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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계간 <문화과학> 90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그런데 필자인 제가 실수로 완성된 판본이 아니라 수정 중에 있는 판본을 편집자에 보내서 <문화과학> 90호에는 미완성 판본으로 이 글이 실렸습니다. 전적으로 저의 실수입니다.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필자의 완성본은 이곳에 올려둡니다.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화과학> 90호, 2017년 여름. 문화과학사.


이데올로기와 어펙트, 혹은 ‘인간학적 조건’을 어떻게 사고 할 것인가?

-루이 알튀세르와 브라이언 마수미 사이의 쟁점을 중심으로-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역사유물론의 대상으로서 인간학적 조건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소위 ‘정동’이론이 유행하면서 비판적 연구의 자장 안에서 어펙트(affect)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1) 특히 ‘정동’이론은 맑스주의 진영의 이데올로기론이 갖는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기획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정동’이론에 대한 맑스주의 진영의 반비판과 그에 대한 재반박이 수행되면서 이 쟁점은 더욱 뜨거워졌다.2)

이 글 역시 그 논쟁의 맥락에서 씌어졌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알튀세리안 이데올로기 이론을 옹호하면서 ‘정동’이론의 이데올로기론 비판에 대한 반박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논쟁에 개입함으로써 내가 부각하고자 하는 바는 ‘정동’이론은 그르고, 이데올로기 이론은 옳다는 테제의 논증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동’이론과의 논쟁을 수행함으로써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해석하는 관점을 보다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종국적으로는 생산양식의 분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역사유물론의 또 다른 계기인 ‘인간학적 조건’의 문제를 보다 정교하게 사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다.3)

이 글은 인간학적 조건으로서 이데올로기라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는 브라이언 마수미의 ‘정동’이론과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사이의 토론이라는 구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한적 조건을 탐구하려는 최신의 이론적 기획인 ‘정동’이론이 자신의 대결 상대 중 하나로 ‘이데올로기’론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수미의 ‘정동’이론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그 개념상 중대한 결함이 있거나, 아니면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더 이상 유효한 개념이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데올로기론의 한계를 지적하며 ‘정동’ 개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정동은 이데올로기 이후 포스트모던 권력을 재고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된다.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어떤 경우엔 가장 유해한 형식으로, 우리 곁에 상당부분 건재하지만, 더 이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는 않다.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권력이 기능하는 전지구적 양태를 설명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전체를 규정할 수 없는 거대한 장 내에서, 이데올로기는 이제 단 하나의 권력 양태에 불과하다.4)

이데올로기는 이제 현 시대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및 그 권력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하기에는 불충한 개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권력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작동하며, 그러므로 그러한 권력과 투쟁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넘어서는 차원을 사고해야 한다. 그 차원이 바로 ‘정동’이라고 마수미는 주장한다.

나는 이 글에서 마수미의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비판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 할 것이다. 마수미에 대한 비판은 우선 그의 이데올로기론 비판이 알튀세르에 대한 오독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이후 마수미가 제시하는 ‘정동’이론 자체의 난점들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려 한다. 하지만 ‘정동’론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인간학적 조건의 문제를 사고하는데 ‘정동’은 무의미한 개념이고 알튀세르에 의해 쇄신된 이데올로기론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정동’이론의 문제제기를 통하여 오늘날의 정세 속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구성하는 계기들 가운데 어느 것에 보다 더 강세를 찍어야 하는지를 보고자한다.

역사유물론이 사회적 삶의 조건에 대한 분석 프로그램이라면, 그러한 사회적 삶의 조건 가운데 인간학적 조건이 포함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조건이 변동하는 것이라면, 이데올로기 개념을 엄밀하게 논구하는 것 못지않게 그 개념이 현재의 역사적 지반 위에서 어떻게 유효하게 작동하도록 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동’이론이 던지는 문제의식 가운데는 수용할 부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은 ‘정동’이론의 문제제기에 대해 이데올로기론은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봄으로써 동시대의 인간학적 조건과 관련된 정치를 분석하고 사고하기 위한 사고의 틀을 모색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2.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이데올로기의 쇄신

맑스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비판들

맑스주의의 이데올기 개념에 대한 비판은 맑스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까지 가장 전형적인 비판은 들뢰즈/가타리, 그리고 푸코에게서 나타난다. 가령 들뢰즈/가타리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장의 무의식적 리비도 투자가 있는데, 이것은 전의식적 투자들 또는 전의식적 투자들[이어야 마땅한] 것과 공존하기는 하지만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체들이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에 명백히 어긋나게 행동할 때, 또 그들의 객관적 상황으로 보아 투쟁해야 마땅한 계급적 이해관계와 이상들에 찬동할 때, “그들은 속았다, 대중은 속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 오해와 가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문제이며,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이다.5)

또 다른, 그러나 유사한 푸코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나로서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사용하기 곤란하다고 봅니다. 첫째는, 이데올로기는 마치 진실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 그 진실에 반대되는 지식은 모두 이데올로기라고 몰아붙이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둘째로, 이데올로기가 갖는 용어상의 난점은 그것이 주체, 또는 주관이라는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이데올로기는 하부구조나 물질성 또는 경제적 결정요인에 비하면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6)


