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된 예술가:
지윤구의 《Calibration》
전승혁
'[2026 서교연 비평이론학교] 시즌 2. 탈식민주의로 TEXT 횡단하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한 비평문입니다.
관객은 미술공간에서 무엇을 보는가.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배열된 전시라면 관객은 이미 주어진 시각 체계 안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본다. 그러나 기획이 있는 전시가 대상만이 아니라 보는 조건 자체를 문제 삼을 때, 관객은 감상자에 머물지 않는다. 전시는 폐기된 역사에 서사를 부여하고, 관객과 다시 읽어내는 시간을 만든다. 이로써 무엇이 보이는지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보도록 조정되고 있는지를 경험하는 자가 된다. 시각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은 능동성 여부에 따라 단일한 시점이 아니라 여러 층위를 거닐 수 있는 참여자로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관객과 작품이 상호작용하여 물리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다층적인 공간으로 나아가려면 작가 역시 그만큼의 고민한 흔적을 내주어야 한다. 지윤구 작가의 첫 개인전 《Calibration》(플로우앤비트, 2026)은 타자를 얼마나 잘 재현하는 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권한으로 보고 보여주는가, 그리고 그 시각의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드러낸다. 작가는 생활세계에서 카메라를 들고 동료작가의 작품과 전시를 찍는 일을 하며,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지역민과 예술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병행하고 있다. 해당 전시의 〈앞장술 소각장〉, 〈심미 미용실〉 두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재현이지만 그 안에 기록, 허구가 혼재된 모순이 있다. 그는 활동과 실천에서 작업의 불씨를 찾았다. 그리고 작가 스스로 카메라가 되는 결심을 내리며 불꽃을 피워냈다.
이 글은 두 작품을 통해, 작가의 ‘카메라 되기’가 어떠한 수행이 될 수 있는지 논한다. 타자를 더 잘 재현하는 전략이 아닌 재현의 권한과 시각의 조건을 스스로 흔드는 카메라 되기는 작가에게 수행이다. 작가를 바라보며 작성한 본 글은 비평 글쓰기 행위로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해석 과정에 독자와 관객이 만나도록 다리를 놓는다. 도구로서만 사용된 요소들은 각자의 역할을 변형하고 흔들리기 시작할 때 조금씩 움직일 수 있다.
시선의 시선
동시대 예술가는 배제된 장소, 주변화된 주체, 지역의 역사에 쉽게 접근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비판적, 윤리적 의식을 자동으로 담보하지 않는다. 예술가가 타자를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대상으로 틀 짓거나 반대로 과잉동일시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할 위험에 놓이기도 한다. 지윤구는 타자의 현장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비판성과 윤리성을 확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시선이 어떤 노출과 차단 위에서 작동하는지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가 지체 없이 위치를 바꿔 그동안 자신을 멈추게 만들었던 것들을 향해 움직였던 발걸음의 배경이다.
작가는 작업세계를 구축하기 전부터 어떻게 하면 대상, 기능, 역할에만 제한된 소재들이 관객과 만날 수 있을지 자문해왔다. 카메라를 들고 세계를 바라볼 때에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피사체는 쉽게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현실 안에 있었다. 하지만 세계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부터 작가로서 새로운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카메라로 ‘둔갑’시키는 방법은 다른 중심성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카메라 되기로서 둔갑은 카메라를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 아니라, 보는 조건 자체를 몸과 전시 구조로 수행하는 일이다. 현실과 밀접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작가는 스스로 허구적인 둔갑체가 되어 단순한 재현에서 느끼는 불충분함을 노출한다.
카메라의 조정값을 찾는 ‘캘리브레이션’ 역시 이미지의 선명도를 맞추는 기술적 조정이 아니라, 누가 보고 누가 보이는지, 어디서 멈칫하고 무엇이 허구와 기록 사이를 흔드는지를 다시 조정하는 실천이다. 이 조정값은 초점, 노출, 거리, 프레임, 감도의 문제로 드러난다. 즉 무엇을 선명하게 무엇을 흐리게 둘 것인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과다노출 시킬 것인지, 대상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서며 어디서 멈출 것인지, 무엇을 포함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지, 타자의 목소리를 어디까지 감지할 수 있는지가 핵심 질문이 된다.
