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도르노를 읽는가: 하나의 강의
베르너 보네펠트(Werner Bonefeld)
번역: 한상원(서교인문사회연구실)
[아래 글은 베르너 보네펠트(Werner Bonefeld)의 'Why read Adorno: A lecture'를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아도르노 특집으로 마련된 <Radical Philosophy> 2026년 여름호(221호)에 수록되어 있다.]
http://radicalphilosophy.com/article/why-read-adorno
Werner Bonefeld · Why read Adorno: A lecture (2026)
www.radicalphilosophy.com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비관주의적이라는 이유로 종종 폄하되고, 실천적인 적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한다.[i] 실제로 그는 1968년 학생 반란을 지지하기는커녕, 1969년에는 경찰을 불러 자신의 연구소에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요하네스 아뇰리(Johannes Agnoli)가 그의 임종 당시 강조했듯이, 경찰을 부른 아도르노는 이미 '자신의 후계자'였다.[ii] 그의 제자들은 아도르노의 결정에 깊은 실망감을 느꼈지만, 그의 비판이론을 자신들의 마르크스주의적 자본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그 발전을 요구했다. 그들은 스스로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포함한 부르주아 대중이 아도르노를 문화적 자산으로 전유하고 그의 비판이론을 순전히 문화적인 의미만을 지닌 지적인 문제로 '격상'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iii] 아도르노 저작 속에서 나의 관심은 어떻게 그의 저작이 마르크스와 함께, 그리고 마르크스를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심화하는가에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본 논평은 두 개의 중첩적 단계들로 나뉜다. 이 글은 아도르노 사유의 중요성에 대한 간략한 개요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사회 비판으로서 부정변증법으로 이어진다. 결론에서는 아도르노에게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 즉 마르크스가 계급 투쟁이라고 불렀던 것이 경제적 범주들의 비개념적 내용이라는 점을 요약한다.
왜 아도르노를 읽는가?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주의 비판과 동의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필연성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들에, 그리고 따라서 경제적 객관성의 개념에 속하지 않는 것에 기반을 둔 허구적 객관성으로 해독해내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개념이 비개념적인 것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객관성의 동일성은 그것의 비동일자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개념은 잔여물을 남기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성격을 포착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잔여물은 개념의 비개념적 개용, 즉 자연적으로, 사물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경제적 힘들, 선험적 사회 규범들 그리고 자연스러운 정치적 제도들의 형태를 취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들이다. 인간 본성이든 경제적 본성이든, 역사적으로 과잉결정된 형태들로서 그것들의 현상은 그 사회적 구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비판적 사회 이론의 과제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들과 그 관계들의 사회적 실천 속에 숨겨진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주어진 현실적 사회적 관계는 사물 간의 관계의 형태를 띠게 되므로, 현실적 사회적 관계는 경제적 사물 간의 관계로서의 사물화된 현상 속에서 사라진다.[iv] 실재적인 경제적 추상의 형태를 띠는 사물과 같은 관계 속에서 그것들이 사라진다는 것(disappearance)은 곧 다시 나타난다는 것(reappearance)을 의미한다. 현실적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사회적 개인들은 사라진 과정 속에서 그들 자신의 사회적 세계의 경제적 인격화 또는 (마르크스 이후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격적 가면(character-masks)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산물에 의해 지배된다'.