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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이다의, 자기 자신의 도굴법 ③ 어찌할 수 없음

by 인-무브 2026. 9. 16.

자기 자신의 도굴법

 어찌할 수 없음

 

이다의

 

 

 

성곽 틈에서 샌 인파에 쓸리고 우리는 우리가 나아간 곳으로 가게 된다.

 

어쩔 수 없으면 받아들일 수 있다. 신탁부터 투표로 흐르는 이 감각은 벌어진 일을 개인의 동의와 분리하는 권위다. 신이란 있다. 사회란 있다. 두 문장이 흐름의 처음과 끝에 있다. 신 앞에 평등한 만인은 신을 빼고 남은 우리라는 소속감으로 나란하다. 정치적인 의사를 결정할 조직에 앞서 사회로 명명한 하나의 공동체를 상정하면서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법치국가의 구속이란 ②에서의 상호의존성처럼 전체의 전체에 대한 구속이었다. 부분의 부분에 대한 구속이 아님에 사회라는 무리의 문제가 있다. 문장이 진척되면서 권력을 쥔 일자나 절대자가 아닌 만민의 횡대가 개인을 포위한다. 사회란 있음에 집중한다. 조직적인 합의는 그 권위보다 먼저 도덕적 결속감에 기댄다. 합의가 일련의 절차나 경합하는 정치를 거쳐 결론으로 나오기 이전, 합의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가 있다. 공동체를 단일한 상황에 대한 단일한 행동양식, 결정에 수렴시키는 일은 그 첫머리에 단일한 의지를 마련하면서 시행된다. 떼 지은 사람들의 흐름은 처음과 끝이 매듭지어져 마름모꼴의 결정체다. ②에서 처벌적 국가론이 선한 공동체를 전제로 두는 동시에 결과로 기대하므로 생기는 교착상태를 이른 바 있다. 처벌보다 효력 있게 채택될, 선의 공동체를 결정화된 정보로 즉각 생산하는 국가론이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 국가이론 수준에서 용이한 논의일지언정 이론으로부터 유출된 무리는 그와 불화한다. 무리는 자신의 최초 형상으로 사회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 사회는 국가에 선행한다는 역사적 흐름 탓이다. 흐름을 알고 있으므로 무리는 사회 형상을 관성적으로 모방한다. 이로 인해 ②의 국가론은, 사회가 국가의 결정작용으로 화합하게끔 유도된다는 쟁점으로 절취된다. 우리가 느끼는 권위는 처벌적 국가론의 여파처럼 타율적 부자유로 되돌아간다.

 

반사 대상인 국가에 대한 불신과 닮도록, 사회 구성원의 서로에 대한 불신은 사회상태 자체다. 가령 국민발안제와 같이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거나 자치 운영하는 제도에 냉소적인 여론이 있다. 이 무리의 국민성이 우매하다는 질타다. 포위하는 횡대를 이야기했듯 해당 여론을 자기비하로 읽기엔 흠이 있다. 차라리 우민에 대한 계몽의 태도와 더 가깝다. 국민과 중복되는 전체 사회로부터 나를 구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를 제외한 군중이 나를 전복할 불온세력이라는 근심으로 연장된다. 분할선은 단일국가 내부에 부분적인 무리를 구획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무리 간의 분쟁이나 적대 따위가 아니라 불신이 다뤄지는 맥락에 대해 쓰려 한다. 위 여론을 자기비하로 읽을 때 우린 분할선을 아우르는 국민의 무리를 상상하고 있다. 국민을 상상함은 냉소적인 여론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연장되게 한다. 국민이라는 표어를 냉소자가 건네받은 순간, 냉소자들은 자기 구별에 의해 무리로부터 이탈한다. 불신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정서임에 상상하는 국민은 이탈한 냉소자들을 우민이라 칭한다. 우민들의 연대라는 이 호명을 극우 포퓰리즘은 전략적으로 시인해버린다. 이들의 논변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관료의 행적이 권위적이라는 비판이라기엔 더 광범위하다. 국민이라는 무리가 전체를 점유하는 지위를 책망하고 있다. 만민의 횡대는 나를 포위한 권위적 타자라는 까닭이다. 국가에 선행하는 전체 사회를 표방하는 선의 공동체는 현실 사회의 불신과 마찰한다. 나와 다른 의견들로 인한 시달림이 사회상태일 때, 화합으로 나아가는 의결 과정 대신 화합해야만 했던 권위가 나타난다. 다수결은 개인들의 거수한 손을 맞잡게 하면서 건조한 의결 과정에서 화합과 양보의 이미지를 새로 갖춘다. 모두가 시달리고 있음이 우리가 공유하는 감각이다. 신과 사회가 있다는 선포문은 생애에 언젠가는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되리라는 예감을 쥐어주면서 질서를 가다듬는다. 반의를 표명하고 있는 개인에게 특정한 규정을 설득하는 일은 규정 자체의 진리값은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끝내 공동의 운명을 만날 것이라는 믿음에 의거한다.

