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혹을 버린 영화, 원본을 버린 클립
필자: 수차미
“최근 OTT 플랫폼은 구독자 견인을 위해 충성도 높은 K팝 팬덤을 겨냥한 다큐멘터리를 계속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소비층은 ‘컷따개’를 거쳐 해체된 아카이브와 인터뷰 단위로 작품을 접하고 원본으로 유입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임수연)
임수연 저널리스트가 다큐매거진 ‘DOCKING’에 쓴 글을 읽었다. 동시에 최근 관람한 넷플릭스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떠올랐다. <케데헌>은 소니픽처스에서 케이팝 아이돌을 소재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다. 특히 팬들 사이에서는 작품 속에 있는 ‘한국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게 하나의 재미가 됐다. 겉보기에는 영화팬과 아이돌 팬이 구분되지 않는 듯하다. 가령 아이돌팬은 아이돌이 등장하는 영상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아이돌 이미지를 영상 위에 덧씌운다. 이는 영화팬이 영화를 반복관람하면서 영화의 빈 공간을 채워가는 것과 유사하다. 영화팬은 영화를 반복관람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어느 순간에는 영화가 본래 내포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된다. 본래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됨으로써 영화는 이제 단순한 ‘내부’로만 사유되지 않는다. 아이돌팬도 마찬가지다. 아이돌팬에게 클립된 사진이나 영상은 단순히 원본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떠올리는 한 세계를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은 무언가를 반복하는 일이 단순히 시작에서 끝을 따라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구성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러니 반복관람은 헛되고도 헛된 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관객이 ‘주어진 세계’를 개척해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원점으로 돌아가면 클립등의 형태로만 접한 영상들이 절대적으로는 원본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특히나 방송계에서는 편집에 따라 대상의 이미지나 관점을 조율하는 일이 흔하므로 소위 말하는 ‘악마의 편집’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고, 이에 따라 진실에 근접하는 일은 어렵게 된다. 더군다나 아이돌의 비화를 담은 짧은 영상이 몇 분 남짓의 클립으로 분화하고, 이를 다시금 릴스나 쇼츠 형태의 초 단위 콘텐츠로 변형되는 걸 보면 아예 처음부터 원본 소스는 필요도 없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건 따로 있다. 일반적으로 영상물은 예비 고객들에게 홍보할 요령으로 예고편 등을 제작하는데 이는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작품 분위기 전반에 대한 스케치를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 자신의 취향을 점검할 시간을 주는 것. 다른 하나는 짧은 클립을 통해 앞뒤 상황을 추론케 함으로써 이를 직접 확인해보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따라가 보려는 건 후자로, 소위 말하는 ‘모험’으로서의 영상 매체다. 우리가 인형과 같은 사물과 오랜 시간을 보낼수록 추억의 깊이가 남달라지듯 어떤 경우에는 정해진 평면보다 더 깊은 면적이 자리하곤 한다. 이렇게 되면 더는 같은 대상이 아니라고밖에 볼 수 없으며 원칙적으로 ‘원본’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원본의 사전적인 정의는 본래의 판본이다. 분명 본래의 판본이란 건 존재한다. 그러나 컷따개(Clipper) 문화는 원래 판본을 마구잡이로 해체함으로써 원본 영상을 알아볼 수 없게 한다. 사실 원본 영상을 애초에 소화할 수 없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소비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하다만, 컷따개는 일종의 장르를 설정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컷따개는 혼성장르로 구성된 원본 영상을 다양하게 나눔으로써 보는 이가 매력을 느낄 만한 여러 장르 태그를 부착한다. “이 남돌/여돌에는 귀여움이나 산뜻함, 그 외 여러 다양한 복합적인 매력이 있는데 이 짧은 클립에서는 이런 걸 보여줄 수 있다”고 말이다. 클립 하나만을 보고 원본에 유입된 관객은 자신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목격한다. 단편적인 클립 하나는 원본과는 전혀 다른 구상을 제공한다. 이렇게 나뉜 클립들을 다양하게 관람한다 한들, 원본에 대한 이해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니 원본에 대한 정의 자체를 바꾸어야 할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본이라는 건 당신이 본 바로 그 풍경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 표현에 가깝다고, 특정한 세계를 구축해서 그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이른바 컷따개를 거쳐 해체된 원본은 세기의 상실이 아니라 모험을 위해 마련된 무대에 더 가깝다.
