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하워드(David Howarth)의『Ernesto Laclau: Post-Maxism, populism and critique』(Routledge, 2014)에 수록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의 인터뷰를 번역한 글입니다.라클라우의 제자이기도 한 하워드는 라클라우 사상의 핵심 개념인 담론,적대,헤게모니,정치의 우위 또는 정치적인 것을 중심으로 논쟁적인 주제들을 거침없이 풀어놓습니다.라클라우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제기된 여러 의문에 대해 응답합니다.
DH:이 책에 수록된 장들은 지난 35년여간 당신의 작업이 이룩한 주요 혁신을 잘 보여줍니다. 단순화하자면, 제가 보기에 당신의 공헌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의 정치와 이데올로기』(1977)와 같은 저작에서 당신은 안토니오 그람시, 루이 알튀세르, 니코스 풀란차스 등의 작업에 관여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비환원론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치 이론을 정교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다음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과 『우리 시대 혁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1990)에서는 데리다, 푸코, 라캉 등의 저작에서 드러나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다양한 측면을 참조하면서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결정론과 본질주의의 잔재들과 완전히 결별하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방(들)』(1996)과 『포퓰리즘 이성에 대하여』(2005)에서는 탈구축(deconstructionist) 철학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대한 라캉의 해석에 더 깊이 관여함으로써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접근을 정치 분석에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각 이론적 발전 단계는 동시대 정치의 일련의 시급한 문제들과 거칠게 연결됩니다. 사회주의적 변혁을 위한 확장된 기획에서 노동자 계급과 대중적(popular) 요구를 어떻게 대표/재현(representation)하고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 신사회운동과 함께 드러난 요구와 정체성들을 접합시킴으로써 급진민주주의를 위한 기획을 발전시키는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형태의 특수주의와 정체성/차이의 정치가 대두되면서 급진 정치의 분열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우연적 보편주의(contingent universalism)’를 제시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이렇게 나누어 설명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연속성도 있습니다. 각 단계에서 이루어진 당신의 작업은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대한 반본질주의적이고 비환원론적인 설명을 모색하는 과정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개입(intervention)은 사회적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정치와 이데올로기 영역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역할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업의 각 단계에서 당신은 비마르크스주의 전통을 활용하고, 때때로 당신의 접근에 통합합니다.
작업의 발전 단계에 대한 이런 대략적인 설명에 얼마나 동의하십니까? 당신의 작업에서 중요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제가 언급한 이론적, 철학적 영향이 결정적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영향도 있습니까? 여전히 당신의 작업을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는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까?
EL:제 사상의 주요 단계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 주신 것 같습니다. 다만 각 단계의 연속성과 관련한 문제에서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단순히 이전 단계의 것들을 버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는 않았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초기 단계부터 미묘하게(in nuce) 존재했던 것이 더 높은 단계로 갈수록 점차 선명해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후기 작업에서 이론적 형태를 갖춘 직관들 중 일부는 사실 1960년대에 [역자 주: 아르헨티나 사회운동과 정치 참여의 경험으로부터] 떠올렸던 것들입니다. 물론 그때는 글로 정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요점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를 이렇게 봅니다. 저는 한 번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포스트’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 깊게 뿌리내린 실제적인 아포리아(aporias)를 다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포리아는 정치사상으로 하여금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범주에 의해 구성된 틀을 넘어설 것을 강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이론화가 열어 놓은 지평 안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당신이 올바르게 지적했던 것처럼, 처음에는 포스트구조주의 전통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열어 놓은 길과 관련된 범주들을 이론화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이론적 작업의 결과는 마르크스주의의 범주를 완전히 새로운 범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주 안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논리를 발견하고 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변곡점(inflection)이었습니다. 샹탈 무페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탈구축된(deconstructed) 중심 범주는 '헤게모니'였습니다.