[v] 사물화된 세계는, 지각되고, 식별되고, 분류되며, 분석되고, 평가되는 대상으로서의 사물화된 사물들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물화된 사회적 관계들의 세계다. 간단히 말해, 경제적 사물들의 운동은 개인들에게 가격의 신호를 보내고, 이는 개인들이 파산하지 않기 위해 순응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들을 강요하는 것은 경제적 대상의 형태를 띤 그들 자신의 사회적 실천이다. 그것의 본성, 그것의 필연성과 요구들은 본성상 사회적이다. 그러한 경제적 본성은 사회적 본성이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사물화된 사회적 형태들을 동일시하려는 유혹에 저항한다. 대신, 무엇이 동일시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의 동일성 속에서 어떤 것이 (경제적) 실재추상으로 나타나는지를 묻는다. 아도르노는 사회에 관해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 사유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경제적 힘의 형태를 띠는, 마르크스가 ‘현실적인, 주어진 사회적 관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해독하려 한다.[vi]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그가 보기에 고통의 역사적 경험에 기반을 둔 ‘사회’라는 강조된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심화시킨다.[vii]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감수성이 오로지 아픔과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해 왔다’.[viii] 마르크스는 인간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기는 하지만,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ix]라고 부르는 것을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논하지는 않는다. 아도르노에게서 ‘고통에 목소리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은 ‘모든 진리의 조건’이며, 이는 그의 비판이론의 핵심이다.[x] 그의 비판이론은 사물화된 사회가 사회적 산물이며, 그 신비화된 성격은 인간적-사회적 실천에 대한 이해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물신주의 비판을 사회적 상형문자 해독이라고 언급했는데, 아도르노는 이를 ‘인간으로 환원하는(ad hominem) 비판’이라고 말한다. 이 이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가설로 제시된 구조나 경제적 전제들의 동일성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으로 환원하는 비판은 사물화된 사회 형태들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해독, 그리고 그러한 형태에 외관상 독립적인 의지와 자연적 힘을 부여하는 사회적 실천들에 대한 규명에 관한 것이다. 실증주의적 사고의 방법으로서의, 그리고 사회 형태들의 추상적 유물론적 자연화로서의 ‘동일화’에 대한 아도르노의 ‘아니오’는, 그러한 형태들의 객관적 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이 그것들을 그렇게 만드는지를 알고자 하며, 그리고, 그는 마르크스와 함께 주장하는데, 그것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그 내부에 은폐되어 있다. 즉, ‘현실적인, 주어진 삶의 관계들’은 이 자기운동하는 경제적 힘의 형태 속에서 ‘신격화’되고, 신성시되며, 사물화되고, 자연화되었다.[xi] '사회는 본질적으로 과정이다.'[xii] 그것은 자기증식화하는 가치로서 자본의 과정이다. '이것의 배후에 계급관계 전체가 놓여 있다.'[xiii] 가치의 자기증식 과정으로서의 자본은, 화폐으로부터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내기 위한 인간적 원료로서, 잉여가치 생산자로서 생계를 꾸려가는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다. ‘오로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xiv]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살아있는 노동의 가치화(Valorisation)를 통해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구 충족은 ‘단지 부수적인 일’에 불과하다.[xv] 가치화의 전체 과정은 ‘특수한 사회적 갈등과 적대 너머에서, 혹은 그러한 그것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적대 자체를 통해 작용한다 […] 사회는 여전히 계급 투쟁의 장이다’.[xvi] 아도르노에게 계급투쟁은 자기보존의 문제이며, 이는 그에게는 실재추상의 과정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숨겨진 비밀을 재현한다.
