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북해에서의 해적질 (포스트-매체 조건 시대의 크로스길드)
수차미
KMDB에 올라온 송경원의 글 ‘업데이트된 향수와 극장의 영토’를 읽었다. 이 글은 존재하지 않고,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모습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요점은 오늘날 극장의 경험이 바로 그러하다는 점이다. 유튜브 등의 매체로 영상을 처음 접한 세대의 등장은 <백룸>과 <옵세션> 등의 영화로 확장됐다. 이와 더불어 물리 매체와 완전히 단절된 세대가 점점 더 극장의 경험에 빠져들면서, 자신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때를 그리워하게 된다. 옛것을 그리워한다는 점에서는 레트로에 대한 현상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들이 느끼고 싶은 건 “아무런 연결 없이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환경”이다. 송경원의 지적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백룸을 이처럼 연결에서 이탈해 끝없는 수직 낙하의 장소로 이해하는 일이다. 끝나지 않는 모험과 외부와 단절된 전파 신호 등은 우리가 백룸의 이상 현상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영화로서 <백룸>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아날로그 환경 위에서 성립하는 극장에 관해 말하는 셈이다.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건, 반대로 그것이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선호되는 듯한 감이 있다. 비가역적인 것은 달리 말해 ‘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니 무언가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에서 안정감이 있을 수 있다. 송경원의 글을 복기하자면, 백룸에서는 자신이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기에 그러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이 뒤바뀐다. 백룸의 특징은 공간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잃는다는 점인데, 공간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의존해야만 해서 이 안에서의 판단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 즉 백룸이 인기를 끄는 것에는 스스로 판단할 일 없이, 다른 것에 견주어 이해할 일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뿐이라는 점이 있다. 백룸의 공간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원래 알던 것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워, 기존 상식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만 한다. 판단의 근거인 현실과 멀어짐으로써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 현실과는 무관하게 줄곧 생성되는 이 경험이 바로 과거의 경험을 흉내 내며 존재하는 ‘영화’다.
이러한 흉내 경험은 대개 환상통처럼 느껴지지만, 도리어 디지털의 약진에서는 그러한 고향 없음이 창작의 조건(post-medium condition)처럼 느껴진다. 고향이 없다는 건 반대로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새 집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 관해서는, 포스트 팬데믹을 용어로 정립하던 시기 <사냥의 시간>과 같은 영화가 그와 같은 조건을 드러낸 바 있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현실을 자신의 현실 목표로 삼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사냥의 시간>은 극장의 경험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그러한 극장의 경험을 자신의 현실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래서 송경원은 지난 몇 년간 해왔던 극장의 종말에 대한 우려가 어쩌면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최악의 세대에 대한 비평론도 마찬가지다. <원피스>에서 등장하는 이 용어는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사이에 태어난 인물들을 가리킨다. 업계에서는 밀레니엄 시네필 정도의 인식인 이 단어는 ‘최악’이라는 설명에서 지난 역사를 모두 아우른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가 영화 역사상 최고의 격변기라는 배경적인 동의가 있는 셈이다.
이런저런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질 수 있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다만 확실히 말해둘 수 있는 점이 있다. 우리가 알던 존재들이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2022년에 있던 고다르의 죽음은 팬데믹이라는 데스밸리 너머로 우리를 데려왔다. 서부극의 깊은 계곡과 마찬가지로, 이 분기점은 베트남전을 비롯해 비행기의 빌딩 충돌에 이르면서 한 시대가 점점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됨을 예고했다. 물질적인 의미에서 디지털 영화로의 전환이 2010년대에 있었다면, 정신적인 의미에서 디지털 영화를 획득하는 것은 영화의 조건을 설계의 기반에서 획득하여 점용하는 ‘포스트 미디어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팬데믹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극장가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말은 이것이 실물 경제와 연동된다는 점에서 이미 예고된 축에 속했다. 그리고 이 격변기에서 스스로를 최악의 세대로 칭하는 일은 자신이 지난 것들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과거의 경험을 흉내 내면서 영화는 어떠한 시점으로부터 영속되어 온 게 아니라 여기 이곳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최악의 세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한 게 있다. 