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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와 소련] <현대 건축>(1):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М. 긴즈부르크, 1926), "르 코르뷔지에가 긴즈부르크에게 보낸 편지와 긴즈부르크의 답신"(1930)

by 인-무브 2026. 9. 20.

 

<현대 건축Соврем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 (1):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 (M. 긴즈부르크, 1926),

"르 코르뷔지에가 긴즈부르크에게 보낸 편지와 긴즈부르크의 답신" (1930)

 

M. 긴즈부르크, 르 코르뷔지에

번역: 황유경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조정훈

 

 

옮긴이의 말
'르 코르뷔지에와 소련'을 주제로 르 코르뷔지에의 저작 및 관련 문헌을 번역,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현대 건축(Соврем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 소브레멘나야 아르히텍투라)>지에 실렸던 두 편의 글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소련 구축주의 건축가들의 핵심적인 단체, OSA(현대건축가동맹)의 계간지 역할을 했던 잡지 <현대 건축>은 1926년부터 1930년까지 5년에 걸쳐 간행되며 도시 건축, 주거, 산업 및 농촌 건축, 최신 건축 이론 등을 다루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를 비롯하여 당대 건축의 최첨단에 있는 여러 작품을 소련 사회에 소개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은 물론, 1928년 제6호와 1929년 제1호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편집위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두 편의 글은 각각 1926년과 1930년, 그러니까 <현대 건축>의 시작과 막바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현대 건축>의 책임 편집위원이자 편집장이었던 모이세이 긴즈부르크는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잡지를 구성했으며, 르 코르뷔지에에 관한 그의 생각은 5년 사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을까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그 시간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모이세이 긴즈부르크가 동시대 건축의 국제적인 상황과 소련 건축의 현실에 대해 남긴 논평,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은 해외 독자를 위한 독일어 요약본이 지면에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해당 요약본은 조정훈님께서 번역해주셨습니다. 기꺼이 번역을 맡아주신 조정훈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현대건축> 1926년 제1호, 1930년 제1-2호의 표지

 

 


 출처: 멘델존[1]의 책, <아메리카>[2]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

 

오늘날 전세계의 건축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빠른 시선으로 훑어보자. 그 첫 인상은 세계가 두 개의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절충주의эклектизм가 지배하고 있다. 이는 그 출발점을 모두 상실한 채 스스로를 완전히 소진하고, 유럽의 썩어가는 문화를 완벽하게 상징으로 매김하고 있는 절충주의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젊고 건강한 새싹이 힘차게 움트, 새로운 삶의 원천이 생겨나며,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을 손쉽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낼 수 있는 이정표들이 세워지고 있다. 국가와 민족마다 서로 다른 차이와 특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선은 실제로 존재한다. 전세계 현대 건축의 아방가르드가 벌이는 혁명적 탐색의 결과물에서 나타나는 여러 노선은 서로 긴밀하게 교차한다. 이들은 새로운 국제적 건축 언어를 제련하고 있다. 이는 국경과 장벽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친숙하며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다.

그러나 이 광경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이내 분명해지는 사실들이 있다. 공통의 흐름 속에 가지각색의 물줄기가 서로 합류하고 있으며, 다양한 국가와 민족이 밟아온 창조적 탐구의 길이 완벽하게 동일하진 않고, 전반적인 유사성 속에도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은 건축 언어가 표현되는 형태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 숨쉬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에서도 발견된다.

 

독일

유럽의 주요 국가들 가운데 독일은 유럽의 경직된 건축 언어를 혁신할 필요성을 가장 먼저 느낀 나라 중 하나였다. 파리와 런던, 페테르부르크가 허위적인 고전주의의 좌대 위에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서 있던 시기에 이미 뮌헨, 뒤셀도르프, 그리고 다름슈타트는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비록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의미심장했던 모던의 물결이 시작된 곳이 바로 독일권 국가들이었으며 그 물결은 이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올브리히[3], 바그너[4], 로스[5]는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부터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인 선구자들이었다. 페터 베렌스[6](1868년 출생)는 산업 시설 건축에 의식적으로 착수한 최초의 인물이며, 1911년에 이미 발터 그로피우스[7]는 완벽하게 현대적인 건축 계획에 따라 일련의 산업 건축물을 만든 바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는 의지를 독일권 국가들이 이토록 분명하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두고 보았을 때 이 첫 단계가 완전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전쟁 발발 전 10년 동안 독일은 범게르만주의의 맹습 아래에서 기념비적이고 압도적인 형태를 찾아내고자 했으며, 대체로 쇼비니즘적 열의에 의해 고무된 육중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독일 건축가들의 작업에도 여전히 그 잔향이 남아 있다. 전후戰後피폐해진 독일은 동시에 이와 같은 탐구에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음조를 더했다. 그것은 쇠약하고 형식이 없는 표현주의였으며, 타우트[8], 펠치히[9], 멘델존과 같이 아주 유능한 건축가들조차 그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독일 건축은 아직도 많은 부분 파토스와 낭만주의에 매여, 형태적 요소들의 유희에 입각한 채 그것을 강조하거나 과장하기만을 일삼는다. 이러한 껍데기 너머에서 모든 기술적 발전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고 가구를 이성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실내 공간intérieur의 혁명을 이룩하려는 거대한 작업이 번번히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안타깝게도 이 모든 가능성은 잠재력으로 머물러 있을 따름이며 건축가들은 아직 그것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최근 독일 건축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새로운 특징들을 관찰하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아르투어 코른[10], 프리츠 글란츠[11], 브루노 타우트와 막스 타우트[12], 에리히 멘델존,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은 현대 독일 건축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 젖히며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에 독일이 세운 첫 번째 이정표를 보여준다. 그들은 현대 독일 건축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있어 의심의 여지 없이 건강하고 올바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

