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로부터의 테러
Terror from the Air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번역: 권범철(서교인문사회연구실)
*도서 정보: Peter Sloterdijk, Terror from the Air, Translated by Amy Patton and Steve Corcoran (Semiotext(e), 2009)
https://mitpress.mit.edu/9781584350729/terror-from-the-air/
Terror from the Air
According to Peter Sloterdijk, the twentieth century started on a specific day and place: April 22, 1915, at Ypres in West Flanders. That day, the German arm...
mitpress.mit.edu
긴장된 경계 태세로 숨이 가쁘고, 후텁지근한 밤공기의 답답함으로 숨이 막힌다 ...
― 헤르만 브로흐, 『베르길리우스의 죽음』[1]
1장 가스전 – 즉 대기테러리즘 모델
예술 분야에서 이룩한 비길 데 없는 성취를 제외하고, 20세기가 특이하고 비교 불가능한 특징을 통해 문명사에 도입한 것을 단 한 문장으로, 가능한 한 적은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 그 답은 세 가지 기준으로 제시될 것이다. 이 시대의 독창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을 고찰해야 한다. 테러리즘의 실천, 제품 디자인의 개념, 그리고 환경적 사유가 그것이다. 첫 번째로, 적과의 상호작용이 탈군사주의적 토대 위에 확립되었다. 두 번째로, 기능주의가 지각의 세계와 재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명과 지식의 현상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심층적으로 연결되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모두 “명시화”explication의 가속화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명백한 작동들의 근저에 놓인 배경적 소여所與들을 드러내며 포함하는 것the revealing-inclusion이다.
나아가, 이 세기가 객관적으로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확정하라고 한다면, 그 답은 정확히 어느 날로 제시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기준점들을 참조하면, 이 시대의 세 가지 핵심적 특징이 처음부터 하나의 공통된 원초적 장면 속에 함께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줄 수 있다. 20세기는 1915년 4월 22일, 하나의 스펙터클한 드러냄 속에서 밝아왔다. 이날 특별히 편성된 독일의 “가스 연대”가 염소 가스를 전투 수단으로 사용하여 이프르 돌출부 북부 지역의 프랑스-캐나다 군대를 상대로 최초의 대규모 작전을 감행하였다. 공격 수주 전부터 독일 병사들은 적에게 들키지 않은 채 이 전선 구역을 따라 수천 개의 가스 실린더를 은밀히 설치하여 독일 참호선을 따라 하나의 포대砲臺를 형성해 두었다. 정확히 오후 6시, 막스 페터슨 대령의 지휘 아래 이 새로운 연대의 공병들은 북북동풍이 부는 방향을 향해 염소로 가득 찬 대형 실린더(40kg) 1,600개와 소형 실린더(20kg) 4,130개를 개방하였다. 액화된 물질을 “방출”함으로써 약 150톤의 염소가 대기 중으로 분출되어, 폭 약 6킬로미터, 깊이 600~900미터에 달하는 가스 구름이 부풀어 올랐다.[2] 항공 사진 한 장이 이프르 전선 위로 피어오르는 최초의 독가스 전쟁 구름을 포착했다. 순풍이 이 구름을 초당2~3미터의 속도로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밀어붙였으며, 독성 농도는 약 0.5퍼센트로 보고되었다. 이는 장시간 노출 시 폐와 호흡기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기에 충분한 농도이다.
