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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기고

이다의, 자기 자신의 도굴법 ④ 매립지 파기

by 인-무브 2026. 10. 9.

자기 자신의 도굴법

 

이다의

 

 

④ 매립지 파기

 

 

인민주권이 국가 바깥에 사회가 있노라 선언하고 마는 장면으로 연다. 전경은 줌 아웃된다. 정당성이 폭탄처럼 돌려진다. 사회를 세우는 최소 원리가 하늘이 만민에게 부여한 기본권이라면 그 신성을 따라 논리는 기화한다. 상승하던 논리는 헌법제정권력이 인민에게 주어지면서 회돈다. 순환 속에서, 선언은 국가에 개입할 수 있는 역량을 인민이 직접 확보하게끔 하는 조건이다.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의 제자리운동은 제 자신을 상술이나 첨언이 불필요한 사실 자체로 빚는다. 공중에 닿을 것 같던 상승선을 가로채어 원환을 그리는 작용, 미리 일렀던 국가이론의 관리 방향이다. 국민이 경험하는 터가 국가임에도 사회라는 사실이 기술되고 있다. 회전무대가 사회라고 증언하고 나면 그 밖은 인간의 규모를 초과한 자연으로 여겨진다. 인민이 신성한 기본권의 자연사를 익히고 있는 탓에 천부인권의 서사는 사실 그 자체를 지키는 외부성으로 장착된다. 사회가 있다는 선언이 ③의 부작용으로 이어진다면, 다시 곧은 선분으로 국가―사회―자연의 겹을 꿰찔러야 한다.

 

관찰된 사실을 당위처럼 논하는 일은 익히 지적받는다. 사례에 규범력을 덧붙여 생기는 논리적 오류를 “자연주의적 오류”(로레인 대스턴, 이지혜·홍성욱 옮김,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 김영사, 2022, 11쪽)로 부르기도 한다. 가령 특정 사례의 발생 빈도가 높을 뿐임에도 곧장 이치로 주장하는 편향이나 어떤 경향성이 자연에 반하므로 부당하다며 가하는 통제가 있다. 이런 입장에서 사회운동이란 순리를 거스르는 인위적인 조작이며, 단단한 자연의 원칙이 인간의 개입을 압도하면서 내장되어 있다. 기본권의 바탕이 되는 자연법 이론의 궤적은 은연중에 이쪽으로 끌려들어간다. 윤리학적 법론을 내밀기 위해 그것이 태고로부터 자연스럽기 때문에 윤리적이라고 논증하는 모양새, 공중으로 상승하는 논리가 자연주의적 오류를 보인다. 그 설득력이 부실하다고 짚기는 간명하다. 자연에는 선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구하므로 자연의 사례들을 원칙으로 추구할 이유가 없다. 보다 까다로운 건 그 역으로, 규범력이 사실로 나타나는 문제다. ②에서 논의한바 당위를 정보들로 가공하는 국가이론이 예시가 된다. 인간 집단을 대상으로 두고 국가이론과 자연 개념이 호응하는 시점에서, 자연법 이론에 대한 지적은 당위의 사실화 문제로 이뤄진다. 자연 개념이 실제 관찰된 사실과 무관히 임의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자연 개념에 미리 설정해놓고 이로부터 국가 이론을 전개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순환논리”(남기호, 『독일 고전철학의 자연법』, 길, 2020, 41쪽)라며 비판받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허구다, 라고 비판하는 건 간소한 일이다. 허구의 기능을 솎아야 겹싸인 사회 개념의 형편을 파악할 수 있다. 당위와 사실의 관계를 국가이론과 자연법이론의 접합으로부터 찾는다.

 