유럽의 강국 중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국가도 있다. 바로 프랑스이다. 허위적인 고전주의로부터 배태한 절충주의의 메마른 열매를 자국의 아카데미라는 온실 속에서 꾸준하게 키워내면서도, 프랑스는 때때로 라틴 민족 특유의 천재적인 창의성을 발휘했다.물론, ‘로마 대상Prix de Rome’[13]의 수상자들이 형편 없고 절망적인 재능의 소유자이듯이, 최근 프랑스의 건축물 대부분은 무익하고 불필요하며 지난 해 파리에서 열렸던 저속하기 짝이 없는 전시회[14]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철근 콘크리트의 발상지가 다름 아닌 프랑스였으며,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일찍이 철강과 유리로 만들어진 건축물, 에펠탑 등을 선보이며 현대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명백하게 제시한 나라 또한 프랑스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토니 가르니에[15](1896년 출생)의 작업과 저서에서도 이미 가치 있고 새로운 사상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현대 프랑스 기술자들의(프라시네Frassinet[16] ) 건축물에서 특히나 공고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아카데미의 구습과 나란히 성장하고 있으며, 건축적 견본들을 통해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 위에 자신의 민족적 전초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프랑스인들이 [다른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따라 전선에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새로운 형식을 위한 투쟁을 하기 보다는 자국의 건축가들이 지닌 창조 정신을 통해 이 지점에 이르렀다. 페레 형제[17] 또한 이 뛰어난 특성을 어느 정도 보여준 인물들이다. 그들이 샹젤리제 거리에 세운 새로운 극장[18] 그 외관만 보면 그리 인상적일 것이 없으나 실상 완전히 현대적인 기법들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하중을 지탱하는 벽의 부재(모든 하중은 개개의 기둥이 부담한다), 새로운 무대 공간 구성, 재치 있는 관객석 배치, 그리고 그 외에도 극장을 진정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기 위한 믿음직한 전제들을 제공하는 일련의 세부 요소들이 그 예시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 베를린. 사무소 건물Bürohaus 계획안.

구조: 기둥은 건물 안에 배치되어 있다. 외벽은 캔틸레버 위에 놓여 있으며, 동떨어진 외피로 바뀌어 상부는 채광을 위해, 하부는 수납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페레 형제의 창조 정신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강조되고 표현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명백하게 절충주의적이고 현대적이지 못한 형태 요소들이 그들의 사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오직 르 코르뷔지에-소니에[19]만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프랑스 민족 특유의 창조적 특수성을 드러내며 또한 그것을 현대적이고 새로운 형식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요컨대 르 코르뷔지에는 새로운 인간의 형상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려는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가득 차 있다. 불과 2~3년 사이에 그는 진정한 현대적 잡지라 할 수 있는  <에스프리 누보>를 창간했으며(유감스럽게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 <도시계획Urbanisme>, <오늘날의 장식예술 L’art décoratif d’aujourd’hui>이라는 세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이 책들은 프랑스 특유의 재치와 힘찬 슬로건의 섬광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르 코르뷔지에의 혁신적 개성은 당연히 무엇보다도 그의 건축적 작업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현대적인 도시에 대한 명철한 계획안을 제시했는데 (현대도시Une Ville Contemporaine[20]), 이는 조직적으로 배치된 마천루의 도시이자 한 공간에 집약되어 있으면서도 공기, , 녹지로 채워진 도시였다. 이 계획은 파리, 뉴욕 등 다른 현대 도시에서 나타나는 맹목적인 건물 축조에 대한 대안이었다. 그는 기본 전제 자체를 매번 근본적으로 혁신하며 도시에서의 다양한 건물 축조 유형을 고안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되는 그의 빌라들에서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롭고 새로운 주거 공간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와 그를 필두로 한 말레-스테방스[21], 게브레키앙[22], 뤼르사[23] 등의 건축가 그룹은 현대 유럽 건축 발전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다.

  

네덜란드

비교작 작은 유럽 국가들 중 현대 건축의 상당한 발전을 보이는 나라들로는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프라하에서 발행되는 뛰어난 건축 잡지 <스타우바Stavba>[24]는 특히 주의를 기울일 만 하다)가 있으며, 벨기에 또한 이 대열에 어느 정도 포함될 수 있다. 

네덜란드는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계획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네덜란드에서는 개개의 수많은 건물들이 건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축 주거 단지 또한 여럿 생겨났다. 유럽의 건축가들이 참호를 파고 있는 동안, 네덜란드의 건축가 아우트[25]는 로테르담에 3천 호의 저렴한 주택을 세웠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새로이 건설된 모든 것들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 중 다수는 아직 새로운 건축적 사상의 원리가 돋보이기보다는 순전히 양식화에 치중한 다양한 시도로 특징지어진다. 네덜란드의 건축가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이들로는 아우트, 판 데르 플뤼히트[26], 판 라베스타인[27], 판트 호프[28], 얀 빌스[29]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과 더불어 더욱 독창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적 형태에 접근한 몇몇 네덜란드 건축가들의 작업 또한 두드러진다. 우리 잡지에서 소개한 리트펠트 슈뢰더 하우스Rietveld Schröderhuis[30]는 네덜란드 건축가 리트펠트[31]가 위트레흐트 시에 지은 것으로, 현대 건축의 새로운 언어를 더욱 선명하고 독창적으로 포착하여 표현해내고 있다. 유럽 건축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대단히 흥미로운 두스뷔르흐[32]의 작업은 현대 유럽 건축가 대부분이 거쳤던 창작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두스뷔르흐의 작업은 그 형태 면에 있어 비범할 정도로 뛰어난 표현력을 갖췄으며 현대적이다. 그 안에는 간결한 단순성과, 설득력 있고 선전적인 명료함이 내재한다. 원심적인 그의 작품은 수많은 구성 요소와 면으로 쉽게 분해될 수 있다. 이 면들의 교차를 통해 네덜란드 건축가 두스뷔르흐의 건축적 규모가 형성된다. 이와 같은 형식과 절대주의의 회화적 구성 사이의 유사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건축의 독특한 절대주의이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작업을 흘긋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새로운 건축의 언어이며, 국제 건축 전선에 놓인 새로운 이정표이다.

