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 만도, 공장 그리고 죽음통치
– 지금 왜 우리는 라인보우를 읽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권범철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지난 7월 22일 “글로벌 SDV선도기업” 에이치엘(HL)만도(주) 평택공장에서 20대 하청노동자 김승모가 사망했다. 자동차 제동장치를 생산하는 설비(MCT)를 정비하던 중 발생한 사고였다. 당시 설비에는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작업지휘자도 없었으며, 2인1조 작업도 지켜지지 않았고, 기계 내부에서 누군가 작업 중임을 알리는 작업표시줄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원청 직원이 기계 가동 버튼을 눌렀고 그 안에서 작업 중이던 김승모는 기계에 끼어 사망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러한 사고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간단한 조치로 막을 수 있었던 이런 비극적인 사고는 왜 반복되는가? 이러한 공장은 대체 어떤 곳인가?
생산과 재생산이 분리되고 전자가 우위를 확립하던 시기에, 다시 말해 경제가 살림살이(oikos)를 넘어 추상적 보편이 되던 시기에 공장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이행이 아니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라인보우는 18세기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노동자-빈자를 연구한 『목매달린 자들의 런던』에서 작업장 노동자들의 힘이 어떻게 ‘공장’의 출현을 저지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화폐를 통한 거래가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임금도 잘 지급되지 않던 시기에 노동자-빈자는 작업장의 생산 재료를 전유하며 생계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시골의 관습, 특히 공통권(common rights)과 유사했다. 그것은 관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투쟁에 의해 늘 창조되는 과정이었고, 그들의 생계를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노동자들은 생산 재료를 취해서 팔거나 물물교환하여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높였다. 이러한 ‘취하기’는 노동 과정에 내재되어 있었고, 특유의 작업 환경 속에서 일어난 자기보상 체계였다. 이는 노동자들의 ‘취하기’(관습적 전유)를 단순히 ‘고용주의 물품을 허가 없이 훔치는 행위’로 정의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누가 생산 과정 중에 있는 물품을 소유하는지, 누가 그것의 이용을 허가하는지는 지금 우리에게 뻔한 문제로 여겨지는 것과는 달리, 늘 분쟁 중에 있는, 세력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였다.
교수형은 이렇게 관습적 전유를 실천하는 이들에게 ‘사유재산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학습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 대담하게 혹은 용감하게 또는 무죄를 주장하며 숨을 거둔 덕분에 공개 교수형은 런던 다중을 위압하거나 공포에 떨게하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즉 범죄화만으로는, 심지어 교수형조차도 관습적인 전유와 싸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협력 관계가 생산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범죄화만으로는 그들의 힘을 꺾을 수 없었다. 그들의 세력의 기반인 협력적 노동 관계 자체를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법적인 조치 외에 "자본의 지리적 이동, 생산양식의 재조직화, 노동의 기계화"라는 다른 해결책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기계화된 작업장으로서의 공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구축되었다. 그곳의 기계는 관습적 전유에 대응하고, 작업장의 통제권을 자본가의 손아귀에 몰아주며, 무엇보다 협력 관계에 토대를 둔 생산자들의 힘을 꺾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요컨대 공장은 “생산과 처벌의 원리가 통합될 수 있는 장소”였다. 처벌(교수형)만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생산의 ‘질서’ – 보편적 추상으로서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기초 – 는 생산과정 자체를 새롭게 조직하는 공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창조로 서서히 확립되었다. 달리 말하면 공장은 죽음통치의 원리를 새롭게 내면화한 장소였다. ‘산 노동에 대한 조직적인 살인’, 즉 사형(capital punishiment)은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억압’, 즉 자본의 처벌(punishment of capital)로, 하나의 생산원리로 ‘조직’되었다.
끼임 사고로 인한 사망은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억압’, 즉 자본의 처벌(학대)에 해당한다. 정해진 기일에 계획한 물량을 생산해야만 하는 생산의 ‘질서’에서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상품 혹은 생산과정 그 자체다. 그 ‘질서’ 확립을 위해 (그리고 값싸게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은 노동력과 생명을 위계화하고 평가절하한다. 외주화된 안전 업무를 맡은 하청업체 노동자는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 이들은 계속 기계에 끼여 다치고 죽지만, 생산은 계속된다. 노동자는 한낱 ‘방해물’로 함부로 다뤄진다. 이것이 하나의 생산원리로 조직된 자본의 처벌(학대)이다. 이는 ‘공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상명제 하에서 굳건하게 유지된다. 즉 자본의 처벌(학대)은 생산과정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공장은 생산과 처벌(학대)의 원리가 통합된 장소, 그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간단한 조치로 예방될 수 있는 사고로 계속 죽고 다치는 이유다.
따라서 자본의 처벌(학대)에 대한 사회적 개입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 노동에 대한 죽은 노동의 억압’은 ‘산 노동에 대한 조직적인 살인’(사형)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것이 노동자들이 계속 죽고 다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산 노동이 죽어나가는 공장이 보란듯이 다시 가동될 수 있는 것은 고용노동부를 비롯한 감독기관의 무책임과 ‘우리’의 무관심 덕분이며, 따라서 이는 ‘산 노동을 대상으로 사회적으로 조직된 살인’이라 할 수 있다. 라인보우가 18세기 런던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했던 용어, 죽음통치는 21세기 한국에서도 강고하다. 공장은 이제 “죽음을 생산하는 곳”이 되었다. 톰 드와이어가 이 말을 한 건 보팔, 체르노빌, 스리마일섬에서의 비극적인 사고 이후였지만, 산재사망이 끊이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독성 가스나 방사선 유출과 무관하게 그 말을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작업 과정 자체가 이미 죽음을 담보하며, 그러한 죽음을 통한 생산을 국가기관과 ‘사회’가 보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죽음통치의 공간으로서의 공장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 공간의 작동을 보증하는 기제에 우리도 연루되어 있으니.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고 무심할수록, 그 연루는 더 깊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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