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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In Moving Translation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인류학적 성찰: 비교 방법서설

by 인-무브 2026. 8. 16.

인류학적 성찰

비교 방법서설 —

Anthropological Meditations : Discourse on Comparative Method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지음

엄정후 옮김

배세진(정치철학자) 감수

 

[옮긴이의 말] 이 글은 Comparative Metaphysics: Ontology After Anthropology에 파트리스 마니글리에가 실은 글입니다. 여기서 마니글리에는 어떻게 하나의 격자·세계(혹은 구조)가 다른 격자·세계(혹은 구조)로 이행할 수 있는지 데카르트적 성찰을 통해 밝힙니다. 이 글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대립항으로 놓고, “한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이행을 설명하지 못하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넘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사유가 등장했다.”라고 말하는 통념과 달리, 구조주의를 통해서도 그 이행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행은 인류학적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를 알튀세르식으로 말한다면, ‘정세’ 속에서 구조가 변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글에서 소쉬르, 야콥슨, 레비스트로스는 등장하지만 ‘구조주의’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조(주의)를 포함한 기존의 통념을 거부한 채로 방랑 속에서 성찰하는 마니글리에가 어떻게 (구조주의라는) 하나의 방법/모델로 귀착하는지 살펴보는 점이 흥미로울 것입니다.

 

비교 형이상학{comparative metaphysics}은 이미 주어진 상이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비교하는 기획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비교 방법{comparative method}을 실천한 결과로부터 나온 형이상학의 정식화를 통해 구성된다. 그리고 이는, 역으로, 고유하고 자율적인 과학적 절차로서 비교는 겉보기에 가장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가정들―그것이 세계에 관한 것이든,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든, 지식의 본성에 관한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조차도 변이 속에 놓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의거한다. 달리 말해, 비교가 진정하고 고유한 과학적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순간, 그것은 그 자신을 “사회적” 혹은 “문화적” 주제에 국한시킬 수 없다. 비교의 범위는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적” 질문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것을 포함할 때까지 확장된다.

 

실제로,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이 아니라면: 옮긴이) 다른 방식으로 의문시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들에 영향을 끼치는, 제한 없는 질문의 형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다. 최소한 이것이, 데카르트 자신(어쨌든, 근대 철학으로의 길을 다시 열어주었다고 평가받는 일련의 형이상학적 성찰들[1]의 저술가이니)이 “형이상학”—합리적인 것 너머의 의심의 급진화—이라는 통념을 이해한 방식이었다.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형이상학”이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그는 그의 악령의 가설{hypothesis of the Evil Genius}을 “의심의 근거는 매우 빈약하고, 말하자면 형이상학적”(valde tenuis et, ut ita loquar, Metaphysica dubitandi ratio; 르네 데카르트.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2021).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59)이라고 말한다. 또한, 데카르트 연구자들은 “형이상학적 의심”(『방법서설』에서 그가 “방법적 의심”에만 머무르는 것과 다르게,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의 특징인)을 본질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intrinsically indubitable}, 예를 들어 논리적·수학적 진리까지도 의심의 외재적{extrinsic} 근거를 마련해주는 악령의 가설을 매개로 의심에 부치는 작업으로 정의한다.[2]

 

나는 여기서 올바르게 이해된 비교 인류학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의심과 유사한 무언가를 수반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마치 데카르트처럼, 인류학자들은 오직 타당한 근거가 있을 때만 의심할 수 있다. 즉, 의심은 일반적인 결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심에 부쳐진 것을 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근거가 실제로 드러난 결과이다. 이것(타당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 옮긴이)이 악령의 가설이 본질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이다. 인류학자의 경우, 그녀에게 완전히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의 방식, 생각의 방식 그리고 감정의 방식을 스스로 수용하는 역량의 경험이,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상상조차 못한 것을 변이의 대상의 자리에 놓이게 한다. 모든 인류학은 어떤 존재가 내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실천이나 믿음을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순전한 당혹감의 경험을 기원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탐구 과정을 추동하고 지속시키는 것은 당연시되었던 것의 부정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반대가 성립할 수 없는 믿음의 대상, 즉 “절대적 확실성”을 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나는 인류학자가 이러한 자명성의 변이를 실정적{positive} 지식의 형태를 구축하기 위해, 즉 경험적인 동시에 축적 가능한 지식의 형태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과학 분야에서도 확실히 독보적으로, 인류학(오직 비교 일반에 기초해 과학적 지식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로 이해된)은 형이상학과 인식론적 차원에서 동일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둘 모두는 가장 정초적인 주제들을 포함한다), 형이상학을 실정적 탐구의 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질문은, “지금 여기서는 자명하게 진리인 것으로 보이는 게 그때 저기에서는 거짓이거나 심지어 사유 불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순전한 가능성 위에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구축될 수 있는가?”이다. 언젠가 비교 인류학이 자신이 진정으로 어떠한 종류의 과학적 지식인지 깨닫게 될 때, 형이상학 또한 비교 인류학이 이미 실제로 베르그송이 “실증 형이상학”—실증 형이상학은 올바르게 이해된 비교 인류학 외에 다른 게 아니다—이라고 부른 것을 실현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형이상학 속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려는 꿈—데카르트, 칸트, 후설, 비트겐슈타인, 제임스 등에 의해 다양하게 표현된—은, 여기서 그 궁극적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엄격한 과학으로서 형이상학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는 바디우에게는 미안하지만{pace}, 집합론이 아니라, —속박에서 풀려난 비교 형이상학이다.

 

인류학의 예비적 정의

 

인류학은 이국적인 인간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가 아니다. 오히려 인류학은, 이 과학의 주체가 처음에는 그녀에게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였던 감정의 방식, 사고의 방식, 그리고 행동의 방식을 수용하는 역량만을 과학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러한 주체의 변이{subjective variation}(자기-타자화로도 표현될 수 있는)의 가능성을 어떠한 인류학자도 그녀가 하는 작업의 정의에서 선뜻 누락시키지 않을 것으로 추측하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녀가 실천하고자 하는 종류의 지식의 특징을 이루는 일종의 사실들의 구성 자체에서도 누락시키지 않을 요소이다. 민족지적 “현지 조사”의 위신과 특성은 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타자성은 그러므로, 인류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학의 도구{instrument}이다. 인류학의 진정한 대상—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는—은 오히려 인류학자 그녀 자신이 무엇인지이다. 인류학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과학이며, 이는 라캉이 그의 『에크리』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한, 과학의 주체 자체에 대한 과학을 정식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기획 중 하나이다.[3]

 

실제로 과학의 주체이며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과학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을 수행하기 위한 바로 그 이유로) 이 존재를 인간이라 부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그리고 이것이 이 학문의 이름이 그리스어 anthropos에서 유래된 이유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정밀하게 확립되어야만 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고, 또한 이는 인류학 고유의 방식을 통해 확립되어야 한다. 만약 인류학이 상식에 의해 구획된 세계의 지역(“프랑스학”의 “프랑스”, “아시아학”의 “아시아” 혹은 “시각 연구”의 “시각” 등)에 의해 규정된 “학(문)”{studies}의 장 이상의 것이 되고자 한다면, 이것이 진정하고 자율적인 과학적 지식이 되고자—단순히 인간학이 아니라—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인류학이 진정으로 자율적인 과학적 지식이고자 한다면, 단순히 인간학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과학의 주체”에 대해 이야기할 이유다. 인류학이 상정하는 대상을 어느 전제된 실체보다는 그 기능에 따라 정의할 것이며, anthropos라는 단어를 과학의 주체라는 문제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하나의 물음표의 자리표시자{placeholder}로 이해할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는 과학적 탐구에 착수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인류학은 현대 과학이 실제로 하는 일을 한다면 과학적일 것이라 말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달리 말해, 인류학이 현대 과학과 실천의 차원에서 연속성을 이루면 된다. 즉 우리에게는 어떤 본질이 아니라, 실천적 유사성만이 필요하다.[4] 인류학은 따라서 과학의 주체에 대한 과학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인류학은 오직 과학의 주체가 과학의 주체가 아니게 될 정도로 변이할 수 있는 주체의 역량에만 기반한다는 사실로 인해 여타 “인간 과학”과는 다르다.

