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클라우 사상의 존재론과 언어학
현우식, 『근본 없는 민주주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읽자』(빨간소금, 2026) 논평문
조지훈(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라클라우의 반본질주의 사상에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저자는 “근본 없는 민주주의”를 모색하기 위한 이론적 방법론으로 라클라우가 제기한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의 구분을 부각한다. 이러한 구분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이라는 본질주의적 사상과의 대결 속에서 라클라우를 자리매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라클라우는 사회를 규정하는 최종 심급의 결정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는 어떠한 내재적 원리에 따라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자기 동일적 실체’가 아니라, “헤게모니의 실천 결과로 구성되는 담론적 총체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근본 없는 민주주의』, 171쪽). 저자가 라클라우를 통해 주장하는 “근본 없음”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 질서를 구성하는 본질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가 오로지 일시적인 담론적 구성물로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173쪽).
이처럼 저자가 3부에서 주목하는 라클라우의 “존재론적 차원”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본질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회를 결정하는 어떠한 심급이나 원리에도 의존하지 않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담론적 구성물로 사회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라클라우의 이론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변이 담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라클라우는 존재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론적 개입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라클라우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함축된 본질주의 사상과 대결하는 이유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해 하이데거를 수용하여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을 구분하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라클라우가 존재론적 차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정치를 인식론과 지식의 문제로 환원해 온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참된 인식과 그릇된 인식을 구분하려는 규범적 인식론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즉 참과 거짓의 구분에 기초한 인식론을 극복하고, 존재가 어떠한 확고한 토대 위에 놓여 있지 않은 채 언제나 열림과 가능성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토대 없음’의 존재론,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도입했다는 것이다(109쪽).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토대 없음’의 존재론을 반본질주의적 사회 이론으로 확장한 것이 라클라우의 기획이다.
문제는 라클라우의 기획처럼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부터 반본질주의적 사회 이론으로의 이행이 매끄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수행한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에 따른 이른바 ‘토대 없음의 존재론’에는 구성주의적 사회 이론의 토대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운 규정적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존재자, 특히 신이나 어떤 실체와 같은 존재자로 규정될 수 없으며, 존재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이때 존재는 ‘개시성(Erschlossenheit)’의 성격을 띠며, 무언가가 ‘열려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학적 의미를 지닌다.
존재자는 그 존재 양상에 따라 구분되는데, 하이데거는 이를 ‘현존재(Dasein)적 존재자’와 ‘비현존재적 존재자’로 나눈다. 비현존재적 존재자는 다시 ‘도구적 존재자(das Zuhandene)’와 ‘사물적 존재자(das Vorhandene)’로 구분되며, 현존재적 존재자는 인간을 가리킨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비현존재적 존재자, 특히 도구적 존재자는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 반면 ‘현존재의 존재’는 본래적인 측면에서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로 규정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 양태를 죽음을 망각하고 회피하며 일상성에 빠져 있는 상태로 파악한다. 이와 달리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는 죽음을 망각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향해 미리 달려가 보는 ‘결정’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고, 역설적으로 본래적인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즉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여 존재론을 전개할 때, 그 핵심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현존재의 존재를 규명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존재자가 ‘근본 없이’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하이데거 존재론의 핵심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라클라우는 시간과 죽음으로 규정되는 현존재에 입각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있는가? 담론적 구성물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는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현존재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이데거에게 집합적인 현존재 개념이 가능하지는 않겠으나,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가 ‘함께 있음(Mitsein)’을 통해 사회를 구성한다면, 이때 본래성의 문제는 어쨌든 죽음의 문제와 떼어 놓을 수 없다. 더욱이 하이데거가 ‘본래적인 것’을 존재 일반이 아닌 현존재의 존재로, 그중에서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라클라우식의 ‘근본 없는’ 사회 이론의 토대로 삼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부분적으로 차용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현존재의 존재’에 내포된 시간성에 관한 논의를 분리할 수 있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면, 이는 편의적인 도입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토론자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규범적 인식론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규범적’ 성격을 띤다. 즉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라클라우의 반본질주의적 사회 이론을 뒷받침하는 여러 근거 가운데 하나로 활용되기에는 충분히 반본질주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난점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라클라우의 사상을 소개하기 위해 굳이 여러 전거 가운데 하이데거적 용법을 끌어와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을 구분한 이유가 궁금하다. 라클라우 사상에서 존재론적 차원을 부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결절점으로 기능하기 위한 ‘비어 있는 기표’는 가능한가?
