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네트 대 프레이저, 그리고 정치경제학 비판
백선우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들어가며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현 시대를 한편으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의 위기 등으로 인해 한 때 정의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경제적 문제와 평등주의적 분배의 요구가 중심적 위치를 상실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1970년대 탈-경제중심주의적인 신좌파의 등장과 그 이후 신사회운동의 등장 등과 함께 섹슈얼리티, 젠더, 종교, 민족, 인종 등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적 갈등의 증가와 차이에 대한 인정의 요구 혹은“정체성 정치”가 앞의 분배의 정치를 탈-중심화 시키며, 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녀는 이러한 시대진단으로부터 현대 사회의 부정의를 크게 두 측면, 즉 1) 문화적 부정의와 인정 문제와 2) 경제적 부정의와 분배의 문제로 나누어 파악하고, 이러한 두 축의 문제설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전개한다. 이에 반해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프레이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대진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저서 『인정투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분배의 문제를 사회 내에서 가치평가(혹은 업적평가)와 관련된 인정의 한 형태로 다룬다. 프레이저가 이러한 호네트의 인정일원론을 비판하면서, 프레이저와 호네트 사이의 논쟁이 시작된다.
호네트와 프레이저 사이의 논쟁은 쉽게 “분배냐 인정이냐”의 구도 혹은 분배와 인정 둘 다를 말하느냐, 인정 하나만을 말하느냐 사이의 대립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이론을 검토하면서, 왜 “호네트 대 프레이저”라는 단순한 틀을 벗어나, 이들의 논쟁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의식이 요구되는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프레이저의 이차원적 정의론
프레이저는 「재분배에서 인정으로?」(1995)를 시작으로, 호네트와의 논쟁의 발화점이 되었던 「정체성 정치 시대의 사회 정의」(1998) 등의 논문을 통해 자신의 인정-분배 이원론 혹은 “이차원적 정의론”을 발전시킨다. 1995년 논문 「재분배에서 인정으로?」에서 프레이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사회의 부정의를 문화와 경제에 각각 뿌리를 두고 있는 불평등 분배와 무시로 파악하기 때문에, 이 환원될 수 없는 두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 두 정치, 곧 인정의 정치와 분배의 정치가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와 함께 두 차원의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 인정의 정치와 분배의 정치가 동시에 요구될 때 생기는 인정-분배 사이의 딜레마를 다룬다.
프레이저는 우선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부정의”, 즉 사회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혹은 상징적)부정의를 구분한다. 그리고 이 분석적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부정의를 양 극단으로 하는 부정의에 관한 하나의 스펙트럼을 구상하고, 다양한 부정의를 이 스펙트럼에 위치시킨다. 우선 부정의의 양 극단에 해당하는 이념형 집단은 착취당하는 계급과 경멸받는 섹슈얼리티이다. 이 두 집단은 각각 경제 질서와 문화 질서에 의해 부정의를 겪으며, 이에 수반하는 다른 부정의는 각각이 겪는 1차적 부정의로 환원 가능한 부차적인 것이다. 예컨대 착취당하는 계급이 겪는 부정의는 문화 질서와 구별되는 경제 질서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며, 이들이 겪는 문화적 부정의는 경제적 부정의로 환원될 수 있는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집단이 겪는 부정의는 하나의 치유책, 즉 분배 혹은 인정만으로 충분히 해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 극단의 이념형 집단을 벗어나면, 복잡한 상황에 놓인 이가적 집단(대표적으로 젠더와 인종)을 만나게 된다. 이 두 집단은 앞의 두 집단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를 모두 겪지만, 앞의 두 집단이 겪는 두 부정의가 하나는 일차적이고, 다른 하나는 이차적이어서,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 가능한 것인 반면, 젠더와 인종이 겪는 부정의는 둘 모두 일차적 부정의로,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젠더와 인종이 겪는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는 둘 모두 일차적이며, 다시 말해 둘 모두 근원적인 부정의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프레이저는 이가적 집단이 환원될 수 없는 이중적 부정의를 겪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치유책을 통해서는 이 이중적 부정의를 해소할 수 없으며, 이중적 부정의에 대한 이중적 치유책, 즉 분배와 인정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더 나아가서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되는 분배와 인정을 각각의 치유책이 사용할 수 있는 두 가지 전략, 즉 긍정 전략과 변혁 전략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긍정 전략은 현재의 경제 혹은 문화 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러한 질서로 인해 발생한 결과로서의 부정의를 교정하는 것을, 변혁 전략은 그러한 결과로서의 부정의를 발생시키는 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프레이저는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했던 목표에 도달한다. 프레이저는 앞서 경제 영역과 문화 영역의 구분, 경제 질서에 의해 발생하는 부정의와 문화 질서에 의해 발생하는 부정의의 구분, 양 극단의 이념형적 집단과 그 사이의 이가적 집단 사이의 구분, 그러한 이가적 집단에 대한 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 양자 모두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긍정 전략과 변혁 전략의 구분을 다루었다.