 

여기서 “과학의 주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경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나는 직접적으로 그 경험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 속에 놓이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문제없는 친숙함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어떤 경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 경험을 실천적 자명성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쉽게 이해된다. 이와 반대로, 타자성은 어떤 형태의 낯섦으로, 혹은, 우리가 반성적 낯섦{reflective estrangement}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즉 어떤 “타자”는 내가 즉각 공감할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그것에 공감하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실로, 내가 실제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스노보드 타기를 생각해 보자. 나는 스노보드를 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말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 이해의 지평 너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 그것이 어떨지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대로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들을 먹는 것은, 내가 자명하게 옳다고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내가 그것을 옳다고 여길 거라고 예상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오해를 이차적 오해{second-degree misunderstandings}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오해는 데카르트가 의심의 형이상학적 근거라고 부른 것과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이러한 오해의 대상이 되는 믿음은 본질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직 외재적으로만, 그러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문제적인 것으로 만드는 삶의 방식에 대해 친숙화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그것의 부정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민족지적 경험은 바로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을 자명하게 보일 정도로 친숙하게 만드는—그리고 그 역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차적 오해는 재주체화의 지점이다.[5] 그녀가 이러한 재주체화의 지점 중 하나를 통과할 때 주체는 타자화되고, 그녀 자신으로부터 낯설게 된다. 인류학적 사실 혹은 자료는 이런 재주체화의 운동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경험 속에서만 구성된다.

 

그럼에도, 엄밀히 말해 인류학은, 어떤 종류의 재주체화든 상관없이 구성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경험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재주체화하는 실천이다. 달리 말해, 과학의 주체가, 과학 자체를 주체화할 수 없는, 다시 말해 과학 자체를 터무니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주체의 위치를 점하는 운동이다. 이것이 현대 인류학을 건립한 아버지들, 타일러, 프레이저, 레비브륄 등이 다음과 같은 실로 유일하게 진정한 인류학적 질문을 한 이유로 조롱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도대체 어떻게 누군가가 선의를 지닌 빅토리아 시대 과학자가 아닌 다른 존재일 수 있겠는가?” 과학은 변했고—그리고 그에 따라 인류학 역시 변했다.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과학의 주체가 극적으로 변화하여, 과학 자체를 상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험을 주체화할 수 있게 된다는 가능성을 (인류학: 옮긴이) 자신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는 것이 가능한가?”

 

제1성찰: 의심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에 관하여

 

인류학에 대한 이러한 정의가 받아들여진다면, 인류학과 형이상학의 관계는 명확해진다. 즉 인류학은 변형의 잠재성 이외에 다른 것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인류학은 오직 자기-변형의 실천이 가능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거나, 또는 인류학적 탐구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일 것이다(그 방법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믿음”에 대해 다루는 관점도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관점이 인류학자가 겪고자 하는 경험과 양립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현”, “문화”, “환경”, “인식” 등과 같은 통념에 대해서도 비슷한 점이 상기되어야 한다. 인류학에서의 “존재론적 전회”로 알려진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 “문화” 그리고 “재현”과 같은 통념이 비교의 실천 너머에 존재하는 메타개념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국가”, “일부일처제” 혹은 “신”과 마찬가지로 비교에 부쳐져 동일한 방식으로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데에 있다.[6] 인류학자는 그녀가 타자성의 경험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혹은 그것에 실패할) 지식의 원천 이외에는 다른 원천을 수용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므로, 그녀는 자신이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에 부칠 때와 매우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류학은 형이상학과 동일한 인식론적 상황을 공유하기에 만날 수 있는 것이지, 이 둘이 특정한 “대상”(예를 들어 “존재론”)을 공유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7]

 

역으로, 이러한 만남은 데카르트의 의심의 동력이 인류학적 경험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이는 독서와 여행이라는 두 가지 활동을 통해 타자성에 노출되는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주제에서 참인 것은 단 하나 이상이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인데, 얼마나 상이한 의견들이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지를 고찰하면서, 내가 그럴듯하기만 한 것은 모두 거의 거짓으로 거부했다… 내가 다른 인간들의 풍습들을 고찰하기만 한 동안에는, 나를 확신시키는 것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전에 철학자들의 의견들 사이에서 알아차린 것과 거의 같은 정도의 다양성을 거기서 알아차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거기서 얻은 가장 큰 이득은, 우리에게 아주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더라도, 다른 큰 민족들에 의해 여전히 널리 받아들여지고 인정되는 것들이 많이 있음을 보면, 선례와 관습에 의해서만 나를 설득해 온 어떠한 것도 너무 확고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2022).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27-29.)

 

의심은 불필요한 결단으로부터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명한 가정의 변이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다. 스피노자는 날개 달린 말이라는 한 가지 상{image}만을 자신의 생애 동안 인식했기에 그의 실존에 대해 의심할 이유가 없었을 남자에 대해 언급할 때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8] 요약하자면, 우리의 의견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의 가변성, 즉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권위”를 거부하고 자신에게로 후퇴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며, 자신의 “이성”만을 믿고, 그에게 의심할 수 없어 보이는 것만 수용하겠다고 하지만, 나는 (명백히 의심할 수 없는) 한 “의견”으로부터 다른 의견으로 이행할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가장 기초적인 자료만을 고수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이성을 어떤 의심할 수 없는 의견을 기대하며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나는 바로 이 가변성 자체에서 과학적 절차를 생산하기 위한 어떤 길잡이를 발견할 수는 없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마치 데카르트처럼, 내가 배타적으로 믿어온 어떠한 특정 의견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믿음만을 확고하게 고수하겠다. 내가 진리라 여기는 단 한 가지는 내가 명백히 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거짓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며, 나는 이러한 자기-변형의 운동을 계속해서 해 나가겠다.

 

나는 데카르트가 그의 『방법서설』(3부)에서 그리는 방랑자 중 하나와 같다. 나는 한밤중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었고 내가 이 어둠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다. 밤은 칠흑 같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타자들이 있다. 그들은 내 주변을 둘러싼 것들을 아는 체하며, 나에게 지도를 제공하려고 한다. 오직 그들만이 나의 길잡이다. 나에게는 다른 정보의 출처가 없다. 어떤 목소리는 주장한다, “오른쪽에 길이 있다”, 와중에 다른 목소리가 이에 반대한다, “그곳은 막다른 길이다.” 데카르트는 나에게 목소리 중 하나를 임의로 믿고 이를 확고하게 고수하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각하지도 못한 채 숲속을 빙빙 맴돌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의지할 만한 단 하나의 믿음, 즉 한 의견에서 다른 의견으로 이행하는 게 항상 가능하다는 것만을 고수한다. 이러한 결단을, 변이주의자의 공준{variationist postulate}이라 부르도록 하자. 문제는, 내가 상대주의의 어둠 속에서, 보는 각도에 따라 변하는 의견의 숲에서 죽도록 선고받은 것인가, 혹은 내가 해결 방안—즉 과학적 방법—이 있다고 희망할 수 있는가이다.