아도르노 사상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간략한 개요는 다소 의아하게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비교적(esoteric) 지식인으로 광범하게 간주되며, 그의 문화적 비관주의, 긍정성의 결여는 단지 당대의 투쟁들로부터 지적으로 거리두기를 허가하는 데 기여할 뿐인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사용에 의해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명망 있는 후계자가 된 하버마스는 학생 운동을 좌파 파시즘으로 비난하고, 아도르노의 사회 이론을 이성의 약속으로부터의 탈주로 여겼다. 1970년대 학생 봉기의 쇠퇴와 분열, 그리고 그로 인한 정치 전략에 대한 분파적 논쟁, 그리고 마침내 1980년대 초, 학생 봉기가 국가와 사회 제도에 흡수되는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그 대신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성의 진보를 보장하기 위한 의사소통 행위의 정치철학과 실천을 옹호했다. 그의 정치철학은 건설적인 사회 비판을 목표로 했으며, 이는 이성적인 철학으로서나 사회 개선을 위한 접근 방식으로서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던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헬무트 라이헬트(Helmut Reichelt)와 크리스 오케인(Chris O’Kane)이 보여주었듯이, (하버마스 이후에) 비판이론을 사회 진보의 가능성에 관한 합리적 담론으로 변형시키려는 노력은 또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을 하버마스가 설립한 원칙들에 따라 문화비평과 이성의 철학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을 포함했다.[xvii] 아도르노의 사회에 대한 확고한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하버마스의 이론은 사회 현상을 마치 외부적인 이성적 척도에서 바라보는 듯하며, 자본주의 사회를 적극적 자유, 실질적 평등, 그리고 분배 정의로 이끌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도르노의 제자들이 이미 우려했던 것처럼, 그의 명백한 후계자들은, 피터 고든(Peter Gordon)이 말하듯, 그를 행복과 보편적 인간 번영으로 특징지어지는 좋은 사회를 위한 현상적 규범적 논증을 제공하는 부정변증법을 가진 문화적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렸다.[xviii] 간단히 말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자(Neinsager)'의 작업은 자본주의 문명의 문화적 기록으로 양식화되었다.[xix]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아도르노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그 자체를 위한 것도, 그의 ‘두 번째 죽음’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며, 자본의 사물화된 형태를 ‘현실적인, 주어진 사회적 관계들’의 형태로 해독함으로써,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부정변증법에서 무엇이 부정적인가?
부정변증법은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진보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 이론들의 주요 사상가는 헤겔이었다. 그의 변증법은 종합과 화해의 변증법, 즉 부르주아 문명 시대로 향하는 역사의 진보적 운동에 대한 변증법이었다. 가장 단순화된 버전 속에서, 그의 변증법은 스미스의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일련의 진보적인 단계와 과정으로서의 역사 개념을 위한 철학적 정당화를 제공했다. 애덤 스미스는 수렵채집인의 생산양식에서 시작하여 그가 상업 사회로 부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정점에 달하는 4단계 역사 이론을 지지했다. 그는 상업 사회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교역과 물물교환 성향의 전개로 나타나는 최종 결과로 보았으며, 이는 역사의 종말 지점에서 상업 사회의 도래를 위한 길을 닦는 점증하는 노동 생산성에 기반을 둔 점증하는 노동분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자연과 역사의 변증법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보았던 정설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논증에 의해 모순과 종합의 변증법을 설명했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변증법이 부정을 통해 긍정적인 어떤 것을 달성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부정의 부정’, 즉 정반합의 형상에서는 사회적 모순과 적대가 역사의 종말에서 인간이 그의 가정된 본성과 화해하기를 갈망하는데, 그러한 형상은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역사의 정점 또는 사회주의에서의 완성된 인간성을 향한 필연적인 단계로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긍정 변증법은 역사의 흐름 속에 자행된 불구화와 살인, 잔혹과 폭력을 망각하고, 이러한 망각된 것을 완전히 발전한 인류의 달성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정당화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면서, 『부정변증법』은 ‘변증법을 그러한 긍정적 특징들으로부터 해방’하고자 시도한다.