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클라우와 세 가지 단위: 시간, 요구, 형식
현우식, 『근본 없는 민주주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읽자』 (빨간소금, 2026) 논평문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시간
라클라우 사상에 역사 철학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라클라우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라클라우의 정치적 존재론이 펼치는 정치적 존재에 관한 논의에 시간적 차원이 있다면, 그 시간은 ‘지속(duration)’인가 ‘순간(instant)’인가? 어쩌면 라클라우의 사상에는 시간이 부재하는 것은 아닐까? 오직 공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헤게모니가 접합하고 탈구하는 공간, 적대하고 경합하는 장(場), 정치적 주체화의 장소만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시간의 차원이 있다고 한다면, 헤게모니 실천의 장소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주체화의 ‘순간’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라클라우는 일종의 ‘카이로스’적 순간, 달리 말해, ‘지금 여기’라는 찰나의 순간에 어떻게 헤게모니가 결정되는가를 이론화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 결정의 순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불안정해진 등가 논리를 무너뜨리고, 차이 논리에 따라서 새로운 의미의 관계망, 즉 담론이 재구성된다고 보았던 것은 아닐까? 라클라우가 말하는 민주주의에서 정치 전략과 그에 입각한 정치적 실천은 바로 그 순간에 개입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전략과 실천은 주어진 이념, 고정된 정체성, 완고한 토대에 따라 도출되는 게 아니라고 비판하면서, ‘공위기(Interregnum)’라는 특정 순간에 담론 (재)구성을 향한 정치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기를 촉구했던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라클라우에게 역사란 정치적 주체화의 순간들, 그 불연속적인 순간들의 집합이지 않나? 아니면, 그렇게 하나의 집합으로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다종다기해서, 오직 낱낱의 순간들 그 자체만이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크로노스’적 시간(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화살)은 라클라우가 그리는 정치의 지평에는 부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집단 정체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집단 정체성이 만들어지면서 정치 자체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는 말에 담겨 있는 시간의 이미지는 중단 없이 이어지는 재구성의 흐름이라기보다는, 다른 순간들과는 단절되어 있는 각각의 순간이 찰나적으로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미지, 곧 오직 단 한 번 탄생했다가 소멸하는 개시(開始)의 순간이 아닐까? 이게 진정한 정치의 순간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근본 없는 정치의 근본은 바로 이 카이로스적 순간에서 행하는 헤게모니 실천이 아닐까? 물론 그 실천의 결과는 ‘임시적’ 봉합, ‘잠정적’ 결정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하여 현우식은 기존의 상징질서와 제도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 배제되어 온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응답하는 것을 급진 정치의 과제로 제시한다(349). 그리고 정치적 행위를 그러한 주변적 주체들이 상징질서의 균열을 매개로 정치적 공간에 출현하는 사건으로 정의한다(350). 그런 점에서 급진 정치의 과제는 ‘근본 없는 것들’이 정치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데 있다고 본다(350).
그러나 존재는 정말 시간과 무관하게 개시될 수 있나? 지속하는 시간 없이, 존재물(entity)이 존재할 수 있나? 근대적 관념에 대한 라클라우의 비판을, ‘존재물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면서 빈 용기로서의 공간 안에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는 이미지’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매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종의 깜빡이는 점으로 존재물을 이해하게 되면, 존재물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강도(intensity)의 차이를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기존의 존재물은 소멸하고 새로운 존재물이 발생하는 것을 인정하는 일과 발생 이후에 그 존재물이 일정 시간 동안 지속하며 일정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다른 문제다. 전자를 긍정한다고 해서, 후자를 반드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언제나 존재물은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서 발생한다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현우식은 13장 <헤게모니 실천으로서의 사회학>에서 고전사회학 패러다임의 한계를 짚으면서, 라클라우 사상에는 현대 사회학의 일반 경향과 구별되는 전체로서의 사회, 혹은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독창적인 관점이 있다고 평가한다. 현우식에 따르면, 라클라우는 사회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며 명확히 정의될 수 없다고 보면서도, 사회를 일정한 질서를 구성하는 하나의 전체 구조로 파악한다. 라클라우에게 사회는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실체적 총체성) 또는 총체성의 내재적 논리나 본질로부터 도출되는 자기 규정적 총체성(170)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담론으로 총체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288-289). 그래서 라클라우는 총체성이란 게 있다면, 헤게모니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담론적 총체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294).