프랑스 장군 장-쥘 앙리 모르다크(1868~1943)는 당시 전선에서 5킬로미터 후방에 있었다. 오후 6시 20분을 막 넘긴 시각, 그는 참호에 배치된 제1티라이외르 연대의 한 장교로부터 야전 전화를 받았다. 독일군 참호에서 괴상한 황색 연기 구름이 솟아올라 프랑스 사단들 쪽으로 흘러오고 있다는 보고였다.[3] 모르다크는 처음에는 이 경보를 믿지 않았으나 여러 건의 추가 보고로 사실이 확인되자, 그와 부관들은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말을 타고 출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동행자들은 호흡 곤란, 격렬한 목의 따끔거림, 귀의 심한 울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들이 더 이상 나아가기를 거부하자, 모르다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가스가 퍼진 지역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그들은 곧 반대 방향으로 달려오는 병사들의 무리와 마주쳤다. 상의 단추는 풀어헤쳐져 있었고 무기는 내버려진 채였으며, 피를 토하고 물을 애원하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이미 땅바닥을 뒹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오후 7시가 되자 프랑스-캐나다 전선에 6킬로미터 폭의 돌파구가 열렸고, 독일군은 그 틈을 뚫고 진격하여 랑에마르크를 점령했다.[4] 공격 부대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갖춘 것이라고는 소다와 염소 결합 용액에 적신 거즈 패드뿐이었으며, 이를 코와 입 위에 대고 있었다. 모르다크는 이 공격에서 살아남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바로 그해에 자신의 전쟁 회고록을 출간했다.
작전의 군사적 성공은 결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이프르에서의 사건이 있고 불과 며칠 후,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독일 전투 가스 프로그램의 과학 총책임자이자 달렘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 연구소 소장이었던 화학 교수 프리츠 하버를 비공개로 접견하여 그에게 대위 계급을 수여하였다.[5] 당시 제기된 몇 안 되는 비판은, 새로운 방법의 효율성에 압도된 나머지 독일군이 4월 22일의 승리를 충분히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사상자 수에 관한 보고는 당시에도 지금도 크게 엇갈린다. 비공식 프랑스 측 자료는 가스 부상자 625명에 독가스로 사망한 자는 3명 이하라고 보고한 반면, 초기 독일 측 추정치는 중독자 1만 5,000명, 사망자 5,000명에 달하였으며, 이 수치는 추가 조사를 거치면서 실제로는 계속 하향 수정되었다. 이러한 불일치는 해석적 투쟁을 분명히 드러내며, 이 작전의 군사-기술적·도덕적 의미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명한다. 가장 심하게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한 곳에서 독가스 희생자를 대상으로 실시된 캐나다 측 부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폐를 적출하는 과정에서 거품이 이는 연한 황색 물질이 상당량 흘러나왔으며, 이는 명백히 단백질이 매우 풍부한 것이었다[독가스 노출로 인한 혈장 단백질 유출]... 뇌 표면의 정맥들은 심하게 막혀 있었고, 모든 소혈관들은 눈에 띄게 팽창해 있었다.”[6]
재앙적인 20세기가 “극단의 시대”로서 역사책에 기록될 채비를 하는 동안 — 그것의 개념들과 전선들이 점점 무력해지며 쇠락하는 가운데 — 그것의 세계사적 시나리오들은 성묘聖墓 해방을 촉구하던 중세 신학자들의 그것만큼이나 이미 빛바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로부터 점점 더 선명하게 출현한 하나의 기술적 모델이 있다. 그것은 적대자들 사이의 전투 속으로 환경environment을 도입하는 것이라 부를 수 있다.
포병대가 처음 등장한 이래로, 사수와 전쟁 지휘관의 직능은 적과 그의 방어 시설을 직접적인 사격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원거리 살상이라는 전사적 기예의 규칙에 따라 적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는 화기를 통해 적의 신체에 직접적인 지향intentio directa을 생성하고, 충분한 수의 정확한 명중으로 표적을 무력화해야 한다. 중세 후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 개전까지, 병사는 이러한 지향성을 불러일으키고 “함양”하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 동시에, 남성성 역시 자신의 무기나 손으로 인과적으로 직접적인 방식으로 적을 살상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로 코드화되었다. 상대방을 겨냥하는 행위는, 말하자면 결투를 탄도적 수단으로 연장한 것이었다. 거리를 둔 전투와 익명적인 소모전의 조건 아래서도, 일대일 살상 행위는 전前부르주아적인 개인적 용기와 가능한 영웅주의의 개념과 너무나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기에, 그 행위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지속되었다. 20세기에 군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이 여전히 “남자다운” 것이며 — 전시 조건 아래서는 — “정직한” 것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마주침의 위험과의 이러한 관련 덕분이다. 이것의 무기-기술적 현현이 바로 총검이 장착된 소총이다. 장거리 사격에 의한 (부르주아적인) 적의 제거가 어떤 이유로 실패할 경우, 이 무기는 근접 거리에서 적을 꿰뚫는 것으로의 (고귀하고 고대적인) 귀환 가능성을 시사한다.