당신이 언급한 세 번째 단계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초기적인 형태로 존재했던 것들을 논리적으로 심화시킨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단계에서는 세 가지 주요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우리는 모든 객관성의 한계를 적대(antagonism)라고 표현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이 주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이 주장에는 약간의 모호함이 있습니다. 적대 그 자체가 이미 담론적 기입(inscription)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적대 개념은 그것의 존재적(ontic) 내용과 재현의 한계 그 자체를 재현하는 존재론적(ontological) 기능 - [역자 주: 하이데거 철학에서] 심연(Abgrund)이라 부르는 – 사이에서 내적으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더 탈구(dislocation)라는 개념에 많은 역할을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순수한 의미의 탈구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오직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적 내용의 뒤틀림(distortions)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적대와 탈구의 이중성은 우리에게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더 풍부하고 복잡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남은 두 가지 진전은 이 첫 번째 진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의 최근 작업에서 재현(representation)의 논리가 갖는 중심성이 증가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탈구는 특정한 존재적 내용의 뒤틀림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이는 그 내용이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재현한다는 뜻인데, 단순한 모방으로서의 –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 현전(presentation)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재현’은 일차적이고 구성적인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데리다와 들뢰즈의 저작들이 이 지점에서 서로 다른 길로 나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최근 작업에서는 과거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포퓰리즘 이성에 대하여』에서 저는 헤게모니적 논리와 라캉의 대상a(object petit a)가 특정한 이론적 관점 하에서는 사실상 같은 개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최근 수년 동안 버팔로에 있는 뉴욕 주립대 대학원 세미나에서 조안 콥젝(Joahn Copjec)과 함께 이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DH: 당신의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범주와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당신의 작업에는 서로 다른 강조와 억양을 띠는 네 가지 기본적인 범주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담론, 적대, 헤게모니 그리고 정치의 우위 또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입니다. 각 범주에 대해 차례대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담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담론이라는 범주는 마르크스주의와 비마르크스주의 전통의 현대 사회·정치 이론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문제적인 대립을 탈구축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여기에는 언어적 실천과 비언어적 실천에 대한 구분, 사유/의식과 소위 물질적 조건 사이의 대립이 포함됩니다. 또한 이 범주를 통해 당신은 언어학 및 수사학 이론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여 정치 분석의 새로운 개념과 논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담론 범주를 광범위한 사회적 실천, 제도, 대상들에 확장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포스트구조주의 정치 이론에 동의하는 사람들조차도 담론적인 것의 차원을 다른 차원으로 보완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Yannis Stavrakakis)는 탁월한 저서인 『좌파 라캉주의(The Lacanian Left)』에서 “상징계와 주이상스(jouissance)의 실재라는 두 가지 구분되지만 상호 중첩된 영역 사이의 연결지점”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그는 담론적 차원을 보완하는 중요한 차원으로 정동적 차원과 리비도적인 차원을 강조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윌리엄 코널리(William Connolloy)는 자아의 ‘본능적 등록부(visceral register)’라는 용어를 제시하면서 신경과학, 생물학, 진화론, 들뢰즈와 복잡계 이론을 바탕으로 문화 이론을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발전은 특히 담론 개념을 ‘실천’이나 ‘관계주의(relationalism)’와 같은 개념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당신의 주장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담론 개념에는 제도, 실천, 조직, 대화, 자연, 신체와 같은 범주들의 영역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할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범주들이 모두 담론적으로 구축된 것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정동, 주이상스, 리비도적 투자(libidinal investment)와 같은 개념들이 일종의 전담론적 혹은 초담론적 차원과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담론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세계의 형태의 관계적이고, 역사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을 강조하는 '급진적 유물론(radical materialism)'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자연, 신체, 물질성과 같은 개념에 대한 충분한 재고찰을 가능하게 합니까?
