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재밌을 수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What’s the Point If We Can’t Have Fun?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번역: 박기형
2014년 1월, no. 24
출처: https://thebaffler.com/salvos/whats-the-point-if-we-cant-have-fun
내 친구 준 선더스톰(June Thunderstorm)과 나는 어느 날 산속 호숫가의 풀밭에 앉아서 자벌레(inchworm) 한 마리를 꼬박 삼십 분 동안 지켜본 적이 있다. 그 벌레는 풀잎 꼭대기에 매달려 온갖 방향으로 몸을 비틀어대다가, 훌쩍 다음 풀잎으로 몸을 날려서는 다시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자벌레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계속 움직였고, 언뜻 봐도 아무 이유도 없어 보이는 그 행동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모든 동물은 놀아(play)." 언젠가 준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개미도 그래." 그녀는 수년간 전문 정원사로 일했고, 이런 장면들을 관찰하고 곱씹어 볼 기회가 많았다. "저걸 봐." 그녀가 어딘가 소박한 승리감이 배어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대부분은 증거부터 대보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 벌레가 정말로 놀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허공에 그려낸 그 보이지 않는 원들은 사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먹이를 찾기 위한 탐색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짝짓기 의례였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고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설령 그 벌레가 놀고 있었다 해도, 이런 형태의 놀이가 운동이라든가, 혹은 앞으로 닥칠지 모를 ‘자벌레 비상사태’를 대비한 자기 훈련과 같은, 궁극적으로 실용적인 목적에 전혀 복무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동물행동학 전문가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대체로 동물 행동 분석이 ‘과학적’이라고 인정받으려면, 그 동물이 —적어도 암묵적으로라도— 경제적 거래에 적용할 법한 것과 동일한 수단/목적 계산에 따라 작동하고(operating)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런 가정 아래에서는 에너지를 쓰는 일에는 반드시 어떤 목표가 전제된다. 그게 먹이를 얻는 것이든,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든, 지배력을 쟁취하는 것이든, 번식 성공을 극대화하는 것이든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증명할 수만 있다면 예외가 허용되겠지만, 짐작하다시피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그런 절대적 증거를 얻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과학자들이 어떤 종류의 동물 동기 이론(animal motivation theory)을 따르고 있는지, 다시 말해 동물이 무엇을 생각한다고 믿는지, 아니면 동물이 무언가를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여부 같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동물행동학자들이 실제로 동물이 단순한 합리적 계산 기계(rational calculating machines)라고 믿는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동물행동학자들이 스스로를 한 세계 안에 가두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 세계에서 ‘과학적’이라 함은 행동을 합리성의 용어들로 설명하는 걸 뜻하고, 이는 다시 동물을 마치 어떤 종류의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최대화하려는 계산적인 경제적 행위자인 것처럼 묘사하는 일을 뜻한다. 그들이 동물의 심리나 동기에 대해 어떤 학문적 이론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동물 놀이(animal play)의 실존(existence)은 일종의 지적 스캔들로 여겨진다. 이 문제는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고, 그나마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약간 별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막연히 위협적이거나 사변적인 개념들이 으레 그렇듯, 동물 놀이가 실제로 존재함을 입증하기 위해 충족하기 까다로운 기준들이 도입된다. 설령 그 존재가 인정되는 경우에도, 대체로 그 연구는 놀이가 반드시 어떤 장기적인 생존이나 번식 기능을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애쓰다가, 결국 자기 자신의 통찰을 갉아먹고 만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놀이가 동물 세계 전반에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는 원숭이, 돌고래, 강아지처럼 장난기 많기로(frivolous) 소문난 생물들 사이에서 만이 아니라, 개구리, 피라미, 도롱뇽, 농게처럼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종들에서도 발견된다. 심지어 개미들에게서도 각 개체가 실없는(frivolous) 활동들에 몰두할 뿐만 아니라, 언뜻 보기에도 그저 재미(fun)를 위해서 하는 게 확실한 모의 전쟁(mock-wars)을 벌이는 모습이 19세기 이래로 관찰돼 왔다.