 

선의를 지닌 일부 목소리들이, 변이주의자의 공준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집착을 고려했을 때, 내가 그 다양한 의견의 합창 가운데서 모든 의견에 되풀이되는 부분만을 추려내고 싶지 않겠냐고 조언한다. 즉 나는 모든 목소리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만을 진리라 여길 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제안을 거부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나의 공준이란 바로 어떤 진리든 오류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즉 내가 이를 포기해야 할 더 나은 이유가 없는 한, 옮고 그름에 대한 각각의 주장이 우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없고, 특히 이 경우에는, 단지 내가 불협화음을 이루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것이 숲의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에 나에게 일어난 적이 있고, 나는 이제 이 모든 목소리들은 내 주변에 산재해 나를 속이려고 하는 악령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목소리들(가령 문화)이 과거에는 있었다는 이야기 역시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숙고하는 문제에 대해 그들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내가 가능한 모든 목소리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최소의 공통분모가 그 자체로 상이한 해석에 부쳐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 내의 특정 성적 관계는 반드시 금지되어야 한다.”와 같이 모든 목소리가 어떤 것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물론, 어떤 가족 관계 내에서 금지되어야 하느냐에 따라 목소리들은 극명한 차이를 보이지만(어떤 이들은 나에게 교차사촌{cross-cousin}과 결혼하는 것이 의무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반드시 금지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모두 어떠한 종류의 금기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너무 성급히 내가 “보편적”인 무언가를, 이 경우에는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것을 찾아냈다며 반색해서는 안 된다. 단순히 이것이 정확히 말하자면 보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만 아니라(우리가 흄을 통해 알듯이), 나는 우선 이 모든 목소리들이 말하는 “성적”, “가족” 그리고 “금지”가 동일한 것인지 확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면밀한 검토를 거치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여기에 내가 트로브리안드에서 온 목소리(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를 거친)라고 부를 목소리가 있다. 이 목소리는 “아버지”는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며, 오히려 임신하는 과정에도 참여하지 않는 “이방인”이라 말한다. 사실, 그와 딸이 가질 수도 있는 성적 관계를 기술하는 단어는 그가 아내가 아닌 어떤 이와 가질 성적 관계를 기술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며, 이 단어는, “근친”이라는 단어보다 “간통”이라는 단어로 옮겨져야 하고, 이는 어머니와 그의 자녀와의 성적 관계를 기술하는 단어와도 다르다(말리노프스키 1929, 447). 비슷한 경우로, 나는 처벌을 어떤 중앙집권적 권위가 범죄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실로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따르면, 범죄를 통해 드러난 일반적인 문제의 일부를 이루는 어떤 다른 존재들이 희생되는 일로 이해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듣는다.[9]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미셸 푸코라는 다른 목소리가, 이것은 매우 최근에 등장한 개념이며, 심지어 루소조차도 내가 이를 통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지점은 작고한 미국의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에 의해 여러 곳에서 매우 훌륭하게 언급되었다.

 

“주니족의 문화는 절제를 존중한다. 콰키우틀족의 문화는 개인의 자기과시를 고무한다. 이것들은 대조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주니족과 콰키우틀족은 그러한 가치들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가치에의 충실함을 보인다. 즉 자기 문화의 변별적 규범{distinctive norms}을 중시하는 것이다.”(클리퍼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2009). 문옥표 역. 까치. 60. 클라이드 클룩혼의 Culture and Behavior에서 재인용. [번역은 일부 수정(옮긴이)])

 

기어츠가 말하길 이러한 주장이 지니는 문제는, “중시”{prizing} 일반의 의미 자체가 그 개별의 내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것을 “한 일반의 도덕 체계”로 특징짓는 것은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도덕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로 우리의 개별적인 도덕 체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내용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혹은 달리 말해, 도덕 가치와 관계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어떤 도덕 가치와 관계 맺는지에 달려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덜 명확해 보이는 경우에도 동일하다. 즉 모든 인간 존재가 거주지를 이용한다고 말하는 것, 죽은 이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 발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무용하다. 단순히 그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거주지를 짓거나, 애도하거나 혹은 다른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주지, 애도 혹은 언어와 같은 것들을 특징짓는 방식 자체가 바로 논쟁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공통된 특징을 그것의 개별적인 형태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애도에 관한 일반 이론을 만들고 싶다면, 당신은 당연하게도 우선 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애도할 때 하는 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하는 것” 이외에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발화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쓰는 방식과 관계가 없는 게 아니며,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 집단이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혹은 그들 모두는 그들의 문화를 통해 다른 집단과 구분된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지극히 다의적{equivocal}이고, 그것은 “문화”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을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을 다른 인간의 삶의 형태에 투사하는 것일 뿐이며, 그 개념은 사실 그들이 자기 자신 및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을 이해하기에 부적절할 수도 있다.[10] 사실 인간 존재는, 그들에게 공통된 것이 무언인지를 규정하는 바로 그 방식에 따라 구분된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 분열과 오해가 만들어지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추상적일수록, 나는 더욱 다의적인 존재가 된다.

 

방금 전의 말이 나의 인식론적 상황의 특수성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내가 통과하고 있는 다양한 의견 사이에서 그것의 차이와 유사성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의견 간의 차이는 그 자체로 의견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느 남성 개인도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이 스코틀랜드에서는 사실이 아니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 나는 이미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제대로 특징짓지 못할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킬트 또한 치마인가?)이다. 조금 더 학술적인 예를 들자면, 내가 세계에 존재하는 상이한 결혼 형태를 비교하고 싶다면, 누가 누구와 결혼할 수 있는지, 결혼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규칙이 상당히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정의는 고정적이라고 전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린 차이의 지도는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먼드 리치가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 문제는 세계 각지에서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이해되고 행해지는 것이, 비록 우리가 하는 것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어도, 실제로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사회적 실천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곳에서는 오직 성적 권리의 확립만을 의미하고, 다른 쪽에서는 성적인 차원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재산권과만 관련된다. 그런 한편 또 다른 곳에서는 어떤 종류의 의례로도 표지되지 않고 그저 우리가 “동거”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기도 한 등(리치 1971). 따라서 오직 결혼의 형태만이 다양한 게 아니라, 무엇이 변이의 대상인지에 대한 바로 그 정의 자체도 다양하다. 물론, 이와 유사한 논의는 인류학 문헌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며, 이에 대해서는 후에 더 심층적인 사례를 통해 다시 논의하겠다. 여기서는 나는 이미 어두운 나의 밤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야 하며, 정말로 “주어진 것”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의견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의견 사이의 차이와 동일성의 지각의 다양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즉 주어진 다양성은 바로 그 다양성 자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지금 나는 완전히 길을 잃었고 그 무엇도 나를 이 깊은 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한 번 더 데카르트를 따라 우리의 성찰을 잠시 멈추도록 하자. 내가 받아들인 형이상학적 전제로 인해 처해 있는 불안의 상태에서는 잠들기가 쉽지 않겠지만, 잠은 필요하다.

