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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좌파 멜랑콜리와 신적폭력의 문제: 주권의 반복에서 통치성의 자기제한으로

by 인-무브 2026. 8. 25.

좌파 멜랑콜리와 신적폭력의 문제

: 주권의 반복에서 통치성의 자기제한으로

 

 

강길모 (현대정치철학연구회)

 

1장. 좌파 멜랑콜리와 정치적 형식

좌파는 자신의 실패를 누구보다 오래 분석해온 정치적 전통이다. 혁명의 좌절, 노동운동의 쇠퇴,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모두 좌파 내부에서 끊임없이 성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성찰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을 지속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해되었다. 실패를 잊지 않는 것, 패배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기억으로부터 새로운 전략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오랫동안 좌파 정치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실패를 성찰하는 작업은 언제나 새로운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비판하기 위해 호출된 기억이 현재의 정치적 판단을 조직하고, 새로운 실천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기준 속에서만 사고되기도 한다. 그 결과 정치는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기보다 이미 경험된 실패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때 문제는 실패 자체가 아니라, 실패가 현재를 조직하는 방식에 있다.

웬디 브라운은 이러한 구조를 '좌파 멜랑콜리[1]left melanchol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브라운에게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한 우울이나 패배감이 아니다. 그것은 상실된 정치적 대상에 대한 애착이 현재의 정치적 가능성을 가로막는 상태이며, 과거의 실패가 현재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심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시간성이 조직되는 형식이다.

브라운의 분석은 오늘날 좌파 정치의 중요한 특징을 포착한다. 좌파 정치이론의 일부는 패배와 좌절의 경험을 숭고화하며, 자신의 전략과 목표를 수정하지 않는다. 이는 좌파 정치의 상당한 영역에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동시에 브라운의 분석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왜 실패는 반복적으로 현재를 조직하게 되는가. 왜 좌파는 끊임없이 실패를 분석하면서도, 그 분석 자체가 또 다른 반복의 조건이 되는가. 다시 말해 문제는 실패 자체가 아니라, 실패를 현재의 정치적 기준으로 만드는 정치적 형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 말이다.

이 글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웬디 브라운을 따라, 여기서 좌파 멜랑콜리는 특정한 정동이나 심리 상태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가 자신을 반복하는 형식이며, 정치적 시간이 조직되는 하나의 장치에 가깝게 이해된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은 좌파 멜랑콜리 자체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멜랑콜리가 어떠한 정치적 형식과 결합하여 반복적으로 현재를 조직하는가를 묻는 데 있다.

이러한 전환은 좌파 멜랑콜리에 대한 분석의 초점을 바꾼다. 만약 멜랑콜리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애착이라면 해결책은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거나 과거를 청산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멜랑콜리가 정치적 형식의 반복이라면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형식이다. 무엇을 기억하는가보다 기억이 어떠한 정치적 형식과 결합하여 현재를 조직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형식은 단순히 제도나 조직의 형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 전체를 가리킨다. 누가 정치적 주체인가, 무엇이 정치적 사건인가, 폭력은 언제 정당화되는가, 공동체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되는가와 같은 질문들은 모두 하나의 정치적 형식 속에서 결합되어 작동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형식이 반복될 때, 좌파 멜랑콜리 역시 반복된다.

따라서 이 글의 문제의식 자체는 좌파 멜랑콜리를 심리적 차원에서 설명하거나 극복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좌파 멜랑콜리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형식[2]이 무엇인지를 묻는 데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좌파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가 자기 자신의 형식을 반복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그 반복을 다른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질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히 좌파만의 문제도 아니고, 특정한 정치적 입장의 한계에 머물지 않는다. 좌파 멜랑콜리를 관통하는 문제는 좌파 멜랑콜리가 정치적 형식이 자기 자신을 시간 속에서 반복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주권, 폭력, 경계, 예외, 정치적 시간성과 같은 정치철학의 핵심 문제들과도 연결된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연결을 따라, 좌파 멜랑콜리에서 출발하여 주권적 정치 형식의 구조를 분석하고, 벤야민의 신적 폭력과 아렌트, 버틀러의 논의를 거쳐, 정치적 형식이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메커니즘과 그것을 변형할 수 있는 통치성의 조건을 탐색하고자 한다.

2장. 주권적 정치 형식[3]과 좌파 멜랑콜리

앞 장에서 좌파 멜랑콜리는 과거의 상실에 대한 심리적 애착이 아니라, 정치가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하나의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형식이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리고 왜 좌파는 자신의 실패를 비판하면서도, 그 실패를 조직했던 정치적 형식을 반복하게 되는가.

이 글에서 나는 그 핵심을 주권적 정치 형식에서 찾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권은 단순히 국가주권이나 최고 권력자의 권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하나의 형식이며, 누가 결정할 것인가, 어디까지가 공동체인가, 무엇이 정치적 폭력이며 무엇이 정당한 질서인가를 규정하는 원리이다. 동시에 주권은 공동체가 개체에게 죽음을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특정한 생명을 희생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권은 특정한 제도나 권력기관에 앞서, 정치의 영역과 경계, 정치적 결정의 주체와 능력을 사고하는 형식 자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권은 정치적 결단과 분리될 수 없다. 슈미트가 지적했듯이 주권자는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이다.[4] 이 정의는 단순히 국가권력의 소재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가 위기와 예외를 통해 자기 자신의 경계를 확인하고, 그 경계를 결정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평상시의 질서는 스스로의 완결성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질서는 예외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결정은 그 예외를 봉합하거나 규정함으로써 질서를 다시 구성한다. 이때 정치는 하나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경계의 안과 밖, 정상과 예외, 구성원과 적, 보호받을 생명과 희생 가능한 생명을 구분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주권은 바로 이러한 구분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주권적 정치에서 폭력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주권이 이미 완성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력으로 간주되는지, 어떤 폭력이 정당한지, 누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자체가 주권적 형식 속에서 규정된다. 다시 말해 주권은 폭력을 소유하는 권력이기 이전에, 폭력을 정치적으로 의미화하고 배분하는 형식이다. 동일한 행위가 누구에 의해, 어떠한 이름으로, 어떤 경계 안에서 수행되는가에 따라 정당한 강제력, 저항, 범죄, 테러, 혁명으로 다르게 규정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폭력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떤 공동체와 질서가 정당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또한 누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누가 정치적 주체로 인정되는가라는 질문과 겹친다. 폭력은 이미 설정된 공동체의 경계를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의 경계를 실질적으로 구성하고, 그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며, 특정한 생명을 보호의 대상으로 만들고 다른 생명을 배제하거나 죽음에 노출시키는 작동 방식이다. 그러므로 폭력은 주권 이후에 부가되는 문제가 아니라, 주권적 형식 자체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폭력과 비폭력의 대립 역시 주권적 형식 내부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상주의적으로 사고할 경우 폭력은 정치의 실패로, 비폭력은 정치의 대안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정치적 형식의 차원에서는 충분하지 않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치와 폭력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정치는 서로 상반된 규범을 제시할 수 있지만, 양자 모두 정치를 하나의 궁극적 결정이 가능한 영역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형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어떠한 경우에 폭력을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다. 규범의 내용은 반대되지만, 정치를 하나의 중심적 기준과 결정으로 조직한다는 형식은 유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혁명적 폭력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예외적 결단을 요청한다. 이때 폭력은 현재의 법과 질서를 중단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경계를 설정하는 창설적 능력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절대적 비폭력은 폭력을 정치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규범을 정치 전체의 중심에 놓는다. 하나는 폭력을 통해 질서를 재구성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비폭력을 통해 정치의 정당성을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정치는 하나의 최종적 기준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그 기준을 적용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결정의 능력을 전제한다.

이 때문에 폭력과 비폭력은 서로 반대되는 가치이면서도, 정치적 형식의 차원에서는 동일한 구조를 반복할 수 있다. 양자는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에서는 대립하지만, 정치가 하나의 궁극적 결정을 통해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형식이 구체적인 조직과 제도, 실천으로 작동하기 시작할 때에는, 비폭력의 정치를 포함한 어떠한 정치도 자신의 규범을 유지하기 위한 강제와 배제의 능력을 전제로 삼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 폭력을 부정하는 규범 역시 누가 그 규범을 위반했는지 판단하고, 위반자를 제재하며, 정치 공동체의 경계를 유지하는 순간 다시 주권적 능력에 의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좌파 내부에서 반복되어 온 폭력 논쟁 역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좌파는 오랫동안 혁명적 폭력과 평화주의, 직접행동과 제도정치, 무장투쟁과 비폭력 저항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전략을 수정해왔다. 그러나 이 논쟁은 종종 폭력을 선택할 것인가, 비폭력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만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폭력과 비폭력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양자를 하나의 결정적 기준으로 배열하는 정치적 형식 자체가 충분히 문제화되지 않는다.

폭력을 긍정하는 입장도, 폭력을 부정하는 입장도 정치를 하나의 결정적 기준과 능력을 중심으로 사고할 때 동일한 주권적 형식을 반복할 수 있다. 혁명적 폭력은 폭력의 올바른 주체와 시기, 대상을 결정하려 하고, 비폭력의 정치는 폭력의 금지를 정치적 정당성의 최종 기준으로 설정하려 한다. 양자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지만, 무엇이 정치적으로 허용되는지 최종적으로 판정하고 그 판정을 공동체 전체에 적용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결단의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폭력과 비폭력 가운데 어느 하나가 본질적으로 주권적인가에 있지 않다. 문제는 그 둘이 어떠한 정치적 형식 속에서 조직되고 작동하는가에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좌파 멜랑콜리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좌파가 반복하는 것은 단순히 혁명의 실패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반복되는 것은 혁명이 조직되었던 정치적 형식이다. 실패는 그 형식을 폐기하거나 변형하는 계기가 되기보다, 오히려 그 형식을 더욱 정교하게 정당화하는 계기로 기능한다. 혁명의 실패는 폭력의 문제를 다시 묻게 하지만, 그 질문은 종종 폭력이 충분히 정교하지 않았는지, 혹은 비폭력이 충분히 철저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그 결과 문제는 정치적 형식의 변형이 아니라, 기존 형식 내부에서 전략과 규범을 조정하는 문제로 축소된다.

