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새로운 실천은 철학의 새로운 실천과 어떻게 조우하는가?
: 알튀세르의 유고를 읽기 위한 하나의 질문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이 글은 황해문화 통권 제108호(2020년 가을)에 실렸습니다. 인용은 해당 자료로 부탁드립니다.
1.1976년 충격의 효과와 알튀세르
공부의 몇몇 시기에 각기 다른 관심사로 알튀세르를 읽어왔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특히 내 흥미를 가장 강하게 자극한 것은 1976년의 충격 속에서 쓰여진 일련의 텍스트들, 즉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선언하고 그 위기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고자 고투하던 시기의 알튀세르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민주적 방법에 의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전략, 곧 결국 유로공산주의로 종합되는 전략의 전환을 결정한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의 22차 당대회는 알튀세르로 하여금 다양한 글들을 쓰도록 촉발하였다. 이 충격 이후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한계, 공백, 난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할 수 있는 방향을 찾기 위한 각고의 이론적 노력을 전개한다. 그리고 알튀세르에 대한 내 고민도 이 시기 그의 작업들에서 휴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시기에 쓰여진 알튀세르의 작업들에 대한 내 독서는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프랑스공산당 22차 대회의 충격 이후 쓰여진 정치적 텍스트와 철학적 텍스트 사이에 대한 관계라는 질문,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질문을 통해 제기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라는 기획과 「철학의 전화」라는 제목을 그라나다 강연에서 제기된 비철학으로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는 기획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을 말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제기되었으나 자료의 부족과 나의 능력으로 부족으로 더 진전되지 못 한 채 내 의식 속 어딘가에 비활성화된 채로 묻혀있었다. 그러다가 2018년 알튀세르의 또 다른 유고인 『검은 소』(배세진 역, 생각의 힘)의 국역본 출간 이후로 같은 해 『무엇을 할 것인가』(배세진 역, 오월의 봄), 2019년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진태원 역, 후마니타스), 2020년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안준범 역, 현실문화), 『루소강의』(황재민 역, 그린비) 등의 유고들이 연이어 국내에서 출판되면서,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2018년 개최된 심포지엄 <알튀세르의 문제들>을 준비하면서 그 질문은 재활성화되었다. 2018년 이후 번역, 출간된 유고들은 ‘정치의 새로운 실천’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의 관계를 다시금 탐구해 볼 수 있는 실마리들을 적잖이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유고들에 대한 주제 독서로서 이 글은 국내에서 출판된 알튀세르의 모든 유고들을 그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의 관계들을 다룬 텍스트들로 서평의 한계를 정하고자 한다. 그 질문 속에서 이 자리를 빌어 읽어보고자 하는 텍스트는 『검은 소』와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2. 철학과 정치 혹은 비-철학과 계급투쟁
(1) 정치의 새로운 실천
알튀세르가 22차 프랑스공산당 대회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여 작성한 공식적 문헌은 1977년의 「프랑스공산당 제22차 당대회에 관하여」[1](이하 「당대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2차 당대회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폐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폐기는 단지 혁명의 방식이나 혁명 이후 권력형태에 대한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국가라는 이론적 문제에 대해 프랑스 공산당이 심각한 혼동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알튀세르는 파악한다.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민주적 방법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22차 당대회의 입장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모순적인 이행기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자 동시에 한 과정의 종착점”, 즉 “하나의 안정된 생산양식”으로 파악하는 심각한 오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당대회」, 43쪽)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국가를 사회주의로 이행 이후에도 여전히 법률을 통하여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도구로 이해하는 시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사회주의가 생산양식이 아니며 공산주의운동의 종착점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유제에 의해 일정하게 속박되는 체제이다. 특히 계급사회로부터 출현한 국가권력을 계급의 폐지를 추구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장악한 모순적 시기로서 이행기라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행기로서 사회주의에도 계급투쟁은 비록 다른 형태로고는 하나, 여전히 존속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인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우위 하에서 여전히 계급투쟁이 전개되는 시기이며 이 시기 동안 프롤레타리아는 국가장치를 장악할 뿐만 아니라 이 국가장치를 파괴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계급투쟁의 맥락 속에서 국가를 장악함으로써 국가를 파괴하는 작업이 바로 이행기에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검은 소』는 1976년 2월의 프랑스 공산당 당대회와 77년 5월 「당대회」의 발표 사이에 존재하는 유고이다. 1976년 봄과 여름 사이에 초고가 쓰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이 텍스트는 1977년의 텍스트인 「당대회」에서 압축적으로 제시된 입장에 대한 상세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당대회」는 『검은 소』의 압축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검은 소』 역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핵심적 쟁점으로 다루고 있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특히 『검은 소』에서는 계급투쟁과 이행의 정치라는 관점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이 상세하게 전개되고 있다. 