 

제2성찰: 타자에 관하여 그리고 타자가 나 자신보다 더 쉽게 알려진다는 것—비교의 직관

 

내가 일어났을 때, 어둠은 전과 같이 짙었다. 그러나 내가 난점에 덧붙인 추가적인 전환{supplementary twist}이 어쩌면 해결책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만약, 모든 개념이 본질적으로 지닌 다의적 성격으로 인해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타당한, 모든 가능한 목소리가 동의할 만한,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주장을 찾으려 하지 않고, 보편성을 자처하는 주장들을, 특히 주장 간의 유사성과 차이의 척도를 제공한다고 자처하는 주장들, 즉 비교 개념{comparative concepts}을, 그것이 지우거나 뒤섞는 바로 그 차이에 어떻게 그것이 의존하고 있으며 바로 그 차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재맥락화한다면 어떨까? 직관적으로 말해, 이는 내가 사용하는 범주의 격자{categorical grid}를 그것이 지우려 하는 차이의 집합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에게 이 새로운 과제를 제안한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바로 그 비교의 격자{comparative grid}를 맥락화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다의성을 드러내고, 실천적 또는 지각적 동일성들이 점차 서로 다른 것으로 분기되는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겉보기에는 공통된 특징이 사실은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른 차이의 장 속에 투사될 때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통해, 그 차이를 더욱 정확하게 특징짓고자 한다. 예를 들어, 결혼이라는 개념(사실, 의견, 세계관, 문화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을 서로 다른 형태의 결혼을 비교하는 데에 쓰는 게 아니라, 한편으로는 결혼이라는 형태의 변형을 바탕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결혼이라는 개념의 변형과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결혼이라는 개념을 “자리매김하고”, “국지화하며” 혹은 “맥락화하는” 다른 상관적 변형 간의 관계를 통해, 결혼이라는 관념 자체를 재정의해 보고자 한다.

 

이는 지금부터는, 나는 변이체{variant}로서 재규정된 것 외에는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나는 확실성이 변한다는 확실성 외에는 그 어떤 확실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엇을 동일한 확실성으로 규정할 때조차 그러하다. 이제 나는 모든 확실성을 다른 확실성의 변이체로 재규정하는 게 가능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발상은 진리가 “문화”, “실천” 등으로 불릴 수 있는, 그 자체로는 불변하는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다른 어떤 것 자체가 그것의 다른 형태와 맺는 차이적 관계{differential relation}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내가 변이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변이체란 그것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의해 그 동일성이 전적으로 특징 지어지는 존재이다. 이는 그 동일성이 레비스트로스적 의미에서 말하는 변형군{group of transformations}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환원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변형군은 오직 변별적/차이적 자질{differential features}에 의해서만 서로 관계 맺는 대상들의 장이며, 따라서 그 대상들은 서로의 대안적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변이체는 변수가 아니다. 변수란 다른 값들의 집합과 규정된 관계(즉 함수 관계)를 이루는 값들의 집합을 대신해 표기하는 문자 기호이다. 예를 들어, 폐암에 걸릴 확률은 (무엇보다도) 흡연 여부라는 또 다른 변수에 의존하는 변수이다. 여기서 폐암에 걸릴 확률은 다른 대상들, 이를테면 다른 형태의 암과 맺는 차이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이 확률의 각각의 값 역시 변형장{field of transformation}의 다른 모든 값과 맺는 차이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적어도 트루베츠코이와 야콥슨의 의미에서 음소는 변이체이다. 왜냐하면 음소는 다른 음소들이 그것을 어떻게 대체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만 규정되기 때문이다.

 

“변이체”라는 개념은 종종 약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이 경우에는 일정한 수의 속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대상들의 집합이 주어져 있다고 상정하고, 그 가운데 일정한 수의 속성은 공유하지만 다른 속성들을 기준으로 서로 차이를 보이는 대상들을 동일한 “유형”의 “변이체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서로 다른 텍스트들이 대부분의 부분에서는 동일하지만 일부 문장이나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텍스트는 변이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에게 변이체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쓸모없어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는 나에게 유형의 동일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숲속에서 유형들 자체가 다의성을 통해 변이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나는 변이체를 다른 항과의 차이적 관계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반대로, 또 상호적으로, 변형군 안에서의 하나의 위치가 아닌 어떠한 동일성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변이체를 어떤 유형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내가 유형이라고 생각해 온 것을 규정된 변이체{determinate variants}들로 재정의할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의 방법, 다름 아닌 비교 방법에 대한 제1규칙을 정립할 수 있다. 즉 변이체로서 재규정될 수 없는 어떠한 동일성도 받아들이지 말 것. 혹은 더욱 데카르트의 표현과 비슷하게 말하자면, 참으로 인정될 수도 있는 것의 규정된 변이체로 재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참으로 인정하지 말 것. 또한 우리는 이 제1규칙을 존재론적인 형식으로도 제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비교라는 결정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다른 가능성들의 하나의 변이체로 재규정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이든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보다 극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우리의 상황, 우리의 세계)에 관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그것 대신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의해 주어진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우리 자신에 관한 유일한 진리는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즉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될 수 있는가)에 의해 주어진다. 즉 현실적인 것{actual}의 진리는 현실적인 이 특수한 세계의 대안적 가능성에 의해 주어진다. 가능적인 것{possible}, 아니 오히려 잠재적인 것{virtual}이야말로 실재적인 것{real}이다. 서로 교대로 나타나는 방식에 의해 상호 규정되는 가능성들 외에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을 요약해 보도록 하겠다. 나는 옳고 그름에 대해 양립할 수 없는 판단들을 통과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준은, 그러한 판단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를 지각하는 방식 또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내가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세계적 차원의 동일성을 거부할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사실은 지워버린 차이들을 통해 모든 동일성을 재규정하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모든 유형을 다의적인 용어로 간주할 것이며, 그것을 그것 스스로가 지워버린 대안적인 해석(즉 그들이 변형되어 만들어지는 다른 유형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이체로 재규정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당연하게도 내 자신의 범주의 격자(동일성과 차이를 구성하는 나의 방식)를 상대화함을 함의하며, 이는 나 자신의 상대화 과정에서 그것 스스로가 구성하는 동일성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대안적 방식들의 지도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그것을 재규정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비교를 수행하는 심급{instance} 자체도 자신이 비교하는 장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교의 진정한 귀결은 바로 내가 지닌 지식을 그것 자신의 다른 변이체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비교의 지식{comparative knowledge}은 위치 지어진 지식이다. 오히려 위치 지어진 지식이란 자기 자신의 대안적 형태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지식이다. “비교한다”는 것은, 비교되는 차이 자체가 각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교하고 있음을 경험하려고 시도하고, 동시에 모든 것,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변이체로 재규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내가 비교해야 하는 것은 비교의 서로 다른 체계임을 의미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인류학은 “관찰되는 자의 사회과학이다”(레비스트로스 1963, 363). 인류학은 타자의 앎에 대한 앎이다. 이는 인류학이 단순히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의 주체 자체를 그것이 아는 것의 장 속에 다시 위치시켜야 하는 비판적 지식임을 분명히 함의한다.

 

이제 당신은 성급하게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방금, 우리가 만들어내는 어떠한 동일성이든 차이든, 그것 자체가 변이하거나 달리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즉 서로 다른 두 존재를 하나로 뒤섞은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을 당신이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이를 두 질문으로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자신의 비교의 격자가 국지적으로 지각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차이를 근거로 그 격자의 변이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일성과 차이의 한 체제에서 그것의 대안적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따라서 하나의 체제에서 다른 체제로 통제된 방식으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변형(즉 국지적으로 유효한 반박 가능성의 절차를 이용함으로써)을 통해 각각의 체제를 재규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문제는 나 자신의 사유, 혹은 나 자신의 언어 안에서 하나의 대안적 사유 체계, 혹은 하나의 대안적 언어를 구성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나는 말하자면,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의 관점에서 내가 이전에 그러했던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내가 이전에 그러했던 것을 내가 되어 있는 것의 하나의 변이체로 재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는, 내가 이를 위해 사용하는 차이와 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차이가 과연 참으로 올바른 것인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는 답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공준에 따르면, 그 물음 자체가 애초에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다시금 절대적인 동일성과 절대적인 차이를 요구하는 방식의 질문일 뿐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얻게 될 변이체의 지도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유일하게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나의 문제는, 변이주의자의 공준이 나를 모든 기준으로부터 완전히 박탈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말해 그렇게 된다면 무엇이든 허용될 뿐이고 나는 내 숲을 방법적으로 헤쳐 나갈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개괄한 과정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증명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변이체로서 재규정될 수 없는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말 것”이라는 기준이 있으며, 그 기준은 주어진 것(즉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의 다양성)을 바라보는 방식과, 또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분명히 변화시킬 것이다. 과학에 필요한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에 대한 분명한 감각—즉 이 결과가 이전의 결과보다 낫다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확고한 기준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 쉬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좀 더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형이상학적 의심으로부터 생겨나는 하나의 방법의 가능성만큼은 보았기 때문이다.