들뢰즈/가타리 및 푸코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 이데올로기란 ‘속임수’, ‘가상’이고 이에 대립하는 진실과 과학이 존재한다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진실을 복원해야할 주체가 존재하며, 진실은 바로 경제적 하부구조/토대에 존재한다는 식의 이분법을 향해 있다. 맑스주의가 입각하고 있는 토대와 상부구조, 진실과 허위, 깨달음과 속임수,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은 사태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오히려 흐릴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를 사고하고자 한다. 푸코의 경우 권력 관계라는 일반화된 장을 상정하고 여기서 벌어지는 전투에 주목한다. 이 전투에는 참과 거짓, 이데올로기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자율성을 되찾아야할 능동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의 일의적 장을 상정하며 지배 권력의 문제도, 이에 대항하는 혁명적 실천의 문제도 사실은 모두 욕망이 배치되는 방식의 문제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도 거짓, 속임수, 가상 따위는 없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것도 실정적인 것이며 저항도 실정적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들뢰즈/가타리와 푸코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전제된 이분법을 해체하고 그런 이분법과 다른 방식으로 지배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자발적 복종과 이에 대한 저항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한 이데올로기론의 쇄신 : 상상으로서 이데올로기

그러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 개념은 그들의 비판이 행해지던 시대에도 이미 맑스주의에 의해 극복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 및 푸코의 동시대에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유명한 글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단지 지배계급의 속임수, 그로 인해 피지배계급이 갖게 된 허위의 따위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을 탈피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맑스 자신으로부터 연원하는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쇄신을 통해 구축되었다.

이데올로기 이론의 쇄신이라는 알튀세르의 기획은 생산관계의 재생산 메커니즘의 규명이라는 문제설정에 기초하고 있다. 알다시피 그에 의하면 재생산의 비밀은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생산에 있으며, 이데올로기가 담당하는 핵심적 기능이란 바로 노동력의 재생산,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순응적인 주체성의 생산에 있다. 그 유명한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7)는 테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그런데 호명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그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영원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상상적 성격이다.

이데올로기가 영원하다, 즉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8)는 테제의 의미는 특정한 생산양식 하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구체적 이데올로기들이 영원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영원성이란 ‘이데올로기 그 자체’, 혹은 이데올로기 일반은 “모든 (시간적) 역사에 대해 초월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 걸쳐 어디서나 나타나고 역사를 관통한다는 것, 따라서 그 형태에 있어 변함없다는 것을 의미”9)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를 계급지배의 효과로 파악하며 계급이 폐절된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던 맑스와 달리 알튀세르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존속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도덕이건 예술이건 ‘세계의 표상’이건 간에, 역사 유물론에서 이데올로기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산주의적 사회를 상상할 수 없다...... 엄격하게 간주된 맑스주의 이론의 현존상태에서는, 특정한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생산의 사회적 조직과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들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10)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없는 역사적 사회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또한 이데올로기 일반이란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존재하는 한 어떠한 생산양식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역사적 사회 속에서 개인들은 영원히 이데올로기 안에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체험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영원성은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계기, 곧 ‘상상’(imagination)이라는 계기에 연관된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그들의 실재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11)으로 정의한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개인들은 그들의 실재조건, 즉 개인들의 동일성, 활동양식, 사고방식 등을 규정하는 조건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표상되는 것은 개인들이 그러한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항상 상상적인 관계라고 알튀세르는 말한다. 이는 결국 개인들이 자신의 실재 조건을 어떻게 체험하는가의 문제이다.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을 체험하는 방식이 바로 상상이라는 것이 이 테제의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서 상상은 개인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아무것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현실 초월적 구상 능력과 같은 것으로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진태원이 매우 잘 보여준 바와 같이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벼려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상상이라는 용어는 스피노자로부터 연원하는 엄밀하게 규정된 철학적 개념이다.12) 스피노자에게 상상이란 인식 한 종류로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타당하지 않은 인식을 뜻한다. 상상이란 자신의 신체가 외부의 다른 존재자(물체나 기호)에 의해 변용될 때, 그 변용의 관념에 입각해서 외부의 존재자를 관찰하는 정신의 활동을 의미한다.13) 이때 상상에 의해 개인들 안에 형성된 관념은 외부의 존재자의 본성보다는 그 존재자에 의해 변용된 내 신체의 상태를 더욱 많이 포함하고 있다.14) 그러므로 상상이란 인식방식을 통해 형성된 관념이란 인식 대상의 본질에 대한 왜곡을 포함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은 타당하지 못한 인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상적 인식만이 아니라 이성적 인식도 신체의 변용이라는 기본 조건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외부 세계와의 마주침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 외부 세계의 존재자들과의 마주침은 인간 신체에 항상 일정한 변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인식은 언제나 그 발단에 있어서는 신체의 변용의 관념에 입각한 대상의 인식, 즉 상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인간이 이성을 통하여 대상에 대한 타당한 인식을 가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에 의한 인간 신체의 변용과 그로 인한 변용의 관념이 형성되는 것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63빌딩의 높이가 273M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있어도 남산 위에서 보는 63빌딩은 우리에게 새끼  손가락 높이만 하게 나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상적 인식은 인간을 구성하는 내적 요인이 물리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것은 이성적 인식에 의해서 완전히 대체거나 사라지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상상은 인간의 세계인식을 위한 영원한 초기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이란 차라리 인간으로서 우리가 세계를 체험하게 되는 기본적인 틀, 곧 인간학적 조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개인들이 자신의 실재조건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에 대한 표상이라고 할 때 알튀세르의 상상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상상 개념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스피노자적 의미의 상상, 즉 인간의 신체적 구조에 결부된 인식의 초기 조건을 정치라는 맥락에서 포착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결코 계급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는 허위의식이거나 지배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 따위가 아니다.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에 바탕을 두고 구축된 그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조직되는 질서에 의해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화되어 있는 조건인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참된 앎과 속임수, 진실과 거짓, 참된 의식과 허위의식이라는 이항대립을 전제하지 않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부재하는 완전한 참된 인식이란 없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La Pensée에 게제된 것이 1970년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진실과 권력’이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푸코가 한 것은 1977년이었고 들뢰즈/가타리의 비판이 담긴 텍스트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1972년에 출간되었다. 이러한 서지 정보가 알려주는 바는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해온 그들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쇄신 작업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푸코와 들뢰즈/가타리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비판은 알튀세르에 대한 의도적 무시 내지는 은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즉 이데올로기 개념을 정통 맑스주의에 국한하는 방식으로 이들은 이데올로기 개념을 비판하고 폐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이데올로기 개념을 비판함으로써 또한 이들의 비판은 극복된 개념에 대한 비판이라는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3. 정동의 정치철학 - 이데올로기에서 정동으로?