루소가 명시한 인민들의 상태는 자연상태로 소급한다. 인민상태와 자연상태를 연계하는 방편으로 사회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한다. 그가 관찰하기를 자연적 분산 상태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③에서는 이 평등성을 다음으로 묘사했다. 이질적인 이들을 유의미한 차이로 묶어낼 기준이 없는 포진 상태가 있다. 그를 지나 인간이 불평등해진 기원은 모임의 행위다. 인위적인 이동에 따른 변이로 사회계약의 개연성이 열린다. 우리에게 자연의 평등함을 되돌려주기 위해, 루소는 개연성을 타고 올라가 자연이 우리의 준거라는 집단기억을 지어냈다. 인민의 발상지에는 자연이 아른거린다. 그는 자연상태를 인간의 시계열에 보탠다. 예시한 우화에서도 비슷한 책략을 엿볼 수 있다. 인간 간 사회적 협력을 다루는 경제학의 게임이론이 루소로부터 발췌한, 사슴 사냥 게임은 한 목표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상정한다. 이 게임은 두 참가자가 상호협력해야만 사슴을 잡아 최대 이익을 취하리라 가정하고 있다. 다른 선택지로 상대방을 배신하고 혼자 토끼를 쫓을 수 있다. 사슴을 사냥하는 자연과의 연결부가 현실의 극대화된 성취로 맺히기 위해선 게임 상대자와의 차이를 발생시킬 안전한 사익을 포기해야 한다. 이 점을 설득하여 개인의 선택을 유인하는 건 끝내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도록 공동체 의식을 자각시키는 인공 장치다. 기억을 따라 자연과 사회의 구분망은 흐트러지고 아른거리는 상관성이 남는다.

 

반대로 홉스에게서 자연상태는 시계열로부터 떨어져나와 비연속적이다.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루소가 모방시킬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극복한 원상태로 국한된다. 홉스의 자연적 투쟁 상태란 모두가 서로를 가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평등한, 압도적인 차이가 없는 비협력적 군집이다. 여기서 비협력이라는 표현이 위 게임처럼 하나의 관계를 시사한다. 오늘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사회상태로의 연역을 위한 근거로 추론한다면, 이는 인간들을 관계 맺게 하는 우리의 관성을 내보인다. 루소가 지은 인민사회의 결과로부터 되감아 상상하는 자연이 홉스에게 희석되고 있다. 투쟁 상태는 분산이 아닌 모여 있는 인간에 대입된다. ③에서 그린, 인간 사이 사회적 차이를 소거한 군체는 두 이론가가 꼽은 특성을 겸한다. 인위적으로 돌려받은 자연적 평등성, 서로 반작용할 수 있는 반의 표현의 권한이 병존한다. 루소가 지목한 미래와 홉스가 충고한 과거가 결합한다. 그리고 국가가 와해되어 자연상태에 포위될지도 모른다는 계약이론 이래의 불안같이, 투쟁 상태 역시 미래의 우발성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두 계약론 속 자연 개념을 지금 읽을 때 만나는 자리는,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이 연속하고자 하는 혼탁한 시간이다. 계약을 타고 과거의 정체 모를 행위자들이 건너오고 있다. 그들의 신원과 오늘로의 이행이 ❶ 개인에서 우리인지 ❷ 우리에서 개인인지 하는 변형태를 캐려 한다. 먼저 계약론이 국가 설립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된다고 받아들일 때 계약은 개인을 집단으로 가다듬는 작업이다. 계약 시점은 개인들끼리의 약속이 가능한 마지막 순간으로, 서로 구속하여 우리가 되자 하는 최후의 약속이다. ❶의 해석은 자연법상 자기보존 원리에 따라 계약이 순행됨을 증명한다. 개인은 계약으로부터 이탈할 수 없다. 귀책을 질 수 있는 상태의 자유로운 주체들이 맺어 당사자가 되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논리로 자연법을 운용하는 해석이다. ❷에서 계약 시점이란 우리가 우리로서 약속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된다. ①에서 인용한바 맥퍼슨이 소유적 개인주의로 홉스를 표현했듯 소유를 통한 개체화로 집단을 분절하는 계약이다. ❷는 계약론 기반 국가이론의 빈약함에 대한 비판을 수용한 해석일 수 있다. 자연상태를 개체성으로 사고하는 ❶에 대해 헤겔은 “계약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자들의 “자의”에 의해 “한갓 공통적인 것”만을 한시적으로 형성할 뿐 국가 내 상이한 의지들의 주권적 동일성을 지속적으로 보증하지 못한다”(『독일 고전철학의 자연법』, 173쪽)고 지적한 바 있다. ❷의 해석은 소유된 개인들의 주권적 네트워크를 그어가면서 계약론을 지속시켜 지금의 국가이론 속에서 한 역할을 차지하게 한다. 두 해석으로 계약이론은 이의적이다. 양 갈래로 형태지어지는 계약 주체를 특정하자면, 남기호는 플라톤을 인용하며 “‘법률’을 ‘서로 부정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기로 합의를’ 본 ‘계약’이라 주장하는 익명의 사람들”(24쪽)이라고 쓰고 있다. 익명의 행위자들이란 정체성이 없어 개별 주체일 수 없고 또 완전한 집단도 아님에 인민사회를 형성하던 삼투적 부르주아 상태와도 같다. 행위자를 두 갈래로 주체화하고 있는 계약론의 이의성은 자연법의 구실을 정확히 기록한다. 자연법은 인간 “각자에게 본성적으로 귀속되는 것”(33쪽)에 관한 이론이다. 귀속으로 쓰이듯 진작에 각자가 소유한 것 혹은 이미 각자인 것과 다르다. 모두에게 마땅한 몫을 주는 분배법칙으로서의 정의가 자연적인 덕으로 수사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집의 구성원에게 자기를 주기 위한 법으로 쓰인다. 귀속되는 동세는 곧 자기원인을 짓는 형식, 인과의 자연법칙을 끊어내어 자기를 세우는 동작이다. 모두의 자기관계가 늘어서며 집단 체조와 같아 두 해석이 함께 유발된다. 자연 개념은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의 공통 성분으로 둘을 혼재시킨다. 소유에서 통치로 넘어가는 국민주권의 계열이 그 혼합물이다. 이런 모호함은 국가이론이 자신의 역사, 정보들을 만들면서 자연과 사회 따위의 상태들을 일시에 관리할 수 있기 때문에 생긴다. 그것이 허구적이므로 무상해지는 게 아니라 그 허구가 달성되었으므로 어수선해진다. 자연 개념은 더 이상 마땅한 목적으로 제시될 수 없는 납작한 사실이다. 당위와 사실은 ②에서 이어붙였듯 분리 관계야말로 무상하다. 외부 자연이 루소의 당위라면 그건 인민주권이라는 사실로 나타난다. 홉스의 사실이라면 그건 대립과 경쟁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적 당위로 나타난다. 사회라고 할 수 있을 변형태가 외부의 가치를 이미 완수했다면 사회와 자연 사이 겹은 무효하다. 자기통치라는 집단적 상상은 자연법을 매립하고 외부를 유실한다. 우리는 역사를 망각하는 일을 지탄하면서, 과거될 수 있는 미래를 거듭 취한다. 인민을 초과한 미래 대신 정보화된 전례만을 규범으로 편찬한다. 현 상태에 대해서 천부적인 신성으로 꾀할 수 있는 자연법의 비판적 기능이 그로부터 마비된다. 외부가 나를 구속한다는 감각은 진작 성곽 안으로 외부가 들어온 탓에 전해진다.