 

합치라는 말이 연상시키는바 타자를 설득하는 입장에 나란히, 타자의 행위를 납득하는 나의 시점을 문제삼는다. 타자들의 권위, 지금의 쟁점은 개인에 대한 다수자로서의 집단이다. 이제껏 머리–국가의 시점으로 국가를 하나의 행위자처럼 묘사했다. 국가로부터 시민사회라는 집단을 도리기 위함이다. 행위에 대한 규범적 승인이라는 실증성의 틀을 뒤집어 규범이 행위를 생산하고 규범으로 행위를 예측한다는 전도에 성공했을 때, 국가가 시민사회의 행위를 승인해준다는 수동적인 기다림은 규범을 이고 타자가 나에게 행위를 설득한다는 적극적인 경로로도 읽힌다. 방금 진술에서 설득의 주체와 대상 자리를 두고 나·타자·국가·시민사회가 뒤섞였다면, 정당성이 자신의 생산물인 시민을 비춘다는 결구는 이런 꼴까지를 의미한다. 쌓아올려둔 국가의 이미지가 단일한 행위자이듯 설득의 대상인 개인은 시민사회의 존재를 납득받게 될 국가이기도 하다. 국민이 국가로 동기화되는 정황을 쫓았다면 지금부터는 국가의 동기화를 묻는다. 국민주권이란 그러한 설득 프로그램으로 쓰인다. 규범이 현실 사태들을 생산하는 과정 도중에 내가 기입하고 싶은 건 설득과 납득으로 집단이 구현되는 배경이다. 막연한 질서인 노모스의 실체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보편성을 회피하기 위해 노모스를 모호하게 개념화하는 슈미트의 위치를 미리 일러두었다. 코지는 “이념적 현실성”을 토대로 슈미트를 칸트주의적인 보편성의 기획과 만나게 되는 지점까지 몰아붙이며 슈미트의 좌표를 해명해준다. “슈미트적인 이데올로기 비판도 분명 타자의 이해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인 이상 그 철저한 반보편주의적 입장을” 사수할 수 없음에, 슈미트는 “보편성에 포섭되는 일 없이 일회적인 장소를 민족적으로 혹은 지정학적으로”(오오타케 코지, 윤인로 옮김, 『정전과 내전』, 산지니, 2020, 34-35쪽) 질서 삼아 복원하려 한다. 한편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행동하는 국가라 할지라도 대외적으로는 타국이 수용 가능한 법(올바름) 혹은 대의를 드높이는 일이 불가피하므로” “인류사의 도덕적 진보”(32쪽)가 정향될 것이라는 칸트주의 국가론의 예견이 있다. 슈미트와 보편성의 접점을 따라가기 위해 규범들 간의 관계를 찾아 쥔다. 유사한 일에 관한 법률적 이견들이 충돌하면서도 상호 이해를 지향하며 보편화되는 모습, 유관성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접목하려는 규범들의 관계는 다른 문맥이다. 범주상 서로 무관한 법률, 예로 물권법과 행정법 등이 조직을 이루는 법체계다. 더 넓은 심급으로 국제관계에 의해 서로 무관한 것으로서의 국법들은 하나의 세계상으로 통섭된다. 모여 있음, 혹은 관찰자가 각각이 놓인 장소를 한 공간으로 파악했으므로 취합되는 체계다. 지역성에 기초한 슈미트의 보편은 연관되지 않은 이질성들의 모임이다. 현실주의는 제 실용적 국제관계론으로 인해, 그리고 국제라는 관찰된 사실로 인해 자기를 현시하여 타자를 설득해야 하는 이상주의적 보편화로 돌아가게 된다. 되돌아가는 동선, 현실주의에서 보편성이 아니라 보편성에서 현실주의가 달성된다는 거점에서 현실성은 이념화되며 슈미트 식의 전체가 기획된다. 개인을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②에서 논한 루만의 상호관계상 조건 의존성은 현실주의가 출발하는 기점, 현실성의 조건이 된다. 수긍으로 완수되는 현실주의적 효율성은 그 바탕에 집단성을 담는다.

 

다수자는 설득의 대상인 이단적 개인을 포괄하며 집어삼키고 있다. 이어질 논의의 최소 단위는 집단인 인민상태다. 이질성을 어떻게 연결할 것이냐 하는 방법론은 이질성을 이어 집단을 구축해야 한다는 당위를 우선 소명해야 시작된다. 설령 방법론의 질문이 역사상 일찍 던져졌다 해도 그렇다. 현재 당면한 집단이 당위를 증명한 이론들에서 비롯되었고 우린 방법론보다 그를 먼저 겪게 된다.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가 결단이듯이, 우리를 무리로 데려온 인민 또는 국민은 들려온 소리다.

 