폭력이 실패할 경우에는 더욱 정교한 폭력의 전략이 요청되고, 비폭력이 실패할 경우에는 더욱 철저한 비폭력의 규범이 요청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혁명의 실패는 보다 올바른 혁명적 주체와 보다 정확한 결단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고, 평화적 정치의 실패는 보다 일관된 도덕적 원칙과 보다 엄격한 자기규율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치가 하나의 중심적 기준과 최종적 결정에 의해 조직되어야 한다는 형식 자체는 거의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좌파 멜랑콜리는 실패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 실패를 조직했던 형식의 반복이다. 과거의 패배는 현재를 끊임없이 심판하는 기준이 되고, 현재의 정치는 그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재구성한다. 실패는 정치적 형식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형식을 더욱 강하게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좌파는 과거를 비판하면서도, 바로 그 과거를 조직했던 주체, 경계, 결정, 폭력의 형식을 현재 속에서 지속시키게 된다. 멜랑콜리는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시간성이다.

이 지점에서 주권과 좌파 멜랑콜리는 정치적 형식의 자기동일성을 재생산한다는 동일한 작동 원리를 공유한다. 주권이 예외를 통해 자기 자신의 경계를 반복적으로 확인한다면, 좌파 멜랑콜리는 실패를 통해 정치적 동일성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주권은 누가 공동체에 속하고 누가 그 밖에 있는지를 결정함으로써 정치적 공간을 조직한다. 반면 멜랑콜리는 어떠한 실패가 기억되어야 하며, 그 실패가 현재의 정치에 어떠한 교훈과 명령을 부과하는지를 결정함으로써 정치적 시간을 조직한다.

양자의 차이는 단순히 대상의 차이가 아니라 작동하는 차원의 차이이다. 주권은 현재의 결단을 통해 공동체의 경계와 질서를 공간적으로 조직하고, 멜랑콜리는 과거의 실패를 현재화함으로써 정치적 동일성을 시간적으로 조직한다. 그러나 둘 모두 하나의 기준을 반복적으로 현재화함으로써 정치적 형식을 자기동일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원리를 갖는다. 이 때문에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히 주권과 유사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주권적 정치 형식이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패의 기억은 단순한 정치적 내용이 아니라 주권적 형식의 시간적 작동이 된다. 과거의 혁명, 패배, 배신, 타협은 현재의 정치적 경계를 설정하는 기준으로 호출된다. 누가 진정한 정치적 주체인지, 어떤 실천이 개량주의인지, 어떤 타협이 배신인지, 어떤 폭력이 혁명적인지는 과거의 실패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그 결과 과거는 현재를 성찰하기 위한 대상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정치적 정당성과 소속을 판정하는 일종의 심급으로 기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좌파 멜랑콜리는 주권적 정치의 문제와 결합한다. 실패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적 경계와 주체, 정당한 실천과 부당한 실천을 다시 구분하는 작업이다. 멜랑콜리가 반복될수록 과거의 실패는 현재를 판단하는 최종 기준에 가까워지고, 좌파 정치는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호출하게 된다. 이때 실패는 변화의 계기라기보다 자기동일성을 보존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만약 폭력과 비폭력이 모두 동일한 주권적 정치 형식 속에서 반복될 수 있다면, 과연 그 형식 자체를 중단시키는 것은 가능한가. 다시 말해 문제는 폭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혹은 폭력을 얼마나 철저히 거부할 것인가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폭력과 비폭력의 대립 자체를 조직하고, 양자 가운데 하나를 최종적인 정치적 기준으로 만드는 형식을 어떻게 중단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이 질문은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 제3의 규범을 추가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기준이 다시 정치 전체를 조직하는 최종적 기준으로 기능한다면, 그것 역시 주권적 형식 속으로 편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더 올바른 폭력이나 더 순수한 비폭력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그러한 선택을 최종적 결단의 형태로 조직하는 정치적 형식 자체를 문제화하는 것이다. 이는 주권적 정치의 내용을 수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권적 형식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중단하거나 변형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벤야민은 폭력과 비폭력의 대립 속에서 어느 한쪽을 단순히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법을 정립하는 폭력과 법을 보존하는 폭력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법적·주권적 구조의 두 계기라는 점을 드러낸다. 법정립적 폭력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법보존적 폭력은 그 질서를 유지한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폭력을 통해 법과 공동체의 경계를 구성하고 지속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벤야민의 문제의식은 이 순환 속에서 더 정당한 폭력의 형식을 찾는 데 있지 않다. 그가 신적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사고하고자 한 것은 법을 새롭게 정립하거나 기존 법을 보다 정당하게 보존하는 폭력이 아니라, 법정립과 법보존의 순환 자체를 중단시키는 폭력이다.[5] 이 점에서 신적 폭력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설계하는 모델이나 또 하나의 주권적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주권적 형식이 법과 폭력의 순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순간을 정지시키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중단이 곧바로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신적 폭력은 주권적 정치의 순환을 파괴하거나 정지시키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그 이후의 정치가 어떻게 조직되고 지속될 수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벤야민의 논의는 주권적 형식의 중단을 사고하는 데 결정적인 동시에, 중단 이후의 정치라는 새로운 문제를 남긴다.

