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하지 않은 발화, 파레시아
강길모 (현대정치철학연구회)
1. 파레시아는 무엇인가?
파레시아Parrhesia는 ‘진실 말하기’ 또는 ‘모두 말하기’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시대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해왔다. 단순한 번역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이 개념은 푸코가 말년에 집중했던 핵심적인 발화 개념이다. 푸코에 따르면 파레시아는 단지 진실을 말하는 개인의 독백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주체와 그것을 듣는 타자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적 실천이다.[1] 파레시아는 언제나 발화 주체와 수신자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종의 담론적 ‘게임’으로 작동하며, 이 게임은 권력과 진실, 윤리와 정치가 교차하는 장에서 전개된다. 발화자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타자의 반응을 요구하고, 타자는 그 진실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와 같은 파레시아의 구조는 양자 간의 비대칭적 관계를 전제하며, 말하는 자에게 특정한 위험을 동반하게 한다. 말년의 푸코는 이 파레시아의 효력과 작동방식에 주목하면서 진실의 문제, 증언의 문제, 법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
푸코가 주목하는 파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 속에서 시기에 따라 정치적 파레시아, 철학적 파레시아, 윤리적 파레시아 셋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정치적 파레시아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진실을 말하려는 행위를 뜻한다. 푸코는 이를 소포클레스의 『이온』을 통해 설명한다.[2] 이 개념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푸코에 의하면 역사적인 최초의 파레시아스트는 『이온』의 크레우사이다. 크레우사는 아폴론에게 강간당해 이온을 낳았고 그를 버렸지만 다시 그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크레우사는 이러한 진실을 온전히 알고 있는 존재는 오직 진실의 신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진실의 신 아폴론이 이온의 아버지이며 자신에게 부정을 저지른 자라고 고발한다. 즉, 크레우사는 진실의 신이자 법의 상징인 아폴론의 이름을 빌려, 오히려 그 아폴론 자신을 고발하는 역설적 행위를 수행한다.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당사자이자 법 그 자체의 이름인 아폴론을 고발하는 역설이 크레우사의 파레시아인 것이다. 이 파레시아의 역설은 크레우사 자신의 존재를 위협한다. 그리스의 성관념 속에서 크레우사는 진실을 드러낸다고 해서 부정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이 아니며, 크레우사가 진실을 통해 공격하는 것은 진실과 법 그 자체이다. 크레우사에게는 자신과 이온이 처해있는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진실을 남김없이 말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진실을 모두 말해버리는 최초의 파레시아, 정치적 파레시아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파레시아-비록 픽션으로서의 파레시아이지만-는 그 출발부터 발화 속의 극한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파레시아가 처음부터 단순한 의견 개진이나 항의의 형식이 아니라, 말하는 주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극한적 조건 속에서 발화되었다는 점은 참주에 대한 파레시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파레시아스트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발화가 권력자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을 감수하고 발화를 감행한다. 이 진실 말하기는 단지 정보의 전달이나 정정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에 있는 타자에게 자신의 말이 윤리적,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의 발화를 통해 상대방이 그 진실에 복종함으로써 스스로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파레시아는 항상 주체의 목숨을 담보로 한 윤리적 도박이며, 권력과의 정면 충돌이라는 위험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이어서 나오는 것은 철학적 파레시아이다. 철학적 파레시아는 크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그 이후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파레시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푸코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례를 통해 파레시아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적이며 동시에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면밀히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파레시아는 단순한 진실 발화나 자유로운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이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윤리적·정치적 행위로 규정된다. 이 점에서 파레시아는 단순한 언어적 행위가 아니라, 담론의 장에서 실천적 용기를 요하는 행위이며,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구조화된다.
푸코는 특히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에서 이러한 파레시아적 태도의 전형을 찾는다.[3]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 체제 하에서 다수의 견해에 반하여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공동체의 권력으로부터 위험에 처하는 것을 감수하였다. 이때 파레시아는 단지 개인의 진실 고백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도덕적·정치적 성찰을 촉진하는 비판적 실천으로 작용한다. 푸코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파레시아의 공간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진실을 말하는 자를 배척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역시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플라톤 역시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국가』나 『법률』 등에서 철인의 통치를 이상화함으로써 파레시아의 가능성과 민주주의의 한계를 동시에 사유한다. 플라톤은 한편, 모두가 아무 말이나 하는 상황을 파레시아라고 부르지 않냐고 하면서 민주주의 하에서의 파레시아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동시에 파레시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철인이 말하는 진실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영혼의 정화와 공동체의 정의를 향한 진리의 인도를 의미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대중의 무지나 다수의 욕망과 충돌한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민주정의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민주정의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철학적 정치의 요청까지 내포한다.
이처럼 푸코는 파레시아를 통해 고대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 즉 진실을 말하는 자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 사이의 긴장 관계를 부각시키며, 그것이 단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주의 실천에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뒤이어 본격적으로 그 이전의 파레시아와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파레시아가 고대 그리스에서 자리매김한다. 철학적 파레시아는 위에서 언급된 플라톤의 사유 전통에서 출발하며, 스승과 제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 속에서 진실의 발화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때 파레시아는 정치적 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진리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윤리적 수양의 과정으로 작동한다. 스승은 진리를 말하는 자로서 파레시아스트의 위치에 서고, 제자는 그 진실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변형시켜 나가는 주체화의 경로를 밟는다. 이러한 관계는 일종의 ‘진리에의 복종’으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파레시아는 단지 말하기의 용기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의 내면적 규율화와 실천을 동반한다. 따라서 철학적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의 윤리성과 더불어, 듣는 자의 자기 수련과 주체 형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윤리-지식의 실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푸코가 강조하는 퀴니코스 철학자들의 윤리적 파레시아의 실천이다. 푸코는 퀴니코스 철학을 고대 철학의 중요한 전통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이 진리를 말하는 방식을 ‘삶의 형태로서의 파레시아’로 규정한다. 특히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파레시아의 실천적, 상징적 핵심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통 속에 거주하며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던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앞에 나타나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자,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대답했다. 이 일화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삶 자체로 진실을 표현하는 행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디오게네스는 권력과 재산, 명예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제도와 관습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이 지닌 인위성과 허위성을 폭로하고자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파레시아는 단지 발화의 문제가 아니라, 전면적인 존재 양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실존적 실천이 된다. 디오게네스의 삶은 인간 사회가 구축해온 문화적 질서에 도전하는 동시에,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으로 진리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그의 삶은 사회적 규범에 포섭되지 않는 자유를 스스로의 몸과 행위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 설정한 규범적 틀과의 불일치를 가시화한다.