맺은 문장은 국민의 헌법제정권력을 제시한 시에예스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의 표현은 사실 다음과 같다. “인민 또는 국민은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다.”(파스쿠알레 파스키노, 「엠마누엘 시에예스와 카를 슈미트에 있어서의 ‘헌법제정권력’론」, 헬무트 크바리치 외, 김효전 옮김, 『반대물의 복합체』, 산지니, 2014, 280쪽으로부터 재인용) 시에예스는 소리로서의 인민을 다소간 낮잡고 있다. 이 인파가 어떻게 정의되는지 살핀다. “인민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각한 정치적인 통일체”(276쪽)다. 인용구는 자기 자신이 통일체로 묶인 단자임을 개체가 자각하는 순간, 공통감을 납득하는 순간을 함의한다. 자각되는 공통감이 무엇을 기준 삼는지 물어야 한다. 시에예스는 사회 차원에서의 공통성을 말한다. 모래알과 바윗돌의 풍화 과정을 바라보듯이(윤석중, 〈돌과 물〉, 1960)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하는 단순 법칙을 상상한다. 근소히 차이나는 구문 하나를 더 병렬한다. 개인이 모여 이루는 것이 사회다. 첫째 문장은 사회 형태를 미리 가정하지만 둘째 문장은 개인의 응집을 곧장 사회로 칭하면서 그 형태를 수행적으로 의미짓는다. 시에예스는 개인이 실현하고 있는 어떤 동작, “이루다”를 공통됨으로 묶으면서 첫째 문장에 정착한다. 그는 농업, 수공업, 유통업, 지식노동과 가사노동 등의 “사회를 유지시키는 활동”(E.J. 시에예스, 박인수 옮김,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2003, 19-20쪽)의 주체로서 제3신분을 거론한다. 유지시킬 사회는 이미 있다. 이 군집은 그에게서 일제히 가치를 생산하는, 사회경제학적인 대상으로 포착된다. 일단락하여 우리가 모여 있는 사회의 최초 형상을 그가 가리킨 프랑스 부르주아 시민으로 소급하려 한다. 시에예스가 공통성을 구성해내려 하는 이 집합에 관한 몇몇 의미들을 참고한다. 모여–사회를–이루듯이, 이들은 공적인 것으로부터 곧바로 서지 않고 공적인 것에 기반한 사적인 것, 다시 사적인 것들의 집합으로 공적인 것이라는 수순을 취한다. 계약으로 확보되는 몸의 제도적 소유와 노동 소유, 자기소유에서 자기통제로의 연속과 유사하다. 전개 중 공적인 것에 관련지어 슈미트는 종교를 지목한다. 초입의 신에서부터 사회로 권위가 흐르는 일처럼, 부르주아에 얽힌 신성이 언급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유화[민영화]”는 그 기초부터 종교와 함께 시작된다. 부르주아적 사회질서의 의미 안에서 최초의 개인 권리는 종교의 자유였으며······종교적인 것이 사적인 것일 때라면 그 사적인 것 역시도 거꾸로 종교적인 것으로서 신성화된다.······사적인 것으로서의 종교라는 명제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에르푸르트 강령 속에서 자주 인용될 때, 그것은 자유주의 속에서의 흥미로운 편차를 보여준다.”(칼 슈미트, 윤인로 옮김, 『로마 가톨릭교와 정치적 형식』, 두번째테제, 2024, 54쪽) 이로부터 꺼내온 사적 자유 개념은 부르주아의 사전적 의미에서도 반복된다. “‘부르주아’라는 말은 ‘봉건적 관할권으로부터 자유롭고 법적 면세권을 누리는 중세 도시bourgs 거주자’(『로베르 사전』)를 가리키기 위해 11세기에 프랑스에서 burgeis라는 말로 최초로 등장했다. 이어 이 용어의 법적 의미–그로부터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전형적으로 부르주아적 관념이 등장했다.”(프랑코 모레티, 조형준 옮김, 『부르주아』, 새물결, 2024, 40쪽)1 자유 개념이 사유화되며 사회로부터의 자유로 수용될 때, 모여 있음에 대해서 반동적으로 겨눠지는 관념이 된다. 시에예스의 국민주권을 토대로 한 혁명 사상이 촉발하는 지점이다. 제3계급인 부르주아를 보편적 층위의 국민으로 전환하기 위해,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하는 사실 논증은 기득권을 빼고 추린 개인들의 배타적 사회상태에 관한 정치적 선언이 된다. 부르주아가 유지하고 있던 이미 있는 사회는 사실 논증이 전제하는 의미값, 발화자가 미리 상정한 사회로 치환된다. 시에예스의 개입은 모여 있는 개인에 대해 자신이 사고하는 사회상태를 성취시키려 하는 홉스의 개입과도 같게끔 변모한다. 사회로부터의 자유를 얻어 다시 사회를 만드는 부르주아의 정치적 변혁성이 여기 있다. “이루다”는 유지기반 행위에서 당위로 지향되어, 진정한 사회를 이뤄야만 하는 노동 이미지를 겸한다. 부르주아의 노동 개념을 여기서 추출할 수 있다. 모레티는 부르주아 노동 행위의 특유함을 비춘다. 노예노동의 전제조건이 타자의 외압일 때, “부르주아는 (노동은 오직 외적 강제의 결과로서만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타자를 위해’ 노동해야 하지만(더 이상 주인이 없으므로)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노동할 수 있다. 자기를 위해 노동한다. 마치 자기가 타자인 듯이.”(위의 책, 72쪽) 유지기반의 노동 행위와 이를 연결할 때 오묘해진다. ①의 자기소유가 구성되는 경위 중 자기의 일부를 처분하고 국가를 형성하면서, 자기는 타자와 연루되며 또 국가화된다. “자기를 위해서만”이라는 자연법적 원리가 타자의 자기들과 꾸린 국가에 연동되는 순간 이래 “자기가 타자인 듯”하다. 부르주아 노동의 동기는 처분된 자기들의 혼합체까지를 향하여, 이 국가적 동기화가 자기와 자기의 계급을 초과하고 사회 차원의 공통성을 늘어뜨린다. 부르주아의 특유함으로 모레티가 짚는, 또 슈미트가 짚는 근면성실성이다. “(귀족제도의) 격동적 정념이 전사 같은 카스트에 의해 요구되는 것–전투가 벌어지는 짧은 ‘하루’의 백열–을 이상화해왔다면 부르주아적 이익은 평화롭고 반복 가능한 매일의 미덕이다.”(같은 책, 75쪽).