해체된 아카이브와 인터뷰는 원본 영상을 찾기도 전에 이를 그냥 스쳐보내는 일로 이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관객은 고고학자가 되어 자신이 찾던 영상을 따라 탐문수사를 진행할 수도 있다. 아이돌팬과 밀레니엄 시네필을 한 곳에 엮을 수는 없지만 반대로 영상 매체의 관점으로 이들을 한데 묶을 수는 있다. 영화는 이제 단순한 ‘내부’로만 사유되지 않는다. 도리어 서로 다른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듣는 공간에 더 가깝다. 영화가 단순한 내부로 사유되지 않는 이상 겉으로 보이는 영화의 우주는 우리 생각보다 더 넓다. 여러 매체 등에서 인용되는 몇몇 영화의 유명한 장면 등은 소위 말하는 ‘오마주’로서 아이돌 덕질에서의 ‘입덕’ 포인트가 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자신이 아는 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만 보일 뿐 일반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입덕 포인트의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이 이 길을 걷는다는 것에 확신을 준다는 것이다. 어둔 밤을 걷는 일에 믿음이 필요하듯, 이 세계에서 중요한 건 ‘세계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니 클립된 영상들을 보고서 원본으로 유입되지 않는다고 지적해도 뭐라 크게 할 말은 없다. 클립은 어디까지나 클립일 뿐, 원본 그 이상으로 커지지는 못한다. 이 클립은 원본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해체된 아카이브와 인터뷰는 원본을 더는 확인할 수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클립은 생존자가 아니며 유실돼가는 세계의 잔여물도 아니다. 도리어 해체의 역할을 긍정할 수도 있는데, 클립은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바로 그 세계로 향하는 입구다. 아카이빙의 관점으로 보면 클립은 결코 원본에 다가설 수 없겠지만 얼마나 많은 평행세계가 존재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클립은 대개 한 영상에서도 많고 다양한 순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마치 한 인간의 삶에도 많고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듯 세계의 이미지를 조작하기보다 자신이 바라는 세계에 도달하도록 많고 많은 계단들을 만들어준다. 줄곧 나아가다 보면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지쳐 쓰러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삶은 계속되야 하므로 이 나아감은 끝이 없어야만 한다. 아무리 반복되는 세계라 한들, 영화는 단순히 내부에만 그치지 않으므로 ‘바깥’은 항상 열려있다. 그래서 클립은 도리어 영화보다 더욱 삶에 가깝다. 영화가 끝이 있기 때문에 도리어 완벽한 세계라면, 클립은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인간의 삶은 끝나지 않으니까 항상 아쉽고 모자람이 있고, 클립이 삶에 가까운 건 한정된 정보와 아쉬움으로 어떠한 원본에 다가서려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클립이 삶의 불완전함을 닮아있다는 관점을 갖고서 다시금 <케데헌>을 비롯한 클립 영상들로 돌아가보자. 최근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등, 작품에 등장하는 화려한 장면들이 발굴돼 인스타그램 등의 플랫폼에 클립돼 돌아다니고 있다. 앞뒤 맥락 없이 곧바로 등장해 온 이 클립들은 원본의 가치나 내용을 보여주지도 않고 어떠한 단면만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서사가 해체된 후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 ‘장면’들은 도리어 우리가 그에 참여할 수 없기에 더욱 그리운 풍경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이른바 ‘존재하지 않던 것’에 대한 기억 말이다. <케데헌>의 팬들은 ‘사자보이즈’가 실존한 적 없는 아이돌 그룹임에도 제사상을 차리는 등, 이들을 기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서 존재한 적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무대 영상을 ‘클립’함으로써 한 세계의 흐름에서 분리해냈다. 이를 통해 ‘사자보이즈’는 이 세계의 한 면이 될 수 있었고, 원본이 될 수 없더라도 진실이 될 수는 있었다. ‘클립’ 전후 맥락을 분리해 진실을 왜곡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분명 ‘사자보이즈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룹이니까. 하지만 그들에게 이 클립은 무엇보다 삶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클립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클립은 있는 그대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이를 맥락에서 분리하는 작업이다. 이때 원본이 없는 것들이 도리어 원본을 초과하게 되는 데, 이는 클립 자체가 하나의 원본이 되는 일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도리어 ‘클립’이란 우리를 점점 더 어떤 생각의 굴레에 가두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말을 되내이기만 하며 점점 자괴에 빠져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생각했던 것과 달라..." 이 한마디에 담긴 환멸과 실망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과도 같다.