[xx] 그것은 사회적 모순의 진보적 종합을 통해 인간과 그 가정된 본성을 조화시키는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추상적으로 구상된 미래의 인류를 향해가는 진보의 기관차가 아니다. 오히려 부정변증법은 부르주아 사회의 숨겨진 비밀인 자기보존을 위한 사회적 실천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둔다. 실로 계급투쟁은 하나의 생산 양식에서 다른 생산 양식으로의 역사의 진보에 봉사하는 투쟁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생활 수단에 대한 접근을 획득하는 것과 관련된다. 계급투쟁은 고난을 극복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과 관련된다. 고통에 대한 투쟁은 고통을 야기하는 조건들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억압과 잔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역사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역사는 사람을 불구화하거나 살해하지 않는다. 역사는 착취하고 지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리고 그 이상은 인간이 행하는 것이다. 역사는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 그들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비판이론은 사유의 체계가 아니다. ‘체계란 우리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다 […]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세계관이 아니며 모든 것을 매개하지만 어떤 것도 위로부터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xxi] 부정변증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사유는 동일화를 포함한다. 그러나 사회 현상을 규명하고 정의하며, 분류하고 분석하여 그 역사성을 명확히 하고 다양한 사회적 관점과 시각에서 의미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통적인 사회 이론과는 대조적으로, 부정변증법은 사회의 구조적 동일성, 발전 법칙, 그리고 사물화된 본질에서 무엇이 동일화되는지를 묻는다. 부정변증법은 사회적 객관성이 갖는 범위와 규모, 운동과 힘을 규명하기 위해 사회적 사물화를 분석하지 않으며, 또한 경제적 발전의 전망을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잉여가치 생산자들을 빈곤에 갇히게 만들고 막대한 부의 축적을 초래하는 부의 분배의 불공정을 비난하기 위해 경제적 수량들의 운동을 분석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무엇이 사물화되었으며 무엇이 따라서 사물화 속에서 나타나는지 묻는다. 그것은 무엇이 수량화되고 무엇이 따라서 비교가능하고 통약가능한 추상적 수량들이자 경제적 숫자들의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들의 확장된 노동이 '숫자들로 환원되지 않는'[xxii], 즉 단지 여분의 인간 원료, 경제적 영점들 그리고 그 자체로 잉여 주체들이 아닌[xxiii] 노동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묻는다. '인간 노동의 평균 노동시간이라는 추상적 보편 개념으로의 환원'은 '근본적으로 동일화 원칙과 친화적이다.'[xxiv] 그것은 비동일적 개인들과 그들의 산 노동 지출을 통약가능하고 동일하게 만든다. 이것은 다만 같은 것의 수량화될 수 있는 동일성들, 잉여가치의 추출에 의해 매개되는, 더 많은 양의 화폐를 위해 교환되는 일정한 양의 화폐의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자는 그가 한 기업에서 다른 기업으로 옮길 수 있는 한 자유롭다.'[xxv] 임금에 기반한 생계 수단 접근은 노동의 이윤 실현 가능성에 달려 있으며, - 이윤을 실현하지 못하는 고용주는 노동자를 해고한다 - 이윤의 기반이 되는 잉여가치는 '노동력 생산에 필요한 [...] 시간과 노동자가 노동에 투입하는 시간' 사이의 차이, 또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차이다.[xxvi] 가치 법칙은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낳아야 한다는 필연성을 전제로 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 재생산의 보편적 원칙이다. 화폐적 양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 말하자면 가치가 없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을 '허위적 상태에 대한 존재론'으로 이해한다.[xxvii]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순은 동일성의 관점에서 본 비동일성'[xxviii]이며, 이때 중요한 것은 추상적 경제적 수량들의 운동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것 덕분에 목숨을 건지기' 때문이다.[xxix]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화폐를 위해 교환될 수 있는 경제적 수량들로서 노동 생산물의 계산가능한 동일성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독자적인 문법이자 사물화된 본질이며, 그러나 제아무리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 객관화의 형태 속에서 사물화되고 자연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그 형태는 인간적이다’.[xxx] 운명이라는 신화적 관념은 그것이 '세속적인 '사물의 논리'로' 탈신화화될 때 결코 덜 신화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 논리는 객관적으로 전개되는 체계-논리와 친화적이며, 경쟁하는 가격의 신호들을 통해 현실적 개인들이라는 경제적 행위자들을 구조화한다.[xxxi]