고다르의 죽음인 2022년 유행했던 GOAT 드립이다. GOAT는 본래 ‘모든 세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선수’를 뜻하는 야구 용어였다. 그러던 중 GOAT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 중 최고를 가리키는 일에도 동원되기 시작했다. 가령 본래의 GOAT가 역사적인 범주에서 대상을 물색한다면, 이 용례에서는 개인이 경험해 본 것 중의 최고 정도를 가리키는 게 됐다. 역사의 범주를 개인으로 좁히며 GOAT의 범주를 사유화한 셈이다. 이러한 관점은 GOAT가 말하는 시간의 범주를 한 개인이 인식하고, 가둘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 즉 이때의 시간은 물리적인 범주에서 이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몸의 경계와도 맞물린다. 과거에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시간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GOAT의 사유화는 이미 주어진 경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탐색을 새로 시작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는 그저 과거의 경험에 불과하고, 이를 흉내 내며 ‘역사’에 받아들여지고 싶은 환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어떠한 몸에 대한 환상이 있다. 물리적인 형태의 몸이 아니라,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에서 자아를 분리해내는 경계로서의 몸을 뜻한다. GOAT를 사유화하는 일은 큰 틀에서 보면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공통적인 주제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일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신이 아는 역사 안에서 최고를 꼽는 일은 반대로 한 개인을 하나의 역사로 바라볼 때도 성립한다. GOAT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과거는 사회 전반의 공통 경험으로 바라볼 수 없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시대정신이라거나 하는 말은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더 자주 인용되고, 추종된다. 역설적으로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아 밖으로 밀려나고, 이를 통해 다시 경계와의 거리를 설정한다. 한 시대에 소속되고 싶다는 말은 반대로 자신이 그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에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점은 우리가 흔히 세대론이라고 하는 구분에서 자신이 어떤 세대에 속해 있는지는 항상 외부에 의해 정립되고, 또 식민화된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최악의 세대가 살아가는 곳은 그리 나쁘기만 한 조건은 아니다. 영화를 더 편하게 볼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영화의 폭도 과거보다는 더 낫다. 도리어 변화의 시기에 선 이들에게는 그런 고민이 있다. 자신이 이 일을 사랑하게 했던 과거를 더는 만나볼 수 없다. 자신이 아는 현실은 지금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영향받아 탄생했으나, 교과서로만 보던 그 풍경들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계속 등장해 온다. 영화의 종말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영화에 대한 정의는 어디까지나 ‘경험해 본 적이 없고, 존재했던 적이 없는 과거’에 불과하다. 예컨대 이들에게 최악이라는 말은 더는 회복될 수 없는 이 시대 경험에 붙여진다. 최악의 세대는 정말로 영화의 수행 여건이 나빠진다는 점을 뜻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이를 되찾을 일도 없다”는 부존재를 가리킨다. 물론 원피스는 실존하는 물건이라고 원작자가 못 박아 두기는 했다. 그러나 작중의 몇몇 현역을 제외하면 루피와 같은 루키들은 이를 접한 적이 없고, 단지 소문으로만 그게 있다고 믿을 뿐이므로 실질에서는 부존재에 준한다.
이와 더불어 이들 세대가 원피스를 찾으려 하는 이유도 생각해 볼 만하다. 원피스가 정말로 있는지가 아니라 그러한 원피스를 얻는 과정에서 위대한 항로의 끝에 도달하는 일이 핵심이다. 이미 한 번 항로를 정복한 로저가 대해적으로 인정받았으니, 자신도 원피스를 찾아 이를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루피가 아닌 크로스길드 구성원 등, 다른 이들의 여건이나 상황 판단이 저마다 다르기는 해도 원피스 자체가 대항로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들은 대항해 시대가 골드 로저의 처형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알기에 원피스를 하나의 ‘영화’로 여기고 있다. 과거 경험을 흉내 내며 존재하는 이 대항로에서 해적들은 깨져 버린 세계 질서에 어떠한 회복 불가능성을 겹쳐 본다. 이들에게 원피스는 단순히 대해적이 되는 길인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등장해 온 길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묶어주는 고리다. 이들은 기존의 세계 질서로 얽혀 있던 항로가 어떤 시절이었는지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안다. 해군도, 해적도 아니라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매끄러운 현재만이 필요할 뿐이다.

*위에서 인용한, KMDB에 올라온 송경원의 글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kmdb.or.kr/story/1016/10071
업데이트된 향수와 극장의 영토
<백룸> 중 (사진: IMDb / © A24) 기억에 남는 불안이 있다. <1917>(샘 맨데스, 2019)에서 데번셔 연대의 무모한 돌진을 막아낸 스코필드가 블레이크의 형을 찾아 야전병원 막사에 당도했을 때, 나는 영
www.kmd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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