이 지점에서 현우식은 담론적 총체성 자체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담론적 총체성에 관한 ‘인식과 실천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는 푸코처럼 사회를 다양한 실천과 담론으로 이해하든, 루만처럼 상호 자율적인 기능 체계들로 이해하든, 둘 다 사회적 총체성 자체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가능성, 즉 회의주의의 위험이 있다고 본다. 그에 반해, 라클라우가 갖는 강점은 사회의 총체성을 인정하는 대신, 그것을 끊임없이 구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럼으로써 총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293-294). 이러한 입장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정치에 대한 사회의 우위’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정치의 우위’라는 테제(171), ‘사회 불가능성’이라는 테제(170)다.
현우식이 멈춘 지점과 관련해, 논평자가 흥미롭게 본 대목은 10장 <라클라우의 인민적 주체성 이론>이다. 여기서 핵심 논지는 라클라우에게 포퓰리즘이란 집단 정체성, 더 구체적으로는 인민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일반 논리임(정치적인 것이 작동하는 일반 논리로서의 포퓰리즘 이성(297))을 밝히는 것이다. 대중심리학, 사회심리학의 등장과 발전을 다루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의 문제를 제기한다.
라클라우가 이 동일시를 등가 논리와 차이 논리로 이론화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rade)와 윌리엄 맥두걸(Willam Mcdougall)이 등장한다. 이들은 개인과 집단의 이원론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 중 하나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더 논의하지 않고, 타르트와 맥도걸과 유사하게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시도이자 라클라우 사상에서 더 중요한 배경으로 설정된, 프로이트의 집단심리학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본 논평자는 이 두 학자가 제기한 개인과 집단으로 이원화될 수 없는, 조직화의 스펙트럼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맥두걸이 말하는 저강도로 조직된 군중과 고강도로 조직된 집단, 타르드가 말하는 내적 조직화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는 현대 사회의 집단들은 일시적인 것과 지속하는 것의 문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두 학자는 ‘동일시’보다는 ‘강도’의 문제를 제기한다. 시간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지속’의 문제를 제기한다(237-238).
지속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는 서로 다른 강도를 지닌 다양한 결합체(nexus)들로 이뤄져 있다. 이 결합체들은 일정한 시간의 폭과 공간의 너비를 갖고서, 생겨나고 움직이고 사라진다. 그리고 결합의 강도에 따라 층위가 나뉜다. 이 스펙트럼에 비춰볼 때, 라클라우는 어쩌면 이원론의 구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정불변하는 구조와 무한히 유동하는 주체와 같은 이항 대립 속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강도를 띤 사회적 단위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한상원 회원은 논평문의 두 번째 질문에서 ‘우리가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객관적 실재성’, ‘그 관계적 망의 강제력과 포섭’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논평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그와 유사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사회나 구조라는 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 앞서, 그보다는 낮은 강도를 가진 또는 그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특수한 차원에 놓인 집단이나 조직, 제도나 문화 등을 라클라우는 어떻게 보았는지, 아니면 라클라우 연구자인 현우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논평자가 보기에, 라클라우 사상은 지속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기울지 않는 것 같다. 그건 라클라우에게 진정한 정치의 시간은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라클라우가 중시하는 정체성은 고정불변하거나 ‘영속’하지는 않지만, ‘지속’한다. 거칠게 말해, 한 사람의 정체성조차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시간적 폭과 여러 경험의 방울들이 모여 공간적 너비를 갖고 생겨나기 때문이다. 한번 생긴 정체성은 쉬이 변화하지 않는다. 각기 나름대로 변화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머리로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행동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여러 경험으로 체화된 습관 때문이다. 물론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하지만 기존 제도, 조직, 문화, 정체성 등 지속하는 것이 소멸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그 기간은 때로는 짧지만 때로는 한 세대가 넘을 정도로 길기도 하다. 이러한 지속성은 한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집단이나 조직, 제도나 문화, 나아가 사회와 담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나?