알튀세르 비판 그리고 정동적 전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겨냥한 비판의 핵심은 그것이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 있기 보다는 기능주의적이라는 점에 맞추어져 있다. 재생산이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것에 있으며 이러한 호명이 항상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체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항하는 주체는 어떻게 생산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지배 권력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항상 성공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이론에 그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일면적 독해에 근거한 것이며 알튀세르 자신에 의해서도, 그리고 이후 알튀세르 해석자들에 의해서도 반박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주체화의 가능성을 자신의 이론적 구조 내에서 충분히 내재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했다는 비판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지배 질서 내지는 지배 권력에 의한 주체화와는 달리 그 질서에 저항하고 그 권력과 투쟁하는 주체화의 가능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지반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맥락에서 동시대의 비판적 이론가들은 ‘정동’에 주목하는 것이다.

‘정동’이론가들은 어펙트(affect)야말로 인간이 지배 질서에 예속되는 메커니즘임과 동시에 그에 대하여 투쟁하는 저항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동시적으로 해명해주는 관건적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정동은 예속적 주체화와 전복적 주체화 모두를 동시적으로 사고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학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정동을 통해서 정치를 사유하려는 이들은 현재적 권력의 핵심적 수단이자 대상이 바로 정동이라고 파악하며, 정동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정치에 대한 분석으로 권력 비판의 작업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더욱 중요한 점은 권력의 작동이 정동을 통해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의 한계 역시 ‘정동’이라는 것에 있다. 가령 밴 엔더슨은 ‘정동’의 정치적 함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약 권력이 정동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는 권력이-어떤 정치적 구성체이건- 정동의 이차적이고 반동적인 축소밖에 되지 않다는 것을 보증한다. 정동은 그 자체 한계가 없기 때문에 권력의 한계로 작용한다. 정동이 불특정한 외부(그중의 하나가 잠재성으로 불린다)에 가해진 ‘관점’이기에, 그것은 생명을 표현적이고 차이 나는 것으로 드러낸다.15)


이런 관점에서 시도되는 정동의 정치철학적 개념화 작업은 정동이 단지 권력분석에서 필수적인 개념임을 보여주는 데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동이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대임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번째 행보(브라이언 마수미의 정동이론-인용자)는 정치적인 것의 단순한 확장보다 더 급진적인데, 왜냐하면 여기서 정동은 명령하고 포획하고 제한하는 권력의 유효성에 대한 한계로서 설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동에의 관심은 약속과 동의어이다. 정동의 약속이란, ‘아래에서부터’ 오는 권력의 생산적 효과를 목격할 때조차 창조적 생산의 운동이 더 우선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6)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정동의 약속”이란 어떤 약속일까? “창조적 생산의 운동”, 즉 현재의 지배적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저항적-해방적 실천 가능성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수미를 비롯한 “두 번째 행보”에 속하는 ‘정동’ 연구자들의 정동 이해가 어떤 것이기에 정동에서 이렇게 강한 희망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정동적 전회’라는 일련의 지적 흐름에 동참하는 이들은 정동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기에 거기서 일종의 저항과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약속’을 발견하는 것일까?

