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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난쟁이가 달을 잡기 위해 공을 던지다

by 인-무브 2026. 7. 6.

난쟁이가 달을 잡기 위해 공을 던지다

 

수차미

사진: 쿠로게임즈 명조 공식 유튜브 채널

 

 

쿠로 게임즈에서 서비스하는 크로스플랫폼 게임 [명조]에서 진행된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콜라보 스토리를 봤다. 이야기는 여느 콜라보와 다를 바 없이 주연이 낯선 세계에 떨어지는 일에서 출발한다. 본작 이후의 시점, 데이비드를 비롯한 갱단 인원이 사망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에서 본편이 시작한다. 데이비드의 사후, 우울증에 시달리며 다크웹을 탐사하던 루시는 평소와 다른 이상균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입장하는데 이때 넘어온 곳이 바로 [명조]의 세계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은 리더이자 애인이었던 데이비드를 잃은 루시가 이를 마주하고 극복해내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본편이 주인공의 죽음과 집단의 와해로 끝난다면 이 이야기는 마무리 짓지 못한 감정과 그에 따른 극복 과정을 그린다. 특히 이 기획에서 흥미로운 건, 본편의 서사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선택되는 ‘꿈꾸기’ 전개가 콜라보 대상의 서사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대개 콜라보 기획은 이야기를 마쳤을 때 다시 서로의 전개로 돌아가기 위해 없어도 그만인 정도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일이 잦다. 일상을 보내는 콜라보측 인물들에서 평소 캐릭터 성격이나 관계 등을 간략하게 참조해 가져옴으로써 서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명조]의 이번 이야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본편에서 진행되지 못한 후일담을 다루는 성격을 띤다. 악몽이라면 악몽, 혹은 좋은 꿈일 수도 있을 게임 속 이야기에서 루시는 그동안 자신이 마주하지 못한 트라우마를 직면해 이를 청산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예정된 상황에서 이야기는 반드시 지난 감정이 회복돼야만 하는 구조로 흘러간다. 어떤 이야기에서 플롯은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를 권태롭게 하지만, 반대로 예견된 미래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주지시키며 힘을 북돋아주기도 한다. 이야기의 초반에 조력자로 등장해 함께하는 레베카에 관해, 루시는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점을 알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넘어온 이세계가 현실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 아니라 해서 꿈이 가짜인 건 아니다. 실체화된 아라사카 보병과 아담 스매셔가 악몽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들 세계마저 무너뜨리려 한다. 

 

[명조]에서는 기획의 무대가 자신들의 본래 현실에 해당하지만, 루시에게는 아니다. 치유를 위해 잠들었던 도입부에서처럼 이야기의 진행은 다시 본래의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야기는 게임의 인물들이 조력자로 등장해 루시를 다시 본래 현실로 돌려보내는 구도로 흘러간다. 루시에게도 이세계는 일종의 꿈으로서 찰나에 불과하므로 그냥 숨어다니며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면 그만이다. 다만 아담 스매셔의 강함도 그렇지만, 그가 루시를 쓰러트리면 목표 제거 후 이 세계에 그대로 남을 가능성이 있으니 서로 힘을 합쳐 적을 제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는 조각을 모아 데이비드를 만나기보다 계속해서 숨어 다니며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양쪽 모두에서 이 꿈, 이 세계를 지켜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엣지러너> 본편이 길고 긴 꿈세계의 종말을 보여준다면, 작은 흔적들에서 출발해 나머지 조각들을 회복하는 콜라보 기획의 내용은 꿈을 지키는 일이 그걸 줄곧 간직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내버려두는 일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애초에 루시가 본편의 전과 후에 줄곧 다크웹을 들여다봤던 것도 혹시 모를 데이비드의 소식을 접할까 기대했던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도 자신이 보고 싶어하던 데이비드와 재회하는 콜라보 기획의 내용은 시의적절하다. 앞서 레베카를 보면서도 알아차렸지만, 이 세계에서 데이비드는 서로가 처음 만나던 때의 모습으로 등장하기에 몸에 사이버웨어를 다수 장착한 후반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세계는 서로에게 꿈이 되어주려 했던 달 BD의 장면에 근간을 두기에 그녀도 결국 이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멀고 방대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런 꿈 안에서도 데이비드의 흔적을 찾으려 했고, 그 꿈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컸다. 사실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감정이나 마음 속에서 이 느낌들의 정확한 위치정보를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콜라보 기획이 제공한 공간은 자신이 무엇을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확히 짚어주는 방향을 설정했다. <섬광의 하사웨이>의 팬들이 영화에서 “살리고 싶다”고 생각하듯 말이다. 