 

미국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현대 건축은 유럽과는 다른 아주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 그곳에도 우리 국제 건축 전선의 견고한 전초기지가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 우리가 선구적인 건축가들의 성취 속에서 그 전초기지를 찾아냈다면, 미국에서 그것은 미국인들의 공학적 천재성이 만들어낸 눈부신 건축물들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다. 미국의 경제력과 기술 발전은 최근 끝없이 많은 건축적 걸작을 만들어냈다. 무수히 많은 엘리베이터(버팔로, 시카고), 창고와 공장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 건축>  4호에 실린 가축용 사료 저장고만 보더라도 전적으로 새로운 이 형태가 얼마나 강력한 표현성과 규모, 그리고 예리함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베를린. 마천루 프로젝트.

이와 같은 구조는 벽에 대한 낡은 관념을 파괴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미국의 가장 큰 대도시들에 등장하는 주거 시설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끝없이 흐르는 유럽 절충주의의 노래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 절충주의는 여기 이 새로운 조건들 하에서 더욱 더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쓸데 없는 것이 되어간다. 허위적인 고전주의 교육이 만들어낸 선량한 옛 전통이 지금 오늘날까지도 머리를 우직하게 가득 채우고 있는 이들에겐 미국의 교훈을 살펴보는 일이 무척이나 유용할 것이다. 마치 거울을 보듯 유럽은 이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꾸밈이 없는 동시에 물론 과장된 형상으로, 미국에서는 새로운 삶의 조건이 훨씬 급격하게 변화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낡은 유럽이 설득하지 못한 이들을 설득해내는 것은 젊은 미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존경스런 유럽의 스승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날카로운 풍자화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결론은 자연스레 도출된다. 미국이 전통적인 노선을 따르고 유럽 예술의 처방에 의존하는 곳에선 그 길이 얼마나 절망적이며 전적으로 시대착오적인지만이 극도로 명확하게 드러날 뿐이다. 

한편 미국이 미국으로 남는 곳,  전통의 굴레에서 해방된 미국의 실용적 이성과, 미학이란 그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 발명가들의 합리적 정신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그들의 이성적 활동으로부터 배태한 독보적인 모범 사례가 자리한다. 그곳엔 삶을 정복해가는 인류의 새로운 이정표가,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에 세워진 새로운 전초기지가 있다.

 

소련

국제 전선의 가장 강력하며 선구적인 위치들을 어느 정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우리의 작업들로 돌아가 [해외 사례와] 공통적인 성공, 실패 및 성취를 비교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외국 동지들과 우리가 이뤄낸 성취를 살펴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차이는, 그들의 선진적 전선이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건설 현장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 건축가들이 구상한 것 가운데 대단히 많은 수가 이미 실현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단지 계획안 수준이 아닌 실제 사진을 통해 제시할 수 있다. 자신의 둔감한 편견을 고수하기 위해 갖가지 구실을 찾으며 현대 건축은 종이 위에 있을 때에만 훌륭하다고 되뇌는 많은 사람들에겐, 실제로 구현된 현대 건축의 성취가 그 표현력과 지각의 예리함에 있어 아직 구현되지 못한 계획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보다도 훨씬 더 우수하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 유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대 건축의 국제 전선을 검토하며 얻어낸 극히 유용하고 설득력 있는 교훈이다. 그리고 우리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이루어진 몇몇 시도는, 안타깝게도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이 교훈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고 있다.

 

건축의 기술적 과제. 신의 기술적 성취를 토대로 합리적으로 건설하는 것.

건축의 사회적 과제. 생산·생활의 새로운 관계를 토대로 건축의 새로운 유형을 창조하고 형성하는 것.

 

해외의 현대 건축이 강력한 우위를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는, 우리의 기술과 비교했을 때 그들의 기술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으며 유독 건설 기술의 수준이 더욱 높다는 점이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거듭하여 성과를 거두는 해외의 기술은 건축가를 기술자에 필적하게 하고 그 안에 숨겨진 새로운 가능성을 모두 일깨운다. 유럽이나 미국 기업이 규격에 맞추어 생산하는 철제 창틀, 승강기, 컨베이어, 혹은 기타 여러 부품의 카탈로그를 아무 거나 집어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유럽 및 미국의 높은 기술 수준이 현대 건축의 발현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상 현대 건축에 관한 최고의 도서관은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대기업들이 발행한 최신 카탈로그와 가격표의 모음집이다.