왜 동물들은 놀이를 하는가? 글쎄, 왜 그러면 안 되는가?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왜 우리에게는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순전한 즐거움(sheer pleasure of acting)을 위해 이뤄지는 행위의 존재가, 그리고 순전히 능력을 발휘하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해 능력을 쓴다는 게 그토록 미스터리하게 다가오는가? 우리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미스터리로 여긴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부적응자들의 생존 Survival of the Misfits
생물학적 세계를 경제 용어로 바라보는 대중적인 사고의 경향은 다윈주의 과학이 막 태동하던 19세기부터 이미 존재했다. 무엇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강도 귀족이자 약탈적 자본가들의들의 총아였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에게서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빌려왔다. 반대로 스펜서 쪽에서는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에서 자연선택을 추동하는 힘들이 자신의 자유방임경제 이론과 놀랄 만큼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원을 둘러싼 경쟁, 이익을 따지는 합리적 계산, 약자의 점진적인 멸종은 우주를 지배하는 제1의 지침(prime directives)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연을 생존을 위한 잔혹한 투쟁의 무대로 보는 이 새로운 관점이 함축하는 바는 중대했고, 이에 대한 반론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제기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진화적 변화를 이끄는 동인으로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강조하는 대안적 다윈주의 학파가 등장했다. 1902년, 이 접근법은 자연주의자이자 혁명적 아나키스트 선전가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의 대중서 『상호부조: 진화의 한 요인(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1]을 통해 뚜렷한 목소리를 얻었다. 사회진화론자들(Social Darwinists)에 대한 명시적인 반격으로서, 크로포트킨은 사회진화론의 이론적 토대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장기적 볼 때, 가장 효과적으로 협력하는 종들이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왕자로 태어났으나(그는 젊은 시절 작위를 포기했다) 혁명 선동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탈옥해 런던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시베리아에서 자연주의자이자 탐험가로 수년을 보냈던 크로포트킨은, 유명한 사회진화론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에 대한 응답으로 쓴 일련의 에세이들을 발전시켜 『상호부조』를 집필했다. 이 책은 경쟁이 자연 진화와 사회 진화 모두를 추동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협력의 역할이라는, 당대 러시아에서 공유되던 인식을 개괄한다.
러시아의 이 도전은 20세기 생물학 —특히 새롭게 등장한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라는 하위 분과— 에서 그 이름이 직접 거론되는 일은 드물었을지라도 상당히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대신 그것은 더 넓은 “이타주의의 문제”라는 주제 아래로 포섭되었는데, 이 역시 경제학에서 가져온 표현으로 사회과학에서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 사이의 논쟁으로도 번져 나갔다. 이는 이미 다윈을 곤혹스럽게 했던 질문이었다. 왜 동물은 다른 개체를 위해 자신의 개별 이점(individual advantage)을 희생하는가? 그들이 때때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은 포식자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리고자, 자기 생명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방식으로 일부러 주의를 끄는가? 왜 일벌들은 벌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는가? 만약 어떤 행동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그 행동에 따르는 합리적이고 극대화하려는 동기를 제시하는 걸 뜻한다면, 도대체 저 카미카제(kamikaze) 벌은 무엇을 극대화하려 했던 것인가?