이로써 논의는 새로운 단계로 이동한다. 지금까지의 문제는 폭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혹은 비폭력을 어떻게 원칙화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문제는 폭력과 비폭력을 모두 하나의 최종적 기준과 결정으로 조직하는 주권적 정치 형식이었다. 좌파 멜랑콜리는 바로 이 형식이 실패의 기억을 통해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 이러한 주권적 형식을 어떻게 중단시키는지를 살펴보고, 그 중단이 열어놓는 가능성과 동시에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3장. 신적 폭력: 주권의 중단과 정치의 공백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한 실패의 기억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적 형식이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이 형식은 주권과 결단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폭력과 비폭력의 대립 역시 그 내부에서 작동한다. 좌파가 반복하는 것은 과거의 실패 자체라기보다, 실패를 조직하고 해석했던 주권적 정치 형식이다. 따라서 문제는 폭력과 비폭력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양자의 대립을 하나의 최종적 결정과 기준으로 조직하는 정치적 형식 자체를 어떻게 사고하고 중단할 것인가에 있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바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 벤야민은 폭력을 도덕적으로 평가하거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당화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으로서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혹은 폭력 그 자체가 부당한가라는 질문만으로는 폭력의 정치적 구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은 개별적인 폭력 행위의 정당성보다, 폭력이 법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질서를 구성하고 유지하는가에 있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자연법과 실정법이 폭력을 다루는 방식 모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자연법은 정당한 목적이 폭력적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실정법은 적법한 수단이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한다고 본다. 그러나 양자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서로 반대 방향에서 설명할 뿐, 법과 폭력이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 자체는 문제화하지 않는다. 벤야민이 비판하려는 것은 특정한 폭력의 정당성만이 아니라, 폭력을 법적 질서의 수립과 보존 속에서 평가하게 만드는 법철학적 틀 자체이다.
벤야민은 이 지점에서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구분한다. 법정립적 폭력은 새로운 법적 질서를 수립하는 폭력이다. 전쟁, 정복, 건국, 혁명과 같이 기존의 질서를 중단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사건은 폭력을 통해 새로운 법적 경계와 권리관계를 구성한다. 반면 법보존적 폭력은 이미 수립된 질서를 유지하는 폭력이다. 군대와 경찰, 사법제도와 형벌은 법을 집행하고 위반을 제재함으로써 기존의 법적 질서를 보존한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이 구분의 핵심은 두 폭력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은 하나의 순환을 구성한다. 법정립적 폭력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 뒤 자신의 법을 지속시키기 위해 법보존적 폭력을 요구한다. 반대로 법보존적 폭력은 단순히 기존 법을 수동적으로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의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위협받는 순간 새로운 법적 권한과 현실을 산출한다. 특히 경찰권에서 두 폭력의 경계는 흐려진다. 경찰은 법을 집행하면서도 법이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영역에서 스스로 명령하고 개입함으로써 법을 사실상 새롭게 정립한다.
따라서 법은 폭력과 대립하는 평화로운 규범체계가 아니다. 법은 폭력을 외부에서 제한하는 동시에, 특정한 폭력을 자신의 정립과 보존을 위한 정당한 폭력으로 승인한다. 폭력은 법이 실패했을 때 예외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자신의 기원과 효력을 유지하는 방식에 이미 내재한다. 법정립적 폭력은 새로운 질서를 창설하고, 법보존적 폭력은 그 질서를 지속하지만, 양자는 모두 폭력을 통해 법의 자기동일성을 구성하고 재생산한다.
이러한 통찰은 앞 장에서 논의한 주권적 정치 형식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낸다. 주권적 질서는 폭력을 독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폭력이며 어떤 폭력이 정당한지를 결정한다. 법정립과 법보존의 순환은 주권이 경계와 예외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통일성을 반복적으로 재구성하는 법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질서는 폭력을 통해 정립되고, 정립된 질서는 다시 폭력을 통해 보존된다. 그 과정에서 폭력은 질서를 위한 잠정적인 수단이 아니라, 질서가 자기 자신을 지속시키는 구성적 요소가 된다.
이 점에서 폭력과 비폭력의 대립도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벤야민은 폭력을 무조건 긍정하거나 비폭력을 단순히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폭력을 법적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만 이해하는 한, 폭력의 긍정과 부정 모두 법의 문제설정 안에 머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폭력을 정당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승인하는 입장은 법정립적 폭력을 반복할 수 있으며, 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제한하는 입장은 법보존적 폭력의 독점을 승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핵심은 폭력을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폭력이 법과 결합하여 질서를 정립하고 보존하는 형식을 중단할 수 있는가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구분을 제시한다. 신화적 폭력은 법정립적이다. 그것은 경계를 설정하고, 죄와 책임을 부과하며, 폭력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 신화적 폭력은 단순히 법 이전의 야만적 폭력이 아니라, 법이 자신을 창설하는 폭력의 형식이다. 그것은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법의 권위를 세우고, 그 희생을 다시 법적 운명과 죄의 관계 속에 편입한다.
반면 신적 폭력은 새로운 법을 정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법을 보존하지도 않는다. 벤야민의 표현을 따르면 신화적 폭력이 법을 세운다면 신적 폭력은 법을 파괴하며,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그 경계를 소멸시킨다. 신화적 폭력이 죄와 속죄의 관계를 통해 생명을 법에 귀속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그러한 귀속 자체를 중단한다. 따라서 신적 폭력은 기존 질서보다 더 정당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폭력이 아니라, 법과 폭력이 서로를 재생산하는 순환을 무효화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적 폭력은 주권적 결단과 구별되어야 한다. 주권적 결단은 예외를 선포하고 기존 법을 중지할 수 있지만, 그 중지는 궁극적으로 질서를 보존하거나 재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예외상태에서 법의 적용이 중단되더라도 주권자의 결정과 질서의 권위는 오히려 강화된다. 반면 신적 폭력은 법을 중지한 뒤 새로운 주권적 질서를 세우지 않는다. 그것은 법의 적용만을 유예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폭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립하고 보존하는 형식 자체를 중단한다.
따라서 신적 폭력을 주권자의 절대적 결단이나 혁명적 창설권력의 극단적 형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해하는 순간 신적 폭력은 다시 법정립적 폭력으로 환원된다. 신적 폭력의 특이성은 그것이 더 강력한 주권을 창설한다는 데 있지 않고, 주권적 형식이 폭력과 법의 결합을 통해 자신을 지속시키는 순환을 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기존의 법적 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최종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며, 자신의 폭력을 반복 가능한 정치적 규칙으로 정식화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신적 폭력은 통상적인 혁명 개념과 긴장을 형성한다. 혁명은 흔히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혁명이 새로운 법과 국가, 새로운 주권적 주체를 정립하는 한, 그것은 다시 법정립적 폭력의 구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기존 질서를 전복한 폭력은 새로운 질서의 기원이 되고, 새롭게 정립된 질서는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폭력을 요구한다. 혁명은 주권적 질서를 중단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주권적 질서의 창설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벤야민의 문제의식은 혁명의 가능성을 단순히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혁명적 폭력이 기존의 법질서를 파괴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법과 폭력의 순환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새로운 질서의 창설을 목적으로 하는 한, 혁명적 폭력 역시 신화적·법정립적 폭력의 구조를 반복할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낡은 법을 새로운 법으로 교체하는 사건이 아니라, 법정립과 법보존의 순환 자체를 중단시키는 사건이다.
그러나 신적 폭력을 하나의 이상적인 정치 형태나 직접적인 실천 지침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벤야민의 논의를 오해하는 일이다. 신적 폭력은 하나의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며, 반복 가능한 전략이나 일반적 규범도 아니다. 그것은 정의상 법을 정립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제도화하거나 지속 가능한 질서로 조직하지 않는다. 신적 폭력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특정한 주체가 판정하고 실행하며 보존해야 하는 새로운 법정립적 원리로 전화될 위험을 갖는다.
또한 무엇이 신적 폭력인지를 사전에 확정할 수 있는 기준도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특정한 폭력이 스스로를 신적 폭력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법과 폭력의 순환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적 폭력을 판정하고 독점하려는 주체가 등장하는 순간, 그 개념은 다시 주권적 결단의 언어로 변형될 수 있다. 따라서 신적 폭력은 정치적 주체가 계획하고 소유하며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 주권적 형식의 자기정당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단절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적 폭력의 급진성은 바로 이러한 비정립성에 있다. 그것은 기존 질서의 폭력성을 폭로한 뒤 더 정당한 질서를 약속하지 않는다. 또한 법의 부당성을 비판한 뒤 새로운 법의 기초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법과 폭력이 서로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관계를 중지시키고, 법적 질서가 자신의 기원과 지속을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못하게 한다. 신적 폭력은 새로운 정치의 내용을 말하기보다, 기존 정치가 자기 자신을 유일한 가능성으로 재현하는 형식을 무효화한다.
이 점에서 신적 폭력은 좌파 멜랑콜리와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앞 장에서 좌파 멜랑콜리는 주권적 정치 형식이 실패의 기억을 통해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방식의 일부로서 규정되었다. 과거의 실패는 현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현재의 정치는 그 기준에 종속된 채 동일한 주체와 경계, 결단과 폭력의 형식을 반복한다. 좌파 멜랑콜리는 즉, 실패한 좌파 주권정치의 시간적 자기재생산인 셈이다.
반면 신적 폭력은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법과 주권의 순환을 중단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를 보다 올바른 혁명이나 보다 순수한 규범을 위한 근거로 다시 호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를 현재의 정치적 명령으로 변환하는 법정립적 구조 자체를 정지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적 폭력은 좌파 멜랑콜리를 단순히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대안이 아니라, 멜랑콜리가 정치적 형식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주권적 시간성을 중단시키는 계기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철저히 부정적이다. 신적 폭력은 기존 형식의 반복을 중단시킬 수 있지만, 중단 이후의 정치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좌파 멜랑콜리가 의존하는 과거의 기준을 무효화할 수 있는 관념이지만, 그 자리에 어떠한 새로운 정치적 시간성을 구성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주권적 경계를 파괴할 수 있지만, 복수의 존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 행위하고 책임지며 관계를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형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적 폭력은 좌파 멜랑콜리의 직접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신적 폭력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순간, 그것은 다시 반복 가능한 원리와 정당한 폭력의 기준으로 전화되어 법정립적 구조 속에 편입될 위험이 있다. 오히려 신적 폭력은 좌파 멜랑콜리 내에서 반복되는 주권적 형식을 드러내고, 그 형식이 필연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임계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 형식을 정지시키지만, 그 빈자리를 어떤 정치가 채워야 하는지는 결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백은 신적 폭력의 단순한 결함이 아니다. 신적 폭력이 직접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원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법정립적 폭력과 구별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만약 신적 폭력이 중단 이후의 질서를 미리 규정한다면, 그것은 다시 새로운 법을 정립하는 폭력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신적 폭력의 비정립성과 정치적 공백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그 개념의 급진성은 바로 그것이 주권적 형식을 중단하면서도 자신의 중단을 새로운 주권의 기원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정치적 사유는 이 공백[6] 앞에서 멈출 수 없다. 실제의 정치는 언제나 일정한 지속과 관계, 판단과 책임의 형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주권적 형식을 중단하는 것과, 그 이후의 정치를 다시 주권적 형식으로 회수되지 않도록 구성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벤야민은 첫 번째 문제를 급진적으로 제기하지만, 두 번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철학을 제공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렌트와 버틀러의 폭력 비판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아렌트는 폭력과 구별되는 권력을 공동행위와 공적 공간에서 찾으며, 주권적 결단 이후의 정치를 복수성으로부터 다시 사고한다. 버틀러는 주권적 주체의 자족성을 비판하고,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으로부터 비폭력과 책임의 문제를 재구성한다. 두 사상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벤야민이 열어놓은 공백 이후에도 정치가 어떻게 시작되고 지속될 수 있는지를 사유한다.
물론 아렌트와 버틀러의 논의를 벤야민의 신적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이들의 문제설정과 개념적 맥락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주권적 정치 형식의 중단 이후 정치의 가능성을 묻는 이 글의 관점에서, 세 사상가는 하나의 공통된 문제계 위에 다시 배치될 수 있다. 벤야민이 법과 폭력의 순환을 중단시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면, 아렌트와 버틀러는 그 중단 이후 남겨진 공동행위와 관계, 책임과 지속의 문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사유한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신적 폭력이 열어놓은 가능성이 왜 곧바로 새로운 정치적 형식으로 이어질 수 없는지를 먼저 확인한 뒤, 아렌트와 버틀러가 주권적 폭력을 비판하면서 정치의 재개와 지속을 어떠한 방식으로 사고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신적 폭력의 부정성이 열어놓은 정치적 가능성과, 그 가능성이 다시 하나의 지속 가능한 형식으로 구성되어야 할 때 발생하는 난점을 함께 검토할 것이다.

 

4. 신적 폭력 이후의 정치: 아렌트와 버틀러


벤야민은 주권적 정치 형식이 법과 폭력의 순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중단시키는 가능성을 사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의도적으로 하나의 공백을 남긴다. 신적 폭력은 법을 정립하지 않으며,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기존 질서가 자신을 필연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재현하는 형식을 정지시키지만, 그 이후 정치가 어떠한 관계와 제도, 판단과 책임의 형식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는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벤야민 이후의 문제는 신적 폭력을 반복 가능한 정치적 원리로 전환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신적 폭력이 열어놓은 비정립적 공백 이후에 정치를 어떻게 다시 사고할 것인가에 있다.

물론 이 질문이 벤야민 이후의 모든 정치철학을 하나의 동일한 문제계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벤야민은 폭력과 법의 관계를 문제 삼았고, 아렌트는 권력과 공적 공간을, 버틀러는 관계성과 취약성, 비폭력과 책임을 중심으로 정치를 사유한다. 이들의 개념적 출발점과 역사적 맥락은 서로 다르며, 제시하는 정치적 언어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을 하나의 계열 위에서 다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세 사람 모두 주권적 결단과 자기완결적 주체를 정치의 충분한 원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들에게 공통된 것은 하나의 동일한 해답이 아니라, 주권적 형식의 한계 이후에 정치를 어떻게 다시 시작하고 지속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벤야민과 독특한 긴장을 형성한다. 아렌트는 폭력을 정치의 본질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정치란 복수의 사람들이 함께 말하고 행동하면서 하나의 공통세계를 구성하는 활동이다. 권력은 누군가가 소유하고 축적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는 동안 발생하고 유지되는 관계적 현상이다. 따라서 권력과 폭력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폭력은 권력을 강화하는 본질적 수단이라기보다, 권력이 붕괴하거나 공동행위가 해체되는 순간 그것을 대신하여 등장하는 도구에 가깝다.