 

부르주아의 공통성은 어떻게 계급을 초과할 수 있나? 시에예스가 이 계급에 치중한 까닭은, 사회를 이루고 있는 모임의 스케일에 있다. “제3신분의 투표에 대항해 특권 신분들이 항상 만장일치로 결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러한 정도로는 그들이 의결에서 과반수를 점할 수 없”(『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120쪽)다고 쓰는바, 제3신분의 주요한 성격은 다수성이다.2 다수성은 부르주아가 다른 계급을 집어삼키는 포괄성을 포함한다. “대부르주아는 자기보다 하층인 계급과 공식적으로 분리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구조가 새로운 가입자에게 열려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제국의 시대, 한길사, 1998, 338쪽) 모레티는 이를 인용하면서 “삼투성(32쪽)”이라 명명한다. 삼투성이 현재의 인민상태까지를 흡수하는 장면을 찾는다. 자기가 타자인 듯이, 라는 원리는 거듭된다. 닫혀 있지 않으므로 당장 구성원들을 개별적인 자연인으로 취급하기엔 곤란하다. 시에예스가 인민을 소리로 뭉뚱그리는 일은 루소와의 비교로 확연해진다. 루소는 역사상 실재할 순간의 인원들을 셈하며 자연인이자 주권의 담지자인 인민을 기록한다. 루소의 인민들은 주권을 자연적으로 나눠 가진다. 반면 시에예스가 가치생산 행위를 기준으로 반죽한 부르주아는 산술되지 않는다. 주권이 이 귀속자들에게 분유되기까지는 일련의 단계가 필요하다. 이들은 아직 공동체를 이루는 자기를 자각하지 못했다.

 

시에예스는 “정치적인” 단계까지 도달하는 통일체가 “동일한 입법부에 의해 대표”(『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23쪽)된다고 쓴다. 루소의 인민은 주권을 분유하는 방식으로 상호 공통된 평등을 확인하지만, 노동에 기초한 시에예스의 인민은 그 공통성의 관계인 직무분업을 정치화한 대의제 형식을 필요로 한다. 그로부터 시에예스의 대표 개념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현실정치에서 기대하는, 대표가 나의 의견을 대의하며 반대자들에게 나를 투사하는 이차 관계는 부차적이다. “각 유권자는 다른 두 가지 이익을 의회로 가지고 갈 수 있다. 먼저 개인적 이익은 전혀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각자는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가지고 있다. 그 다양함이 그 실질적인 대책이다. 큰 문제가 나타나는 부분은, 한 시민이 다른 몇몇 사람들하고만 공유하는 이익이다. 이 이익은 서로 모의하고 서로 결탁하게 만들며, 이것에 의해 공동체에 위험한 계획안이 도출되며, 이것에 의해 가장 가공할 만한 공적인 적이 형성된다.”『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127쪽) 모의된 이익으로 규합한 일부는 시에예스에게 위험한 적이다. 규범들 사이 무관성의 관계를 불러온다. 모의된 이익은 규범을 발의하면서 진행되는 설득이기보다 자기들끼리의 관계로 전체성을 가로챈다. 대조적으로 시에예스에 미루어, 소집단의 이해관계 없이 모두가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 있다. 대표는 이들 중 어떤 개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무리에 관해 타자로서 출현한다. 루소와 달리 분유는 인민들끼리 몫을 나눠갖기가 아니다. 인민 무리가 대표자인 타자에게 의사권력을 나눈다. “자기가 타자인 듯이”의 노동 원리는 시에예스가 인민주권과 대표자를 동시에 세우는 이론적 거리에도 포개어진다.

 