우리는 유전자의 발견 덕분에 가능해진 그 최종적인 답을 모두 알고 있다. 동물들은 단지 자신들의 유전자 코드의 전파를 최대한 널리 퍼뜨리려 할 뿐이라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결국 신다윈주의(neo-Darwinian)라고 불리게 된 이 관점은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든 급진주의자라고 여겼던 인물들이 주로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주의 생물학자인 잭 홀데인(Jack Haldane)은 이미 1930년대에, 여느 생물학적 개체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두 명의 형제나 여덟 명의 사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농담하며, 도덕주의자들을 약 올렸다. 이 사고방식의 정점은 전투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책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이 저작은 모든 생물학적 개체를 “성공한 시카고 갱스터”처럼 행동하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이유로 자신을 전파하려는 끝없는 욕망 속에서 무자비하게 영역을 확장하는— 유전자 코드에 의해 프로그램된 “육중한 로봇”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서술 뒤에는 으레 "물론, 이것은 은유일 뿐이며 유전자가 실제로 무엇을 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단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사실 신다윈주의자들을 그러한 결론으로 내몬 것은 그들이 처음 세워둔 가정이었다. 과학은 합리적 설명을 요구하며, 이는 곧 모든 행동에 합리적 동기를 귀속시켜야 한다는 뜻이고, 진정으로 합리적인 동기란 인간에게서 관찰될 경우 통상 이기심이나 탐욕으로 묘사될 만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 말이다. 그 결과 신다윈주의자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변종들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허버트 스펜서 같은 구식 사회진화론자들이 자연을 시장 —비록 유별나게 치열한 시장이긴 하지만— 으로 보았다면, 새로운 버전은 아예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적이었다. 신다윈주의자들은 단순한 생존 투쟁이 아니라, 무한 성장을 향한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이기까지 한 명령(imperative)에 의해 추동되는 합리적 계산의 우주를 상정했다.
어쨌든 러시아의 도전은 대체로 이렇게 이해되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의 실제 논지는 훨씬 더 흥미롭다. 그의 논의 상당 부분은, 동물의 협력이 종종 생존이나 번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즐거움(pleasure)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단지 즐거움을 위해 떼를 지어 비행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조류 사이에서 꽤 흔한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사회적 놀이(social play)의 사례들을 줄줄이 나열한다. 자기들끼리 오락을 즐기듯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 쌍들, 다른 종과 권투를 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가끔 (그리고 어리석게도) 여우에게 접근하는 산토끼들, 군사 훈련 같은 기동을 수행하는 새 떼들, 레슬링이나 유사한 게임을 하려고 함께 모이는 다람쥐 무리들.
“우리는 오늘날 개미에서 시작하여 새들을 거쳐 가장 고등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이 놀이, 레슬링, 서로 쫓아다니기, 서로 잡으려 하기, 서로 놀리기 등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말하자면, 많은 놀이가 성숙한 삶을 위해 어린 개체들이 올바른 행동을 배우는 학교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리 목적(utilitarian purposes)을 떠나 춤이나 노래와 더불어 힘의 과잉(excess of forces)의 단순한 발현 —'삶의 기쁨(the joy of life)', 그리고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다른 개체들과 어떤 식으로든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 즉, 동물 세계 전체의 뚜렷한 특징인 사회성 그 자체(sociability proper)의 발현인 놀이들도 존재한다.”[2]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은 자기 존재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며, 사회적 생명체에게 그러한 즐거움은 함께 행할 때 비례적으로 증폭된다. 러시아적 관점에서 이 사실은 별도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다. 그것이 곧 삶이란 무엇인가(what life is)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생명체가 살아 있기를 욕망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Life is an end in itself).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실제로 달리고, 점프하고, 싸우고, 허공을 나는 등의 힘(powers)을 갖는다는 걸 가리킨다면, 목적 그 자체로서의 그와 같은 힘의 발휘 또한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같은 원리가 연장된 것에 불과하다.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는 이미 1795년에, 우리가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의 기원, 나아가 자유와 도덕성의 기원을 발견하는 곳은 다름 아닌 놀이 속이라고 주장했다. 실러는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하여(On the Aesthetic Education of Man)』[3]에서 "인간은 이 단어의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때에만 놀이를 하며, 오직 놀이를 할 때에만 온전한 인간이다"라고 썼다. 그렇다면, 그리고 만약 크로포트킨이 옳았다면, 자유의 희미한 빛, 혹은 도덕적 삶의 희미한 빛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크로포트킨의 주장의 이러한 측면이 신다윈주의자들에 의해 무시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타주의의 문제’와 달리, 목적 그 자체로서의 즐거움을 위한 협력은 이데올로기적 목적으로 되찾을(recuperated) 수 없었다. 사실, 20세기를 거치며 부상한 생존 투쟁의 새로운 버전은 구식인 빅토리아 시대 버전보다 놀이가 끼어들 여지가 훨씬 더 적었다. 허버트 스펜서 자신은 동물 놀이가 아무 목적도 없고 그저 잉여 에너지를 누리는 한때의 즐거움일 뿐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성공한 사업가나 세일즈맨이 집에 돌아가 크리비지(카드놀이)나 폴로 경기를 즐길 수 있다면, 생존 투쟁에서 성공한 동물들이 약간의 재미를 본다고 해서 무슨 문제겠는가? 그러나 축적을 향한 충동에 한계가 없다고 보는 새로운 진화론, 즉 만개한 자본주의 버전의 진화가 보기에, 삶은 더 이상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DNA 서열의 전파를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놀이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스캔들이 되어버렸다.