정동의 정치철학 : 브라이언 마수미의 경우

브라이언 마수미의 「정동의 자율」17)은 정동적 전회를 촉발한 기념비적 저술들의 목록에 속한다고 평가된다. 뛰어난 들뢰즈 연구자이기도 한 마수미는 자신의 정동 이해에서도 들뢰즈의 이론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수미는 정동을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논의하는데, 그는 정동을 들뢰즈가 ‘강도계’(system of intensity) 불렀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마수미는 정동과 강도를 동일시하는데 이를 통해 마수미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정동이 개체성의 발생 이전에 이미 존재하며 개체들이 발생한 이후에도 각 개체들을 관통하는 무엇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동은 개인성의 성립 이후에 개인에게 속하는 감정(emotion)18)이 아니다. 정동은 오히려 개인성 또는 개체성을 발생하게 하는 개체 이전의 수준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동은 이들의 실제적인 특수성 안에서, 이들(정“신과 육체, 의지와 인식, 육체의 심층과 외피, 과거와 미래, 작용과 반작용, 행복과 슬픔, 정적과 흥분, 수동성과 능동성” 등등-인용자)의 발생점이다. 또한 특이성 안에서, 이들의 잠재적 공존과 상호연결 안에서, 이들의 소실점이다........ 들뢰즈의 철학이 개념화하려 노력을 기울인 강렬함의 왕국(강도계-인용자)이 비록 경험적으로 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선험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초월적인 것은 아니며,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강렬함은 물질에 그리고 사건들에, 정신에 그리고 육체에, 그리고 그들을 구성하고 또 그들이 구성하는 분기의 모둔 수준에 내재한다.19)

이 복잡한 문장에서 마수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정동이란 각각의 사물 및 인간 개인의 발생과 소멸의 지점, 개체들의 운동과 개인들이 느끼는 감정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대, 각 개체들이 합성되어 또 다른 개체화를 이루게 되는 장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수미에 의하면 정동은 무엇보다 감정(emotion)과 구별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정동을 각각의 개인들이 느끼는 슬픔과 기쁨, 유쾌함과 불쾌함 등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개인성에 의해 포획되고 지층화된 정동의 응고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수미는 감정을 “주관적 내용으로, 경험의 질을 사회언어학적으로 고정하는 것”이며, “경험되는 순간부터 그것(감정-인용자)은 개인적인 것으로 제한”되며, “자격이 부여된 강렬함(intensity)이며, 틀에 박힌 것”이라고 규정한다.20) 즉 감정이란 “의미론적이며 기호학적으로 형성된 진행과정 속으로, 내러티브화할 수 있는 작용-반작용의 회로 속으로, 기능과 의미 속으로 강렬함이 삽입되는 합의된 지점”이다.21)

결국 인간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란 인간에 의해 언어적으로 해석되고 인지 가능하게 의미화된 정동을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동은 항상 개인성을 초과하고 있으며 오히려 개인성을 규정하는 선험적 장에 속한다. 그것은 일종의 ‘전개체적인 것’이다. 정동은 서사, 언어구조, 기호체계, 문화 등 인간적 의미세계에 의해서 전부 포획되지 않으며 그것들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의 차원을 항상 남긴다.

그런데 왜 마수미는 이렇게 전개체적인 장, 강도로서의 정동에 주목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그와 상관적인 통치 권력이 자신의 타겟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정동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지배 권력은 미디어를 매우 중요한 통치의 테크놀로지로 삼고 있는데 미디어는 정동을 겨냥하여 정동을 더 효과적으로 포획하고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정동에 기반하여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마수미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정동을 분석해야 현재적 자본주의와 통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합하게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 자체보다도 더 빠르고 확실한 경제효과를 생산하는 정동의 능력이 의미하는 바는 정동이 후기 자본주의 체계의 실제적 조건이며, 내적인 변수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장에 버금가는 하부구조이다.(『가상계』, 87쪽)

하지만 그가 정동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렇게 현대의 정치, 경제 권력이 정동에 기초하여 작동하고 있다는 것, 정동을 통해 인구를 통치하고 이윤을 축적한다는 점에만 국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동에 대한 그의 강조점은 그 권력들이 결코 정동을 온전히 장악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데에 찍혀있다. 모든 권력체들도 개체인 인상 정동은 항상-이미 권력체의 개체성을 넘어서며 초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동은 권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지대이기도 하고, 개체성을 질서 지우는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정동은 현행적 지배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잠재력의 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정동은 하부구조를 넘어서 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서든 작동한다. 간접적으로 오는, 영토들을 교체하고 그 모두를 가로질러 효과들을 생산하는, 그 능력은, 정동에 메타공장적 편재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하부구조를 넘어선다. 그것은 횡단선이다.22)

정동을 연구하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동이야말로 권력의 동력이지만 권력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수미는 정동연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잠재적인 것(the virtual/국역자에 의하면 가상적인 것)에 관한 개념들은, 발생에 대한 화용론적 이해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변화(새로움의 유도)를 촉발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잠재성의 끄트머리(the edge of virtual)이다. 그곳은 잠재성이 현행적인 것(the actual/국역자에 의하면 현실적인 것) 쪽으로 새어 들어가는 곳이다.23)

