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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라클라우 읽기

라클라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조지훈, 한상원, 박기형의 논평에 대한 답변

by 인-무브 2026. 7. 22.

라클라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조지훈, 한상원, 박기형의 논평에 대한 답변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2026년 7월 21일 서교연 포럼 <서교연이 묻고 저자가 답하다>의 발표문입니다. 서교연 동료 회원의 논평문에 답하는 글이니 아래 논평문을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라클라우 사상의 존재론과 언어학 - 조지훈

https://en-movement.tistory.com/697

라클라우 급진민주주의의 존재적 차원 - 한상원

https://en-movement.tistory.com/699

라클라우와 세 가지 단위: 시간, 요구, 형식 - 박기형

https://en-movement.tistory.com/698


1. 들어가며

 

『근본 없는 민주주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읽자』(빨간소금, 2026)는 라클라우 사상을 소개하는 입문서다.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사상 전반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한다. 이런 서술 전략을 택한 이유는 한국에서 사상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준거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책의 1부(한국 사회는 어떻게 라클라우를 읽어 왔는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국 좌파 지식장에서 라클라우 사상은 오랜 시간 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부정적 평가가 통념으로 굳어지면서 사상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행히도 2010년대부터 마르크스주의 대 포스트 담론이라는 90년대의 구도를 넘어서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세계적으로 우파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좌파 정치의 혁신이 사실상 강제되고 있다는 현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근본 없는 민주주의』는 이러한 흐름에서 라클라우 사상을 독립된 연구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90년대 이병천과 박형준 등이 논란 속에서 라클라우 사상을 처음 수용했고, 2000년대 조희연과 이승원 등이 새로운 해석의 토대를 마련했다면, 이 책을 통해 라클라우 수용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보자는 의도였다.

 

세 논평문을 읽으며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논평문은 라클라우 사상의 내재적 한계에 대한 기존 연구의 비판을 일정 부분 계승하면서도 이를 새로운 문법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동료 연구자들이 제기한 문제를 라클라우 사상에 대한 해석 문제로 환원하기보다는, 책의 부제가 시사하듯이 라클라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관점에서 답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라클라우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며 논평자들이 사상을 잘못 해석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라클라우가 ‘말한 것’의 의미, 그것이 나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이다.

 

아래에서는 논평자들의 질문을 순서대로 일일이 답하기 보다는 핵심 주제를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질문들에 응답할 것이다. 주제는 1)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 2) 사회적인 것의 실재성, 3) 역사와 제도, 4) 비어 있는 기표와 요구, 5) 급진 정치의 과제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 이를 부연하는 방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책에 대한 이해를 돕고 논평자들의 비판에 대한 나름의 응답을 하도록 하겠다. 

 

2.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

 

“라클라우 사상을 존재론적(ontological) 차원과 존재적(ontical) 차원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라클라우 사상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 두 차원의 구분을 강조한다. 존재론적 차원은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 다시 말해 존재를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관한 초월론적(transcendental) 차원을 의미한다. 라클라우 사상은 모든 존재가 그 의미와 정체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 속에서 구성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을 존재론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존재론(political ontology)이라 부를 수 있다. 반면 존재적 차원은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관한 차원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정치 현실을 설명하는 정치 이론과 그러한 현실에 개입하기 위한 정치 전략은 모두 존재적 차원에 해당한다. 기존 연구는 두 차원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면서 해석의 혼란을 초래했다. 예컨대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퓰리즘 이론’을 언급할 때 그것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정치 논리’를 말하는 것인지, 존재적 차원에서 포퓰리즘 현상을 설명하는 ‘정치 이론’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좌파 포퓰리즘과 같은 ‘정치 전략’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라클라우 사상이 ‘말한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차원을 구분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18~19)

 

라클라우 연구의 관점에서 이 책의 학술적 기여는 라클라우 사상을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으로 구분하고 두 차원에서 사상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를 거치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밝힘으로써 사상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의 구분은 하이데거 철학의 문제설정을 따른다. 조지훈의 질문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라클라우의 반본질주의 사상에 근거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시간과 죽음으로 규정되고,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을 규범적으로 구분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라클라우의 반본질주의 정치사상이 긴장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라클라우 사상이 얼마나 하이데거의 철학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를 따지기 보다는 라클라우가 하이데거를 어떤 식으로 독해하고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 질문에 답하도록 하겠다.