왜 하필 나야? Why Me?
문제는 과학자들이 동물들 사이에서 놀이 —따라서 자기의식, 자유, 도덕적 삶의 씨앗— 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길로 들어서기를 주저한다는 데만 있는 게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인간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귀속시킬 정당성을 찾아내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단 모든 생명체를 시장 행위자, 즉 자신의 유전자 코드를 전파하려고 애쓰는 합리적 계산 기계의 등가물로 환원하고 나면, 우리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뿐만 아니라 우리의 직계 조상이 되는 존재들 역시 자의식, 자유, 도덕적 삶과 조금이라도 닮은 그 어떤 것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고 나면, 애초에 어떻게 혹은 왜 의식(마음, 영혼)이라는 것이 진화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미국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은 이 문제를 꽤 명쾌하게 제기한다. 그의 말을 따라서, 랍스터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랍스터가 단지 로봇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랍스터는 자아에 대한 어떤 감각도 전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랍스터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라고 물어볼 수 없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랍스터들에게는 의식과 닮은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들은 그냥 기계다. 만일 데닛의 주장대로 정말 그러하다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세포에서부터 원숭이나 코끼리처럼 정교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진화적 복잡성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내내 동일한 가정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원숭이나 코끼리가 외관상 아무리 인간과 유사한 특질을 지녔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간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데닛의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은 —확실히 전체 시간 중 최소 95퍼센트는 자동조종 모드로 활강하듯 돌아다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me)” 위에 의식적 자아(conscious self), 즉 시스템에게 새 직업을 찾으라 거나, 담배를 끊으라 거나, 의식의 기원에 관한 학술 논문을 쓰라고 지시하고 개입하면서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어 관리감독적 주목(supervisory notice)을 수행하는 자아가 덧대어진 것처럼 보인다. 데닛의 정식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작은 로봇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조 개의 로봇 같은 (그리고 무의식적인) 세포들이 스스로를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으로 조직하여, 전통적으로 영혼, 에고, 자아에 할당되었던 활동들을 유지해 낸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단순한 로봇들은 무의식적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면(만약 토스터와 온도 조절기, 전화기가 무의식적이듯이), 왜 그러한 로봇들의 팀이 굳이 ‘나’를 구성하지 않고는 더 복잡하고 더 근사하게 보이는 프로젝트들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가정해야 한단 말인가? 만약 면역 체계가 그 나름의 마음(mind of its own)을 가지고 있고, 산딸기를 따는 '손-눈 협동 회로 (hand–eye coordination circuit) '가 그 나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왜 굳이 이 모든 것을 감독하는 초(超)-마음(super-mind)을 만드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가?”[4]
데넷 자신의 대답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는 우리가 거짓말을 할 수 있도록 의식을 발달시켰으며, 그 덕분에 진화적 이점(evolutionary advantage)를 점하게 되었다고 암시한다. (정말 그렇다면, 여우들에게도 의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묻게 되는 순간, 질문의 난이도는 한 차원 더 높아진다. 이 바로 이 물음이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라고 부르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로봇 같은 세포들과 시스템들이 도대체 어떻게 결합하길래, 질적 경험(qualitative experiences)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걸까? 축축함을 느끼고, 와인을 음미하고, 쿰비아(cumbia)는 흠모하지만 살사(salsa)에는 무관심한 그런 경험 말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경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할 만큼 충분히 정직하다.
