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화의 관점으로부터: 보그다노프와 아우구스티누스적 좌파 (2)
로드리고 누네스
번역: 김수환 | 한국외대

인류세의 보그다노프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에게는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를 동시대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우주와 행성을 모든 것이 연결된 자기 조직화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 탈조직화라는 엔트로피적 힘, 그리고 인간의 활동-저항이 환경과 맺는 끝임 없는 긴장에 대한 강조, 그 어떤 관계에서도 환경과의 최종적 평형은 불가능하다는 확신, 그리고 생존 가능성과 적응의 명령은 인류에게도 적용되는 바, 이는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인류를 잠재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다는 이해 등이 그러하다. 이 모든 것은 보그다노프를 인류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동시대인으로 만드는 듯하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생태적 위기로 인해 우리가 인간중심적 예외주의(anthropocentric exceptionalism) 바깥에서 사유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 시점에, 러시아 사상가의 일원론(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인간과 비인간,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생명과 비생명을 사유할 수 있는 단일한 원칙들의 집합을 찾게 하는 동력)과 그로부터 비롯된 조직화의 관점(활동-저항 개념이 함축하는 관점주의(perspectivism) 및 거대한 평준화(great levelling)와 더불어)은 보그다노프에게 있어 행위주체성(agency)을 인간의 범위 너머로 확장한다는 아이디어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도 지적했듯이, 보그다노프는 삶을 “반드시 항상 평형을 찾는 것은 아닐지라도, 자기 조절적인 시스템의 일부”로서, 그리고 인류의 집단적 노동을 “[행성적] 전체 수준에서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으로서 인식함으로써, 당대로서는 매우 선구적인 인식을 보여주었다.[i]
그렇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인류의 목표가 “자연에 대한 지배”[ii]라는 그의 주장, “인간 집단”이야말로 “자연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조직적 중심”이며, 그것이 “자신의 에너지와 경험이 닿는 범위까지” 자연을 “‘종속’시키고 ‘지배’한다”[iii]는 보그다노프의 비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우선 주목할 것은, “정복”, “종속”, “지배” 따위의 표현들이 권위주의적 형태의 [기존]사회 조직이 “이그레션(egression)”이라는 텍톨로지적 현상을 부적절하게 명명한 은유일 뿐이라는 보그다노프의 관찰이다. 보그다노프에 따르면, 이그레션이란 더 넓은 시스템 내의 하나의 복합체가 그 시스템의 다른 요소들에 대해 우세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iv] 이전 역사 시기들의 페티시 없이 바라본다면, “보편적 이그레션” (항상 그 범위가 실질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장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인)으로서의 인류라는 개념이 결코 비인간의 행위주체성도, 인간과 환경 사이의 단순 지배 이상의 또 다른 유형의 관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거대한 보편적 조직자로서의 자연” 안에서 자신들이 점유해 온 시공간의 몫만큼,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가장 큰 조직화의 힘을 지닌 복합체임이 드러났다는 단순한 사실을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v] 즉, 목적론적 운명이나 형이상학적 탁월함 대신, 우리가 여기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사실 적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비극적인 이면을 갖고 있음이 드러났다. 인류세라는 개념이 결정적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은, 이러한 조직화의 힘이 행성적이고 지질학적인 규모의 탈조직화[해체](disorganizing)의 힘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비록 보그다노프가 그 자체로 예견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인식이 그의 사상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편조직학”의 관점에서 인류세를 사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확인하려면, 보그다노프의 활동-저항 개념에 깃든 관점주의, 조직화는 언제나 에너지 지출을 수반한다는 원칙, 그리고 자연에 맞선 “투쟁”이라는 은유가 “탈조직화의 상관관계(disorganising correlation)”[vi]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분명히 여기서 보그다노프는 관련된 관점들 가운데 오직 하나에서만 그 관계를 고려하고 있다. 자연이 인류를 “탈조직화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연이 자기 목적에 따라 자연을 변형하려는 인류의 노력에 ‘저항’한다는 관점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한 부분에서의 조직화의 이득[획득]은 언제나 다른 부분에서의 조직화의 손실을 함의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전에는 한 복합체에 속해 있던 요소와 연결들이 다른 복합체에 의해 소비, 변형, 혹은 통합되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소비, 변형, 통합에 필요한 활동들의 과정 중에 지출된 에너지의 일부가 열의 형태로 영구히 상실되기 때문이다. 위너가 말한 “엔트로피 감소의 국소적이고 일시적인 섬들”은 다른 곳에 존재하는 조직화를 먹고 살며, 그 결과로 그러한 부분들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엔트로피 증가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vii]
