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우주를 넘어서
필자: 수차미
“예술이 어렵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건 ~다’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문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작품에서 요소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무엇과 무엇이 대립하고, 무엇이 무엇과 유사한 관계가 있는지 하는 짜임새(구조)를 관찰한다. 작품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꽤 어려운 작업으로, 많은 작품을 통해 연습해야 한다. 아마 이게 어려워서 도중에 관찰을 포기하고 ‘이 요소는 사실 작가의 이런 메시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식의 수수께끼 풀이로 바뀌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바 마사야)
지바 마사야의 글 「예술 작품이란 '풀 수 없는 문제'다」를 읽었다. 이 글의 주요 논의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대개 ‘양가적인 것’을 다루기에 모호한 감정으로 남으며, 그래서 예술을 대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에 예술을 감상하는 이는 무언가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작품을 하나의 틀에 사로잡히게 한다. 소위 영화평에서 말하는 ‘해설’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을 이 말은 단절의 어려움을 시사한다. 어떤 문제들은 딱 잘라 말할 수 없어서 어느 곳을 자를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등을 맞대고 서로 한 몸이 된 샴 쌍둥이처럼, 어느 한쪽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쪽이 될까 노심초사하던 혹자는 결국 ‘가른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예술은 유기적인 생명체와도 같아서 어느 한쪽을 잘라내는 순간에는 핵심 기관이 있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망에 이른다. 이에 따르면 예술은 결국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작업이며 동시에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는 작업이다. 마치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들을 두고서 회복가능성을 조율하며 우선순위를 정하기에, ‘감상자’로서는 자신의 판단이 다른 의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아닐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것에 의미가 있겠지만 그걸 다 욱여넣으면 글이 이상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어떤 의미를 살릴 것인지를 조율해야만 한다.
예술은 그 점에서 생명정치와 긴밀히 연결된다. 예술은 정확한 의미와 죄목을 갖고서 이를 구분짓는 게 아니라 비교적 덜 중요한 것을 골 라내며 ‘차선’을 택하는 작업일 뿐이다. 오늘날 예술에서 해석의 문제는 이를 감별해서 특수인을 ‘선별’하는 ‘고양감’이 아니라,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죄악감에 더 익숙하다. ‘언더테일’ 게임의 등장인물 ‘샌즈’처럼, 이를 반복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불가능성만을 받아들게 된다. 말하자면 예술에서 해석의 문제는 ‘변하지 않는 것’이자 ‘자기를 구성하는 문제’, 결여를 가리킨다. 그런데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말은 반대로 이를 선별하는 자신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가리킨다. 선별하는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와 같은 선상에 서 있으며, 이 경우 예술은 문제를 밝히는 작업이자 점점 더 멀쩡한 것과 이별하는 작업이다. 의도적으로 이를 버리기보다는 늙고 지치거나 병들고 상처 입은 육체가 점점 탈락되는 과정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떤 의미로든 광기를 행하는 작업이다. 상처 입은 몸을 계속해서 안고 살아가야 함은 인간의 몸에 내재한 결여 등이 도리어 몸의 중심이 됨을 보여준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에서는 결국 ‘문제’라 생각되는 것이 예술의 핵심을 이루기에 정작 이를 (지적하더라도)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점이 있다.
그리고 박동수의 석사학위논문 “여전히 영화를 ‘트는 사람들”을 읽었다. 박동수의 이 글은 자신이 영화를 트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자주상영’을 하는 이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트는 일에 집중하는 이 작업은 설치미술 등과 마찬가지로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둔다. 이를 따라 ‘영화’가 어느 한 문제로 구성된 예술 작품이라면, 영화를 트는 일은 그런 문제 자체를 무언가 설명하려 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함부로 손을 대어 생사여부를 결정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셈인데, 어딘지 모르게 이는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다는 시각의 우위성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특정한 무엇을 골라내는 게 아니라 멀리서 풍경을 관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는 문제 일부로서 참여자가 되고야 말지만 영화를 ‘트는’ 사람이 되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영화를 트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영향받기보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다. 영화를 트는 사람은 영화의 ‘바깥’에 선다. 그들에게 ‘영화’를 튼다는 건 자신에게서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일이다. 영화를 보는 일은 곧 한 세계의 한 면을 ‘선택’해 그들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이 ‘풀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영화의 태도다.
그렇다면 영화를 트는 일은 도리어 무책임한 일이 되진 않을까.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면 도리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이에게 이를 넘기는 게 낫다. 가령 박동수의 논문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건 씨네21에 실린 마이크로시네마 특집을 두고서 ‘마이크로시네마’가 영화 문화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고 진술하는 대목이었다. 마이크로시네마는 대개 소수집단의 수요를 따라 자신들이 틀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무언가 속 시원한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들 상영은 파일을 정식으로 들여오기 어렵거나, 그 수요에 대응하기가 어려워 저작권을 풀 수 없는 문제로 남겨두고는 한다. 즉 자유상영은 문제를 공유하지만 그 문제를 공론화하는 일에는 공표의 관점에서 법률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니 ‘자신’의 문제를 꺼내두는 게 아니라면, 타인의 영화를 자신이 ‘말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말하는 일은 ‘문제’를 ‘바깥’에 꺼내둔다는 점에서 ‘금기(저작권)’를 어기는 것처럼 보인다.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영은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며, 자신(I)의 문제와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구분짓는 일이 선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금기를 행하는 이 자유상영들은 사실 자신이 말하기 힘든 것을 영화에 전가할 뿐인 것일 수 있다. ‘나’란 누구인지를 말이다.