2. 요구
사회질서의 구성에서 (바디우 식으로 수학의 논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어학의 논리가 정말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가?(201) 근본 없는 민주주의에서 언어와 형식이 숨겨진 근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사회를 오직 의미의 관계망, 즉 담론구성체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탓에 라클라우가 말하는 정치는 수사(학)적 문제로 제한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물론 개별적인 정체성과 각자의 여러 요구를 하나의 인민적 주체성으로 대표하도록 조직하는 건 급진 정치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라클라우를 따르면서도, 정치적 존재들이 갖는 강도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정치를 어떻게 다시 사유할 수 있는가? 사회적 요구들이 어떻게 재현되고 어떤 의미 관계 속에 배치되는지, 우리가 지향하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대표되도록 하려면 이 과정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와 같은 물음만을 정치적 과제로 삼게 될 위험을 경계할 수 있을까?
현우식은 “사회적 관계가 등가 논리와 차이 논리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며, 특정한 방식의 사회적 적대도 이러한 두 논리의 상호작호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209)고 말한다. 여기서 현우식은 이 두 논리의 ‘긴장(충돌과 교차)’에 주목한다. 그런데 시간의 측면에서 보면, 이 긴장이 작동하는 변증법적 ‘과정(process)’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현우식도 ‘민주적 요구(democratic demand)가 인민적 요구(popular demand)로’(240), 즉 개별적인 사회적 요구가 보편적인 정치적 요구로(332-333) 바뀌는 전체 과정은 ‘순환 구조’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적 요구가 정치화되었다가 정치적 요구가 다시 사회화되는 ‘순환(circulation)’을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이론이 개입해야 할 핵심 지점은 사회적 요구가 구성되고 정치적 요구로 바뀌는 접합의 순간이라고 말한다(334). 여러 사회적 요구가 등가 논리를 통해 접합되어 하나의 정치적 주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개입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요구가 인민적 요구인데, 이는 기존의 사회적 정체성과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정치적 정체성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인민은 이 새로운 정치적(이고 집합적인) 정체성의 이름이다(240-241). 누가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될 것인가를 두고서 벌이는 헤게모니 투쟁에 개입하는 게 중요한 실천 과제로 제기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순환의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는 점이다. 여러 요구가 모여 하나의 대표성을 띠면서 접합되는 과정은 찰나에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라클라우, 그리고 현우식 또한 찰나에 단 한 번 개입으로 헤게모니 실천이 완료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람시의 진지전을 강조하면서, 부단한 실천을 촉구하는 것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심지어 접합은 매끄럽지 않으며, 지체되거나 무산되기도 한다. 제도, 조직, 문화, 정체성 등이 지닌 지속성이 헤게모니 실천을 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다르게 표현하면, 헤게모니 실천을 상대적으로 제약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라클라우는 이 제약을 너무 가볍게 보았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개입하려는 실천의 의지를 강조하려던 것일까? 그의 사유에서는 언젠가 등가 사슬이 약해질 때가, 즉 공위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가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언제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 차이 논리가 작동하는 순간은 우리도 모르게 갑작스럽게 도래하는 것인가?