요컨대, 조직화란 언제나 어떤 다른 장소로의 탈조직화와 엔트로피의 전이를 수반하는 국지적 현상이다(공동체나 노조 조직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이를 알 수 있다). 이 원리에 근거할 때, 텍톨로지는 “보편적 이그레션(universal egression)”의 조직화 활동이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국지적 차원과 전지구적 차원 모두에서 탈조직하는 힘으로 판명되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완벽한 위치에 서 있다. 즉, 이 활동이 힘과 범위를 확대함에 따라, 자연은 이제 자기 자신의 배열들의 수동적(국지적) 저항과 그 배열들을 탈조직화하는데 필요한 활동의 결과로 증가하게 되는 (일반적) 엔트로피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진전에 의해 촉발된 일련의 새로운 (전지구적) 배열들과 비선형적 반응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응답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다시 말해, 인류의 조직화 활동은 그것이 자연을 탈조직화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입증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동시에 자연을 재조직화(reorganizing)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결국 이런 재조직화의 결과로 발생하는 활동이 인류에게는 저항, 곧 탈조직화의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수출이 “일부 사람들이 진보의 존재를 확언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면, 생태적 위기는 닫힌 체계 안에서 엔트로피를 계속해서 수출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렇게 구축된 진보의 연속성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계의 평형을 무너뜨리게 되는 지점이 도래했음을 시사한다.[viii]
그런데 이런 설명이 인류세 및 인간 너머로의 행위성의 확장을 도덕적으로 읽으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조직화하는 것이며, 조직화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용을 수반한다. 이는 다른 모든 존재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바, “좋음”이나 “나쁨”, 이득이나 비용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라는 질문을 동시에 함축한다. 인간을 전지구적 스케일로 [작동하는] 탈조직화의 힘으로 만들어온 것은, 조화를 향한 자발적 성향을 갖춘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달리 도덕적 결함이 있는 인간 종만이 그로부터 면역되어 있다는, 어떤 종 특유의 도덕적 결함 탓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확장을 요구하는 부의 생산 및 분배 시스템, 그리고 효과를 산출하는 능력의 성장과 그 비용을 계산하는 능력 사이의 엄청난 불일치가 결합된 결과일 뿐이다. 비인간[행위자]을 인식하는 일이 이런 계산을 수행하기 위한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줄 수는 있어도 행위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사실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한 비용을 급격하게 줄이고, 감수할 비용의 우선 순위와 분배 기준, 그리고 이득의 배분 기준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는 일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필요하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에 대한 권력’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을 위한 권력’을 향한 환상이나, 비용을 수반하지 않는 조직화에 대한 환상 같은 것들은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생명이 최대한 번영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과의 동적 평형을 찾아 나가는 실질적 과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행동 방침은 당연히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공짜 점심은 없다(no such things as a free lunch)”는 식의 냉철한 현실주의의 어조는 대개 최악의 것들, 특히 우리를 생태적 붕괴 상황 직전까지 몰고 온 바로 그런 종류의 행태들을 정당화하는데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그다노프가 지적하듯이, “편의성의 규범(the norms of expediency)”은 이웃을 돕는 일과 이웃의 목을 치는 일을 똑같은 확신으로 가리킬 것이다.”[ix] 그러나 텍톨로지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비용이 실제로 든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고서도 그런 입장들에 맞서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반대로, 비용의 실재를 믿는다고 해서 주류 경제 및 정치 담론의 셈법, 가령 어떤 이득이 바람직한지, 어떤(그리고 누구의) 손실이 용인 가능한지, 어떤 반대급부(trade-off)가 더 가치 있는 것인지 따위를 계산하는 그들의 방식에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기준들이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달려 있다. 현실주의의 영역을 이런 담론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포기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상정하는 기준들을 감싸고 있는 자명함의 공기를 문제 삼을 수 있도록 만드는 전망 그 자체다.