 

라클라우는 자신의 사상이 20세기 서양 철학의 반본질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이는 분석철학, 현상학, 구조주의 전통에서 이루어진 세 가지 운동을 말한다. 하이데거와 관련해서는 그의 실존론적 현상학(existential phenomenology)이 현상학의 초점을 인식론의 문제에서 존재론의 문제로 전환시켰다는 점에 주목한다.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서 현상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면서 여전히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초월적 주체라는 인식론적 문제설정에 머물러 있다면, 하이데거는 철학의 과제는 인간이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살아가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개별 존재자에 대한 지식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 존재 자체의 의미를 해명하는 존재론적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올리버 마차트(Oliver Marchart)는 라클라우를 장 뤽 낭시, 르포르, 바디우와 함께 좌파 하이데거주의(Left Heideggerianism) 사상가 중 하나로 해석한다. 그 핵심은 이들이 하이데거 철학이 강조하는 존재론적 차이(ontological difference), 즉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의 차이를 정치화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전정치적(pre-poltical)이자 실존적인 차원에서 존재론적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라클라우는 정치(politics)와 구분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대한 사유를 강조한다. 정치가 존재적 차원에서 사회·경제·문화 등과 구분되는 제도라면, 정치적인 것은 그러한 제도를 정초하고자 하는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는 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철학의 과제는 한정된 자원을 권력을 통해 배분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개인과 집단의 요구를 대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차원, 즉 민주주의의 ‘근본 없음’을 사유하는 것이 된다.

 

굳이 말하자면, 라클라우적인 의미에서 현존재란 모든 사회적 질서가 완전할 수 없으며, 탈구(dislocation)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헤게모니 투쟁에 참여하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이다. 이러한 사유 없이 현실에 존재하는 질서를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질서가 재구성되는 공간을 닫아버리는 것은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라클라우에게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분은 하이데거의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규범적이기도 한데, 이는 민주주의를 강한 의미에서 민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클라우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의 구분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모든 전체주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적 실천뿐만 아니라 정치의 결정불가능성의 영역을 제거하고자 하는 이론적 시도에 반대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3. 사회적인 것의 실재성

 

그러나 정치적인 것에 대한 반본질주의적인 사유만으로는 현존하는 사회 질서를 분석하고 그러한 질서를 재구성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 한상원의 질문은 여기서 제기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자연주의(naturalism)적 존재론에 대한 라클라우의 비판은 사회적인 것의 실재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사실상 사회적인 것의 실재성과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이분법을 부당하게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주의란 사회현상을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따라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철학적 입장을 말한다. 이는 라클라우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를 다시금 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담론환원주의에 대한 서영표, 지주형, 김정한의 비판에서는 두 가지 차원의 이원론(dualism)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 축에서는 사회(구조)적, 필연적, 물질적, 역사적, 제도적 차원이 놓이고, 다른 축에서는 담론적, 우연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차원이 위치한다. 담론환원주의 비판은 전자의 차원이 후자의 차원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성립될 수 있다. 라클라우 사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정치적인 것 혹은 담론적인 것의 한계를 제약하는 ‘사회적인 것의 한계’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적인 것은 정치/담론적인 것의 ‘토대’ 혹은 ‘조건’으로 여겨진다. … 문제는 이러한 전제가 라클라우 사상의 핵심 테제인 ‘사회’의 불가능성과 사회적인 것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우위와 충돌한다는 점이다.”(77)

 