이러한 권력 개념은 단순히 폭력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를 사고하는 형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주권은 하나의 통일된 의지와 최종적 결단을 중심으로 질서를 구성한다. 반면 아렌트에게 정치란 하나의 의지가 다른 의지들을 지배하거나 대표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차이를 제거하지 않은 채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복수성은 정치 이전에 조정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정치 자체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며, 공공성은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의 외적 표현이 아니라 공동행위를 통해 비로소 출현하는 세계의 형식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아렌트는 주권을 정치의 원리라기보다 정치를 위협하는 형식으로 이해한다. 주권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하나의 의지를 요구하며, 그러한 의지는 복수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아렌트에게 행위는 본래 복수적이며, 그 결과는 어느 한 주체가 완전히 소유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정치의 의미는 이러한 불확정성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시작하고 응답할 수 있는 공간을 유지하는 데 있다. 따라서 정치의 핵심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최종 기준이 아니라, 공적 공간이 어떻게 출현하고 지속되는가에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아렌트의 혁명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혁명론』에서 아렌트는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단순히 실패한 혁명과 성공한 혁명으로 대비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혁명이 무엇을 파괴했는가보다 무엇을 창설했는가에 있다.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을 전복했지만, 사회적 필요와 폭력의 확대가 점차 정치적 자유의 공간을 압도하면서 공동행위의 장을 지속적으로 축소시켰다. 반면 미국혁명은 폭력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공적 공간과 제도를 창설하고 시민들이 함께 행위할 수 있는 구조를 일정하게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혁명 이해는 벤야민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벤야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신적 폭력의 파괴성 자체를 정치적 원리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의 관심은 기존 질서의 중단이 그 자체로 얼마나 급진적인가에 머물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중단 이후 사람들이 다시 함께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세계가 어떻게 창설될 수 있는가이다. 벤야민이 법과 폭력의 순환을 중단시키는 사건을 사고하였다면, 아렌트는 그 중단 이후에도 인간들이 공동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사유한다.

물론 이것이 아렌트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을 직접 계승하거나 보완한다는 뜻은 아니다. 벤야민의 문제는 법과 폭력이 서로를 정립하고 보존하는 순환이며, 아렌트의 문제는 복수의 인간들이 어떠한 공적 공간 속에서 함께 행위할 수 있는가이다. 양자의 관계는 하나의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이어받는 계승 관계라기보다, 주권과 폭력의 위기 이후 정치의 가능성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사유하는 긴장 관계에 가깝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나란히 읽는 것은 중요한 철학적 함의를 갖는다. 벤야민이 주권적 형식의 자기정당화를 중단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아렌트는 그러한 중단 이후 정치가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이 법적·주권적 질서의 비정립적 중단이라면, 아렌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 이후에도 인간들이 함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창설과 공동행위이다. 이 의미에서 아렌트는 신적 폭력의 공백을 새로운 주권으로 채우기보다, 복수성이 출현할 수 있는 공적 공간으로 전환하려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공동행위는 어떻게 지속되는가.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행동할 때 발생하지만, 그러한 공동행위는 어떠한 조건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가. 행위는 시작의 능력을 갖지만, 그 시작이 하나의 순간적 출현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적 지속성을 획득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공적 공간은 어떠한 제도와 습속, 기억과 실천을 통해 유지되며, 그 과정에서 어떻게 다시 하나의 통일된 의지와 주권적 중심으로 회수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구별하고, 정치를 복수성과 공동행위로부터 다시 사고함으로써 주권적 정치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을 제공한다. 또한 그는 혁명 이후의 창설과 제도 문제를 전혀 무시하지 않는다. 약속, 권위, 헌법, 평의회와 같은 개념들은 시작된 정치가 어떻게 일정한 지속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아렌트 자신의 답변이다. 따라서 아렌트가 정치의 지속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다만 이 글에서 남는 질문은 조금 다르다. 아렌트가 제시하는 창설과 제도화의 형식이 어떠한 내적 메커니즘을 통해 자기 자신의 주권화를 제한할 수 있는가이다. 공동행위로부터 발생한 권력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다시 대표와 명령, 중심과 경계의 형식으로 응축될 수 있다. 공적 공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마련된 제도는 그 공간을 보존하는 동시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와 무엇이 정치적 행위인지를 고정할 수 있다. 아렌트는 이러한 위험을 분명히 의식하지만, 공동행위와 창설이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수정하면서도 주권적 형식으로 굳어지지 않게 하는 자기조정의 조건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난점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단순한 결함이라기보다 그가 정치의 복수성과 비주권성을 끝까지 유지하려 한 데서 발생한다. 정치적 지속을 하나의 완결된 원리로 설명하는 순간, 그 원리 자체가 다시 정치의 복수성을 규율하는 주권적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일정한 지속 형식을 제시하지만, 그 지속이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수정될 수 있는 조건은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는다.

 

바로 이러한 문제 위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다른 방향으로 주권 이후의 정치를 사유한다. 버틀러 역시 주권적 정치 형식을 비판하지만, 그 출발점은 아렌트와 다르다. 아렌트가 공적 공간과 공동행위를 중심으로 권력의 발생을 설명하였다면, 버틀러는 그러한 공간을 구성하는 인간 존재가 애초에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문제는 정치적 주체들이 어떻게 함께 행위하는가에 앞서, 주체 자체가 어떠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가이다.

버틀러에게 인간은 관계 이전에 완성되어 있다가 이후 타인과 접촉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으며, 타인의 돌봄과 인정, 언어와 규범, 사회적·물질적 기반 속에서만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관계와 조건들 속에서 형성되며, 자신의 신체와 삶조차 완전히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이러한 관계성과 취약성은 우연한 사회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성적 조건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주권적 주체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주권적 주체는 자신의 경계를 명확히 소유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단하며, 행위의 원인과 결과를 자신에게 귀속할 수 있는 존재로 가정된다. 그러나 버틀러의 주체는 타인의 언어와 인정, 돌봄과 폭력에 노출된 관계적 존재이다. 따라서 정치적 행위 역시 완결된 주체의 독립적 의지가 외부세계에 실현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없다. 책임은 순수한 자율적 결단의 결과라기보다, 이미 맺어져 있고 자신을 구성해온 관계들에 응답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버틀러는 아렌트의 복수성 개념과 만나는 동시에 벤야민에 더욱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아렌트에게 중요한 것이 사람들이 함께 출현하는 공적 공간이었다면, 버틀러는 주권적 질서가 완전히 포섭할 수 없는 삶의 관계와 취약성에 주목한다. 그가 벤야민을 읽는 방식은 신적 폭력을 새로운 정치적 법칙이나 정당한 폭력의 기준으로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7] 오히려 신적 폭력이 법의 자기보존과 주권적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중단시키는 사건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버틀러의 독해에서 신적 폭력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법과 주권이 삶을 완전히 규정하고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계기이다. 법적 질서는 특정한 생명을 보호하고 다른 생명을 폭력에 노출시키며, 누구의 삶이 가치 있는지와 누구의 죽음이 애도될 수 있는지를 차등적으로 배분한다. 신적 폭력은 이러한 법의 폭력적 배치를 중단시키고, 법적 분류와 주권적 경계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삶의 상호의존성과 취약성을 드러내는 관념으로 다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신적 폭력 이후에도 남는 것은 무가 아니다. 주권적 질서가 중단된 자리에 처음부터 서로에게 얽혀 있던 삶의 관계가 드러난다. 정치의 출발점은 더 이상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는 주체들의 계약이나 결단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하고 노출되어 있으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관계이다. 이 점에서 버틀러는 벤야민의 비정립성을 하나의 새로운 법이나 규범으로 봉합하지 않으면서도, 그 공백을 관계성과 취약성의 언어[8]로 정치화하려 한다.

 

이러한 접근은 아렌트의 문제를 다른 층위에서 확장한다. 아렌트가 폭력과 구별되는 권력의 공간을 공동행위로부터 사고했다면, 버틀러는 그러한 공동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적·물질적 조건을 문제 삼는다. 정치적 공간에 출현할 수 있는 신체는 이미 돌봄과 노동, 사회적 기반시설과 규범에 의존한다. 따라서 공적 공간은 단지 자유로운 행위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삶이 출현할 수 있고 어떤 삶이 배제되는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관계와 물질적 조건 위에서 형성된다.

버틀러는 이러한 관계적 존재론으로부터 비폭력과 책임을 다시 사유한다. 비폭력은 순수한 주체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도덕적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조건에 응답하는 실천이다. 이때 비폭력은 갈등이나 강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상태가 아니라, 타인을 제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는 주권적 환상을 중단하고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려는 정치적 지향이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제시한다고 해서 그로부터 하나의 정치적 형식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명제는 정치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어떠한 관계에 우선적으로 응답해야 하는지, 충돌하는 요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책임과 결정이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곧바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관계는 언제나 복수적이며 비대칭적이다. 모든 관계가 동일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의존성이 해방적인 것도 아니다. 돌봄과 상호의존성은 공동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지배와 착취, 폭력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관계성을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어떤 관계를 변형하며 어떤 관계를 중단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정치에는 여전히 판단과 경계, 우선순위와 책임의 문제가 남는다.

버틀러의 취약성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취약성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존재론적 조건이지만, 실제의 취약성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차등 배분된다. 어떤 삶은 보호받고 애도될 수 있는 삶으로 인정되는 반면, 다른 삶은 폭력과 죽음에 더 쉽게 노출된다. 버틀러의 정치철학은 이러한 차등적 배분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데 강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 이후 복수의 관계와 요구를 어떤 지속 가능한 형식으로 조직할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로 남는다.

