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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인-무브 서평

로토스를 먹는 오디세우스: 아도르노와 놀란의 『오디세이아』

by 인-무브 2026. 8. 5.

로토스를 먹는 오디세우스: 아도르노와 놀란의 『오디세이아』

 

한상원(서교인문사회연구실)

영화 <오디세이> 포스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드물지 않게 철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현대 철학에서는 대표적으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공저한 계몽의 변증법』의 (아마도 아도르노가 서술한 것으로 추측되는) ‘부연 설명 1.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에서 오디세이아가 심도있게 다뤄진다.

 

아도르노가 바라보는 서사시 오디세이아주체성의 근원사(Urgeschichte)’를 보여주는 텍스트이며,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부르주아적 주체의 원형으로, 곧 계몽적, 합리적 주체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아킬레우스가 불사의 몸을 가진 최강의 용맹한 전사라면, 오디세우스는 지략(List)을 통해, 자신의 합리성(Logos)을 통해 토로이를 멸망시켰으며, 그의 귀환 과정에서 등장하는 모험들은 이성을 통해 자연의 힘, 신화적인 힘을 극복해 나가는 계몽적 주체성의 형성과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르노가 묘사하는 오디세우스는 차가운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다스리며, 남성적인 지배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거스르는 힘들을 제압하고, 또 아내를 탐하는 구혼자들을 척살하면서 권력을 쟁취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러한 외적 자연의 지배과정은 동시에 내적 자연에 대한 지배, 곧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폴리페모스를 무찌르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udeis)’라고 불러야 한다. ‘오디세우스라는 고유명사는 아무도 아닌 자라는 호명을 통해 소멸한다. 고유성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얻어지는 익명성을 통해 주체는 자기보존을 달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획득된 자기보존은 동시에 익명적 존재로의 후퇴, 곧 자기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도르노는 오디세이아라는 신화적인 텍스트 속에서 현대적인 익명적 지배의 키워드를 읽어낸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오디세이>에서 보여주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이와는 정반대로 그려진다. 그는 강인하고 합리적인 주체이자 남성적 지배자가 아니다.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고뇌하는 자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책을 통해 불에 타고 멸망하는 트로이를 바라보며 괴로워한다. 아군에 의해 죽어나가는 무고한 사람들을 보며 좌절한다. 또 그는 귀향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희생되는 전우들을 생각하며 깊이 고뇌한다. 그는 죄의식과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로 인해 끝없이 고통받는다. 마치 모친을 살해한 후 복수의 여신 에레니에스에게 시달리는 오레스테스처럼, 오디세우스는 끝없는 고통 속에 서 있다. 세이렌의 달콤한 노래는 그에게는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기제였다. 그는 서사시가 그려내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고뇌하는 근대 문학의 주인공, 이를테면 햄릿을 더 닮았다.

 

<Odysseus (Sehnsucht nach der Heimat)> Alexander Rothaug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는 로토스(연꽃). 오디세이아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로토스를 먹지 않는다. 로토파고이족(로토파겐)의 땅에서 다른 선원들이 로토스를 먹고 망각과 향유에 젖어 귀향이라는 목적을 잊어버렸을 때, 오히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을 야단치면서 그들을 연밥의 몽롱한 환각에서 일깨워 각성시키는 계몽적 합리성을 구현하고 있었다. 아도르노는 이런 맥락에서 오디세우스에게서 행복의 역설을 발견한다. 노동하지 않고 향유하는 로토파고이족의 삶의 방식은, 땀 흘려 노동하고 문명을 개척하는 것을 인간의 참된 모습으로 간주하는 문명인들에게는 야만의 모습에 불과하다. 오디세우스는 고된 노동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성과 하인들, 권력을 되찾는 것을 진정한 행복으로 부르지만, 그러나 아도르노가 보기에 그러한 오디세우스의 노동윤리는 현대인들의 지옥 같은 삶을 부추기는 근대성의 저주와도 같았다.

 

<Odysseus in the Land of the Lotus-Eaters> Theodoor van Thulden

 

반면 놀란의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망각하기 위해, 번뇌를 잊기 위해 스스로 로토스를 먹는다. 오히려 로토스를 처음 권한 칼립소가 그를 만류할 만큼 그는 로토스의 환각효과에 취해,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신에게 아내와 자식이 있는지를 모두 망각한다. 그는 칼립소에게 유폐된 채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망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폐인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놀란의 오디세우스, 곧 신화 세계의 영웅이 아니라 좌절하고 고뇌하는 자로서의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측면은 오디세우스의 남성성을 희석시키는 데에서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와 잠자리를 갖고, 7년간 요정 칼립소의 남편이 되어 생활하며, 스케리아섬의 파이아케스인들의 공주 나우시카아가 반할 만큼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아도르노는 구혼자들 앞에서 정절을 지키는 여성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며 그를 유혹하는 키르케의 모습에서 가부장제의 두 가지 여성적 이미지를 발견한다. 가부장제는 정숙한 페넬로페와 음란한 키르케의 이중성 속에서 여성을 남성의 지배 아래에 종속시킨다. 오디세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이중적 측면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남성적 지배자다.

 

<Penelope and the Suitors> John William Waterhouse

 

그러나 놀란의 <오디세이>는 그러한 성적 관계들을 암시하는 장치들을 모두 소거했다. 여기서 오디세우스는 마치 거세된 남성과도 같다. 그는 여성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돌봄을 갈망하는 연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키르케의 목에 칼을 대고 그녀를 협박하는 남성적 영웅이 아니라, 그녀와 협상을 통해 돼지로 변한 동료들을 돌려받고 조언을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도처를 헤매며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놀란의 오디세우스는, 계몽적 주체로서 합리성을 통해 신화적 힘들을 정복해 나가는 아도르노의 오디세우스의 정반대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두 상반된 이미지의 오디세우스를 비교해 봄으로써, 우리는 서사시의 영웅을 독해하는 서로 다른 시선들을 만난다. 아도르노의 시대는 합리성이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계몽의 약속이 전체주의의 지배로 귀결되는 전도된 논리의 시대였다. 놀란의 <오디세이>가 개봉되는 오늘의 세계는 다른 의미에서 전도된 논리의 시대다. 오늘날 우리는 주인에 의해 지배받는 세계가 아니라, 주인기표가 상실되고 헤게모니가 소멸하는 가운데 누구도 지배하지 않지만 모두가 지배받는 세계, 고삐 풀린 힘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세계, 밀실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벽이 사라지고 외부가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오늘날에는 신화적인 영웅의 모험을 고대하기보다는, ‘당신도 나처럼 고통받는가를 물으면서 더 커다란 위안을 얻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시대에는 영웅의 모습도 변할 수밖에 없다. 지배자로서의, 합리적 주체로서의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죄의식 속에 고뇌하는 나약한 피조물로서의 오디세우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현시대의 어떤 면모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