EL:제 이론적 접근 방식에서 담론 범주의 지위에 대해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담론은 일반적 존재론(general ontology)에 해당합니다. 알랭 바디우가 집합론(set theory)에 입각한 수학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이 일차적 수준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저의 이론적 접근은 수학이 아닌 언어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저는 비슷한 시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저는 제 접근이 집합 이론과 관련된 범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제가 이런 선택을 이유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첫째로 제가 ‘담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좁은 의미의 발화나 글쓰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론은 모든 사회적 실천에 내재하는 의미화의 관계를 말합니다. 사회적 실천은 기표의 논리를 둘러싸고 스스로를 구성합니다. 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지배하는 복잡한 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개념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단어뿐만 아니라 행위도 포함됩니다. 질문에서 언급하신 모든 차이들은 기표/기의 관계의 대체라는 측면에서 담론 이론으로 표현될 수 있고, 또 표현되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시작하면서 현대 사회의 부는 엄청난 양의 상품으로 나타나며, 상품은 그 기본 형태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이 주장을 하면서 그는 우리에게 상품만 있고 은행, 금융 시스템, 국제 무역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내적 논리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차이들을 개념적 형태로 생산하고자 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기호에 존재론적인 중심성을 부과한다는 것은, 기표의 논리로부터 출발하여 당신이 언급한 다양한 차이들을 구축하겠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사학(rhetoric)은 전통적으로 언어를 꾸미는 방법과 관련한 것으로, 언어 규칙과는 외재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고전 수사학에는 문체들이 명확한 분류 원칙 없이 구조화되지 않은 채로 길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야콥슨(Jakobson)의 작업으로 인해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수사학적 문체들은 은유와 환유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조직됩니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이를 계열체적(syntagmatic) 축과 통합체적(paradigmatic) 축으로 부릅니다. 나아가 소쉬르는 계열체적 축이 통사 규칙(syntactic rules)에 엄격한 적용을 받는 반면, - 그가 ‘연상(associative)’이라고 불렀던 - 통합체적 축은 어떠한 규칙도 적용받지 않고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통합체적 축의 기능은 엄밀하게 말해 위상학적(tropological)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사학이 언어학과 분리된 것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사학은 언어 구조의 필수적 차원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예로 정신분석학을 들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는 언어학과 수사학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구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응축(condensation)과 변이(displacement)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구분은 동일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모든 정신적 요소는 과잉결정(overdetermined)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차별적으로 고착(cathected)됩니다. 이는 당신이 언급한 담론과 주이상스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은 스타브라카키스를 인용하면서 “상징계와 주이상스의 실재라는 두 가지 구분되지만 상호 중첩된 영역 사이의 연결지점”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저는 그의 저작이 매우 값지다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이 표현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두 차원의 구분과 상호 함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상호 독립적으로 구성된 두 개의 독립적인 영역의 현전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하나가 반응하는 것의 문제라면 저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언어의 통합체적 축은 언어의 기능에 있어 필수적이며, 무의식적 연상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지 선험적인 계열체적 규칙에 의해 종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은 언어에 내재적이며, 그 역도 성립합니다. 정동은 언어 바깥에서 작동하는 신비스러운 힘이 아닙니다. 정동은 오직 연쇄적인 의미화의 요소에 차별적으로 고착됨으로써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상징계 바깥에서 구성되는 ‘주이상스의 실재’ 같은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재는 오직 상징계의 완전한 구성이 실패했을 때의 결과로써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담론은 두 가지 차원에 모두에 내재하는 통일성입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당신은 내가 어떤 존재론적 작업을 수행하는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인간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기본적인 상동성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학에서 그것은 계열체와 통합체이며 수사학에서는 은유와 환유, 정신분석학에서는 응축과 전이, 그리고 정치학에서는 등가와 차이입니다. 각자의 영역은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특수성들을 비교하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시키면서 우리는 더 형식적인 일반적 존재론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제 방식대로 말해보자면, 이 상동성에서 후자(통합체, 환유, 전이, 차이)는 언어적 성격을 띠지만, 그것은 언어적 범주가 그것의 영역적 정박을 벗어날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이 이중적 차원은 저의 지적 작업에 핵심적입니다. 