그런 반면 우리의 건설 현장에는 기술적 사고의 발전에 기댈 발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낡아빠진 예술의 쓰레기를 마음으로 아끼고 열렬히 옹호하는 이들은 우리의 낮은 기술적 수준을 이유로 들며 자신의 마비된 정신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유럽에는 어울리는 것이 경제적·기술적으로 뒤처진 우리에게는 걸맞지 않다. 물론 이러한 지적에는 진지하게 맞설 필요조차 거의 없을 것이다. 정반대의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 매우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빈곤함과 기술적 무지야말로 모든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앞질러 우리가 유럽과 미국의 최신 기준을 따라야 하는 이유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해외 현대 건축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기술적 우위를 지니고 있는 한편 우리 쪽에도 다수의 유의미한 장점이 있다.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지향, 변화된 생산·생활 관계를 갖춘 새로운 사회와 우리의 조건 속에서 성장하는 사회에 대한 지향. 이것이 바로 우리의 결정적인 패이며, 무한히 위대한 의미를 지닌 패이다.

유럽과 미국의 선진적인 기술적 사고가 이뤄낸 모든 성취, 즉 건설 작업에서의 기계화와 표준화 등은 낡은 삶의 조건 속에서 개개인의 저속한 취향, 여러 기업 간의 경쟁, 주택과 도시의 무분별한 성장에 부딪힌다. 반면 우리의 사회적 조건은 건설로의 계획적인 접근에 있어 대단히 매력적인 전망을 우리 앞에 열어 보이며, 표준화를 비롯하여 현대 기술의 여타 성취가 그 긍정적 특성을 모두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대량 생산의 가능성 또한 제시한다.

우리의 주거와 도시 개조에 관한 르 코르뷔지에의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구상은 물질적·정신적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성을 옹호하는 경직된 유럽 부르주아 사회 체제의 굳건한 장벽에 부딪히며, 프랑스의 부르주아적 조건 속에서 그의 거대한 집합 주거는 너무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우리네 삶의 조건은 현대의 건축가를 정반대의 길로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새로운 생활양식быт을 형상화하고 결정화結晶化시킬 수 있는 새로운 건축 유형을 발명하도록 하는 길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진리는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고, 모든 사람들이 이 새롭고 진정으로 창조적인 활동에 대한 의지를 느낀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는 불행히도 변화를 거부하는 저항적인 물결의 둔중한 힘이 아직도 지나치게 강하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요인이 유럽 건축가들에 대한 우리의 우위를 현저한 정도로 약화시킨다.

 

 에리히 멘델존. 베를린.

 

결국, 우리 건축과 해외 건축 사이에 존재하는 극도로 본질적인 차이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의 작업 방식이 지닌 명확성에서 나타나는 차이이다. 

현대 유럽 건축에 대하여 검토한 바를 떠올려 보면, 대부분의 경우 유럽 건축은 직관적으로 전진하며 확고한 방법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유럽 건축의 상당 부분은 미학적 요소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고 형 그 자체를 추구하는 한편, 무의식적인 감각에 기대어 추상적이고 자족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길이 극도로 불안정한 길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달리 소비에트의 현대 건축, 적어도 우리 잡지를 중심으로 결집한 건축은 확고한 유물론적 방법론에 우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허무주의도 포함하지 않으며, 표현력 있는 형태에 대한 요구를 그 어떤 경우에도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전체 과업와 그 각각의 요소가 지닌 기능적 특수성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우리의 현대 건축 전선은 다음의 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원리란, 진정으로 현대적인 다른 모든 사물이 그렇듯 완성된 건축 작품은 단순히 집에 불과하거나 어떤 미학적 부가물이 덧붙여진 사물이 아닌, 합리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직된 구체적인 과제이며, 그 조직 방법론 자체에 자신이 지닌 표현력의 최대치를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 건축 전선은 구축주의의 건전한 원칙과 기능적 사고의 방법론에 기초한다. 이 방법론은 건축가에게 그의 활동 노선을 분명히 제시하며, 그가 마주한 일련의 현실적 전제에 의거하여 그가 자신의 과업을 형상화할 방식을 일러주는 방법론이다. 

 

에리히 멘델존. 베를린.

 

이 방법론은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성과를 보여준 바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근거 없는 절충주의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조건 속에서 진정으로 현대적인 건축 언어를 탐색하도록 했다. 한치의 거짓도 없이 단언하건대, 우리 현대 건축은 이 언어를 이미 습득했다. 

그렇지만 기능적 방법론의 변증법적 발전은 그것을 습득한 사람들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가만두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재료와 구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고, 현대 건축의 언어를 익혔으며, 건축의 다양한 유형, 특히 산업 건축 및 산업 건축과 유사한 생산적 성격을 지닌 건축 유형에 대한 해결책을 탐색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과제,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작업 방법론이 우리에게 그 해답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는 과제, 그것은 현대 건축의 새로운 유형과 새로운 기준을 표명하고 결정화하는 일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들 고유의 주택 유형, 클럽, 학교, 대학교 등을 고안해내야 한다. 우리는 현대적인 언어를 익혀야 하며, 개별적인 특수성으로부터 기인한 모든 다양성을 고려하여 공장과 대학을, 대학과 주택을 구별 지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통, 습관, 경직성으로 인해 연상되고 격세유전되는 인식을 우리 스스로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서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대학교는 모스크바의 모호바야 거리에 있는 기둥 달린 그 대학교[33]가 아니며, 우리의 주택은 낡은 거리들을 '장식'하고 있는 그 수익형 주택доходный дом[34]들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새로운 유형들과 관련하여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생산·생활 관계를 비범한 통찰력을 가지고 인식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건축적 언어로 그것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건축의 새로운 표준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주택과 새로운 대학 등을 진정으로 얻게 될 것이다.

