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없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2026년 8월 8일(토) <모든이의 민주주의 희우재> 시민특강의 발표자료입니다. 제 책 『근본 없는 민주주의』를 다양한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글을 썼습니다. 책의 내용이 1) 지성사 연구, 2) 라클라우 연구, 3) 민주주의 연구의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책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읽어 주시는 분들에게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지성사 연구
지성사 연구의 관점에서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서구 사상을 ‘실천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라클라우 사상은 매우 실천적인 관점에서 수용되어 왔다. 기존 연구자들은 사상 자체에 대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급진민주주의와 좌파 포퓰리즘과 같은 정치 전략의 관점에서 사상을 수용해 왔다. 이론적 탐구가 이루어질 때조차도 좌파의 정치 전략을 기획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1990년대 초반 이병천과 박형준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2000년대 후반 조희연과 급진민주주의 연구모임 데모스의 사례, 좌파 포퓰리즘 전략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비상한 관심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개별 연구자의 지향이라기보다는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복권과 비제도권 학술운동의 성장을 조건으로 형성된 한국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학술장(좌파 지식장)의 지적 관행 또는 지식 패러다임에 따른 지식사회학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80년대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낳는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강한 실천적 목적에서 비롯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수용은 주류 아카데미 학술장과 구분되는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학술장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비록 현실 사회주의의 급격한 몰락으로 이 흐름은 머지않아 위기에 처하고, 90년대 이후 학술장이 전면적으로 제도화되면서 ‘주류’와 ‘비판’의 구도는 힘을 잃었지만, 여전히 상징적인 차원에서 학술장의 지적 관행과 패러다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며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은 현재 재생산되지 못하면서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른바 ‘비판의 위기’는 바로 이 현상을 가리킨다.
라클라우 사상의 한국적 수용 과정은 사상의 실천적 수용이 반드시 실천적 활용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라클라우 사상은 실천적 목적으로 수용되었지만, 정작 사상 자체는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다양하게 해석되고 실천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이 수용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체계적인 이론적 탐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현실의 사회운동과 정치 영역에서도 수용되지 못한 채 지식인들의 담론으로만 남아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라클라우 사상을 실천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행을 벗어나 사상을 새롭게 주제화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라클라우 사상을 어떻게 수용해야 실천적으로 수용하는 것일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먼저 지성사적 관점에서 사상이 형성된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폭넓게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책에서 라클라우 사상의 이론적·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다룬 이유이다. 구체적으로 이론적 배경으로는 알튀세르와 그람시의 서구 마르크스주의뿐만 아니라 분석철학, 현상학, 구조주의 전통에서 이어진 서양 철학의 반본질주의 운동을 살폈다. 또한 역사적 배경으로는 1960년대 사회운동 참여라는 생애사적 배경,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 이행 논쟁과 국가론 논쟁 및 1980년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 등 논쟁사적 배경, 나아가 1970~80년대 신사회운동의 등장과 1990년대 이후 탈근대로의 이행에 이르는 세계사적 변화가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함께 짚어보았다. 라클라우를 비판하기 이전에, 먼저 라클라우가 ‘말한 것’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딜레마에 빠진다. 라클라우가 말한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결국 사상을 수용하는 이유는 정치 현실을 설명하고, 그러한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러니까 사상에 대한 훈고학적 작업이 한쪽에 있고, 여전히 그와 구분되는 실천적 수용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대립한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이시윤의 『하버마스 스캔들』, 그리고 조금 결은 다르지만 서구 사상의 한국적 수용을 비판적으로 다루어 온 진태원의 탁월한 작업들은 결국 한쪽 편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즉,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서구 사상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서구 사상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반복되면서도 지속적인 학술적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과 맞물려 설득력을 얻는다.
나는 조금 다른 답을 제시하고 싶었다. 이른바 이론 연구라는 것은 사상이 형성되는 시간과 그것이 수용되는 시간, 그리고 그것을 다시 수용하고자 하는 현재의 세 가지 시간이 항상 맞물려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수용사(1부), 형성사(2부~4부), 재해석(5부) 순으로 배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어느 한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더 엄밀한 작업이 가능했겠지만, 1) 사상을 어떻게 연구해 왔는가, 2)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3) 사상은 어떻게 재해석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결국 서로 연결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이 세 가지 문제가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는 나의 경험과 어떻게 연결되며 또 앞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사상의 실천적 수용이란 세 가지 상이한 시간과 문제를 엮어내면서 자신만의 해석을 제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연구자로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비평가이자 정당의 구성원, 그리고 정치공동체의 주체로서 논문 쓰기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말하기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실천적 차원은 이 모든 층위에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라클라우 사상이 형성된 맥락을 열심히 이해하는 것이 실천적일 수 있고, 라클라우의 관점을 따라 말하고 쓰면서 내가 놓인 현장에서 헤게모니 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모든 과정이 실천이다. 이런 점에서 사상에 대한 훈고학적 탐구와 이른바 ‘실천적’ 수용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할 이유는 없다.