특히 타자에 대한 책임이 무한한 것으로 이해될 때, 정치적 책임은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끊임없이 연기할 위험을 갖는다. 실제의 정치는 언제나 제한된 시간과 자원 속에서 이루어지며, 서로 충돌하는 요구들 가운데 어떤 것에 먼저 응답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책임은 중요한 윤리적 지향이지만, 그 책임이 어떠한 형식으로 분배되고 조정될 것인지 설명되지 않는다면 특정한 개인이나 위치에 무한한 응답의 부담을 집중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는 버틀러의 정치철학이 관계를 새로운 주권적 원리로 완결하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버틀러는 관계성과 취약성을 하나의 고정된 규범이나 정치체제의 기초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순간 관계는 다시 하나의 보편적 기준이 되어 구체적인 차이와 갈등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사유가 정치적 조직의 완성된 원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누락이라기보다, 새로운 폐쇄성을 피하려는 철학적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글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관계가 고정된 주권적 원리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관계를 실제로 지속하고 조정할 형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함께 사고할 것인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하나의 중심적 주체에게 무한히 귀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책임과 판단을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조건은 무엇인가. 관계적 정치는 어떻게 자기 자신의 개방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지속 가능한 정치적 배치를 형성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아렌트와 버틀러는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문제 위에서 다시 만난다. 아렌트는 공동행위와 공적 공간으로부터 권력을 사고하였고, 버틀러는 상호의존성과 취약성으로부터 정치적 책임을 다시 시작하였다. 두 사람 모두 하나의 통일된 의지와 자족적인 주체를 정치의 원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정치를 복수성과 관계성으로부터 재구성하려 한다. 동시에 두 사람 모두 그러한 정치가 새로운 주권적 원리로 닫히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권 이후의 정치가 어떠한 형식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아렌트에게 공동행위는 권력을 창출하고 공적 공간을 열지만, 그 공간을 유지하는 제도와 실천은 다시 주권적 중심으로 응축될 수 있다. 버틀러에게 관계성과 취약성은 주권적 주체를 해체하지만, 복수의 관계를 조정하고 책임을 분배하는 과정은 다시 결정과 경계의 문제를 불러온다. 두 사람은 주권 이후의 정치적 형식을 중요한 방식으로 제시하지만, 그 형식이 자신의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지속하고 수정하는 조건은 여전히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제로 남는다.

따라서 여기서 남는 문제는 폭력을 정당화할 것인가, 비폭력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다. 또한 공동행위와 관계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치의 최종적 기초로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다. 핵심은 이러한 정치적 형식이 어떠한 조건 아래에서 자기 자신을 지속하면서도 다시 주권적 형식으로 고정되거나 회수되지 않을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문제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정치가 반복되는 방식, 자신의 관계와 제도, 책임과 판단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어떻게 다르게 구성할 것인가가 남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논의는 다시 좌파 멜랑콜리의 문제로 돌아간다. 좌파 멜랑콜리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제시되고 실천되었음에도 그것을 지속시킬 조건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을 때, 기존의 정치적 언어와 주체, 경계와 결단의 형식이 다시 현재를 조직하는 방식과 관계된다. 새로운 정치를 말하지만, 그것을 의미화하고 지속시키는 배치는 익숙한 주권적 형식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아렌트와 버틀러의 구상이 남기는 열린 문제는 바로 이러한 회귀의 조건을 드러낸다. 이들이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공동행위와 관계성, 복수성과 취약성을 통해 새로운 정치의 중요한 조건을 제시한다. 문제는 그러한 형식이 어떠한 제도와 습속, 주체화와 실천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속하면서도 다시 주권적 동일성으로 굳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이다. 새로운 정치의 형식과 그 형식을 지속시키는 조건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웬디 브라운의 좌파 멜랑콜리 개념은 벤야민 이후의 논의를 다시 읽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한 심리적 애착이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등장했음에도 현재가 다시 과거의 정치적 욕망과 형식에 의해 조직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브라운의 문제는 새로운 정치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만 있지 않다. 새로운 정치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지속되고, 왜 반복적으로 기존의 정치적 형식 속으로 되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제기한다.

 

다음 장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브라운의 좌파 멜랑콜리 개념을 통해, 새로운 정치가 단순히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치적 배치 속에서 다시 의미화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좌파 멜랑콜리를 상실된 대상에 대한 애착의 문제에서 정치적 형식의 반복과 회수의 문제로 확장하고, 새로운 정치의 지속 조건이 왜 통치성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5장. 멜랑콜리 이후의 정치: 재생산과 통치성의 문제

지금까지의 논의는 하나의 공통된 문제로 수렴하였다. 벤야민은 법과 폭력이 서로를 정당화하는 주권적 정치 형식을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중단시키고자 하였다. 아렌트는 공동행위와 공적 공간을 통해, 버틀러는 관계성과 취약성을 통해 주권 이후의 정치를 다시 사고하였다. 브라운은 좌파 멜랑콜리를 통해 새로운 정치가 반복적으로 과거의 정치적 시간성 속으로 회귀하는 현상을 분석하였다. 이들의 문제설정과 개념적 맥락은 서로 다르지만, 적어도 하나의 점에서는 공통된다. 모두가 주권적 정치 형식만으로는 더 이상 정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벤야민에게 주권적 형식의 한계는 법과 폭력이 서로를 정립하고 보존하는 순환 속에서 드러난다. 새로운 질서를 창설하는 폭력은 곧 자신을 보존하는 폭력을 요구하며, 그 보존은 다시 법의 경계를 재정립한다. 아렌트에게 그 한계는 정치가 하나의 통일된 의지와 명령으로 환원될 때 복수성과 공동행위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버틀러에게 그것은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주체가 결단의 기원이라는 전제가 인간의 관계성과 취약성을 은폐한다는 데 있다. 브라운의 좌파 멜랑콜리 역시 다른 층위에서 동일한 문제를 드러낸다. 좌파는 새로운 정치를 말하면서도 과거의 실패를 조직했던 주체와 경계, 결단과 욕망의 형식을 반복적으로 현재화한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진 이 비판들은 주권적 형식의 외부 또는 이후에서 정치를 다시 사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질문을 남긴다. 새로운 정치적 형식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벤야민은 주권적 정치 형식의 중단을 사유하지만, 중단 이후 정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신적 폭력의 비정립성은 그것이 다시 법정립적 폭력으로 전화되지 않기 위한 조건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중단 이후의 지속이라는 문제는 공백으로 남는다. 아렌트와 버틀러는 각각 공동행위와 관계성으로부터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렌트는 약속과 헌정, 공적 공간과 제도의 문제를 통해 정치의 지속을 사유하고, 버틀러는 수행성의 반복과 집회의 정치, 취약한 신체들의 상호의존을 통해 정치적 실천이 지속되는 조건을 탐구한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가 정치의 지속을 전혀 사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글의 관심은 그러한 가능성과 지속의 조건들을 하나의 통치성의 문제로 다시 읽는 데 있다.

 

정치적 가능성이 제시되는 것과 그것이 역사 속에서 지속 가능한 정치적 현실이 되는 것은 동일한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시작은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와 언어 역시 순간적으로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 가능한 실천이 되고, 행위자들의 삶과 판단을 조직하며, 제도와 습속 속에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별도의 조건들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금부터의 문제는 새로운 정치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만 머물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지속하고, 그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어떻게 구성하는가가 함께 물어져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는 하나의 전환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정치적 형식이었다. 주권은 누가 결정하는가를 규정하는 정치적 형식이며, 법과 폭력, 경계와 예외는 모두 그러한 형식 속에서 이해되었다. 주권적 정치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정상과 예외를 설정하며, 정당한 폭력과 부당한 폭력을 판정한다. 그것은 정치적 통일성을 하나의 최종적 결단과 중심을 통해 구성하려는 형식이다. 좌파 멜랑콜리는 이러한 주권적 형식이 과거의 실패를 현재의 기준으로 호출하면서 시간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재생산하는 한 방식으로 읽혔다.

그러나 정치는 하나의 형식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치적 형식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오랜 시간 지속되고, 어떤 것은 짧은 순간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하나의 선언과 결단이 정치적 형식을 창설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 형식이 일상의 현실 속에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형식은 그것을 실행하는 제도, 받아들이는 언어, 반복하는 행위, 내면화하는 주체,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거나 현실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습속을 필요로 한다. 정치적 형식은 선언되는 것만으로 현실이 되지 않으며, 반복되는 실천과 제도, 담론과 습속, 주체화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 현실로 지속된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정치적 형식에서 정치적 형식의 지속 조건으로 이동한다. 이 전환은 주권의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주권적 형식이 어떻게 반복되고 자연화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주권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주권은 정치가 어떠한 형식으로 조직되는가를 설명한다. 누가 결정하는지, 무엇이 예외인지, 어디까지가 공동체인지, 어떤 폭력이 정당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주권론은 그 결정과 경계가 일상적인 실천 속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행위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판단과 자기 이해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제도와 습속이 어떻게 그 형식을 지속시키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주권의 문제에서 통치성의 문제로 이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분석 수준의 변화를 의미한다. 주권의 문제는 누가 결정하고, 어떠한 경계를 설정하며, 어떤 능력으로 질서를 강제하는가를 묻는다. 반면 통치성의 문제는 그 결정과 경계가 어떻게 반복되고, 어떠한 실천과 합리성을 통해 행위의 조건이 되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그 질서에 적합한 주체로 형성하는가를 묻는다. 주권이 결정의 형식을 분석한다면, 통치성은 결정이 삶의 조건으로 지속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주권이 권력의 집중과 최종성에 주목한다면, 통치성은 권력이 분산된 제도와 지식, 실천과 주체화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문제 삼는다.

이 전환은 주권과 통치성을 서로 배타적인 권력 형태로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의 정치에서 주권적 결정과 통치적 실천은 서로 중첩된다. 주권은 통치성의 배치 없이는 지속될 수 없으며, 통치성 역시 위기와 경계 설정의 순간에 주권적 결단을 호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권적 정치 형식의 반복을 설명하기 위해 분석의 범위를 최종적 결정과 법적 권한에서 일상의 행위와 습속, 제도와 자기주체화로 확장하는 일이다. 좌파 멜랑콜리 역시 과거의 실패를 회상하는 의식적 행위만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정치적으로 현실적인지, 누가 정당한 정치적 주체인지, 어떤 실패가 기억되어야 하며 어떤 실험이 무모한 것으로 간주되는지를 조직하는 일상의 판단 속에서 반복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글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9]을 호출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통치성은 국가의 통치기술이나 행정 일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코에게 통치성은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명령하거나 강제하는 권력이라기보다, 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을 조직하고 타인의 행위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이끄는 실천과 합리성의 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국가의 정책에 국한되지 않으며, 제도와 전문지식, 규범과 통계, 교육과 훈련, 자기관리와 타인에 대한 개입이 결합하여 특정한 행위 가능성을 구성하는 방식까지 포함한다.

