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무브 Translation/트랜스레이팅 페미니즘

리디야 세이풀리나, <타냐>(1)

by 인-무브 2026. 8. 9.

타냐

 

리디야 세이풀리나

번역: 장은재

 

소비에트 초기(1920-1930년대) 여성과 젠더 문제를 다룬 짧은 소설들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타냐»(1934)는 소비에트 시기 러시아의 작가 리디야 세이풀리나(Л. Н. Сейфуллина)가 쓴 단편소설로, 소비에트 사회에서 모범적으로 자라난 소녀 '타냐'의 내적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날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I. I. 마슈코프, <호른을 든 여성 소년단원>, 1933년

 

1

 

타냐는 양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양아버지와의 말다툼은 늘 타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어린아이답지 않은 슬픔을 남기곤 했다. 오늘도 그들은 언제나처럼 이른 아침에 둘이서 함께 차를 마셨다.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는 침울한 모습으로 식탁에 앉았다. 타냐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 그녀는 즐거운 기분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음식을 먹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종알거리면서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과 오늘 아침에 가졌던 생각들에 대해 횡설수설 이야기했다. 

레닌은 맑시즘의 창시자예요.”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가 타냐의 말을 끊었다.

보통 사람들은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한단다. 그런데 너는 어떠니?”

그가 타냐의 말을 이보다 무례하게 끊은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그의 어조에서 유독 노골적인 무시를 느꼈다. 아직 덜 자란, 독립적이지 못한 자신을 향한 무시 말이다. 그녀의 마음이 모욕감으로 가득 찼다. 타냐는 거만하게, 그러나 불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언제나 스스로 확실된 것만 말해요.”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는 화가 나서 물잔을 옆으로 치우더니, 일어나면서 의자를 넘어뜨렸다. 

“'확실된'이 아니라 '확실한'이겠지. 너에게는 확신이랄 것도 없을 거야. 아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 네가 도통 어느 나라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그는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타냐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등받이에 기댄 채 머리를 젖혔다. 타냐는 피오네르카[1]인데, 어떻게 그녀에게 확신이 없겠는가? 아버지 역시 공산당원이니, 만일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 역시도 화가 날 것이다!

학교로 향하는 도중에 타냐는 늘 다니던 길도, 사람도 분간하지 못했다. 다리를 움직이고, 눈을 떠 앞을 보고, 익숙한 습관에 따라 전차와 마차, 자동차를 피해 다녔지만 머릿속은 온통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타냐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만약 어른들이 계속 그렇게 대한다면, 결국에는 죽는 방법도 있을 거야 뭔가를 삼키고 확 죽어버리는 거지. 아냐, 그냥 우연히 죽는 게 낫겠어. 만약에 내가 스스로 죽기를 택한다면, 그건 자살을 한다는 의미니까 사람들은 나를 보고 신념이 없다고 할 거야. 예세닌주의자인 여자애가 고통 속에 죽었다 하겠지… '나는 그 정도로 술고래는 아니라네. 널 보지도 못한 채 죽을 정도의 술고래는 아니라네.'[2] 타냐가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목이 메어왔고,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볼을 적셨다. 장갑으로 눈물을 닦아내려 했지만, 눈물은 자꾸만 흘러내렸다.

“'어머니에게 부치는 편지'는 퇴폐적이지 인정할 만한 시는 아니야. 그래도 꽤 감동적이야. 이런 부분을 보면 말이지. '어둠 속에서는 자주 똑같은 걸 보게 된다네…' 그래, 죽어야겠어. 그럼 사람들이 슬퍼할 거야. 평범하게 죽었다고 상상해보자. 이를 테면 성홍열 같은 걸로 아빠는 내 묘지 옆에 서 있어 아냐, 만약 평범하게 죽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진 않을 거야. 모스크바를 지키다 죽어야겠다 모스크바가 습격당한 거지…”

타냐의 눈물이 마르고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소련을 위해 용감히 죽을 수 있는 다양한 경우를 생각하며, 상상 속에서 그것들을 경험했다. 타냐의 눈앞에 성대한 장례식의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심지어 지도자들도 의장병들을 데리고 내 무덤 옆에 서 있게 될 거야. 우리 학교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겠지. '그녀는 우리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요.'“

 그러나 사람들이 무덤을 모두 떠난 후 자신의 유해가 담긴 유골함이 혼자 남게 될 것을 떠올리자, 타냐는 무척이나 살고 싶어졌다.