현우식에 따르면, 일반적인 사회·정치 이론에서는 흔히 개인이나 집단을 최소 단위로 전제하는 데, 개인이나 집단은 이미 다수의 이질적 요소가 특정한 방식으로 접합되어 구성된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라클라우가 이론화의 최소 단위, 즉 인민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요구를 설정한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240). 개인이나 집단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나 특성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개인과 집단에 앞서 또는 무관하게 요구가 존재하는가? 요구는 이미 어딘가에 주어져 있는가? 라캉은 왜 우리가 ‘충만한 사회’라는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하는지를 설명한다. 라클라우는 라캉의 영향을 받아, “주체의 무의식적 욕망의 구조가 정치적 주체 형성의 구조와 비슷한 형식을 띤다(207-208)”고 주장한다. “욕망이 결핍을 매개로 구성되듯이, 헤게모니 또한 사회적 결핍, 즉 ‘충만한 사회’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기획으로 작동한다. 이때 비어 있는 기표는 이질적인 요구들을 연결하는 결절점으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충만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이 만들어진다(208).” 아마도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테마, 곧 주체의 욕망과 그 욕망을 결코 충족할 수 없다는 결핍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요구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현우식에 따르면, “라클라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충족되지 않는 요구들 사이의 접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헤게모니 실천이라고 강조한다(247).”
그러나 요구 또한 구성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요구는 그 자체로 떠다니지 않는다. 요구는 언제나 요구하는 몸들을 요구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요구한다. 그 개인이나 집단은 특정 제도와 문화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 제도와 문화를 구성한다. 이 과정 속에서 요구가 생겨난다. 더욱이 라클라우는 요구의 내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게 아닐까? 자신도 모르게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형식과 같은 걸로 취급해버린 것은 아닐까? 마치 텅 빈 기표처럼 말이다.
달리 말해, 정말로 “계열체(paradigm)와 통합체(syntagm)의 논리가 언어적 차원을 넘어 사회 현실의 모든 차원에 적용(201)”될 수 있는가? “라클라우는 엄격한 통사 규칙에 따라 구조화되는 통합체적 축에 비해, 규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작동하는 계열체 축을 따라 전개되는 의미작용에 주목한다. 언어 체계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기표와 기의 사이의 결합이 임의적이고 불안정하다면, 의미 작용은 결국 어떤 대상을 임의로 명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미 작용은 필연적으로 수사학의 논리를 전제한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맥락에서 수사학을 사회적 의미의 형성과 헤게모니 실천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파악한다(202-203).” 라클라우는 『포퓰리즘 이성』(이승원 옮김, 2026, 빨간소금)에서 “수사학적인 메커니즘이 사회 세계의 해부학(anatomy)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마치 물처럼 자신을 담을 용기에 따라 모양이 바뀌거나, 언제든 쉽게 비워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요구의 측면에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요구하는 내용과 요구를 담아내는 형식의 관계에는 상당한 마찰력이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보다 더 끈적이는 관계이지 않을까?
이와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 건, 본 논평자가 요구가 서로 다른 몸들, 서로 다른 강도를 지니고 층화된 몸들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구는 분명 헤게모니 실천의 대상이자 출발점이다. 그러나 자칫 요구를 납작하게 봐서는 안 된다. 언제나 요구는 서로 다른 내용과 서로 다른 수준을 가진 요구들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3. 형식
앞서 언급했듯이, 라클라우는 “민주주의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정치적인 것이 작동하는 일반 논리”를 이론화하려고 했다. 그는 이를 ‘포퓰리즘 이성’이라고 불렀다. 이를 이론화함으로써, 라클라우는 불확정성과 유동성이 증대한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원리, 근대 민주주의 정치에 내재한 고유한 인민적 정체성 형성의 논리를 밝히고자 했다. 현우식에 따르면, 그가 정립한 “인민적 정체성 이론은 인민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접합 양식에 관한 이론”이다. “여기서 접합 양식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내용에 종속되지 않고 형식적 구조로 제시된다. 이 형식은 ‘명명하기’라는 행위를 통해 사후적으로 특정한 내용으로 채워진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집합적 주체는 실체적 내용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구성된다.
