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클라우의 렌즈로 본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
2026. 08. 13. 문화연구캠프 발표문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2026년 8월 13일(목) 대구에서 열리는 문화연구캠프 기획 세션 <근본 없는 민주주의: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 발표문입니다. 저의 책 『근본 없는 민주주의: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읽자』(빨간소금, 2026)를 중심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라클라우의 관점이 현대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를 분석하고 개입하는 데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정리한 글입니다. 발표 시간과 지면의 한계로 많은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책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포퓰리즘 연구자 라클라우
라클라우는 평생에 걸쳐 포퓰리즘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온 연구자입니다. 포퓰리즘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라클라우의 독특한 포퓰리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60년대 아르헨티나 사회운동 참여 경험이 그의 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1960년대 대중화되고 급진화된 페론주의(Peronsim)는 라클라우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2부 4장). 라클라우는 사회주의 운동이 페론주의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페론주의에 담긴 대중의 열망을 더욱 급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일찍이 그는 페론주의와 같은 포퓰리즘이 저발전 국가에서 나타나는 일시적이고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공적 질서에서 배제된 대중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등장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70년대 영국으로 망명한 라클라우는 알튀세르 학파의 영향을 받으며 정치·이데올로기 현상을 계급 관계로 환원하지 않는 비환원론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을 발전시켜 인민-민주적 호명 이론을 제시합니다(4부 10장 전반부). 이로부터 그는 생산양식 수준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에 의해 과잉결정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사회구성체 수준에서 전개되는 인민-민주적 투쟁의 상대적 자율성에 주목합니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에 대한 기능주의적 해석, 즉 포퓰리즘을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발전의 비동시성으로 인해 나타나는 일시적으로 병리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관행을 비판하면서 포퓰리즘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이 시기 좌파 포퓰리즘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1970년대 라클라우의 이론이 비교적 마르크스주의 문제설정 안에서 이루어졌다면, 1980년대 이후 라클라우는 마르크스주의 문제설정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해체하고, 훗날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대안적인 문제설정을 제시하게 됩니다(3부 8장). 이에 따라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 역시 달라집니다. 『포퓰리즘 이성』에서 라클라우는 다시금 포퓰리즘이라는 주제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기능주의 해석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포퓰리즘을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주체성의 형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환원 불가능한 정치 논리로 해석합니다(4부 10장 후반부). 나아가 그는 포퓰리즘이 정치와 동의어이며, 포퓰리즘의 종말은 곧 정치의 종말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라클라우는 왜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요?
2. 포퓰리즘을 둘러싼 해석의 정치학: 위험한 과잉과 모호한 과소
그 이유는 포퓰리즘을 병리화하고 문제화함으로써 이를 정치 분석과 개입의 영역으로부터 추방시키고자 하는 해석의 정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노회찬재단 웹진 <평등과공정>에서 저는 이를 ‘위험한 과잉’과 ‘모호한 과소’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참고: https://hcroh.imweb.me/144/?bmode=view&idx=170498464). 『포퓰리즘 이성』 <서문>에서 라클라우는 자신이 왜 포퓰리즘이라는 주제에 주목하는지를 설명하면서 포퓰리즘이 항상 ‘위험한 과잉’과 연결되어 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포퓰리즘은 인민(people)이라는 주체를 정치의 전면에 등장시키며, 이는 기존 질서에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플라톤 이래 서구 정치철학은 인민주권을 이야기하면서도, 언제나 인민의 통치를 제한하기 위한 지식을 생산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민은 통치에 적합한 지식을 갖지 못하거나, 감정에 휩쓸려 우매한 선택을 하는 존재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위험한 과잉과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현대 포퓰리즘을 위험한 과잉과 연결짓는 해석은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민주주의 정치의 정상적 형태로 가정하고,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를 초과하는 정치는 모두 위험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포퓰리즘 현상이 상당 부분 현행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간과합니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을 주변화하는 이러한 해석들이 “정치에 대한 기각”이며, “공동체 관리를 행정 권력의 관심사로 단정”하는 것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포퓰리즘과 자유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는 구체적인 포퓰리즘의 정치 논리를 파악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에 대처하지도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 포퓰리즘은 ‘모호한 과소’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포퓰리즘을 좌파 포퓰리즘과 같은 정치 전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연구들에서 드러납니다. 포퓰리즘이 모호한 이유는 자유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정치에 미달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여타의 민주주의 이론들과는 달리 명확한 규범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주의 이론과 달리 억압적 국가와 독점적 시장, 자본주의와 같은 명확한 목표와 이행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좌파 포퓰리즘 전략이 민주적이고 좌파적이란 보장이 있는가 하는 오랜 비판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앞서 소개한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좌파 포퓰리즘 전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니, 모든 정치 전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제는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이 암묵적으로 정치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정치적 상상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입니다. 『포퓰리즘 이성』의 <결론적 논평>에서 라클라우는 “결코 말의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실천적 측면에서, 그리고 누군가 감정적으로 항상 고조되어 있는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시대의 이 유혹은 분석을 윤리적 비난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포퓰리즘, 파시즘, 극우 정치와 같은 것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비난이 설명을 대체할 때 시작됩니다. 이 때 이 현상들은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원인을 박탈당한 일탈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포퓰리즘을 한쪽 코너에 놓고, 반대쪽 코너에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것들을 놓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포퓰리즘과 구분되는 진정한 정치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포퓰리즘적인 논리로부터 깔끔하게 면제된 그러한 진정한 정치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러한 진정한 정치에 대한 환상이 포퓰리즘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상에 대한 분석과 개입 역량을 축소해 왔던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포퓰리즘이라는 불온한 주제를 계속해서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라클라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3. 포퓰리즘의 세 가지 차원