 

제3성찰: 인류학에 관하여, 그것이 현존하며 친족의 사례를 통해 예증될 수 있다는 것

 

나는 큰 흥분 속에서 깨어난다. 나의 비교의 직관이 과연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나는 기존의 비교 인류학으로 눈을 돌리기로 결심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19세기 중반 친족 용어에 관한 루이스 헨리 모건의 연구에서 시작되어 20세기 영국과 프랑스 학파에서 체계화된 현대 인류학의 성립 순간을 (매우 개략적으로나마) 재연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나는 그 전통을 통해 매개되어 온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나 역시 친족이 무엇에 관한 것이며, 다양한 친족 체계들이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드러나는 차이들,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다른 범주의 격자의 하나의 변이체로 재규정되기를 바라는 바로 이 범주의 격자에서 출발하는 것 말고는 달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이 와그너의 표현을 빌리면, “타문화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다.” 또는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하듯, 그것은 하나의 “확장”{extension}이다(1981, 12). 다시 말해, 민족중심주의적인 투사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바로 그것이 출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내가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을 특징짓는 몇몇 차이와 타자가 설정하는 차이 사이에서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인식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목소리들이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행위를 차별화하는 방식과 나의 방식 사이에 하나의 유사성을 지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녀를 양육하는 일, 세대 간 전승, 성적 행위의 조직, 선호와 태도 등의 문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 곧 이로퀴이라 불리는 목소리가 그러한(차별화된) 관계들을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고 있다는 점도 지각한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녀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어머니의 이름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선의로, 나와 그들 사이의 적절한 변별적/차이적 자질{relevant differential feature}은 혈통 또는 계통의 규칙을 어머니 쪽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아버지 쪽에 귀속시키느냐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침 나는 바로 이 아버지의 이름{name of the father}이라는 관념이 끔찍한 가부장제 사회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부장제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며, 그러한 끔찍한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소리도 존재한다고 기꺼이 말한다.[11]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곧 내가 유사성과 상이성{dissimilarities}을 잘못 지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방금 내가 제시한 외양들 사이의 차이를 특징짓는 방식이 내가 실제로 지각할 수 있는 변이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로쿼이의 목소리에 더 주의 깊게, 또는 더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머니”라는 말은 아이를 낳은 여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자매, 곧 이모도 가리키며, 마찬가지로 “할머니”라는 말 역시 내가 할머니라고 부를 여성의 자매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여성의 딸 역시 사실은 “어머니”이며, 이러한 관계는 계보도 위쪽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그 결과 이로쿼이의 목소리는 각 개인에게는 어머니가 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어머니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게는 어머니란, 미혼자가 반드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처럼, 유일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Trautmann 1987, 53). 나는 여기에 어떤 다의성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에게 드러나는 것의 장 안에서 이러한 다의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를,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는 여러 명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 등이 내게 자명한 것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나의 믿음 체계에서)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나는 그것이 이 목소리가 “가족”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을 중심으로 구분하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발견한다. 즉 오히려 그 핵가족은 “친족”을 구성하는 데에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목소리는 같은 성{same sex}의 부모를 통해 서로 연결된 개인의 집단에 의해 “친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킬 기성의 용어가 내게는 없지만, 어떤 이들이 manataboo를 그대로 사용했듯이 그들 자신의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고, 또는 나에게 더 가까운 어떤 목소리에서 매우 유사한 의미를 전달하는 말을 찾을 수도 있다—이를테면 라틴어라는 목소리가 “계통”{lineage}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로쿼이의 목소리가 가족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이 말하고 있었던 것은 계통이었다. 따라서 이제 내게는, 나와 그들 사이의 차이를 가장 잘 특징짓는 것은 혈통의 규칙이 어머니를 통해 이어지는가, 아버지를 통해 이어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직계(예컨대 아버지-아들)와 방계(삼촌-조카) 사이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취급하는가(그렇다면 삼촌은 아버지가 아니다), 아니면 동일하게 취급하는가(그렇다면 어머니의 자매도 어머니가 된다[12])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13]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언급이 나의 세계 안에 내가 가능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의 변이를 도입하고, 원칙적으로 생각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차이와 동일성을 만들어 내는 방식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사유되지 않았던 하나의 가능성을 내가 상정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이러한 차이적 매개변수{differential parameter}를 나 자신의 용어들(“직계”, “방계”)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용어들은 다의적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 자신의 범주로부터 새로운 변별적/차이적 자질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차이에 의해 나 자신을 특징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나의 세계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제 나는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이 차이적 속성 때문에 나 자신을 재규정해야 한다.

 

이제, 이러한 새로운 차별화와 비교의 원리를 갖추게 된 나는, 다른 목소리와 내가 맺는 차이, 그리고 그 목소리들이 서로 간에 보이는 차이를 동일한 용어로 특징지을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나의 세계 안에서 다의적으로 드러나는 각각의 세계들(그리고 나 자신의 세계 역시)을, 그러한 변별적/차이적 자질을 기준으로 하나의 변이체로 재규정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살펴볼 것이다. 이 변별적/차이적 자질은 아마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내부에서의 동일성의 구성과 관련된 특징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전반 영국 인류학이 특히 선호했던 혈통 집단 이론{theory of descent group}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 이론은 다섯 가지 유형의 친족 체계를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첫째, 단일 계통{unilineal} 체계는 하나의 친족 집단에 속하는 것이 한쪽 성 또는 다른 쪽 성에 의해 규정되는 체계(모계 계통과 부계 계통)이며, 직계와 방계 계통을 통합하지만, 오직 어머니 쪽 또는 아버지 쪽에서만 그렇게 한다. 둘째, 양계{bilineal} 체계는 각 개인이 두 개의 친족 집단에 속하는 체계로, 양쪽 모두에서 직계와 방계 계통의 통합에 의해 규정된다. 셋째, 비구분적{undifferentiated} 체계(나의 체계와 같은 것)는 양쪽 모두에서 두 계통을 구분하며, 그 결과 친족 단위라는 통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형한다. 왜냐하면 이제 친족 단위는 안정된 집단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친족에서 더 먼 친족으로 나아가면서 변화하고 점점 강도가 감소하는 것으로 정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러한 변이를 다른 변이와 연관시킬 수 있다면, 예를 들어 내가 “정치적 권위”라고 부르는 것이나 “경제적 관계”가 조직되는 방식에서의 변화와 연관시킬 수 있다면, 나는 각각의 집단을 변형 체계 안에서의 하나의 위치, 다시 말해 상호 연관된 변이들의 집합 안에서의 하나의 위치로 재규정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나를 규정하는 것이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내가 “가족 관계”라고 부르는 것에서는 자녀를 부모와 관계 맺게 하고 핵가족 단위를 만들어 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은 한 인간 집단의 정치적 구조화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서로 다른 친족 용어 체계들을 서로의 변이체로 다시 특징짓기 위해서는 혈통의 조직보다 다른 하나의 변별적/차이적 자질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동맹{alliance}의 규칙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 구조』에서 여기서 핵심적으로 문제가 되는 매개변수는 개인들이 집단 내에 분배되는 방식이라기보다 혼인이 조직되는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집단들이 동맹을 통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동맹 자체는 여성들의 교환으로 분석된다는 것이었다(1969). 그는 다의성을 해소하고 각각의 용어를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변형 체계 안에서 하나의 변이체로 재규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들을 여성이라는 선물의 상호 교환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했다. 우리가 레비스트로스를 따른다면, 우리는 부모, 자녀, 형제자매 등과 맺는 관계를 차이화함으로써 더 광범위한 교환 체계를 조직하는 특정한 방식에 참여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는 바로 그것이 더 많은 상호 연관적 변이들을 설명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변이체로 재정의하는 작업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더 급진적인 비판의 힘(즉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더 많은 것들을 상대화하는 힘)을 가진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가족 관계”라고 부르는 것에서 우리에게 걸려 있는 것을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친족 집단의 구성이라기보다, 선물로 간주되는 여성의 교환이다. 달리 말해, 이것은 혈통 집단 이론이 말한 것보다도 우리가 친족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훨씬 더 벗어난 어떤 것을 친족에 대해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친족“이” “진실로” 여성 교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가진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친족” 형태들의 변이에 더욱 밀접하게 부합하며, 내가 가진 범주를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상대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내 행동과 닮아 보이는 행동들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했던 다의적인 친족 개념을 사용하여, 바로 그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는 데 도달했고, 그 결과 나는 더 이상 내가 이전에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더 이상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화 절차가 작동하는 모습을 꽤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즉 소위 보편적인 것은 모든 외관상의 동일성을 변이체로 다시 특징지음으로써 재규정된다.