따라서 어떤 정치 운동이 포퓰리즘적 성격을 지니는지는 그것이 담고 있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내용이 아니라, 요구들을 통합하고 ‘인민’을 구성하는 접합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인민적 주체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구성의 형식적 논리이며(245)”, “정치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형식적 구조(247)”다. 이게 라클라우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이 접근은 포퓰리즘이 특정한 정치적 위기나 민주주의의 결핍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예외 현상이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 정치 형식임을 뜻한다(246).”
현우식의 설명에 따르면, 라클라우는 근본 없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어 있는 장소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헤게모니 투쟁을 (만약 근본 조건이 있다면) ‘근본 조건’으로 본다. 어떤 집단이 ‘우리’로 호명되고 형성되는 실천 그 자체가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이다. 이 관점에서 정치는 고정된 본질이나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다. 언제나 불확정성과 유동성 속에서 다양한 요구와 의미를 접합하고 재구성하는 창조 행위다.
그가 라클라우의 입장, 곧 민주주의를 보편적 정치 형식으로 이해하는 게 이론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적합하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례에 관한 분석에서 현우식은 “자유민주주의가 다양한 정치 기획에 따라 재해석되고 전략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떠다니는 기표가 되었다”(314)고 본다. 신자유주의를 계기로 촉발된 국내외의 여러 변화를 돌아볼 때,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 특정한 정치적 내용을 안정적으로 지시하는 기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력들이 경쟁적으로 점유하려는 보편적 형식으로 전환되었다”(315)고 본다. 현우식은 이를 ‘자유민주주의의 형식화’라고 평가한다(315).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좌파나 우파 어느 한쪽의 고유한 의미를 담지 않으며, 다양한 정치 기획에 열려 있는 형식적 틀로 기능한다(315)”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다. 현우식은 형식의 유사성이 내용의 동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좌파 포퓰리즘이냐 우파 포퓰리즘이냐, 반동적 포퓰리즘이냐 민주적 포퓰리즘이냐, 이를 가르는 것은 포퓰리즘이라는 형식 그 자체가 아니다. 그 형식이 접합되는 가치와 규범, 그리고 민주주의 질서와 맺는 관계에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라클라우 사상 내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거론된 적이 거의 없는 단어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바로 가치, 규범, 질서 등과 같이, 형식과는 구분되어 내용의 차원에 속하는 단어들이다. ‘배제와 혐오의 서사냐’, ‘민주주의 확대와 회복의 서샤냐’ 그중 무엇을 정치의 목표로 삼을 것이냐. 이와 같은 질문은 라클라우 사상 내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가?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것인가?
자유민주주의 또한 텅 빈 기표라고 한다면, 거기에 채울 내용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자유민주주의라는 형식에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라는 문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어떻게 내용이 채워지는지’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내용 중 어떤 내용을 선택해서 채울 것인지’다.
현우식은 포퓰리즘이라는 하나의 형식 안에 서로 다른 정치적 방향과 규범적 내용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본다. 헤게모니 실천의 과정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포퓰리즘 형식은 양면적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어떤 (돌출하는 또는 주어져 있는) 요구들이(을) 어떤 등가 사슬로 접합되는가(할 것인가), 그리고 그 접합 과정에서 어떤 정치적 경계가 설정되며(하여), 어떤 방식으로 ‘국민’이 구성되는가(할 것인가)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여전히 개별적 요구를 집단적 요구로 묶어내는 형식 논리와 그 작동을 가리킬 뿐이다. 논평자가 보기에, 라클라우 사상은 전자를 이론화하였지만, 후자는 실천의 영역에 남겨두었다. 어떤 요구가 인민의 얼굴로 대표될 것인가라는 내용을 결정하는 일은 오직 좌파 정치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남겨진다는 말이다. 정치적 지향 자체도 수행적으로 구성되는 결과로 보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되물어보자. 정말로 헤게모니 실천이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의 문제는 라클라우 사상에서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가? 그는 이념의 폐쇄성을 개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것인가? 이념적 지향을 제시하는 순간, 자신이 벗어나고자 했던 전통 마르크스주의나 노동자 계급 정치와 같은 길로 빠지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일까? 오히려 이 무한한(즉 한정되지 않은) 개방성 때문에, 끊임없는 재구성과 갱신을 향한 실천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위험은 없는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나아가도록 해줄 나침반, 일종의 준거(準據)는 정말로 부재하는가?
