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영화와 무국적인 관객
필자: 수차미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마테리알에 올라온 박경태 감독의 글 「상상된 세대(론)와 탈계급적 문화정치의 무능함에 대하여」를 읽었다. 큰 틀에서 보면 이 글은 한국영화의 위기 담론이 현재의 1‘독립영화’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민족문화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정권에 대한 저항수단으로서 한국영화가 만들어졌고, 이 시기 형성된 민중론이 그동안의 영화관객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후 영화산업이 발전하면서 민중이라는 단어가 대중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생산하는 한국 영화인과 소비하는 한국 관객의 교환 관계를 통해 ‘한국영화’의 상상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이 지적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이어진다.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는 생산과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있긴 있지만 위치를 상실한 그 영화가 ‘있다’.” 위치를 상실한 게 어떤 의미에서 ‘독립’을 뜻한다면 결국 독립영화란 위치를 상실한 영화다. 이는 곧 독립영화의 현 주소가 대중적 상상력을 획득하는데 실패한, 시장과 공공성을 하나로 만드는 상상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대중적 상상력이 있는 곳을 벗어난 영화가 바로 독립영화이며, 여기서 실패란 시장과 공공성의 일치 즉 ‘사적인 것’의 부재를 뜻한다. 공공적이라고 해서 꼭 공적인 일이라고만도 볼 수 없지만 만약 이 둘이 서로간에 오인된다면, 지금의 독립영화엔 ‘사적인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시장에서의 성공이 정치적 동의로 확대되는 과정”을 지적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벌새>와 <너와 나>가 독립영화에서 입소문을 타는 데 성공했다면 이는 정치적으로 동의를 얻었다는 뜻일 수 있다. 이는 명실상부히 ‘공적인’ 목적을 갖고서 ‘공공의 동의’를 얻어 발화된 사례이므로 ‘성공한’ 독립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독립영화에서 도리어 사적인 영역은 사라지고야 만다. 독립영화는 상상된 대중을 가정하며 몸을 의태하고 있는가? 김병규 영화평론가는 씨네21 1433호에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너와 나>, <괴인>」라는 글을 쓴다.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이야기로부터 동떨어져 사물의 물질성을 추상화하고 오직 의미의 생산을 위한 손쉬운 유혹에 붙잡힌 화면은 영화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하다.” <너와 나>에는 시장과 공공성을 하나로 만드는 상상이 있었지만 반대로 대중적 상상력은 없었다. 박 감독은 “공공성이 시장의 그늘 아래 존재하기 때문에 시장의 파국은 터전의 상실처럼 느껴진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너와 나>에서 부재한 대중적 상상력이 파국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터전의 상실이라는 점에 더 귀를 귀울여야 한다. <너와 나>의 비평적인 선호도는 전적으로 ‘현실에 있을 곳 없이 터전을 상실한 이미지들’에서 비롯되니 말이다. 이른바 ‘독립영화’가 말하는 ‘독립’은 도리어 특정 터전에만 머물지 않고 산포되어있기에 생산과 보급이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어디까지나 상상된 형태로만 존재했다. 이렇게 상상된 관객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제작’에 투자하는 일로 이어졌다. 흩어진 관객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소재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상상된 관객을 위해 대중적인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보려 했다.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을 얼기설기 이으며 내부에 상상된 공동체가 형성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상상력이 현실 안에 남을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상상력이란 현실을 뛰어넘는 힘이 아니었던가? 독립영화의 선별자들은 무엇을 전할 것인지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허락된 상상력 안에 남고 싶어했다. 자신이 아는 게 아니라면 결국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바깥’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상상된 관객은 변방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며 서로 같은 곳을 향하는 존재들이다. 특정한 믿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대중적인 상상과 유사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아는 미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공공성이 시장의 그늘 아래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서로는 파국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토종 OTT가 국민국가 내부의 극장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일차원적 상상일 뿐이라면 상상된 공동체는 결국 ‘바깥’에 있다. 흩어진 관객들을 하나의 플랫폼에 세우는 건 대중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바깥’의 사유에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올라온 <K팝 데몬 헌터스>를 봤다. 1시간 반을 조금 넘긴 러닝타임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한국적인 것’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케이팝 스타 루미, 미라, 조이로 구성된 그룹 ‘헌트릭스’는 공연이 없는 날이면 각자의 은밀한 활동을 즐긴다. 그건 바로 ‘악령 퇴치’로 이들은 오래 전으로부터 내려오는 ‘데몬 헌터’를 계승해 활동 중이다. 데몬 헌터는 노래하는 이의 힘으로 인간계를 노리는 악귀들로부터 이 세상을 지켜낸다. 이들의 숙원은 사람들을 화합으로 이끄는 노래의 힘으로 ‘황금 혼문’을 꾸려 세상을 항구적으로 평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설정은 루미의 개인서사가 더해지면서 반전국면을 이룬다. 루미는 선대 헌터와 악귀를 부모로 둔 채로 태어나 온몸에 악귀의 문신이 새겨진 상황이다. 이에 루미는 같이 활동하는 멤버들에게도 맨몸을 보여주지 않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려 한다. 진우를 필두로 한 악귀 멤버 5인조가 ‘사자보이즈’로 데뷔해 헌트릭스에 대항하는 가운데, 루미와 진우는 사랑에 빠진다. 루미의 개인 서사가 평면적일 수 있는 대립구도에 반전축으로 작용하면서 이야기는 보합을 이룬다. 황금 혼문이라는 거시적인 세계관이 한 세계를 막아내는 일에 중점을 둔다면, 루미의 개인서사는 자신이 감춰뒀던 세계를 밖으로 풀어내야 하는 일에 방점이 찍힌다. 