그런데 이데올로기 개념은 바로 이 역설적 차원, 지배의 힘이 곧 저항의 힘이 되는 차원을 사유하지 못한다고 마수미는 주장한다. 단지 이데올로기는 정동의 포획, 제어, 환원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권력의 전복 가능성이 권력의 작동방식,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작동방식에 어떻게 내재되어 있는지를 알튀세르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그는 파악한다. 마수미는 데이빗 봄의 ‘함축된 질서’라는 개념이 사실상 자신이 말하는 정동과 같은 것임을 보이면서, 이 개념에 입각하여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것(함축된 질서-인용자)이 필요한 이유는 의미화의 평면 위에서 포착과 폐쇄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절대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모든 이데올로기 구조의 이질적 현실로의 열림의 척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과 관련하여 저항의 개념적 가능화를 위한 제스처이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상식적 의미에서는 신념의 구조로, 문화-이론적 의미에서는 호명하는 주체의 정위로 해석된다.24) 

이 문장에서 언급되는 ‘이데올로기 구조’란 명백히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겨냥하고 있다. 정동은 신념의 구조, 폐쇄된 의미세계로의 호명, 곧 이데올로기 구조를 넘어서는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개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다시 말해, 주체를 호명하는 이데올로기 구조가 아무리 절대적으로 강력하더라도 정동(=함축된 질서)은 그것을 빠져나가며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동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와 같은 대비는 정동 개념이 없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저항을 사고할 수 없다는 비판을 함축하게 된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러한가? 이제 어펙트라는 질문을 가지고 다시 알튀세르에게로 돌아가 볼 차례이다.


4. 이데올로기론의 재검토와 ‘정동’이론비판


알튀세르의 이데올기 이론에 있어서 정서(affect)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갖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의 영원성 테제가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실재 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개념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피면서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허위의 문제가 아님을 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라는 이분법이 갖는 한계를 부각함으로써 이데올로기 개념을 폐기하려는 푸코 및 들뢰즈/가타리의 시도가 그들 당대에 알튀세르에 의해 쇄신 이데올로기 개념에는 해당할 수 없는 철지난 비판임을 논의했다. 그렇다면 마수미의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즉 알튀세르의 이론에는 정동의 차원이 사상되어 있기 때문에 저항을 내재적으로 사유할 수 없다는 비판은 어떠할까?

개인들이 자신의 실재조건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의는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25)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테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이 정서(affect)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존재를 갖고 있음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하 ISA)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보여준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작업은 언제나 특정한 장치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ISA들 안에서 우리의 신체는 특정한 행동들을 의례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신체적 수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동일성의 감각을 획득하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인용하고 있는 “무릎을 꿇어라. 기도의 말을 읊조려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문장처럼, 우리는 학교 안에서 학생으로서 해야 할 행동을 수행하는 물질적-신체적 과정을 통하여, 혹은 회사에서 직원으로서 해야 할 행동을 수행하는 물질적-신체적 과정을 통하여 특정한 주체가 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장치에 의해서 개인이 특정한 주체로 호명된다는 알튀세르의 사유 또한 스피노자적 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 했듯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다. 상상이란 변용의 관념에 의한 외부 대상의 관찰이다. 그런데 상상은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따라 생각해보면 정서(affect)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정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타당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26)

여기서 정서는 두 가지 계기에 의해서 규정된다. 하나는 신체적 능력의 증대와 감소라는 계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체의 변용과 변용의 관념이라는 계기이다. 지금의 맥락에서는 바로 이 두 번째 계기인 변용이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하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스피노자에게 상상이란 신체의 변용의 관념에 의하여 자기 외부의 존재를 관찰하는 정신의 활동을 말한다. 그런데, 신체의 변용의 관념이란 또한 정서를 규정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즉 정서는 ‘신체의 변용’을 상상과 공유하고 있다. 양자는 신체의 변용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이란 외부의 물체에 의해 나의 신체가 변용될 때,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인 정서를 통해 외부의 물체를 파악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상상은 정서에 의한 인식, 혹은 항상 정서와 결부되어 있는 인식, 혹은 정서에 입각한 인식인 것이다.

이제 다시 알튀세르가 말하는 ISA라는 개념으로 돌아가 보자. ISA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이란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물질적 장치를 통해서 작동함을 포착하는 개념이다. 개인들은 가족, 교회, 학교, 군대 등과 같은 특정한 물질적 장치들이 요구하는 행동들을 신체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특정한 주체가 된다. 무릎을 꿇는 신체적 작동이 신의 존재를 믿는 신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때 내 믿음이란 교회라는 외부의 물질적 장치에 의해서 내 신체가 변용될 때, 즉 무릎을 꿇을 때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ISA,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은 개인의 신체에 작용함으로써 그 신체를 변용함과 동시에 변용의 관념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변용의 관념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는 ISA가 개인의 신체에 작용함으로써, 즉 개인의 신체가 ISA에 의해 변용됨으로써 형성된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장치들이라는 물질성을 통하여 개인의 신체를 변용함으로써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란 정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것은 개인의 의식이나 사고에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지기 이전에 개인의 신체에 대한 작용을 통해 그 신체를 변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ISA가 겨냥하는 근본적인 대상은 바로 신체의 변용 및 변용의 관념, 곧 정서(affect)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ISA를 통한 호명의 과정이란 정서적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자신의 실재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상상, 즉 이데올로기에는 항상 정서의 차원, 즉 기쁨, 슬픔, 욕망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만들어지는 “상상적 관계란 현실을 묘사하기 보다는 하나의 의지(보수적, 관행적, 개혁적 또는 혁명적인), 게다가 하나의 희망 또는 향수를 표현하는 것”27)이라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희망이나 향수와 같은 정서의 차원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개인의 주체로 호명 과정은 정확히 정서와 관련된 것이다. 이때의 정서는 특히 수동적 정서이다. 내 신체가 변용되고 및 그러한 변용에 의해 관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내가 타당한 원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서에 의한 인식인 상상은 그래서 항상 혼돈된 인식인 것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의 실재적 조건에 대한 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고 말할 때, 즉 “모든 이데올로기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만일 사람이 그 진실 속에서 체험하지 않는다면) 모든 상상적 왜곡의 기반은 바로 이 관계의 상상적 본성”28)이라고 주장할 때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본성이란 곧 수동적 정서에 의한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사실은 정서(affect)라는 인간학적 조건을 겨냥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이 정서의 문제를 방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정서의 정치적 효과라는 문제를 다루는 이론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정서를 대상으로 작용함으로써 주체성을 형성하는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이론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브라이언 마수미의 알튀세르 비판, 곧 그의 이데올로기론이 어펙트(affect)의 차원을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폐쇄 의미화의 평면이 기능하는 방식만을 설명할 뿐이라는 비판은 알튀세르에 대한 무지로부터 비롯된 통념적 비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하겠다.