 

레비스트로스 이후에는, 이보다 더 강한 입장들도 제안되었는데, 특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사회” 또는 인간관계라고 부르는 조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관련된다고 결론짓는 입장들이 그러하다.[14] 나는 이 문제를 다루지는 않겠다. 다만 비교의 지식이 자기 자신의 폐허를 딛고 올라가며 전진한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일도, 이에 고유한 일도 아니라는 점만은 말해 두고자 한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변이주의자의 공준을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종류의 지식의 역동성을 규정하는 반증 가능성의 기준과 발견의 도구들을 여전히 갖추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즉 비교의 지식은 새롭게 창출된 관점의 시각에서 우리 자신의 견해를 재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한 형태이다.

 

데카르트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성적인 정신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즉 나는 새로운 변별적/차이적 자질을 발견하고, 그 새로운 변별적/차이적 자질에 따라 사물을 재규정하도록 이끌렸고, 나(와 타자)의 삶에서 본래는 사소해 보였거나 심지어는 보이지조차 않았던 몇몇 측면들, 예를 들어, 직계와 방계 사이의 융합, 분기 또는 구별의 관계, 혹은 레비스트로스를 따른다면 남편과 처남(또는 매부) 사이의 관계가 내가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였을 측면들(예를 들자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모든 친족 체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렇기에 어떤 외양들은 전면으로 부상하고, 다른 외양들은 덜 중요한 것으로서 배경으로 물러난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차이화의 선들{lines of differentiation}을 따라 나 자신을 다시 특징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규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친족은 가족관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가 여성을 교환한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이다. 즉 우리는 아이를 돌볼 때조차, 좋든 싫든 우리는 여성의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더 큰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친족에 대한 진실, 곧 비교의 진실{comparative truth}이다. 가족은 교환의 변형들 속에서 하나의 변이체에 불과하다(이는 “일반화된 교환”{generalized exchange}에 해당한다.).

 

우리가 친족에 관한 이러한 명제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다의성을 깨닫는 과정에서 우리의 개념들이 겪은 변형뿐이다. 즉 우리는 어떠한 사회학적 인과 설명이나, 혹은 뇌에 관해 어떤 계시를 얻었다는 식의 방식으로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족이라는 관념 자체를 상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다. 이것이 비교 방법에 고유한 점이다. 서로 다른 친족 형태들을 비교함으로써, 나는 친족을 어떤 다른 것(교환)의 한 변이체이자 한 사례로 재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나는 나 자신과 타자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서로로부터 다의적으로 차이가 나타나는 방식 속에서만 모습을 나타내는, 우리 모두에게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유사-보편성(친족)을 하나의 특수한 인류학적 개념으로 재정의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은 “인류”, “문화”, “사유”, “종교” 등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개념에 대해서도 수행될 수 있으며, 또 수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비교의 지식의 본성이다. 즉 비교의 지식은 다른 삶의 형태를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른 형태의 삶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재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제 나는 세 번째 휴식—자신감에 찬—을 취할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밤을 벗어날 길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제4성찰: 같음과 다름에 관하여, 또는, 비교의 지식의 “논리”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이전의 성찰들에서 내가 도달한 결론들을 즉각 다시 검토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낀다. 그것들은 너무나 새로운 것이어서 쉽게 내 기억에서 미끄러져 버린다. 나는 또한 지금까지 내가 의존해 온 친족에 대한 예시를 넘어,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 일반의 개념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자기-상대화의 가능성은 두 가지에 달려 있다. 첫째, 나의 범주의 격자 안에서 또 다른 범주의 격자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인데—이를 우리는 조심스럽게 번역이라 부를 수 있다. 둘째, 그 두 격자를 서로의 관계 속에서(또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더 많은 가능성들의 관계 속에서) 다시 특징지을 수 있는 능력인데, 이것이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교이다.   

 

우리는 네 단계—비교 방법의 네 단계인—를 구분해야 한다.

 

             1. 첫 번째 단계는 가족 유사성의 단계이다. 나는 나의 범주의 격자 속에(그리고 그 격자 자체는 다름 아닌 유사성과 상이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나타나는 서로 다른 행동 방식들 사이의 유사성과 상이성의 목록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라는 말은 아이를 낳은 여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어머니의 이름을 따른다.” 이때 세계{world}라는 통념, 특히 알랭 바디우가 Logics of Worlds에서 제시한 의미의 세계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내가 여기서 “격자”라고 부른 것을 “세계”로 정의하고, “세계 W에서 x는 존재하고, y는 존재하지 않는다.”[15]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번째 단계는 다의성의 단계(또는 오해를 지각하는 단계)이다. 나는 나의 행동 방식과 유사해 보였던 행동 방식(어머니를 지칭하는 것 등)이, 나의 것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지각했던 행동 방식에까지 확장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예를 들어, “‘어머니’라는 말은 어머니와 이모 등을 모두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 등” 이후 나는 다음과 같은 (비정상적인{aberrant}) 형식을 띠는 다의성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x = (x,y,w)

z = (z,u,v), etc.

 

             3. 셋째, 나는 이 모든 다의성을 단번에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변이를 특징지으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이로쿼이족이 “어머니”를 (우리처럼) 어머니만이 아니라 (우리와는 달리) 이모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사용하는 이유와, “aunt”를 (우리처럼) 고모에게는 사용하지만, 이모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동일하다. 적어도 나의 경험적 근거와 상상력을 모두 고려할 때, 내가 지각할 수 있는 한에서 그 “이유”는, 그들이 방계를 직계와 통합하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며—이 변이만으로도 다른 모든 변이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이 단계가 바로 비교 가설{comparative hypothesis}의 단계이다.

 

실제로 내가 하려는 것은, 나 자신의 범주 체계 안에서 가산 가능한 개수의 값을 갖는 하나의 변수를 구성하려는 것이다. 이는 변수가 단순히 하나의 이항 대립적 특징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예컨대 직계와 방계를 통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완전히 정렬되거나 체계화된 값들의 집합을 갖기 때문일 수도 있다(예컨대 조합론적 표나 자연수의 집합).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첫째, 가능한 선택지들의 장이 나에게는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목록은 랩소디적{rhapsodic}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것이다.). 둘째, 나는 그 각각의 값으로부터 다의성의 목록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비형식적이고 귀납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명제들을 얻게 된다.