 

자유주의 경제학을 제시하는 하이에크는 외부를 지우는 방법으로 과거로의 루프에서 탈출한다. 그에게 질서는 행동의 반복에 의해 내생적으로 진화하는 습속이다. 자생적 질서 개념이 인위와 자연의 틈새를 비집는다. “정신은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정신은 그 환경 속에서 자라나긴 했지만 그것을 만들지는 않았던 만큼 이 제도들에 영향을 미쳐 그 제도들을 변경했던 것이다.”(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법, 입법 그리고 자유』, 민경국·서병훈·박종운 옮김, 자유기업원, 2018, 52쪽) 질서에 조작을 가할 수 있을 만한 정신은 질서와 공진화할 뿐 질서를 제조하지 않는다. “질서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 의한 의도적 배열인 것으로 해석되어왔기 때문에, 그 개념은 자유의 친구들 대부분에게는 인기가 없었으며, 주로 권위주의자들에 의해 애호되었다······질서 개념에 대한 이러한 권위주의적 의미 함축은 전적으로 질서가 체제 바깥에 있는 힘들에 의해서(혹은 ‘외생적으로’)만 창출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 시장 이론이 설명하고자 애쓰는 것처럼 내부로부터(혹은 ‘내생적으로’) 설정된 균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77쪽) 하이에크는 내생성으로 외부 자연의 투과력만 아니라 입법자의 단독적인 자의까지를 제거하려 한다. 대체재는 구성원 여럿으로부터 발원하는 노모스다. 노모스 역시 인위적이라 지적해볼 수 있다. 그에 대한 변론으로 하이에크는, 행위가 쌓이면 자의성은 상쇄되고 객관성을 얻기에 “행위의 반복적 수행의 결과 경험적으로 성장해온 제도는 오히려 자연에 포함”(이동희, 2016 : 276으로부터 재인용)됨을 적시한다. 인간 외부의 외생적인 자연법을 인간 습속으로 반복되는 노모스의 형식으로써 이해하고 있다. 과거에 둔 동질감에 기초한 입법권력과 초과분의 자연을 모두 벗기자 평탄한 플랫폼이 구상된다.