즉 밖으로는 막아낸다면 안에서는 이를 꺼내두어야만 한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다시 점검해보자. ‘외국 감독’이 ‘해외자본’으로 ‘다국적 플랫폼’에 작품을 공개했다. ‘한국적’이라는 말은 도리어 한국만의 것이기보다 이미 어떠한 정체성으로 규정된 듯하다. 이 작품은 ‘한국적’이라 할 만한 가치를 품고 있어서 한국 사람에게 무엇보다 한국적인 작품으로 인식됐다. 해외에서는 이를 이질적으로 대하기보다 이미 익숙한 문화의 한 종류로 바라보았고 이 안에서 ‘한국’은 해외인의 일상에서 상상된 무언가였다. 반면 작품의 주요 서사는 ‘자신에 결함이 있다고 여기는 한 사람이 마음을 열고 이를 풀어헤친다’는 공감하기 쉬운 감정에 의존한다. 이 작품에서 ‘한국적’이라는 말은 어떠한 존재론이기보다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얼핏 보면 ‘위치상실’이라 볼 법한 것도 여기서는 독립적인 매개체가 된다. 작품은 루미가 자신이 숨겨왔던 결함을 밖으로 내보이면서 동시에 황금 혼문을 열고, 세계를 다시 내부로 되돌린다. 이제 악귀들은 혼문 너머로 들어올 수 없어 다시금 ‘바깥’으로 추방됐다. 이 일련의 과정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만약 한국적인 것이 단순히 한국이라는 지리학적인 장소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만 국한되었다면 이는 일종의 봉쇄 상태나 마찬가지다. 한국을 알리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레 자신을 가두면서 통제하려는 성향을 갖게 된다.
<K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적 정체성과 감정의 공유가 반드시 ‘한국’이라는 지리적·제도적 경계 안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독립영화 역시 외부의 정의나 기존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정체성의 유동성과 경계 바깥에서의 자생력’이라는 공통된 본질을 공유한다. 즉 독립영화란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무엇에도 간섭받지 않고 또 구애받지 않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면서 독립영화에 대해 쓴 글이 떠올랐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작중에서 루미는 자신의 출생을 고민하면서 악귀였던 자신의 정체성 반쪽을 ‘황금 혼문’을 완성함으로써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때까지만 숨기면 ‘완전해진다’고 여겨서 가장 친한 동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하지만 루미가 자신을 숨김으로써 도리어 악귀가 이를 이용해 동료 간에 불신을 심어주게 된다. 루미는 뒤늦게 자신을 믿어달라 호소하지만 친구들은 이미 반쯤은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후 루미는 음악을 통해 심정변화를 묘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한 음악이 루미의 진솔한 내면을 전달하게 된다. 마음을 속인 ‘Golden’ 음악이 악귀들에 의해 방해받고 나면 헌트릭스 사이에는 작은 불화가 찾아오지만 이후 갈등은 개인의 결핍과 차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What It Sounds Like’ 곡으로 봉합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공감대는 전적으로 상상된 것이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한국적인 정체성 안에서만 구상될 수 있다고 본다면 그렇다. 그러나 제작과 유통 모두 한국과는 연이 없는 이 작품은 분명하게도 ‘한국적’이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도 제작이나 유통과는 관계없이 ‘독립영화’가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바꾸어 말하자면 “독립영화를 독립영화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이 타고난 성질이나 정체 등은 태어난 이상 바꿀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처음부터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해서 ‘독립영화’다운 것을 먼저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정체성은 이미 ‘외부’에 ‘존재’하므로 이들로서는 그 점을 고민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 상상된 세대가 있다면 반대로 상상된 영화도 있다. 상상된 영화란 이런 정체성을 갖는다면 독립영화라 부를 수 있으리라고 추론하는 일을 뜻한다. ‘독립’이라는 정체성을 묘사하면 반대로 그곳에 ‘독립영화’가 있으리라고 보는 셈이다. 하지만 ‘독립’의 참된 의미란 모든 일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을 뜻한다. 이미 외부에 있는 것을 따라잡기에만 급급하면 그 무엇에서도 독립할 수 없다. 영화가 꼭 때깔이 곱거나 매끄럽게만 진행될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독립영화의 진정한 의미는 외부 기준이나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데 있다.
판데믹을 기점으로 ‘선별’의 양상은 다변화한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를 통해 극장에서 개봉했던 영화를 쉽게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기존의 OTT 시장이 비디오방처럼 한물간 영화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프리패스에 가까웠다면 판데믹 시기 OTT는 영화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였다. 독립영화는 그동안 자신들을 극장에 내걸고 이를 다시금 VOD로 공급하며 저변을 확장하려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여전히 상상된 존재로 남지만 이 사실이 관객은 더는 영화 산업의 참여자로 남을 수 없게 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상상된 공동체를 떠올리기를 지양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에게 내비치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시장과 공공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어느 하나를 다른 한쪽에 편입한다면 시장이 줄어들던 공공성이 줄어들던 둘 중 하나는 손해를 보게 된다. 독립영화는 시장을 줄이고 공공성을 획득하거나, 공공성을 줄이고 시장을 늘리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러니 힘차게 도주해라. 계급론이라던가 영화론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규정하면 남들에게 이를 소개하기에 편리할지는 몰라도 점점 더 자신을 가두어버리게 된다. ‘상상’하는 것만이 ‘항상’ 답은 아니며, 도리어 모든 것에서 독립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당신은 아무런 것도 해야 할 필요가 없고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 (편집자주) 이 글은 마테리알 8호 '우리의 미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테리알 8호 : 알라딘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