통치성은 무엇을 결정하는가보다 결정과 행위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가능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경험되는가를 분석하는 개념이다. 어떤 행위가 정상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지, 어떤 주체가 책임 있는 행위자로 인정되는지, 어떤 위험이 관리되어야 하며 어떤 희생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는지는 하나의 명령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지식과 제도, 실천과 규범이 결합된 배치 속에서 형성된다. 사람들은 외부의 강제에 복종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합리성에 따라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행위를 조정하며 타인의 행위에도 개입한다. 통치성은 권력이 외부에서 개인에게 작용하는 방식과 개인이 자기 자신을 특정한 주체로 형성하는 방식을 함께 포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통치성은 정치적 형식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10] 오히려 정치적 형식이 현실 속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드는 조건들의 배치와, 그 배치를 관통하는 합리성을 분석하는 개념이다. 정치적 형식이 어떠한 공동체와 주체, 경계와 책임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면, 통치성은 그러한 구성들이 어떻게 반복되는 실천으로 자리 잡고 행위자들의 자기 이해 속에서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준다. 정치적 형식은 통치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얻으며, 통치성은 일정한 정치적 형식을 행위의 기준과 삶의 질서로 구체화한다.

어떠한 정치도 하나의 이념이나 규범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원리가 선언되더라도 그것을 수행할 절차와 역할, 교육과 기억, 언어와 감각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 원리는 쉽게 소멸한다. 반대로 명시적인 이념이 약화되더라도 그것을 지탱하던 습속과 제도, 판단과 주체화가 남아 있다면 기존의 정치적 형식은 다른 이름으로 반복될 수 있다. 정치는 단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통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반복할 수 있는 생활의 리듬과 조직의 관행, 역할에 대한 기대와 책임의 귀속 방식까지 함께 조직한다.

정치적 형식의 지속이 언제나 재생산의 문제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재생산은 동일한 결과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생산은 정치적 형식이 변화 없이 그대로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형식은 새로운 환경과 갈등, 행위자와 요구를 수용하고 변형하면서도 자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관계와 판단 기준을 지속한다. 재생산은 변화의 반대가 아니라, 변화를 자신의 지속 속에 편입시키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정치적 형식은 자기 자신을 직접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제도는 자신을 유지하는 절차와 역할을 만들고, 담론은 특정한 언어와 분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며, 실천은 일정한 행동을 습속으로 정착시킨다. 교육과 훈련은 무엇이 올바른 판단이고 적절한 행동인지 학습시키며, 기억과 서사는 현재를 해석하는 과거의 기준을 전달한다. 주체화는 이러한 실천과 규범을 수행하고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정치적 주체를 생산한다. 행위자는 이미 완성된 제도에 외부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제도와 실천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특정한 정치적 주체가 된다.

이 요소들은 각각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제도는 특정한 담론과 지식에 의해 정당화되고, 담론은 제도적 실천 속에서 권위를 얻는다. 실천은 행위자의 습속을 형성하고, 형성된 습속은 제도의 규칙을 명시적인 강제 없이도 반복하게 만든다. 주체화는 행위자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만들며, 그러한 자기 이해는 다시 제도와 담론을 지탱한다. 통치성은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의 배치를 이루어 특정한 정치적 형식을 반복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의 정치적 형식이 강력하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이념이나 권력이 우세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지속 조건을 조직하는 통치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는 하나의 결정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정이 자연스럽고 불가피하며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삶의 조건 자체를 재생산한다. 어떤 결정이 반복적으로 내려지는 이유는 매번 동일한 주권자가 그것을 강제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행위자들이 선택 가능한 대안을 제한적으로 인식하고, 특정한 역할 분담과 책임 귀속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언어를 이미 주어진 범위 안에서 구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형식은 단순한 논쟁이나 비판만으로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 어떤 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철회하더라도, 그 제도와 결정을 가능하게 했던 역할 관계와 습속, 지식과 주체화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유사한 형식은 반복될 수 있다. 새로운 규범을 선언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세우더라도 책임이 특정한 위치에 집중되고, 행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위임하며, 결정의 불가역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 지속된다면 주권적 형식은 다른 외양 아래에서 재생산된다.

 

주권적 정치 형식의 반복은 이처럼 최종적 결단의 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단을 준비하고 정당화하며 사후적으로 유지하는 일상의 통치적 실천 속에 분산되어 있다. 공동체의 경계는 법적으로 한 번 선포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성원과 비구성원을 구분하는 언어와 관행을 통해 반복된다. 책임의 집중은 지도자나 국가의 권한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판단과 실행을 위임하고 결과에 대한 성찰을 소수에게 맡기는 조직적 습속을 통해 재생산된다. 폭력의 정당화 역시 예외상태의 선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통은 불가피하고 어떤 생명은 부차적이라는 판단을 일상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지식과 감각 속에서 지속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앞서 논의한 좌파 멜랑콜리 역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히 과거의 혁명에 대한 정서적 애착도 아니며, 실패를 반복해서 기억하는 심리적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속할 조건을 충분히 조직하지 못할 때, 이미 형성된 정치적 배치가 다시 현재의 판단과 실천을 조직하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과거의 실패는 기억의 내용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능하고 불가능한 정치로 볼 것인지, 어떤 위험을 피해야 하는지, 누가 믿을 만한 정치적 주체인지 판단하는 규칙으로 작동한다.

새로운 정치는 제안될 수 있다. 새로운 언어와 관계,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 역시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아렌트의 공동행위와 버틀러의 관계성은 바로 그러한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이 곧 새로운 지속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정치가 자신을 반복할 실천과 제도, 기억과 교육, 책임과 주체화의 방식을 구성하지 못한다면, 기존 정치적 형식은 여전히 현재를 조직하는 힘으로 남는다. 이때 새로운 정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일시적인 사건이나 윤리적 요청, 예외적인 경험으로 축소될 수 있다.

브라운이 분석한 좌파 멜랑콜리는 이러한 문제를 정치적 시간의 차원에서 드러낸다. 반복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실패가 아니다. 기존의 정치적 형식은 실패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재생산한다. 실패는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기 위한 계기가 되기보다, 이미 알려진 위험을 피하고 과거의 동일성을 보존하기 위한 교훈으로 조직된다. 새로운 정치적 언어는 기존의 전략적 분류 속에서 평가되고, 새로운 관계는 익숙한 주체와 조직의 형식에 따라 이해되며, 새로운 실천은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정당성을 심사받는다.

따라서 좌파 멜랑콜리는 새로운 정치의 부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이 출현하더라도 과거의 정치적 형식이 현재를 해석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글의 관점에서 좌파 멜랑콜리는 기존의 주권적 형식이 그것을 지지하는 통치적 배치를 통해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한 양태로 이해될 수 있다. 과거의 실패가 현재의 정치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원이 되는 것은 단순한 의식적 집착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해석하고 전승하며 실천에 적용하는 제도와 담론, 습속과 주체화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난점이 발생한다. 새로운 정치 역시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통치성을 형성해야 한다. 어떠한 정치도 재생산[11]을 포기한 채 지속될 수는 없다. 공동행위는 반복될 수 있는 공간과 습속을 필요로 하고, 관계적 책임은 책임을 분배하고 조정할 실천과 제도를 필요로 한다. 복수성과 개방성을 중시하는 정치라고 하더라도 그 가치를 전승하고, 행위자를 형성하며, 갈등을 처리하고, 결정을 실행할 수 있는 일정한 배치를 구성하지 않는다면 역사적 지속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제는 재생산 자체가 아니다. 재생산을 곧 고착이나 억압으로 간주한다면, 정치는 일회적인 사건과 순간적인 출현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새로운 정치는 자신을 반복하고 전승하며 제도화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형식은 일정한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가져야 하며, 행위자들은 자신이 어떠한 관계와 책임 속에 놓여 있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결정은 실제로 실행되어야 하고, 공동의 행위는 기억과 경험으로 축적되어야 한다. 지속과 재생산은 정치의 외부에 있는 타락이 아니라, 정치가 현실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다.

문제는 재생산이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절대화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정치적 형식이 자신의 지속 조건을 유일하게 가능한 질서로 자연화하고, 자신의 판단 기준을 최종적인 것으로 만들며, 자신을 수정할 가능성을 배제할 때 재생산은 주권적 자기보존으로 전환된다. 결정은 다시 검토될 수 없는 기원이 되고, 제도는 자신이 해결하려 했던 문제보다 자신의 존속을 우선하게 되며, 정치적 주체는 이미 규정된 역할과 정체성을 반복하게 된다. 정치적 형식은 자신을 지속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바로 그 성공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자기 자신을 변형하는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