이제 그녀는 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 이에 대한 긍정 전략과 변혁 전략의 조합을 통해 네 개의 항을 제시한 뒤,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가 모두 요구되는 현재의 정세 속에서 과연 어떤 항들 사이의 조합이, 즉 네 가지 조합(긍정적 분배-긍정적 인정, 긍정적 분배-변혁적 인정, 변혁적 분배-긍정적 인정, 변혁적 분배-변혁적 인정) 중 어떤 조합이 전략적으로 좋은지, 다시 말해 어떤 조합이 서로를 방해하는지 아니면 서로를 보완하는지에 관련한 딜레마를 다룬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이러한 딜레마는 긍정 전략이 기존의 집단의 분화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변혁 전략이 분화된 집단을 탈-안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에 따라 프레이저는 우선 모순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긍정적 분배-변혁적 인정과 변혁적 분배-긍정적 인정의 조합을 배제한 뒤, 긍정적 분배-긍정적 인정과 변혁적 분배-변혁적 인정을 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프레이저는 긍정적-분배-긍정적 인정이 기존의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로 인해 수혜 받는 집단이 모욕을 받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합보다는 변혁적 분배-변혁적 인정의 조합을 선호한다. 이는 변혁적 분배-변혁적 인정이 조합, 즉 사회주의적 개혁과 해체주의적 정체성 기획의 조합이 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기존의 분화된 집단들을 탈-안정화시킴으로써 연합을 추구하는데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조합의 문제는 현재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나 질서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대대적인 변화를 촉구한다는 것이다.(Fraser, 1995)
「재분배에서 인정으로?」(1995)에서 제기된 이와 같은 프레이저의 문제의식은 「정체성 정치 시대의 사회 정의」(1998)와 「인정을 다시 생각하기」(2000) 등에서 점점 더 발전되며,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는 중 정치적 배제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글로벌한 세상에서 정의의 틀 새로 짜기」(2005), 『지구화 시대의 정의』(2008)와 같은 논문과 저서에서 분배-인정-정치적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삼차원적 정의론으로 발전한다. (이는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으로,본고에서는 분배-인정의 이차원적 정의론을 다루는 것으로 범위를 제한한다.)
간략히 말해, 프레이저의 기획은 현시대에 대한 프레이저의 진단, 즉 인정 정치가 분배 정치를 대체하는 “대체의 문제”와 인정 정치가 차이에 대한 존중이 아닌 집단의 정체성의 강화 및 사물화 되는 경향으로 나아가는 “물화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인정 정치와 분배 정치 사이의 잘못된 대립을 해체하고, 이 둘 모두의 필요성과 그 둘이 모두 요구될 때 생기는 난점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Fraser, 1995; Fraser, 2000) 주언(Christopher F. Zurn)이 잘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프레이저의 기획의 독특성은 1) 불평등 분배와 무시를 모두 고려하는 이가적 사회이론, 2) 자아실현 모델에서 신분(status) 모델로의 전환, 3)참여 동등성(parity of participation)을 정의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Zurn, 2003: 225)
프레이저에 대한 비판
호네트와 프레이저의 논쟁은 한편으로 컴프리디스(Nikolas Kompridis)가 바르게 파악한 것처럼, “분배냐 인정이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정”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다.(Kompridis, 2007: 45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겐 이것이 더 중요한데, 머레이(Patrick Murray)와 슐러(Jeanne Schuler)가 올바르게 파악했듯이, 오히려 둘 사이의 진정한 논점은 단순히 인정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으로 축소될 수 없는 자본과 인정 사이의 관계에 놓여 있다.(Murray & Schuler, 2000: 105)프레이저가 호네트와 자신을 구별하는 근거는 정체성 정치가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분배 정치의 필요성이었다.