20세기는 그 본질적 사유가 더 이상 신체가 아니라 적의 환경을 표적으로 삼는 데 있었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이것이 보다 명시적인 의미에서 테러리즘의 기본 사상이다. 셰익스피어는 샤일록의 대사를 통해 그 원리를 예언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대가 내가 살아가는 수단을 빼앗을 때/그대는 나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7] 그러한 수단들 중에서, 경제적 조건들을 제외하면, 오늘날 비판적 주목은 인간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환경적 조건들에 집중되고 있다. 적의 환경에 작용함으로써, 생명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들을 억압하는 이 새로운 과정들은 특수하게 근대적인 탈헤겔적 공포terror 개념의 윤곽을 산출한다.[8] 실로, 20세기의 테러는 자코뱅적 자의식이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자들의 시체를 밟고 지나갈 때의 “내가-원하기-때문에-나는-권리가-있다”는 태도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하였다. 또한 그것은 19세기 후반 3분의 1에 걸쳐 이루어진 아나키즘적·허무주의적 공격들과도 근본적인 차이를 지닌다. 그 공격들은 후기 귀족적·부르주아적 사회 질서의 전前혁명적 불안정화를 더 많이 겨냥한 것이었다.[9] 결국, 그것은 방법이나 목표의 측면에서, 과거 또는 미래 독재 체제들의 공포정치phobocratic 기법들과도 혼동될 수 없다. 그 기법들은 본질적으로 자국 인구를 복종시키기 위해 계산된 “의례와 공포”의 혼합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10] 우리 시대의 테러는 환경 이론을 경유하는 근대화된 말살의 지식의 출현에 있으며, 그 강점은 테러리스트로 하여금 희생자들 스스로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그 희생자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적의 신체를 더 이상 직접 타격으로 제거할 수 없다면, 공격자는 충분히 긴 시간 동안 적을 살 수 없는 환경 속에 직접 침잠시킴으로써 그의 지속적 존재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 결론은 적의 일차적·생태적으로 의존적인 생명 기능 — 호흡, 중추 신경 조절, 지속 가능한 온도 및 방사선 조건 — 에 대한 공격으로서의 근대적인 “화학전”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여기서 실제로 수반되는 것은 고전적 전쟁에서 테러리즘으로의 이행이다. 후자의 공준이 대등한 상대들 사이에서의 낡은 “검의 교차”를 폐기하는 것을 수반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테러는 정규 병력 간의 순진한 무력 교환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이러한 고전적 전투 형태들을 적의 생명의 환경적 조건들에 대한 공격으로 대체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전환을 추동하는 것은 힘에서 극도로 불평등한 상대들 간의 마주침의 출현이다. 우리는 이를 비국가적 전쟁과 무장 국가 병력 및 비국가 전투원 사이의 적대 행위라는 현재의 국면에서 목격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가스전 군사사史에서 기이한 점은, 그것을 통해 — 전선의 양측 모두에서 — 국가가 후원하는 형태의 환경 테러리즘이 법적으로 징집된 군대들 사이의 이른바 정규전에 통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지만, 적에 대한 작전에서, 그리고 더욱이 비전투원 민간인에 대해서 어떠한 종류의 독성 또는 고통 가중 무기의 사용도 분명히 금지한 1907년 헤이그 협약 제23조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다.[11] 1918년 독일은 약 7,000명 규모의 9개 이상의 가스 대대를 보유하였고, 연합군은 12,000명 이상의 13개 “화학 병력” 대대를 보유하였다. 전문가들이 “전쟁 속의 전쟁”을 말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표현은 절멸주의exterminism가 전통적인 전쟁의 폭력으로부터 풀려난 순간을 예고한다. 제1차 세계대전 병사들, 특히 직업 장교들의 수많은 진술들은 가스전이 전쟁의 타락이자 모든 관련자들에 대한 품위 훼손으로 여겨졌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의 법칙”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병사의 기록은 거의 없다.[12]