플랫폼에 표시될 정의란 자기를 생산하는 몫이 아니라 반복이다. 루만도 언급한 바 있다. “정의의 핵심이 결정의 일관성에 있다면 우리는 ‘정의란 곧 반복이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니클라스 루만, 윤재왕 옮김, 『사회의 법』, 새물결, 2014, 477쪽) 루만은 반복을 한정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정보는 체계에 대해 체계의 상태를 변경하는 차이(구별)를 만들어내는 차이(구별)”인 반면 “정보를 선택”하며 “정보처리를 조직화하는 유도 장치”가 반복이라고 쓴다. “반복은 체계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또 “‘가치’로서 기능”(474-475쪽)한다. 하이에크가 꺼리는 자의성이 인간이 설계하는 실험실에 고정된 현재라면, 반복 행위를 갱신하는 상태는 어찌 되었든 전개되는 현재[1]다. 현재를 관측하는 일까지로 렌즈를 넓힌다. 행위를 누적시키는 것으로 보아 행위자들은 이미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이에크의 규범은 집단 속에서 발견되는 타자와 같다. “미개사회에서 규칙의 성문화의 필요성은 새로운 규칙의 창설이 아니라 기존 규칙의 상호 확인에 있다. 이것은 무엇을 규칙으로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규칙인가를 명문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실정적인 사회규범의 기저층은 이와 같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법의 기저층은 구성되는 것은 아니고 복원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학자가 이미 존재하는 문법규칙을 발견하는 작업과 같다.”(『법, 입법 그리고 자유』, 77쪽) 그리고 발견 주체는 자신이 지켜보고 있는 집단에 포함된다. 행위할 자유 이전에, 자생 가능하다는 공약성을 지녀야 할 군집이 있다. 외부 규범이 목적성[2]으로 인간들을 수렴시키기 무색하게 일치가 앞서 주어져 있다. 일치에서 개별자로 갈라지는 수순이 하이에크의 진화다. 개체들이 각자의 경험을 통과하며 주관성이란 경험된 시간상의 차이다. 객관성은 그 시간이 있기 이전으로 거스르는 공동이다. 주관성을 쌓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될 타자들과 경합[3]하며 주체 없는 과정이 조감된다. 어찌할 수 없게 자의가 깎여서 발현되는 주체 없는 과정은, 그 과정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어찌함의 반복적 권리로 나아간다. 하이에크는 정당성에 관한 질문을 과거에 기탁하지 않는다. 주관성으로 관여하는 지금의 집단과 미래의 집단 간 동맹, 정당함은 다음에 올 현재 혹은 미래에 이임된다. 두 집단을 가로지르는 연속성은 양자가 동일한 외부 준거에 의지한다는 이유가 아니라 보존이 지속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로부터 조직된다. 연장된 사회감각이다. 미래가 있기 위한 조건으로 일관적인 국가나 집단이랄 것이 존속해야 한다. “노모스의 가치는 효용에 근거하며, 사회에 적합하게 기능하는가 그 사회를 유지존속시키는가로 판별된다.”(이동희, 2016 : 273) 계약이론으로 안정된 미래를 확약하고, 결정화 과정이 현실을 생산하다가 여기 다시 미래에 투사하게 된다.

 

하이에크의 운영체제가 결정이론 뒤에 놓임을 염두한다. 자기소유의 욕구가 자기통치로 옮아가면서 인위적인 개입주의가 만연해지고 자유지상주의가 소유로 재반동하는 연쇄가 있다. 생활세계에 적극 개입하며 국가가 되고자 한 인민의 사회국가를 막으려 한다면 애당초 개입 없이도 규칙을 안정화할 권위가 필요하다. 하이에크는 권위마저 점유할 인민사회가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자의성이 정작 자유를 훼손한다고 우려하며 우선 사회적 집단 자체를 자연 개념에 육박시킨다. 그를 지탱하는 게 인민을 앞질러 국가의 운동으로 상연되는 결정 만들기다. 인격을 덜어낸 슈미트의 반쪽짜리 유산이 하이에크에게 놓여 있다. 국가를 독립시키기 위해 경제를 탈정치화하려던 슈미트의 기획이 역이용되며, 경제는 자의적인 정치의 대안으로 출현한다.