 

<섬광의 하사웨이>는 등장인물인 노아 하사웨이가 이미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론에서 출발하는 작품이다. 원작이 나올 당시 토미노가 차용했던 이미지는 <샤아의 역습>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이 이루어낸 거대한 기적을 정반대로 응용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주인공 노아는 자신이 꾸었던 원대한 꿈들을 뒤로한 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마치 영화 한 편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게 한편의 꿈처럼 사라져버리고야 말듯이 혁명의 불씨는 사람들을 꿈에서 깨어나게도 했지만 반대로 일상을 크게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게임이라는 매체가 영화와 다른 건, 프레임 바깥에도 여전히 세계가 있고 오브제가 돌아간다는 점이다. 게임에서 오브젝트는 구현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볼 때 이용자가 마주했을 때 그게 본래부터 그곳에 존재해왔다는 인상을 준다. 마찬가지로 루시가 자신의 꿈이 형상화한 데이비드를 새로 만났을 때 그녀는 마음속 한구석에 줄곧 깃들었던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명조>의 콜라보 기획은 이 점을 데이비드가 어딘가에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연결하고, 종국에는 다시 영화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응용한다. 넷러너인 루시가 블랙월 너머를 탐사하던 일은 본래 작품 안에서는 데이비드를 쫓는 모두를 배제하던 일에서, 데이비드가 살아있을 모두를 탐사하는 것으로 바뀌었었다. 작품의 결말부이자 콜라보 기획의 도입부에서 이 모습은 마치 데이비드에 관한 것이기보다 블랙월 자체에 집착처럼 보인다. 넓은 만큼이나 길을 잃은 확률이 큰 이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몰랐고, 또 좌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는 방랑자와 동료를 통해 평소에 짓눌려왔던 고민과 시간들을 이겨냄으로써 항상 다다랐던 꿈의 마지막 길을 돌파한다. 그리고 콜라보 기획의 마지막 장면에서, 방랑자와 친구들은 "마음 속 한구석에 계속해서 머무를 방법은 있다"고 하지만 루시는 이를 거절해 나선다. 아마도 그녀는 미련을 남기는 게 아니라 한다면, 그 대상에는 자신도 포함돼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고, 원작에서는 분명 배드엔딩으로 끝나지만 영화에서는 그가 살아났으면 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중에는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가 있다. 이 작품은 마을에 찾아오는 재난을 막아 미래를 바꾼다는 이야기의 전작 <너의 이름은>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다룬다. 당시 신카이는 세계의 거대한 운명에 휩쓸리는 사람을 보며 무기력함을 느꼈다고 한다. 기후변화,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사회 분위기, 젊은 세대의 무력감 등…. 전자가 맞서야 한다는 쪽이라면, 후자에서는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제대로 앞을 마주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마주하는 여러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에 부딪히며 목소리를 내야만 비로소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뜻에서, 정주하는 자신을 고민하게 된다. 광장에 나서는 사람들, 사적인 삶의 진통이나 목마름에 시달리는 이들. 누군가는 상대와 대판 싸우기도 하고, 일상에 더 가까이 붙들리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 아무런 관심을 보내지 않거나 자신의 무가치함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무언가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걸까? <날씨>는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기획이다. 소년은 소녀를 하늘에 바쳐야만 재난이 닥치지 않는다는 설화에 맞선다. 소녀를 다시 땅으로 데려오고, 그렇게 지상은 거대한 재난을 마주한다. 중요한 건 재난 이후에도 이야기와 삶이 줄곧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상의 대부분이 예전 삶과 함께 물에 잠긴다. 비가 그치지를 않아 금방이라도 일상에 경고수위가 넘실대지만 아이들은 그저 화목하게 떠들 뿐이다. 여기에, 지나가던 어른은 아이들의 선택으로 망했을 세상이라면 진작에 망했을 것이라며 “네가 선택한 게 아니고 그러니 책임의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어딘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여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어 보인다. 그냥 내버려두면 ‘어른(스러운 이)’들이 알아서 할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전작의 반대방향에서 출발하기에 의미 있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맞서 싸울 때, 이에 집어삼켜지더라도 그대로 세상이 끝나버리지는 않는다. 그저 환경이 바뀐 채로 세상이 흘러갈 뿐이며, 우리는 그걸 두고서 아프거나 다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드러내는 일과 아프지 않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일까. <너의 이름>에서 아픔에 적극적으로 맞서며 이를 치유해야 한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작품에서의 병은 교정되어 사라져야 한다. 반대로 <날씨>에서는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이 주로 다뤄진다. 하늘이 예지한 신병을 해소하려면 사람을 하늘에 공양해야 한다. 여기서 소년은 (소녀와) 자신의 세계를 아프게 하기보다 세계의 병이 재발하도록 내버려둔다. 바꿀 수 없는 문제들에 골머리를 앓기보다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몸에 있는 병듦이 자신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걸 인정해버리는 순간 이 세상에서 치유되고 교화돼야 할 건 자신이 되어버린다. 세상에는 어떤 삶의 형태도 존재할 수 있고, 그걸 자신이 모두 끌어안는다고 해서 다시 병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냥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와 건전히 동행하는 편이 더 낫다고 두 사람은 생각한다.  자신이 마주하는 동시대의 문제의식들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건 그런 동행의식 때문인 게 아닐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미래의 한편을 보는 이가 있다면, 이 세계에서 개인이 어떤 존재일지를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픔과 동행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이가 되는 게 아니냐는 마음이 들 때가 있지만, 악몽을 꿈의 한 형태로 정의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꿈의 기본값을 좋은 것에 두면서 비루하고 초라한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란다. 악몽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다고 여겨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애초에 악몽이라는 게 좋은 꿈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에 인정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악몽을 꾼다는 건, 반대로 이 세상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를 강조하니 말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좋은 꿈에 머무르기보다 조금은 더 낯선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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