“환경”의 발견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이루어졌다. 양측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향해 발사된 총탄과 폭발물이 너무나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기에, 대기전atmospheric war의 문제가 긴박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적 해법은 가스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원리는 적이 자연스러운 호흡 반사의 희생자가 될 때까지 충분한 “전투 농도”의 유해한 구름 속에 충분히 긴 시간 — 실제로는 최소 몇 분 — 동안 에워싸는 것이었다. 이 독가스 구름은 엄밀한 물리적 의미에서의 가스로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없었고, 오히려 미세한 폭발을 통해 공기 중으로 방출되는 극도로 미세한 입자 먼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로부터 “제2의 포병”이라는 현상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병사들과 그들의 진지를 겨냥하는 대신, 적의 신체를 둘러싼 공기를 표적으로 삼음으로써 “타격”이라는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표적에 충분히 근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충분히 정확한 것으로, 나아가 작전적으로 숙달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게 되었다.[13] 이후의 발전 단계에서, 새로운 가스 포병의 연막 발생 탄약은 고전적 포병의 폭발 탄환과 결합되었다. 그 후 독가스 구름의 급속한 확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전투 지역 위에 어떻게 안정화시킬 것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열띤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효과들은 통상적으로 고도로 휘발성인 전쟁 먼지 입자들의 거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변형시키는 화학 첨가물을 통해 달성되었다. 이프르에서의 사건 이후 거의 하룻밤 사이에, 일종의 군사 기후학이 사실상 무無에서 솟아올랐다. 그것을 테러리즘이라는 시대적 현상Zeit-phenomenon으로 인식하는 것은 외려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독성 구름 연구는 20세기에 그것의 신분증을 제공한 최초의 과학이었다. 그러한 주장은 1915년 4월 22일 이전에는 사이비 학문으로 여겨졌겠지만, 그 이후로는 어떠한 “실제성의 존재론”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으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기후학 자체에서 독성 구름 연구, 즉 호흡 불가능한 공간의 이론의 위상이 여전히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기후 이론이 아직 자연과학의 후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 이론은 — 내가 보여주고자 시도할 것이지만 — 제1차 세계대전의 지식으로부터 출현한 최초의 새로운 인문과학이었다.[14]
군사용 호흡 장치(통칭: 아마포 방독면)의 번개 같은 발전은, 인간의 호흡이 전쟁의 사건들 속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떠맡게 된 상황에 병사들이 적응해야 했음을 보여준다. 머지않아 방독면은 프리츠 하버를 자신의 저명한 아버지로 발견할 것이었다. 군사사 관련 저작들에 따르면, 1916년 2월부터 6월까지 베르됭에서만 거의 550만 개의 방독면과 4,300개의 산소 호흡 장치(광업에서 처음 사용됨), 그리고 200만 리터의 산소가 야전 보급소에서 독일군에게 배포되었다.[15] 이 수치들은, 이 새로운 “생태화된” 전쟁, 즉 대기 환경 속에서 수행된 이 전투가 얼마나 적대적 당사자들의 호흡 “잠재력” 정복에 관한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상대방의 생물학적 취약성이 전투 속으로 계산되어 들어온 것이다. 방독면 개념의 급속한 대중화는, 공격의 표적이 된 자들이 공기 필터 뒤에 자신을 숨김으로써 즉각적인 환경, 즉 호흡 가능한 공기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떨쳐내려 했던 노력을 드러낸다. 이것은 공기 조절air conditioning의 원리를 향한 첫 걸음을 포함하였으며, 그것의 기본 아이디어는 규정된 부피의 공간을 주변 공기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공격 측면에서, 그러한 발전에 대항하는 길은 적의 방독 마스크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독소의 사용으로 공격을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1917년 여름, 독일 화학자들과 장교들은 “블라우크로이츠”(청십자) 또는 클라크 IClark I로 알려진 디페닐클로로아르신이라는 화학전 작용제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적의 호흡 장치에 침투할 수 있는 극도로 미세한 먼지의 부유 입자 물질로, 희생자들은 그것을 “마스크 파괴자”라 불렀다. 