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Untitled, Portrait of a Silent Fag), 2020
Julien Ribeiro
번역: 임하은
«보시오, 이것은 예술가가 창조한 폭력의 찬가가 아니라, 현실이 직접 내지르는 비명이자 노래요...»
1971년 영화 〈 Sweet Sweetback's Baadasssss Song〉 오프닝 자막에서 인용된 중세 전통 주문
2022년 여름, 진단이 내려졌다. 우울증. 12호선 선로 위로 몸을 던지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던 날, 그게 분명해졌다. 그로부터 다섯 달 전, 내 안에서충분히 단단하다고 여겼던 무언가가 부서졌다. 아무 예고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몇 주 동안 멈추지 않았다. 울면서 잠들고, 울면서 깼다. 슬픔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침묵과의 새로운 관계만큼은 아무도 모르게 간직했다. 침묵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귀청 터질 듯한 침묵은 시끄러운 곳에서도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음악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은 모든 음표를 덮어버리고 소리를 죄다 질식시켰다. 그게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처음엔 항불안제로 버텼고, 그 다음엔 항우울제에 기댔다. 이 정도까지 왔다면, 내 감정과 내 이야기, 그리고 내 몸을 새롭게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심리치료를 통해 과거로 다시 뛰어들었다.어떻게 모든 게 그렇게 무너질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면서, 조금씩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이 몇 페이지에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한다. 하나의 문화 — 여기서는 호모 문화가 — 는 결국 여러 삶의 이야기들이 맞물린 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화려하든 평범하든, 각각의 이야기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헌신을 빚어내고, 새로운 시선을 열어준다. 그 다양함과 겸손함, 서로 간의 대화 속에서 호모 문화는 — 내 눈에는 — 비로소 살아난다.
Let's rewind
2021년 10월부터 시테 국제 예술촌에서 레지던시를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300여 명의 예술가들과 6개월을 함께했다. 오랜 고독과 분노의 시간 끝에, 거기서 강렬하면서도 섬처럼 닫힌 사교의 세계를 발견했다. 그 만남들이 가진 변혁적인 힘에서 나는 양분을 얻었다. 특히 LGBTQIA+ 입주자들과 나눈 교류, Queer Residents Café가 그랬다.
격주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 300명 중 많은 외국인 이웃들은 처음으로 파리의 삶 — 종종 가혹하고 고독하지만, 동시에 강렬하고 사회적으로 도취적인 — 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LGBTQIA+로 정체화하며 처음으로 퀴어 커뮤니티를 경험하는 이들도 있었고, 자국의 커뮤니티를 뒤로한 채 온 이들도있었다. 우리 모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공공장소에서든 집 안에서든 제도 안에서든, 우리가 공유하는 정체성으로 인해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커뮤니티 활동으로 쌓아온 내 경험 덕분에, 나는 이 새로운 삶의 조건들이 이웃들에게 여러 위험 요소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감지했다. 물론 더 이기적인 이유도있었다. 내 삶의 궤적이 나를 이런 교류에 굶주리게 만들었다. 이런 공간들이 내게 좋다는 걸 안다. 내 말이 더 자유로워지고, 더 섬세해지는 곳들이니까.
그 공간에서 나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이웃들의 작업 이야기를 들었고, 내 연구를 나눴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때로는 내밀한, 때로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다. 문화 기관과의 관계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기도 했고, 나의 섹스에 대해 말하고 타인의 이야기도 들었다.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내 HIV 양성상태와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고, 동료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오가며 때로는 통역을 맡기도 했다. 춤을 췄다. 각자 한 곡씩 틀 수 있도록 전화기를 돌렸다. 비밀을 간직하기도 하고, 몇 가지는 나누기도 했다.
그 시간들은 애도에 관한 수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였다. 애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들과 나 자신이 세운 방법들 — 문화적이든, 예술적이든, 정치적이든, 순전히 전략적이든 — 에 대해서. 그 주제가 반복해서 떠오른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속한 서구 문화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재한지를 드러냈다. 대체로 백인 중심인 이 문화에서 죽음은 기피 대상이다. 영원한 젊음과 생산성,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 대화들 덕분에 나는 죽음과 애도로부터 비켜 있었다는 생각이 사실은 허구였음을 깨달았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에게 되뇌던 이야기.