여기서 소리를 듣는 청자가 나타난다. 소리에 관해, 시에예스와 슈미트를 비교하는 파스키노 역시 다음을 덧붙인다. “인민이 자기 스스로는 발언할 수 없기 때문에 해석을 필요로 한다.”(『반대물의 복합체』, 279쪽) 거슬러 올라 찾아낸 최초의 권력인 헌법을 제정하는 권력은 단순히 집단을 꾸리게끔 유인되었을 뿐 정작 자신의 청자, 나아가 이후 집행들의 대리자를 요청하고 있다. 그는 “국민의 의지는 이러한 의미에서는 어떠한 형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 의지가 발언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같은 쪽에서 재인용)는 시에예스의 문장을 끌어온다. 여기서 삼투성이 갖추는 형식을 긷는다. 일찍이 슈미트는 습속을 재생산하는 국가의 형식을 이른 바 있다. 그의 용례를 구체화하기 위해 형식이 내용을 잃는 상황에 대한 어구를 더한다. “정치적 통일이란 상태에서의 인민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결코 될 수 없는 국가가 그 내용을 상실”하는 경우로 “최대한의 대표”와 “인민의 최소한의 동질성” “잡다한 인간집단” 상태(286쪽)가 꼽힌다. 내용을 취해 완전한 형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인민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킨 국가다. 슈미트의 국민 개념을 생각한다. 슈미트는 국민을 삼위로 나누어 헌법제정권력자인 국민·지금의 법질서 내에서 찬반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국민·여론을 내보이는 국민을 이야기한다. 기속되기 전 제정권력자로서의 국민은 의사나 여론 없이 잡다하게 동질적이다. 이 시점은 비정치적이다. 그럼에도 “최대한의 대표”와 같이 대표될 수 있다면, 대표 개념은 인민이 정치적으로 통일되기 전에도 적용된다. 최대한의 대표란 무얼 대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형세의 대표, 곧 모두가 모두를 대표하는 국면이다. 자유로운 모두가 각자의 말을 하는 판국은 어떤 데이터의 집적으로 연상된다. 예를 들어 가능한 모든 정보를 누적시키면 최상의 결정을 뽑아낼 수 있다는 정치적 데이터베이스가 제안되곤 한다. 동일성 없이 개별 의사만 작동하는 집적체는 비권위적인 듯하다. 하나 여태껏 무리의 권위를 지적했듯, 타자이자 청자로서의 대표가 없는 노이즈 상태는 의사를 묵살한다. 루소는 해당 가닥을 직접민주정의 맹점으로 제기한다. “통치자와 주권자를 완전히 동일 인격으로 보는 까닭에 말하자면 정부 없는 정부를 만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그토록 완전한 정부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다.”(장 자크 루소,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18, 214-216쪽) 인민이 완벽하게 자기를 통치한다면 되레 통치 자체가 필요 없다. 체제의 부재에서 통치는 소실된다. 이제까지 시에예스가 관찰 대상으로서의 공통성만 포착해낸, 이질성의 모임에선 산재하는 권위가 제어되지 않는다. 이질성의 공통됨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추가되어야  한다. 파스키노가 인용할 슈미트의 헌법제정권력론인  “형식 중의 형식”으로서 “그 자체는 형식이 없”다는(『반대물의 복합체』, 286쪽에서 재인용) 문구를 불러온다. 상기하건대 슈미트에게 헌법제정권력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 국가형식의 상위 심급으로서의 비형식이다. 노모스의 질서를 내포할 인민에게서 잡다한 대표상태가 해결되어야 의사랄 것이 표명되며, 비로소 법률의 당위로 삼을 만하게 된다. “그들의 의사는 자연 질서 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사로부터 모든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그 의사가 하나의 의사라는 순수한 성격만을 지녀야 한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97쪽) 노모스가 광역의 질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내용의 주입, 헌법제정권력 이후의 국민 상태가 필요하다. 슈미트는 “전체 인민의 대리인”으로서의 “의원”이란 개개인의 유권자가 아니라 상상된 전체, 대립하는 것의 복합체로 추상화된 이념을 대표한다고 본다.(『로마 가톨릭의 정치형태』, 44-45쪽) 대표라는 형식, 청자를 마주하면서 인민의 무리가 만들어지며 피대표자라는 동일성이 자각된다. ①에서 기계회로의 국가엔진으로 그린 홉스를 분명 슈미트는 이어받는다. 그럼에도 기계적 절차에서 벗어나 유기체의 이질성·대표자의 인격을 삽입하는 까닭은, 대표가 타자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루소 역시 같은 논리를 인민의 시점에서 반복한다. 정부는 자신의 상대물을 일반 인민으로 취급하면서, 기존 인민 바깥의 이견들까지 타자화하여 인민의 범위를 확장한다. 일반의지는 데이터 산과 달리 불일치라는 관계 다발을 갖는다. “일반 의지는 공통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반면, 전체 의지는 사사로운 이익만 생각하는 특수 의지의 총화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 의지에서 서로 상쇄하는 과부족을 빼면 차이의 합계로써 일반 의지가 남게 된다.”(『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177쪽) 과잉분과 미달분을 제하는 숙의 작업은 정부 따위의 국가 형식을 동반한다. 일반의지 개념이 타자로서의 대표와 결부되는 지점은 루소를 재해석하는 인스턴의 이하 구절로 드러난다. “일반 의지의 동일성은······국가의 정당성이 인민의 수용 가능성에 의존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는 국가 조직화의 일반 원리로서의 일반 의지의 기능과 일반 의지를 정의하는 결정의 우발성 사이의 분열로서 출현하는 것이다.”(케빈 인스턴, 황재민 옮김, 「루소와 라클라우: 다소 특수한 보편적인 것, 철학과 문화』, 2024, 253쪽) 불복종·이의를 수용하는 기능과 일시의 결정을 내리는 시점 사이 충돌이 일반의지를 현시한다. 그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견에 대해, 당신의 반론까지 우리의 결론이었다는 응변을 떠올린다. 부르주아의 삼투성은 대표 과정이 작동시키는 대상적인 포괄성으로 전환되며 비로소 내용이 된다. 영역을 갈아 축소하는 처벌적 국가론과 상이하다. 적대의 소멸을 탈정치로 비판하는 슈미트와 같이, 불일치가 없는 집적체는 우리가 정당함을 떠맡기는 인민의 무리를 소실시킨다. 그러므로 루소는, 행정부를 계약으로 엮는 이론을 섬세히 하여 인민 입법의 양식으로 행정부를 세운다. 근거는 홉스와 유사하다. 계약은 상호 평등하게 일치된 약속이므로 책임을 지울 제3의 기관이 필요하다. 시민들은 이 계약을 맺기 위해 정부를 입법으로 사전 구성한다.(「루소와 라클라우: 다소 특수한 보편적인 것」, 260쪽) 인민은 인민 자신을 인민으로 만들기 위해 정부라는 타자를 만든다. “사회적 결합 행위는 공동체와 개개인 사이의 약속을 포함한다는 것. 또 개인마다 이른바 자기 자신과 계약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다시 말해 개개인에 대해서는 주권자의 구성원으로서, 주권자에 대해서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167쪽)

 

