)은 어느 나라의 법원이 그 사건을 재판할 권한을 갖는가의 문제로, 외국 법원 판결의 승인과 집행 문제까지 포괄한다.
[31] 외국적 요소(élément d'extranéité)는 사건 당사자의 국적이나 주소, 목적물의 소재지, 행위지, 사실발생지 등 법률관계를 이루는 요소의 일부가 사건이 벌어진 법적 관할권 밖과 관련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국제사법은 외국적 요소가 있는 법률관계에만 개입한다.
[32] 여기서 지향성(intentionnalité)은 의도와 목적을 품고 행위하는 능력으로, 의식·주체성과 함께 존재의 내면성(intériorité)을 이루는 요소로 꼽힌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에 따르면, 애니미즘의 존재론은 인간이 자신의 것과 동일한 내면성을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비인간 존재들에게도 귀속시킨다(P. Descola, Par-delà nature et culture, Gallimard, 2005를 참고하라).
[33] 인정(reconnaissance)은 지식(connaissance)에 접두사 re-가 붙은 단어인데,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저자는 어근의 연관성을 살려, 언어 유희를 시도한다. 그를 통해 동물들의 법과 동물들 스스로 주었을 권리에 대한 지식에 이르지 못한 채, 인간이 일방적으로 권리를 인정해 주는 데 그친 중세 재판의 한계를 짚고 있다.
[34] 화해(transaction)는 당사자들이 서로 양보하여 이미 발생한 분쟁을 끝내거나 장래의 분쟁을 예방하는 계약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다. 그런 점에서 화해는 승소와 패소가 갈리는 판결과 대비된다.
[35] 재정복(reconquête)은 빼앗기거나 잃은 것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종종 회복을 뜻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훼손된 생물다양성과 자연을 회복한다는 2016년 8월 8일 법률의 취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36] 일반적으로 물적 의무(obligation réelle)는 특정인이 아니라 사물에 부착되어 그 사물의 소유자가 누구든 그를 구속하며, 사물이 양도되면 새 소유자에게 승계되는 의무를 말한다. 사람 간의 관계에 부과되는 대인적 의무(obligation personnelle)와 대비된다. ‘환경 물적 의무’는 환경에 대해 물적 의무를 지는 걸 가리키는 프랑스 환경법의 법률 용어다. 이에 관해서는 각주 210번을 참고하라.

'인-무브 Translation > In Moving Transla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브뤼노 라투르, 고분고분하지 않은 주체들 (0) | 2026.08.18 |
|---|---|
|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인류학적 성찰: 비교 방법서설 (1) | 2026.08.16 |
| [르 코르뷔지에와 소련] 르 코르뷔지에, 『빛나는 도시』 中 "개인의 자유", "볼셰... 혹은 '크게'의 개념", "모스크바" (1) | 2026.07.11 |
| 사라 바눅셈, <대지를 소유한다는 것> 2장 (0) | 2026.07.07 |
| 네트워크에서 땅으로: 하나의 여정을 위한 이정표들 - 이자벨 스탱게르스 (0) | 2026.07.05 |
| 사라 바눅셈, <대지를 소유한다는 것> 1장 (0) | 2026.06.28 |
| 라스트코 모치닉, 이해와 호명 (0) | 2026.06.23 |
| 마니글리에, 사물의 질서 (1) | 2026.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