포퓰리즘을 분석과 개입의 장으로 들여놓기 위해서는 포퓰리즘의 세 가지 차원을 분석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서 저는 라클라우 사상을 존재론적(ontological) 차원과 존재적(ontical) 차원으로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존재론적 차원이란 존재의 (불)가능성 조건에 관한 유사초월론적 차원을 의미합니다. 존재적 차원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정치 현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정치 이론과 그러한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정치 전략은 모두 존재적 차원에 해당합니다.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 역시 정치 존재론(political ontology), 정치 이론, 정치 전략의 세 차원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치 존재론의 차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주체성의 형성을 둘러싼 정치 논리를 말합니다. 포퓰리즘은 정치와 동의어라고 할 때 라클라우는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논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가 포퓰리즘이라는 주장이라기 보다는, 포퓰리즘 정치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민주주의 정치는 그것이 국민이든 인민이든 민중이든, 정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문과 같이 민주주의는 인민(국민)주권이라는 이상을 토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국민의 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있나요? 정치인들이 그러는 이유는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국민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명확히 규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민으로부터 배제된 존재들이 있으며, 국민으로 인정받더라도 차별과 배제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주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는, 민주주의의 풀리지 않는 난제입니다. 이 문제가 존재하는 한 포퓰리즘 정치를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존재적 차원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적’, ‘좌파적’, ‘우파적’, ‘극우적’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포퓰리즘이 형식 논리라면, 존재적 차원에서의 포퓰리즘 현상은 그러한 형식이 어떤 내용과 접합되는가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포퓰리즘 현상이 점점 더 우경화되고 극우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배 질서의 위기와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떨어진 신뢰는 다양한 방식의 포퓰리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그것이 지배 질서를 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데 그치거나 심지어는 구 체제로 돌아가자는 반동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라클라우 사상은 포퓰리즘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여러 개념적인 도구들을 제공합니다. 요구(demands), 등가의 논리와 차이의 논리, 비어 있는 기표와 떠다니는 기표 같은 개념들이 그렇습니다. 이 개념들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 주체성이 실제로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2부 6장, 4부 10장, 5부 14~15장).
마지막으로 존재적 차원에서 포퓰리즘 현상에 개입하기 위한 정치 전략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우경화되고 극우화되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를 어떻게 더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득권 정치와 기존 질서에 실망한 대중적 요구를 어떻게 대표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당은 여전히 주요한 행위자이고, 최근에는 미디어 정치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2010년 서유럽의 정세에서 제시된 하나의 시도일 뿐입니다. 저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기표에 매몰되기보다는 반기득권 정서를 바탕으로 터져나오는 대중적 요구를 어떻게 대표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보다 천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포퓰리즘을 정치 분석과 개입의 영역에서 추방하고자 하는 오랜 관행과 결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4. 현대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
마지막으로 라클라우의 관점이 현대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를 이해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는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개념을 지나치게 규범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극우’나 ‘탈정치’와 같은 개념들은 특정 현상을 병리화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왜 그런 정치가 발생하고 반복되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이 개념들이 기본적으로는 낙인을 찍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가능하고 때로는 유효하기도 하지만,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연구자는 현상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의 담론(상징)적이고 정동적인 차원을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올림픽공원 시위에서 제시된 ‘재선거’ 요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은 이를 법적인 의미에서 선거를 다시 실시하는 것으로 축소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라면 재선거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선거를 다시 하거나 혹은 다시 하지 않는 것,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선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조직을 개혁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재선거 요구에는 많은 이질적인 요구들이 접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기득권 정당(주로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이기도 하고,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이기도 합니다. 정당과 사회운동 세력에 동원되고 싶지 않는 마음이기도 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시민으로 남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소비주의적이고 탈정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중정치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표면적인 요구보다는 ‘재선거’라는 요구가 어떤 요구들을 담는 중심축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정선거’는 안되고, ‘재선거’는 수용 가능하다는 주장 역시 현실적이지만 다소 소박한 주장입니다. 오히려 문제는 진보정당과 사회운동 진영에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서사와 조직적 역량이 부재하다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현재 그런 역량을 갖고 있는건 극우 세력들입니다. 오히려 극우 세력들이 억지로 (대진연과 같은) ‘극좌’를 만들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대표되기를 원하지 않고, 정치를 거부하는 이들을 왜 나서서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대표와 정치 일반이 아니라, 기존에 자신들의 요구를 대표하는 특정한 방식, 특정한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새롭게 대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미 SNS 등을 통해 스스로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구요. 적어도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조직되지 않는 개인들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진보정당과 사회운동 진영의 화두였습니다. 물론 조직되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지만 말이죠.
하지만 저는 정치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개인으로 남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고 싶은 것은 혼자인게 좋아서가 아니라 같이 있는게 힘들어서인 경우가 많죠. 결국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될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입니다. 라클라우 사상은 집합 정체성, 즉 집단적인 방식으로 ‘우리’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역동적인 방식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해 줍니다. 물론 이 렌즈를 낀다고 갑자기 극우 정치가 민주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고민해야죠. 계속해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저는 라클라우를 읽으며 그러한 고민을 함께 시작할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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