타자로서의 대표는 통념상 군주처럼 보인다. 파스키노는 이 곤경을 잘 알고 있다. “진화론적·역사적인 헌법개념에 반기를 드는 것”(『반대물의 복합체』, 277)이라며 시에예스의 행로를 일축하는바, 부르주아를 인민 일반으로 몰역사화해야 의사 없는 제정이라는 모순이 드러나지 않는다. 국가 이후의 유물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잘라낼 때 인파가 새면서 역사는 리셋된다. 파스키노는 유럽 헌법사를 거론하며, 군주가 헌법제정 주체인 국민의 동일성을 낳는 대표양식임을 이야기한다. 동일성과 대표양식은 분극일 수 없다. 시에예스의 정치 감각과도 공명한다. 그에게 인민은 삼부회 중 귀족정치의 대립항으로 존재하며 군주는 이항에서 예외화되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러한 관계를 조망한다. “이들 제3신분은 자신들의 편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귀족의 권리들을 침해하기 위해 바로 절대 군주제를 이용했죠.······프랑스의 역사 전체에서 군주제와 인민 반란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결이 있습니다······마지막에는 민중적 반란에 의해 주어진 권력밖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된 왕과,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모든 도구를 장악한 민중계급만이 마주본 채 남게 됐습니다.”(미셸 푸코, 김상운 옮김,『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난장, 2015, 180쪽)·“국민공회는 벌거벗겨진 군주제의 진실이며, 왕이 귀족에게서 빼앗은 주권은, 아주 당연하게도, 왕의 정당성 있는 후계자인 인민의 손아귀에 있다고 몽로지에는 말합니다.······인민은 왕의 후계자, 그것도 정당성 있는 후계자입니다.”(280-281쪽) 파스키노는 후계 과정을 헌법론과 헌정사로 양분한다. 동일성의 인민이 권력의 대리자를 위임하는 정태적 헌법론이 있다. 대표가 인민의 동일성을 창출하는 동태적 헌정사가 있다. 헌법론에서 “국민의 “‘헌법제정권력’의 개념은 그 본래의 의미에서는 영주 ‘군주’를 그 주체로 할 수는 없”지만, 헌정사에 있어 “군주는 ‘헌법제정권력’의 담당자 내지 주체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헌법제정권력의 지상에서의 유일한 주체로서의 국민을 결과적으로 낳는 권력 내지 권위”다.(『반대물의 복합체』, 293쪽) 인민이론이 대표라는 타자에 의해 부지되는 일에서 절대주의가 아른거린다면, 그것은 헌정사적 사실이다. 헌정사의 서사 줄기 위로 헌법론이 솟으며, 인민은 리셋된 인민주권을 기억한다. 대표는 인민들 중 하나와 다름없는 누군가가 된다.

 

반사 혹은 소리의 메타포는 헌법제정권력의 모호한 위치를 표시한다. 반사된 음파로 위치를 인식하는 박쥐를 닮아 헌법제정권력은 자신에 의해 직임하게 된 헌정체 네트워크들, 무수한 스피커들을 경유한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청자가 되돌려준 반응 또는 메아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재인한다. 인민은 인민이라는 자기 규정성을 얻기 위해 자신이 인민임을 납득할 설득의 대상을 구한다. 파스키노가 시에예스를 따라 대표를 “직무”의 노동분업으로 분석할 때, 대표의 노동을 보아 우리가 대표되고 있음이 반사적으로 방증된다. 분업은 나와 다를 바 없는 대표의 상을 그려낸다. 임기제 선거로 공직자가 교체되면서 타자였던 것이 다시 인민으로, 후임자는 다시 상대물로 내세워진다. 자기통치는 타자를 경유한다. 예컨대 일상 정치에서 유권자는 당선인을 꼭 동일시 원리로만 선택하지 않는다. 그가 나를 보는 듯하거나 나를 잘 반영해주리라는 믿음만을 투영하지 않으며, 그가 무언가 잘 해주리라 하는 적임의 판단이 있다. 통치자와 피치자가 완벽히 동일하지 않을 때, 대의제가 분화한 역할은 권력의 장소·공간이기보다 대표되는 시간의 문제다. 양자의 비동일성은 상연시간의 중단 시점이다. 차이로 분화하며 상연이 개시되고, 인민이 청중이 되는 시간에 우리가 인민주권을 재론하면서 생기는 난점이 있다. 헌정사는 헌법론을 재규정하는 단면들의 줄기로 이뤄진다. 헌법제정권력이 정치적인 통일의 장, 의사와 여론의 장에서 제기될 적마다 시에예스와 루소의 인민 개념이 화해된다. 루소는 일반의지가 회집되는 숙의를 투표로 예시한 바 있다. “투표자는 그 제안이 자신의 인격적 욕구와 일치하는지 여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국가에 유리한지 곧 공동선에 유리한지 물어야 한다.”(『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95쪽) 숙의는 개인의 반성 작업으로 시작된다. 투표가 반성에 사용될, 개인의 선택이 공동선과 일치하는지 불화하는지에 관한 진리값을 보여준다. 숙의 훈련이 시민총회로 실행될 것이라 본 루소와 달리, 유물화된 인간의 집단 경험은 국가적이다. 그 때문에 반성은 총회의 조직으로 순행하지 않고 역행한다. 헌법제정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린 맞닥뜨리는 차이들을 역으로 소거하여 평등한 인간 군체를 상상한다. “루소는 원시인의 모습에 도달하는데. 이는 원시인이 사회화를 거쳐 획득했을 어떠한 속성을 제거해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의 모습에 이르는 소거의 과정을 통해서이다.”(「루소와 라클라우: 다소 특수한 보편적인 것」, 230쪽) 천부적으로 평등한 인간의 자연사가 국가의 헌정사 중에 있어, 주권을 논하기 위해서 불평등이나 선악의 정도 차가 될 수 있을 인간학적 차이를 탕진시키게 된다. 계약 시점에서 우리가 주체적 작용인 가해를 처분했듯이 그러하다. 계약 이후의 사적 소유로 내용상의 차이를 벌리면서도, 투표 시마다 반복 양도될 양적으로 평등한 몫을 나눠가진 것이다. 군체를 상상하면서 현대 인민은 주권을 분유하는 행사를 거듭하고, 주권 조각은 다시 합쳐지며 집합을 보증한다. 국가의 재소환은 여기에 편승한다. 처분집합으로서의 국가는 나뉘고 합쳐지기를 반복한다. 담지자가 국민이면서도 국가를 요청하고 마는 주권의 순환모순을 끊어내기 위해 대표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도입에서는 사회 형상이 처벌적 국가론의 순환 대기처럼 빚어지는 느낌을 기술했다. 이제 보아 주권의 순환은 국가이론이 직면한 난점이 아니다. 더 매끄럽게 순환시키기 위한 방책이다. 대표 과정으로써 질서의 정당성이 인민 무리에 기탁됨은, 국가이론에서 논리적인 최솟값·기본값이기에 제자리운동으로 보일 뿐이다.