예를 들어 방금 언급하신 것처럼 코널리의 설명과 같이 여타의 이론가들이 개발한 타당한 많은 구분은 제 접근 방식에서 정당하게 채택되고 재생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하여 그것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DH: 이제 적대 범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당신의 접근 방식의 핵심적 특징 중 적대의 구축과 경험의 문제를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작업에서 적대는 자아와 사회의 완전한 구성을 방해하는 구성적이고 한계적인(liminal) 현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작업을 가르치고 토론할 때 종종 적대적 관계의 구성에서 이익(interests)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이 문제는 최근 ‘인정의 정치’와 ‘재분배의 정치’를 둘러싼 논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의 접근은 이익의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특정한 요구와 불만을 중심으로 조직된 투쟁과 갈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컨대 노동자들이 임금의 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거나 환경운동가들이 도로나 공항의 건설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경우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이런 요구들은 분명히 정체성과 차이의 동학을 둘러싸고 조직되지만, 때로는 특정한 성취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인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 정체성의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갈등과 투쟁사례들은 적대라는 말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적대라는 용어는 오직 주체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두드러지는 사례의 경우에만 사용될 수 있습니까? 이익과 정치적 정체성의 구축은 개념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연결됩니까? 아니면 이익이라는 개념은 적대와는 다르거나 상반된 패러다임에 속한 것입니까? 정체성과 이익 개념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EL: 인정과 재분배의 구분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그 구분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인정을 문화적 영역으로, 재분배를 경제적 영역으로 국한하는 매우 전통적인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토대-상부구조 모델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재분배의 정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경제적인 요구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현재 부정되고 있는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합니다. 같은 이유로, 가장 문화적으로 보이는 인정에 대한 요구에도 특정한 사회 안에서의 상징적 가치에 대한 재분배와 재구성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익이란 무엇입니까? 사회적 행위자는 실제로 부정된 것에 대해서만 인정을 요구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기존의 현상에서 부정되거나 최소한 위태롭게 느껴지는 정체성에 대한 주장 없이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정한 요구의 취약성은 보호되어야 할 이익과 그것을 둘러싸고 구성된 정체성에 대한 인정의 요구를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고전적인 사회주의 담론에서도 사회적 행위자의 소위 ‘의식화(conscientization)’의 과정은 이익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지탱하는 정체성의 구축을 포함합니다. 저는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이익의 구축이 정체성의 형성과 차별적 특징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차이가 이익/정체성 복합체의 기본적 구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영역의 구조화(structuration)에 있어 적대가 수행하는 구성적 역할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DH: 헤게모니라는 범주는 당신의 접근에서 다양한 요소와 개념을 연결시키는 중심적인 장치입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당신의 작업에는 서로 다른 표현과 강조점이 있습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헤게모니는 헤게모니 프로젝트를 구축하기 위해 서로 다른 요구와 정체성을 연결하는 일종의 실천입니다. 이 접합적 실천(articulatory practice)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불완전하고 개방적인 특징과, 적대적 세력, 그리고 그 세력을 나누는 경계선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헤게모니적 실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떠다니는(floating) 요소들이 서로 대립되는 형태로 접합될 수 있어야 합니다. 등가관계와 경계선이 없다면 엄밀하게 말해 헤게모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최근 저작에서 헤게모니 개념은 비어있는 기표(empty signifier)가 수행하는 기능과 좀 더 밀접히 연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포퓰리즘 이성에 대하여』에서 헤게모니는 “하나의 차이가 ... 그것과 통약불가능한 총체성을 재현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과정으로 묘사됩니다. 그 결과 체현된 총체성이 불가능한 대상이라면, 보편성과 특수성의 연쇄적인 상호작용에서 헤게모니적 정체성은 비어있는 기표의 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당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헤게모니 개념에 대한 생각을 수정했습니까? 기본적인 개념이 있고, 다양한 변이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헤게모니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들이 있는 것입니까? 또 다른 질문은 몇몇 정치 이론가들이 제기한 헤게모니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회의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헤게모니를 다원성을 지우는 단순한 지배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몇몇 이들은 ‘포스트헤게모니(post-hegemony)’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헤게모니라는 범주가 점점 더 이질적이고 지구화되어 가는 세계를 해석하고, 설명하고, 변화시키니는 데 있어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헤게모니 투쟁은 이전과 달리 더 이상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국민국가(nation-state)’ 수준의 영역에 제한된 것입니까? 급진적인 다원주의와 차이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문제가 된다고 보십니까? 여전히 당신의 작업에서 헤게모니라는 범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EL: 여러 질문들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제가 헤게모니 개념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에 대한 저의 대답은 대단한 불연속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같은 범주에서 다른 차원이 강조될 뿐입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무페와 저는 사회구성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접합이 갖는 본질적 특성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헤게모니는 통일화 과정을 설명하는 본질주의적 해석에 맞서서 다양한 요소들의 우연적인 결합으로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이는 그러한 통일의 결정화된 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남겨놓습니다. 여기서 비어있는 기표의 역할이 제기됩니다. 이 개념은 저의 후기 저작에 등장하지만, 같은 연구의 일환입니다.