 

에리히 멘델존. 베를린.
Erich Mendelsohn. Berlin.

 

  그렇지만 이 과제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새로운 건축가는 우리 사회 전체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이를 감당할 수 있다. 이 작업에 있어 의뢰인의 역할 또한 대단히 중요한데, 이때의 의뢰인이란 사회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행정 관료들이다. 건축 공모나 개인적 주문을 통해 부여되는 과제가 생산·생활 관계의 낡은 전통적 관계,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외형에 전적으로 지배되는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된다면, 여기서 새로운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의 탐구는 그 가로막는 장애물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우리 눈앞에 놓인 이 장벽을 제때에 격파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과제의 성격과 특수성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를 해결하는 건축가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과제를 제시하는 소비에트 사회 또한 이러한 인식을 갖추어야 한다.

 

М. Y. 긴즈부르크

 

새로운 건축의 국제적 전선(Die Internationale Front der neuen Architektur) / M. 긴즈부르크의 논문 (번역: 조정훈)

세계는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졌다. 한쪽에는 아직도 옛 유럽의 썩어가는 문화를 상징하는 절충주의(Eklektizismus)가 지배하고 있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신선하고 건강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다. 

그 새싹들 덕분에 새로운 국제적인 건축 언어가 형성되고 있고, 그 언어는 국경과 장벽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다. 

독일은 강대국 가운데 가장 먼저 이러한 굳어버린 유럽의 건축 언어를 혁신해야 할 필요를 느낀 나라들 중 하나였다. 아르투어 코른, 프리츠 글란츠, 브루노 타우트와 막스 타우트, 에리히 멘델존,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은 독일에서 새로운 건축의 국제적 전선을 대표한다. 

프랑스에서는 이 전선이 당장은 독일만큼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나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프랑스의 학문적 온실에서는 주로 의사고전주의적(pseudoklassischen) 절충주의의 생명력 없는 산물들만 길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 민족의 창조적 천재성이 드러난다. 르 코르뷔지에와 그를 중심으로 모인 말레-스테방스, 게브레키앙, 뤼르사 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유럽 신건축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 가운데 하나를 차지한다. 

네덜란드는 다행히 세계대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 동안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설계를 실제로 실현하는데 성공했다. 아우트, 판 데르 플뤼흐트, 판 라베스타인, 판트 호프, 얀 빌스, 리트펠트, 그리고 두스뷔르흐와 그의 그룹은 이곳에서 가장 진보적인 건축가들로 평가받는다. 

미국에서는 새로운 건축의 발전이 유럽과는 전혀 독창적이고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곳에도 우리의 국제적 전선은 강력한 전초기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우리가 그 전초기지를 새로운 건축물들에서 찾는 반면, 미국에서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천재적인 미국인 공학자들의 작품 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우리가 이미 이루어 낸 것과 외국의 동료들이 이미 이루어 낸 것 사이의 가장 크고도 눈에 띄는 차이는, 새로운 건축 진영이 비록 양적으로는 아직 그리 크지 않더라도 그곳에서는 이미 실제 건축 분야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서구의 새로운 건축이 보여주는 높은 기술적 수준은 우리의 건축과 비교할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기술적 장점에 맞서, 우리 쪽에도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 다른 장점들이 존재한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 새로운 산업과 기타 관계를 갖추며 발전해가는 새로운 사회 – 바로 거기에 우리의 승리가 있으며, 그 승리의 의미는 무한히 크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생활 조건은 현대의 건축가를 새로운 건축 유형의 길로 몰아가며, 그 건축 유형들 속에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활 형태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른 한편으로 엄격한 작업 방법을 정립하는 것으로도 이어져야 한다. 

새로운 소비에트 건축, 적어도 우리 잡지가 그 대표자로 간주되는 건축은 무엇보다도 견고한 유물론적 기반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허무주의와도 거리가 멀며, 형식적 표현에 대한 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들은 전적으로 전체 건축적 과제와 그 개별 요소들이 지닌 기능적 특성에 종속된다. 우리의 새로운 러시아 건축 진영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즉 완성된 건축물은 다른 모든 진정으로 동시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집도, 미적인 장식물이 덧붙여진 사물도 아니라,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직된 하나의 과제이며, 그 과제는 그것이 조직되는 방법 자체에 이미 최대한의 표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능적 방법의 변증법적 발전은, 그 방법을 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한 양식을 고착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이러한 새로운 산업적-사회적 관계들을 감지해내고, 그것들의 새로운 형태, 즉 건축의 새로운 표준들을 우리 고유의 건축 언어 속에서 탄생시켜야 한다. 

이 목표를 제때 달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닥칠 과제들의 성격과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은 그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축가의 측에서만이 아니라 그 건축가를 뒷받침하고 있는 소비에트 사회의 측에서도 그러하다. 