『검은 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투쟁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자리한다. 왜냐하면 계급투쟁은 항상 특정한 계급의 독재라는 조건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ㅡ 이전에 그 누구도 하나의 사회계급의 독재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 이는 모든 지배계급(봉건제,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이 필연적으로 행사하는 일종의 절대권력 –마르크스 이전에는 자신의 이름을 갖지 않으면서 행사되었던 절대권력 – 이며, 단일한 정치 내에서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 사회적 삶 전체, 즉 토대에서 상부구조까지, 착취에서부터 이데올로기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계급투쟁 내에서, 정치를 경유 – 단지 경유하기만 –함으로써 행사되는 것입니다. (『검은소』,180쪽. 강조는 저자의 것)
모든 계급사회에는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이 있다.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나 정치권력의 장악을 통해서만 지배하지 않는다. 지배계급은 사회적 규범, 관습, 제도들을 통해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지배한다. 다시 말해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을 규제하는 제도적, 정신적 장치들을 지배계급이 통제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장치들이 억압적이 아니라 탈권위주의적이고 민주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장치들은 지배계급에 의해,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방적 종속이나 저항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갈등적 통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게 저항한다. 즉 계급투쟁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계급투쟁의 조건은 부르주아 독재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가 그 동맹세력과 함께 부르주아의 지배를 전복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시기인 이행기, 즉 사회주의는 계급투쟁이 종결된 시기가 아니라 여전히 다른 형태로 계급투쟁이 존속하는 시기이다. 이 다른 형태로 전개되는 계급투쟁은 지배계급이 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조건으로 하여 진행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조건으로 진행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정치적 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할 때 프롤레타리아 및 그 동맹세력에 의한 국가장치의 장악은 그것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계급투쟁은 ‘무질서의 군림’이 아니라 ‘자유의 군림’을 위한 정치이며 ‘각자에 대한 존중 속에서의 자유’를 위한 정치이다.(같은 책. 226쪽) 더욱이 공산주의가 미래에 도달해야하는 목표라기보다는 “우리의 눈앞에서 실현되는 현실의 운동”(같은 책, 214쪽)이라면 이 진정한 자유를 위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타도하기 위한 과정에서부터 국가장치를 장악함으로써 국가장치를 파괴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알튀세르는 발리바르를 따라 이러한 정치적 과정 및 그 결과를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규정한다.
(2) 철학의 새로운 실천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대한 생각을 담은 『검은 소』가 쓰여지던 1976년, 알튀세르는 그라나다 대학과 마드리드 대학에서 철학에 관한 일련의 강연을 한다. 그 강연들의 내용이 「철학의 전화 : 그라나다 강연」[2](이하 「강연」)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출판되었다. 「강연」이 탐구하는 대상은 제목처럼 철학이다. 「강연」에는 철학 일반에 대한 성격 규정(“철학은 이데올로기들의 편에 있는 어떤 것,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라는, 즉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성이라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추상 속에서 실험적으로 시험당하는 장소인 이론적 실험이이다.”(「강연」, 201쪽)만이 아니라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특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재규정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는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강연」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란 결코 철학이라는 형태로 생산될 수 없다고 천명한다. 즉 세계 속의 모든 실천들에 대해 진리를 제시하는 사유(로고스)라는 형태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은 구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철학으로서 생산된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같은 책, 206쪽)이며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비철학”(같은 책, 201쪽)이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행기(사회주의 시기!)의 국가가 사멸하는 국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국가, 국가 아닌 국가, 즉 비국가여야 하듯이 철학 또한 스스로의 폐지를 위해 작동하는 이론으로서 비철학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분석 속에, 혁명의 전략에 대한 모색 속에, 현실의 투쟁과 그 조건의 분석 속에서 작동하는 이론적 ‘무엇’이다.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이하 『입문』)을 관통하는 기획 역시 바로 이 ‘철학의 비철학으로의 전화’, 즉 ‘철학의 새로운 실천’으로서 마르크스주의 비철학에 대한 모색이다. 그렇다면 『입문』과 「강연」이 맺는 관계는 『검은 소』와 「당대회」가 맺는 관계와 동형적이라 할 수 있다.[3] 『입문』에는 알튀세르가 「강연」에서 제시했던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는 기획이 보다 풍부하게 전개되며 그 함의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해명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입문』에서 더욱 풍부하게 제시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은 어떤 쟁점을 갖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계급투쟁의 맥락에서 파악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 아니 비철학의 의미이다.