일부 독자들의 회의론에 관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오해가 있다고 봅니다. 제 작업과 그람시의 작업을 신중하게 읽은 독자라면 헤게모니가 지배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헤게모니의 작동에는 (민주적 등가성이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합의적 차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원주의란 무엇입니까? 만약 이 용어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들의 투쟁을 의미하고, 특정한 종류의 모나드적 현존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제 대답은 그런 방식의 다원주의는 사회적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무익한 고립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폐쇄적인 조합주의에는 어떤 민주적 요소도 없습니다. 반대로 다원주의가 경직된 중심의 강제(diktats)로부터 종속되지 않기 위한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자들의 시도를 의미한다면, 저는 그러한 시도의 중심은 비어있는 기표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은 의미화의 연쇄에서 다원적 요구들의 상호작용, 즉 끊임없이 유동하는 과정의 상호작용에 의해 부여될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헤게모니적 안정화는 다원적 상호작용의 결과로써 달성되는 것이지, 선험적으로 주어진 권력의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적 투쟁의 구체적인 다원성이 사라지면서 차이가 등가관계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원성이 조합주의적 고립으로 변형되어 광범위한 대중적 목표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투쟁을 응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민주적 관점에서 ‘포스트헤게모니’라는 개념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질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저는 지구화된 세계가 점점 더 이질적이 될수록 헤게모니적 실천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헤게모니’는 지역적 수준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 존재론의 일반적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헤게모니는 헤게모니적 구성에서 접합된 요소와 접합하는 힘 모두가 헤게모니적 구성 내에서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우연적 접합의 실천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 세계의 표면을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항하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이자 확실한 기초(fundamentum inconcussum)로 작동하는 선험적 토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급진적 우연성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면, 본질주의적 사회적 존재론은 무너지고, 헤게모니적 패러다임과 관련된 개념군들이 그 유효 영역을 확장하게 됩니다. 이는 당신이 언급한 국제적 영역에서도 적용됩니다. 저는 국민국가가 정치적 행위의 틀로서 완전히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과거에 비해 중심성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부분적인 유효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등가관계, 차이의 관계, 헤게모니의 구축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가로질러 확장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이와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의사소통은 전통적인 정치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DH: 당신의 접근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정치의 우선성, ‘정치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의 결정 불가능한 성격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당신이 급진적 우연성과 적대의 역할에 부여하는 중심성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이유로 당신은 『우리 시대 혁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는 “투쟁을 통해 급진적으로 변형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에드먼드 후설을 따라 침전된(sedimented) 실천 또는 관계의 우연적 토대를 재활성화(reactivating)함으로써 정치적 주체가 결정하고 새로운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치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이런 정치의 우선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만약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경제와 생산관계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해 왔다면, 당신의 접근은 정치적 실천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식의 결정적 역할은 인과적인 관계로 이해해야 합니까? 당신은 비판적 설명에 있어서 경제적 논리와 실천의 역할을 어떻게 고려합니까?
EL:우선 두 가지 사회적 총체성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가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을 구분하듯이 사회적 총체성이 각각 나누어 구분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의 입장과 같이 사회적인 것의 구성에 있어서 정치적인 것의 논리를 특권화하는 사회적 총체성 개념입니다. 후자의 개념에서는 특정 수준이 다른 수준에 대해서 우선성을 갖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인과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습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구상하는 경제적 '수준'은 사회의 여러 다른 수준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논리에 의해 구조화된 영역입니다.
DH: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쟁점은 당신의 작업에서 정치적인 것의 범위와 특수성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의 접근은 정치적인 것을 국가를 넘어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자유주의적 구분을 넘어서 확장하고 있으며, 정치의 토대로 정의나 권리와 같은 개념들을 특권화하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작업에서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또는 문화적인 것 사이의 경계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모든 투쟁과 논쟁을 정치적인 것으로 보십니까?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는 친구/적의 대립만이 존재합니까? 아니면 사회적 적대의 구축과 매개에 있어서 당신의 설명을 보완하는 다른 기준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정치는 고유의 공적 차원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정치에는 대안적 실천 또는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실천이나 체제의 규범에 대항하는 활동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EL: 이 문제에서 서로 다른 문제를 혼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에게 적대 개념은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이기 때문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에 선행합니다. 이는 아렌트의 접근과 다릅니다. 저에게 사회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의 부분적 결정화로서, 헤게모니적 구성이 일시적인 안정을 얻을 때 출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이 침전된 정도를 식별할 때는 필요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의 우선성에 대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합니다. 단지 지역적 범주인 문화적인 것의 개념은 더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