한상원이 사회적인 것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치법칙과 같은 “우리가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는 객관적인 관계망의 강제성과 포섭에 대한 이론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라클라우 사상의 ‘사회적인 것의 한계’를 고려하지 못한다는 기존 연구의 비판과 공명한다. 즉, 라클라우가 강조하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무한한 지평 위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정치적 실천이 사회적인 것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클라우의 ‘사회’의 불가능성과 사회적인 것에 대한 정치의 우위 테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의 불가능성에 대한 라클라우의 주장은 정치의 우위에 관한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정치의 우위란 정치를 사회구성체 내부의 지역적이고 부분적인 심급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질서가 구성되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정치적인 것은 상부구조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의 차원에 자리한다. 정치는 사회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이루어지거나, 이미 주어진 사회적 주체들의 요구를 대표하는 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사회란 정치적 실천의 계기들이 침전되어 정치적 기원이 잊힌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침전된 계기들은 언제든지 탈구의 계기와 재접합의 과정을 통해 재활성화될 수 있으며, 정치는 이러한 가능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라클라우의 정치의 우위에 관한 주장은 모든 사회 질서를 정초하는 또 하나의 본질적 심급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하지만 라클라우가 말하는 정치의 우위는 이러한 심급들 간의 구체적 위계나 관계를 존재적 차원에서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심급들 사이의 관계 자체가 성립할 수 있는 존재론적 조건, 다시 말해 사회질서가 구성될 가능성의 장을 지시한다. 바로 이 점에서 라클라우의 정치 개념은 최종심급과 같은 본질주의 개념들과 양립할 수 없다.”(171~172)

 

라클라우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위계를 뒤집는다. 라클라우에게 실재는 정치적인 것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라캉적 의미의 실재, 즉 기존 상징 질서의 탈구로 인해 경험되는 차원을 의미한다. 라클라우 사상의 사회적인 것의 실재성에 대한 주장은 여전히 그러한 실재를 우리가 간접적으로나마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제기된다. 사회라는 객관적 실재가 어떻게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으로, 때로는 전도된 형태로 드러나는지를 분석하는 마르크스의 분석 역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인식론적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정치의 차원이 지식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있는 위험이 생긴다. 문제는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판적 사회학과 사회운동 담론은 정치를 좁은 의미의 제도 정치로 환원하는 본질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제도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차원, 특히 사회구조와 사회운동의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본질주의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정치를 사회적 토대로 환원하는 또다른 형태의 본질주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라클라우 사상은 ‘사회’의 불가능성과 정치의 우위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의 실재성을 해체하고 사회적인 것의 구성을 둘러싼 결정불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로부터 그는 ‘정치’를 ‘사회’라는 토대(본질)로부터 해방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 이론과 정치 전략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 이론은 개인, 집단, 사회구조와 같은 사회(학)적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논리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정치 전략은 시민사회의 요구, 사회운동의 요구 등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거나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가 구성되고 나아가 정치적 요구로 전환되는 과정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353~354)

 

한상원의 질문 역시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으로 나누어 답할 수 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라클라우는 정치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의 한계 안에 두려고 하는 어떤 형태의 ‘실재론’적 입장에도 반대한다. 다만 그는 ‘실재론자’로서 사회적 실재의 영역을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과정을 포함하는 차원으로 확장하고자 한다고 할 수 있다. 존재적 차원에서 남은 문제는 한상원이 질문했듯이 “사회적인 것의 객관적 실재성이라는 마르크스적 테제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과 우발성이라는 라클라우의 테제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예컨대 현실의 억압과 착취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배적인 사회 질서가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 질서를 마르크스주의적인 방식으로 재현하는,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적, 담론적, 헤게모니적 실천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사회 질서를 설명하는 수많은 방법이 존재한다.

 

결국 존재적 차원에서 현실을 잘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수한 사회 이론일 뿐인 마르크스주의를 사회 세계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보편적인 이론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는 헤게모니적 동의의 문제이지, 이론내적인 설명력의 문제가 아니다. 한 때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헤게모니적 지위를 유지했던 적이 있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운동이 하나의 특수한 운동임과 동시에 전체 인민의 해방을 위한 보편적 운동이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과오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일반화(보편화)하는 대신 물신화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라클라우의 이론 역시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과 유럽의 신사회운동이라는 특수한 맥락을 보편화하는 데 실패해 왔다고 할 수 있다.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좌파 이론이 처한 과제다. 