이념적 이유로 고통을 받을 순 있겠지만,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안돼. 부상 정도는 괜찮지만, 죽음은 안돼. 상상해보자, 나는 감옥에 있는 거야, 자본주의 국가의 감옥에. 그래, 나는 미국에서 선전 활동을 하고 있어 그렇지, 탈옥을 한다면 무척이나 용감해보일 거야…”

타냐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상상 속에서 수많은 멋진 영웅적 삶을 살아낸 뒤였다. 이 삶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닮아있었다. 각각의 삶은 타냐의 세계를 공고하게 만들어주는 승리자의 수난으로 수렴되었다. 그녀의 세계는 명확했다. 그 세계는 뚜렷하게 갈리는 두 진영으로 완전히 나뉘어 있었다. 우리 편이거나, 남의 편이거나. 우리 편은 타냐가 함께 자라난 것들이었다. 남의 편은 타냐라는 개인의 세계에서는 아직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우리 편에 대한 공공연한 적을 가리켰다. 즉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자들, 소련의 기생충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오래된 비극들처럼 그녀에게 우리 편은 그 어떤 결함도 없이 언제나 옳은 것이었고, ()은 빛 한 줄기 없이 캄캄한 거짓 속에 있는 잔인한 것이었다. 타냐가 상상 속에서 경험한 사랑과 증오는 진실된 것이었다. 사랑의 승리는 그녀의 영혼을 환희로 채웠고, 그 환희가 뿜어내는 빛들이 현재 그녀가 존재하고 있는 일상적 세계 위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빛들은 세계를 행복하고 선한 것으로 만들었다. 가령 킴 같은 경우가 있다. 그는 도통 규칙을 지키지 않는 말썽쟁이에다 불량배인데, 타냐는 자신이 미국의 감옥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 킴이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그는 진정한 볼셰비키의 자기비판적 태도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동지, 내가 타냐 루슬로바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소…’

그래서 오늘 타냐는 그에게 다가가 매력적인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을 걸었지만, 킴은 대화를 거부했다. 

, 절대로 나를 좋아하지 마. 나는 더 예쁜 애가 좋아!”

타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나쁜 말을 뱉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저 복수심에 차 이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뼈저리게 후회할 거야. 아주 뼈저리게!’

타냐는 이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얌전히 하루를 보냈고, 수업도 성실히 들었다. 그러나 하루가 끝날 무렵 다시 그녀의 기분이 나빠졌다. 정말이지 그런 불쾌감은 지금껏 없었다. 모두들 타냐가 옳은 대답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학교에는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가 방문했었다. 그녀는 건물 입구에서 타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고, 헤어지면서 악수를 청하며 손을 뻗었다. 타냐는 응당 해야 할 대답을 했다.

우리 조직에서는 악수를 하지 않습니다.”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의 얼굴에 밝고 선한 웃음이 번졌지만,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타냐는 그렇게 느꼈다. 자신의 대답이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것이다. 타냐는 생각했다.

손을 잡았어야 했어. 아첨의 의미가 아니라, 존중의 의미에서. 아니지, 그럴 필요 없지.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는 우리 조직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이해해주실 거야.”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옳은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할수록, 타냐의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냐는 이고르 세레브랴코프에게 조용히 말했다. 

난 벌써 12살인데, 아직도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못 정했어. 내가 뭐가 되면 좋을 것 같니?”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는 파일럿이나 선원이 될 거야. 바다나 하늘, 어디든 좋아!”

나는 아직 꾸준히 하고 싶은 게 없어. 작년에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어. 무척 매력적이잖아! 그리고 나선 깨달았지.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을 하는 직업이 아니야. 배우들에게는 카메라 앞이니 뒤니 하면서, 여기저기서 속임수가 벌어지잖아. 그리고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하기 싫은 직업들이 너무 많아. 예를 들어 치과 의사 같은 거. 말할 필요도 없어. 한 평생 남의 냄새나는 입 속을 들여다 봐야 하잖아!”

맞아, 그건 즐겁지 않아. 이가 아프면 사람들은 울부짖잖아. 나도 한번 그렇게 비명을 지른 적이 있는데, 그러자 치과의사가 도망갔어.”

물론 치과 의사든 다른 의사든, 의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큰 도움을 주지. 그렇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위할 줄 알아야 해. 이고르, 나는 말이지, 광산기술자가 될래.”

광부 말이야? 그렇게 해! 난 찬성이야.”

그렇지만 아직 고민이 돼.”

너는 작곡가도 되고 싶어 했잖아.”

그건 안돼! 우리 엄마가 작곡가인걸…”

, 보아하니 너희 어머니는 올바른 견해를 갖고 계신 것 같던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연히 엄마는 우리 사람이지. 비록 당원은 아니시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늘 우울해 하셔. . 가까운 사람들과 있을 때도 절대 웃지 않으셔. 아냐, 난 엄마를 사랑해. 그렇지만 엄마와 사는 건, 고맙지만 사양하고 싶어. 결혼을 세 번이나 하다니, 퍽이나 좋은 생각이지 말이야.”