동일성 사고는 실재의 직접성을 사회적 진리의 기초로 삼는다. 즉, 사실들은 스스로 말하지만, 그 해석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필연적인 가상으로 이해되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부정변증법은 사물화된 사회의 동일성 내부에 존재하는 ‘비동일성의 일관된 감각’이다.[xxxii] 그것은 사물화된 객관성이 가상에 불과함을 폭로한다. 그러나 그 가상적인 객관성은 비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한다. 사물화된 자본의 세계에서 진리는 허위의 한 계기다. 진리는 현존하는 허위로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진리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개념적인 두더지의 노동 과정과 닮았다. 그 객관적인 발전 법칙을 규명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개입의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사물화된 사회에 관해 사유하는 대신,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사회적 구성을 해독하고, 그 필연성을 이해하며, 그 안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 그 사회 내부에서, 그리고 그 사회를 통해 사유한다. 사물화된 대상의 형태 속에서의 사회는 '살아있는 인간의 사물화된 노동'이다.[xxxiii] 부정변증법은 세계의 흐름에 맞서 사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 비판의 강도는 사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 사유하는 것이며, 이것이 의도하는 것은 '내재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비판적 과정을 통해 자연성(Ansichsein, 즉자존재)의 외관을 해소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주장하기를, 마르크스는 '반성적인 정신에 이러한 즉자존재의 가상을 없애버리고, 그와 반대로, [...] 은폐된 것을 들춰내는 과제를 부과한다.'[xxxiv] 사물화된 사회에서 은폐된 채 남아있는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발전법칙도 아니고, 필연성의 자연적 경제 법칙도 아니며, 다소 추상적으로 구상된 인간 본성도 아니다. 사물화된 사회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주어진, 현실적인 사회적 관계들인데, 마르크스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들은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을 특징으로 한다. 이 투쟁 속에는 어떤 확실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해피엔딩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한 폭력적인 역사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경제 체제로 나타나는 그것의 구성된 개념 속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그 사물화된 외관은 바로 그 효과에 의해 감춰져 있는, 폭력의 역사가 갖는 실재-효과다. 부정변증법은 전통적 사회이론이 그러한 구성된 자연성 속에 명백히 숨겨져 있는, 역사의 출현 과정에서 드러난 폭력을 지워버렸다고 고발한다. 그 대신에, 부정변증법은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이 되었다고, 즉 실체추상의 체계이자 행위하는 개인들을 구성하는 생활세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꼭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출현 과정에서 나타난 법정립적 폭력이 그 확립된 사회적 개념의 법보존적 폭력으로 이행했음을 이해한다. 한편으로 사미 카팁(Sami Khatib)이 다른 맥락에서 논했듯이, '모든 일상적인 상품 교환 행위는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등장하게 해준 소위 '원시적' 또는 '근원적' 축적의 원초적 폭력을 일깨우는 응결된 지시자다.'[xxxv] 다른 한편, 실재추상의 과정으로서 사회는 '마치 고문 도구처럼 특수한 것을 그것이 깨질 때까지 짓누른다.'[xxxvi] 하지만 사회적 개인과 그들의 적대적인 사회적 재생산 실천들이 없다면, 교환도, 고문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특수한 것은 자신을 억누르는 체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존할 수 없다. 그러한 독립적인 실존을 얻는다는 것은 특수자가 그것을 매우 특수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결론