 

4. 역사와 제도

 

우리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출발하여 점점 더 존재적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라클라우 사상이 존재적 차원에서 사회 분석의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박기형은 “라클라우 사상에는 시간성(역사성)이 부재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물음을 던진다. 이는 라클라우가 말하는 정치는 기존 질서가 탈구되는 찰나의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으며, 라클라우 사상은 사회적인 것의 지속성을 이론화하지 못한다는 비판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기존 연구는 라클라우 사상에는 역사적, 제도적 분석이 빠져 있으며, 정치를 제약하거나 촉진하는 제도적 경로의존성(path-dependence)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고 비판해 왔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사회적인 것의 한계’ 비판과 공명하면서도 조금 다른 결의 문제를 제기한다. 박기형은 “존재물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강도(intensity)의 차이”와 “다양한 강도를 띤 사회적 단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 안에서 존재는 조직화 정도 등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라클라우가 말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회적인 것의 토대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존재적 차원에서 이러한 조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라클라우는 제도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닌가?

 

“모든 존재는 그 의미와 정체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과정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정치적이다. 만약 어떤 대상이 비정치적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대상을 형성한 정치적 과정이 잊혀 침전(sedimentation)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클라우 사상이 제기하는 이론적·실천적 과제는 대상이 침전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 정치적 기원을 되살림으로써 이를 재활성화(reactivating)하는 데 있다.”(353)

 

라클라우는 후설을 따라 침전과 재활성화를 구분한다. 침전은 이론적 범주들이 처음 도입되는 정치적 과정이 은폐된 상태를 말하며, 재활성화는 그 과정을 다시 드러나게 하는 계기를 말한다. 후설이 이 구분을 통해 순수한 의식의 영역에서 현상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다면, 라클라우는 재활성화를 통해 범주들의 구성이 처음부터 우연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라클라우 사상에서 사회적인 것과 모든 영역화·공간화된 범주는 침전된 것이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그러한 범주들이 탈구되고 재접합되는 계기와 관련이 있다. 탈구와 재접합이 가능한 이유는 침전된 범주들이 영원히 침전되어있을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역사와 시간의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라클라우 사상은 공간에 비해 시간을 특권화한다고 볼 수 있다.

 

박기형의 질문은 라클라우 사상이 강조하는 시간이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크로노스적 시간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찰나의 시간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치안(police)와 정치를 구분하면서 정치란 치안의 감각적 질서가 깨지는 순간에 아주 드물게 존재한다고 보았던 랑시에르에게 제기되는 비판과 유사하다. 그러나 랑시에르와 다르게 라클라우 사상에는 사회적인 것이 침전된 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 중요하다. 침전된 범주를 재활성화하는 것은 사실상 그러한 범주가 침전된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라클라우에게 정치는 기존 질서의 예상치 못한 탈구로 인해 갑자기 등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적 질서가 침전되면서 제도화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곧 이미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자 정치적 실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라클라우가 실제로 그러한 분석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게임의 룰’을 설정하는 데 치중한다. 기존 패러다임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해체하는 데 주력하면서 제도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내가 책에서 “라클라우는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다”(11)라고 말한 이유도 이와 같다. 그런 점에서 박기형의 비판은 타당하다. 다만 나는 이를 라클라우적인 사회 분석의 불가능성의 논거로 삼기 보다는 라클라우 사상을 사회 이론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론화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본다.

 

제도의 경로의존성에 대한 라클라우적인 분석의 실마리는 헤게모니 구성체(hegemonic formation)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람시는 역사적 블록(historical bloc)이라는 개념을 통해 헤게모니적 동의를 바탕으로 한 상대적으로 통일된 사회 질서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와 유사하게 라클라우는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의 지배적인 사회 질서를 헤게모니 구성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이를테면, 라클라우는 무페와 함께 서유럽에서 복지국가 헤게모니 구성체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구성체의 전환 과정과 각 헤게모니 구성체의 위기를 설명하며 위기에 개입하기 위한 전략으로 급진 민주주의와 좌파 포퓰리즘을 제시하기도 했다.  