 

“만약 x=(x,y,w) 이고 z=(z,u,v) 라면, 그것은 V가 V–가 아니라 V+이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V– → x = x, y = y, …) ∧ (V+ → x = (x,y,w) ∧ z = (z,u,v) …).”[17]

 

달리 말해, 나는 V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동일성들이 재평가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이의 원리(V, U 등)는 여러 개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비교적 대조{comparative contrasts}의 목록(즉 구별적 특징{distinctive features}의 목록)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두 가지 지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나의 세계의 일관성 자체에 대한 인식은 비교 그 자체로부터, 다시 말해 외재적으로 비롯된다. 즉 나 자신의 세계의 체계성은 세계들 사이의 변이들이 지니는 체계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여기서 작동하는 일종의 “전체론{holism}”의 중요한 특징이다. 둘째, 첫 번째 단계에서의 유사성과 상이성과 세 번째 단계에서의 구별적 특징 사이의 차이의 정도는 비교 가설이 지니는 비판의 힘의 척도를 제공한다. 하나의 특정한 구별적 특징(즉 체계적 차이)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다의성의 수는 비교 가설의 설명의 힘{explicative power}의 척도를 제공한다. 비교 이론은 이 두 가지 기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4. 네 번째 단계는 모든 비교의 격자(동일성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방식)를 그러한 변이들의 체계에 위치시킴으로써 재규정하고, 따라서 그것을 오직 다른 형태들과 맺는 (차이적) 관계에 의해서만 규정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비교의 격자를 하나의 세계라고 부른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세계는 일차적으로, 그것이 다른 가능한 세계들과 연관될 수 있게 해주는 이러한 구별적 특징들의 수에 의해 정의된다. 이러한 연관은 다의성의 연속적인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W¹은 V+, U–이다 등). 그리고 나의 세계는 이차적으로, 이러한 구별적 특징들에 의해 서로 관계 맺는 세계들의 체계 안에서 차지하는 하나의 위치, 그리고 그러한 위치들의 체계(하나의 공간) 안에서의 위치에 의해 정의된다. 가장 단순한 경우,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띨 것이다.

 

표 5.1

  V+ V-
U+
U-

 

이 단계는 변이체들의 체계(즉 레비스트로스적 의미에서의 변형군)의 단계이다. 물론 위의 조합론적 표는 이항적 특징과 가장 단순한 조합 기법만을 사용하여 변이체들의 체계를 말하는 하나의 방식에 대한 빈약한 예시에 불과하다.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모델을 상상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이해 방식들을 이해하는 우리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은 어떤 모델인가?”라는 질문은 경험적인 문제와 형식적 상상력{formal imagination} 모두를 함축하는, 열린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교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델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지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의 잠재적 변형들(즉 자기 자신에 관한 다의성)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한에서의, 지식의 주체에 대한 지식으로 이해되는 인류학은, 그 가장 높은 야심에 있어서는, 과학의 주체 자체가 수행할 수 있는 변이를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변이 일반의 형식 이론이다.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던 무엇일 뿐이라는 것은 옳다{that we are nothing other than what we could become}.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생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즉 그러한 생성의 규정된 형태는 여전히 열린 문제이다—또 진정으로 흥미로운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학은 변이체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형식적 존재론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성찰을 끝맺을 수 있을 것이다. 비교는 모든 전제를 의심하려는 태도에 있어서 형이상학이 도달하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가는 동시에, 형이상학을 하나의 과학적 학문으로 재정의한다는 점을 보여준 것 같다. 형이상학이 과학적인 것은 그것이 경험적이고, 축적 가능하고, 반증 가능하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이 과학적 형식의 지식과 같은 모습을 띠기 때문이다. 비교의 지식은 형이상학이 실정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내가 개략적으로 제시한 것에서 비롯되는 많은 의문과 우려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절차가 성공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간략히 분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절차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선험적인{a priori}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패들 가운데 일부를 검토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실패의 한 가지 이유는 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들 사이에 유사성이 전혀 없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 세계와 나의 세계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이러한 경우는, 예를 들어, 오직 백만 년이라는 길이의 사건들만을 지각하는 존재가 있다고 해보자. 그들은 아마 우리를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각각 백만 년이라는 시간 단위들로 구성된 규모에 우리가 결국 간섭하게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비슷한 경우로, 나는 이 방 안에 내가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미생물이 존재하며, 그들이 내 세계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이러스도, 박테리아도, “진드기류” 등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왜냐하면 가정상{ex hypothesi} 이 세계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전혀 없다면, 한 세계가 다른 세계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세계들이 서로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일 수 있다. 즉 한 세계에서 표현되는 모든 차이가 다른 세계에서도 역시 표현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우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에 직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가지 서로 다른 “실질”{substances}(소쉬르의 개념을 이용하자면)을 통해 나타내는 동일한 언어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모스 부호와 알파벳이 그러하다.

 

가장 흥미로운 실패 사례는 “번역”하는 것, 혹은 로이 와그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떠한 비교의 가설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경우이다. 이 경우 나는 이중 언어 사전을 얻게 되고, 실제로 타자의 삶을 함께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들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나는 나의 세계(또는 나의 경험)를 풍부하게(“확장”) 만들고, 이전에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에서 이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기존의 의견들에 새로운 의견을 덧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처음에 내가 사용했던 표현으로 말하자면, 나는 새로운 목소리를 지각하게 되지만, 그것은 어떠한 “진리”도 정식화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의견들의 다양성을 활용하여 그것들을 서로의 변이체로 드러나도록 다시 특징짓지 못한다. 즉 그것들을 서로 규정된 관계 속에 위치시키지 못한다. 새로운 세계들이 출현하지만, 그것이 그 세계들을 그들의 “본질”, 곧 변이체로서의 본질로 환원하도록 해주지는 않는다. 즉 그것들은 그저 서로 병치되어 있을 뿐이며, 나는 어느 의견이나 어느 언어를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해야 할 이유를 갖지 못한다. 결국 나는 처음의 상태, 곧 비교의 도구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의심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비교의 가설이 비록 잠시이더라도, 비록 불안정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새로운 문제들과 더 강력한 새로운 해결책들을 향해 열리는 방식일지라도 작동한다면, 나는 비교가 나에게 가르쳐 주는 바에 따라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충분한 변이주의적 근거를 갖게 된다. 새로운 모습, 즉 나의 세계 및 세계들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나는 바로 이것이 참과 거짓에 대한 판단이 가변적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공준으로부터만 도출된 것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시각이 다른 시각들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당성을 얻는다.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들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새로운 의견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선별할 어떠한 절차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면, 오히려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가능한 모든 세계 속에서 안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세계에 관한 어떤 “진리”를 구성해 내기 위한 새롭고도 매우 까다로운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비교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즉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관해서 말이다. 나는 나의 세계의 현상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나의 세계의 어떤 측면은 다른 측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의 세계의 일관성을 해체할 수 있는 특징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이것들을 우리는 비판적 요소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세계가 될 수 있는 모든 세계들에 대해, 특정한 측면(“친족”이나 “종교”와 같은)에서 무엇이 말해질 수 있는지도 배우며, 또한 나아가 궁극적으로, 또 사변적으로, 세계 일반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우게 된다. 세계 일반의 형태는 선험적 사변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세계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도록 세계를 구성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진리 덕분에 나는 많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우연성(달리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이 진리를 포함한 모든 것의 궁극적 진리라는 점을 달리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타자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우연적인 존재인지를,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우리가 바로 그 우연성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성에 대한 자각은, 우리가 공유할 수도 있는 필연성들이 상대화되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그것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재규정되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 한, 공허하며 아마도 인위적인 것에 머물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에서 자신의 작고한 스승의 다음의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한다. “이성의 창공에 빛이 없는 달, 희미한 달, 어두운 달이 여럿 떠 있”(2023, 83-84)다는 것이다. 내가 이 인용의 인용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바로 여기에서 레비스트로스가 품고 있었던 직관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곧 이성이란, 떨리는 별들의 변화하는 빛 속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다르게 바라보려는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묘한 천문학이야말로 계몽의 기획으로부터 우리에게 남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어둠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황혼의 변이만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시각—비교의 시각을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하다.