입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넬슨이 내 일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처음 만난 날, 그는 자신의 예술 작업과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그 작업을 어떻게 펼쳐나가는지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 프로젝트에도, 그 남자에게도 끌렸다. 당시 공동체적 돌봄에 집중하던 내 연구와는 달리, 그는 나로 하여금 스스로에 의한 자기 자신의 돌봄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레지던시 기간 동안 새로운 큐레이토리얼 연구도 시작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 — 오늘까지도 내 시간의 일부를 차지하는 — 은 국립조형예술센터 온라인 컬렉션에서 찾아낸 디지털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다. 귀에 꽂힌 흰 꽃, 옅은 화장, 배 위의 십자가에서 발산되는 듯한 빛, 주황빛 할로겐 조명…
낸 골딘의 사진, Cookie in Her Casket, N.Y.C., Nov. 15, 1989. 왜인지도 모른 채 그 사진에 홀렸다.
쿠키 뮬러의 얼굴은 낯익었지만, 그때까지 나는 그녀를 오직 그 사진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쿠키 뮬러는 미국의 배우이자 작가였다. 양성애자에 HIV 양성이었으며, 야생적이면서도 마녀 같은 존재로 언더그라운드와 미국 영화계에서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1949년 메릴랜드에서 태어나 존 워터스의 영화들(Multiple Maniacs, Pink Flamingos, Female Trouble, Desperate Living, Polyester)로 이름을 알렸다. HIV 유행 초기, 헤로인과 크랙이 미국 대도시를 잠식하던 시절, East Village Eye에서 건강 칼럼 「Ask Doctor Mueller」를 쓰며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과학적 정보는 없고 정치적 허위 정보가 판치던 그 시절, 그녀의 글은 때로 음모론이나 뉴에이지 요법과 경계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그 솔직하고 다정한 어조로 연애 조언도 건넸다. 여러 권의 책을 남겼고, 그중 일부는 파란만장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피터 후자르, 로버트 메이플소프, 낸 골딘의 모델이 되었고, 골딘은 오랜 친구였던 그녀에게 바친 열다섯 장의 사진과 텍스트 연작 The Cookie Mueller Portfolio를 남겼다.
영결식에서 찍힌 쿠키의 사진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사진은 내가 금지당해온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쿠키 뮬러를 발견하기 전, 레지던시를 시작하기 1년 전, 나는 스테판과 함께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 이주가 내 커뮤니티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LGBTQIA+를 위한 성 건강 센터 체크포인트 팀에 합류했다. 1년 동안 동료 안내자로 일하며, 주로 게이, 호모, 혹은 동성애자남성들 — 각자의 자기 정의에 따라 — 을 만나고 들었다. PrEP 사용 경로를 시작하거나 이어가려는 사람들이었다.
PrEP는 HIV 예방 전략이다. 영어 pre-exposure prophylaxis 의 약자로, HIV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감염을 막기 위해 약을 복용하는 방식이다. 모든 국제 임상시험은 처방대로 복용할 경우 감염 위험이 극히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과 HIV 위험 감소 전략을 이야기한다는 건, HIV/에이즈가 우리 몸에새겨놓은 상상들, 고정관념들, 트라우마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Chemsex 와 마약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시기에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코로나가 강제한 멈춤과 환각버섯 경험이 함께 작용하여, 점점 더 내 사교와 성생활, 건강을 갉아먹던 그 습관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많은 이들처럼, 호모로서의 내 삶은 HIV/에이즈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단보다도 훨씬 앞선 일이었다. 1980~90년대는 우리 세대를 낙인으로 찍었다.영화, 텔레비전, 신문은 쉬지 않고 우리를 그 동어반복적 이미지로 환원했다 — 본성상 사회적으로 병든 존재이기에 신체적으로도 병든 동성애자. 이 표상들은 수많은 호모들의 첫 감정적 설렘의 순간부터 따라다녔다. 그 상처는 한 번도 공동체적 방식으로 치유된 적이 없다.
나는, 내 동료들처럼, 우리의 어휘 속에까지 내면화된 혈청공포증 sérophobie 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클린'이라는 단어가 그 예다. HIV 양성인 사람이 '더럽다'는 함의. 그리고 더러움이란 "제자리에 있지 않은 무언가"다. 오염의 언어를 사용하는 건 차별적 실천에서 흔히 나타나는 방식이다. 우리 커뮤니티 안에서 HIV 양성인 사람들이 데이팅 앱에 설 자리가 없다는 생각을 그 언어가 불어넣는다. 아무 자리도 없다는 것을. 이에 맞서, 친구 프레드 콜비와 함께 인스타그램 계정 「Séropos vs Grindr」를 만들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여러 데이팅 앱에서 벌어지는 HIV/에이즈 관련 차별의 증거인 대화 스크린샷을 정기적으로 올린다. 혐오 발언을 받은 사람과 발신자 모두를 익명으로 처리하고, 짧은 교육적 텍스트를 함께 단다. 발신자를 익명으로 하는 건 변혁적 정의의 원칙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책임을 중심에 두고 변화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 물론 가해자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침묵하고 눈을 돌림으로써 공동체가 그 차별적 발언을 허용하고 있다고 우리는 본다.