동시에, 서부 전선의 독일 가스 포병 부대들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겔프크로이츠”(황십자) 또는 황화 머스터드[16]라 불리는 혁명적인 새 가스 작용제를 도입했다. 이 물질은 극히 소량으로도 피부나 점막 접촉 시 유기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특히 실명과 파국적인 신경 기능 장애를 야기하였다. 서부 전선에서의 유명한 머스터드 가스, 즉 이페리트 피해자들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 상병이 있었다. 그는 1918년 10월 13일 밤, 베르빅 근처(라 몽타뉴) 이프르 남쪽 언덕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영국군 가스 공격 중 하나에 노출되었다. 히틀러는 회고록에서, 14일 아침이 되자 자신의 눈이 타오르는 석탄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진술한다. 11월 9일 독일의 항복 이후(그는 이 소식을 파제발크의 포메라니아 군병원에서 소문으로 접했다), 그는 머스터드 가스로 인한 실명의 재발을 겪었으며, 이 위기 상태에서 “정치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훗날 1944년 봄, 패배가 임박한 시점에 그는 슈페어에게 당시처럼 다시 실명하게 될까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가스 트라우마의 신경학적 흔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을 규정지은 요소들 중에서, 군사 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한 가지 특정한 사실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히틀러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전쟁 개념 속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노사이드 실천에 대한 자신의 구상 속에 가스에 대한 특유한 이해를 지니고 들어온 것이다.[17]
(1장 계속)
[1] Hermann Broch, Trans. Untermeyer, New York. 1972, p.109.
[2] 이 서술은 다음을 따른 것이다. Dieter Martinetz, Der Gas-Krieg 1914-1918. Entwicklung, Einsatz und Herstellung chemischer Kampfstoffe. Das Zusammenwirken von militärischer Führung, Wissenschaft und Industrie, Bonn: Bernard & Graefe, 1996. 지명이나 구체적인 시점 및 수량에 관한 사소한 차이는 Olivier Lepick의 논문, La grande guerre chimique: 1914-1918,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8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Jean-Jules Henry Mordacq, Le drame de l'Yser, Paris: Editions de Portiques, 1933, quoted in Rudolf Hanslian (ed.), Der chemische Krieg, 3rd Edition Berlin: Mittler, 1935, pp. 123-124.
[4] 다음을 참조하라. Martinetz, Der Gas-Krieg 1914-1918, p. 23.
[5] 전쟁 중,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 교수는 전쟁성(War Ministry)에서 “독가스 연구” 부서 또한 지휘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1933년, 바로 그해 여름 독일 지도부(Reichsführung)에 가스 무기의 재도입을 제안했다고 알려진 이후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 잠시 머문 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던 도중 1934년 1월 29일 바젤에서 사망했다. 그의 친척 여러 명은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하버의 죽음의 산물(Haber’s death product)”은 군사과학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있는데, 이는 독성 농도에 노출 시간을 곱한 값(CT 값)의 결과물이다. 거의 말할 필요도 없이, 하버는 1918년 이후 유사한 민간 업무를 맡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농업 분야의 “해충 방제”였다.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견한 공로로 그가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일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의 이름이 화학전 조직화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6] Martinetz, Der Gas-Krieg 1914-1918, p. 24.