아도르노에게, 그리고 샬로테 바우만(Charlotte Baumann)의 독해를 따르자면, 인간적 고통, 계급사회에서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경제 범주들의 비개념적 전제이자 숨겨진 내용이다.[xxxvii] 마르크스의 비판이 산 노동의 관점에서 자본 축적법칙의 개념적 논리를 전개한다면, 이 과정은 자신을 생계 수단으로부터의 항구적 분리 과정으로, 그리고 따라서 자기보존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으로 제시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은 상처받은 주체들의 관계로서 사회의 개념적 논리에 주목한다. 고용 계약의 자유에서 표현되는 것은 생계 수단으로부터 노동의 자유다. '굶어 죽을 자유로 드러나는' 계약의 자유는 자본주의에서 자유 개념을 탈신비화한다.[xxxviii] 바로 역사적으로 획득한 자유 때문에, 노동력을 파는 사람들은 굶주림이라는 채찍에 시달리게 되며, 이는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는다.[xxxix] 궁핍한 개인은 기본적인 물질적 재화에 대한 접근을 위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개념에 속한다. 계급으로서 자유로운 노동자들은 잉여가치 생산자로서만 존경받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으로 말해 불필요한 존재들이다. 다른 계급의 인간의 이윤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노동력의 구매자에게 이윤을 창출해야만 고용이 유지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에서 제기되는 적극적 자유의 요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의 자유가 '경제적 속박' 상태에 있다고 서술했다.[xl]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이 의사소통 행위의 강령으로서 신뢰성을 얻으려면, 고통을 피하려는 투쟁이 자본 개념에 속한다는 사실이 망각되어 있어야만 한다. 아도르노(그리고 마르크스)에게는 이 통찰이 열쇠가 된다.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명확히 밝혔듯이, "마르크스는 올바르게도 모든 시대와 사회에 스며들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의 본질이 있다는 확신을 없애려고 했다. 바로 이 헤겔 철학의 요소가 그에게는 관념론적 망상으로 보였다. 오직 인간 그 자신 - 인간성의 '본질'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순간 속의 실재하는 인간 - 만이 행위하는, 그리고 고통받는 역사의 주체다."[xli] 아도르노에게서도 같은 것이 말해질 수 있다.
특히 암울하고 비참한 시기에는 아도르노의 비판 이론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 이론은 역사가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의 편에 서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가올 미래에서의 구원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어떤 약속도 하지 않는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성의 규범은 수많은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하는 현존하는 관계들의 규범일 뿐이다. ‘오직 내부로부터만 벗어날 수 있다(1969년 6월)’.[xlii]
베르너 보네펠트는 요크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ZRC SAZU 대학원 대학(슬로베니아)의 겸임교수다. 최근 출판물로는 Critical Theory of Economic Compulsion, 그리고 크리스 오케인과 함께 편집한 Adorno and Marx가 있다. 그는 블룸버리(Bloomsbury) 비판이론 시리즈와 '사회비판(Critique of Society)'지의 공동 편집자다.
[i] 마리 루이제 크로흐(Marie Louise Krogh)의 살뜰한 독해와 편집적 제안들에 감사한다.
[ii] Johannes Agnoli, ‘Die Schnelligkeit des realen Prozesses, Vorläufige Skizze eines Versuchs über Adornos historisches Ende’ [‘The speed of the real process, Preliminary sketch of an essay on Adorno’s historical end’], in Die Linke nach Adorno [The Left after Adorno], ed. Wilfried E. Schoeller (München: Kindler, 1969), 202.
[iii] Inge Hoffmann, Hans-Jürgen Krahl, Regina Schmidt, et al., ‘Eine Erklärung seiner Frankfurter Schüler’ [‘A Statement from his Frankfurt students’], in Die Linke nach Adorno, 203–207.
[iv] Karl Marx, Capital, vol I, trans. Ben Fowkes (London: Penguin, 1990), 1장,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The Fetishism of the Commodity and its Secret)’), 특히 165쪽의 눈에 띄는 문단들을 참조. 이 구절들은 여기서는 달리 표현되었다.
[v] Marx, Capital, 772.
[vi] Marx, Capital, 494.
[vii] Theodor W Adorno, Negative Dialectics, trans. E.B. Ashton (London: Routledge, 1973), 226–30를 참조.
[viii] Hoffmann, Krahl, Schmidt, et al., ‘Eine Erklärung seiner Frankfurter Schüler’, 203.
[ix] Theodor W Adorno, ‘Sociology and Empirical Research’, in The Positivist Dispute in German Sociology (London: Heinemann 1976), 80.
[x] Adorno, Negative Dialectics, 17–18.
[xi] Marx, Capital, 494.