 

행위의 집적체가 질서를 구현하듯, 결정화 과정의 규범들은 인간의 자의로부터 분리되었을 뿐 행위에는 정보로서 연쇄되어 있었다. 이 선택적인 결합이 곧 하이에크가 다루는 집단의 정체다. 분명 사회 바깥 자연을 구획하는 외곽선을 지웠다. 그러나 그는 개인을 사회 내적인 존재로 여기며, 개인이 제 외적 실재인 사회를 훤히 알 수 없다고 쓴다. 행위를 골라잡기 위해선 인간의 의도를 더 깊은 내부에 매립해야 한다. 누적된 행위만을 질서로 표상하기 위해 그가 끝내 부지하는 표층은 시장조직이다. 신호와 그 정보로 만드는 ②의 행위이론처럼 시장의 행위자들은 가격이라는 신호에 맞춰 행동을 수정하는 능동적인 가격 수용자다. 적응 행동을 쌓아 시장은 균형 잡힌 질서로 개진한다. 이때 신호가 공개되어야 한다. 자유지상주의를 지지하는 경제이론은 시장이야말로 공개성이라 논한다.[4] 전면에 드러나는 슈미트의 공개된 결정과 비교할 만하다. 결정의 국가이론 또한 목적을 두고 규범을 운용하는 처벌적 통제를 대체하며 예측 불가능함까지 삼키는 질서를 고안한다. 그러나 결단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인 박수 갈채, 사전 일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공개성과 다르다. 하이에크의 일치란 결단자가 아니라 행위자 사이 일치이므로, 신호에 따른 변동을 허용한다. 결정의 공개성이 경제이론으로 대입된다면 차라리 신고전학파의 가격 수용자 모델에 가깝다. “경쟁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메커니즘이자 초월적 힘으로서 어느 누구도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주체 없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가격이 행위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개인은 “가격 수용자”로 된다. 어떤 개인의 행동도 가격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히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만일 각각의 행위자가 가격을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면, 가격은 어떻게 형성될까? 누가 가격을 결정하는가? 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신고전학파 경제 이론이 제출한 대답이 바로 시장 서기이다.”(앙드레 오를레앙, 신영진·표한형·권기창 옮김, 『가치의 제국』, 울력, 2016, 86쪽) 가격은 서기에 의해 공표되며 수용자들이 순응하는 추상적인 힘이 있다. 결정이론에서 행위란 실현된 섭리 자체이고, 하이에크에게서 행위는 섭리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섭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 슈미트의 권위가 펴발라진 결정화 과정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길이 하이에크의 제안으로 보인다. 그건 우리가 국가를 일자로 추상하고 사회 개념을 존속시키면서 빠지는 구덩이다. 실상 하이에크가 정부와 국가라는 용어를 구분하는 순간에 사회 개념의 불순도가 비친다. “헤겔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지난 수백 년간 (대문자 ‘S’를 써가는 것을 선호하면서) ‘국가’라는 말을 쓰는 일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행동하거나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항상 정부라는 조직이다. ‘정부’라는 말로도 충분한 곳에서 ‘국가’라는 말을 끌고 다니는 것은 명확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가’가 조직이고 ‘사회’가 자생적 질서라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정부’ 대신 ‘국가’를 ‘사회’와 대비시킬 때면, 그것은 특히 엇나가게 된다.”(『법, 입법 그리고 자유』, 93쪽) 그는 국가 개념을 차치하고 임의적인 활동기구로 철저히 규정한 정부를 도려 표적 삼는다. 이때 국가와 사회의 겹에 다시 끼게 된다. 개입주의와의 알력처럼, 펴발라진 권위가 인민으로 스민 상황이 하이에크와 대치하고 있다. 역동적으로 출현했던 자기통치의 주권은 그와 논리 형식을 공유하는 자유주의 경제철학에 활력을 빼앗긴다. 하이에크를 따라 찾은 건 매립지가 통하는 경제로의 경로다.