「Séropos vs Grindr」를 통해서든, 체크포인트에서의 활동을 통해서든, MAC VAL과 함께 Act Up-파리를 위해 런칭한 티셔츠 컬렉션을 통해서든, 내 접근 방식이 일종의 향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안다. 다른 시대의 활동가적 역사들과 연결되고 싶은 것이다. HIV/에이즈에 맞선 싸움의 과제들은 여전히 유효하고 투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 바이러스의 역사는 동시에 내가 오늘 살아 건강하게 있을 수 있도록 싸워온 사람들, 집단들, 단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아카이브를 통해 접한 그들의 이야기가 내 삶에서 가장 고독했던 시기를 건너게 해주었다. 그들의 연장선상에서 행동하는 건, 나에게 이중의 빚에 대한 인정이다.
2019년 파리에 정착한 것은 이 공동체 아카이브들과 공간적으로 만날 기회였다. 오늘날 역사적인 게이 동네를 심각하게 잠식한 젠트리피케이션에도 불구하고, 마레 Marais 가 품고 있는 고유한 장소의 정신과 호모 유령들을 찾아 나서는 기회이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게이 바들에서 술에 취하다 보면, 나는 종종 죽은 이들을 깨운다.
"기욤 뒤스탕이 여기서 정기적으로 섹스를 했는데, 지금은 소변기가 된 자리가 예전엔 백룸 backroom이었어." 혹은 "미셸 푸코가 죽던 날, 바로 저 테이블에서 — 그래, 저 테이블! — 다니엘 드페르와 친구들이 모여 AIDES 협회를 만들었지." 이 이야기들의 정확성 따위는 상관없다. 나는 그것들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알고, 무엇보다 그것들이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이 공간들 안에서 계속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이 된다.
파리에 오기 바로 전, 두 번째로 리옹에 짐을 풀었는데, 그건 실수였다. 너무 분노에 차 있어서 아무것도 일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상처들이 나를 따라다녔고, 더 이상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리스본에서 보낸 2년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스스로를 재발명하고, 내게서 빼앗겼던 어떤 이야기의 실을 다시 이어가기 위해 그곳으로 떠났다. 포르투갈 출신이자 프랑스 동화주의의 산물인 아버지는그 나라를 내 DNA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그 언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고, 심지어 성을 리비에르 Rivière 로 바꾸는 것까지 고려했었다.
리스본에 자리를 잡은 건 어떤 이주의 경험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발견했다. 여전히 가족의 이야기였지만, LGBTQIA+ 커뮤니티 아카이브가 나를 그 속으로 이끌었다. 이 활동가적 과거는 나를 매료시켰지만, 영웅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내 행동을 가로막을 수 있었으니까.
새로운 도시에서 정서적·직업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첫 6개월을 보낸 뒤, 나는 병에 걸렸다. 증상이 충분히 뚜렷해서 진단을 받기도 전에 이미 짐작하고있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성생활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HIV 양성 판정을 알렸을 때,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그 불가피한 죽음이 다시 나타나는 느낌과 함께, 어릴 적 낡은 이미지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나의 감염은 내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를 따라잡고 만 원인-결과의 과정에서 하나의 단계에 불과했다.
HIV에 실제로 감염된 것은 그 순간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바이러스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내 안에 있었으니까. 나는 이것을 나의 복수 감염 이라고 부른다.
복수 감염이란 이론적으로 동일한 바이러스의 다른 변종에 다시 감염될 위험을 말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과학적 데이터의 부재 속에서 지배적이었던 개념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쓰지 않는다.
스테판은 몇 달 전 리스본에서 내게 청혼했었다. 진단을 받고 이틀 후, 그는 반지를 사러 가자고 했다. 삶은 계속된다는 걸 내게 이해시키려는 그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어떤 이미지들과 연상들은 너무 깊이 뿌리내려 있어서, 타인의 도움 없이는 거기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몇몇 친구를 사귀었고 리스본에서 의료적 관리도 잘 받았지만, 나는 혼자 병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스테판은 자주 해외에 있었고, 매일 전화를 해줬음에도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내 상태에 대해서도, 리스본에 온 이후 어쩔 수 없이 내 삶의 리듬이 되어버린 마약에 대해서도.