한국에서 시네필리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5년은 소위 ‘95년 체제’라고 불리며 오늘날 현대 한국 영화 문화의 기원으로 지적된다. 이를 기점으로 자유상영의 양상이 변화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과거에 영화를 트는 행위가 광주 민주화 운동이 담긴 비디오 촬영본을 은밀하게 상영하는 형태 등이었다면, 군부정권 이후인 95년서부터는 어떠한 사건이나 사상, 사고에 얽매이지 않는 이들이 등장한다. 소위 힙스터, 시네필리아로 분류되는 영화광들이 등장함에 따라 ‘영화’는 ‘사회’가 아니라 ‘나’를 지칭하는 행위가 된다. 이 행위에서 ‘영화’는 ‘그것’을 하는 ‘나’를 가리키는 수사가 보조언이 되며 이 과정에서 ‘나’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풀 수 없는 문제’가 되는 셈이다. 95년 이전의 자유상영문화가 자신들이 점진적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를 의논하며 토론하는 자리였다면 95년 이후의 상영문화는 바로 그 문제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여기는 세상에서 영화는 ‘나’에 봉사한다. 이를 종합해서 말한다면, ‘영화를 트는 사람들’이란 ‘나’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이 세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어서 선과 악으로 구분짓기가 어렵다. 오늘날 마왕성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연 있는 이들이 각자의 삶을 내세우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건담: 지쿠악스>를 봤다. 이 작품은 소위 ‘레이와’ 시대로 구분되는데 뉘앙스로 보면 뉴제네레이션쯤이 아닐까 한다. 신세대가 보며 어울릴 만한 건담을 만들자는 기획 아래 설정된 많은 요인이 작품 안에 자리한다. 버츄얼 가수가 부른 노래, 전후 세대를 다루는 최초의 건담 등,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원본 우주세기에 대한 파생상품으로서 자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원작의 인물이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팬들이 상상하던 ‘만약’을 실현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구상하고 실현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다. 즉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만의 작은 이야기를 소소하게 꾸리며 개인의 행복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반면 여러 전개를 보여주며 원작에 과도하게 의존할 뿐, 그 안에서 ‘개인’은 인물 자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원본에 대한 ‘작은 이야기’로서만 성립하기에 진정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는 없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단순히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로만 정의를 내리는 게 아니라 큰 이야기의 상관항으로만 자리한다면 그건 진정으로 ‘자유’로운 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껏 논의한 바에 따르면, 이 점이야말로 동시대 시네필을 설명하는 좋은 단서가 될 수 있어 보인다.
영화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란 어떤 사람이다”라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지쿠악스>의 샤아는 원본과 달리 미혹에 빠지지 않은 상황이며 이게 원본과 본작을 서로 갈라지게 하는 분기점이 된다. 원작의 샤아는 아버지의 사상과 가족에 대한 미련 등,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배후세계에 많은 짐을 두고 있었다. 이 점은 내내 샤아의 약점으로 작용해 라라아 슨과 같은 인물상이나 그에 따른 파국을 낳는 등, 원작의 이야기가 큰 이야기로 흘러가는 데 많은 동기를 제공한다. 샤아에게 ‘건담’에 타는 일은 시네필이 ‘영화를 트는 일’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이루어졌으며, 아마 그는 진정한 ‘나’를 찾고 싶어했던 것 같다. ‘건담’은 어렵다.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그저 건담을 타는 것만이 명쾌한 답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F1>이나 <탑건>처럼, 그러한 자아찾기가 큰 이야기와 같은 ‘미혹’으로 인해 좌절되는 게 바로 원작 <건담>이 그리는 우주세기다. 전쟁 이후의 세상에서는 누구라도 그에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를 해결하려면 결국 건담에 탈 수밖에 없다. 지독한 회의론자였던 토미노 유시유키가 말하는 ‘건담’은 모든 인간이 한 세계에의 ‘미혹’에 영향받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 점에서 박동수의 논문은 뉴타입론과 맞닿는다.
일본에서는 건담 등으로 ‘외부 세계에 나와 행동하는 팬들’이 생겨났을 때 이를 하나의 이레귤러로 취급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것이 하나의 문화로서 인정받으며 동시에 ‘오타쿠’ 집단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졌다. ‘뉴타입’이라는 작중 용어도 동시에 유행을 타기 시작해, 무언가 신세대로서 이전과는 구분되는 양상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런 칭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동수는 이들을 “영화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소유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네필리아”로 지칭한다. 뉴타입의 정의를 생각하면 이전과 다른 목적으로 ‘영화를 트는’ 시네필들을 뉴타입으로 정의하기란 충분하다. <지쿠악스>가 말하는 뉴타입은 자신이 몸담은 세계와 배경, 그릇 등에 구애받지 않으며 모든 것에 맞서 싸우며 ‘자기’를 쟁취하는 존재다. 이들에게 ‘자유’는 어떠한 국적이나 전쟁 같은 이분법으로 상대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중심에 둔 채 ‘바깥’을 밀어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과거의 자유상영과 오늘날의 자유상영도 그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영화를 트는 사람들’은 영화가 남겨놓은 이 세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지만, 반대로 그들 세계를 ‘바깥’으로 밀어내려고 노력한다. 제도의 부재는 곧 자신을 제도화하는 일로 이어진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로서의 ‘뉴타입’인 셈이다.
* 본 글에서 언급된 박동수 연구원의 연구 원문은 https://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fef82acad6015ecfffe0bdc3ef48d419&keyword=%EC%97%AC%EC%A0%84%ED%9E%88%20%EC%98%81%ED%99%94%EB%A5%BC%20%ED%8A%B8%EB%8A%94%20%EC%82%AC%EB%9E%8C%EB%93%A4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인용된 지바 마사야의 원문은 https://note.com/masayachiba/n/nc9731e024459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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