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세계, 빈손의 영화
수차미

KMDB에 올라온 홍은미 평론가의 글 ‘알몸의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감상을 언어로 풀어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하는 이 글은 임권택의 <개벽>을 다루는데, 그중에서도 허문영 평론가의 “인물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이 되기에 실패한 영화”라는 서술을 인용한다. 이는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풍경을 공유한다는 뜻으로, 영화를 하나의 시대로 바라보는 쪽이다. 영화 안에 내러티브가 있기보다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서 재현된다고나 할까. 사실 무언가 거대한 흐름에서 개인의 의견은 쉽게 채택되거나 압박받고는 한다. 이에 응해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질린 나머지 아예 판을 떠나버리기도 한다. 영화의 잔인한 점은 바로 그 후일담마저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는 것이다. 흐름을 버티든 말든 간에 여전히 장소는 남겨지기 마련이므로 남은 자리가 어떻게 될지는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면 그 안의 일부가 손상돼도 다른 누군가로 금세 대체될 것쯤은 누구나 상상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이런 거대한 흐름이 영화 전반의 무력감을 구성하면서 그에 따라 다시 원점으로 (반강제적인) 회복을 구성하는 게 영화의 종결점이다.
원점으로 회복되는 건 당사자로서는 그리 바라지 않는 상황일 수 있다. 아픈 상태로 남아있고 싶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성장은 자신이 겪은 상황에서 배울 때가 많고,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다시 예전과 같지 않은 대목이 생겨나는데 이게 인물의 성장을 보여주곤 한다.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오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정에서 완벽한 회복은 결국 여태까지의 이야기와 성과를 부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당사자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이러한 아픔에는 그런 뜻도 있다. 자신이 당장 아프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고통은 인체가 상처를 측정하는 수단에 가까워서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면 경고등이 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영화에는 결국 사건이 있어야 하고, 이게 간과되면 영화는 시간을 잃는다. 즉 흘러간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바로 사건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가정들을 종합하면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풀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아픔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조건 없는 회복에 반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시간과 함께 이전의 것들은 점진적인 누출을 겪는다. 영화가 일관되게 하나의 세계를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이 과정에서 어떠한 감소에 대응하는 일은 세계 자체의 섭리이기에 맞설 구석이 없다. 마치 노화를 최대한 늦춰도 결국 모두가 죽음에 도달하듯 한 시대나 배경도 천천히 현재를 향해 달려간다. 간단히 말하자면 엔트로피는 평형상태에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 전기에서 후기,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이동하므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서사는 모두 이런 것들에 지배받는다. 아픔을 인정해야 함은 이처럼 높은 강도의 위기에서 낮은 단계로 완화되기 위함이고, 회복에 반대한다면 자신이 아직 이야기를 진행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영화들은 이러한 의사표현을 무시하고 이야기 진행에 나서기도 한다. 이는 대개 시간 자체의 순리를 따라가는 쪽이지만 어쨌거나 무기력함을 유발한다는 점에서는 그 원리와 결과가 같다. 시간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는 가운데, 화면 속에는 잡을 곳 하나 없어서 안의 내용물이 손쉽게 떠나버린다. 이로 인해 아무런 것도 움켜쥘 수 없는 ‘빈손의 영화’가 탄생한다.