이러한 윤리적 파레시아는 인간 주체와 기존 질서 사이의 불일치, 그리고 인간과 동물적 존재 방식 사이의 불일치를 동시에 드러내는 역설적 실천이다. 푸코가 강조하듯, 키니코스적 파레시아는 말의 수사가 아니라, 삶 전체가 진실을 증명하는 수행의 장이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어떤 주장을 전달하는 언표적 행위라기보다, 기존 사회 질서에 균열을 내고, 자기 자신을 그 질서의 바깥에 위치시키는 태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기존 질서를 스스로 배척하는데 멈추지 않고 인간의 동물적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곳까지 도달한다. 따라서 키니코스의 파레시아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며,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실존성 자체를 다시 사유하도록 만든다.

2. 발화행위와 실천양식으로서의 파레시아 : 진실을 말하는 용기
지금까지 파레시아에 대한 푸코의 역사적 추적을 간략히 요약했다면, 이제 파레시아의 발화행위로서의 성격과 푸코가 주목하고자 했던 파레시아의 실천적 양식에 대해 재정리해보자.
아테네 민주정에서의 파레시아는 종종 무분별한 자유발언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다수 대 개인의 구조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푸코는 파레시아의 기본적인 구성 단위를 ‘자기와 타자’라는 양자 간의 관계로 설정한다. 발화 주체는 타자에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그를 변화시키고자 하며, 이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타자의 삶의 방식과 자기 인식의 구조 자체에 개입하는 실천적 시도가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타자는 발화자의 개입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폭력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본질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윤리적 행위이며, 발화 주체는 타자의 반응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존재론적 용기를 요구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레시아는 단지 위험을 감내하는 고통의 행위로 머무르지 않는다. 푸코는 파레시아가 타자를 변화시키려는 힘이자, 타자의 주체화 방식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역량으로 작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파레시아는 단지 말하는 자의 실천에 그치지 않고, 듣는 자의 윤리적·존재론적 조건을 다시 구성하게 만드는 관계적 권력 작용의 한 형태로 기능한다. 이처럼 파레시아는 자기와 타자 사이의 대결을 매개로 하여, 양자 모두의 윤리적 변형을 이끌어내는 진실의 기술이자 권력에 대한 실천적 저항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푸코의 사유는 언제나 역사적 특수성과 맥락성을 중시하며, 개념의 고정적 정의보다는 그것이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어떻게 작동했는가에 주목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파레시아라는 개념 역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에, 그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 정의나 필수 조건을 설정하는 일은 푸코의 역사철학적 입장에 위배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파레시아를 하나의 실천적 양식으로 포착하면서, 그것이 어떠한 윤리적·정치적 조건에서 가능해지는지를 분석한다.
파레시아는 기존의 질서, 즉 통치성과 자기 자신 사이의 불일치로부터 출발한다. 푸코에 따르면, 파레시아적 발화 주체는 자신에게 부과된 사회적·정치적 질서가 자신의 삶의 조건이나 경험과 충돌할 때, 진실을 말하는 행위를 통해 그 불일치를 가시화한다. 특히 정치적 파레시아의 경우, 발화 주체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나 질서가 특정한 상황에서 무력화되었을 때, 그 권리를 회복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한 발화에 나선다.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권리 주장이 오히려 그 주체로 하여금 그 권리의 자격 자체를 박탈당할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즉,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발화자는 그 공동체가 인정하는 자격 조건에서 이탈하게 되며, 공동체로부터의 배제 가능성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철학적 파레시아에서는 진리를 말하는 자와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타자 사이의 관계가 중심을 이룬다. 이때 ‘진리’는 단지 정합적 명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통치적 질서와는 다른 지식-권력의 체계를 기반으로 한 진실의 실천을 뜻한다. 철학적 파레시아는 그러한 진실을 통해 타자에게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기존 권력 질서에 대한 급진적 도전을 내포한다. 이를 통해 철학적 파레시아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 진실이 어떻게 정치적 실천으로 전화될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철학적 파레시아가 가졌던 기존 권력질서와의 긴장관계는 윤리적 파레시아에서 더욱 극단적인 방식으로 심화된다. 윤리적 파레시아는 세계와 자기 자신 사이의 불일치를 말로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 자체를 통해 이를 구현하려는 실천으로 나아간다. 이때 파레시아는 단순한 언어 행위에서 벗어나, 몸을 통한 행위, 즉 행위적 수행성의 차원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 파레시아는 말의 용기를 넘어서 삶의 용기를 요구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는 자신의 몸과 일상을 통해 사회적 규범과의 불일치를 표출하는 존재로 재현된다. 이러한 파레시아의 행위성은 그 자체로 기존 질서를 교란하고, 새로운 윤리적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정치적 실천의 형태가 된다.
푸코가 파레시아에서 주목한 또 하나의 핵심적 요소는 바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4]이다. 그는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행위 자체보다, 그 진실이 말해지는 조건, 그리고 진실을 말함으로써 발화 주체가 감수해야 할 위험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파레시아적 행위는 어떤 지적 설득이나 이성적 교환의 영역을 넘어, 때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실존적 결단을 수반한다. 이처럼 진실을 말하는 자는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를 담보로 하여 진실을 증명하려는 윤리적 주체로 등장한다.