 

5. 요구와 비어 있는 기표

 

헤게모니 구성체 개념 이외에도 라클라우 사상에는 실제 분석에 적용될 수 있는 몇 가지 흥미로운 개념들이 존재한다. 라클라우는 개인이나 집단을 분석의 최소 단위로 설정하는 사회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분석의 최소 단위로 요구(demands)를 제시한다. 집합 정체성(collective identities)이 이질적인 요구들이 접합된 결과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는 인민적 정체성은 민주적 요구(democratic demands)가 인민적 요구(popular demands)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비슷하게 나는 현대 사회에서 집합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회적 요구(social demands)와 정치적 요구(political demands)의 변증법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전체 과정을 하나의 순환 구조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사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불만과 기대 가운데 일부는 공공의 공감과 인정을 얻으며 제도의 언어로 정식화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요구’로 자리 잡는다. 둘째,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며, 이를 매개로 공동의 경험과 정서, 상징적 표상이 구축된다. 셋째, 그러나 기존 체제가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거나 이를 의도적으로 배제·억압하면, 다수의 이질적인 사회적 요구가 공통의 적대를 중심으로 접합되면서 ‘정치적 요구’로 바뀐다. 넷째, 이렇게 형성된 정치적 요구가 체제 안에서 어느 정도 수용되거나 제도화되면 다시 ‘사회적 요구’로 되돌아가고, 이에 따라 정체성 구성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정된다. 이러한 순환 과정에서 때로는 새로운 정치적 요구와 정체성이 창출되기도 한다. 기존 담론 체계 안에서 고려되지 않거나 가시화되지 않았던 주제들, 예컨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의 권리, 동물권 등이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창발적 요구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합 정체성 형성은 단순히 기존 요구들의 병렬적 결합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 지평을 열어 가는 창조적이며 우연한 과정이다.”(333~334)

 

여기서 박기형의 질문은 이러한 규정이 “요구를 개인과 집단에 무관하게 이미 어딘가에 주어져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를 수사학적 문제로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요구는 언제나 요구하는 몸들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요구 또한 구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의 박기형의 입장이다. 물론 요구는 결국 누군가의 요구이다. 그러나 라클라우가 요구 이전에 개인이나 집단을 상정하지 않는 이유는 행위를 정치의 시작이라고 보는 아렌트의 입장과 유사하게 요구 그 자체를 정치의 시작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구 없이는 정치도 없다.

 

여기서 라클라우의 입장은 버틀러와 긴장한다. 수행성의 이론가인 버틀러는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심지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복수의 신체들의 수행성이라는 관점에서 ‘살만한 삶’에 대한 요구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역시 신체들의 ‘모여있음’을 특한 요구로 재현하는 행위이다.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지라도 그 자체는 특정한 요구로 재현되고 번역된다. 바로 여기서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이 라클라우의 입장이다. 요구 이전에 객관적인 필요(needs)가 존재하며, 이를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다만 라클라우의 시각에서는 그것이 생물학적 필요라고 하더라도, 언어화되기 이전의 필요 그 자체는 정치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요구가 서로 다른 몸들, 서로 다른 강도를 지닌 층화된 몸들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박기형의 반론은 타당하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요구의 좌절이 만성화된 상황에서 요구가 언제나 이미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최근 올림픽공원 시위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대, 계급, 젠더 등의 사회적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재선거’, ‘부정선거’라는 기표를 중심으로 드러나는 요구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요구를 어떻게 재현/대표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시급하며, 이는 명시적으로 드러난 요구, 예컨대 선거를 다시 하라는 요구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 버틀러 식으로 말하면 복수의 몸들의 수행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언어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어 있는 기표는 어떠한 고정된 기의와도 직접 결합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의미의 부재를 통해 정치적 표상과 접합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기표 형식이다. 다만 이 개념은 라클라우에 의해 하나의 이념형(ideal type)으로서 이론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완전히 ‘비어 있는’ 기표나, 반대로 ‘완전히 채워진’ 기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모든 기표는 언제나 경향적으로 비어 있는 동시에, 일정한 의미 내용이 부분적으로 채워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결절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담론구성체 내부에서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채 떠다니는 기표들(floating signifer)이다. 이러한 기표들은 의미와 과잉결정 과정에서 서로 다른 기의들과 경쟁적으로 연결되며, 그 결과 담론구성체 내부에서 중심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 헤게모니 관계는 바로 이러한 떠다니는 기표들 가운데 특정한 기표가 보편의 위치를 점할 때 만들어진다.”(129)