 


르 코르뷔지에가 긴즈부르크에게 보낸 편지와 긴즈부르크의 답신

 

르 코르뷔지에의 편지

나는 오늘 저녁 모스크바를 떠납니다. 사람들은 내게 <녹색 도시Зелёный город> 공모전[35]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더군요. 나는 조금이라도 내 동료들을 평가하고 싶진 않았기에 의견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도시화의 원칙에 관해서는 짧은 글을 하나 남겼습니다. 나의 결론은 '탈도시화дезурбаницзация'라는 단순한 말을 둘러싸고 현재 이곳에서 보여지고 있는 (일시적인) 열광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말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명백한 모순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회 현상은 복잡한 것입니다. 거기엔 단순함이라곤 없습니다. 우리가 성급하고 경향적인 방식으로 해결을 보려 한다면 사회 현상은 분명 복수를 감행할 것이며,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탈도시화는 레닌의 원칙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레닌은 농민을 구하고 싶다면 산업을 농촌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도시인을 구하고 싶다면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이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농민은 꽃을 감상하지도 않고 종달새의 노래를 듣지도 않습니다. 그건 도시인들이 하는 일입니다. 국적과 기후를 불문하고 인간은 모두 집단을 이루어 살고자 합니다. 집단 생활은 산업적 생산물과 지적 생산물을 낳습니다. 지성은 오직 한데 모인 인간 대중 속에서만 발전합니다. 이것은 집중의 산물입니다. 분산은 이성을 빼앗아 가고 물질적·정신적 규율의 모든 유대를 약화시킵니다. 다음을 염두에 두십시오. 인구 밀도가 높은 곳에서 사망률이 가장 낮다는 사실은 국제적인 통계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구가 집중하는 순간 사망률은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통계적 사실이며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현대 건축에겐 거대한 과제가 따르고 있습니다. 바로 집단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나는 도시가 거대한 공원이 되어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호화를 누리기 위해 나는 800에서 3,200까지 인구 밀도를 높여야만 했습니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은 도시화를 지향합니다. 보시다시피, 이 건전한 결론엔 수천 가지의 불편함이 뒤따릅니다. 

모스크바 탈도시화 계획안 중 하나는 짚으로 만든 숲속 오두막을 제안하더군요. 훌륭할 겁니다! … 주말에 하루 휴일을 보내는 선에서는요.

르 코르뷔지에.

 

M. 긴즈부르크의 답신 

우리가 도시화에 관해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와 당신의 편지로 인해 나는 이 문제 전체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당신이 우리 집에 방문했을 때와 이번 편지에서 제기한 모든 반론을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나의 모든 동료들은 당신을 건축계의 가장 섬세한 거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조직화의 근본적인 문제를 급진적이고 본질적으로 해결할 줄 아는 한 인간으로서 끝없이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내게 당신은 내 삶의 목표이자 내용이며 의미인 이 직업을 대표하는 오늘날 가장 위대하고 눈부신 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화에 관한 당신의 사상과 해답은 우리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이며, 큰 의미를 지닙니다.

당신은 자연을 향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언제나 녹음 속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내게 여러 차례 토로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도시 안에 거대한 공원을 조성하는 호화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편지에 쓰셨더군요 함께 트베르스카야 대로를 산책하면서 당신은 페레를 비롯한 프랑스 유수의 건축가들이 도시 외부로 주거를 옮기려 시도했다고 내게 말한 적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이상적인 물리적 생활 조건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에 대한 과제를 본인 스스로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의 프로젝트를 통해 급진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과제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부득이하게도 이 급진적인 해결책이 불가능하다고 간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인 즉, 당신은 그 모든 눈부신 재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내재한 객관적 모순을 자신이 극복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모든 작업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것은 도시화의 날카로운 발톱을 제거하고 그 가시를 모두 무디게 하고 감추려는 끈질기고 완고한 시도와 다름 없습니다.

당신은 현대 도시의 가장 뛰어난 외과 의사이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시를 치료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도시 전체를 기둥 위로 들어 올림으로써 대도시의 교통, [생활]공간 외부의 교통이라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처리하려 합니다. 당신은 다층 건물의 옥상에 화려한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한 뙈기의 녹지라도 더 주려고 하며, 매혹적인 단독 주택을 만들어 거주자들에게 이상적인 편리함과 평온함, 안락함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모든 일을 하는 까닭은 도시를 치료하고,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모습 그대로 도시의 본질을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이곳 소련에서 우리는 더 순조로운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속박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는 오직 혁명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과제를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우리의 힘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 과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 도시에 진단을 내립니다. “맞아, 도시는 병들었어, 그것도 죽을 병에.” 이것이 우리의 진단입니다. 그렇지만 도시를 치료하고 싶진 않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도시를 절멸하고, 인간 정주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내부적 모순이 없으며, 사회주의적이라 불릴 수 있는 공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를 기둥 위로 들어 올린다고 해서 (이 점에 있어 우리가 당신의 선례를 따랐다는 것은 당신도 보셨을 겁니다) 도시 교통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기둥 사이를 다니는 일은 빽빽한 길을 따라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옥상 정원이 훌륭한 건축적 해결책이라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보건 문제나 녹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거 단위에 대한 해답을 호화로운 단독 주택이나 유럽식 호텔의 형태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고자 합니다. 

당신은 인구가 빽빽하게 집결한 중심지에서 출생률이 가장 높고 사망률이 가장 낮다는 수치를 제시하는 국제적 통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인구가 적은 지역은 의사도, 문화도 없으며 물질적 풍요와 좋은 음식도 없는 비참한 시골 마을들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문화가 오직 많은 인구가 집중된 장소에서 발전한다고 쓰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소련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결한 인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주민에게 문화를 제공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농업을 파괴하지 않고 1억 명에 달하는 우리 농민들을 대도시로 이주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집중의 이점을 통해 문화적 성과를 축적하는 동시에, 분산과 탈집중의 장점 또한 온전히 누리며 우리 주민들에게 문화를 최대한 균등하게 배분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 자체를 철폐하는 것을 기초로, 인간 정주의 새로운 사회주의적 형식을 창조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집단 생활이 차지한 역할을 높이 평가한 것에 있어 당신의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견 차이는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생산에서 높은 수준의 집단성과 집중을 요구할 때엔 공간상의 탈집중화와 분산 또한 요구됩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당신이 레닌의 권위있는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기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레닌이 농촌에 산업을 도입함으로써 농민을 구제하려 했으나 도시인의 구제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친애하는 르 코르뷔지에 씨, 당신은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레닌, 엥겔스, 마르크스는 모두 양쪽 문제에 대하여 많이, 그리고 깊이 고민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동일한 문제가 가진 두 개의 측면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그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인류 분화. 이는 농촌이 방치되거나 세계로부터 고립되지 않게 하며, 대도시로 대중이 대거 밀집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을 막는다.” – 레닌