푸코의 후기 사유, 특히 그가 제시한 ‘품행’과 ‘대항품행’에 대한 분석의 정점에서 파레시아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부상한다. 품행은 통치성의 일환으로서, 주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되고 이끌리는 상태를 의미하며, 대항품행은 이에 대한 저항적 실천을 지칭한다. 그러나 푸코는 이 양자 사이의 이항대립에 머무르지 않고, 통치성의 조건을 내면화하면서도, 그 작동을 성찰하고 반성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주체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주체의 실천적 가능성은 단지 외적 질서에의 복종이나 반발을 넘어서는 주체화의 차원에서 파악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레시아는 더 이상 지식/권력의 자동기계처럼 작동하는 시스템 내부의 메커니즘이나, 통치성과 반통치성의 단순한 반사 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파레시아는 주체가 자기 자신의 품행을 인식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 윤리적 계기로 기능한다. 진실을 말하는 자는 단지 외부 세계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을 말하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실천을 수행한다. 따라서 푸코가 말하는 파레시아는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용기 있는 개입, 즉 주체화의 윤리적 실천으로 자리잡는다. 파레시아는 권력과 통치성, 주체화의 얽힌 그물망이 제각각 고유한 영역들을 확보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행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발화수행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푸코 철학의 전개 과정에서 권력에 대한 탐구는 시기적으로 어느 정도 차이를 보여준다. 초기에는 주로 권력을 억압적이고 주체를 종속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었지만, 중기 이후 푸코는 권력을 주로 생산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며, 그것이 주체의 형성과 실천에 어떤 방식으로 관여하는지에 주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통치성’이며, 이는 단순히 정치 권력의 집행 방식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행위를 이끌고 형성하는 총체적 기술로 간주된다. 통치성은 법이나 제도만이 아니라, 담론, 규범, 지식, 윤리 등을 통해 작동하며, 결과적으로 주체를 내면화된 규범과 자기 훈련의 주체로 구성한다.
이러한 전회 이후 푸코가 말년의 강의와 저술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한 개념이 바로 ‘파레시아이다. 파레시아는 단순히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행위로서의 실천, 즉 주체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윤리적 행위이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통치성과 권력, 그리고 주체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결정적인 고리를 형성한다. 말하자면, 권력이 주체를 구성하는 동시에 통치성을 통해 내부화되는 메커니즘 속에서, 파레시아는 그 통치성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전복할 수 있는 실천의 지점이 되는 것이다.
즉, 푸코는 파레시아를 통해 권력-통치-주체의 삼항 구조를 단순히 반복하거나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구조에 틈을 내고, 주체가 자신을 재형성할 수 있는 윤리적 행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때 주체는 단지 권력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그 진실에 따라 자신을 형성해나가는 존재,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존재로 재구성된다. 푸코의 후기 사유에서 파레시아는 바로 이러한 자기 통치의 윤리, 혹은 진실의 용기를 바탕으로 한 비판적 자기형성의 실천으로 자리매김된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단순한 수사학적 말하기의 기술도, 대항권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정치적 실천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푸코 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권력·통치·주체의 문제계를 응축시키는, 그리고 그 문제계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려는 마지막 실천적 모색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파레시아는 단순한 언어 행위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면서 진실을 발화하는 존재론적 실천이다. 이 발화는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즉, 진실을 말하는 자, 파레시아스트와 그 진실을 받아들일 위치에 놓인 청자 혹은 청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비대칭적 소통 구조를 전제로 한다. 이 구조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권력관계와 위험이 교차하는 장에서 수행되는 발화의 행위성이 핵심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파레시아는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말하기, 다시 말해 자기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타자에게 도전하는 실천적 언표 행위로 볼 수 있다. 진실을 발화하는 주체는 기존의 규범과 권력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그 질서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를 복원한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권력에 대한 수동적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을 감내하며 행하면서 권력과 특정한 방식의 상호작용을 꾀하는 주체화의 적극적 실천이다. 이 발화는 그 자체로 제도나 관습에 균열을 내며, 청중 혹은 상대방을 새로운 인식의 장으로 이동시키는 행위가 된다. 또한 파레시아의 발화는 단지 메시지의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그 말이 수행되는 정동적이고 윤리적인 태도, 즉 말하는 자의 용기, 위험 인식, 자기 책임 등의 요소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단순한 '자유로운 표현'과 구별된다. 그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방식이자, 그 자유가 권력 구조를 통해 제약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돌파하려는 윤리적-정치적 수행이다. 이처럼 발화 속에서의 파레시아는 단지 언어적 현상이 아니라, 주체화의 과정과 권력 관계의 재편을 동시에 함의하는 실천의 장으로 기능한다.
3. 민주주의를 둘러싼 파레시아 해석 : 에티엔 발리바르와 이치다 요시히코
파레시아 개념의 내적 다양성과 이질성에 주목한 연구자들 가운데, 에티엔 발리바르와 이치다 요시히코의 해석은 푸코 이후의 파레시아 개념을 풍부하게 재구성하는 중요한 좌표를 제공한다. 발리바르는 파레시아를 민주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균열이자 그 경계를 구성하는 원리로 해석하며,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내적 자기모순과 그 외부로부터의 긴장을 동시에 읽어낸다. 즉, 그는 파레시아를 단순히 민주주의의 일부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구성하면서도 그 체제와 긴장관계를 맺는 ‘비동일적인 권력의 분출’로 파악한다.[5] 발리바르의 이러한 해석은 파레시아를 ‘진실을 말하는 용기’로 제한하기보다, 민주주의가 내부적으로 수렴할 수 없는 외적 힘이자 ‘민주주의를 구성하면서도 끊임없이 위협하는 정치적 외상’으로 바라본다. 이는 푸코의 『담론의 질서』에 제시된 통제와 예외, 말의 배제 구조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독해로도 해석될 수 있다.