벌써 세 번째 결혼이셔?”

당연하지! 첫번째 남편은 내 아버지야. 엄마가 그 분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버렸고, 그 후에 나를 엄마 쪽 호적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나는 그 분을 몰라. 두 번째 남편이 내 현재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 쪽에 남겠다고 한 것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 하고 계셔. 엄마가 집을 떠날 때 내가 떠나지 않겠다고 소리치며 울자, 아버지와 소냐는 나를 입양하기로 했지. 그래서 지금 내 성이 루스노바인 거야. 엄마 성이 발크인 것과 다르게 말이야. 그렇지만 아버지와 나는 가끔 다툴 때도 있어.”

타냐는 깊게 한숨을 쉬더니,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침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마친 후, 그녀는 이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고르는 생기를 띠며 타냐의 말을 받았다. 

어른들은 놀라울 정도로 말꼬리 잡는 걸 좋아해. 우리가 조금 당황해서 말을 불분명하게 하면, 마구 혼내려 드는 거야. 한번은 내가 캠프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나에게 호통을 치신 적이 있어. 나는 시골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돌아온 참이었어. 래서 부모님께 이렇게 보고드렸지. '저는 콜호즈[3]를 세 개 조직하고 왔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네가 조직을 했다고?' 그러더니 나를 혼내기 시작했어.”

이고르,  «아버지와 아들»[4] 읽어봤어?”

누구 작품이지? , , 그거, 그 사람 작품 아직 안 읽어봤어.”

나도 아직 안 읽어봤어. 왠지 모르겠지만 소냐가 그걸 자세히 읽어보라고 조언하더라고.”

아마 소냐 본인이 그 책을 읽은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겠지. 너희 양부모님이 그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읽으라고 하신 걸 거야.”

거기엔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 같아. 바자로프는 마르크스주의자인데, 그의 부모님은 반대하지. 나중에 부모님은 그의 무덤 앞에서 울게 돼.”

부모님은 무덤 같은 곳이 아니더라도 슬퍼할 분들이야. 특히 어머니들 말이야. 있지, «전쟁과 평화»를 한번 읽어봐. 문학 작품이야. 나는 여름에 읽었어. 약간 길긴 하지만, 읽다 보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져. 그러다 보면 진이 빠져. 좀 힘들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다 읽었어. 재밌어.”

이고르, 나는 가끔 몇몇 페이지들은 건너뛰면서 읽어.”

이고르는 머리 위에 놓인 모자를 정리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도 별로 안 중요한 부분은 빨리 지나가긴 하지만, 대부분은 읽어. 그러면 안돼. 나는 내용을 건너뛰지 않아. 어쨌든 잘 가.”

그런데 이고르, 나에게 수학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저녁 무렵에 너희 집에 잠시 들를게. 절대 걱정하지 마.”

이고르가 길을 꺾어 갔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불빛은 선명했고, 마치 저물어가는 오늘 하루가 어떻게 끝나가는지 살피러 순찰을 나온 것만 같았다. 빛과 어둠이 기묘하게 섞인 공기는 위태로워 보였다. 사람들과 온갖 짐을 실은 자동차들의 거친 숨소리, 늘 갑작스럽게 울리는 전차들의 히스테릭한 벨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차의 귀를 째는 듯한 한숨, 공장의 사이렌 소리, 그것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약하지만 항상 도처에 깔려있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이 섞인 대도시의 소음이 힘 센 괴물의 겁에 질린 아우성처럼 저 멀리로부터 공명하며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이 저물어가는 시간 속 도시의 한가운데에서는 오직 어린 아이들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연인들만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회상에 사로잡혀 다른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계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저마다에게 부여된 운명의 윤곽이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타냐는 자신이 모두에게 잊힌 채 지쳐버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구부정한 자세로 발을 끌며 천천히 길을 걸어갔다. 지붕들 위에는 눈이 흉하게 쌓여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타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냐>(2)에서 계속됩니다)

 


 

원문 출처: Сейфуллина Л.Н. Таня // Собр. соч.: в 3 т. Т. 4. М.: Художествен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69. С. 26–45.

그림 출처: https://www.stena.ee/blog/pionerki-sssr-v-kino-i-zhivopisi



[1] 소련 공산당의 여성 소년단원.

[2] 러시아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 어머니에게 부치는 편지’(Письмо матери)(1924)의 한 구절. 

[3] 소련의 집단 농장.

[4]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장편소설(1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