사회 전체가 동지적 협력에 기초하게 되면, “목표와 그것에 봉사하는 다양한 규범들이 행복을 위해 사회적으로 조율된 투쟁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것”이라는 보그다노프의 주장은 아마도 다소간 너무 순진하거나 (혹은 기만적일 정도로) 낙관적인 것일 수도 있다.[x] 결국 “우주의 궁극적 목표”, 이를테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삶의 극대화가 사회 전체를 위한 삶의 극대화에 상응하게끔 상관관계 속에서 달성되는 것”이라는 목표가 명확히 설정된다고 해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그 수단을 판단하는 기준들이 자동으로 투명해질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러한 평가들은 자신의 관점적 조건을 초월할 수 없다.[xi] 따라서 (우리가 그 단어를 얼마나 넓거나 혹은 좁게 해석하든 간에) “모두”에게 똑같이 안 좋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반-목적성[xii]을 촉발시킨다는 의미에서) 틀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텍톨로지 프로젝트에 이미 내포된 상호 의존성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보그다노프의 이상은 여전히 가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삶과 자연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위한 투쟁”을 비인간 자연과 비인간 생명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xiii] 그렇게 되면 목표는 – 부분적이고 불확실한 용어들을 통해서만 구체적인 평가들로 세분화가 가능한 아주 넓은 의미에서 - 인간과 그 밖의 모든 생명의 최대치의 번영이 가능한 환경과의 동적 평형을 유지하는 일이 된다. 혹은 워크가 표현했듯이, 위대한 조직적 “탐구”란 여전히 “생명의 잉여를 배양할 수 있는 총체성(totality)을 발견하고 정초하는”[xiv] 일로 남게 된다.
그런데 누구의 탐구인가? 보그다노프가 마르크스주의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특정 휴머니즘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지점 중 하나는 그가 쉽고 편안하게 인류를 집단적 주체로 지칭하는데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주체는 거의 시작부터 조직자와 집행자 사이의 분열을 겪었으며, 근대 이후부터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보그다노프는 이 도식에서 일시적으로 떨어져나갈 수는 있어도 결국엔 모든 인간 집단이 그 안으로 스스로를 통합하고, 그 원초적인 분열을 제거한 후에 자기 세계의 조직자들로 이루어진 단일한 공동체로 결합될 것이라는, 역사의 단선성에 관해서는 단 한 순간도 의심을 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그다노프의 저술들 속에서 우리는 인류세가 온 힘을 다해 전면적으로 부각시키려 애쓰는 또 다른 쟁점인 다양한 인간 집단의 동시적 공존[이라는 문제]을 사유하기 위한 유용한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xv]
그에 따르면, “인식은 곧 적응”이며, 그것의 “진리는 실천을 지배하는데 적합한지[의 여부]로 귀결된다.” 또한 “집단은 언제나 실천의 주체”[xvi]이며, 따라서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다. 보그다노프의 이런 주장은, 어떤 집단이든 진리성을 부여하게 되는 대상은 노동에 저항하는 모든 것, 즉 “자연”[xvii]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행해진 실천 가운데 정착된 모든 지식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특정한 조직 조건 하에서의 집단적 활동과 환경을 구성하는 사물들의 활동 사이의 마찰로부터 발생하는 진리는, 언제나 객관적인 동시에 상대적이다. 객관적인 이유는 실천이 드러내는 규칙성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며, 상대적인 이유는 생산 관계들과의 조우에 특징적인 우연성에 의해, 가령 한 집단의 활동 영역 내에서 이용 가능한 자연적 다양성의 크고 작음에 의해 조건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남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회적·자연적 조건 모두가 가변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정적 평형 상태에 해당할 어떤 확정적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철학적[또는 