반면 이치다 요시히코를 비롯한 일본 학자들의 해석은 푸코의 후기 작업 중에서도 특히 최후의 강의록인 『진실의 용기』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적 파레시아, 철학적 파레시아, 윤리적 파레시아, 그리고 퀴니코스적 파레시아를 구분하며, 각각의 양식이 보여주는 주체화의 양태와 발화의 윤리성에 주목한다. 이치다는 특히 윤리적 파레시아가 단지 말을 통한 타자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더 이상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발화, 다시 말해 말과 삶이 구분되지 않는 실존적 실천으로 전환된다는 점에 주목한다.[6] 이러한 해석은 후기 푸코가 ‘권력-지식’ 개념에서 ‘자기 돌봄’의 미학으로 이행했다고 평가되는 지점에서, 여전히 자기 돌봄의 차원에서도 권력-지식의 구조가 내면화된 채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발리바르와 이치다의 차이는 민주주의 내부의 권력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발리바르에게 파레시아는 민주주의 외부의 권력적 긴장이 민주주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균열의 형식이며, 이로 인해 파레시아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타자성의 출현을 의미하게 된다. 반면 이치다는 파레시아를 민주주의 내의 자기모순 ― 곧, 민주주의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이상을 스스로 실현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 에서 비롯된 실천적 주체화로 해석한다. 이치다에 따르면, 민주주의 내의 파레시아는 외부의 권력적 기원에 의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민주주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반성적 실천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발리바르와는 상이한 입장을 보인다.
이치다가 제시하는 윤리적 파레시아의 정의는 더욱 급진적이다. 그는 윤리적 파레시아를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주체, 즉, 타자(신)와의 위계적 관계를 전제로 한 자기의 주권적 선언"이라고 정리한다. 이 선언은 단순한 자백이나 자기 폭로가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통해 절대적 주체성을 획득하는 자기화의 순간으로 나타난다. 이치다의 탁월함은 푸코가 명시적으로 정식화하지 않았던 지점 ― 즉, 파레시아가 권력-지식의 작동으로부터 어떻게 개체화를 가능하게 하는가 ― 을 정확히 포착했다는 데 있다.
이치다는 후기 푸코의 진실 말하기 개념이 때로는 개인의 생존 혹은 윤리적 자기 수행에만 집중하는 듯한 위험을 내포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윤리적 파레시아는 단지 자기 보호나 자기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이미 권력-지식의 미시적 작동 속에서 형성된 개체성의 골격을 드러내는 발화로 읽힌다. 이치다에 따르면, 파레시아스트는 여전히 권력-지식의 생산물이며, 그 개체성은 이미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형성된 분할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파레시아는 근본적으로 신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신과의 동등한 관계로 주체를 상정했을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는 ‘지고한 주체성’을 드러내며, 이 지점에서 비로소 타자와 분리된 절대적이면서도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밖에 없는 개인이 가진 최소의 육체성이, 즉 파레시아의 윤리적 출발점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이치다 요시히코의 주장, 즉 ‘개체가 전체와 권력을 초월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권력-지식에 의해 분할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통찰은 파레시아 개념의 윤리적 차원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데 중요한 전기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이미 분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주체, 혹은 언어를 넘어선 윤리적 발화가 여전히 권력의 작동 속에 놓여 있다는 이치다의 주장은, 푸코 권력이론과의 어떤 불편한 긴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푸코 권력이론과 자기 돌봄 이론 사이의 어떠한 상호성을 명확히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가능한 첫 번째 해석 가능성은, 윤리적 파레시아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철학적 파레시아와 정치적 파레시아라는 두 극 사이로 분할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순수한 ‘개체적 육체성’이나 ‘신과의 관계 안에서만 성립하는 지고한 주체’라는 개념은 환상일 수 있으며, 현실에 존재하는 주체란 항상 이미 권력에 의해 포섭되고, 관계적 구조 속에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입장은 곧 “개체는 태초부터 권력-지식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윤리적 파레시아 역시 예외적인 발화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신과의 관계라는 절대적 고립성은 실제로는 타자들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결국 ‘진실 말하기’는 언제나 정치적 관계의 한복판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을 가장 설득력 있게 반영하는 해석은 발리바르의 파레시아 독해로 볼 수 있다. 발리바르는 윤리적 파레시아의 절대성과 독립성을 인정하기보다, 모든 진실 발화 행위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권력관계, 즉 민주주의 내부의 긴장과 마찰 속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는 곧,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이 윤리적 주체의 고립된 선언이라기보다, 항상 정치적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수행이라는 입장이다. 이 관점을 밀고 나갈 경우, 윤리적 파레시아가 강조하는 '신과의 관계', '타자와 단절된 지고한 주체의 발화'는 푸코 권력이론의 핵심이었던 관계성과 상호작용의 장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관계성의 사유를 전제로 하는 푸코의 권력이론에서 이러한 윤리적 파레시아의 개념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도약을 구성하게 되며, 나아가 나르시시즘의 철학적 승인처럼 해석될 위험까지 내포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푸코 권력이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비판과도 맥을 같이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푸코는 권력의 네트워크적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지배나 주권과 같은 비대칭적 권력 구조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상대적으로 미흡하게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푸코는 지배의 문제를 주체들 간의 수평적 관계로 환원해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오히려 주권적 폭력이나 비대칭적 지배의 현실을 가시화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7] 이 비판은 주디스 버틀러의 푸코 해석, 즉 ‘권력은 항상 양방향적이며 동등한 주체 간의 상호작용으로 작동한다’는 입장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역시 비대칭적 권력 하에서의 저항의 가능성 ― 예컨대 계급적 폭력이나 국가 권력에 대한 투쟁 ― 을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비판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통치성은 권력의 미시적 작동과 주체화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탁월한 개념이지만, 통치 구조를 조직하는 ‘지배 개념’ 자체를 푸코가 명확히 정식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특히 윤리적 파레시아가 그러한 통치성과 독립된 고유한 주체화 양식으로 제시될 경우, 그것이 과연 푸코적 권력이론 내부에서 정합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혹은 이로 인해 푸코 권력이론이 자기 내부의 이론적 긴장을 노출하게 되는지는 여전히 숙고해야 할 지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시된 여러 해석―윤리적 파레시아의 독립성과 절대성, 혹은 권력-지식에 대한 초월적 저항으로서의 개체적 진실말하기―에 대해, 푸코 자신의 파레시아 분석은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파레시아를 단순한 자기 선언이나 고립된 윤리적 결단으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며, 언제나 위험과 비대칭성의 장 속에서 발생하는 발화 행위로 이해한다.