“환멸이나 실망은 가능하다면 피해서 살아가고 싶지만, 아무리 사전에 철저히 계획해도, 절망은 예기치 않은 사고처럼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인생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다고 강한 척해봐도, 그것은 식사 한 끼도 즐길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게다가 이 세상에서 ‘최악의 사태’가 계속해서 경신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러면 차라리 득도라도 해야 하는 걸까?”(미야케 쇼)
웹툰을 보며 좋아하고 웃긴 장면을 스크린샷으로 남겨두는 것이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아이돌 영상의 한 장면을 ‘클립’해두는 건 자기만 아는 진실을 만드는 일과 같다. 그게 어떤 맥락에서 잘라내어진 것인지는 전적으로 잘라낸 본인만이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 클립이 공감대를 얻는 건 그게 무언가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발견한 순간을 한 곳에 가두어둔다는 점인 탓이 크다. 이 안에서 순간을 기리는 일은 삶 전체를 왜곡하지 않으며, 도리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게 하므로 깊은 환멸과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클립’은 영화로 치면 하나의 순간에 해당하지만 반대로 원본과 맥락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어떤 맥락에서 빠져나온 것임을 스스로 알리는 이들 클립들은 항상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어서, 항상 ‘바깥’을 등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래서 이는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몇몇 순간들이 거대한 삶 전체에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며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보려 하지만 결국 진실이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진리를 알기 위해 삶의 한순간을 살아보려 했지만 끝내 가두어진 것은 자신의 삶 전체였음을 깨닫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깥에 나설 수 없었고, 그것이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다.
그렇다면 이 '최악의 사태', 즉 미혹의 굴레를 끊어내고 클립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는 서사는 가능할까? <건담: 지쿠악스>는 불완전한 서사와 즉흥적인 클립으로 구성됐다. 이야기는 필요한 점만 간단하고 빠르게 짚고 넘어간다. 부분부분 떼어놓고 보면 재미있는 곳이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언가 엉성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재밌게도 이 점이 <지쿠악스>를 더 흥미롭게 한다. <지쿠악스>는 미혹에 빠진 각 인물들이 자신에 있는 미혹을 내려놓는 과정을 그린다. 큰 틀에서는 샤아를 잃은 라라아 슨이 샤아가 살아남는 세계로 이동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평행우주 장르로 그려진다. 작품의 시작과 끝에 자리한 <퍼스트 건담> 레퍼런스는 샤아가 건담을 탈취하는 첫 장면과 샤아가 라라아 슨을 대신해 아무로에 빔 샤벨을 맞는 마지막 장면으로 그려진다. 라라아 슨은 어느 세계에서도 샤아는 연방의 하얀 건담에 격추됐다고 말하며 단편적인 사건들을 뒤바꾸고, 새로운 세계로 이동한다. 슈우지는 그런 라라아 슨을 따라다니며 라라아 슨이 미련을 갖는 이 세계를 파괴해야만 비로소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슈우지는 건담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건담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으로 건담을 불러와 마츄 일행을 상대한다. 슈우지와 라라아 슨. 마츄의 마음이 서로에 전해지며 이야기가 종국을 향한다.
<지쿠악스>는 <퍼스트 건담>에 대한 오마주로 시작한 만큼 이야기에 손을 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작품 안에 다양한 오마주와 변형 판본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야기의 공통에 선 것은 바로 미혹이다. 뉴타입 간의 감응이 주가 되는 전개에서 인물들은 각자 서로에게 깊이 빠진다. 아무로와 샤아, 라라아 슨의 삼각관계는 물론이고 샤아와 샤리아 불의 관계도 흥미롭다. 뉴타입은 인간의 감정에 감응하는 만큼 서로에 더 깊이 빠진다는 말은 이들의 행동이 너무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일을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그런 미혹을 이겨내고 서로가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은 안노 히데아키가 <신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말했던 ‘어른’의 의미를 떠올리게도 한다. <신 에바>의 마지막 장면은 열차에 올라 자신의 지난 날을 회상하는 신지의 모습에서 출발해 아버지인 게도와의 주먹다짐,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유년기의 충격경험으로 맺음된다. 이 장면에서 신지의 성장은 삶 전체로서, 확장된 바깥으로써의 ‘원본’이 아니라 겐도에 의해 바라보아진 순간들로부터 비롯된다. 클립된 이 순간들은 신지가 눈 앞의 관계와 감정들에 미혹되기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과거, 그 원본들과 이별하는 계기가 돼준다. 이른바 ‘클립’은 자신을 가두는 게 아니라 도리어 삶 전체를 확정해서 이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클립이 미혹의 순간을 극복의 계기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지쿠악스>의 상징적인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거대화한 건담이 라라아 슨에 손을 뻗는 가운데 마츄의 지쿠악스는 거대한 형태의 필드를 펼친다. 지쿠악스의 오랜 입이 벌어지고 나면 거대화한 빔 샤벨이 건담의 목을 끊어낸다. 어쩌면 이 만화는 바로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건담의 목을 자르는 일은 이야기의 시작점에서 샤아가 자신의 여동생을 향해 쏘기를 주저하던 일과 연결돼 모든 미혹을 끊어내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치 이곳이 최악이 아니라 더 많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른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클립은 원본에서도 수없이 많은 순간들을 파생하며 도달한 ‘세계’이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결과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과 의도가 살아있다. 클립은 사람들이 서로 같은 것을 보면서도 동시에 다른 존재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쿠악스>의 마츄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른 개체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은 이미 <건담>의 우주세기 원본에 대한 파생 판본으로 존재하기도 하는 이 작품이 ‘클립’의 여정을 경험하는 바, 이는 원본에서 맥락을 잘라내는 일이 보기 싫은 나머지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 대한 ‘극복’임을 보여준다.