“… 도시가 농촌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농촌은 수천 년에 걸친 오랜 우둔함을 선고받았고, 도시인은 자신의 고립된 노동에 대하여 노예화를 선고받았으며, 전자는 정신적 발전의 토대를, 후자는 물질적 발전의 토대를 상실했다.” – 엥겔스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개인이 노동의 분할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조야한 표현이다. 이 분할은 한 인간을 도시의 편협한 동물로, 또 다른 인간은 농촌의 편협한 동물로 바꾸어 놓는다.” – K. 마르크스

당신은 도시 바깥으로 주택을 옮기려 했으나 실패했던 페레의 시도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실패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기체 전체로부터 개별 성분만을 떼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떼어낸 성분은 필연적으로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도시로부터 그 도시 자체를, 그것의 식량 및 보급 체계 전체와 문화를 꺼내 옮기려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새롭고 완전한 유기체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페레의 시도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당신은 농민들이 꽃을 감상하지 않으며 종달새의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쓰셨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고된 노동에 허리가 휘어가고 있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농민들이 종달새의 노래를 듣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가 짊어진 노동의 무게를 덜어주고 그의 삶을 더 문화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순을 완화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다가올 시대에 더욱 어울리는 인간 정주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함으로써 가능해질 것입니다.

 지극히 과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가 아직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우리 스스로 제기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걸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보통의] 건축가를 넘어 사회주의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 건축가들의 의무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길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토록 어렵고도 새로운 과제의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와 나의 친구들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당신의 충실한 친구, M. 긴즈부르크

 

르 코르뷔지에의 Urbanisme 러시아 판 (1926)

 
 

원문 출처:
(1) Соврем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 1926, № 2, М. Я. Гинзбург.  Международный фронт современной архитектуры.  — С. 41—46.
(2) Соврем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 1930, № 1-2, Письмо Корбюзье к Гинзбургу и ответ Гинзбурга. — С. 61—62.

 


[1] 에리히 멘델존(Erich Mendelsohn, 1887~1953). 유대계 독일인 건축가. 독일 표현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인 포츠담의 아인슈타인 타워(1921)로 이름을 알렸으며, 나치를 피해 영국, 팔레스타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다.

[2] <아메리카: 한 건축가의 사진집Amerika: Bilderbuch Eines Architekten>(1926). 에리히 멘델존이 1924년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미국의 대도시를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 70여장이 수록되어 있다. 마천루, 철골 구조, 엘리베이터 등 유럽과 달리 기계화된 미국의 대도시 경관을 담은 사진집이다.

[3]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1867~1908).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로, 빈 분리파의 창립자 중 한 명이며 빈 분리파 전시관의 설계를 맡았다.

[4] 오토 바그너(Otto Wagner, 1841~1918).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 가구 디자이너, 도시 계획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빈 분리파와 아르누보/유겐트스틸 운동을 이끌었다. 

[5]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의 건축가. 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로, “장식은 범죄다라고 주장하며 빈 분리파의 노선을 비판했다.

[6]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1940). 독일의 건축가 겸 산업 디자이너. 디자인 경영의 시초가 된 인물로, 독일 전자회사 AEG의 디자인 책임자를 맡았다.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가 그의 설계실에서 일했다.

[7]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독일 태생의 건축가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이며 1919년부터 1928년까지 초대 교장을 맡았다. 건축의 기능과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8]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1880~1938).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건축가, 도시 계획가, 이론가. 1914년 공작연맹 쾰른 건축전시회장에 세운 유리 파빌리온으로 유명하다.

[9] 한스 펠치히(Hans Poelzig, 1869~1936). 독일 표현주의 건축가. 1919년 만들어진 베를린 대극장이 그의 대표작이다. 

[10] 아르투어 코른(Arthur Korn, 1891~1978). 독일의 모더니즘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 에리히 멘델존의 건축 사무실에서 잠시 근무했으며, 1920년대 베를린의 모더니즘 건축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바우하우스 계열의 건축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여 현대건축연구그룹MARS(Modern Architectural Research Group)에 합류했다.

[11] 프리츠 글란츠(Fritz Glantz). 1920년대 독일 베를린 등지에서 활동한 건축가로, 달걀 모양의 목조 주택 빌라 파롤로Villa Parolo가 대표작이다.

[12] 막스 타우트(Max Taut, 1884~1967). 독일 표현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건축회사를 창립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3] 1663년 루이 14세 재위 시절에 시작된 예술가 지원 장학 제도로,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인재들에게 로마에서 국가 지원으로 유학할 기회를 주었다. 베를리오즈, 비제, 드뷔시 등 유명 예술가들을 배출해냈으며 300여년의 역사를 거쳐 1968년 폐지되었다.