이런 진행은 주로 장력이 크다는 점으로도 설명되는데, 이미 예전부터 흘러온 인과가 있으니 그 안의 인물이 사건을 주도해도 큰 틀에서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는 뜻이다. 위에서 말한 임권택의 <개벽>도 동학농민운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가 지나온 시간이기에 우리가 쉽게 부딪힐 수 없게 느껴지는 셈이다. 이런 걸 단순히 무기력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회복에 반대하면서까지 이루어낼 만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고통이 자신을 살아있게 느끼게끔 해주어서일까? ‘나는 아프다’고 말하는 일이 자해나 공갈 협박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몸이 보내는 이상현상은 신체에 속해있어서 환자 개인의 영역으로 다뤄지고는 하지만, 살아가는 환경에서도 몸을 병들게 하는 구석은 많으므로 자신이 아프다는 점을 소명하는 일이 곧 그런 환경에 대한 도전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환경에 의한 신체변화가 적응에 실패한 것으로 여겨질 때 당사자는 회복 중단을 요청하게 된다. 오늘날 비평가와 이들의 신체는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침입자가 바라는 건 피해자의 눈물이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참교육>을 보며 느낀 건 그런 점이다. 교권보호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속 여러 사건들은 이미 최근 10년 동안에 화제가 됐던 몇몇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비교적 최근의 일화들인 만큼 사람들의 기억에 아직 잘 남아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에 보다 잘 침투한다. 이에 따라 드라마를 두고 이야기가 오가는 건 주로 자극적인 내용이 감정적인 해소에만 그칠 뿐, 실리적인 대안이나 해법을 제안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을 소재로 가공하는 일에 대해, 진정성 있는 이해가 아니라 상업적인 이용에만 그친다는 지적이다. 생각해보아도 가공할 만한 폭력이 등장할 때는 그만한 정도의 사태에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요인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작품에 등장하는 적대 세력은 상종하기도 힘들만큼 확실한 악이어야만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를 나치로 설정했고, <범죄도시>는 마약 등을 유통하는 중범죄 집단을 설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타깃을 설정할 때 사람마다 대상에 대한 평가가 갈릴 때다. 한 사람의 죄질에 관해 명확하고 뚜렷한 기준이 없으면 이를 막연히 적대하기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상대방에게 강도 높은 폭력이나 문책을 진행할 때는 그만큼의 설득력 있는 이유를 준비해두어야 하는데 <참교육>은 이를 상대방의 죄질을 부각하는 쪽으로 진행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례에 관해서는 비교적 이견의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만큼 단순히 어느 한 쪽의 입장만으로는 판단 내리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거진 이야기의 전개에서 결말까지 모두 지나버렸으니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점 말고는 대중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기껏해야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쪽이거나, 아니면 이를 이야기의 표면으로만 받아들이며 사건에서 자기를 분리하는 일만 가능하다. 작품이 이미 판결이 끝난 사례들을 가져온 것도 법안에서 최종 심금에 도달한 것들로 다른 말이 나오는 걸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작품이 다루던 에피소드 중 하나처럼 이미 사람들 사이에 판결이 나서 마무리 지어졌다고 여기는 건 일종의 낙인효과가 될 수도 있다.
작품은 몇 년 전에 끝난 사건들을 참조하며 이를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한다. 시의성을 위해 그렇게 했겠지만 반대로 몇몇 사건에서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재평가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완전히 결백한 사람이 없다면 반대로 절대적인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이 흐려지거나 하고 싶은 말이 불분명해지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고, 적어도 대중일반에게는 언제나 모니터링되는 한 면만이 제공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어, 원본을 편집해 특정한 이해나 해석을 유도하는 일은 영화의 기술이지만 작품 안에서도 드라마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등장한다. 드라마가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항상 교육부 장관이 나서 브리핑을 하며 처분이 어떻게 됐고 경과가 어땠는지를 보고한다. 무언가 절차에 따라 진행됐으니까 적당히 잘 마무리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절차는 모두가 보고 싶어하는 것을 관습적으로 승인하는 것일 뿐이다. 즉, 러닝타임 전체에서 인과를 쌓아올리면서 결국에는 자신이 바라는 결말을 승인하게끔 절차를 밟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드라마로 보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점만 남기고 나머지는 아예 생략함으로써 주어진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므로 잘 만든 편에 속한다. 더군다나 자신이 비판하는 내용 자체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동일하게 둠으로써 이야기를 전파하는 일에도 능숙해 보인다. 원리적으로 보면 이 둘이 서로 같아서, 미디어의 표면을 보고 내리는 판단이 결국에는 이 작품 자체에 대한 자기성찰로 작동하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드라마가 일종의 사회고발물 형태를 한다는 점에서 한 사회의 방향성을 해치거나 망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수 있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표면에서 대중은 개별 존재로서 자신을 화면 속 상황과 무관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이 다루는 내용이 현실에 가까울수록 점점 더 이야기는 특정한 현실을 결론으로 승인하게 된다. 화면에 묘사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토대로 가공된 유사물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작품은 미디어에 올라온 게시물을 보고 댓글을 달며 오해와 불신을 전파하던 이들에 대한 처분이나 이해를 다루지 않는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로 보이지만, 사람들을 속이는 쪽과 휘둘리는 쪽 모두에 공평한 책임이 있다.
"인-무브 기고" 코너는 공개 모집을 통해 접수된 원고를 게재하는 공간으로,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지닌 필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취지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원고에 담긴 의견이나 입장은 필자의 개인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서교연의 공식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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