아마도 내가 새 삶 속에 만들어놓은 그 고독을 채우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집 근처 섹스 클럽 단골들에게서 블리스를 샀다. 프랑스에는 없는 마약이었지만 3-MMC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약은 저녁 외출이 시작될 때쯤엔 즐거움을 줬고, 아침이 오면 나를 극도로 성적으로 만들었다. 그것의 중독성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리옹과 리스본 이전에도 향정신성 물질을 쓴 적은 있었지만, 순전히 오락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다. 리옹에서는 몇 년간 변화하는 글쓰기에 특화된 예술센터를 운영하며 클럽 나이트도 조직했다. 경제적으로 빠듯했어도, 사회적 자본에 대해서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고, 내 작업으로인정받았고, 파티에서 환대를 받았다. 꽤 특권적인 — 때로는 조금 지나치게 — LGBTQIA+ 소규모 커뮤니티의 일원이었다. 베를린 출장 중에 스테판을만났고, 그는 곧장 리옹으로 합류했다. 우리는 트랜스-호모-레즈비언 (TransPédéGouine, TPG) 파티 세계에서, 혹은 적어도 그것이 변모한 형태로, 어울렸다. 리옹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몇 년 후 어쩌다 그 세계에 발을 들였다. 바로 그 파티들에서 내 안에 내면화된 동성애혐오와 여성스러운 남성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음을 깨달았다.
바로 그 파티들에서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고, 처음으로 매니큐어를 발랐다. 바로 그 파티들에서 버틀러와 프레시아도를 발견했다. 바로 그 파티들에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단체들을 위한 모금을 했다. 바로 그 파티들에서 댄스플로어가 엄청나게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처음 리옹에 온 건 인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 도착은 해방이었다. 아르데슈에서의 청소년기가 나를 짓눌렀고, 가족의 이해를 받지 못한 채 몇 년 전부터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해왔다. 노동자 계급의 농촌 환경에서, 정말로 떠나는 게 가능하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젊은 호모로 산다는 건 우리에게 운명 지어진 이성애가부장제적 허구들이 눈앞에서 허물어지는 걸 목격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날수 있다면, 다른 것들에서도 벗어나려 시도할 수 있다. 더 쉬워지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눈을 돌리기가 어려워진다.
그렇게 2003년, 열여덟 살이던 나는, 이성애자인 여자친구들이 효과 없는 예방법을 쓰는 것을 보다 못해 — 피임이든 성병 예방이든 — Annonay에서 에이즈 퇴치를 주제로 한 최초의 행사를 조직했다. 일주일 동안 시의 청소년문화회관과 협력하여 콘서트, 공연, 전시, 강연이 이어졌다.
그 행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작은 도시에서 HIV/에이즈 퇴치 운동의 행위자로 지목하게 했고, 당시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정치적으로 에이즈 양성 상태를 경험하게 했다. Act Up-파리가 개념화한 이 말은, 실제 혈청 상태와 무관하게 HIV/에이즈 운동에 관여한다는 이유로 양성자로 인식되는것을 뜻한다.
인구 1만 8천 명의 작은 도시에서 나는 '에이즈 걸린 호모'가 되었다. 도망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요함과 설득 끝에 남자친구들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내가 열네 살이던 때 아버지가 식탁에서 던진 말이 내 안에 울리고 있다.
"네가 언젠가 호모라고 말하면, 벽에 대가리를 쳐박아버릴 거야!"
어떤 말들은 새겨진 채로 남는다. 최근 그것을 다시 꺼냈을 때까지 그는 그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내가 그를 용서한 건 그가 변했기 때문이고, 당시 그가 나를 미워한 이유 중 일부가 내가 성적 학대를 당했기 때문임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외상성 기억상실이 사건의 연쇄를 흐릿하게 가리지만, 나는 그 남자를 다시 본다. 중학교 가는 길,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 공중 소변기에서 내 옆에서 자위를 하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집요하게 졸라대던 그 남자를. 그가 나를 만지고 내 첫 사정이 일어날 때까지 빨아댔던 것이 기억난다. 중학교 가는 길에 음경에 느꼈던 이상한 통증도. 몇 주 후 어머니와 함께 그를 마주치고, 또 다시 중학교 가는 길에서도. 마치 우리가 공모자라도 된 듯 거리에서 말을 건네던 그. 그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그의 압력 아래, 부모님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그 화장실로 돌아갔던 나. 어떤 남자들에게 그 화장실은 그 도시에서 게이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약 1년 동안, 그들과 함께 그 안에서 성적 경험을 했다. 때로는 거의 동의에 가깝게, 때로는 강압적으로. 어디가 경계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됐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죄책감, 사회복지사에게 털어놓게 만든 그 죄책감. 경찰이 학교로 나를 데리러 와서 경찰서에서 나를 오직 가해자로만 대하던 그 일. 경찰이 나를 심문하는 사무실 유리 너머로 눈물을 쏟던 부모님의 모습. 나중에 화를 내며 아버지가 던진 말, "싫으면 그냥 다시 화장실 가면 되잖아." 내 신원은 감추면서도 미성년자인 나를 자유로운 성노동자로 묘사한 지역 신문 기사. 그리고 내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된 후 시의 결정으로 그 화장실 입구를 수년간 막아버린 콘크리트 블록 벽.