우선, 푸코가 말하는 정치적 파레시아는 그 기원에서부터 자기보다 더 강한 타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용기 있는 행위로 규정된다. 이 진실 말하기는 결코 자아의 자족적인 만족이나 나르시시즘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레시아는 언제나 말하는 자가 물리적·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는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이 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발화하는 구조적 실천이다. 따라서 파레시아는 본질적으로 비대칭적 권력 관계의 정면에 위치하며, 타자의 위협을 내포한 위험한 윤리적-정치적 실천이다. 이러한 점에서, 발리바르나 이치다가 부분적으로 제안한 바와 같이 파레시아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 혹은 초월적 윤리성에 기반한 자율적 행위로 제한하는 것은 푸코의 기본 입장과 충돌하게 된다.
철학적 파레시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철학자의 진실 말하기는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내면적 윤리성’의 실현으로 보일 수 있으나, 푸코는 이를 스승-제자 관계, 혹은 지식-무지의 권력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 한다. 철학적 파레시아는 언제나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자기 통치성과 진실성이 검증되는 과정이다. 특히 푸코는 더 나아가 스승과 제자 관계가 겨냥하는 목표로서의 자기 통치성, 즉 사목권력의 논리와 구분되는 철학적 지도력의 형태로서의 사제화되지 않은 형태의 자기 통치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자기 통치성은 외형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타인의 요구, 타인의 시선, 그리고 교육적 권위와의 관계 안에서 실현된다. 다시 말해, 철학적 파레시아는 결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고립된 윤리적 발화’가 아니며, 타자와의 위계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이 감수해야 할 책임과 위험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푸코가 진술한 윤리적 파레시아나 퀴니코스적 파레시아조차도 결코 순수하게 내면화된 자기 돌봄의 형태에 머무르지 않는다. 퀴니코스적 파레시아는 특히 권력과 사회의 규범적 구조 전체에 대한 조롱, 전복, 그리고 거리두기를 통해 발화되며, 이는 단순한 철학적 반성이라기보다 사회적 장 전체에 대한 ‘거침없는 진실 말하기’의 실천이다. 윤리적 파레시아 또한 자신의 삶 전체를 통째로 내던지는 식의 실존적 선언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실천은 단순한 도덕적 결의나 개인적 윤리를 넘어서, 제도적 권력과 사회적 시선에 대한 정면 충돌을 포함한다.
따라서 푸코에게 파레시아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타인과의 대면, 그리고 권력 관계 속에서의 자기 노출을 전제로 한다. 말하는 자는 언제나 관계적 장 속에 있으며, 진실을 말한다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위험과 대가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파레시아는 단순한 개체적 윤리도, 고립된 자기 규율도 아니며, 오직 비대칭성과 불균형 속에서 성립하는 실천적 진실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푸코의 파레시아에 대한 구상을 감안했을때, 윤리적 파레시아를 별도의 개념적 차원으로 설정하는 대신 정치적 파레시아와 철학적 파레시아만을 공통 원리 아래 포섭하려는 해석, 곧 발리바르가 제시한 파레시아 개념의 재구성은 난처하게 된다. 특히 발리바르의 이러한 축소적 해석은 푸코의 후기 강의록, 특히 『진실의 용기』에서 명확히 반박된다. 이 강의록에서 푸코는 윤리적 파레시아를 단순히 철학적 자기 성찰의 연장선상에 두지 않고, 삶의 양식 전체에 걸쳐 실천되는 ‘진실의 실존화’로 규정한다. 윤리적 파레시아는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말하기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그 진실에 따라 구성하고, 이를 통해 기존 사회 질서와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실천이다. 따라서 윤리적 파레시아는 철학적 파레시아보다도 더 급진적인 실존적-정치적 실천을 함의하며, 독립적인 범주로 간주될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리바르의 해석이 지니는 설득력은 푸코의 다른 작업들, 특히 권력-지식 및 통치성에 대한 분석들과의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왜냐하면 푸코는 정치적 저항을 신이나 초월적 이념에 대한 대립으로 환원하지 않고, 언제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관계망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윤리적 파레시아는 오히려 철학적 파레시아의 극단적 표현이자 정치적 파레시아의 특수한 경우로 간주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파레시아 개념 내부에서 범주를 나누기보다는, 그 공통된 핵을 중심으로 정치적·철학적·윤리적 실천이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시각은 파레시아를 민주주의에 대한 귀족주의적 저항의 형태로 이해하려는 발리바르의 해석과도 접합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파레시아는 언제나 통치성의 이질적인 절합 혹은 대립을 드러내는 실천이다. 정치적 파레시아가 국가 권력이나 제도적 질서에 대한 비판적 진실 말하기라면, 철학적 파레시아는 주체의 형성 내부에서 발생하는 통치성의 내면화와 그것에 대한 반성과 전유의 실천이다. 결국 이 둘은 통치성이라는 공통된 기반 위에서 작동하는 두 개의 상보적 형식으로 이해된다.
나아가 발리바르는 오늘날 통치성이 더 이상 단일한 체계로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파편화되고 상호 충돌하는 권력 장치들의 결합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통치성의 다극화 속에서, 진실 말하기의 권한도 더 이상 특정 개인이나 제도에 독점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는 파레시아가 더 이상 정치적 저항의 개념으로 유효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이는 현대 사회가 ‘모두가 파레시아스트인 것처럼 말하는 사회’라는 사실―즉 수많은 개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진실’을 주장하는 다원주의적 담론 환경―과 깊게 연결된다. 오늘날의 우리는 무수한 주체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파레시아는 특정한 윤리적 용기나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 진실의 다원화 속에서 그 실천적 가능성과 경계가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실천으로 남게 된다.