기존의 주권적 통치성은 자신의 재생산을 하나의 필연적 질서로 만들며,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반복한다. 주권적 형식은 단지 위기의 순간에 결단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는지, 어떤 판단이 전문적이고 현실적인지, 누구에게 책임이 귀속되어야 하는지를 일상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결정의 집중을 재생산한다. 경계와 예외 역시 반복적인 분류와 관리, 보호와 배제의 실천 속에서 자연화된다. 주권은 통치성에 의해 일상의 질서로 번역되고, 통치성은 주권적 형식을 반복 가능한 삶의 규칙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 역시 자신의 지속 조건을 조직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재생산이 또 다른 주권적 형식으로 굳어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새로운 통치성은 공동행위와 관계성, 복수성과 책임을 반복 가능한 정치적 현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가치들을 하나의 최종적 원리로 고정하거나, 그것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특정한 위치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형식을 재생산하되 그 형식을 유일한 것으로 절대화하지 않고, 자신의 제도를 유지하되 그 제도의 수정 가능성을 닫지 않으며, 주체를 형성하되 그 주체의 위치와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는 통치성이 요구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신적 폭력은 다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앞에서 보았듯 신적 폭력은 법과 폭력이 서로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순환을 중단시키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기존 법을 더 나은 법으로 교체하거나 새로운 주권적 질서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립과 법보존의 순환 자체를 무효화한다. 이 부정성은 정치적 형식이 자신의 지속을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못하게 하고, 주권적 질서가 자기 자신의 기원을 절대화하는 운동을 정지시킨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중단을 혁명적 사건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적 폭력을 반복 가능한 전략이나 정치적 규칙으로 전환하는 순간, 그것은 다시 누군가가 판정하고 실행하며 보존해야 하는 법정립적 원리로 변형될 수 있다. 또한 정치의 재생산을 매번 외부의 파괴적 사건에 의존하게 만든다면, 중단 이후의 지속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새로운 정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재생산의 외부에서 그것을 파괴하는 영구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재생산이 자기절대화로 전화되는 순간을 내부에서 다시 문제화할 수 있는 통치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적 폭력이 열어놓은 중단은 통치성의 문제계 속에서 새롭게 번역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적 폭력을 제도화하거나 일상의 행정기술로 축소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신적 폭력이 보여준 비정립성, 즉 중단을 새로운 주권의 기원으로 만들지 않는 원리를 정치적 지속의 내부에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정치적 형식은 자신을 재생산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결정과 제도, 주체화와 관계가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반복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정치가 자신의 재생산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정치적 문제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만드는 통치성이다. 정치적 형식은 자신의 지속 조건을 자연스럽고 비정치적인 배경으로 만들지 않고, 누가 결정하는지, 책임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어떤 관계와 경험이 배제되는지를 다시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제도는 자신의 권한과 절차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하며, 행위자는 자신이 형성된 주체화의 조건을 성찰하고 변형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의 자기재생산은 자기보존으로 폐쇄되는 대신, 자기수정과 자기제한의 가능성을 함께 생산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통치성이 요구하는 것은 재생산의 부정이 아니라 재생산에 대한 자기제한이다. 정치는 스스로를 지속시켜야 하지만, 그 지속은 자신의 형식을 다시 철회하고 수정하며 재배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해야 한다. 결정은 이루어져야 하지만 최종적인 기원으로 성역화되어서는 안 되고, 책임은 실제로 귀속되어야 하지만 특정한 개인이나 위치에 영구적으로 응축되어서는 안 된다. 제도는 지속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존속을 정치의 목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주체는 형성되어야 하지만 이미 주어진 정체성과 역할에 완전히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통치성은 주권을 단순히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조직과 결정, 경계와 책임은 정치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없으며, 사라져서도 안 된다. 문제는 이 기능들이 하나의 중심과 최종적 기준에 독점되고, 자신을 수정할 수 없는 형식으로 고착되는 데 있다. 새로운 통치성은 주권적 정치가 수행해온 결정과 지속의 기능을 인정하면서도, 그 기능이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못하도록 배치를 구성해야 한다. 주권으로부터 통치성으로의 이행[12]은 결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결정이 반복되고 수정되는 조건을 문제 삼는 것이며, 권력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특정한 위치에 응축되는 과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장의 과제는 새로운 정치적 이상이나 완결된 정치체제를 제안하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새로운 정치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지속 조건을 구성할 것인가이며, 동시에 그 지속 조건이 다시 하나의 주권적 정치 형식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어떠한 자기제한의 원리를 가질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통치성은 자신을 재생산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자신의 재생산을 반복적으로 중단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다음 장에서 철회 가능성과 공동책임성을 새로운 통치성의 두 가지 핵심적인 자기제한 메커니즘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철회 가능성은 정치적 결정과 배치가 자신의 최종성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미 이루어진 결정이 다시 판단과 수정의 대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원리이다. 공동책임성은 결정과 책임이 특정한 주체나 위치에 독점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책임과 행위 자체가 소멸하지 않게 만드는 원리이다. 두 원리는 정치적 형식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형식의 재생산이 다시 주권적 자기절대화로 폐쇄되지 않도록 만드는 통치성의 조건으로 제안될 것이다.

 

6장. 통치성의 자기 제한: 비주권적 정치의 프로그램

지금까지의 논의는 하나의 공통된 결론으로 수렴한다. 좌파 멜랑콜리는 단순한 실패의 기억이 아니라 정치적 형식이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방식이며, 이러한 반복은 주권적 정치 형식이 자신의 지속 조건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통치성과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는 단순히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제안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떠한 정치도 자신을 지속시키는 통치성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결국 기존 정치가 이미 구축해 놓은 재생산의 배치 속에서 다시 이해되고 조직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치의 문제는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스스로를 어떠한 방식으로 지속시키는가에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난점이 등장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권적 정치 형식의 반복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가 자신의 지속 조건을 조직해야 함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 역시 하나의 통치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통치성이란 본래 행위를 조직하고, 그 조직을 반복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의 배치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통치성 역시 자신의 재생산을 조직하는 순간, 다시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위험을 갖는다. 다시 말해 주권적 정치를 넘어선 통치성 역시 또 다른 주권적 형식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문제는 통치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다. 정치는 언제나 자신을 지속시키는 실천과 제도, 담론과 주체화의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주권적 정치의 문제는 통치성을 폐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통치성이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절대화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리를 함께 조직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정치는 단순히 새로운 통치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통치성을 반복적으로 다시 문제화할 수 있는 통치성을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주권적 정치란 주권이 제거된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도, 결정도, 조직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결정과 조직, 그리고 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자기 자신을 유일한 정치적 기준으로 절대화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정치이다. 따라서 비주권적 정치의 핵심은 권력의 부재가 아니라 자기 제한의 가능성에 있다. 새로운 정치가 기존 정치와 구별되는 것은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반복적으로 다시 정치적 판단의 대상으로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글은 자기 제한을 하나의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통치성의 작동 원리로 이해하고자 한다.[13] 자기 제한은 정치 주체들의 선의나 도덕성에 의존하는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형식이 자신의 지속 조건을 조직하는 방식 자체 속에 내재해야 하는 원리이다. 통치성이 자기 자신을 반복적으로 수정할 수 없다면, 어떠한 새로운 정치 역시 결국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 제한은 새로운 통치성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규범이 아니라, 그 통치성이 비주권적 정치로 남기 위한 내적 조건이다.

이러한 자기 제한은 두 개의 작동 원리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사고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철회 가능성[14]이고, 두 번째는 공동책임성이다. 이 둘은 각각 독립된 규범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성이 자기 자신의 절대화를 제한하는 서로 다른 측면을 구성한다.

먼저 철회 가능성은 정치적 결정을 다시 정치적 판단의 대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주권적 정치에서 결정은 하나의 단절된 사건이다. 결정은 예외를 확정하고 질서를 조직하며, 이후의 정치적 판단은 그 결정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결정은 더 이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실패는 현재를 수정하는 계기가 아니라 새로운 결단을 요청하는 근거로 기능한다. 좌파 멜랑콜리가 반복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과거는 현재를 비판하기 위한 자료가 아니라 현재를 규정하는 기준으로 남게 된다.

철회 가능성은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형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결정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판단과 결정을 요구하며, 어떠한 공동체도 결정 없이 지속될 수 없다. 문제는 결정 자체가 아니라 결정의 지위이다. 결정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어떠한 결정도 자기 자신을 최종적인 기준으로 만들 수는 없다. 결정은 언제나 다시 정치적 검토의 대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지속 조건 역시 다시 판단될 수 있어야 한다. 철회 가능성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통치성이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반복적으로 다시 정치화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철회는 하나의 정책 수정이나 전술적 유연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형식이 자기 자신의 최종성을 스스로 철회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철회 가능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 형식이 언제나 다시 수정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정의 권한이 특정한 개인이나 지도부, 혹은 하나의 기관에 집중된다면, 철회는 곧바로 새로운 주권적 특권으로 전화될 것이다. 자기 제한은 다시 하나의 중심 권력이 관리하는 절차가 되고, 정치적 형식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동일성을 회복하게 된다. 따라서 철회 가능성은 그것을 수행하는 정치적 관계와 함께 사고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두 번째 원리가 공동책임성[15]이다. 공동책임성이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책임을 진다는 도덕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책임이 특정한 위치에 응축되지 않도록 관계를 조직하는 통치성의 원리이다. 정치적 결과는 언제나 복수의 행위와 복수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책임 역시 단일한 주체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책임은 관계 속에서 조직되며, 관계의 변화와 함께 다시 배치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공동책임성이 의미하는 것은 책임의 분산이 아니라 책임의 비독점성이다. 누구도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되지 않지만, 동시에 누구도 책임을 독점할 수도 없다. 정치적 책임은 특정한 권위에 고정되는 대신, 정치적 형식 전체를 반복적으로 재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구성된다. 따라서 공동책임성은 책임을 약화시키는 장치가 아니라, 권력이 특정한 위치에 응축되는 것을 방지하는 자기 제한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점에서 철회 가능성과 공동책임성은 서로를 전제한다.[16] 철회 가능성이 없다면 공동책임성은 이미 확정된 결정을 함께 부담하는 형식적 참여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 반대로 공동책임성이 없다면 철회 가능성은 다시 특정한 권력이 독점하는 수정 권한으로 귀결될 수 있다. 철회 가능성은 정치적 시간 속에서 자기 동일성의 반복을 제한하고, 공동책임성은 정치적 공간 속에서 권력의 응축을 제한한다. 하나는 결정의 절대화를 막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절대화를 막는다. 이 둘은 함께 새로운 통치성이 자기 자신의 반복을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안하는 비주권적 정치는 통치를 부정하는 정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통치성이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유일한 질서로 고정시키지 못하도록 만드는 정치이다. 주권적 정치가 자신의 동일성을 재생산함으로써 지속된다면, 비주권적 정치는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반복적으로 다시 문제화함으로써 지속된다. 그것은 형식을 폐기하는 정치가 아니라, 형식이 스스로를 다시 수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치이며, 완결된 질서를 목표로 하는 정치가 아니라 자기 제한을 반복 가능한 통치성으로 조직하는 정치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하나의 완결된 이론이라기보다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에 가깝다. 이 글은 비주권적 통치성이 지향해야 할 원리를 제시하였을 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제도와 실천, 교육과 조직, 습속과 정치적 관계를 통해 구성될 수 있는지까지는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후의 연구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점만은 분명하다. 좌파의 실패는 단순한 전략의 실패도, 혁명의 실패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형식이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방식의 실패이며, 그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통치성의 문제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 역시 새로운 이념이나 새로운 혁명적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가 자기 자신의 재생산을 어떻게 반복적으로 다시 정치화할 것인가,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절대화를 어떻게 스스로 제한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주권적 정치는 주권을 폐기하는 정치[17]가 아니라, 통치가 자기 자신의 절대화를 반복적으로 철회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정치이다. 그리고 앞으로 구성되어야 할 새로운 통치성은 형식을 고정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형식이 자기 자신의 반복을 끊임없이 다시 문제화할 수 있도록 배치를 조직하는 자기 제한의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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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파 멜랑콜리’라는 표현은 벤야민의 1931년 글 「좌파 멜랑콜리」에서 유래하며, 브라운은 이를 프로이트의 멜랑콜리 개념과 결합하여 좌파가 상실한 정치적 이상과 정체성에 애착하는 구조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본문에서 사용하는 좌파 멜랑콜리는 직접적으로는 브라운의 문제설정을 따르지만, 이후 논의에서는 이를 정치적 형식의 시간적 반복이라는 문제로 확장한다.