[xii] Theodor W Adorno, ‘Society’, in Critical Theory and Society, eds. Stephen E Bronner and Douglas Kellner (London: Routledge, 1989), 267.
[xiii] Theodor W Adorno, ‘Marx and the basic concepts of sociological theory, from a seminar transcript in the summer semester of 1962’, in Adorno and Marx, ed. Werner Bonefeld and Chris O’Kane (London: Bloomsbury, 2022), 248.
[xiv] Adorno, ‘Marx and the basic concepts of sociological theory’, 248.
[xv] Theodor W Adorno, History and Freedom, trans. R. Livingstone (Cambridge: Polity Press, 2008), 51.
[xvi] Adorno, ‘Society’, 267, 272.
[xvii] Helmut Reichelt, ‘Jürgen Habermas’ Reconstruction of Historical Materialism’, in The Politics of Change, eds. Werner Bonefeld and Kosmas Psychopedis (London: Palgrave, 2000). Chris O’Kane, A Critical Theory of Social Domination (London: Bloomsbury, 2027).
[xviii] Peter Gordon, A Precarious Happiness: Adorno and the Sources of Normativ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4).
[xix] Hoffmann, Krahl, Schmidt, et al., ‘Eine Erklärung seiner Frankfurter Schüler’, 203.
[xx] Adorno, Negative Dialectics, xix.
[xxi] Theodor W Adorno, ‘Graeculus (II), Notizen zu Philosophie und Gesellschaft 1943-1969’, in Frankfurter Adorno Blätter VIII, ed. Rolf Tiedemann (München: edition t+k), 23.
[xxii] Max Horkheimer and Theodor W Adorno, Dialectic of Enlightenment, trans. John Cumming (London: Verso, 1986), 7.
[xxiii] Fabian Arzuaga, ‘Socially necessary superfluity: Adorno and Marx on the crises of labor and the individual’,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45:7 (2019). Werner Bonefeld, Critical Theory and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On Subversion and Negative Reason (London: Bloomsbury, 2014).
[xxiv] Adorno, Negative Dialectics, 146.
[xxv] Adorno, ‘Marx and the basic concepts of sociological theory’, 248.
[xxvi] Adorno, ‘Marx and the basic concepts of sociological theory’, 248; Marx, Capital, chapter 9.
[xxvii] Adorno, Negative Dialectics, 11.
[xxviii] Adorno, Negative Dialectics, 5.
[xxix] Adorno, ‘Society’, 275.
[xxx] Theodor W Adorno, Against Epistemology: A Metacritique, trans. Willis Domingo (Cambridge: Polity Press, 2013), 28.
[xxxi] Adorno, Negative Dialectics, 319.
[xxxii] Adorno, Negative Dialectics, 5.
[xxxiii] Adorno, ‘Society’, 274.
[xxxiv] Adorno, History and Freedom, 136, 137.
[xxxv] Sami Khatib, ‘Society and Violence’, in The Sage Handbook of Frankfurt School Critical Theory, vol. 2, eds. Beverley Best, Werner Bonefeld and Chris O’Kane (London: Sage, 2018), 608.
[xxxvi] Adorno, Negative Dialectics, 346.
[xxxvii] Charlotte Baumann, ‘Adorno, the New Reading of Marx, and Methodologies of Critique’, in Adorno and Marx, eds. Werner Bonefeld and Chris O’Kane (London: Bloomsbury, 2022).
[xxxviii] Adorno, History and Freedom, 201.
[xxxix] Marx, Capital, 719. 마르크스와 아도르노의 사회적 고통에 관해서는 Claudia Leeb, ‘Rebelling against suffering in capitalism’, Contemporary Political Theory 17 (2018); Werner
Bonefeld, A Critical Theory of Economic Compulsion: Wealth, Suffering, Negation (London: Routledge, 2023) 참조.
[xl] Marx, Capital, 723.
[xli] Max Horkheimer, Between Philosophy and Social Science: Selected Early Writings (Cambridge MA: MIT Press, 1983),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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