이렇듯 카메라 둔갑은 지각의 조건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이자 미적 도전이다. 작가의 놀이적 발상으로부터 시작됐으나, 거꾸로 예술의 형식을 가늠하게 하는 시도로 연결됐다. 초점은 불분명해지고, 기록과 허구는 뒤섞였다. 관객 응시와 작품은 이제서야 상호작용한다. 피사체의 위치는 소실되거나 붕괴되었다. 바라보기는 바로 이 무질서에서 열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열림이 주는 개방감에 앞서 불안정함을 먼저 가져다 쓴다. 촬영자이자 장치이면서 수행자인 위치를 파괴하고 다시 재구축한다. 관객은 전시를 보려고 왔지만 보이는 자가 되어 버렸다. 작품은 겉으로는 멈춰 있지만 퍼포먼스이면서 아카이브로서 작동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모순이다. 타자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만 대신 말할 수는 없고, 기록하려 하지만 연출을 피할 수 없으며, 보여주려 하지만 장치가 다시 시야를 가리는 상태가 전시를 움직이는 형식적 동력이다. 모순의 가치는 예술가가 자타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무너뜨리고, 재현 장치의 폭력과 한계를 작품 내부에 남겨두는 데 있다. 따라서 균열은 작가의 의지에만 있지 않고 관객의 익숙한 지각 습관과 작품의 물질적 장치가 충돌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미용실과 모순
〈심미 미용실〉은 이러한 논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2021년 서울 대림동에서 마주한 미용실을 재구성한 사운드 설치이자 몽타주다. 지하 1층에 있는 전시장은 계단을 밟아 내려가야 볼 수 있다. 실제 촬영장에서 사용하는 소프트박스 젬볼로 인해 은은한 조명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바닥과 천장을 각각 지지하고 있는 C-스탠드와 A-스탠드는 무심하게 젬볼을 들고 있다. 촬영 장비들이 기댄 벽 뒤로는 작가가 방문했던 날짜의 뉴스가 라디오처럼 흐르고 있다. 이는 관객이 미용실 커트 의자에 부담스럽지 않게 앉게 되는 일차적인 계기가 된다. 의자와 벽에 걸린 거울, 익숙한 아나운서와 방송기자 톤의 뉴스 보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관조에서 벗어나 앉는 행위로 단계를 옮긴다. 열처리기 안에서 울리고 있는 음성을 듣는 과정은 동선, 행위, 청취로 이어지는 관객의 자발적인 결심 아래 시작된다.


커트 의자와 거울은 현 시점의 관객을 2021년 어느 날의 일상적인 미용실의 장면 속으로 불러들인다. 미용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업황의 변화, 대림동에서 거주하며 살아가는 조선족의 인생, 자녀의 교육문제, 서울 내 이동의 어려움에 대해 읊는다. 하지만 그 편리한 듣기는 곧이어 어긋남으로 변이된다. 실제 미용실에서 녹음한 미용사와의 대화가 열처리기 속에서 흘러나오면 관객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음조, 호흡, 발화의 리듬에 붙들린다. 말의 음량은 확인이 되지만, 쉽게 번역되지 않는다. 의미가 받아들여지기 전에 미끄러져 버린다. 관객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체험보다 청취의 불균등성 자체를 경험한다.
이 작품은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전시장 안으로 호출한다는 점에서 민족지학적 작업처럼 읽힐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의 초점은 조선족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편집되지 않은 음성, 완전한 번역에 실패하는 발화,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청취의 어긋남을 그대로 두면서 예술가가 타자의 의미를 손쉽게 봉합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스튜어트 홀의 재현 논의를 따르면, 문제는 주변화된 주체 스스로의 재현 여부에만 있지 않다. 어떤 발화가 어떠한 담론적 구조 속에서 이해되고 소비되는지 〈심미 미용실〉을 통해 사고해볼 수 있다. 작가는 목소리와 서사의 완전한 현전 대신, 청취의 실패가 어떻게 경계를 드러내는지 제시했다.