 

사용된 기호에 관한 주

“x”, “y”, “z”는 이다(일반적으로는 “mother”와 같은 단어를 가리키며, 더 넓게는 문화적 동일성을 가리킨다).

“W°”와 “W¹”은 그러한 항들이 자신의 동일성을 획득하고 서로 공존하는 세계이다.

“U”, “V” 등은 세계의 특징, 즉 한 세계에서 현실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특성이다. 이것들은 +와 – 두 가지 값을 가질 수 있으며, “U+”, “U–”로 표기된다. 전자는 해당 특징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후자는 그것이 부재함을 의미한다.

“→”는 고전 일차 논리에서의 함의를 나타낸다(대략 “만약…라면, …이다”라는 의미).

“∧”는 고전 일차 논리에서의 연언을 나타낸다(대략 “그리고”라는 의미, 혹은 더 정확히는 “~ 없이는 안 됨”이라는 의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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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2022).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르네 데카르트. 『제일 철학에 관한 성찰』(2021).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에티카』(2007). 강영계 역. 서광사.

브뤼노 라투르. 『젊은 과학의 전선』(2016). 황희숙 역. 아카넷.

자크 라캉. 『에크리』(2019). 홍준기, 이종영, 조형준, 김대진 역. 새물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2023). 박정호, 박세진 역. 파이돈.

클리퍼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2009). 문옥표 역. 까치. 

Badiou, Alain. 2009. Logics of Worlds, trans. Alberto Toscano, London: Continuum.

Fox, Robin. 1967. Kinship and Marriage: An Anthropological Perspectiv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Kluckhohn Clyde. 1962. Culture and Behaviour, New York: The Free Press of Glencoe.

Leach, Edmund. 1971. Rethinking Anthropology, London: Athlone.

Lévi-Strauss, Claude. 1969 [1949].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London: Eyre & Spottiswoode.

Lévi-Strauss, Claude. 1963 [1958]. Structural Anthropology, trans. Claire Jacobson & Brooke Grundfest Schoepf, New York: Basic Books.

Malinowski, Bronislaw. 1929. The Sexual Life of the Savage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Moyal, Georges J. D. 1997. La Critique cartésienne de la raison. Folie, rêve et liberté dans les Méditations, Montréal/Paris: Bellarmin/Vrin.

Trautmann Thomas R. 1987. Henry Lewis Morgan and the Invention of Kinship,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Wagner Roy. 1981. The Invention of Cultur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 원문의 “Metaphysical Meditations”는 프랑스에서는 Méditations Métaphysiques로, 한국에서는『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혹은 『성찰』로 출판된 책을 지칭하는 의미도 있지만, 후에 “Meditations”라며 해당 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고, 데카르트가 행한 여섯 성찰 자체를 의미할 뿐더러, 성찰의 방법을 마니글리에가 이 글에서도 수행하고 있기에 따로 단행본으로 표기하지 않고 이탤릭체로 표기했다. (옮긴이)

[2] 실제로 악령의 가설은, 나에게 자명해 보이는 모든 것이 사실은 기만적인 것이 되게끔 내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내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음을 함의한다. 데카르트 사상의 이러한 측면에 관한 최근의 논의로는 Georges J.D. Moyal (1997, 176)를 참조하라.

[3] 자크 라캉. 『에크리』(2019). 홍준기, 이종영, 조형준, 김대진 역. 새물결. 7부 ‘과학과 진리’를 참조하라. (옮긴이)

[4] 달리 말해, 인류학은 과학이 하는 일을 한다면 과학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과학이 하는 일은 과학 자신이 한다고 공언하는 것과 다르다. 브뤼노 라투르. 『젊은 과학의 전선』(2016). 황희숙 역. 아카넷.을 참조하라.

[5] 몽테스키외는 어째서인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을 통해 인류학 일반이 직면한 과제를 아이러니하게도 포착해 냈다. “세상에나, 페르시아인이 있다니!”—몽테스키외.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2022). 이자호 역. 문학과지성사. 107. 편지 30을 보라: “군중 속에서 누군가 내가 페르시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순간 갑자기 내 주변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네. “어머나, 세상에! 저 사람이 페르시아인이라고요? 세상에나, 페르시아인이 있다니! 정말이지 놀랍고 믿기지가 않는군요.””

[6] 이러한 방법에 대한 예시로, 나는 여기서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브뤼노 라투르, 메릴런 스트래선 그리고 필립 데스콜라의 다양한 작업을 떠올리고 있다.

[7] 그러나 데카르트가 정확히 보여주듯이, 그러한 인식론적 상황에서는 몇몇 “대상들”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신(악령 가설로 인해), 영혼과 신체의 구별(경험적 지식의 타당성에 대한 믿음의 유예로 인해) 등과 같이 그 인식론적 상황에 의해 직접적으로 문제시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8] “나는 판단을 보류하는 자유로운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답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판단을 보류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사물을 타당하게 지각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판단의 보류는 지각이지 자유 의지가 아니다. 이것을 명백히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날개 달린 말을 표상하고 다른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는 어린이를 생각해 보자. 이 표상은 말의 존재를 포함하며(제2부 정리 17의 보충에 의하여), 어린이는 말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는 말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의 존재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에티카』(2007). 강영계 역. 서광사. 144-145. 2부 정리 49의 주석)

[9] 예를 들어 레비브륄의 『원시인의 정신세계』(2011). 김종우 역. 나남출판.에서의 인과 관계의 통념에 대한 분석을 참조하라. (제2장 6절 ‘원시인의 정신세계에서 인과관계는 온통 신비적이고 직접적이다’를 참조하라. (옮긴이))

[10] 이것이 로이 와그너의 주장이다 (1981).

[11] 이것은 모건이 이로쿼이족을 경험한 방식을 상당히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다. 모건의 모계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석에 대해서는 Trautmann (1987, 49, 51)을 참조하라.

[12] 원문은 “and the mother will be aunt”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글의 논리를 따를 때, 어머니의 자매도 어머니가 되어야 하므로 다음과 같이 옮겼다. (옮긴이)

[13] 나는 여기서 영국의 친족 인류학의 고전적인 교과서를 따르고 있다(Fox 1967).

[14] 나는 여기서 Anette Wiener, Françoise Héritier, Maurice Godelier 그리고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에 의한 작업을 떠올리고 있다.

[15] 바디우의 개념 장치{conceptual apparatus}는 x가 지각 가능한지 아닌지와 같은 단순한 이항적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것은 x가 다소간 현현하는 정도상의 변이를 허용하며, 이는 x가 자기 자신과 다소간 유사{similar to itself}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x가 이 세계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은, x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의 값이 크다고 말하는 것이며, 반대로 y는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의 값이 낮다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덜 일치하며, 그 값이 최소라면 아마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16] 여기에서 사용된 기호들은 1차 논리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기호들이다. “→”는 함의(“만약…라면,…이다.”), “∧”는 연언(“그리고”)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