저자에 따르면 라클라우의 반본질주의 사상은 포스트구조주의 언어학을 하나의 준거로 삼고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 언어학이 전제하는 기표와 기의의 안정적인 결합을 해체한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의 절합으로 규정되는 기호는 폐쇄된 체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며 열려 있는 체계’로 규정된다(113쪽). 이를 바탕으로 라캉은 유동하는 기표들을 고정하는 ‘누빔점’을 고안하고, 라클라우는 이로부터 수많은 헤게모니적 실천을 접합하는 ‘결절점’을 도출한다(124쪽).
이처럼 헤게모니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기표가 결절점의 역할을 할 때, 이 기표는 “기의와의 연결이 매우 느슨한 상태, 다시 말해 의미가 경향적으로 비어 있는 기표”여야 한다. 이러한 기표 개념이 바로 저자가 정의하는 라클라우의 ‘비어 있는 기표’이다(128쪽). 문제는 이처럼 ‘비어 있는’ 기표가 개념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며,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이 양자를 필연적으로 절합하는 어떠한 심급도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구조주의 언어학이 기표와 기의의 결합 양태로서 기호의 ‘안정적 질서’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기호의 변화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변화보다 안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언어가 기호의 자의적인 결합에도 불구하고 그때그때 변화하기보다는 고정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단지 기호의 변화 가능성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할 뿐이다
따라서 토론자가 보기에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다루는 기표는 특정한 기의와 반드시 결합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심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비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저자가 ‘비어 있는 기표’를 설명하면서 ‘경향적’이라는 유보 조항을 덧붙인 점을 고려하면, 모든 기표는 경향적으로 ‘비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비어 있는 기표가 이념형으로서 이론적으로 구성된 기표라고 하더라도, 기표 자체가 이미 이론적 구성물이라는 점에서 양자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소쉬르에게 기표가 물리적 세계에서 포착되는 소리, 즉 음성학적 개념과 구분되는 동시에 청자에게 유의미하게 식별되는 소리, 즉 음운론적 개념으로 정의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기표는 그 자체로 이론적인 구성물이다. 이를 더욱 추상화한 옐름슬레우의 표현과 내용의 구분은 물론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기표와 구분되는 ‘비어 있는 기표’가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라클라우가 ‘비어 있는 기표’를 통해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채 떠다니는 다양한 요구의 기표들을 하나로 포괄하는 결절점을 설명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결절점의 기능을 하는 기표가 단지 비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동의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헤게모니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비어 있는 기표’로서 결절점의 역할을 한다면, 이는 단지 민주주의라는 기표에 어떠한 기의도 결합하지 않은 채 텅 비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기표에 수많은 새로운 기의가 결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화는 언제나 기존에 민주주의라는 기표에 결합했던 기의를 참조하여 그것을 따르거나 변형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에 새로운 기의들이 단순히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남아 있는 기의에 새로운 기의들이 보충되는 방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토론자는 민주주의라는 기표에 수많은 기의가 결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결합이 어떠한 조건도 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형성되어 온 기호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민주주의에 완전히 뜻밖의 의미가 형성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텅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수행적 실천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 결과 아무리 탈맥락화된 새로운 용법으로 보일지라도, 그러한 용법은 기존의 맥락과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맥락에 저항하는 지점을 반드시 포함한다.
물론 모든 기표는 기의와 분리되려는 경향이 있으며, 특정한 헤게모니적 실천의 국면에서 부각되는 기표를 ‘비어 있는 기표’로 명명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어 있음’이라는 수식 자체가 결절점으로서의 기표를 오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라는 기표가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기의와도 결합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기표에 결합한 기존의 기의를 초과하여 새로운 기의가 보충되는 논리를 파악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비어 있는 기표’에 요구 사항들이 집결되는 현상만을 설명할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기표’에 기존의 의미와 다른 의미가 부가되어 기호의 용법이 달라지는 이유를 파악하고 이에 개입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토론자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생각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구들을 접합하는 결절점으로서 라클라우의 ‘비어 있는 기표’가 지니는 이론적 강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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