이는 앞서 설명한 모순의 가치를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다. 기록이면서 동시에 몽타주이고, 실제 목소리를 틀면서도 완전한 번역은 포기하며, 존엄을 회복시키려 하지만 동시에 대신 말하기의 폭력을 경계한다. 작가의 태도는 주저함이 아니라 윤리적 멈춤에 가깝다. 어떻게 하면 타자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기 보다 타자를 곧장 이미지와 서사로 환원하지 않는 보류를 택한 것이다. 대림동, 조선족, 이주에 관한 인식은 한국의 도시적 맥락 속에서 평평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녹음된 목소리는 여전히 번역 불가능성과 경계 인식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이 작품의 결과로 나타날 뿐이다.
일반 카메라를 들어 피사체를 볼 때 소수자, 이주민, 외국인, 국민, 민족으로 분류되는 체제는 자동적으로 진행된다. 과연 이 자동 처리 기계를 중지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작가로 하여금 카메라 되기를 촉진했다. 직접 알아보기 위해 다리를 움직여 이동하여 가까이 위치하고 싶은 예술가는 경계가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을 방문한다. 그는 그곳에서 알 수 있는 것과 모르겠다고 느낀 지점을 동시에 발견한다. 작가로서 더 이상 카메라를 들고 소수자 이미지를 추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디아스포라 위치나 번역된 주체를 전면화 하는 순간 자신의 손 밖을 벗어나기에 알 수 없는 경계를 마주하게 됐다. 관객의 시선들이 함께 뒤섞이면서 교란될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됐다. 그 다음으로는 카메라의 렌즈, 센서, 저장 장치, 이미지가 어디서 왔는지 묻게 된다.
카메라의 앞과 뒤
〈앞장술 소각장〉은 작가가 2025년과 2026년에 걸쳐 방문한 주문도 지역의 한 쓰레기 소각장에서 수집한 감정을 공시적으로 펼쳐 놓은 이중 무대다. 먼저 관객이 전시장에 진입하는 순간 천장에 매달린 편광필름 소재의 커튼 뒤로 3채널 비디오를 관람하게 된다. 타오르는 불 자체가 주는 원초적인 몰입감이 시각 작용을 예열할 때 즈음 타고 있는 쓰레기가 터지면서 내는 폭발음 등이 겹쳐져 이입을 강화한다. 관객이 보다 가까이 다가가 강렬한 감정과 동일시하려는 순간, 편광필름 커튼 뒤로 잘만 재생되고 있던 영상은 백색화면으로 전환되어 나타난다. 영상, 커튼은 제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관객이 커튼의 앞과 뒤로 움직일 때마다 눈을 통해 확인해야 하는 화면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작가는 관객을 시야를 찾아 헤매는 참여자로 만들기도 하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관람자의 권한 또한 부여한다. 시야의 사라짐과 되찾음을 반복하여 수행하는 이를 멀리서 바라봄과 동시에 눈을 떼기 힘든 영상과 관계를 지어 사고할 시간도 벌어준다. 바라보고 있는 위치에 따라서, 커튼을 열고 닫으며 지나가는 동선에 따라서 영상의 화면은 백색과 불타오름을 오고 간다.
이 작품에서는 카메라 되기의 장치적 차원이 훨씬 전면에 나타난다. 이 작업은 특정 장소를 조사하고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 보는 장치 자체를 뒤튼다. 관객이 보고 있는 것보다 어떻게 보게 되는가를 묻게 만든다. 이 작품의 주요 소재인 편광필름은 단순한 시각 효과가 아니다. 화면에 이미지를 부여하는 틀이자 동시에 시야를 가리는 장치다. 즉, 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를 물질화하여 나타낸다.