 

다시 국가를 1인칭에 놓는다. 국가가 상대하는 건 군집이다. 청자가 듣고 있는 소리가 내 소리 뿐 아니라 무리의 소리기에 나는 그것으로 대표되어 무리에 소속된다. 남들이 그러하니까 그러함이라는 어쩔 수 없음의 합의 양식을 지나, 청자가 그리 들었으므로 그러함이라는 믹싱 기법이다. 이때 청자는 믹싱된 개인을, 내가 당신을 대표하고 있다며 정당하게 설득해낼 수 없다. 개인은 청자 내지 타자로서의 대표자와 자신이 맺는 관계를 간단히 납득할 수 없다. 헌법제정권력은 소리의 발원지로, 개인이 들려주었을 발화에 위치값을 지정하며 책임을 귀속한다. 국가 자신의 궁극적 근거가 당신의 말로부터 나왔음을 서사화한다. 동일성과 대표가 이중절합하는 동세다. 이로써 국가에는 다음 효과가 가해진다. 대표가 인민 개인 혹은 인민 일부와의 합치, 부분에 대한 대표를 포기한다. 인민끼리의 동일성을 일차로 확보하며, 개인을 전체로 추상하여 전체의 타자로 등장한다. 대표는 인격적으로 자율화되며 피대표자에게 고용된 일꾼 모델에서 이탈할 수 있다. 국민에는 다음 효과가 가해진다. 법학의 틀에서 법적 실체가 없는 임의의 집단은 권리나 의무를 갖는 주체적 지위가 없어 면책된다. 만일 헌법제정권력이 실제 적용된다면 국민발안제에서처럼 입법권이 국민에게 직접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헌법제정권력의 국민주권론은 사법사회를 비워두고 입법처와 국민을 공법적으로 잇는다. 법률상의 공백, 여기엔 상연이 중단된 국가의 시간이 흐른다. 자기통치의 방점은 자기가 아니라 통치에 있다. 통치의 주체로서 인민이 먼저 있고 객체인 그 자신을 통치하기보다, 통치당할 객체로서 인민이 먼저 있고 그 주체를 자기로 다시 삼는 순서쌍이다.

 

국민주권은 사회를 부분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전체, 혹은 국가의 준거로서의 질서로 표상한다. 국가이론의 궤적은 해당 경향을 따른다. 국가이론이 이것을 사회라 부르든 자연으로 보든 두 개념을 망라하는 전체로서의 준거는 국가라는 타자로부터 가로놓아져 있다. 자연법 이론에 기반하는 계약이론은 자연적 순리를 모범으로 삼아 모방 제작된 정치체를 생각한다. 홉스에게서 외화된 정당화 기제이자 그것으로 원인이 되는 자연상태, 루소에게서 개연성이 되는 자연적 평등성, 슈미트에게서 정당성이 의지할 대지의 질서인 노모스 모두 일관적이다. 그러나 이 준거가 어떤 논리로든 연속적이라면, 자연상태가 사회상태에 이르러 소멸되지 않고 바깥에 있다면, 단절되지 않고 그 영향이 지속된다면, 혹은 최초의 인민상태가 오늘날 재상상된다면, 이 가닥은 연속됨에 더불어 역방향을 표시한다. 지금의 사회상태가 그 자신의 준거를 관리한다는 모순이다. 사회상태가 자연상태를 관리하는 방향이 하나 있다. 한편 여태까지의 논의에 의거하여 사회상태가 국가를 관리하는 방향이 있다. 첫 번째 방향은 잠시 남겨둔다. 두 번째 방향은 시민사회가 국가정치에 개입하는, 우리가 기대하는 순방향이다. 여기서 멈춘다. 시민사회의 국가에 대한 관리는, 준거가 사회이며 국가가 뒤따른다는 위 문장과 외려 대립한다. 위 문장은 역으로 국가가 시민사회를 관리하는 방향이다. 대립에 집중하며 사회라는 개념을 보전하는 국민주권론의 경향이 국가이론에 차용될 때 생기는 곤경을 말하려 한다.

 

제솝의 국가론은 단일한 행위자로서의 국가에 대한 반례다. 일러두기를 제솝 역시 부분/전체의 개념쌍을 유지한다. 그에게 국가란 “사회구성체에 구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부분”으로서 “제도적 앙상블이지 주체가 아니”(밥 제솝, 지주형 옮김, 『국가론』, 여문책, 2024, 176쪽)므로, “국가가 사회를 형성하고 사회세력들이 국가를 형성하는 규정과 재규정의 지속적인 순환”이 발생한다. 제솝에게서 흥미로운 건 “사회들은 국가체계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국가의 활동을 통해서 구성된”다고 보는 견해다. 그는 국가로부터 배출된 사회 영역에 국가가 개입함은 국가권력을 확장시킨다고 쓴다. 그러면서도 개입은 되레 국가 자신의 권한을 분산시켜 사회 영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인다는 것이다. 제솝은 이중적인 효과가 신자유주의의 수사에 협조한다고 묘사한다.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는 자신의 야심과 권한에 한계를 부과할 때만 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국가론』, 178쪽) 제솝의 전제인 사회의 국가에 의한 배출을 떼어낸 채 그의 분석을 사용할 때, 혹은 그의 분석이 사회를 국가의 준거로 표상하는 경향과 결합할 때 신자유주의의 수사는 강화된다. 나아가 국가가 생산하는 영역을 사회라고 명명하여 사회가 실재화될 때, 수사가 실재의 효과를 일으키며 국가는 자신이 생산한 영역을 방임한다.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려는 대처리즘의 수사인, ‘사회란 없다’를 향해 ‘사회가 있다’는 명제를 제시할 때, 두 명제가 출연한 선후관계에 의해 후발적 대안은 정작 방임된 영역을 증폭시키거나 국가를 축소시키며 대처리즘에 공모한다.