이제 이러한 해석을 좀 더 확장해보자. 푸코가 제시한 최초의 역사적 파레시아스트 크레우사는 단순한 고백의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치—여성, 피해자, 권력 바깥의 존재—를 기반으로 진실을 말하는 정치적 파레시아스트의 전범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크레우사와 같은 ‘소수자’ 파레시아스트가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다수자’ 또는 ‘대중’의 파레시아스트는 과연 성립 가능한가? 다시 말해,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권력을 지지하거나 형성해온 집합적 주체로서의 대중이 파레시아스트가 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수사적 질문이 아니다. 실제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민중’ 혹은 ‘대중’ 내부에서, 억압받는 집단들이 제도 권력에 맞서 진실을 외치는 순간들은 존재해왔다. 이들은 분명히 일시적이나마 파레시아의 윤리적·정치적 실천을 구현해낸다. 그러나 발리바르가 『대중들의 공포』에서 지적하듯이, 대중은 단지 두려움에 떠는 존재가 아니라 동시에 타자를 두렵게 만드는 권력적 주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중은 언제나 억압받는 존재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일정한 조건 속에서는 억압을 재생산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다수자’ 파레시아라는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론적 통찰을 참조하면, 대중의 진실 말하기는 때로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 권력의 무한한 반복적 갱신—가령 스탈린주의 아래의 무한한 고발 체계처럼—으로 기능할 수 있다. 지젝은 스탈린 치하에서의 반혁명분자 고발과 ‘영구혁명’ 사이의 긴장 관계를 통해, 진실이 어떻게 권력과의 전면적인 대립이 아니라, 그 권력의 정당성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전도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8] 이러한 경우, 고발 행위는 위험을 감수하는 진실 말하기라기보다, 권력에 대한 동일화 혹은 복종으로 읽힐 수 있으며, 이때 파레시아는 더 이상 그 개념의 핵심인 ‘진실을 말할 용기’와 ‘권력에 대한 대면’이라는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렇듯 파레시아를 단지 ‘진실을 말하는 행위’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그 진실이 어디에서 말해지는가, 누구에 의해 말해지는가, 그리고 그 말하기가 어떠한 권력 구조에 대면하는가라는 조건이 빠질 때, 파레시아는 그 개념의 급진적 정치성을 상실한다. 그렇다면 결국 파레시아는 본질적으로 소수자 정치의 무기로서만 유효한가? 혹은 다수자의 파레시아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특별한 조건—예컨대 다수자 내부의 자기 분열 혹은 탈동일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은 분열된 다중의 사회 속에서 파레시아 개념의 정치적 실효성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수많은 이들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말하는 다원주의적 현실 속에서, 파레시아는 더 이상 권력에 대항하는 윤리적 고발로 간주되기 어렵다. 오히려 오늘날의 파레시아는, 다원적 진실 체계와 끊임없이 충돌하는 불완전한 실천, 혹은 진실의 독점이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의 위험한 말걸기로 재정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레시아 개념을 보다 저항적으로 활용할 방안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다시 주목할 만한 것은 푸코가 철학의 역사에서 파레시아를 재구성하는 방식, 특히 그의 칸트 해석이다. 푸코는 고대 철학자들, 특히 소크라테스를 파레시아스트로 호명하면서, 철학과 파레시아 사이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조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서술 순서를 따라가 보면, 철학자들 중 최초로 파레시아스트로 명명되는 인물은 오히려 칸트이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계보화라기보다는, 푸코가 자신의 강의와 저술 속에서 개념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담론적 방식의 결과이며, 파레시아의 현대적 윤리로의 이행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실제로 『담론과 진실』 초기에 푸코는 소크라테스를 파레시아스트로 간주하지 않았고, 이후의 강의와 글에서야 비로소 그를 철학적 파레시아의 전형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개념의 진화라기보다는, 푸코가 철학적 파레시아의 개념 모델로 우선적으로 칸트를 설정했기 때문에 나타난 전략적 지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진리, 주체, 권력의 삼항구조를 철학 내부에서 다시 정식화하려는 푸코의 기획과 맞닿아 있다.
푸코에게 있어 칸트는 진리와 정의를 둘러싼 ‘말해야 할 진실’을 감히 수행한 인물로, 일종의 테이오스 아네르(theios aner, 신적 인간)로 재현된다.[9] 칸트의 계몽 철학은 진리의 지위에 근본적인 전환을 일으킨다. 진리는 더 이상 초월적 제3자—신이나 절대자의 차원—의 소유가 아니라, 이제 인간 주체 내부에서 구성되고, 그 주체가 스스로에게 말하고 판단하며 실천하는 윤리적 행위로 등장한다. 즉, 진리는 외부로부터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화된 규율과 자기 판단에 따라 생성되는 실천적 구성이며, 이러한 진리 말하기는 공적 공간 속에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말걸기의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전환은 푸코 철학의 핵심인 통치성과 권력-지식 체계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진리는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통치의 형식에 직접 개입하는 실천의 문제가 되며, 계몽은 곧 자기 시대의 조건과 구조에 응답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재규정된다. 이 맥락에서 이치다 요시히코는, 신에게 강간당한 크레우사가 고발을 통해 신의 질서를 문제삼고, 이를 재구성한 아테네 시민이 국가의 형성과 파괴에 기여했다고 보며, 진리 말하기의 정치적 성격이 시대를 관통해 작동해왔음을 강조한다. 이는 파레시아가 단순한 고대적 수사행위가 아니라, 권력과 통치성의 경계를 흔드는 윤리적 행위임을 시사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적 파레시아를 재고할 때, 모두가 무분별하게 말하는 행위가 단순히 기존의 사회질서가 부여한 권리로 인해 모순을 일으키는 행위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개체의 자율성을 통한 윤리적-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파레시아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진리 효과는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과 방향성을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또 추가로 중요한 점은, 푸코가 파레시아를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담론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파레시아를 일관된 형식으로 재현하거나, 역사적 시기들을 선형적으로 연결하는 데 관심이 없다. 오히려 파레시아는 각 시대의 통치성과 권력-지식 체계 속에서 상이하게 작동하며, 그러한 조건 속에서 특정한 윤리적 실천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파레시아라는 개념은 유명론적 명명으로 기능한다. 동일한 이름 아래 존재하는 다양한 형식들은 실제로는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작동하며, 공통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윤리성과의 접점에서 명명되는 정치적 실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파레시아는 절대적 동일성을 가진 근본개념이 아니라 각 시대의 통치성과 충돌하며 그것을 전환시키는 현재성에 의해 관통되는 개념이다. 이 현재성은 단지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주체가 자기 시대의 구조에 응답하여 말하기를 통해 새로운 진리 실천을 가능케 하는 정치적 조건과 행위의 교차점이다. 그렇기에 파레시아는 항상 ‘소수자’의 행위로만 환원되지 않으며, 오히려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다수자’ 역시 파레시아스트가 될 수 있다. 예컨대 다수자 집단이 권력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시기, 혹은 내부적으로 균열을 드러내며 동일성을 해체해 나가는 조건에서, 이들은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하는 윤리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 이 경우, 다수자의 말하기 역시 특정한 양태의 파레시아적 윤리를 형성할 수 있으며, 현대에서 이를 목도하거나 이러한 말하기에 참여하는 우리 또한 이를 현대적 의미의 파레시아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푸코가 강조한 역사성 및 보편적 담론에 대한 거부와도 충돌하지 않는다.