[14]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 장식 미술 및 산업 미술 국제전Exposition International des Arts décoratifs et industriels modernes> 가리킨다. 대부분의 출품작에서는 기하학적이고 직선적인 장식적 형태의 아르데코 양식이 두드러졌으며, 이후 붙여진 그 명칭 또한 이 전시로부터 비롯되었다. 한편, 전시에서 나타난 지배적 경향과는 달리 르 코르뷔지에는 해당 전시회에 장식을 배제하고 콘크리트, 강철, 유리로 만든 모듈식 건축물 에스프리 누보Esprit Nouveau 전시관을 선보였다.

[15] 토니 가르니에(Tony Garnier, 1869~1948).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가. 철근 콘크리트가 지닌 잠재력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응용하려 한 첫 번째 인물로서, 철근 콘크리트를 기반으로 한 공업 도시 계획안을 제시했다.

[16] 외젠 프레시네(Eugène Freyssinet, 1879~1962)의 오기로 보인다. 프랑스의 기술자로,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prestressed concrete를 발명하여 다수의 교량을 건설했다. 

[17]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 1874~1954), 귀스타브 페레(Gustave Perret, 1876~1952) 형제를 일컫는다. 1900년대 초부터 적극적으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사용하며, 이를 통한 새로운 건축적 조형성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르 코르뷔지에는 젊은 시절 그들의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Élysées, 1913)을 가리킨다. 고전주의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철근 콘크리트로 전체 구조를 축조한 파리 최초의 공공 건축물이다. 

[19] 훗날 르 코르뷔지에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가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와 그의 동료 아메데 오장팡Amédée Ozenfant은 잡지 <에스프리 누보L’Esprit Nouveau>를 창간하며 공동 필명 르 코르뷔지에-소니에Le Corbusier-Saugnier를 사용했다.

[20] 르 코르뷔지에가 1922년 구상한 유토피아적 도시 공간으로, 300만 명 이상의 주민을 수용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21] 로베르 말레-스테방스(Robert Mallet-Stevens, 1886~1945).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22] 가브리엘 게브레키앙(Gabriel Guévrékian, 1892~1970). 아르메니아 태생의 건축가로 유럽, 이란, 미국 등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에 파리에 머무르며 르 코르뷔지에, 앙드레 뤼르사, 로베르 말레-스테방스 등과 함께 작업했으며, 1928~1932년 근대건축국제회의CIAM의 의장직을 지냈다.

[23] 앙드레 뤼르사(André Lurçat, 1894~1970). 프랑스의 모더니즘 건축가, 도시 계획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활동 초기에 로베르 말레-스테방스의 작업실에서 근무했으며, 근대건축국제회의의 초기 멤버이다. 

[24] 건물’, 혹은 건설이라는 뜻으로, 프라하에서 1922년부터 1938년까지 발간된 아방가르드 건축 잡지이다.

[25] 야코뷔스 아우트(Jacobus Oud, 1890~1963). 데 스틸De Stijl 운동의 일원이었으며, 1918~1933년 로테르담 시의 주택 전문 건축가로 활동했다.

[26] 레인더르트 판 데르 플뤼히트(Leendert van der Vlugt, 1894~1936). 네덜란드 모더니즘과 기능주의 건축을 이끌었다. 반 넬레 공장과 손네펠트 하우스가 대표작이다.

[27] 시볼트 판 라베스타인(Sybold van Ravesteyn, 1889~1983). 네덜란드 기능주의 건축가. 철도 건축으로 유명하다.

[28] 로베르트 판트 호프(Robert van’t Hoff, 1887~1979). 네덜란드의 모더니즘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데 스틸 운동의 주요 일원이었다.

[29] 얀 빌스(Jans Wils, 1891~1972). 네덜란드의 모더니즘 건축가. 데 스틸 운동의 일원이었다. 192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한 올림픽 경기장 설계로 유명하다.

[30] 1924년 지어졌다. 가변식 건축물로, 몬드리안의 회화와 같은 미니멀한 구성이 돋보인다. 202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31] 게리트 리트펠트(Gerrit Rietveld, 1888~1964). 네덜란드의 가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데 스틸 운동의 핵심 멤버이다.

[32] 테오 판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 18883~1931). 네덜란드의 화가, 작가, 건축가. 데 스틸 그룹을 창립하고 이끌었다. 

[33]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를 가리킨다. 현재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의 부속 건물은 대부분 모스크바 남서쪽에 위치한 참새 언덕에 위치해 있으나, 구관을 비롯하여 일부 학부의 건물이 여전히 모스크바 중심지의 모호바야 거리에 자리한다.

[34] 임대를 위해 만들어진 다세대 주택. 1830~40년대 유럽 국가들에서 발전한 건축 구조의 일종이다. 대개 건물 내부에 작은 중앙 정원이 있고, 거리와 마주한 전면 파사드의 장식적인 디자인, 주거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한 창문간의 좁은 간격, 파사드의 수직성이 특징적이다. 1917년 혁명을 기점으로 대부분 국유화되었고, 현재까지 많은 수가 남아 있다.

[35] 1929~1930년 사이, 모스크바 근교의 녹지에 휴양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열린 공모전의 이름이다. 이는 단순한 휴양 도시가 아닌, 새로운 일상에 걸맞는 집단 주택 단지를 건설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공모전의 수상자는 니콜라이 라돕스키Николай Ладовский였으며, 콘스탄틴 멜니코프Константин Мельников, 모이세이 긴즈부르크, 미하일 바르시Михаил Барщ 등도 혁신적인 계획안을 출품하였다. 공모전에서 채택된 설계를 실제로 모스크바 근교에 적용하는 것이 사업의 본래 목표였으나, 라돕스키의 계획안은 모스크바 인근의 몇몇 요양원에서 부분적으로 구현되는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