 

또 다른 핵심적인 개념은 비어 있는 기표와 떠다니는 기표다. 조지훈은 “모든 기표는 사실상 어느 정도는 비어 있는 기표이기 때문에 결절점의 기능을 하는 기표가 단지 비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비어 있는 기표는 기표의 의미가 순전히 부정적(negative)인 차원에서 부여되는, 예컨대 그 의미가 기존 체제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에서만 의미를 갖는 수준까지 다양한 요구들을 접합하는 결절점으로 기능하는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기표가 비어 있기 때문에 결절점의 기능을 할 수 있다기 보다는 사회 전체가 두 진영으로 양분되는 가상의 상황에서 한 쪽 진영의 요구를 대표할 수 있는 기표가 있다면 그 기표는 비어 있는 기표일 수밖에 없다는 사고실험에 따른 결론이다.

 

현실에서는 196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이라는 기표가 사실상 지배적인 과두정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를 획득하는 경우, 러시아 혁명에서 ‘빵, 평화, 토지’가 사실상 차르 체제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이 기표들 역시 그 의미가 완전히 비어 있다고 볼 수는 없으며(페론은 어디까지나 인간 페론이다), 현실에서 결절점의 역할을 하는 모든 기표는 경향적으로는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비어 있는 기표라는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역으로 특정한 기표가 결절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 기표와 관습적으로 연결되었던 기의와의 연결이 느슨해져야 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페론이 인간 페론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이념과 정치적 지향을 초월한 광범위한 요구를 통합할 수 있는 결절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사회 분석에 있어 실제로 중요한 것은 떠다니는 기표이다. 떠다니는 기표는 말하자면 기의와의 연결이 어느 정도 약화된 상태로 떠다니기 때문에 결절점의 기능을 하는 기표가 될 수 있는 후보가 된다.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수많은 기표들은 대개 떠다니는 기표들이다. 기표와 기의와의 연결이 너무 강하게 되면 소위 ‘확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적 수사들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치인의 무능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공허함을 통해 이질적인 요구들을 접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게모니 투쟁은 떠다니는 기표들을 특정한 담론구성체 안의 결절점으로 포획하고자 하는 헤게모니 프로젝트 사이의 경쟁이기도 하다.

 

6. 급진 정치의 과제

 

마지막으로 존재적 차원에서의 정치 전략의 문제를 다룰 차례다. 한상원은 “급진민주주의적, 포퓰리즘적 인민 개념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는 이 책의 제목인 ‘근본 없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의 핵심 문제설정을 중심으로 오늘날 ‘급진 정치’를 새롭게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화두로 ‘근본 없는 민주주의’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것은 ‘radical democracy’를 새롭게 번역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radical’은 한국어로 ‘근본적’ 또는 ‘급진적’으로 번역하며, radical democracy 역시 ‘급진민주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민주주의에 어떤 ‘근본’, 즉 고정적 이념, 최종적 목표, 본질적인 토대가 있다는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 … 따라서 급진민주주의 전략의 반본질주의 문제설정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radical democracy를 ‘근본 없는 민주주의’로 번역하고자 한다. 이 표현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바로 그 역설을 통해 민주주의의 ‘근본 없음’을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344)