과학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xviii] 보그다노프식 관점주의의 이러한 또 다른 차원은 객관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는 다원주의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복잡한 지식과 실천의 생태계를 화해시킬 것을 요청하고 또 필요로 하는, 환경 위기와 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매우 유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가 복수의 관점들을 통합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놓치지 않도록 도와준다. 진리가 계속해서 상대적인 것으로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통합하고 조직할 수 있는, 서로 다른 경험 영역에서 축적된 결과와 방법의 수를 확장함으로써, 진리의 일반성의 정도를 증가시키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xix] 상대적인 것은 자신의 상대성의 체계를 정교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덜 상대적인’ 것, 그러니까 더 많은 것들과 관계 맺는 것이 된다. 역사적 단선성에 대한 가정과, 인류의 모든 과업을 떠맡을 운명의 계급이 출현하리라는 확신은, 보그다노프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 세대의 모든 이의 경험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엄밀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일하는” 프로젝트가 하나의 단일과학으로 수렴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다.[xx]
식민지 팽창이 강요하고 촉진해 온 경제, 기술, 문화적 통합 과정이 치러야 했던 커다란 대가와 막대한 사각지대[맹점]를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통합적 자부심의 동기, 실행가능성, 바람직함에 대해 훨씬 더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보그다노프를 읽는 일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그러한 회의론이 체계화의 노력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 버리도록 만드는 이유가 아니라, 그런 노력의 결과들을 통제하기 위한 신중한 원칙이자 도구로서, 말하자면 약리학적으로(pharmacologically)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생태적 비상사태를 최전선에 둔 동시대의 “복합위기(polycrisis)”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폭과 복잡성을 지닌 조직적 과제들”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과제의 해결은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일 수 없다. 해답은 더 적은 조율(coordination)이 아니라 더 많은 조율이다. 이는 전지구적 모델링의 시도를 줄일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더 잘, 더 다양하게, 그리고 (상이한 관점들과 스케일에서) 더 자기성찰적으로 행할 것을 요구한다. 보그다노프에게 민주주의는 윤리나 인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식적이고 실천적인 명령이다. “종합적(synthetic)” 혹은 “동지적(comradely)” 협력이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복합적인 집단적 모델러(modeler)가 원칙상 더 복잡한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통찰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보그다노프에 비해서는 다소 절제된 낙관주의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좌파
10여 년 전에 영국의 미술사학자 T. J. 클라크는 “미래 없는 좌파”의 창설을 촉구하는 글로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모종의 “변혁적(transfiguring)”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오히려 계몽주의 시대에 우파의 전유물이자 강점이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주의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좌파였다.