 

활발하게 자생하는 질서를 하이에크는 “카탈락시”(위의 책, 406쪽)라고 칭한다. 카탈락시는 단일 목적 체계에 대비되는 상이한 가치체계의 장으로 의미지어진다. 집단을 활성화하는 게 특정한 외부의 배경이 아닌 플랫폼에서 교차하는 가치가 되어, 이제 경제학적 가치 개념으로부터 뻗어나갈 수 있다. 가치란 기본 논의선상에서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다. 가치이론의 정식적 어구인 〔가치는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이전에 가치는 무엇에 근거하여 부여되는가 하는 인식과 통약의 차원이 있다. 정식 쪽으로 휘말리면 다시 가치체계를 단일한 실체로 사고하며 외부 자연에 채우게 된다. 반복 개념으로부터 가치는 축적되는 것, 축적될 만한 것, 미래의 누군가가 쓸 만하므로 저장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외부 자연이 가치의 역사적인 일관성을 실어나를 용기로 착상되었던바 지금 자연화된 것들을 곧 가치로, 가치를 담지하는 틀이라는 빈 개념으로 다듬는다. 정확히는 순환논리로 비판받은 그 자연 개념의 허구성을 통해 가치를 개념화한다. 사회 혹은 국가로의 이행 따위의 상태 변화가 더 효용 있는 쪽으로의 진보라고 스스로 납득시키듯 가치란 반복할 만한 효용을 설득해야 하는 개념이다. 그로부터 우리가 후대에 무엇을 남겨 일관성을 유지할 것이냐 하는 이식 행위, 또는 무엇을 귀속시킬 것이냐 하는 자기소유의 집단적인 미래 침투로 가치가 전개된다. 줄곧 되풀이한 묘사처럼 가치는 나 이전에 통약된 것들로부터 온다. 칸트의 자연법론에서도 가치의 사전적인 공약성을 가늠할 수 있다. 자연상태 내 사법이 생성하는 임시적인 소유 상태는 시민적인 공법이 안정적으로 법제화하는 확정된 소유 상태에 의해 부정된다. “소유의 임시성은 소유의 확정성의 필요를 위해 부정되어야 할 것을 미리 도입해 놓은 개념 장치”(남기호, 68쪽)라는 구절 속, 해소되기 위해 도입된 임시 상태에 이미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세워져 있다. 가치 있다 여겨지며 소유하게 될 것은 시간을 건너 연속된다. 가령 구매는 미래지향적 행위로, 미래에도 구매 대상의 가치가 이어져 내가 여기서 효용성을 느끼게 되리라는 예상이다. 소유 개념을 불러온 데 이어 가치가 소유물로 분절되는 서사를 언급해본다. 유구한 난제인 가치가 가격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전형 문제는 제쳐둔다. 가격으로써 가치를 판단하고 대소관계를 비교하는 국면은 가치의 공약성이 다량으로 쪼개졌음을 뜻한다. 일반의지의 차기 단계는 시장가격으로의 전환이다. 일탈 행위와 그 통제를 사회적으로 지출하게 될 비용으로 환산하는 담론의 변화가 이를 따른다. 가격과 그를 표상하는 화폐는 가치판단 척도에 더해 가치를 저장하는 기능을 아우르고, 그로 인해 개인에겐 쪼개진 소유권의 유실분까지 상상하게 하는 기준이 주어진다. 저장이 가능해진 이래 가치는 기간상의 개념으로 비고정적인 유량으로서, 부가 산출되는 과정으로 의미지어진다. 가치과정이 종결되며 고정되는 것은 시점상의 개념인 저량으로서의 부다. 집단적 정치체 “코먼웰스”(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1』. 나남, 2008, 227쪽)가 공통의 부로 풀이된다면, 여기서부터 확정되는 개인이란 공통 부의 저장체로부터 가치를 역산해야 한다. 집단에 관해 개인이 느끼는 어찌할 수 없음이, 내가 가진 것을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박탈감으로 나타남은 이 경과에 근간한다. 입구의 공약성과 같이 시장체계는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정체된 듯하여 이론상의 기대에 미달한다.

 

