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클라우 급진민주주의의 존재적 차원
현우식, 『근본 없는 민주주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읽자』 (빨간소금, 2026) 논평문
한상원(서교인문사회연구실)
현우식 선생님의 신간 『근본없는 민주주의』는 라클라우에 대한 탁월한 입문서로서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책이다. 특히 현우식 선생님을 칭찬하고 싶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책의 서술이 라클라우에 대한 쉽고 친절한 입문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라클라우 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수많은 인문-사회과학 담론들에 관해서도 매우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어, 복잡하고 난해한 라클라우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저자는 알튀세르와 그람시의 고전적인 이데올로기/헤게모니 이론,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비트겐슈타인과 크립키의 분석철학, 소쉬르의 언어학과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데리다와 라캉의 담론 분석, 돕과 스위지의 자본주의 이행논쟁, 밀리밴드와 풀란차스의 국가론 논쟁 등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서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설명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라클라우에 대한 입문서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현대정치철학’의 입문서 역할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이 책은 라클라우의 한국적 수용맥락을 다루면서, 사회운동과 관련된 담론장의 관점에서 라클라우를 분석하고 있으며, 오늘날 민주주의의 담론들과 라클라우가 맺는 현실적 관련들에 관해서도 분석하고 있어, 라클라우를 현실과 치열하게 대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장점들은 수도 없이 열거할 수 있지만, 본격적인 토론을 위해서 나는 저자 현우식 선생님에게 몇 가지 비판적인 질문들을 드리고자 한다.
먼저 라클라우 사유의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라클라우를 대결시켜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첫째 질문은 마르크스의 ‘자연주의적 존재론’이라는 비판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라클라우가 1980년대에 마르크스의 문제설정방식과 단절하는 지점들을 설명하면서, 라클라우가 마르크스의 ‘자연주의 존재론’을 넘어서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연주의적 존재론은 사회를 하나의 객관적 실재로 간주하면서, 그 실재가 투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현상 역시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따라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자연주의(naturalism)와 긴밀히 연결된다.” (164)
그러나 『자본』에서 전제되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관심은 사회라는 객관적 실재가 어떻게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으로 작동하는가를 밝혀내는 데 있다. 『자본』의 모든 범주들은 그 서술의 귀결 속에서 그 관계들의 불투명성과 비가시성, 이로 인한 인식의 혼돈을 초래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컨대 상품은 ‘가치대로 교환된다’고 마르크스는 밝히고 있지만, 가치의 현상형태인 교환가치는 상품이 교환되는 과정을 가리게 되고, 결국 상품은 물신주의를 발생시킨다. 이를 마르크스는 ‘몽롱한 안개’, ‘종교와 같은’, ‘판타스마고리아’와 같은 수식어를 통해 서술한다. 『자본』이 밝혀내는 잉여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의 서술의 핵심은 잉여가치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잉여가치의 개념을 규정하자마자 마르크스는 이 잉여가치가 임금노동제 하에서 어떻게 은폐되는가를 서술한다. 실제로 잉여가치의 착취가 가시적이었던 전근대사회와 달리, 임금의 형태로 노동에 대한 가치를 지불받는 자본주의에서는 얼마만큼의 노동이 필요노동이고 얼마만큼의 노동이 잉여노동인지를 경험적으로는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착취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이 자본가에게 임금을 받는다는 가상을 얻게 된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는 오히려 ‘자연주의적 존재론’을 전개하기보다, 자본주의에서 일상적으로 얻게 되는 의식형태들이 필연적으로 물신적 가상에 빠진다는 비판 속에서 ‘자연주의적 존재론’을 비판하는 입장에 가깝다. 이러한 사실은 라클라우가 마르크스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을 낳는다.
둘째 질문은 ‘사회적 실재’와 관련된, 다시 마르크스와 라클라우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사회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테제(사회의 불가능성)를 통해 사회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관점을 택한다. 이 지점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마르크스와 결정적으로 단절한다. 그리고 사회적 객관성이 우발성과 헤게모니적 실천에 의해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 전환은 정치적 실천을 사회적 객관성이라는 토대의 상부구조로 바라보는 기계적 유물론을 탈피하여, 그 우발성과 탈중심적 흐름을 이론화한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말한 바 있듯이, ‘사회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테제는, ‘사회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가족’이라는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 명제와 공명하는 것도 사실이다. 즉 극단적 유명론의 관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것을 해소하는 방식의 이론화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강제성과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라클라우가 말하고자 하는 헤게모니적 실천의 자율성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사회’는 분명 우리의 존재, 삶 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 실재성’이라는 마르크스(그리고 아도르노)의 설명방식이 갖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르크스는 가치법칙이 갖는 강제력을 중력의 법칙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가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객관적인 관계망의 강제성과 포섭에 대한 이론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실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점을 줄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은 이 강제력과 포섭을 넘어설 수 있는 실천에 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래서 그람시가 러시아 혁명을 ‘『자본』에 반하는 혁명’이라고 말한 것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라클라우의 헤게모니적 실천과 정치의 자율성, 우발성에 대한 설명 역시 분명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인 것의 객관적 실재성’이라는 마르크스적 테제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우발성’이라는 라클라우의 테제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셋째 질문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인민의 주체화와 관련된 것이다. 저자는 12.3 내란 이후 등장한 광정에서의 집합적 주체화를 평가하면서,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포퓰리즘적 계기’를 보여준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민주주의는 그 주체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과정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내란 직후 광장에서 펼쳐진 장면은 바로 그 점을 드러내는 결정적 신호였다. 광장은 반동적 포퓰리즘이 호명한 ‘국민’이 아니라, 민주주의 질서와 헌정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는 ‘국민’이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이었다.” (319)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올림픽공원 시위가 나타났다. 이 시위 역시 새로운 형태의 ‘인민’(한국에서는 ‘국민’)에 대한 호소가 등장한다. 즉 선거권을 박탈당한 평범한 국민은 선거조작을 통해 집권을 연장하려는 민주당 과두세력에 대항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선거’는 이들 시위대를 묶어주는 결절점을 형성한다. 이로부터 이 기표를 중국혐오, 반공주의, 친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들로 이어주는 등가사슬이 성립한다. 말하자면 올림픽공원의 극우 시위대는 나름의 헤게모니적 실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벌어진 탱크데이 논란, 스타벅스 가야지 응원, 리센느의 일베노체 논란 등의 사건들은 ‘스타벅스도 못 가게 하는’, ‘아이들에게 5.18을 강요하는’, ‘아이돌을 일베라고 비난하는’ 기성세대 꼰대진보에 대한 반감과 결합되어 2030세대의 우경화를 촉진하면서 백래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퓰리즘적 인민 개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은 인민을 주어진 경험적 범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 접합으로 구성되어야 할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급진민주주의적, 포퓰리즘적 인민 개념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하여 올림픽공원 시위 등을 통해 반동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요구(demand)의 헤게모니 접합을 차단하고, 새로운 형태의 인민 개념의 연결접속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현우식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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