마지막으로 말하건대, 전쟁, 빈곤, 멜서스적 공포, 폭정, 잔혹함, 계급, 죽은 시간, 그리고 육신이 물려받은 모든 병폐가 없는 미래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좌파가 [.....] 언젠가 니체가 지상에서 사라졌다고 여겼던 “사회를 위한 재료”를 모으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xxi]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보그다노프는 클라크가 열거한 ‘제거 불가능한 주어진 것들’의 목록과 관련해 비스듬한 대각선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한편으로 보그다노프는 계급, 빈곤, 폭정의 종식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것을 위험이나 노력, 환경이 부과하는 저항도 끝날 것이라는 기대, 가령 『붉은 별』이 보여주듯이 자원의 희소성, 과잉 인구의 위험, 그리고 결국엔 (행성 간의 것일지라도) 전쟁 자체에 맞서야만 하는 투쟁도 끝날 것이라는 기대와 혼동하지 않았다. 그 차이는 첫째, 그러한 병폐의 근원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달려 있다. 클라크에게 그것은 급진적인 악(radical evil)을 향한 선천적 성향을 타고난 인간 본성에 있다. 반면 러시아 저자인 보그다노프에게 그것은 활동-저항의 작용 속에, 모든 개별 사물의 물질적·에너지적 비용 속에, 그리고 탈조직화라는 내·외부적 작용 속에 자리한다. 이로부터 지향점의 차이가 도출된다. 클라크의 좌파는 카테콘(katechon,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저지하는 자)으로 기능해야 하며, 그의 급진성은 급진적인 악의 지속적 현존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것의 최악의 효과를 억제시키는 능력에 자리한다. 반면 보그다노프의 좌파는 자신의 야망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최종적인 평형점이라는 환상 없이 그것에 직면한다. 그 작업은 결코 끝나지 않는데, 이는 최악이 항상 가까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탈조직화가 언제나 그곳에 있고, 그 어떤 것도 비용 없이는 오지 않으며, 엔트로피와 퇴행의 위험이 최대한의 풍요와 자유를 향해 나아가려는 모든 투쟁을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두 종류의 좌파가 있는 셈이다. 하나는 마니교적이고, 다른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이다. 둘 중 어느 쪽이 클라크가 주장하는 “비극적”이라는 칭호에 더 어울리는가? 전자의 비극은 단지 인간적인 것으로, “종종 끔찍한 고통과 함께 멸망하고, 서로를 집어삼키고, 스스로를 파괴하며, 마치 다른 목적 없이 단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xxii]주체들에 관한 것이다. 후자의 비극은 우주적이다. 그것은 무질서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엔트로피는 증가하며, 타협 불가능한 한계가 존재하고, 행동과 무위 모두에 되돌릴 수 없는 비용과 효과가 따르는 우주 속에서, 동일한 메커니즘과 법칙에 종속된 복합체 혹은 시스템들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환멸에 찬 “성숙한”[xxiii] 어조를 특징 중 하나로 내세우지만, 여전히 많은 좌파 정치사상들이 공유하는 특정 유형의 주인공의 관점을 점유하고 있다. 거창한 몸짓의 영웅, 위기가 갈등으로 치닫는 순간 자신의 삶을 내던지는 활동가, 아니면 중대하고 어려운 결정을 저울질하는 정치가가 그런 유형의 주인공이다. 여기서 유일한 차이점은 그 몸짓이 프로메테우스적이라거나 변혁적인 것이 아니라 카테콘적이라는 것뿐이다. 보그다노프는 우리를 훨씬 더 드문 캐릭터인 조직자의 관점에 세운다. 그 몸짓은 규모나 빈도 면에서 훨씬 덜 특별한 영웅의 것이다. 그의 파토스는, 언제나 결정의 시간에 직면한 자의 것도 아니고, 최종적 평형을 여전히 몽상하는 자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하고 유지하는 데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는 점을, 사물은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한다는 점을, 충분한 시간과 충분하지 않은 노동이 주어진다면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릴 것임을 이해하는 자의 체념적 불굴성(resigned irresignation) 같은 것이다. 또한 그것은 “높은 곳을 향하는 투쟁은 그 자체로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그 과정에서 축하할 것 또한 많다는 것 역시 알고 있는 자[xxiv], 진정한 인간적 비극은 우발성, 반-목적성, 선택과 반대급부의 불가피성, 그리고 그것의 불가역성에 대한 인식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곧 고통 앞에서 무감각해져도 좋다는 변명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의 파토스다. 승리가 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싸우지 않는 것, 존재함을 돌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싸우는 자의 관점이다.
[i] McKenzie Wark, Molecular Red: Theory for the Anthropocene)(Verso, 2015), 54, 12. 워크의 작업은 최근 영어권에서 러시아 사상가의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ii] Aleksander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The General Science of Organization (Intersystems Publications, 1984), 1.
[iii]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184.
[iv]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184.
[v]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63.
[vi] Bogdanov, Essays in Tektology, 184.