 

제솝은 국가와 사회의 분할선이라는 관념이 국가 차원에서 재생산됨을 명시한다. “국가–시민사회의 경계는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담론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바로 그 이동 가능한 경계를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세력들의 반대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국가–시민사회의 구획은 정치현장에 있는 다른 행위자들이 ‘국가’를 향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규정한다. 그들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행동하게 된다.”(『국가론』. 96-97쪽) 그가 “국가라는 물화된 개념”(97쪽) 혹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구획이 자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유념한다. 국가에 의해 주조되는 사회의 주체들은, 제 원인인 국가에 반응하고 국가를 향해 행동하곤 한다. 이는 네트워크로서의 국가가 일자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고, 제솝에 근거한다면 국가가 비국가적 영역으로서 사회로 이름지어질 공간을 제공하므로 사회를 제외한 다른 것이 국가로 인지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①의 언급과 같이 국가가 개인들의 잔여 집합이자 구속성으로 이론화되는 탓이다. 이러한 인지에는 하나의 도랑이 파인다. 타자로서의 대표가 전체화되는 문제다. 국가에 대한 개인의 행동학은 행동의 대상을 물화된 국가로 설정하든 개인으로 삼든 동일한 도상으로 중첩된다. 잔여인 타자와 나를 구분 짓는 주체, 혹은 나 아닌 것으로서의 잔여물인 국가를 사고하는 개인에게 잔여란 타자이자 국가다. 다수의 타자들은 국가와 등치된다. 이들은 나의 준거이자 한계개념으로서, 주권자·자기통치자인 나를 통제하려 한다. 이러한 실제상의 헌정사 와중 인식상의 헌법론이 누출되면, 나는 타인에 대한 통제욕과 국가에 대한 통제욕을 동시에 쥐게 된다. 서두에서 시민사회의 존재를 납득받게 될 개인이 국가라고 이야기했듯 그 두 이름만이 남는다. 소리를 들은 건 대표양식으로서의 청자에 더해 나이기도 하다. 이 문맥에서 국가의 감시자로 사회를 이론화하는 청중 민주주의의 소리는 왜곡된다. 사회는 없다. 인민을 광음, 제어 불가한 인파로 보며 헌정질서를 논하거나 자유로운 준거로 보며 주체성을 논한다면 헌정체와 인민사회의 순환 속에서 국가–개인이 반동한다. 이쯤하여 남겨둔 질문을 되가져온다. 국가가 관리하는 자연, 박물화된 자연사의 방향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오오타케 코지. 윤인로 옮김. 『정전과 내전』. 산지니. 2020.

헬무트 크바리치 외. 김효전 옮김. 『반대물의 복합체』. 산지니. 2014.

E.J. 시에예스. 박인수 옮김.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2003.

칼 슈미트. 윤인로 옮김. 『로마 가톨릭교와 정치적 형식』. 두번째테제. 2024

프랑코 모레티. 조형준 옮김. 『부르주아』. 새물결. 2024.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제국의 시대. 한길사. 1998.

장 자크 루소. 최석기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동서문화사. 2018.

미셸 푸코. 김상운 옮김.『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난장. 2015.

밥 제솝. 지주형 옮김. 『국가론』. 여문책. 2024.

케빈 인스턴. 황재민 옮김. 2024. 「루소와 라클라우: 다소 특수한 보편적인 것. 철학과 문화』, 27, 223-266.

 

 

각주

1: 해당 구절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이 용어의 법적 의미는 ……. 17세기가 끝날 즈음 일련의 익숙한 부정과 함께 “성직자계급에도 또 귀족계급에도 속하지 않으며, 제 손으로 노동하지 않으며, 독립적 수단을 소유한”(다시 한 번 『로베르 사전』이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경제적 의미와 결합된다.”(『부르주아』, 40쪽) 부르주아의 용례가 생산수단의 소유자로 좁혀질 때, 시에예스에게선 노동과 결부된 부르주아 주체성이 무산자로서의 노동자와 긴장관계를 맺는다. 소유로 벌어지는 부르주아 노동을 모레티는 교역으로 예시하며, 교역이 “‘한가하지 않음’, ‘해야 할 일’ 등의 총칭적 추상명사”(39쪽)로만 말해진다고 시사한다. 소유의 종결이 처분임을 염두한다. 끊임없는 교환교역은 몫을 개인끼리 분배하며 국민경제를 형성한다. 이들의 이익은 국민경제 내에서 개별의 이해관계로 내부화된다. 반면 소유가 없고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그 없음으로서 국가에 대한 하나의 외부자가 되며, 인터내셔널의 출처가 그 외부성에 있다. 이익을 공유하지 않으며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자들이 바깥에서부터 강렬하게 응집된다면, 부르주아는 국민경제 안에서 개별적이다. 노동가치에서 효용가치로의 전환은 이 계급적 차이와 연동된다. 이 글에서는 국민 개념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보다 국민주권 자체에 치중하므로 노동계급의 논점은 차치하려 한다. ④에서 가치 개념과 함께 다룰 것을 밝힌다.

 

2: 시에예스는 성직자, 귀족, 부르주아의 세 계급으로 구성된 1789년 삼부회에 관해 비평한다. “귀족은 성직자나 제3신분에 의해 대표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직자는 결코 귀족과 평민의 위임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 신분은 하나의 개별적 국민이며, 따라서 다른 신분의 문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117쪽) 세 국민의 단위 중 제3신분이 과반수 이상을 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