2. 라클라우 연구
라클라우 연구의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라클라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책의 학술적 기여는 라클라우 사상을 존재론적(ontological) 차원과 존재적(ontical) 차원으로 나누어 사상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준거점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기존 연구는 주로 존재적 차원에서 라클라우를 정치 이론과 전략의 관점에서 해석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클라우 사상의 핵심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반본질주의 관점, 즉 정치에 대한 반본질주의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앞선 내용과 연계해 보자면, 한국에서 이루어진 ‘사상의 실천적 수용’은 역설적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라클라우가 의도했던 본래의 의미를 해석의 공백으로 남겨두는 결과를 낳았다.
기존 연구가 라클라우 사상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라클라우 사상을 그 고유의 철학적·이론적 토대가 아닌, 기존 연구자들의 상이한 토대 위에서 외재적(external)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1부의 마지막에서 나는 기존 연구의 담론환원주의와 정치적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는, 그러한 비판의 전제 자체를 의문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예컨대 라클라우 사상은 ‘사회’의 불가능성과 정치의 우위를 주장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기존 연구는 여전히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회적인 것의 우위라는 관점에서 사상을 해석해 왔다는 것이다. 특정한 입장을 갖는 것은 자유이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에서 사상을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상의 기본적인 전제와 충돌하며, 지속적으로 사상을 실천적으로 활용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면, 그러한 전제는 의문시되어야 마땅하다.
존재적 차원에서의 정치 이론과 정치 전략 역시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급진 민주주의는 정치 이론인가 전략인가? 라클라우 자신이 이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해석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급진 민주주의 이론은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적 적대의 구성 방식을 설명하는 정치 이론을 말한다. 반면 급진 민주주의 전략은 서유럽 복지국가 헤게모니 구성체의 위기라는 국면에서 신좌파가 취해야 할 정치 전략을 말한다.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 전략 역시 서유럽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구성체의 위기와 포퓰리즘 계기라는 국면에서 신좌파가 취해야 할 정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라클라우 사상의 한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사유와 구체적인 정치 전략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정치(사회) 이론의 차원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서유럽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구성체의 형성과 탈구(dislocation)라는 역사적 맥락을 언급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정치 이론으로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급진 민주주의 이론 역시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이 누락된 민주주의 혁명 이후의 보편 이론에 머문다. 따라서 라클라우적인 사회 분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정치(사회) 이론의 차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가 담론환원주의와 정치적 상대주의를 근거로 라클라우적인 사회 분석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데 머물러 왔다면, 나는 사상에 대한 내재적 해석을 통해 그러한 공백을 메우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예컨대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구성체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구성체 개념이나 그람시의 역사적 블록 개념과 어떻게 다르며, 이를 ‘체제’ 수준의 사회구조 분석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요구(demands)를 최소 분석 단위로 삼는 라클라우의 방법론은 어떻게 집합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활용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이 그것이다. 이것이 내가 사회과학적 분석과 유리된 채 정치철학 담론으로 남아 있는 라클라우 사상을 다시 사회과학 이론으로 이론화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책의 5부에는 개인적으로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이러한 맥락을 담은 시론적인 작업들이 수록되어 있다.
라클라우 사상과 무페 사상의 관계 역시 좀 더 탐구되어야 할 주제다. 이들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같이 쓰고, 이후에도 긴밀한 지적 동반자로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라클라우와 무페는 90년대 이후 서로 다른 맥락에서 학술 작업을 이어갔다. 라클라우가 여전히 대륙철학 전통에서 보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방식으로 정치 존재론(political ontology)을 발전시키고자 했다면, 무페는 영미권 정치 이론의 전통에서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등과 경합하며 경합적 다원주의와 같은 ‘민주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론적 개입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해야 하며, 둘을 뭉뚱그려 ‘라클라우와 무페’로 성급히 묶거나 무페가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라클라우 사상을 합리적으로 길들였다고 섣불리 판단할 필요는 없다. 라클라우와 무페 사상의 (불)연속성은 여전히 이론적 탐구를 필요로 하는 주제이다.