전자(들)가 춤을 춘다고? Do the Electron(s) Dance?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갈 길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의 출발점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고려하는 것이다. 랍스터를 다시 생각해 보자. 랍스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매우 나쁘다. 그들은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없는 크리처(purely unthinking, unfeeling creatures)의 예로 랍스터를 빈번히 호출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먹기 전에 자기 손으로 직접 죽여본 유일한 동물이 랍스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몸부림치는 크리처를 물이 펄펄 끓는 냄비에 집어넣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러니 랍스터가 실제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자기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 패턴의 유일한 예외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인 것 같다. 거기서는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이 애완 랍스터에게 목줄을 매어 산책시키곤 했고,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한 번은 메스칼린을 과다 복용한 후 랍스터에게 성적으로 집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과학적 관찰에 따르면, 랍스터조차 어떤 형태의 놀이 —예를 들어, 어쩌면 단지 그렇게 하는 즐거움 때문에 물체들을 이리저리 조작하는 행위— 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생물을 “로봇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로봇”이라는 단어에서 그 의미를 도려내 버리는 셈이 된다. 기계는 빈둥거리며 놀지(fool around)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크리처가 로봇이 아니라면, 까다로워 보이던 그 많은 질문들은 곧장 녹아 없어진다.
만약 우리가 관점을 뒤집어서, 놀이를 특이한 변칙이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놀이를 랍스터뿐만 아니라 실로 모든 살아있는 크리처 안에, 더 나아가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들이 “자기 조직화 시스템(self-organizing systems)”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수준에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원리로 간주하기로 합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처음 들으면 완전 터무니없는 소리 같겠지만, 알고 보면 그 정도는 아니다.
죽은 물질(dead matter)에서 어떻게 생명(life)이 창발(emerge)할 수 있는가, 혹은 미생물에서 어떻게 의식 있는 존재로 진화할 수 있는가라는 수수께끼에 직면한 과학 철학자들은 두 유형의 설명 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첫 번째는 창발론(emergentism)이라 불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장하는 바는, 일정 수준이상의 복잡성에 도달하면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물리 법칙들이 “창발”할 수 있는 일종의 질적 도약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법칙들은 기존 법칙들을 전제로 하지만, 그것들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화학 법칙은 물리학에서 창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화학 법칙은 물리 법칙을 전제로 하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생물학 법칙은 화학에서 창발한다. 물고기가 어떻게 헤엄치는지 이해하려면 물고기의 화학적 구성 요소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나, 화학적 구성 요소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들로부터 창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범심론(panpsychism) 혹은 범경험주의(panexperientialism)라고 불리는 두 번째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은, 앞의 설명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창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최근 영국의 철학자 갈렌 스트로슨(Galen Strawson)이 지적했듯이, 감각 없는 물질(insensate matter)에서 감각 없는 물질의 실존을 논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가는 일이 단 두 번의 도약만으로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은 창발에 너무 많은 일을 맡기는 셈이다. 물질이 실존하는 모든 수준, 심지어 아원자 입자(subatomic particles)의 수준에서조차 무언가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미미하고 배아와 같은 상태라 할지라도, 우리가 생명(심지어 마음)이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 가운데 일부를 수행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무언가가 점점 더 복잡한 수준으로 조직되어, 마침내는 자의식을 지닌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는 극도로 미미한 것일 수 있다. 환경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rudimentary) 반응성, 예기(anticipation)와 비슷한 어떤 것, 기억과 비슷한 어떤 것 같은 것 말이다. 아무리 초보 수준이라 해도, 원자나 분자와 같은 자기 조직화 시스템이 애초에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으려면, 그런 것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이 논쟁에는 자유 의지(free will)라는 해묵은 문제를 포함해 온갖 종류의 쟁점들이 걸려 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종종 약에 취해 우주의 신비를 처음 깊이 생각할 때— 고민해 왔듯이, 만약 우리 뇌를 구성하는 입자들의 움직임이 이미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표준 대답은 대략 이렇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이후 우리는 원자 입자들의 움직임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양자 물리학은 전자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집합적으로 어느 위치들로 점프하는 경향이 있는지를 예측할 수는 있지만, 개별 전자가 특정 순간에 어느 방향으로 점프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뭔가 빠져 있다. 만약 이 모든 게 우리 뇌를 구성하는 입자들이 무작위로 점프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뉴런들을 무작위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개입하는 어떤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마음”)를 상상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건 순환 논법이다. 당신의 뇌를 마음처럼 행동하게 하려면, 이미 마음이 있어야 때문이다.