이 물음과 관련해, 라클라우, 버틀러, 지젝이 보편성에 관해 나눈 논쟁은 흥미로운 참고점이 될 수 있다. 본 논평자는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박미선·박대진 옮김, 2009, 도서출판b)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가 나눈 대화에 주목한다.
라클라우는 보편성 담론을 역사화하여, “역사적 실천의 산물로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정치적 형식으로 이해한다(192).” “보편성은 고정된 실체나 보편적 본질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내용들이 반복해서 채워지는 하나의 형식으로 기능했다고 주장한다. 보편성은 특정한 내용에 의해 본질화될 수 없으며, 비어있지만 동시에 투쟁의 장이 되는 정치의 장소로 존재한다(192).” “라클라우에게 보편성은 개념적으로 고정되거나 완전히 포착될 수 없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범주다(193).” 따라서 라클라우의 보편성 개념은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틈이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히 메워질 수 없다는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195).” 이를 통해 라클라우는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틈을 변증법적으로 해소하려는 모든 헤겔적 논리, 즉 모순의 지양을 통해 통일성을 달성하려는 사유를 거부한다. 그 틈을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구성적 틈으로 간주하여, 보편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가능성을 사유한다.
그에 반해, 버틀러는 “특수성들 자체가 이미 보편성을 내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98).” “모든 보편적 주장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서 제기(198)”된다. 라클라우의 용어로 바꿔 말하면, 개별적인 요구들에는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보편적인 요구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적 요구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든 언제나 정치적으로 구성되어 인민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요구에 연루되어 있다. “모든 보편적 주장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서 제기되며, 그로 인해 애초부터 특수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핵심 과제는 다수의 경쟁하는 보편성들을 번역(translation)하는 과정, 즉 문화적 맥락에 맞게 적합하게 조절하는 실천이다. 그는 문화적 번역 없이 제기되는 보편성의 주장이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로 악용될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198).” “버틀러는 라클라우가 보편성을 ‘비어 있는 장소’로 개념화하고, 이를 문화적 맥락을 초월한 중립의 장소로 설정하는 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198-199).”
이러한 버틀러의 비판에 대해, 현우식은 헤겔과 라캉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서 비롯되는 차이라고 설명한다. “버틀러는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 불가분성을 강조(200)”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우식은 이 차이를 확인하는 데 그친다. 그런 다음, 세 사상 모두 보편성을 반본질주의적으로 이론화했다며 공통점을 지적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논평자가 보기에, 이들을 반본질주의로 쉽게 묶어버리는 것은 이들 간의 논쟁에서 드러난 쟁점들을 회피하는 일에 불과하다.
다시 묻자. 만약 버틀러라면 인민적 요구의 헤게모니적 구성 과정을 어떻게 다르게 얘기할까? 한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요구를 제기할 때, 그 요구는 언제나 보편의 이름으로 제기된다. 그러면서도 보편적 요구로 얘기되는 그 요구는 동시에 언제나 특수한 위치를 점한다. 그건 개별 요구가 아무런 배경이나 조건 없이, 아무 준거 없이 제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요구하는 몸들은 그 몸에 각인된 경험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요구하는 몸들은 자기 몸보다 더 강한 강도를 가지며, 더 길게 지속하는 결합체(집단, 조직, 제도, 구조, 문화, 사회 등)에 속해 있다. 그럴 때, 요구는 헤게모니 투쟁의 공간이라는 텅 빈 장소에 툭 던져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만큼, 재구성을 제약하는 조건들에 대해서도 더 사유해야 하지 않나?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감수하고서 말한다면, 경쟁하는 보편성들, 이를테면 다수의 가치나 규범 중 우리는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지 않나. (무조건 따라야 할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최소한 실천하고 논쟁하면서 참고할 이념, 이상, 유토피아, 전망의 존재를 부정할 순 없는 게 아닌가? 라클라우 사상에 그 존재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나?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에서 라클라우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검토하면서, 해방의 조건에 대해 논의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모순의 총체성을 특정 계급의 입장에서 포착될 수 있어야 한다(197)”고 보았다. 이 조건은 노동자 계급과 같은 ‘보편 계급’이라는 객관적 범주의 존재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역사적 행위자가 자신들의 부분적 해방을 사회 전체의 보편적 해방과 연결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과 역량에 달려 있다(197).”