‘정동’이론의 난점들

그러나 알튀세를 잘 못 읽었다고 해서 마수미의 논의가 부질없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마수미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가지는 정서의 문제에 대한 함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의 정동이론에 별다른 난점이 없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마수미의 정동이론에는 몇 가지 난점들이 있다.

일차적으로는 개념적 적합성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정동’(affect) 개념을  스피노자 및 들뢰즈와 명백하게 연결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9) 이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개념의 정확한 의미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는 정동과 관련된 스피노자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정념 안에 있는, 영향 안에 있는, 능동과 수동성의 구별에 앞서는, 세 번째 상태, 배제된 중간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 순수하고 생산적인 수용성 안에 있는 하나의 기원, 즉 정동(affect)으로부터 나온, 정신과 육체의 서로 평행하는 생성-능동의 철학이다.30)

여기서 마수미가 말하는 능동도 아니고 수동도 아닌 ‘순수하고 생산적 수용성’으로서 ‘정동’이란 무엇인가? 이는 자극에 의해 능동의 극으로도, 수동의 극으로 움직일 수 있는 어떤 중지(suspense), 언제든지 다른 특질을 띠고 변이될 수 있는 비결정성, 시몽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준안정적 평형’과도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수미는 ‘정동’을 미결정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 미결정성을 정동의 자율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일단 이와 같은 어펙트(affect) 개념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어펙트와는 다른 함의를 가진다. 스피노자는 어펙트에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이 그러한 근본적 어펙트이다.31) 그런데 스피노자는 기쁨도, 슬픔도 모두 ‘이행’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그는 욕망을 의식된 충동, 즉 정신과 신체에 모두 관련되는 코나투스로 이해한다.32) 즉 어펙트란 어떤 상태, 멈춰짐이 아니라 이행, 움직임, 운동의 차원에 속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펙트를 능동도 아니고 수동도 아닌 세 번째 ‘상태’로 규정한 적이 없다.

어펙트를 움직임, 이행으로 이해하는 것은 마수미가 직접적으로 기대고 있는 들뢰즈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들뢰즈는 어펙트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의한다. 어펙트란 “존재의 능력의 연속적인 변이”33)이다. 그에 의하면 “어펙트는 힘의 실행”이며 “내가 능동과 수동 속에서 경험하는 것”34), “능력의 증대와 감소”35)이다.

어펙트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행입니다. 변용은 어두운 상태이자 밝은 상태입니다. 절단되는, 두 개의 연속적인 변용들. 이행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생생한 변이입니다.36) 

그러니까 마수미가 기대이고 있는 철학적 전통에 의하면 어펙트는 능동과 수동 이전에 존재하는 중간항이나 상태, 능동으로의 움직임이나 수동으로의 움직임이 중지된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에게나 들뢰즈 모두에게서 어펙트는 준안정적 평행과 같은 움직임의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중지나 순수한 수용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펙트는 능력의 증대와 감소, 이행과 변이, 즉 움직임이다. 다시 말해 마수미의 ‘정동’ 개념은 그가 끌어들이려는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정서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마수미가 말하는 “정념 안에 있는, 영향 안에 있는, 능동과 수동성의 구별에 앞서는, 세 번째 상태, 배제된 중간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 순수하고 생산적인 수용성 안에 있는 하나의 기원”이란 어펙트라기 보다는 차라리 들뢰즈/가타리의 맥락에서는 ‘강도 0’(degree O)로서 ‘기관 없는 신체’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들은 스피노자의 구도 속에서 기관 없는 신체를 속성에, 강도를 양태에 위치시킨다.