반대로 그 움직임들이 무작위가 아니라면, 적어도 물질적 설명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자연에는 자기 조직화 형태들 —전자기장부터 결정화(crystallization)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환경 안에서 스스로 평형을 유지하는 구조들— 이 끝없이 존재하며, 이로부터 범심론자들은 무궁무진한 작업 재료들을 제공받는다. 물론 범심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당신은 이 모든 실체들이 단지 자연 법칙(그 존재 자체는 설명될 필요가 없는 법칙)을 “복종”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완전히 무작위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고 고집할 수 있다 (...)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고집하는 건, 애초에 그게 세상을 보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만 보면, 당신이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완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물론 이 접근법이 항상 소수 의견이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이 방식은 완전히 밀려나 있었다. 조롱하기도 꽤 쉽다. ("잠깐, 테이블이 생각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제안하는 건가요?" 아니, 사실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요지는 테이블을 구성하는 원자와 같은 자기 조직화 요소들이, 우리가 훨씬 몇 배로 복잡한 수준에서 사고(thought)라고 여기는 성질들의 극도로 단순한 형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특히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와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이 새로운 인기를 얻으면서, 이 관점도 어느 정도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흥미롭게도, 주로 물리학자들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수학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도 퍼스와 화이트헤드 둘 다 수학자로 경력을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말하자면, 물리학자들은 생물학자들보다 더 장난기 많고 덜 편협한 크리처들이다. 부분적으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물리학 법칙에 시비를 거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을 상대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과학계의 시인들이다. 이미 13차원 물체나 끝없는 수의 대안 우주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우주의 95퍼센트가 우리가 그 성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암흑 물질과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원자 입자가 “자유 의지”나 심지어 경험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숙려하는 것도 그리 큰 비약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아원자 수준에서 자유가 실존하는지 여부는 현재 열띤 논쟁거리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점프할지를 전자가 “선택한다”고 말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는 건 분명하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증거(그것이 무엇을 할지 우리가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는 이미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결정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세계에 대한 일관된 유물론적 설명을 원한다면, —즉, 마음을 물질 세계 위에 덧씌워진 초자연적 존재물(entity)로 취급하지 않고, 이미 물질적 실재(reality)의 모든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들의 한층 더 복잡하게 조직된 것(a more complex organization)으로 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조금은 지향성(intentionality)처럼 보이는 무언가, 조금은 경험처럼 보이는 무언가, 조금은 자유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물리적 실재의 모든 수준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이치에 맞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 대부분은 즉 그런 결론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가? 왜 그런 결론이 얼토당토 않는 소리, 비과학적인 얘기처럼 들리는가? 더 적합하게 말해, 왜 우리는 DNA 가닥에는 (아무리 “은유적으로”라 해도) 행위성(agency)을 기꺼이 부여하면서, 전자나 눈송이, 혹은 응집력 있는 전자기장에 대해서 똑같이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여기는가? 아마도 그 이유는, 눈송이에게 자기 이익을 귀속시키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행동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란 오직 그 행동 뒤에 어떤 종류의 자기 손익을 따지는 계산이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해버렸다면, 그래서 그와 같은 정의를 따른다면, 그 모든 수준에서 합리적 설명이 발견될 수가 없다. 적어도 갱스터 같이 무자비한 자기확대(self-aggrandizement)라는 프로젝트를 추구하고 있다고 “흉내라도 낼 수 있는” DNA 분자와 달리, 전자는 그야말로 추구해야 할 물질적 이익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생존조차 추구하지 않는다. 전자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다른 전자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만약 전자가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면,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말했다고 전해지듯이, 전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한다”면— 그건 오직 목적 그 자체로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물리적 실재의 바로 그 토대들 위에서, 우리가 자유 그 자체를 위한 자유(freedom for its own sake)와 마주한다는 걸, 또한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놀이와 마주한다는 걸 뜻한다.