파레시아의 효과는 고발의 성공 여부나 발화 주체의 억압 여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하기가 기존의 통치성—즉, 객관적 진리나 제3자의 권위에 기반한 구조—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하는 구도 전환의 발화로 작동했는가이다. 다시 말해, 파레시아는 결과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구도를 전환시키는 윤리적 발화의 양식 자체로서 정의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의 미투 운동은 파레시아의 대표적 사례로 이해될 수 있다. 미투 운동은 법적 결과나 고발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피해자들이 권력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진실을 공적 공간에서 발화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파레시아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이 말하기는 단지 성폭력 사건을 사법 체계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서, 그 사법체계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통치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정치적 행위로 기능하며, 가부장적 권력과 그 정당화 논리를 역전시키는 윤리적 효과를 낳는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파레시아는 단지 진실을 말하는 발화가 아니라,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중첩된 통치성과 권력-지식 체계에 응답하며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을 여는 행위이다. 이는 민주주의 내부에서 민주주의 자체를 질문하고 교란하는 자기반성적 실천으로 작동하며, 따라서 파레시아는 민주주의적 주체성과 정치적 윤리의 중핵적 방식으로 재사유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 파레시아를 민주주의 내부에서의 자기 반성과 균열의 형식으로, 더 나아가 민주 주의적 주체성과 정치적 윤리의 핵심으로 파악하였다고 하여, 발리바르가 제기한 비판을 마냥 경시할 수는 없다. 발리바르는 파레시아 개념이 가진 근본적인 정치적 긴장을 지적한다. 현대 정치 현실에서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흔하게 들린다. 정치 지도자, 미디어, 시민운동, 심지어 혐오를 내세우는 집단까지도 자신들의 주장을 ‘진실 말하기’로 정당화한다. 이처럼 파레시아가 무분별하게 호출되는 조건 속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파레시아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판단하는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운 난제로 머물러있다.
이는 단지 파레시아의 오용이라는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파레시아가 정치적 맥락 속에서 기능할 때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한계이며, 파레시아 자체가 정치적 진실 말하기의 형식으로서 갖는 운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정치적 파레시아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상이한 입장들이 서로를 향해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각 주체는 자신이 말하는 진실이 억압된 진실이며, 상대는 그 진실을 억누르는 통치성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상반된 진술들이 각기 다른 통치성을 겨냥하며 파레시아를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는, 정치적 파레시아의 진정한 실천성을 구별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더욱이 이러한 조건에서는 각 진술이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허위를 동시에 지닌 채, 타자에 대한 예속화를 정당화함과 동시에 또 다른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양가적 형식을 띠게 된다.정치적 파레시아의 이러한 난점들은 철학적 파레시아와 윤리적 파레시아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시대의 현재성 속에서는 주요한 난점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어떤 발언이 파레시아에 해당할 수 있는지, 또는 무엇을 진정한 파레시아로 규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제기해야 한다. 이는 특정한 주장을 그 자체로 긍정하거나 거부하는 판단 기준을 규범화한 후에 이루어져야 할 질문이 아니라, 발화가 기존의 통치성에 어떻게 개입하고 구도를 변화시키는지를 면밀히 분석하는 실천적 기준에 기반해 이루어져야 하는 질문이다. 파레시아는 단순한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하기가 어떤 윤리적, 정치적 구도를 만들어내는지를 평가해야 하는 말-정치의 행위인 것이다.
4. 결론: 적절하지 않은 발화로서의 파레시아
푸코가 정립한 파레시아 개념에서 '진실을 남김없이 말하는 발화'는 단순한 언어 행위를 넘어, 주체 형성과 정치적 윤리의 핵심적 실천으로 기능한다. 푸코에게 파레시아는 주체가 진실을 감히 말하는 순간에 형성되는 실천적 존재이며, 이때 발화와 주체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불일치 혹은 긴장이 내재해 있다.
실제로 푸코가 고찰한 철학적, 정치적, 윤리적 파레시아를 관통하는 공통된 핵심은 발화가 권리적 자격의 소유 여부에 따라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오히려 발화 과정에서 그 권리를 비로소 실현하고, 발화를 통해 새로운 주체성과 새로운 윤리적 위치가 구성된다. 이때 파레시아는 단지 주체의 내면적 용기나 도덕적 진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즉 권력의 위계 속에서 자신을 적절하지 않은 위치에 놓이게 하는 진실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파레시아는 언제나 일정한 불화와 부조화 속에서 작동한다. 이는 단순히 권리의 위계나 제도적 배제라는 틀을 넘어서, 발화를 수행하는 주체 자신이 자신의 위치성에 대해 위협받고, 그 위협의 조건 하에서야 비로소 발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하다. 이러한 발화는 타자에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통해 타자의 윤리적 위치를 동요시키며, 새로운 정치적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프레데릭 그로Frédéric Gros는 푸코의 『진실의 용기』 강의정황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푸코의 개입은 다음 지점에서 중요하다. 그러한 윤리적 차이화는 사실 지도자의 도덕적 자질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예외적 개인을 익명의 대중으로부터 구별하는 실존 양식화의 독특성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푸코의 개입은 오히려 자기와의 관계 구축에서 진실의 차이를 작동시키는 것이며, 억견과 공유된 확신에 구멍을 뚫는 거리로서 진실을 작동시키는 데 있다.” 이 말은 파레시아를 단지 도덕적 강자의 언어 행위로 이해하는 입장을 배격하며, 윤리적 자기형성이라는 미시적 차원과 정치적 개입이라는 거시적 차원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는 개념으로 재규정하고자 하는 푸코의 문제의식을 집약한다.