이러한 프레이저의 논조에 따르면, 프레이저와 호네트 사이의 차이는 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가 모두 필요하다는 주장과 인정 정치를 통해서 분배 정치를 포괄하려는 주장 사이의 차이처럼 보인다. 프레이저의 이차원적 정의론은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를 각각의 고유한 영역의 구조에 의해 발생되는 것으로 구분하기 때문에, 경제와 문화 사이의 이원론(암묵적으로 하버마스식의 체계와 생활세계 구분을 따르는)을 초래한다. 물론 그녀는 이러한 구분이 단지 분석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 “경제 부정의와 문화 부정의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분석적이다. 실천에서 이 둘은 서로 얽혀 있다. 심지어 가장 물질적인 경제 제도마저도 구성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문화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 반대로 가장 담론적인 문화 실천 역시 구성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경제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 경제 부정의와 문화 부정의는 통상 서로 비늘처럼 얽혀 있으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변증법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Fraser, 1995: 31-32)(이러한 주장은 프레이저의 다른 글에서도 이어진다. Fraser, 1998; Fraser, 2003)
그러나 호네트가 바르게 지적했듯이, 그녀는 계속해서 경제와 문화의 이원론으로, 더 정확히는“본질주의적 의미에서 “사회 통합”과 “체계 통합””의 구분으로 되돌아간다.(Honneth, 2003c: 378-379) 왜냐하면 프레이저는 이념형적 집단(착취당하는 계급과 경멸받는 섹슈얼리티)과 이가적 집단(젠더와 인종)이 겪는 부정의가 경제 질서와 문화 질서에 의해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한 프레이저가 언급하는 경제와 문화의 상호작용이 단지 현상 차원에서 그것들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일 뿐, 범주적 차원에서 경제와 문화는 “관점적 이원론”이라는 그녀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때 프레이저는 “변증법적”이라는 용어를 두 개의 독립적인 존재들(entities)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머레이와 슐러에 따르면, 프레이저는 경제와 문화(혹은 자본과 인정)를 매우 “구획론적(demarcationist)”이고, “외적인(external)” 관계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해에 따라 프레이저의 기획은“좌파-리카도적(left-Ricardian)” 접근과 유사하게 된다. 이러한 프레이저의 기획의 구획론적 문제와 좌파-리카도적 접근 방식은“부(wealth)와 부를 생산하는 활동들의 사회적 형태들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들을 등한시하는 자본에 대한 개념화”에서 비롯되는 것이다.(Murray & Schuler, 2000: 105-107)
호네트의 인정이론과 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반론
여기서 호네트가 프레이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점은 호네트가 자본과 인정을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호네트는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자본과 인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다 : “루만이나 하버마스처럼 자본주의가“무규범적인” 경제적 진행 체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물론 투쟁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항상 일시적으로 확립된 가치 원칙에 따라 물질적 분배가 이루어지며,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존중, 사회적 가치부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Honneth, 2003b: 218) 이처럼 호네트는 하버마스식의(그리고 암묵적으로 이를 따르는 프레이저식의) 체계와 생활세계의, 혹은 경제와 문화의, 또는 자본과 인정의 이분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경제가 무규범적인 체계가 아니며, 항상 생활세계의 규범적 요구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호네트는 자신의 논문 제목과 같이 “인정으로서의 분배”(Honneth, 2003b)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은 그의 『인정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 호네트는 예나시기의 헤겔의 인정투쟁에 관한 저작들-예컨대 『인륜성의 체계』, 『예나 실재철학 1, 2』-과 미드(George Herbert Mead)의 사회심리학을 결합하여, “인정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사랑(배려), 권리(존중), 업적(사회적 가치 부여)이라는 세 가지 인정 형태를 구분하고, 이를 통해 개인이 갖게 되는 자기 믿음, 자기 존중, 자기 가치 부여라는 세 가지 실천적 자기 관계를 구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 가지 인정을 통해 주체는 온전한 “전인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호네트는 이러한 세 가지 인정 형태에 대한 부정의 형태들(폭력, 권리 부정, 가치 부정)을 규정하며, 이것들에 의한 실천적 자기 관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인정의 훼손이 주체가 가지는 규범적 기대에 대한 훼손으로서 투쟁의 도덕적 동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네트는 이 세 번째 인정 형태, 곧 사회적 가치 부여에서 자본과 인정의 관계를 다룬다. 호네트에 따르면,이 사회적 가치 부여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해 경제적 영역에서 업적 평가 척도에 따른 개인의 기여에 대한 평가와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때 정당한 업적 평가를 요구하는 업적 평가 척도에 관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분배가 정당한 업적 평가를 요구하는 규범적 투쟁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호네트의 인정이론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된다. 호네트에 대한 대다수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제기되는 반론의 핵심은 호네트에 의해 행해진 “문화주의적 환원”에 있다.