물고기와 함께 헤엄치다 Swim with the Fishes
하나의 원리를 상상해 보자. 그것을 자유 원리라 부르자. 혹은 이런 문제에서는 라틴어식 표현이 더 묵직하게 다가오니, 유희적 자유의 원리(principle of ludic freedom)라 불러도 좋겠다. 이 원리를, 어떤 존재물이 가진 가장 복잡한 힘(powers)이나 역량(capacities)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일이, 적어도 일정 상황 아래에서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 가정해 보자. 물론 이것이 자연에서 작동하는 유일한 원리는 아닐 것이다. 다른 원리들은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하지만 최소한 이 원리는 열역학 제2법칙에도 불구하고 왜 우주가 덜 복잡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처럼 보이 이유와 같이, 우리가 실제로 관찰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최근의 한 책 제목처럼— “왜 섹스가 재미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왜 재미가 재밌을까? (why fun is fun?)'이다. 이 원리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제기한 논의가 매우 복잡한 이슈들을 가차없을 정도로 단순화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더욱이 나는, 여기서 내가 제안하는 입장 —모든 물리적 실재의 기반에 놀이 원리(play principle)가 있다는 것— 이 반드시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생각 없는 로봇 같은 우주가 갑자기 어디선가 시인과 철학자들을 뱉어낸다는 현재 정설로 통용되는 기묘하게 모순적인 추측들에 비하면, 그러한 관점이 최소한 그에 못지 않게 그럴듯하다고고 주장해보고 싶을 뿐이다. 또한, 나는 놀이를 자연의 원리로 여긴다고 해서, 반드시 어떤 종류의 유약한 유토피아적 견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놀이 원리는 왜 섹스가 재미있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왜 잔혹 행위가 재미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증언할 수 있듯이, 대다수 동물 놀이는 그다지 착하지 않다.) 그러나 이 원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탈(脫)사유(unthink)할 수 있는[당연하게 여겨 온 생각들을 벗어나 다시 사유해볼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준다.
수년 전 예일대에서 가르칠 때, 나는 종종 도가(Taoist)의 유명한 일화를 담은 읽을거리를 과제로 내주곤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문장이 왜 말이 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학생에게는 무조건 “A”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성공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장자(莊子, Zhuangzi)와 혜자(惠子, Huizi)가 호수 위 다리를 함께 거닐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저기 숭어들이 뛰놀머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구려. 저것이야말로 물고기의 즐거움이라네.”
혜자가 말했다.
“그대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단 말이오?”
이에 장자가 답했다.
“그럼 그대도 내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네는 어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걸 아는가?”
그러자 혜자가 답했다.
“내가 그대가 아님은 분명하니, 본디 그대를 알 수 없다네. 하지만 자네도 본디 물고기가 아니니, 그대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건 틀림없네.”
장자가 말했다.
“자, 우리 이야기의 근본으로 돌아가보세. 그대가 조금 전에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지 아느냐고 내게 묻지 않았는가. 그대가 그렇게 물은 건,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걸 자네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헌데 내가 그 즐거움을 알게 된 건, 바로 이 호수 위 다리에서였다네.”[5]
이 일화는 보통 서로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 즉 논리학자와 신비주의자의 대결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정말 이 해석이 옳다면, 왜 이 일화를 기록한 장자는 자신이 논리학자인 친구에게 패배한 것처럼 묘사했을까?