파레시아는 절대적 외부로부터 말해지는 진실이 아니라, 언제나 권력 속에 있으면서도 그 권력의 작동을 흔드는 말하기이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바깥dehors’은 권력과 완전히 분리된 외부가 아니라, 권력 안에 있으면서도 그 작동에 틈을 내는 접속의 공간이다. 이 ‘바깥’에 위치한 주체는 권력에 의해 구성되고 억압당하면서도, 통치성을 자기화 하고 순응하면서도, 그 억압과 순응의 틈새에서 대항적 윤리와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구성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레시아는 단순한 발화가 아니라, 주체화라는 다층적 과정에서 진실을 감행하는 용기의 이름이며, 항상 '적절하지 않음'이라는 구조적 조건을 수반한다. 말하자면, 파레시아는 윤리적 정당화보다 앞서는 정치적 실천이며, 통치성의 논리에 균열을 가하는 잠재적 개입으로 작동한다. 바로 그곳에서, 정치-윤리적 주체는 진실의 위험을 감수하는 윤리적 존재로서, 타자와의 불일치로서 출현한다.
[1] 푸코의 파레시아에 대한 탐구는 1981년 콜레주 드 프랑스 ‘주체의 해석학’ 강의에서 처음 언급된다. 이후 1982년 그르노블대학에서 ‘파레시아’ 강의를, 1983년에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담론과 진실’ 강의를 하며 파레시아를 지속적으로 다루었고, 마지막으로 1984년 초 마지막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였던 ‘진실의 용기’ 강의에서 파레시아 연구를 마치게 된다.
[2]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담론과 진실 첫 번째 강의(91p~134p), 두번째 강의(135p~177p) 참조. 오르트망 옮김, 동녁, 2017.
[3] 『현대사상』 2009년 6월 특집: 미셸푸코 2권 외,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옮김, 2020』 참조. 프레데릭 그로는 ‘푸코에게서의 파레시아’ 논문에서 푸코가 1982년 ‘주체의 해석학’ 강의와 달리 1984년 ‘진실의 용기’ 강의에서 소크라테스를 파레시아스트로 정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로에 따르면 푸코는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자기[에]의 배려와 실존의 기술이라는 테마에 파레시아의 요청을 접합하는 인물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동일한 논문이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심세광 외 옮김, 길, 2006에 수록되어 있다.
[4]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참조, 양창렬 옮김, 난장 (예정). 콜레주 드 프랑스에 강의록 녹음본이 공개되어 있다. https://www.college-de-france.fr/fr/agenda/cours/le-gouvernement-de-soi-et-des-autres-le-courage-de-la-verite
[5] 에티엔 발리바르, “말하기, 대항말하기: 미셸 푸코에게서 파레시아의 형태들에 관하여.” 참조, 배세진 옮김, by 인-무브, 2025년 4월 11일, https://en-movement.net/554.
[6] 이치다 요시히코가 2020년 1월 25일 교토대학교에서 발표한 글 ‘소피스트는 어떻게 파레시아스트가 되었는가’ 참조. 현대정치철학연구회에서 푸코와 파르레시아 1,2 『현대사상』 2009년 6월 특집: 미셸푸코 2권 외,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소책자를 발간했고 이 중 푸코와 파르레시아 2에 수록되어 있다..
[7]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 부록1 - 푸코와 맑스 : 유명론이라는 쟁점 참조.
[8]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5장 ‘잉여가치에서 잉여권력으로’ 참조.
[9] 푸코와 파르레시아 2 『현대사상』 2009년 6월 특집: 미셸푸코 2권 외,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옮김, 2020. 221p~223p 참조. 이치다 요시히코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푸코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역사적 순서가 아니라 등장순서(푸코의 작업순서)에 관해 말하자면 칸트가 최초의 파레시아스트”라고 말하며, 비록 푸코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수행한 계몽이 공허한 동어반복적 슬로건임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1970년의 푸코라면 명확히 칸트를 “테이오스 아네르라고 말했을 것”이며 1984년의 작업에서도 푸코가 칸트의 계몽으로부터 파레시아적 주체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참고 문헌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오르트망 옮김, 동녁, 2017.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 오트르망 옮김. 동녘, 2016.
미셸 푸코.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2-1983. https://www.college-de-france.fr/fr/agenda/cours/le-gouvernement-de-soi-et-des-autres. 『자기 통치와 타자의 통치』. 난장 (출간 예정).
미셸 푸코.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 le courage de la vérité. https://www.college-de-france.fr/fr/agenda/cours/le-gouvernement-de-soi-et-des-autres-le-courage-de-la-verite. 『진실의 용기』. 난장 (출간 예정).
사카이 다카시, 오모다 소노에, 프레데릭 그로, 이치다 요시히코 외. 『푸코와 파르레시아 I』(『현대사상』 2009년 6월 특집 (1/2)).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엮음. 김상운 옮김. 현대정치철학연구회. 2020.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
에티엔 발리바르. “말하기, 대항말하기: 미셸 푸코에게서 파레시아의 형태들에 관하여.”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 https://en-movement.net/554.
이치다 요시히코. “우리는 누구인가? 혹은 푸코 말년의 ‘바깥의 사고’.” 김상운 옮김. https://multitude.tistory.com/984.
필립 사보, 이치다 요시히코, 에티엔 발리바르, 하코다 태츠 외. 『푸코와 파르레시아 II』(『현대사상』 2009년 6월 특집 (2/2) + 특별논문 3권). 현대정치철학연구회 엮음. 김상운 옮김. 현대정치철학연구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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