결국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한 위대한 책은 『에티카』가 아닐까? 속성이란 기관 없는 신체의 유형 또는 유이며, 실체, 역량, 생산의 모체로서의 강도 0이다. 양태란 발생하는 모든 것, 즉 파동과 진동, 이전, 문턱과 그레디언트, 특정한 모태로부터 시작해 특정한 유행의 실체 아래서 생산된 강도들이다.37)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에게 강도란 스피노자적 구도에서 양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양태란 “능동과 수동성의 구별에 앞서는, 세 번째 상태, 배제된 중간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 순수하고 생산적인 수용성 안에 있는 하나의 기원”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수미의 ‘순수하고 생산적인 수용성’은 차라리 속성에 해당하며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에서는 강도 0로서 ‘기관 없는 신체’에 가깝다. “기관 없는 신체는 강도들을 지나가게 하고 생산하며, 자체로 강렬하며 비연장적인 내포적 공간 안에 강도들을 분배”하는 것이며 “강도적이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지층화되지 않은 물질, 강도적 모체, 강도 0”38)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수미는 스피노자와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자의적 독해에 기반하여 자신의 ‘정동’이론을 구축함으로써 이 개념으로 그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불명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의적 독해는 정동이란 개념이 갖는 정치적 함의에도 혼돈이 발생하도록 만든다.

‘정동’에 대한 마수미의 규정을 수용한다고 하면 ‘정동’이란 순수한 생산적 수용성이며, 잠재적인 것이자 강도이고, 현행화의 방향은 그 자체로 규정되지 않은 미결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동’이 기존 질서를 뚫고 나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동의 그와 같은 분출의 정치적 방향 역시 당연히 미결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정동’이 현행적 자본주의 질서를 뚫고 나와 그것을 전복한다고 하더라도 ‘정동’의 본질적 성격상 현행화의 방향(sense)은 미결정된 것이기에 정동의 힘이 향할 방향이 반드시 해방적이고 평등 지향적이며 민주적인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정동의 자율성이 ‘의미론적이며 기호학적으로 형성된 진행과정’, ‘내러티브화할 수 있는 작용-반작용의 회로’, ‘기능과 의미 속으로 강렬함(intensity)이 삽입되는 합의된 지점’과 같은 현행적 질서를 뚫고 분출할 수 있으며, 그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힘일 수는 있지만 그렇게 전복된 질서가 반드시 해방의 약속을 담보한다는 보장은 ‘정동’ 내부에는 없다. 이미 들뢰즈/가타리가 잘 보여준 바와 같이 파시즘조차도 어펙트의 차원에서 실행된 정치이다. 파시즘은 당대 독일의 사민주의 체제라는 현행적 질서를 폭파하며 분출한 어펙트적인 대중운동이었다. ‘정동’의 자율성, ‘정동’의 미결정성이 곧 ‘정동’의 해방적 성격을 담보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39)

마수미의 ‘정동’이론은 ‘정동’을 대상이자 수단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는 권력의 한계를 명시하며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권력의 한계 지점으로부터 ‘정동’이 나갈 방향, 그것에 의한 변화의 지향을 ‘정동’ 그 자체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행 질서에 대한 ‘정동’의 반발 내지는 초과를 해방적 정치의 차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동에 정치적 방향/의미(sens)를 부여하는 의미화의 작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정동’이라는 존재론적 힘에 정치적 지향점에 대한 인식 내지는 표상이 ‘정동’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혹은 표상의 작업과 결합되지 않는 ‘정동’이란 현행질서에 대한 맹목적 부정의 힘 이상이 될 수 없다.40) ‘정동’이론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현행 질서에 대한 부정적 힘으로 기술되는 것을 넘어서 정동의 맹목성에 정치적 방향/의미를 결합시키는 작업, 즉 대항 이데올로기의 구축 작업 내지는 이데올로기의 전화라는 작업이 있어야 정동의 정치학이 해방의 정치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이데올로기 비판과 정서분석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수미의 ‘정동’이론에는 중요한 난점이 있다. 그렇지만 어펙트를 오늘날 자본주의 지배체제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부각시킨 점에 대해서는 적극적 평가가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유물론의 또 다른 축인 인간학적 조건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어펙트, 즉 정서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스피노자가 보여준 바와 같이 인간은 그 신체 구조(fabric) 상 무엇보다 정서에 좌우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에 이르는 길은 이성의 힘으로 정서의 힘을 제어함으로써 열리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정서를 기쁨의 정서를 통해서 극복함으로써 열리는 것이다.41) 정서, 즉 어펙트의 역동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인간학적 조건의 계기 가운데 하나이다.

그 동안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둘러싼 논쟁들은 주로 기능주의와 저항 가능성의 문제, 라깡에 대한 알튀세르 해석의 정확성 문제 등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발리바르에 의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비판적으로 발전되면서 이데올로기를 사유함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이 매우 중요함이 드러나게 되었으며42), 사실 알튀세르의 작업에서도상상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이 부각되었다. 이렇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에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에게 이데올로기의 관건적 문제가 바로 어펙트, 즉 정서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상상이란 정서 정서의 작용에 의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정동’이론가들의 기여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통찰은 어펙트가 경제와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데올로기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때 강조되어야 하는 바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정서의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의식의 수준 보다는 무의식의 수준에 작용한다고 할 때 무의식의 수준이란 사실상 정서의 장이라는 점을 명확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데올로기 분석 내지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은 정서의 정치화 양식에 대한 분석이자 비판이 되어야 한다. ‘정동’이론은 오히려 이데올로기 안에서 정서 작용의 강조로서 읽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데올로기 없는 ‘정동’은 맹목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한 것은 ‘정동’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대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전화이다.