그런데 조금 강하게 말해, 라클라우는 이 능력과 역량을 수사학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해방의 역량은 오직 사회적 요구의 언어들이 엮여있는 의미의 관계망(곧 담론)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달려있나? 이걸 (은연 중에) 라클라우는 정치의 근본을 언어의 세계에, 형식 논리의 차원에, 담론 투쟁의 영역에 가둬버리는 것은 아닐까?
앞서 언급했듯이, 현우식은 “급진 정치의 핵심 과제를 ‘근본 없는 것들’이 정치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데 있다(350)”고 했다. 왜 ‘번역’이라는 라클라우에게는 낯선 단어를 사용하였는가? 번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현우식은 버틀러를 염두에 둔 것인가? 아니면, 개별 요구가 보편 요구로 전환되는 헤게모니 실천을 번역이라고 달리 표현한 것인가? 각자의 얼굴을 대표할 인민의 얼굴을 그리는 일에 번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가?
현우식은 오늘날 많은 사회운동은 고정된 조직이나 일관된 이념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 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무정형의 주체들이 정치의 장에 출현하는 이러한 사례들은 정치가 본질이나 필연적 토대가 아니라 우연한 접합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351)”가 말한다. 그래서 현우식은 다음과 같이 급진 정치의 과제와 방향을 정식화한다. 이 정식은 한국 정치에서 작동해 온 이념적 이분법과 정당 중심의 대표성 모델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다.
“오늘날 급진 정치의 과제는 정교한 기획을 앞서 확보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 정치 구조의 바깥에서 제기되는 이름 없는 요구들을 정치의 장으로 호출하고 정치 언어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있다. 근본 없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민주주의란 고정된 원칙의 체계가 아니라 언제나 열려 있고 재구성할 수 있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급진 정치의 핵심 과제는 근본 없는 것들의 요구를 접합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의 장을 여는 데 있다. 이는 특정 정치 세력의 급진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더욱 민주화하려는 실천이다. 기존 질서에서 배제된 근본 없는 것들의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열린 정치적 공간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근본 없는 민주주의가 제시하는 급진 정치의 방향이다(351).”
그러나 무엇이 급진 정치가 응답해야 할 근본 없는 목소리인가? 우선, 현우식은 “주변화된 요구들(350)”을 언급한다. 이 요구들은 어디로부터 주변화된 것인가? 이 요구들을 주변화하는 중심은 무엇인가? 다음으로, 어떤 요구에 응답하고, 어떤 요구에 응답하지 않을 것인가? 실제로 우리는 이미 모든 목소리에 응답하지는 않는다. 그 목소리들은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를 형식으로만 규정해버리면, 급진 정치가 수행하는 번역을 납작하게 이해할 위험이 있다. 현우식은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는 정치라는 (텅 빈) 장소에 무정형의 주체들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정말 그 주체들은 무정형인가? 이미 어떤 형태와 특성을 갖고 있지 않나? 정말로 그들은 아무 조건이나 토대 없이 출현하는가? 헤게모니 실천의 순간은 우연한 계기로 갑작스럽게 도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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