작가가 모니터의 편광필름을 손으로 뜯어 구성한 점은 이미지의 표면을 해체하고 장치의 권위를 폭로하는 행위로 읽힌다. 화면은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고, 필터와 각도, 물질적 조건을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사실이 이 수행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필름이 벗겨지며 화면이 백색으로 전환되면 관객은 보지 못함을 맞닥뜨린다. 백색화면은 재현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장치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계기다. 다시 시야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장치에 의해 보게 되고 있었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이 작업은 관객의 동선까지 포함해 인식의 조건을 조직한다. 커튼 뒤로 돌아가고, 인식의 틀을 통과하고, 다시 화면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의 시야가 일방적으로 통제된 구조에 기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경험하는 인식 전환은 대상을 파고드는 강화된 시선이 아니라 ‘나’의 앎이 매체, 필름, 동선, 장치에 의해 조정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로써 편광필름은 인식의 투명성에 의문을 가능케 하는 장치가 된다.
작가는 필름, 백색화면, 쓰레기의 연소, 이미지의 소멸의 연관성을 카메라 되기를 통해 더욱 절절하게 이입할 수 있었다. 그가 카메라가 된다면, 카메라가 영원히 기계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 카메라는 어디로 가는지 묻게 된다. 촬영자는 공장에서 새롭게 출시되고 또 폐기되는 카메라를 버리고 다시 구비하기를 반복하면서 카메라도 인간처럼 언젠가는 수명이 다하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죽는 인간처럼 카메라도 그 삶을 다하면 태어나기 전의 곳으로 돌아간다. 카메라조차 광물, 폐기물, 열과 에너지로부터 왔다는 점을 직시하는 순간이다.
예술가는 카메라가 되어서도 기계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찾아볼 수 없다. 인간 없는 세계, 쓰레기, 먼지, 잔여물로부터 왔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행성적 관점에서는 카메라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나 카메라 뒤에 있는 죽음의 문제는 가까이 있다. 카메라 뒤에서도 결정되고 있는 주변화 문제는 카메라 앞의 지역 및 도시서사와 별개가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메라 되기는 현장을 더 잘 포착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지의 배후와 소멸의 조건, 보는 자의 위치와 장치의 조정값을 교란하는 물질적 실험으로 확장된다.
《Calibration》에서 카메라 되기는 타자를 대신 보여주는 민족지학적 탐구가 아니다. 지윤구의 둔갑술은 그러한 접근이 언제나 실패, 오해, 과잉동일시의 위험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형식으로 드러내는 실천이다. 이 전시에서 모순의 가치는 재현의 미숙함에 있지 않다. 그것은 타자를 완전히 보여주고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중지시키고, 재현 장치의 한계를 작품 내부에 남겨 둔다. 관객은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보도록 조정되었는가를 경험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작품의 대상이 아니라, 시각의 조건을 되묻게 된다.
카메라 앞으로 모이는 사람들
세계가 없으면 이미지도 없고, 카메라가 되고자 하는 예술가도 없다. 카메라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역사적 경험이 모인다. 카메라는 세계 속에서 사람을 모으고 관계를 만든다. 지역과 그 지역 이야기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도 카메라가 된다면 재현을 성찰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작가는 현실과 작업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점에 먼저 도달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현실 재현이 어떻게 실패하는지 작업에 담았다. 작품은 실패 이후 끊임없는 질문과 되묻는 과정까지 연장된다.
카메라가 된 예술가는 지금 동시대의 삶의 방식, 균열과 불안을 담는다. 삶은 인간이 카메라 기계에 기대하는 것처럼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카메라로서 드러나는 환상을 보고 싶었던 인간은 우연한 계기를 동반한 기억, 깊은 층위의 예술을 통해 잊힌 것을 먼저 만나야 한다. 그 후 현재로 되돌아오는 사건을 겪은 후에 묻혀 있던 의미를 깨워서 들을 수 있다.
예술가, 작품, 전시의 경계를 뒤섞는 작업이 미술공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전시는 소통의 조건을 묻고 답하는 장이 된다. 시점이 구성되고 있는 순서와 단계를 돌아보고 위치를 파악해가며 지각 조건을 따지는 비평은 미술이라는 범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안정적인 삶, 주변부와 무관한 일상은 흔들거리는 미술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202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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