책에는 담지 못했지만, 라클라우 사상에는 세 가지 중심축이 있다. 첫 번째는 담론(적대)의 차원으로, 이는 모든 존재가 그 의미와 정체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일반 존재론(general ontology)의 차원이다. 두 번째는 헤게모니의 차원으로, 이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보편자와 특수자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세 번째는 포퓰리즘의 차원으로, 이는 정치철학 전통에서 정치공동체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인민(people)과 인민적 주체성에 대한 탐구와 관련이 있다. 담론(적대)이 사상의 밑변이라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정점으로 하는 헤게모니의 차원이 좌변, 『포퓰리즘 이성』을 정점으로 하는 포퓰리즘의 차원이 우변으로 삼각형을 이룬다. 이 관점에서 보면 20년 차이를 두고 1985년과 2005년에 발표된 두 대표작 사이의 연속성 문제도 해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민주주의 연구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연구의 관점에서 이 책은 근본 없는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radical democracy 개념을 번역한 것인데, 일반적으로 radical이 급진적 혹은 근본적으로 번역되는 것을 고려하면 다소 이상한 번역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오역(?)이 의도한 바는 라클라우가 민주주의를 어떠한 최종적 토대나 궁극적 본질이 부재한, 언제나 과정 중에 있는 질서로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르포르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비어 있는 장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면, 라클라우는 복수의 비어 있는 장소들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 자체가 민주주의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현상을 어떻게 분석하고 개입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책에서는 이를 사회과학 철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정치학 연구는 정치를 좁은 의미의 제도정치, 즉 정치제도와 국가, 정당과 선거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로 인해 정치를 제도정치로 환원하면서 제도정치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차원을 시야에서 놓치기 쉽다. 비판적 사회학과 정치사회학 연구는 이를 비판하면서 사회 구조와 사회운동의 차원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 역시 정치 현상을 사회적 관계로 환원하는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과 계급환원론은 정치·이데올로기 현상을 계급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관계로 환원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라클라우적인 민주주의 연구는 제도정치로의 환원과 사회적 토대로의 환원이라는 이중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좁은 의미의 정치(politics)와 구분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영역을 분석과 개입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영역은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지는 차원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사회학 연구가 개인, 집단, 사회구조라는 사회적인 것의 실재로부터 출발한다면, 라클라우적인 사회과학 연구는 개인, 집단, 사회구조를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 실재가 헤게모니 투쟁에 의해 구성 중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회 이론은 개인, 집단, 사회구조와 같은 사회(학)적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논리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나아가 정치 전략은 시민사회의 요구나 사회운동의 요구 등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요구를 단순히 반영하거나 대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가 구성되고 정치적 요구로 전환되는 과정 자체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를 ‘정치’를 ‘사회’라는 토대(본질)로부터 해방시키는 새로운 사회과학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근본 없는 민주주의는 현대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출발점은 이 현상들을 규범적으로 문제 삼기보다는, 민주주의 사회의 환원 불가능한 포퓰리즘 정치가 발현되는 다양한 현상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거나 그러한 요구를 온전히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강력한 반기득권 정서를 바탕으로 점점 더 반민주당 정서로 수렴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과 극우 개념을 규범적으로 활용하면서 이를 병리화하는 전략은 정치 비평과 현실 개입의 수단으로 적절히 활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러한 현상들이 어떤 사회적 조건과 담론적·정동적 메커니즘을 통해 드러나는지 분석하는 데는 취약하다.
포퓰리즘과 극우에 대한 규범적 접근은 결국 민주주의의 ‘정상’ 상태로 여겨지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은밀히 강화하는 데 그칠 위험이 있다. 그보다 나는 이 현상들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려 온 지배 질서의 탈구로 인해 열린 포퓰리즘 계기에서 대중정치가 급진화되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할 것을 권하는 편이다. 여기서 급진화란 진보적, 좌파적 의미의 급진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대로, 이러한 급진화의 방향이 왜 우경화, 극우화의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는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러한 분석을 토대로 이를 보다 민주적이고 좌파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정치 전략 역시 고안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포퓰리즘, 극우, 파시즘과 같은 정치를 한쪽에 두고, 그와 구분되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진정한 정치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진정한 정치’에 대한 관념을 해체하고 우리를 끝없는 헤게모니 투쟁의 과정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이는 단순한 사고 실험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치가 우파적이고 극우적인 방향으로 변질되는 것을 거듭 경험했다. 현대 극우 정치 역시 자유민주주의적 합리성의 외피를 쓰고 등장한다. 비슷하게 우경화, 극우화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경향 역시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운명에 놓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에서 나는 라클라우 사상이 가야 할 길이 분명하거나 그 길을 빠르게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라클라우는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가 말해주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지금은 우리가 당연히 믿어왔던 신념과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가 아니다. 그동안 자명하다고 믿어 왔던 가치와 규범을 원점에서 재고하고, 우리가 서 있는 토대가 실은 아무런 근본이 없는 불안정한 지반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매우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바로 그 ‘근본 없음’을 직시하는 용기만이 민주주의를 그 어떤 권력도 독점할 수 없는 비어 있는 장소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마치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허무한 제안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여전히 라클라우 사상의 ‘쓸모’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대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해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오롯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매 순간 정치를 새롭게 기획해야 하는 자유를 얻는다. 돌아가는 것 역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이다. 더디고 고통스러운 길일 수 있지만, 라클라우를 함께 읽으며 그 길을 가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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