이 이야기를 수년간 곱씹어본 끝에, 나는 바로 이것이 이야기의 핵심 전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장자와 혜자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둘은 이런 식으로 논쟁하며 몇 시간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했다. 분명 이것이야 말로 장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였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고기에 대해 논쟁하면서, 우리는 정확히 물고기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저 뭔가를 한다는 그 자체의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우리가 잘하는 무언가를 하며, 재미를 느끼는(having fun) 것이다. 일종의 놀이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자네가 논쟁에서 나를 이기려고 애써야 한다고 느꼈고, 실제로 나를 이길수 있어서 그토록 기뻐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네가 옹호하던 전제(우리는 타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가 틀림없이 잘못되었다는 걸 보여주네. 만일 철학자들조차 주로 그런 즐거움, 곧 단지 행위 그 자체를 위해 자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발휘하는 즐거움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다면, 이는 분명히 자연의 모든 수준에 존재하는 원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세.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물고기들에게서도 그 원리를 자발적으로(spontaneously) 알아볼 수 있었던 거라네.
장자가 옳았다. 준 선더스톰도 옳았다. 우리의 마음은 단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물고기들의 —혹은 개미나 자벌레들의— 행복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논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궁극적으로 [물고기들의 것과] 정확히 똑같기 때문이다.
자, 꽤 재밌지 않았는가?

[1] 옮긴이 주: 국내에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김영범 옮김, 2005, 르네상스)로 번역되었다.
[2] 옮긴이 주: 『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김영범 옮김, 2005, 르네상스)의 「동물의 상호부조 (2)」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개미에서 시작해서 새들을 거쳐 가장 고등한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들은 서로의 관심을 끌거나 집적거리면서 놀고 뒹굴고 서로 쫓아다니기를 좋아한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이런 놀이는 새끼들에게 어른이 되어서 적절한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는 학교 역할을 하지만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 이외에도 춤이나 노래와 함께 넘치는 활력 즉 단순히 ‘삶의 즐거움’을 표출하는 수단이거나, 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개체들과 의사소통 하려는 욕망의 소산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이러한 행위들은 모든 동물계의 두드러진 특징인 적절한 사회성의 표출인 셈이다.”(p.84) 덧붙여, 이 문단에 크로포트킨이 단 각주는 다음과 같다. 한국어본에 따르면, “허드슨의 『라플라타 강의 박물학자(Naturalist on the La Plata)』와 칼 그로스의 『동물의 놀이(Play of Animals』에 나오는 ‘자연 속에서의 음악과 춤’이라는 장에 씌어진 기술들은 이미 자연에 나타나는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본능에 상당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p.84)
[3] 옮긴이 주: 국내에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다. 『미학 편지: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실러의 미학 이론』(안인희 옮김, 2012, 휴먼아트),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 교육론』(윤선구, 이경희, 조경식, 하선규, 한진이 옮김, 2015, 대학문화아카데미). 여기서 인용된 문장의 또 다른 번역은 다음과 같다. "..."(『미학 편지』, p.00)
[4] 옮긴이 주: 대니엘 C. 데닛이 이탈리아의 과학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줄리오 조렐로(Giulio Giorello)와 가진 인터뷰 기사 "Sì, abbiamo un’anima. Ma è fatta di tanti piccoli robot"("Yes, we have a soul, but it’s made of lots of tiny robots")의 한 대목이다. 이 인터뷰는 1997년에 출간된 Corriere della Sera에 실렸다. https://archivio.corriere.it/Archivio/interface/view_preview.shtml#!/NDovZXMvaXQvcmNzZGF0aS9AMTI5Mjc%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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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자』(외편)의 제17절 秋水(추수) 중 魚之樂(어지락, 물고기의 즐거움)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장자여혜자유어호량지상).
莊子曰(장자왈): 儵魚出遊從容(조어출유종용), 是魚樂也(시어락야).
惠子曰(혜자왈): 子非魚(자비어), 安知魚之樂(안지어지락)?
莊子曰(장자왈): 子非我(자비아), 安知我不知魚之樂(안지아부지어지락)?
惠子曰(혜자왈): 我非子(아비자), 固不知子矣(고부지자의); 子固非魚也(자고비어야), 子之不知魚之樂全矣(자지부지어지락전의).
莊子曰(장자왈): 請循其本(청순기본). 子曰(자왈) 汝安知魚樂(여안지어락). 云者(운자), 既已知吾知之而問我(기이지오지지이문아), 我知之濠上也(아지지호상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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