알튀세르는 『입문』에서 철학의 형태로 생산되지 않은 철학, 즉 비철학을 실천한 세 명의 사상가를 주목한다. 물론 그 핵심에는 역사유물론을 구축하고 이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과 공산주의로 이행의 계기들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탐구한 마르크스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를, 세계를 구축하는 실천을 추상 속에서 파악하여 그 실천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제시하는 ‘철학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그 추상적 진리가 은폐하는 모순과 적대, 갈등과 분할을 구체적 실천과 그 실천의 조건들을 통해 파악하려는 비철학자는 마르크스만이 아니었다. 알튀세르는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투쟁 속에서 정치적 실천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비철학을 실천한 마키아벨리, 인간의 실천을 의식의 통일성이 아니라 무의식 내의 분할을 분석함으로써 비철학을 실천한 프로이트에게서도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 수행되는 구체적 방식을 발견한다.
『입문』은 비철학을 무엇보다 계급투쟁의 맥락에서 사유한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이 추상을 통해 계급투쟁을 은폐하며 지배계급의 입장을 보편화하는 작업이라면 비철학은 그 보편으로 추상화될 수 없는 구체적 계급투쟁을 철학의 장에 도입한다. 이는 결국 비철학은 철학으로서의 철학, 지배계급의 철학에 맞서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들을 통합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를 계급투쟁의 주체로 구축하는 의식적 실천에 복무한다.
아무도 착취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해방 및 계급들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는 어떤 계급을 가정해보자. 바로 이 계급이 자신들의 전투에서, 자신들의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합하면서 자신들을 스스로 통합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통합을 해내는 철학을 다듬어 내면서 이 이데올로기를 통합하는 것을 가정해보자.…… 이 철학이 프롤레타리아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필연적으로 처하게 되는 의존은 맹목적 예속이 아니라 정반대로 의식적 규정이고, 이 규정은 저 이데올로기의 조건들과 형태들과 법칙들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의해 확실해지는 것……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통일을 감당할 철학을 명령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런 과학적 인식이야말로 가능한 한 객관적인 철학적 조립의 조건들을 허용해줄 것이다.(『입문』,3 45-346)
즉 마르크스주의의 비철학은 계급투쟁의 조건, 계급 이데올로기의 조건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기반을 두고 이 투쟁 내에서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통일된 계급으로 통합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조립하는 과업을 떠 맞는 이론적 실천이다.
그러므로 철학 이전에 계급투쟁이 선행한다. 비철학은 계급적 입장, 즉 당파성을 삭제하며 초역사적이고 무갈등적인 보편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과 무관하다. 비철학은 철학이 제시하는 보편적 진리의 추상적 세계에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의 조건, 혹은 외부를 제시하며 이 조건, 외부에 입각하여 ‘아무도 착취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해방 및 계급들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는 어떤 계급’을 구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조립한다. 비철학이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실천에 복무하는 당파적인 이론적 실천인 것이다.[4]
3. 계급투쟁 속의 새로운 군주
우리가 살펴본 두 편의 유고는 모두 1976년 2월 이후 작성되었다. 이 날자가 의미하는 것은 22차 프랑스공산당대회의 효과와 그 글들이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관계란 어떤 것인가? 다시 말해 철학의 새로운 실천과 정치의 새로운 실천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는 결국 다시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관통해온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질문,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이론과 실천의 관계란 무엇인가를 질문이다.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1976년 이후 알튀세르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쓰여진다. 22차 프랑스공산당대회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표현되는 하나의 징후일 뿐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22차 공산당대회의 결정은 1975년 이탈리아 공산당으로부터 시작되어 스페인 공산당의 선언으로 완성되는 유로공산주의의 등장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유로공산주의는 일견 스탈린주의의 반민주성과 억압성이 조성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위기와 68혁명에서 정점에 이른 대중운동에 대한 공산당의 무능력이 보여주는 정치적 위기, 즉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보일 수 있으나 알튀세르에게 유로공산주의는 그 위기의 대응책이 아니라 그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상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유발한 마르크스 이론 자체의 난점과 공백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이 난점을 통과하고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 아니라 그 난점과 공백을 삭제하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작업이 바로 유로공산주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관한 일련의 글들을 발표하는 가운데, 비록 그의 생전에 출간되지는 못했지만, 알튀세르는 그람시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한 책을 저술하였다. 그 유고가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책에서 알튀세르는 레닌의 입장에서 그람시를 읽으며 그람시의 오류를 비판한다. 레닌의 입장이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계급투쟁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규정하는 이다. 그러나 그 구체성은 결코 현실에 대한 무매개적 이해, 이론적 매개에 의한 해명 없이 판단 가능한 자료들에 대한 직접적 대면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입장은 경험주의이며 유로공산주의가 기대고 있는 그람시의 입장으로부터 유래하는 오류라고 알튀세르는 주장한다.