1) 어펙트(affect)를 국내의 문학연구자들이나 예술, 미학이론가들, 일부 문화연구자들은 ‘정동’으로 번역한다. 나는 어펙트의 적합한 번역어는 개념사의 맥락에서 정동이 아니라 정서라고 보는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번역어의 적합성 문제라기보다는 어펙트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혹은 정의하는가의 차이의 문제이다. 나는 스피노자에 의해 규정된 어펙트 개념이 이 용어를 개념적으로 적합하게 사용 가능하게 해준다는 입장이며 스피노자의 어펙트 개념은 정서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브라이언 마수미를 비롯한 논자들이나 국내의 조정환, 권명아 등의 논자들이 말하는 어펙트=정동과 구별하기 위하여 나의 입장에서 어펙트를 사용하고자 할 때는 정서라고 번역할 것이다.

2) 물론 이는 맑스주의자들과 비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만 벌어진 논쟁은 아니다. 맑스주의 내부에서도 ‘정동’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대표적으로는 ‘정동’의 관점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후기 자율주의적 경향의 국내적 대표자인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동진과 조정환의 논쟁을 들 수 있다. 맑스주의자들, 특히 알튀세르주의, 혹은 스피노자-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정동’이론에 대한 비판은 다음을 참조하라. 진태원, 「정동인가 이데올로기인가?-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초보적 논의」, 『현대시학』563호, 2016년 4월호; 최원, 「‘정동이론’ 비판 - 알튀세르와의 쟁점을 중심으로」, 『문화과학』, 86호, 2016년 여름호. 진태원과 최원에 대한 비판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권명아, 「비교 역사적 연구를 통해 본 정동 연구의 사회정치적 의제 - ‘여자떼 공포와 다스려 질 수 없는 자들의 힘」, 『여성문학연구』39호.

3) ‘인간학적 조건’ 조건이란 생산양식 혹은 넓은 의미의 경제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삶의 조건으로서 인간의 신체구조(fabric) 상 인간의 사고와 정서 그리고 행동을 규제하는 인간의 내재적 조건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 스피노자에 의해 중요하게 탐구된 주제이며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에 관한 논의나 신체적 차이로부터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정치를 사유하는 엘리자베스 그로츠, 로지 브라이도티 등의 페미니스트 신체 유물론이 탐구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나는 인간 신체구조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가 역사유물론의 또 다른 차원을 이룬다는 착상을 발리바르와 진태원의 논의로부터 얻었다. 인간학적 조건과 관련된 발리바르의 논의는 다음 글들을 참조하라.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스피노자, 루소, 맑스 :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  윤소영 옮김,「‘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 Etienne Balibar, "The Infinite Contradiction", Yale French Studies, No. 88, Yale University Press, 1995, 진태원의 경우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진태원, 홍기숙,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3(1), 서양근대철학회, 2008

4)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가상계』, 갈무리, 2011, 81쪽.

5)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2014, 187쪽.

6) 콜린 고든, 홍성민 옮김, 『권력과 지식』, 나남, 1991, 151쪽.

7) 루이 알튀세르, 김동수 옮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4, 115쪽

8) 같은 책, 103쪽.

9) 같은 책, 106쪽.

10) 루이 알튀세르, 이종영 옮김, 『맑스를 위하여』, 백의, 1997, 278~279쪽.

11) 같은 책, 107쪽.

12)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진태원,「스피노자와 알튀세르 상상계와 이데올로기」, 서동욱, 진태원 엮음, 『스피노자의 귀환』, 민음사, 2017.

13) 스피노자, 『에티카』2부 정리26의 중명.

14) 『에티카』,2부  정리 16의 보충2.

15)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편,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정동이론』, 갈무리, 2015, 277쪽.

16) 같은 책, 280쪽.

17) 이 논문의 국역본은 다음 책에 실려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 조성훈 옮김, 『가상계』, 갈무리, 2011

18) 국역자는 emotion을 정서로 번역한다.

19) 마수미, 앞의 책, 63~64쪽.

20) 같은 책, 54쪽.

21) 같은 책, 54쪽.

22) 같은 책, 85,86쪽.

23) 같은 책, 83쪽.

24) 같은 책, 78쪽의 각주39

25) 알튀세르, 앞의 책, 110쪽.

26) 『에티카』, 3부의 정의3, 강조는 인용자

27) 루이 알튀세르, 이종영 옮김, 『맑스를 위하여』, 백의, 1997, 281쪽.

28) 『아미앙에서의 주장』, 109쪽.

29) 마수미가 ‘정동’ 개념에서 스피노자적 계기는『가상계』, 55쪽, 60~61쪽, 들뢰즈적 계기는 62~65쪽에 드러나 있다.

30) 마수미, 앞의 책, 61쪽. 강조는 인용자.

31) 『윤리학』3부 정리11의 주석.

32) 『윤리학』3부 정리9의 주석.

33) 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 안토니오 네그리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 김상운 외 옮김, 갈무리, 34쪽.

34) 같은 책, 71쪽.

35) 같은 책, 90쪽.

36) 같은 책, 91쪽. 번역 일부 수정.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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