[vii] 이것은 경제적 과정을 ‘낮은 엔트로피’에서 ‘높은 엔트로피’로의 전환으로 본 니콜라스 조르제스쿠-뢰겐의 통찰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수렴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그다노프와 마찬가지로 조르제스쿠-뢰겐 역시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흐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Nicholas Georgescu-Rogen, The Entropy Law and the Economic Proce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을 보라.
[viii] 여기서 ‘닫힌(Closed)’이란 용어의 기술적 의미는, 그것이 환경과 교환하는 것은 에너지이지 물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ix] Aleksander Bogdanov, “Goals and Norms of Life,” in Russian Cosmism, ed. Boris Groys (e-flux journal and MIT Press, 2018), 194.
[x] Bogdanov, “Goals and Norms of Life,” 185.
[xi] Bogdanov, “Goals and Norms of Life,” 185.
[xii] [옮긴이주] counter-finality는 행위자가 의도한 목적과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상 비판』에서 중국의 산림벌채를 예로 들어 썼던 표현이다.
[xiii] Bogdanov, “Goals and Norms of Life,” 185.
[xiv] Wark, Molecular Red, 11.
[xv] 보그다노프가 개인적으로 이러한 공시적(synchronic) 다양성에 관해 몇몇 유감스러운 언급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Aleksander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Popular Outlines (Haymarket, 2016), 24–25.
[xvi]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158, 249.
[xvii] “자연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경험이 끝없이 펼쳐지는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42. 물론 이것은 일종의 소급적 투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인간 집단이 이 총체성을 지칭하기 위해 어떤 개념을 사용했든지 간에, 그것은 보그다노프가 이해하는 ‘자연’과 동등하다는 것이다. 설령 어떤 집단이 그러한 총체성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경험은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수집될 수 있다.
[xviii]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13.
[xix]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마찬가지로 보그다노프에게도 이러한 방향으로의 충동은 사고 자체의 내적 요구이며, 그는 이를 조직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조직이든 정확히 그것이 통합적(integrated)이고 총체적인(holistic) 정도만큼 조직화된다. 이것은 생존 가능성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인식이 경험의 조직화를 나타낸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는 인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식은 언제나 통일성(unity)을 향해, 일원론(monism)을 향해 나아간다.”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236.
[xx] Bogdanov, Philosophy of Living Experience 10.
[xxi] T. J. Clark, “For a Left with No Future,” New Left Review, no. 74 (2012): 75. For a sharp rejoinder, see Alberto Toscano, “Politics in a Tragic Key,” Radical Philosophy, no. 180 (2013).
[xxii] A. C. Bradley, Shakespearean Tragedy: Essays on Hamlet, Othello, King Lear, Macbeth (MacMillan & Co., 1912), 23.
[xxiii] Clark, “For a Left with No Future,” 59.
[xxiv] Albert Camus, Le Mythe de Sysyphe (Gallimard, 1942), 168. 번역은 인용자.
'인-무브 Writing > In Moving Zo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직화의 관점으로부터: 보그다노프와 아우구스티누스적 좌파 (1) (0) | 2026.02.18 |
|---|---|
|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텍톨로지』 (0) | 2026.02.08 |
| 공포영화 <랑종>에 드러나는 신자유주의가 여성의 몸을 좀비로 만드는 방법 (1) | 2025.12.07 |
| 러시아의 신자유주의 도입 하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정체성 이행: 빅토르 펠레빈의 『P세대』를 중심으로 (0) | 2025.12.06 |
| “그러나 되돌릴 수 없어”: t.A.T.u의 레즈비언 모티프와 러시아식 신자유주의 (0) | 2025.11.09 |
| 김수환 - 두브로브니크 강좌(1990)와 수전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 연대에 이르지 못한 우정에 관하여 3 (0) | 2024.04.25 |
| 김수환 - 두브로브니크 강좌(1990)와 수전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 연대에 이르지 못한 우정에 관하여 2 (0) | 2024.04.18 |
| 김수환 - 두브로브니크 강좌(1990)와 수전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 연대에 이르지 못한 우정에 관하여 1 (0) | 2024.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