알튀세르는 이 글에서 그람시의 경험주의를 비판하며 그를 또 다른 비철학자, 마키아벨리와 날카롭게 대조한다. 그람시의 마키아벨리 이해와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이해 사이에는 다양한 쟁점이 있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특히 ‘군주’라는 질문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그람시에 의하면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질서, 국가, 체제를 구축하는 군주는 더 이상 개인일 수 없다. 이제 군주는 집단성을 띠며 그 집단성의 형태에는 정치정당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는 집단-인간도 아니며 개인-인간도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란 무엇인가?
아니다, 군주는 본성[자연]에 의해 혹은 이성에 의해 덕과 악덕을 행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 주체인 개인이 아니다. 군주는 중심적 주체가 없는, 다시 말해 이 군주에게 자신의 객관적 기능들의 종합을 부여해줄 주관적 통일체로서 중심적 주체가 없는, 그러한 심급들의 하나의 체계이다.…… 군주는 하나의 정치적 전략이고 이러한 자격으로 이 군주는 ‘주체 없는 과정’인데, 왜냐하면 군주 그 자체이기도 한 이 전략이라는 것 속에서, 군주는 우리가 새로운 국가로 파괴하고 교체해야하는…… 투쟁전략을 표상할 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128-129)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의 군주에게서 어떤 의지의 주권적 중심으로서 주체의 형상이 아니라 기능적 심급들의 체계, 즉 새로운 질서, 체제, 국가를 창출하기 위한 투쟁의 ‘전략’을 발견한다. 이 투쟁의 전략이란 인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그 속에서 발견하고 인지하도록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전략이자 그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기 위한 역사적 조건들과 행위자의 역량에 대해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투쟁의 전략이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 그러한 구체성으로부터 이행을 위한 투쟁을 구축해가는 전략 자체가 바로 군주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역사적 조건을 사상한 채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필연적 이행을 보장해주는 역사철학의 변종이 아니며, 마르크스주의 정치란 민주주의에 대한 규범적 확신에 입각해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상에서부터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민주화를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의지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또 하나의 역사철학(그것의 다른 이름이 결정론이다)이 되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또 하나의 의지주의(그거의 다른 이름이 인간주의이다)가 되는 것이 바로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에 도래한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것이다.
알튀세르는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사고하고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 분석은 결코 역사의 필연적 법칙으로도, 직접적 경험에 입각한 현실의 서술로도 환원될 수 없다. 분석의 대상인 구체적 상황을 인지하는 작업에서도, 이 대상을 적실하게 분석하게 해주는 작업에서도 이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이론이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동시에 단지 법률적 수준에서, 이 법률이 보장하는 제도의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최대화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아니다. 부르주아의 통치를 민주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계급독재에 의해 규정되는 민주주의를 해방하는 계급투쟁, 다시 말해 하나의 계급에 의한 지배를 또 다른 계급의 지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자체를 폐지함으로써 지배 계급을 폐지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자체가 마르크스주의 정치, 즉 ‘정치의 새로운 실천’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철학의 새로운 실천과 정치의 새로운 실천의 관계라는 질문에 잠정적 답변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의 새로운 실천은 계급투쟁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 전략을 매개로하여 정치의 새로운 실천과 만난다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전복하는 혁명에서부터 국가장치를 파괴해 가는 이행기에 이르기까지 진행되는 계급투쟁을 사고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실천이 바로 비철학으로서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물론 이 답변은 그의 유고만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저작들을 다시 읽기 위한 단지 하나의 전략에 불과한 것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1] 이 글의 국역본은 『당내에서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될 것들』(루이 알튀세르, 이진경 엮음. 새길.1992)에 수록
[2] 이 글은 『철학에 대하여』(서관모, 백승욱 역, 동문선, 1997)에 수록되어 있다.
[3] 물론 『검은 소』가 「당대회」의 확장판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는 『입문』과 「강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 그러나 비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러한 정식화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라는 난점이 그것이다. 가령 그의 또 다른 유고인 『재생산』(김웅권 역, 동문선, 20078) 및 이 작업의 일부로 실렸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관한 노트」에서 선언된 ‘이데올로기의 영원성’ 및 ‘이데올로기에 의한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 테제와 비철학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의식적 통일 작업이 맺는 관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라는 주제로 쓴 일련의 글들 (이 글은 『대중들의 공포』-서관모, 최원 역, 도서출판b, 2007)-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마르크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마르크스주의의 오래된 아포리아가 바로 프롤레타리아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특히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였음을 지적한바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와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은 발리바르가 지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알튀세르 자신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배태되어 있는 동요를 보여준다. 이는 『검은 소』와 『입문』에 실은 진태원의 ‘해제’에서도 날카롭게 지적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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