가치이론의 사상사를 훑으며 마추카토는 그 출발을 “가치가 어디에서 어떻게 창조되는지 알아보려는 초창기 시도”(마리아나 마추카토, 안진환 옮김, 『가치의 모든 것』, 민음사, 2020, 68쪽)로 가리킨다. 초창기의 질문을 어디까지가 이곳의 가치인가로 수정해보려 한다. 중상주의는 가치의 원천을 금과 은의 축적으로 짚는다. 출처를 두 외적 실체에 설정하며, 물품을 수출함으로써 가치를 국가 내부로 들이는 일을 중시했다. 경제는 국가 간 체계를 의식하며 국가 바깥으로 보낸 가치보다 안으로 들인 가치가 많게끔 운영된다. “귀금속의 축적이 국가의 권력과 번영을 높이는 길이라는 주장을 ‘중상주의’라고 부른다. 이들은 금은의 유입을 촉진하고 유출을 막기 위해 보호주의적인 교역 정책을 펴서 무역 흑자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63쪽) 마추카토는 이 견해에 기반하여 부에 대한 사고가 국가 단위에 집약되었다고 본다. 국가의 소득을 집계하던 작업이 회계 장부인 국민계정(64쪽)으로 확장되고 심층에 가치 개념이 있다. 대외영역을 고려하던 중상주의에는 내부 불화가 발생하게 된다. 혁명 이전 프랑스 정부의 중상주의 정책은 “생계 필수품이 싼 가격으로 공급되도록 농업 산출물의 가격을 낮게 유지”(70쪽)한 탓에 농업을 피폐하게 했다. 중농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한다. 가치의 원천을 토지로 두는 농경 중심의 사상은 국가 내부로부터의 생산을 이론화한다. 마추카토는 그 대표자로 케네를 인용한다. “농업, 어업, 수렵, 광업은 자연이 생산한 것을 인간 사회로 가져오는 일이다. 케네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생산적인 계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경제의 다른 영역(인용자 주 : 제조업과 서비스 등)은 비생산적이라고 봤다.”(71-72쪽) ③의 부르주아 노동 개념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중농주의에서 자연과 노동 행위가 결부되는 장면을 그린다. 노동가치는 지금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대안서사, 노동에 대한 절하를 비판하며 가치평가의 정책화를 촉구하는 개입주의와도 공명한다. 케네는 가치 생산을 신진대사로 비유한다. 투입가치는 펌프에, 산출가치는 관에 대입하며 체계의 현상 유지 내지 자기보존을 도식화한다. 외부로부터의 투입량 혹은 내부로부터의 발생량을 유지하자는 목표가 필요해진다.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태어나야 한다는 노동 재생산의 이념이 산출된다.

 

초기의 두 사상에서 가치는 외부 자연에 실체화된 채 인간의 물리적인 경제·노동 행위에 의해 가공된다. 이 객관성으로 노동은 국가에 집약된다. 외부 자연을 장착하는 인민주권과 같이 자연을 투과시키는 내적 체계는 인적 자원으로서의 인민이다. 공약되는 노동 개념은 어찌할 수 있음의 조건이 되는 할 수 있음이다. 생산할 수 있게끔 하는 공약된 매립지의 규범과 생산 자체로서 최고차의 합법 행위가 되는 노동이 있다. “어떤 대상도 목적 자체이지 않으며 – 유용성의 왕국에서는 아무것도 목적 자체가 아니다 — 항상 그리고 단지 다른 어떤 것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이 세계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다. 도구이다. 그리고 도구의 세계에서는 할 것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 노동이 그것이다.”(프랑코 모레티, 조형준 옮김, 『부르주아』, 새물결, 2024, 80쪽) 노동의 원초적 수단인 신체를 영위하기 위해 다시 노동이 요구되는 임노동 체계에서 노동은 최상위의 유용성, 그 자체는 무언가를 소모하지 않는 행위다. 행위가 규범에 연쇄적으로 정보화되듯 노동이자 행위―상품이 정보화되는 가치체계가 있다. 네그리는 해당 맥락에서 노동 정보가 국가에 종속되는 사태를 논의한 바 있다. 노동은 사법세계에서 “외부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적 능력을 입증하는 사법적으로 유의미한 활동성”만을 의미하며, 이 의미는 “생산적 노동에 대한 일반적 찬양을 생산”(안토니오 네그리, 『디오니소스의 노동 1』, 이원영 옮김, 갈무리, 1996, 192-193쪽)한다. “민주주의의 개념과 평등주의의 개념을 이 추상적 노동 위에 기초”짓는 입헌주의적 과학(129-130쪽)의 작용이 벌어진다. 가치이론이 제기하는 질문의 수정본인 어디까지가 이 국가의 가치인가, 나아가 가치를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 하는 물음이 인민형태를 벼린다.