 

내 고민은 여기서 출발한다. 급진 정치란 무엇인가? 어떤 문제에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해결하는 정치인가? 아니면 제도나 정책 수준이 아닌 ‘체제’ 수준의 변혁을 지향하는 정치인가? 나는 급진 정치가 공적 질서에서 배제된, 정당한 사회적 요구가 좌절된 이들의 요구를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대표/재현할 수 있는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급진 정치는 어떤 점에서 급진적 혹은 민주적인가? 그것은 최소한의 규정, 그것이 사회의 열린 재구성 가능성을 억제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는 한에서만 급진적이고 민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정치는 드문 것이라는 랑시에르의 말을 비틀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정치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드물다.

 

한상원은 “올림픽공원 시위 등을 통해 반동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요구의 헤게모니적 접합을 차단하고 새로운 형태의 인민 개념의 연결접속을 이룰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는다. 이러한 요구를 반동적이고 극우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기득권 세력과 기존 체제에 대한 실망과 반감이 특정한 요구를 중심으로 표출되는 포퓰리즘 정치의 사례로 보고, 이를 세대와 같은 사회적 범주로 환원하기 보다는 그러한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적인 정치 논리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극우’, ‘탈정치’ 등은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효과적인 용어지만, 우연적이고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정치 논리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개념이다.

 

“오늘날 급진 정치의 과제는 사회적 요구가 정치적 요구로 전환되는 경계에서 등장하는 ‘근본 없는 것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 없는 것들’이란 기존의 상징질서에서 제도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 채 배제되어 온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시민이나 권리의 주체로 호명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제도 정치의 시야 밖에 있었다. 이들을 ‘자들’이 아니라 ‘것들’이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정치적 고려의 범위를 인간 주체로 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 자연, 환경, 비인간 존재들 역시 인간 중심 질서 속에서 배제되었으며, 이러한 배제는 정치적 공간의 경계를 다시 사유하도록 만들고 있다. 정치적 공간은 인간의 의지나 이해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 중심성이 흔들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열린다. … 따라서 급진 정치의 핵심 과제는 ‘근본 없는 것들’이 정치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데 있다”(349~350)

 

박기형은 “무엇이 급진 정치가 응답해야 할 근본 없는 목소리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왜 ‘번역’이라는 라클라우에게는 낯선 단어를 사용하였는지”를 묻는다. 먼저 근본 없는 것들의 요구는 자연히 진보적이거나 민주적이지 않다. 그러한 요구가 ‘아래로부터’ 왔다고 해서 마땅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사회에서 보다 소외된 존재들을 우선적으로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나는 어떤 목소리에 보다 우선적으로 응답해야 할지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을 내리는 데도 주저하게 된다. 물론 현실은 무정형의 주체들이 랜덤하게 출현하는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선택이 언어적(담론적) 실천의 차원을 띤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거리에서의 투쟁만큼이나 실천적이다. 거리에서의 투쟁 역시 특정한 요구들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말과 글만큼이나 언어적이다. 라클라우를 읽는다고 해서 현실을 명확히 설명하고, 현실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라클라우를 읽으면 우리가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정치 현상을 분석하고 개입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라클라우가 새로운 출발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라클라우라는 거울에 비춰 볼 것을 제안하는 셈이다. 공공연한 ‘적’을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동안 자명하다고 믿어 왔던 자신의 규범과 가치를 의심하고, 우리가 서 있는 토대가 실은 아무런 근본이 없는 불안정한 지반임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바로 그 ‘근본 없음’을 직시하는 용기만이 민주주의를 그 어떤 절대 권력도 독점할 수 없는 비어 있는 장소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마치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허무한 제안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여전히 라클라우 사상의 ‘쓸모’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대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매 순간 정치를 새롭게 기획해야 하는 자유를 얻는다. 돌아가는 것 역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이다. 더디고 고통스러운 길일 수 있지만, 독자들에게 라클라우를 읽으며 그 길을 함께 가자고 제안하고 싶다.”(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