[2] 이 글에서 ‘정치적 형식’은 특정 사상가의 개념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경계·결정·폭력·시간성 등이 일정한 관계 속에서 조직되는 방식을 지칭하기 위한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3] 이하의 ‘주권적 정치 형식’은 슈미트의 예외상태와 결단 개념에서 중요한 단서를 얻지만, 슈미트의 주권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이 글은 주권을 최종적 결정, 공동체의 경계 설정, 폭력의 정당성 및 희생 가능한 생명의 구분을 결합하는 보다 넓은 정치적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사용한다.

[4] 슈미트에게 예외상태에 관한 결단은 규범으로부터 단순히 자의적으로 이탈하는 행위가 아니라, 정상상태를 성립시키고 법질서가 적용될 수 있는 조건을 결정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하에서 논의하는 ‘결정의 최종성’ 역시 모든 주권적 결정을 경험적으로 불가역적인 결정으로 간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5] 이 글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을 특정한 혁명적 주체가 행사하는 정당한 폭력의 유형이라기보다 법정립과 법보존의 순환을 중단하는 비정립적 계기로 읽는다. 따라서 이하에서 ‘중단’이라는 표현은 신적 폭력을 새로운 창설적 주권의 원천으로 해석하지 않기 위해 사용된다.

[6] 여기서 ‘공백’은 벤야민 자신의 개념이 아니라, 신적 폭력의 비정립성을 정치적 지속의 문제와 연결하기 위해 이 글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7] 이하의 논의는 버틀러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을 관계성과 취약성의 정치로 직접 전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버틀러의 벤야민 독해가 법적 책임과 죄책, 주권적 주체의 문제를 재검토하는 방식에 주목하면서, 이를 본문의 ‘주권적 형식의 중단 이후’라는 문제계 속에서 재배치한다.

[8] 여기서 관계성과 취약성은 개별 주체가 이미 완성된 이후 타인과 맺게 되는 우연적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버틀러에게 주체는 타인의 언어와 인정, 돌봄과 사회적 조건에 의존하여 형성되고 유지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노출과 의존은 주체의 구성적 조건이다. 다만 이러한 보편적 취약성의 조건과 실제 삶에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차등 배분되는 불안정성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비폭력을 관계적 존재론과 연결하는 것 역시 이러한 조건에서 출발한다. 비폭력은 자족적인 주체가 선택하는 순수한 도덕적 원칙이라기보다, 자신이 제거하거나 폭력에 노출시키려는 타자와도 이미 관계 맺고 있다는 조건에 응답하는 실천으로 이해된다. 본문은 이러한 문제설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관계성과 취약성만으로는 복수의 책임과 요구를 어떻게 조직하고 조정할 것인지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별도로 제기한다.

[9] 푸코의 통치성(gouvernementalité)은 좁은 의미의 국가행정이나 정부의 통치기술을 뜻하지 않는다. 통치는 타인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능한 행위의 장을 구조화하고 ‘행위를 이끄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통치성은 그러한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합리성, 지식, 기술, 제도 및 실천의 결합을 분석하는 문제계이다. 따라서 통치의 대상은 이미 완성된 수동적 개인만이 아니다. 개인은 통치의 대상으로 구성되는 동시에 일정한 진리와 규범에 따라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자신의 행위를 조정하는 주체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통치성 분석은 권력이 제도적 명령으로 행사되는 방식과 주체가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이끄는 방식을 함께 문제 삼을 수 있게 한다.

[10] 다만 이하에서 통치성은 푸코의 역사적 분석에서 제시된 특정 통치합리성을 그대로 지칭하기보다, 정치적 형식이 제도·담론·실천·습속·주체화를 통해 반복 가능한 현실로 구성되고 지속되는 조건을 분석하기 위해 확장하여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정치적 형식’과 ‘통치성’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전자가 주체·경계·결정·책임 등이 어떠한 관계로 조직되는지를 지칭한다면, 후자는 그러한 관계가 행위와 제도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조건과 메커니즘을 지칭한다.

[11] 이 글에서 ‘재생산’은 이미 완성된 정치적 구조가 동일한 형태로 반복 복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적 형식의 재생산은 그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절차·담론·습속·기억·주체화의 조건들이 반복적으로 생산되고 갱신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재생산은 변화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하나의 정치적 형식은 새로운 요구와 행위자,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고 스스로를 변형하면서도 자신을 구성하는 관계와 판단방식을 지속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변형을 통한 지속’까지 포함하는 재생산이다. 이는 특정한 사회재생산 이론이나 알튀세르의 재생산 개념을 직접 적용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 형식의 지속 조건을 분석하기 위한 작업개념이다.

[12] 여기서 주권에서 통치성으로의 ‘이행’은 하나의 권력형태가 역사적으로 다른 권력형태에 의해 대체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푸코 자신도 주권·규율·안전의 관계를 단순한 계기적 대체로 설명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권력기술이 중첩되고 재배치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 글에서의 이행 역시 권력형태의 역사적 시대구분이 아니라 분석적 초점의 이동을 의미한다. 주권적 분석이 결정·경계·예외·최종성의 형식을 문제 삼는다면, 통치성 분석은 그러한 형식이 분산된 실천과 제도, 지식과 주체화를 통해 어떻게 반복 가능한 현실이 되는지를 문제 삼는다. 따라서 하나의 정치적 배치 안에서 주권적 결정과 통치적 메커니즘은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13] 이하에서 ‘자기제한’은 정치행위자의 절제나 관용과 같은 윤리적 덕목을 뜻하지 않으며, 이미 성립한 주권권력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자유주의적·헌정주의적 권력제한과도 구별된다. 또한 정치적 역량의 통치의 축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자기제한은 하나의 통치성이 자신의 결정·제도·책임배분·주체화 방식 등 자신의 재생산 조건을 다시 정치적 판단과 변형의 대상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따라서 자기제한의 주체는 통치성 외부에 존재하는 별도의 초월적 심급이 아니다. 문제는 통치의 외부에서 통치를 제한하는 최종적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의 작동 자체가 자신의 배치를 다시 문제화할 가능성을 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가에 있다.

[14] 여기서 ‘철회 가능성’은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단순히 취소하거나 이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법적·행정적 의미의 철회와 구별된다. 또한 결정을 잠정적으로만 내리거나 결정을 회피하는 태도를 뜻하지 않는다. 정치적 결정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일정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다. 철회 가능성이 문제 삼는 것은 결정의 존재가 아니라 결정의 지위이다. 주권적 결정이 이후의 판단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설정하면서 그 자신은 판단의 외부에 놓이는 경향을 갖는다면, 철회 가능한 결정은 자신이 형성한 질서 안에서도 다시 판단·비판·수정의 대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폐쇄하지 않는다. 따라서 철회 가능성은 결정의 효력을 부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결정이 자신의 효력을 스스로의 최종성과 동일시하지 못하게 하는 통치적 조건이다. 이 의미에서 철회는 과거로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결정이 만들어낸 관계와 효과까지 다시 정치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15] 여기서 ‘공동책임성’은 어떤 정치적 결과에 대해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정도의 책임을 부담한다는 의미의 집단책임(collective responsibility)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책임소재를 다수에게 분산시켜 개별 행위자의 책임을 희석하는 원리도 아니다. 공동책임성의 핵심은 책임의 ‘균등한 분산’이 아니라 ‘비독점적 조직’에 있다. 정치적 결정과 결과가 복수의 행위와 관계, 역할과 제도를 통해 생산된다면, 책임 역시 단일한 주권적 주체에게 최종적으로 집중되거나 반대로 익명적 집단 속에서 소멸해서는 안 된다. 각 행위자의 구체적인 행위와 위치에 따른 책임을 구별하면서도, 정치적 배치 전체가 자신의 결과를 다시 검토하고 수정할 책임을 공유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공동책임성이다.

[16] 두 원리는 각각 시간과 공간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별개의 원리라기보다 상호의존적인 자기제한 메커니즘이다. 철회 가능성은 이미 이루어진 결정과 배치가 시간 속에서 최종적 기원으로 고정되는 것을 제한하고, 공동책임성은 그것을 검토하고 수정할 정치적 역량이 특정한 위치에 독점되는 것을 제한한다. 전자만 존재하면 수정권한을 독점하는 새로운 주권적 위치가 형성될 수 있고, 후자만 존재하면 공동책임은 이미 확정된 질서를 함께 집행하는 참여로 축소될 수 있다.

[17] 이 글에서 ‘비주권적 정치’는 결정, 권력, 조직, 경계 또는 강제력이 사라진 정치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주권성은 무정부성, 무조직성, 무결정성 또는 순수한 합의정치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 글이 문제 삼는 주권성은 이러한 기능의 존재 자체보다 그것들이 하나의 최종적 중심과 기준에 응축되고, 그 중심이 자신의 결정과 재생산 조건을 다시 판단의 대상으로 돌려놓지 않는 형식이다. 비주권적 정치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결정의 철회 가능성과 책임의 비독점성을 통해 그 기능이 자기절대화되는 것을 제한하는 정치적 형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비주권성은 주권의 단순한 외부라기보다, 정치적 형식이 자신의 주권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한하는 작동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