(Deranty, 2013: 747) 특히 톰슨(Michael Thompson)은 호네트에 의한 “신-관념론적 전회(neo-idealist turn)”(Thompson, 2014)로 인해 비판이론이 “순치[길들여짐](domestication)”(Thompson, 2016)되었다고 비판한다. 우선 보만(David A. Borman)은 호네트가 “인정이 거부된 것이기 때문에, 답은 인정을 성취하는 것이다”라는 방식의 너무 성급하고 안이한 태도를 취한다고 비판한다.(Borman, 2009: 944)그는 호네트에게서 정치경제학 비판적 문제의식이 사라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보만에 따르면, 호네트는 (1) 사회적 투쟁의 동기에 관한 문제의식을 과도하게 확장하고, (2) 인정 요구에 대한 체계의 왜곡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무시하며, (3) 체계-생활세계의 구분에 대한 과장된 문화주의적 비판으로 인해 결국 비판이론의 비판적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ibid.) 호네트는 경제와 분배의 문제가 “개인적 업적”(사회적 가치 부여)을 평가하는 척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호네트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근대적인 “존중” 개념의 분화, 곧 한편으로 보편적 권리의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 개인적 업적에 관한 사회적 가치 부여로 분화됨으로써 등장한 근대 자본주의적 인정 형태의 하나로서 분배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분배의 문제는 사회적 가치 부여와 이것을 부정당한 사람들의 투쟁과 관련된 가치 평가의 척도의 문제로 환원된다.
물론 프레이저의 비판에 대응해, 그는 자본의 자기-증식 경향과 이윤 추구 경향을 인정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규범적 제한으로 수정하지만, 여전히 ““체계통합”에 대해“사회통합”에 우선성을 부여”(Honneth, 2003: 375)함으로써 이전의 입장을 유지한다. 이 때문에 호네트는 자본주의가 그러한 사회적 가치 부여를 체계적-구조적으로 방해한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을 무시하게 된다. 또한 호네트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성공 지향적 행위”와 “규범적 행위”를 구분하며, 전자인 전략적 행위의 실패 “기술적 장애”에 의한 것이며, 후자인 규범적 기대를 가지는 행위의 좌절만이 “도덕적 갈등”이라고 주장함(Honneth, 1992: 260)으로써, 규범적 행위에 대한 “기술적 장애”의 가능성, 즉 “도덕적 요구에 대한 ‘기술적’ 장애물” 혹은 사회적 가치 부여에 대한 자본주의의 체계적 왜곡의 문제를 “선험적(a priori)”으로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든다.(Borman, 2009: 947-948)
데란티(Jean-Philippe Deranty)는 호네트에게 제기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의 비판들(앞에서 살펴본 보만의 논문(Borman, 2009)과 특히 뒤푸르와 피노의 논문(Dufour, F. G. & Pineault, E. (2009). Quelle Théorie du Capitalisme pour quelle Théorie de la Reconnaissance?. Politique et Sociétés 28(3), pp.75-99)을 검토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대다수의 호네트에 대한 비판이 “문화주의적 환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비판의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호네트는 1) 문화주의적 환원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을 간과하며, 2) 현대성을 “도덕적 진보”로 파악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간과하고, 3)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피상적이며, 4)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하는 지구적 범위의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검토하기 어렵게 된다.(Deranty, 2013: 747-748) 이에 따르면(특히 2)와 3)),호네트는 현대성을 규범적 진보의 과정, 즉 인정의 타당성 범위가 확장되는 것으로 파악하지만, 이러한 파악은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주의의 위기의 관점에서 파악하지 못하며, 이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를 축적 위기에 따른 자본주의의 대응 과정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예컨대 뒤메닐(Gerard Duménil)과 레비(Dominique Lévy)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관리혁명,케인즈주의, 복지국가, 신자유주의와 같은 일련의 변화들은 도덕적 진보나 인정의 타당성 확장이 아닌 자본의 축적 위기에 따른 자본주의의 대응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Duménil & Lévy, 2003)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첫 번째 요점이다.문화주의적 환원으로 인해 호네트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조직되는 특별한 방식, 즉 자본주의적 노동이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고 부당한 관계, 즉 착취와 지배의 관계로서 임금 관계” 아래에 놓여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노동을 조직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의 핵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간과한다.(Deranty, 2013: 747)
뒤푸르와 피노는 이러한 방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체화(subjectivation)”, 즉 “총체적 사회구성체로서 자본주의가 개인들에 의해 취해질 수 있는 주관적 위치를 선-결정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맥락을 구조화”하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과 관계된 인정은 오직 이러한 “주체화” 개념 위에서만 적절히 고려될 수 있다고 말한다.(Dufour & Pineault, 2009: 86-93. (Deranty, 2013: 737 에서 재인용)) 호네트나 프레이저가 자본주의 사회가 위와 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논쟁에서 “경제적 부정의는 분배의 문제로 축소”된다.