[7] The Merchant of Venice, Act IV, Scene 1.
[8] 다음을 참조하라. G.W.F. Hegel, Phenomenology of Spirit, New York, 1979, p. 359. 헤겔에 따르면, 공포는 “실제적 자기의식의 개별적이고 절대적으로 단단한 경직성과 자기의지적 원자성”을 현실화한다. “따라서 보편적 자유의 유일한 작업이자 행위는 죽음이며, 그것은 또한 아무런 내적 의미나 내용도 갖지 않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부정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아의 텅 빈 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죽음 중에서 가장 차갑고 가장 하찮은 죽음이며, 양배추 한 포기를 자르거나 물 한 모금을 삼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ibid., p.360).
[9] 개인의 테러와 국가 테러리즘의 차이를 강조하는 서술은 다음을 보라. Albert Camus, L’homme révolté, Paris 1951, in The Rebel: An Essay on Man in Revolt, New York: Vintage, 1992, pp. 149-233.
[10] 다음을 참조하라. Joachim Fest, Hitler. Eine Biographie, Munich: Ullstein, 2000, p. 294. Published in English as: Hitler, Trans. Richard and Clara Winsron, Orlando, Austin, New York, San Diego, Toronto, London: Harcourt, 1974.
[11] 양측 모두 자신들이 전쟁법을 위반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도 독가스 사용에 대해 상대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주 최근까지도, 염소가스는 독이 아니라 자극제에 불과하며 (따라서 헤이그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하버 교수의 허위 논변의 흔적이 독일의 국가주의적 변론들 속에서 여전히 발견되곤 했다.
[12] 다음을 보라. Jörg Friedrich, Das Gesetz des Krieges: das deutsche Heer in Rußland 1941-1945. Der Prozeßgegen das Oberkommando der Wehrmacht, Munich: Piper, 1993.
[13] 이 효과는 폭발성 탄약의 대규모 투입에 의해 예견된 바 있다. 다음을 참조하라. Naill Ferguson, The Pity of War: Explaining World War I, New York: Basic Books, 2000, p. 308: “이제 포탄의 중량이 정확도의 부족을 보완해 줄 것으로 여겨졌다.”
[14] 19세기 초 객관적 구름학(nephology)의 출현에 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리처드 햄블린(Richard Hamblyn)의 저서를 보라. The Invention of Clouds: How an Amateur Meteorologist Forged the Language of the Skies, New York: Picador, 2001. 전쟁 프로파간다라는 현상을 토대로 인문과학이 산출한 가장 중요한 파생물들, 그리고 그것들이 전체주의적 대중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폐기되는 과정은 헤르만 브로흐의 집단 광기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 p. 97[영어본] 참조.
[15] 다음을 참조하라. Martinetz, Der Gas-Krieg 1914-1918, p. 93.
[16] 프리츠 하버는 이 물질을 프로젝트 담당 과학자들, 즉 로멜(Lommel) 박사(바이엘, 레버쿠젠)와 슈타인코프(Steinkopf) 교수(베를린-달렘 소재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전기화학 연구소, 전시에는 “프로이센 군사연구소”로 불렸다)의 이름을 따서 “로스트(Lost)”라고 명명했다. 이 가스 작용제는 그 냄새 때문에 “머스타드 가스”(mustard gas)라고도, 그 치명적 성질 때문에 “훈넨슈토프”(“훈족 물질”)라고도, 그리고 그것이 처음 사용된 지명을 따서 이페리트(Yperite)라고도 불렸다.
[17]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 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것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Günther Gellermann, Der Krieg, der nicht stattfand. Möglichkeiten, Überlegungen und Entscheidungen der deutschen Obersten Führung zur Verwendung chemischer Kampfstoffe im Zweiten Weltkrieg, Koblenz: Bernard & Graefe Verlag,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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