 

하이에크가 강조하는 주관성으로 돌아간다. 노동가치의 객관성은 효용가치의 주관성으로 교체된다. 효율성과 만족도를 포함한 효용이 생산 비용을 결정(『가치의 제국』, 120쪽)하게 될 시 저장·유지할 만한 가치는 타인이 효용을 느껴 구매하고 사용할 만한 것으로 변환된다. 효용가치 역시 집단을 전제한다. 특정 대상에 효용가치가 극대화되려면 대상의 수량이 한정된 물질적 조건, 그를 욕망하는 주체의 다수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주체의 예산이 제약되는 소유적 현상까지 덧붙어야 한다. 마추카토는 노동가치가 효용가치로 이행할 때 국부의 측정상 공백, 경제 단위가 가치 생산을 측량하기 모호해졌다고 논하지만(『가치의 모든 것』, 127-128쪽), 감각적인 단위로 떠올리는 국민주권 기반의 국민경제가 공백을 메운다. 발 밑의 시장에서 효용 있는 것은 이론가의 규정을 제치고 시장에서 책정되는 가격으로 표지된다. “생산 범위 외부에 들어가는 유일한 경우는 시장을 통하지 않고 소득을 올리는 경우뿐이다. 예를 들어 기업에 가는 보조금이나 시민들에게 가는 사회 보장 수당 등이 이에 해당한다.”(129쪽) 이 문맥에서 시장의 국민―소비자 주체는 범위에서 제외되는 정부 개입의 가치를 납득하기 곤란하다. 유인된 국민―소비자 주체가 합의한 주관적 가치는 끝내 구덩이 안의 객관성에서 파낸 것이다. 오를레앙은 “가치의 객관성에 의해 매개되는 타자에 대한 관계”(『가치의 제국』, 40-41쪽)를 거론하며 “가치는 모든 대상들의 분배에 관한 한 모든 행위자들의 합의라는 집단적 사실로 강제”(62쪽)된다고 적는다. 가치의 외적 객관성이 거느린 국가를 해소해도, 집단으로부터 통약적으로 가른 가치가 제기된다. 이 집단 형태를 사회라고 부르는 일에서 사회 개념은 경제로 이양된다.


 

【참고문헌】

로레인 대스턴, 이지혜·홍성욱 옮김.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 김영사, 2022.

남기호. 『독일 고전철학의 자연법』. 길, 2020.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법, 입법 그리고 자유』. 민경국·서병훈·박종운 옮김. 자유기업원, 2018.

니클라스 루만. 윤재왕 옮김. 『사회의 법』. 새물결, 2014.

앙드레 오를레앙. 신영진·표한형·권기창 옮김. 『가치의 제국』. 울력, 2016.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 1』. 나남, 2008.

마리아나 마추카토. 안진환 옮김. 『가치의 모든 것』. 민음사, 2020.

프랑코 모레티. 조형준 옮김. 『부르주아』. 새물결, 2024.

안토니오 네그리. 『디오니소스의 노동 1』. 이원영 옮김. 갈무리, 1996.

이동희. 2016. 「자연법과 노모스」. 법학논총, 40(3) : 261-284.

 

 

【각주】

1: 정지와 재생의 인격적 조치를 도입하는 슈미트와의 차이를 상기한다. 하이에크에게는 인격을 지워내어 부분적인 슈미트의 유산, 혹은 ②에서 되가져온 슈미트 이후의 국가에 관한 기술이 드러난다. 추후 슈미트의 카테콘 개념을 통해 이를 채워넣고자 한다.

 

2: 하이에크는 자연법을 외부에 정향된 목적성으로 독해하는 게 근대 합리주의의 오해라고 짚는다. “법의 원초적 형태가 금지조항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노모스는 특정한 목적달성을 위한 행위를 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인의 행위한계를 확정하는 것에 불과하다.”(이동희, 2016 : 271쪽) 그가 자연법을 읽는 방식은, 자연법이 우연성을 포괄하는 다음 맥락에 상통한다. “무언가 생겨나거나 일어나는 일은 전혀 우연의 사건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성이나 본질을 무시하고 벌어지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한편으로 우연히 발생하는 것들을 의미하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발생한 것들의 필연적 본성을 의미하기도 한다.”(『독일 고전철학의 자연법』, 25쪽)

 

3: 규범 혹은 타자를 외부에 처리하는 입장은, 하나의 개별자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외부 요소들에 대한 상대주의로 귀결된다. 하이에크는 한정된 앎을 가진 주체상을 전제하면서도 내생성으로 이를 극복한다. 상호의존적 적대 개념을 첨가하며 경합 모델을 떠올려볼 수 있다.

 

: 정치적 의사결정을 경제학으로 연구하는 공공선택이론에서는, 비공개적이며 밀실적인 담합에 따라 정부가 실패하는 경우가 주로 거론된다.