결론을 대신하여 : 왜 다시 정치경제학 비판인가?
프레이저와 호네트의 이론과 그들에 대한 비판에서 살펴본 것처럼, 프레이저와 호네트는 모두 정치경제학 비판적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의식을 간과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호네트와 프레이저 사이의 논쟁의 지형을 재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프레이저와 호네트의 논쟁에서 진정한 “타자”는 서로가 아니다. 왜냐하면 프레이저의 경제와 문화의 이원론, 혹은 체계와 생활세계의 이원론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에 대한 “물화의 문제”와 호네트의 세 번째 인정 영역, 곧 사회적 가치 부여에 대한 논의에서 간과된 “체계의 자립성”의 문제, 그리고 둘 모두에게서 간과된 특정한 방식으로 노동을 조직하는 “사회적 지배”의 문제는 바로 이 자본주의의 “유사-체계성(quasi-systemic)” 성격과 사회적 지배에 대한 비판을 제시했던 누군가, 즉 정치경제학 비판자로서 마르크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들의 논쟁에서 언급되는 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령”처럼 그들의 논쟁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면,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Derrida, 1993: 365)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자본을 한편으로 체계로, 즉 자립적 형태로 등장하는 것으로 다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를 실체화하지 않으며, 단지 유사-체계적인 것으로, 즉 이러한 자립적 형태가 물신적 가상이라는 것, “사회적 형태를 규정하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현실적인 경제적 질서, 즉 ‘경제 일반’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실제로는 경제적인 것의 환영일 뿐이라는 것”(Murray & Schuler, 2000: 104)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주체화 양식, 즉 인정에 의한 주체화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과 자본에 의해 구조화된 사회를 통한 주체화를 주장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프레이저의 논쟁 상대,그리고 호네트의 논쟁 상대는 동일한 한 사람, 즉 정치경제학 비판자로서 마르크스이다.
프레이저는 현대 사회의 중요한 두 가지 문제, 즉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분배 정치와 인정 정치를 주장한다는 것에서, 또 호네트는 무시의 감정과 인정투쟁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의 동학을 주장한다는 것에서 매우 큰 이론적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정의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면서도, 마르크스가 수행했던 정치경제학 비판의 유산을 간과했다. 그러나 진정한 비판은 단순히 그들이 정치경제학 비판적 문제의식을 간과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인정이론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매개시키는 것이다.
참고문헌
Borman, D. A. (2009). Labour, exchange and recognition: Marx contra Honneth. Philosophy & Social Criticism, 35(8), pp.935-959.
Deranty, J-P. (2013). Marx, Honneth and the Tasks of a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Ethical theory and Moral practice, 16(4), pp.745-758.
Duménil, G. et Lévy, D. (2003). Économie marxiste du capitalisme. Paris: La Découverte.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김덕민 옮김. 그린비. 2009)
Fraser, N. und Honneth, A. (2003). Umverteilung oder Anerkennung? Eine politisch-philosophische Kontroverse. Frankfurt am Main: Suhrkamp. (『분배냐, 인정이냐?』. 김원식·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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