그건 내 이야기이고, 그 언론 보도이며, 성에 대한 억압적 정책이 — 내 의지와 무관하게 — 그 커뮤니티 만남의 장소를 닫아버리게 만들었다. 근거 없는 죄책감이었음에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그 이전에 남자에 대한 욕망을 가졌던 기억이 없다. 다른 이들처럼, 나는 호모이기 전에 호모로 인식당했다. 그 순간, 그 길은 피하고 싶었다. 죽음과 연결지었으니까. 열 살 무렵,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동성애자 남자가 된다는 건 에이즈에 걸려 죽는다는 것이라고. 이것이 내 정신이 세운 원초적 등식이었다. 호모 = 에이즈 = 죽음.
What a fucked up world we live in!
2000년 이전 남성 동성애에 대한 미디어 표상이 그 희화적이고 비극적인 이미지를 전달한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 근원에는 더 오래되고 개인적인 상처가 있다.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나는 대부부의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무지하고 개인적 애도에 잠긴 그녀는 내게서 죽은 아들을 보았다. 매주 수요일, 수년에 걸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아이와 함께 했던 것들을 내게 시키거나 그것에 대한 말을 건넸다. 그녀는 그가 암으로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에이즈였다. 나는 그가 죽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알지 못했다. 1993년의 일이었다. 내가 여덟 살이었을 때, 부모님이 학교에서 데리러 와 필립의 죽음을 알렸다. 아마도 그 갑작스러운 이별의 충격과, 마지막 몇 달을 곁에서 돌본 유일한 사람들이었다는 고립감 속에서, 부모님은 그의 죽음과 동성애, 그리고 HIV 양성 사실을 동시에 내게 알렸다. 가족은 수년간 대부부의 어머니 앞에서 이 비밀을 내가 지키게 했다.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나를 이 침묵의 거짓말의 실행자로 만들면서. 나의 원죄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성적 일탈이 내가 자란 이성애가부장제 구조를 위협할 수 있었고, 나는 침묵했다. 그들은 그 애도 중인 어머니를 보호하려 한 게 아니었다. 최근 대화에서 그들 스스로도 인정했다. 그녀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건 무엇보다 지배적인 섹슈얼리티의 현상 유지였다.
부모님은 내가 필립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게 했다. 애도를 경험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했지만, 가족의 비밀을 짊어지기에는 충분히 나이 들었다. 이유란 때로 우리를 벗어난다.
아마도 관 속의 쿠키 뮬러 사진이, 부모님이 내게 거부한 것을 내게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오랫동안 죽음과 애도로부터 비켜 있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나는 깨닫는다. 내가 보호받은 게 아니라, 내가 필요로 했던 방식으로 그것을 살아낼 수 없도록 막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침묵이 내 애도를 묻어버렸다. 이제 침묵은 적이다. 그것이 신체적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건, 내가 여전히 그 침묵의 보증인이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부의 어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거의 3분의 1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방식 그대로, 거짓 속에서. 그게 나를 슬프게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이다.
1982년 이후 에이즈는 프랑스에서 약 4만 명의 죽음을 불러왔다. 그 상당수가 우리 커뮤니티 출신이었다. 대부분은 잊혀졌다. 그중 일부는 우리의 삶이 자신들의 것보다 더 나아지도록 수년간 싸웠다.
그들의 이름이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져간다. 매년 우리의 트랜스 형제자매들은 TDoR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에 살해된 트랜스들을 추모한다.
우리는 우리의 죽은 이들을 어둠 속에 두기를 택한다.
우리, 호모들은 우리의 죽은 이들, 상처 입은 이들, 빈곤한 이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들을 침묵시키는 데 동참한다.
여전히, 끊임없이, 납처럼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하지만 거의 40년 전, Act Up-파리는 이미 우리에게 말했다. 아주 단순하게,
침묵 = 죽음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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