이 '극복'의 서사는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선택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지쿠악스>의 세계는 라라아 슨이 여러 번의 도피를 거쳐 도달한 세계다. 세계의 파괴가 몇 차례 유예된 이곳에 슈우지가 나타난 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함이다. 슈우지는 눈을 뜬 라라아 슨이 폭주를 일으키면 본래 세계까지 무너져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슈우지는 라라아 슨이 깨어나기 전에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슈우지는 원본 세계가 계속해서 클립되는 일에 반대했고 이런 식으로 클립이 반복되다가는 원본을 아카이빙하는 것도 힘들어지겠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슈우지를 저지한 건 라라아 슨에 빠진 마츄의 미혹이다. 마츄는 자신이 동경하던 지구가 다채로운 원본이 아님을 깨닫고는 순간에 대한 미혹을 버렸다. 마츄는 라라아 슨을 죽여 이 세계를 폐쇄된 우주로 분리해내기보다, 순간을 외부에 열어 그 가능성을 긍정하려 했다. 삶에서도 무엇이 정말로 원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라라아 슨이 줄곧 샤아가 죽지 않는 세계선을 찾아다녔듯이 이 클립들은 끝없는 분화를 거친다. 이들은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고 느껴서 반대로 어떤 형태로의 ‘끝’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본디 자신의 잃어버린 세기가 아니라 ‘열림’으로의 여정이다. 영화는 항상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지쿠악스>는 분명 원본 우주세기에 대한 흥미로운 가정으로만 존속한다. 원본이 없으면 아무런 역할조차 해내지 못한다. 원본의 무게감이 있기에 반대로 모든 가정들이 파생된다. 그래서 이야기의 초장에 마츄는 우주 콜로니를 한없이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밤하늘은 가짜이며 중심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마츄는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 ‘편집된’ 가짜라고 생각했다. 지구를 묘사한 여러 환경이나 데이터를 학습하더라도 원본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구에 가도 결국 자신이 바라던 것은 없었다. 마츄가 바라던 세상은 특정한 형태로 멈춰있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살아가며 깨닫는 바로 그 고리 안에 있었다. 그러니 마츄는 세상 어디서라도 줄곧 살아가기를 택한다. 장소나 위치, 지위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찾아 바라 마지않던 영화 속 세상은 이제 끝을 맞이한다. 라라아 슨도 마찬가지다. 슈우지는 라라아 슨을 경계해 그녀를 제거하려 했지만, 라라아 슨은 자신이 바라던 형태의 현실은 끝나지 않는 여정 안에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지쿠악스> 세계선의 샤아를 위해 자신의 우주로 돌아가기를 택한다. 아무리 클립된 영상이라도 원본에 돌아가려 함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쿠악스>는 원점/판본에 대한 미혹을 버린 ‘영화’인 것이다.
‘클립’의 여정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마음에서 출발해 ‘생각되던 미래를 다르게 해보려는’ 일과 같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는 건 단지 슬프거나 당황스러운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살아가면서는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무진장 많겠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예측불가한 혼돈’에서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기쁜 일이 될 수도 있다. 클립의 여정은 그런 것이다.
* 본 글에서 언급된 임수연 저널리스트의 원문은 dockingmagazine.com/menu/contentsList/19/329?mtv=6542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미아케 쇼의 원문은 小津安二郎生誕120年 連載コラム「わたしのOZU」第12回「思っていたのと違う小津作品」―『一人息子』 映画監督 三宅 唱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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